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틴과 알렉산드르 두긴의 유라시아주의의 ‘제3제국론’ ‘위대한 러시아’ ‘反자유주의’는 히틀러와 흡사
⊙ 알렉산드르 두긴, 1997년 《地政學의 기초》에서 러시아의 覇權 회복 방안으로 ‘유라시아주의’ 제안
⊙ 문재인, 유라시아주의자 구밀료프 인용해 푸틴의 ‘新동방정책’ 찬양
⊙ 두긴의 ‘제4의 정치이론’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버무려 자유주의 공격하는 것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알렉산드르 두긴, 1997년 《地政學의 기초》에서 러시아의 覇權 회복 방안으로 ‘유라시아주의’ 제안
⊙ 문재인, 유라시아주의자 구밀료프 인용해 푸틴의 ‘新동방정책’ 찬양
⊙ 두긴의 ‘제4의 정치이론’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버무려 자유주의 공격하는 것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지난 4월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규탄 시위에는 푸틴과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등장했다. 사진=AP/뉴시스
어느 시대 어떤 문명이든 그 나름의 ‘이념적(理念的) 가치’를 갖지 않는 경우는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이념적 가치는 언제나 함께 간다. 하지만 ‘이념과 가치’는 인기는 없다. 인기를 끄는 건 ‘탈(脫)이념’이다. 현대로 접어들수록 그리고 선진부국(先進富國)일수록 더 그렇다. 풍요(豊饒)의 역습(逆襲)이다. 마치 배부름 뒤의 졸음과도 같은 이완(弛緩)이다.
한편 현대의 인문사회과학도 그렇다. 학문방법론상으로는 이념도 가치판단도 배제돼야 한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이 다루는 문제들은 이념적 가치와 무관한 게 본질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특히 정치학은 더욱이 그렇다. 국제정치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념과 가치의 문제는 분석대상은 물론 분석을 위한 이론의 틀에서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정치적 사태가 명백히 이념적 명분과 관련된 것일 때도 그런 식이면 곤란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분명 그런 경우다. ‘유라시아주의’라는 이념적 배경이 있다. 푸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유라시아주의를 언명해왔다. 공식적 최고 통치자의 언명이다.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념적 함의를 당연히 살피고 따져봐야 한다. 대표적 이데올로그로는 알렉산드르 두긴(Alexandr Dugin·1962~)이 있다.
두긴의 《地政學의 기초》
두긴의 대표적인 저작은 《지정학(地政學)의 기초: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1997)와 《제4의 정치이론》(2009)이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선 일차적으로는 《지정학의 기초》가 주목된다. 두긴은 이 책에서 러시아가 소련 붕괴 이후 국제무대에서 잃어버린 패권(覇權)을 되찾을 방안을 제시한다. 조지아 침공, 우크라이나 병합,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미국의 인종·종교적 분열을 부추기고 고립주의 성향을 촉진하는 것 등의 주장이다. 이미 그런 일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적나라한 예견적 주장이었다.
두긴의 이 같은 유라시아주의 구상은 소련 붕괴 이후 사상적 공백과 옐친 시대의 정치권력의 무능·부패에 진절머리를 내던 러시아 엘리트들을 사로잡았다. 러시아 군부(軍部)와 외교 인사들에게 열렬히 읽혔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군 총참모학교(General Staff Academy)’의 장교 교육 과정의 교과서로도 채택됐다. 유라시아주의가 러시아에 이념적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듯한 양상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런 가운데 감행됐다.
유라시아주의는 그 이전부터의 간단치 않은 뿌리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슬라브주의가 있고 볼셰비키 혁명에 반발해 망명한 일군(一群)의 지식인들이 있다. 그 같은 지식인들 가운데 하나가 레프 구밀료프(1912~1992년)다. 구밀료프를 대표적으로 살피는 것은 그 위상도 있지만 하필이면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그의 말을 인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구밀료프의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
구밀료프는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유라시아 국가로서만, 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018년 6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 의회 두마에서 구밀료프의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라고 러시아의 역사지리학자 레프 구밀료프는 말했습니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륙은 …희망을 키우는 공간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님의 ‘신(新)동방정책’은 평화와 공동번영의 꿈을 담은 유라시아 시대의 선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같은 연설은 서구(西歐)의 입장에선 도발적 언사다. 구밀료프의 대표 저작은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1970, 2009 영어판, 2016년 한국판)이다. 모티브는 12세기 전후 유럽이 이슬람과 치열한 쟁패에 돌입해 있던 시절 “아시아 한가운데 기독교 사제-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존재한다”는 소문, 이른바 ‘프레스터 요한(Prester John)의 전설’이다. 동방에서 이슬람을 물리치는 원군(援軍)이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프레스터 요한의 실체는 사실은 몽골이었다. 나중에 서구가 맞닥뜨린 몽골제국은 ‘상상했던 구원자’가 전혀 아니었다. 전례 없는 재앙을 야기한 침공 세력이었다.
