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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통령의 편지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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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1991년 공화당 출신 부시가 민주당 출신 클린턴에게 편지 남기고 퇴임하면서 후임자에게 편지 남기는 전통 생겨
⊙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 당신의 성공이 나라의 성공”(아버지 부시 → 빌 클린턴)
⊙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 지킨 법치, 분권, 평등한 보호, 시민적 자유 등의 민주적 제도와 정책의 수호자 역할”(오바마 → 트럼프)
‘아버지 부시’가 퇴임하면서 후임자인 빌 클린턴에게 남긴 편지. ‘대통령의 편지’의 시초이자 모범이 됐다.
  1993년 1월 20일, 백악관에 입성한 신임 대통령 빌 클린턴(제42대)은 집무실 책상에서 편지를 하나 발견했다. 전임자인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제41대)가 백악관을 떠나면서 남겨놓은 편지였다. 편지를 읽은 새 대통령은 전율에 휩싸였고, 새 퍼스트레이디는 울음을 터뜨렸다.
 
  〈친애하는 빌. 나는 지금 집무실에 들어오면서, 4년 전 느꼈던 것과 같은 경이와 존경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도 느끼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몇몇 전임 대통령이 묘사했던 외로움을 결코 느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매우 힘든 날을 겪게 될 것이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비판으로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조언자는 못 되지만, 그런 비판 때문에 용기를 잃거나 정도를 벗어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가족들도 이곳에서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성공이 바로 나라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굳건히 지지하겠습니다. 행운을 빌며-조지.〉
 
 
  부시와 클린턴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인생 역정도, 철학도 달랐다. 부시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나 계부의 가정폭력 밑에서 자라면서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고,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부시의 아들뻘인 클린턴은 전후(戰後) 베이비붐 세대로 베트남전 반전(反戰)시위에 참여했던 반항아였다. 부시는 평생 아내 바버라에게 충실했고, 클린턴은 바람둥이였다. 부시는 보수주의자였고, 클린턴은 리버럴이었다. 아내도 정반대였다. 부시의 아내 바버라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이었고, 클린턴의 아내 힐러리는 정치적 야심에 불타는 페미니스트였다.
 
  1992년 대선은 당초에는 부시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연방하원의원, 주(駐)유엔대사, 주중연락사무소장(주중대사), CIA국장, 부통령 등 화려한 공직을 거친 후, 로널드 레이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는 냉전(冷戰) 해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쿠웨이트를 침략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면서 인기 절정에 있었다. 빌 클린턴은 미국에서도 작고 가난한 주(州) 중 하나인 아칸소주의 법무장관과 주지사 경력이 전부였다. 당시 민주당 후보들은 ‘일곱 난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부시의 재선은 따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경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부시를 궁지로 몰았다. 부시는 “우리 집 강아지가 저 두 멍청이(빌 클린턴과 앨 고어)보다 국제 문제를 더 잘 알 것”이라며 반격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초 경쟁 상대조차 못 된다고 생각했던 아들 또래의 천방지축 리버럴 정치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재선에 실패했으니, 부시는 속이 꽤나 쓰렸을 것이다. 하지만 부시는 그런 아픔을 달래며 후임자의 성공을 비는 편지를 남기고 백악관을 떠난 것이다.
 
 
  “그는 당파보다는 애국심을 앞에 뒀다”
 
  사실 후임자에게 편지를 남기기 시작한 사람은 조지 H.W. 부시의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제40대)이었다. 레이건의 편지는 자신의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8년간 봉직했고, 자신의 정부를 물려받게 된, 같은 당 소속 대통령에 대한 기분 좋은 응원의 편지였다. 하지만 부시가 클린턴에게 남긴 편지는 자신과 정반대의 이력과 철학을 가진 반대당 소속 후임자에게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후 조지 H.W. 부시와 빌 클린턴은 정당과 세대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2004년 동남아 쓰나미, 2005년 허리케인 카타리나 피해 구제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함께 벌이기도 했다. 빌 클린턴은 조지 H.W. 부시의 아들이자, 논란이 많았던 2000년 대선에서 자신의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를 꺾고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아들 부시·제43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018년 12월 1일 조지 H.W. 부시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빌 클린턴은 자신이 받았던 조지 H.W. 부시의 편지 원본을 공개했다. 빌 클린턴은 “누구도 이 편지보다 더 그가 누구였는지를 잘 드러낼 수 없다”며 “그는 미국과 우리의 헌법, 제도, 공동미래를 믿었던 존경스럽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그는 또 “부시 전 대통령은 정치싸움에서 거칠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면서 “그는 정치보다 사람을, 당파보다는 애국심을 앞에 뒀다”고 높이 평가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
 