구밀료프의 저작은 직접적인 정치적 저작은 아니다. 하지만 유라시아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 활용되면 문제가 된다. ‘프레스터 요한’이 결국에는 서구를 침공한 몽골이었다는 데서 유라시아주의 러시아가 서구를 제압하는 상황에 대한 이념적 암시가 읽힌다. 그런데 문재인은 구밀료프를 인용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찬양했다. 무지일까 고의일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 국제정치란 본래 국익(國益)의 충돌의 장(場)이며 국가들의 힘의 추구는 본질인 만큼 ‘섣부른 가치판단’을 배제한 ‘현실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정당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놓아버리면서 선택하는 ‘현실적’이라는 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제정치에 있어 국제(inter-national)란 개별 국가(nation)들의 존재가 전제될 때 형성되는 개념이다. ‘nation’ 없이 ‘international’은 없다. 실제로 근대적 국제관계 국제정치의 발생 자체가 그렇다. 유럽 세계는 물론 동아시아 세계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텐돔(Christendom·기독교 단일 세계)이나 중화주의(中華主義) 세계 모두 마찬가지다. 국제관계 국제정치라는 건 개별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쉬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국민국가들의 탄생부터가 전쟁이었다. 국민국가들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국가들 간의 충돌이 거듭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국제정치도 성장했다. 국제법이 등장하고 국제기구들이 자리 잡아 갔다. 물론 완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다. 지금 유엔은 비난받아 마땅할 만큼 허약한 꼴이다. 그러나 어떤 영역이든 이상적(理想的) 완벽함은 없다. 개별 국가든 국제정치든 다 마찬가지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몰가치적 격돌을 불가피한 현실로 체념하는 것은 국제정치는 물론 문명적 성취 자체의 포기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감상적 이상주의에서의 얘기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런 기로(岐路)에 직면했던 경우였다.
英·美가 히틀러와 맞서지 않았다면?
만약 가치판단을 버리고 현실적 힘만을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결코 그런 식으로 전개될 이유가 없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한 뒤 영국에 대해 먼저 추구한 것은 휴전이었다. 처칠은 히틀러의 그 같은 시도를 받아들여 전란(戰亂)이 확대되는 걸 막아야 했을까? 스탈린은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맺고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히틀러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끼리 전쟁이 벌어져 공멸(攻滅)해가기를 기대했다. 그 판단이 맞았나?
처칠은 히틀러와 대결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곧이어 미국도 참전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나치 독일이 동서(東西) 두 개의 전선에서 허덕이게 만들었다. 만약 영국과 미국이 나치 독일과 맞서지 않았다면 소련은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영국과 미국이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꿈꾸고 있는 소련을 나치 독일의 손으로 무너뜨려버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적 선택을 했다면 세계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아마도 인명피해가 적었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문명의 서구세계는 없을 것이다. 그때 소련이 사라졌다 해도 그 대신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나치즘의 세계가 군림하는 시대를 맞았을 것이다.
뜬금없는 공상(空想)이 아니다. 영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가 1992년 발표한 《당신들의 조국(Fatherland)》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의 작품이다. 대체역사소설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패망하지 않고 승리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가정(假定)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세계의 양상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 속의 나치 독일은 소련을 패퇴시켜 우랄산맥 너머로 쫓아내고 영국도 항복시킨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부터 동유럽 전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뿐 아니라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유럽 전역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정치적 지배를 하는 패권자가 돼 있다. 남은 것은 일본을 패배시킨 미국뿐이다. 유럽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고 미국은 아메리카에서 버티며 미국과 독일 간에 냉전(冷戰)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다.
히틀러와 푸틴
지금 푸틴의 행태는 어떤가? ‘히틀러의 부활’이라 하면 과한가? 그런데 푸틴의 행태와 그 이념적 배경인 유라시아주의는 나치즘의 판박이다. 푸틴이 2014년 크름(크림)반도를 점령하고 2022년 다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내세운 논리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갈 때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생존공간) 논리와 복사한 듯 닮았다. 둘 모두가 그 주민들이 자신들의 동족(同族)이라 주장했다.
히틀러가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밀어붙여도 당시 유럽 열강들은 충돌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히틀러와 타협했다.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30일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히틀러의 요구대로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넘기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로써 전체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 명의 인구를 잃게 됐다. 그럼에도 영국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런던 시민들 앞에서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를 지켜냈다고 연설했다.
체임벌린의 평화 운운이 헛소리였음이 증명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 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 병합했을 뿐 아니라 1939년 9월에는 폴란드까지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의 경우는 어떨 것인가?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냥 힘의 추구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위태롭기 짝이 없지만 그 차원이기만 하면 일단은 멈춤이 있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물리치든 아니면 불행히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패배해 점령되든 일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히틀러의 멈추지 않은 진격과 같은 이념적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제4의 정치이론’
《지정학의 기초》와 함께 짝을 이루는 두긴의 또 하나의 저서 《제4의 정치이론》은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긴은 20세기의 3대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파시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이론이라는 뜻에서 ‘제4의 정치이론’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버무리고 있으며 핵심적 공격대상은 자유주의다. 두긴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를 타락으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 근본적으로 서방기독교문명의 한계에서 비롯된 잘못된 길이었다고 주장한다. 지정학적 논리로 표현되는 유라시아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 근대문명의 이념적 가치에 대한 총체적 거부를 주창한다.
그러면서 두긴은 그 서구적 타락의 대안(代案)으로 동로마제국 동방정교회 문명을 상속한 러시아 문명을 내세운다. 러시아는 단순히 일개 국가가 아니라 국가세계(a state-world)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정교는 그 문명의 영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라시아주의는 지정학적 차원만이 아닌 서구의 한계와 타락을 넘어서는 ‘제4의 정치이론’이라는 구원적 정치이념으로 이어진다. 러시아 자신을 프레스터 요한이라는 ‘상상의 왕국’ 마냥 구원자처럼 설정하는 이념적 상상이다.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런 이념적 상상의 연장에 있다.
히틀러의 전쟁은 이념전쟁이었다
이것은 히틀러의 나치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1년 스탈린은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러 차례 침공 징후 보고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무시했다.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당분간은 독소불가침협정이 유효할 것임을 믿었다. 그런 만큼 히틀러가 소련을 쳐들어가지 않고 멈추었다면 기왕에 장악한 지배권을 굳혀가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이념적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동쪽으로의 팽창을 계속 주장했다. 히틀러는 이미 1925년 출간한 《나의 투쟁》에서 동쪽으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공간)을 확장해야 한다고 언명한 바 있었다. 이 구상은 나치가 내세우는 대(大)게르만제국이라는 제3제국의 이념적 기치였다. 더욱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대인과 ‘한 몸의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독일의 동쪽 레벤스라움과 맞닥뜨려 있으면서 공산주의인 소련은 결국에는 대결해야 하는 절대적 적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개시 전 군(軍) 장교들에게 소련과의 전쟁은 “인종과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이라고 연설했다. 그 말대로였다.
두긴과 히틀러
두긴은 자신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 2.0’이라 칭한다. 소련과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다 그냥 서구 변방의 일원으로 초라하게 주저앉게 된 고르바초프의 실패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두긴(과 푸틴)의 이념은 ‘나치즘 2.0’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러시아판으로 번안한 것으로 보아도 될 만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러시아, 위대한 대(大)유라시아’는 ‘위대한 게르만, 위대한 아리안’의 종족만 바뀐 번안이다. ‘제3제국론’도 그렇다. 나치 독일의 제3제국론은 1923년 독일의 극우(極右) 사상가 아르투르 묄러 판 덴 브루크(1876~1925년)가 저술한 《제3제국론》에서 차용한 것이다. 브루크는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제3의 제국’의 창설을 주창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가 ‘동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은 ‘차르 러시아제국’에 이어 ‘새로운 제3의 제국 유라시아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맥락만 바뀐 반복이다.
두긴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은 ‘제3의 로마’가 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동로마제국 상속은 갈망에 입각한 조작된 기억이다. 러시아의 직접적 뿌리인 모스크바 공국은 1283~1480년까지 200여 년간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인 킵차크칸국의 속국(屬國)이었다. 이른바 ‘타라르의 멍에’ 시대였다. 때문에 차르 러시아는 몽골적 유습이 매우 강했다. 17~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를 강력히 추진했던 것은 그 같은 상태를 후진성(後進性)으로 여기며 서구세계처럼 근대화를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였다.