2009년 1월 7일 백악관에 모인 미국 역대 대통령들. 왼쪽부터 조지 H.W. 부시(41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44대),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43대), 빌 클린턴 전 대통령(42대), 지미 카터 전 대통령(39대). 사진=퍼블릭 도메인
  조지 H.W. 부시가 빌 클린턴에게 편지를 남기고 백악관을 떠난 후, 퇴임하는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덕담을 담은 편지를 남기는 것은 전통이 됐다. 이 편지는 바로 공개되지는 않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공개되어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곤 했다.
 
  2001년 1월 빌 클린턴은 8년 전 자신에게 편지를 남겼던 전임자의 아들 조지 W. 부시(공화당)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는 “당신은 자랑스럽고, 품위 있으며, 선량한 국민들을 이끌게 됐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입니다. 당신에게 성공과 행복이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당신이 어깨에 지고 있는 짐은 분명 무겁지만, 실제보다 과장돼 있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순수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면서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의 축복이 있길!”이라고 축복했다.
 
  조지 W. 부시도 2009년 1월 퇴임하면서 민주당 출신 신임 대통령 버락 오바마(제44대)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는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판이 계속되고 ‘친구들’은 실망을 시킬 것입니다”라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녹록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키면서도 “그러나 당신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와 당신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또 나를 포함해 당신을 성원하는 국가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끄는 국민들의 기질과 이해가 영감을 줄 것입니다”라고 격려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잠시 맡을 뿐”
 
  2017년 1월 퇴임한 버락 오바마도 공화당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제45대)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그는 “놀라운 선거 운동을 축하합니다. 수백만 명이 당신에게 희망을 걸었고, 우리 모두는 당을 불문하고 당신 임기 중 번영과 안보가 확장되길 바라야 합니다”라면서 “우리는 이 자리를 잠시 맡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 지킨 법치, 분권, 평등한 보호, 시민적 자유 등의 민주적 제도와 정책의 수호자 역할을 합니다. 일상의 정치가 흔들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우리 민주주의의 수단들이 최소한 더 약해지지는 않도록 지키는 게 우리의 몫입니다”고 당부했다. 마치 앞으로 시작될 트럼프의 폭주를 예견하고 견제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거기에는 품위가 있었다. 오바마는 “미셸과 나는 이 위대한 모험을 떠나는 당신과 멜라니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아름다운 편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선거 부정 논란과 의회 의사당 폭력 점거 사태라는 소란 속에서 2021년 백악관을 떠난 도널드 트럼프도 후임자인 조 바이든 현 대통령(제46대)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 정부, 우리 정부와 비교받게 될 것”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을 닷새 앞둔 5월 4일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는 백서(白書) 발간을 자축하는 오찬 자리에서 “다음 정부의 경우에는 우리 정부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거의 부정하다시피 하는 가운데 출범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정부의 성과, 실적, 지표와 비교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를 염두에 둔 소리였다. 문 전 대통령이 한 소리는, 대선 이후 감사원이나 공공기관에 기를 쓰고 자기 사람들을 박아 넣고, 새 정권의 사정(司正) 기능을 마비시키는 ‘검수완박법’까지 강행해서 국회를 통과시키고 공포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래, 윤석열이, 너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악담(惡談)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치열했던 선거전의 기억과, 자신 혹은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바랐던 같은 당 후보의 패배를 잊고, 정당을 초월해서 후임자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남기고 물러가는 미국의 퇴임 대통령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는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인물의 품격의 문제일까? 아니면 그 나라 정치문화, 아니 국민의 품격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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