두긴 등은 그 같은 서구화 추진을 잘못된 것으로 본다. 반면 유라시아주의 개념 안에 몽골의 활약상과 전통을 중시하는 내용은 중요하게 자리매김시킨다. 이렇게 되면 동로마의 상속인지 몽골의 상속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은 그 모든 것의 융합이라는 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제3의 로마 운운은 강변일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마는 서로마든 동로마든 몽골과의 짬뽕은 아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랬듯 작금 러시아의 유라시아 이념도 소설적 강변이다. 그런 만큼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판타지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그랬듯 결국 실패할 것이다. 우선 러시아는 당장의 우크라이나 전쟁 자체에도 실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스스로의 성장·발전도 실패할 것이다. 그 판타지적 이념의 한계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유라시아주의와 그 뿌리인 슬라브주의에는 서구적 근대화를 적대시할 뿐 그 경과가 가졌던 강점에 대한 통찰이 전혀 없다. 두긴이 슬라브주의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찬양하는 나로드니키는 러시아 농민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기조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 농민을 계몽시켜 공동체적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두긴은 그 논지를 얘기만 좀 더 보태어 반복한다. 두긴은 “만인(萬人)이 자유롭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만능(萬能)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영성(靈性)과 인격의 추구에 바탕한 공동체’를 대안으로 강조한다. 나로드니키가 몰두했던 러시아 봉건시대 농민공동체 전통의 ‘미르(평화 또는 세계)’ 공동체의 반복이다.
그런데 정치 구상뿐이다. 거기에는 근대문명 성취의 핵심적 동력인 과학과 산업의 자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는 종합적인 성장·발전의 힘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두긴 등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예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적대시하는 서구 근대문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뉴턴의 國葬
영국의 아이작 뉴턴(1643~1727년)의 경우는 그런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뉴턴의 이름은 과학도가 아니라도 웬만하면 알 만큼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뉴턴은 그 같은 업적을 남기고 1727년 3월 31일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며칠 뒤인 4월 4일 그의 장례식이 있었다.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당시 영국 런던에 와 있던 한 외국인이 그것을 지켜보고 인상기를 남겼다.
“세상을 떠난 왕립학회 회장은 4월 4일의 장례식에 앞서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며칠간 안치되었고, 그 장례에서 두 사람의 공작과 세 사람의 백작 그리고 대법관이 그의 관(棺)을 운구(運柩)했다. 그는 선정(善政)을 베푼 왕과 같이 신하들에 의해서 매장되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프랑스인 망명객 볼테르(1694~1778년)였다. 어느 귀족과의 시비 끝에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볼테르는 국장으로 치러진 뉴턴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인상기를 남겼다. 감명의 토로였다. 그럴 만했다.
뉴턴은 경(卿·Sir)이라 칭해졌지만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젠트리(gentry)보다도 아래인 요먼(Yeoman) 계층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출신의 인물이 놀라운 성취를 이룩했다.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라는 과학사에 획을 긋는 저술을 내놓았다. 1689년 국회의원으로 추대되고 1696년에는 왕립 조폐국(造幣局) 국장을 맡게 됐다. 170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회장이 됐다. 1705년 그간의 업적으로 기사(騎士·Knight) 작위(爵位)를 받았다. 과학자로서 나이트 작위를 받은 건 뉴턴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망했을 때는 나라 전체가 애도하며 왕족·귀족과 같은 예우로 웨스트민스터에 안장됐다.
볼테르의 고국 프랑스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영국 근대문명의 힘이었다. 볼테르의 그 경험은 프랑스 앙시앵레짐에 대한 그의 비판사상을 다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간극은 뉴턴의 국장이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
뉴턴이 회장을 지낸 영국 왕립학회는 명칭의 인상과는 달리 영국 왕실이 만든 조직은 아니었다. 시작은 1660년 11월 런던의 한 식당에 모인 10여 명의 과학자들에 의해 결성된 자발적 모임이었다. 특별한 자격 요건도 없었다. 일정한 액수의 회비를 내고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창립된 학회가 1662년 7월 국왕 찰스 2세의 칙허(勅許)를 받음으로써 ‘왕립(Royal)’이라는 칭호를 갖게 됐다.
1666년 프랑스에서도 왕립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됐다. 영국의 왕립학회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설립 주체는 왕실이었다. 회원들은 모두 직업적 과학자였고, 회원수도 제한돼 있었다. 소속 과학자들은 왕으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그래서 왕실과 아카데미 대표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영국 왕립학회는 달랐다. 호칭은 왕립이었지만 문턱이 없었다. 신분은 물론 학벌도 따지지 않았다. 요건은 딱 하나, 재능이었다.
발명특허 보유자인 대통령
미국에도 특이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제3대 대통령인 제퍼슨과 남북전쟁을 지휘한 16대 대통령 링컨에겐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개인적으로 발명특허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미국 특허청은 영국의 특허보호제도를 그대로 본받아 건국 14년 만인 1790년 설립되었다. 그 초대(初代) 청장을 당시 국무장관인 토머스 제퍼슨이 겸임했다. 링컨은 그 특허청을 강력한 연방기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링컨은 특허의 의의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위치한 미국 특허청 건물에 그 말이 새겨져 있다.
“The patent system added the fuel of interest to the fire of genius.(특허제도는 천재라는 불꽃에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 것이다.)”
최고 통치자급의 정치인이 이런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경우는 찾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게 미국의 힘이었다. 미국에서 발명왕 에디슨이 나오고 그 뒤로도 발명가들이 줄을 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힘이 미국의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옛 러시아에도 과학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과학자가 있다. ‘원소 주기율표’를 정립한 멘델레예프(1834~1907년)다. 멘델레예프의 업적은 슬라브주의나 유라시아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실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선 ‘그런저런 주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그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계속 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논리 속에는 그런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허세적 이데올로기의 한계
진짜 실력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인간은 과시성 허세(虛勢)가 없다. 열등감이 허세를 낳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콤플렉스가 허세의 이데올로기를 작화(作話)한다. 전체주의 체제는 특히 더 그렇다. 그 이념 자체가 본래 그런 식이다. 그런 이념은 대외정책화할 때면 거의 언제나 과시성 도발(挑發)의 양상을 보인다. 중공의 중국몽,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구상 모두 그렇다.
물론 그 같은 과시성 도발의 정책 추구는 결국 실패한다. 실질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 이념과 체제의 허위성에서 비롯되는 한계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된다. 전체주의 권력의 과시성 도발은 계속 반복된다. 그렇게 반복되면서도 제압되지 않는 도발은 폭주(暴走)로 이어지다 대란(大亂)으로 번질 수도 있다. 세계는 지금 그런 위험의 조짐이 이미 어른거리는 상태다. 과장된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세력균형 등에 미룰 문제가 아니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 차원의 문제다. 자유민주문명세계는 지금 그 결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자유민주문명 가치의 구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 힘으로 태어났고 지켜지고 성장해왔다. 지금의 국제적인 이념적 격돌은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적인 문제였다. 정권 교체로 고비는 넘었지만 도발적 저항이 만만치 않다. 압박은 ‘외부’에서도 엄습해 올 것이다. 당연히 그 모두에 강건하게 맞서야 한다.⊙
한편 현대의 인문사회과학도 그렇다. 학문방법론상으로는 이념도 가치판단도 배제돼야 한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이 다루는 문제들은 이념적 가치와 무관한 게 본질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특히 정치학은 더욱이 그렇다. 국제정치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념과 가치의 문제는 분석대상은 물론 분석을 위한 이론의 틀에서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정치적 사태가 명백히 이념적 명분과 관련된 것일 때도 그런 식이면 곤란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분명 그런 경우다. ‘유라시아주의’라는 이념적 배경이 있다. 푸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유라시아주의를 언명해왔다. 공식적 최고 통치자의 언명이다.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념적 함의를 당연히 살피고 따져봐야 한다. 대표적 이데올로그로는 알렉산드르 두긴(Alexandr Dugin·1962~)이 있다.
두긴의 《地政學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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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두긴. 사진=AP/뉴시스 |
두긴의 이 같은 유라시아주의 구상은 소련 붕괴 이후 사상적 공백과 옐친 시대의 정치권력의 무능·부패에 진절머리를 내던 러시아 엘리트들을 사로잡았다. 러시아 군부(軍部)와 외교 인사들에게 열렬히 읽혔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군 총참모학교(General Staff Academy)’의 장교 교육 과정의 교과서로도 채택됐다. 유라시아주의가 러시아에 이념적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듯한 양상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런 가운데 감행됐다.
유라시아주의는 그 이전부터의 간단치 않은 뿌리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슬라브주의가 있고 볼셰비키 혁명에 반발해 망명한 일군(一群)의 지식인들이 있다. 그 같은 지식인들 가운데 하나가 레프 구밀료프(1912~1992년)다. 구밀료프를 대표적으로 살피는 것은 그 위상도 있지만 하필이면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그의 말을 인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구밀료프의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
구밀료프는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유라시아 국가로서만, 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018년 6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 의회 두마에서 구밀료프의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라고 러시아의 역사지리학자 레프 구밀료프는 말했습니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륙은 …희망을 키우는 공간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님의 ‘신(新)동방정책’은 평화와 공동번영의 꿈을 담은 유라시아 시대의 선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같은 연설은 서구(西歐)의 입장에선 도발적 언사다. 구밀료프의 대표 저작은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1970, 2009 영어판, 2016년 한국판)이다. 모티브는 12세기 전후 유럽이 이슬람과 치열한 쟁패에 돌입해 있던 시절 “아시아 한가운데 기독교 사제-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존재한다”는 소문, 이른바 ‘프레스터 요한(Prester John)의 전설’이다. 동방에서 이슬람을 물리치는 원군(援軍)이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프레스터 요한의 실체는 사실은 몽골이었다. 나중에 서구가 맞닥뜨린 몽골제국은 ‘상상했던 구원자’가 전혀 아니었다. 전례 없는 재앙을 야기한 침공 세력이었다.
구밀료프의 저작은 직접적인 정치적 저작은 아니다. 하지만 유라시아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 활용되면 문제가 된다. ‘프레스터 요한’이 결국에는 서구를 침공한 몽골이었다는 데서 유라시아주의 러시아가 서구를 제압하는 상황에 대한 이념적 암시가 읽힌다. 그런데 문재인은 구밀료프를 인용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찬양했다. 무지일까 고의일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 국제정치란 본래 국익(國益)의 충돌의 장(場)이며 국가들의 힘의 추구는 본질인 만큼 ‘섣부른 가치판단’을 배제한 ‘현실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정당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놓아버리면서 선택하는 ‘현실적’이라는 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제정치에 있어 국제(inter-national)란 개별 국가(nation)들의 존재가 전제될 때 형성되는 개념이다. ‘nation’ 없이 ‘international’은 없다. 실제로 근대적 국제관계 국제정치의 발생 자체가 그렇다. 유럽 세계는 물론 동아시아 세계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텐돔(Christendom·기독교 단일 세계)이나 중화주의(中華主義) 세계 모두 마찬가지다. 국제관계 국제정치라는 건 개별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쉬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국민국가들의 탄생부터가 전쟁이었다. 국민국가들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국가들 간의 충돌이 거듭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국제정치도 성장했다. 국제법이 등장하고 국제기구들이 자리 잡아 갔다. 물론 완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다. 지금 유엔은 비난받아 마땅할 만큼 허약한 꼴이다. 그러나 어떤 영역이든 이상적(理想的) 완벽함은 없다. 개별 국가든 국제정치든 다 마찬가지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몰가치적 격돌을 불가피한 현실로 체념하는 것은 국제정치는 물론 문명적 성취 자체의 포기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감상적 이상주의에서의 얘기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런 기로(岐路)에 직면했던 경우였다.
英·美가 히틀러와 맞서지 않았다면?
만약 가치판단을 버리고 현실적 힘만을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결코 그런 식으로 전개될 이유가 없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한 뒤 영국에 대해 먼저 추구한 것은 휴전이었다. 처칠은 히틀러의 그 같은 시도를 받아들여 전란(戰亂)이 확대되는 걸 막아야 했을까? 스탈린은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맺고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히틀러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끼리 전쟁이 벌어져 공멸(攻滅)해가기를 기대했다. 그 판단이 맞았나?
처칠은 히틀러와 대결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곧이어 미국도 참전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나치 독일이 동서(東西) 두 개의 전선에서 허덕이게 만들었다. 만약 영국과 미국이 나치 독일과 맞서지 않았다면 소련은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영국과 미국이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꿈꾸고 있는 소련을 나치 독일의 손으로 무너뜨려버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적 선택을 했다면 세계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아마도 인명피해가 적었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문명의 서구세계는 없을 것이다. 그때 소련이 사라졌다 해도 그 대신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나치즘의 세계가 군림하는 시대를 맞았을 것이다.
뜬금없는 공상(空想)이 아니다. 영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가 1992년 발표한 《당신들의 조국(Fatherland)》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의 작품이다. 대체역사소설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패망하지 않고 승리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가정(假定)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세계의 양상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 속의 나치 독일은 소련을 패퇴시켜 우랄산맥 너머로 쫓아내고 영국도 항복시킨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부터 동유럽 전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뿐 아니라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유럽 전역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정치적 지배를 하는 패권자가 돼 있다. 남은 것은 일본을 패배시킨 미국뿐이다. 유럽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고 미국은 아메리카에서 버티며 미국과 독일 간에 냉전(冷戰)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다.
히틀러와 푸틴
지금 푸틴의 행태는 어떤가? ‘히틀러의 부활’이라 하면 과한가? 그런데 푸틴의 행태와 그 이념적 배경인 유라시아주의는 나치즘의 판박이다. 푸틴이 2014년 크름(크림)반도를 점령하고 2022년 다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내세운 논리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갈 때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생존공간) 논리와 복사한 듯 닮았다. 둘 모두가 그 주민들이 자신들의 동족(同族)이라 주장했다.
히틀러가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밀어붙여도 당시 유럽 열강들은 충돌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히틀러와 타협했다.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30일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히틀러의 요구대로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넘기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로써 전체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 명의 인구를 잃게 됐다. 그럼에도 영국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런던 시민들 앞에서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를 지켜냈다고 연설했다.
체임벌린의 평화 운운이 헛소리였음이 증명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 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 병합했을 뿐 아니라 1939년 9월에는 폴란드까지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의 경우는 어떨 것인가?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냥 힘의 추구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위태롭기 짝이 없지만 그 차원이기만 하면 일단은 멈춤이 있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물리치든 아니면 불행히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패배해 점령되든 일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히틀러의 멈추지 않은 진격과 같은 이념적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제4의 정치이론’
《지정학의 기초》와 함께 짝을 이루는 두긴의 또 하나의 저서 《제4의 정치이론》은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긴은 20세기의 3대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파시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이론이라는 뜻에서 ‘제4의 정치이론’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버무리고 있으며 핵심적 공격대상은 자유주의다. 두긴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를 타락으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 근본적으로 서방기독교문명의 한계에서 비롯된 잘못된 길이었다고 주장한다. 지정학적 논리로 표현되는 유라시아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 근대문명의 이념적 가치에 대한 총체적 거부를 주창한다.
그러면서 두긴은 그 서구적 타락의 대안(代案)으로 동로마제국 동방정교회 문명을 상속한 러시아 문명을 내세운다. 러시아는 단순히 일개 국가가 아니라 국가세계(a state-world)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정교는 그 문명의 영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라시아주의는 지정학적 차원만이 아닌 서구의 한계와 타락을 넘어서는 ‘제4의 정치이론’이라는 구원적 정치이념으로 이어진다. 러시아 자신을 프레스터 요한이라는 ‘상상의 왕국’ 마냥 구원자처럼 설정하는 이념적 상상이다.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런 이념적 상상의 연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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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
그러나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이념적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동쪽으로의 팽창을 계속 주장했다. 히틀러는 이미 1925년 출간한 《나의 투쟁》에서 동쪽으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공간)을 확장해야 한다고 언명한 바 있었다. 이 구상은 나치가 내세우는 대(大)게르만제국이라는 제3제국의 이념적 기치였다. 더욱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유대인과 ‘한 몸의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독일의 동쪽 레벤스라움과 맞닥뜨려 있으면서 공산주의인 소련은 결국에는 대결해야 하는 절대적 적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개시 전 군(軍) 장교들에게 소련과의 전쟁은 “인종과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이라고 연설했다. 그 말대로였다.
두긴과 히틀러
두긴은 자신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 2.0’이라 칭한다. 소련과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다 그냥 서구 변방의 일원으로 초라하게 주저앉게 된 고르바초프의 실패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두긴(과 푸틴)의 이념은 ‘나치즘 2.0’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러시아판으로 번안한 것으로 보아도 될 만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러시아, 위대한 대(大)유라시아’는 ‘위대한 게르만, 위대한 아리안’의 종족만 바뀐 번안이다. ‘제3제국론’도 그렇다. 나치 독일의 제3제국론은 1923년 독일의 극우(極右) 사상가 아르투르 묄러 판 덴 브루크(1876~1925년)가 저술한 《제3제국론》에서 차용한 것이다. 브루크는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제3의 제국’의 창설을 주창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가 ‘동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은 ‘차르 러시아제국’에 이어 ‘새로운 제3의 제국 유라시아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맥락만 바뀐 반복이다.
두긴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은 ‘제3의 로마’가 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동로마제국 상속은 갈망에 입각한 조작된 기억이다. 러시아의 직접적 뿌리인 모스크바 공국은 1283~1480년까지 200여 년간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인 킵차크칸국의 속국(屬國)이었다. 이른바 ‘타라르의 멍에’ 시대였다. 때문에 차르 러시아는 몽골적 유습이 매우 강했다. 17~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를 강력히 추진했던 것은 그 같은 상태를 후진성(後進性)으로 여기며 서구세계처럼 근대화를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였다.
두긴 등은 그 같은 서구화 추진을 잘못된 것으로 본다. 반면 유라시아주의 개념 안에 몽골의 활약상과 전통을 중시하는 내용은 중요하게 자리매김시킨다. 이렇게 되면 동로마의 상속인지 몽골의 상속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은 그 모든 것의 융합이라는 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제3의 로마 운운은 강변일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마는 서로마든 동로마든 몽골과의 짬뽕은 아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랬듯 작금 러시아의 유라시아 이념도 소설적 강변이다. 그런 만큼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판타지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그랬듯 결국 실패할 것이다. 우선 러시아는 당장의 우크라이나 전쟁 자체에도 실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스스로의 성장·발전도 실패할 것이다. 그 판타지적 이념의 한계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유라시아주의와 그 뿌리인 슬라브주의에는 서구적 근대화를 적대시할 뿐 그 경과가 가졌던 강점에 대한 통찰이 전혀 없다. 두긴이 슬라브주의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찬양하는 나로드니키는 러시아 농민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기조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 농민을 계몽시켜 공동체적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두긴은 그 논지를 얘기만 좀 더 보태어 반복한다. 두긴은 “만인(萬人)이 자유롭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만능(萬能)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영성(靈性)과 인격의 추구에 바탕한 공동체’를 대안으로 강조한다. 나로드니키가 몰두했던 러시아 봉건시대 농민공동체 전통의 ‘미르(평화 또는 세계)’ 공동체의 반복이다.
그런데 정치 구상뿐이다. 거기에는 근대문명 성취의 핵심적 동력인 과학과 산업의 자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는 종합적인 성장·발전의 힘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두긴 등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예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적대시하는 서구 근대문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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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
“세상을 떠난 왕립학회 회장은 4월 4일의 장례식에 앞서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며칠간 안치되었고, 그 장례에서 두 사람의 공작과 세 사람의 백작 그리고 대법관이 그의 관(棺)을 운구(運柩)했다. 그는 선정(善政)을 베푼 왕과 같이 신하들에 의해서 매장되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프랑스인 망명객 볼테르(1694~1778년)였다. 어느 귀족과의 시비 끝에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볼테르는 국장으로 치러진 뉴턴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인상기를 남겼다. 감명의 토로였다. 그럴 만했다.
뉴턴은 경(卿·Sir)이라 칭해졌지만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젠트리(gentry)보다도 아래인 요먼(Yeoman) 계층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출신의 인물이 놀라운 성취를 이룩했다.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라는 과학사에 획을 긋는 저술을 내놓았다. 1689년 국회의원으로 추대되고 1696년에는 왕립 조폐국(造幣局) 국장을 맡게 됐다. 170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회장이 됐다. 1705년 그간의 업적으로 기사(騎士·Knight) 작위(爵位)를 받았다. 과학자로서 나이트 작위를 받은 건 뉴턴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망했을 때는 나라 전체가 애도하며 왕족·귀족과 같은 예우로 웨스트민스터에 안장됐다.
볼테르의 고국 프랑스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영국 근대문명의 힘이었다. 볼테르의 그 경험은 프랑스 앙시앵레짐에 대한 그의 비판사상을 다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간극은 뉴턴의 국장이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
뉴턴이 회장을 지낸 영국 왕립학회는 명칭의 인상과는 달리 영국 왕실이 만든 조직은 아니었다. 시작은 1660년 11월 런던의 한 식당에 모인 10여 명의 과학자들에 의해 결성된 자발적 모임이었다. 특별한 자격 요건도 없었다. 일정한 액수의 회비를 내고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창립된 학회가 1662년 7월 국왕 찰스 2세의 칙허(勅許)를 받음으로써 ‘왕립(Royal)’이라는 칭호를 갖게 됐다.
1666년 프랑스에서도 왕립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됐다. 영국의 왕립학회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설립 주체는 왕실이었다. 회원들은 모두 직업적 과학자였고, 회원수도 제한돼 있었다. 소속 과학자들은 왕으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그래서 왕실과 아카데미 대표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영국 왕립학회는 달랐다. 호칭은 왕립이었지만 문턱이 없었다. 신분은 물론 학벌도 따지지 않았다. 요건은 딱 하나, 재능이었다.
발명특허 보유자인 대통령
미국에도 특이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제3대 대통령인 제퍼슨과 남북전쟁을 지휘한 16대 대통령 링컨에겐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개인적으로 발명특허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미국 특허청은 영국의 특허보호제도를 그대로 본받아 건국 14년 만인 1790년 설립되었다. 그 초대(初代) 청장을 당시 국무장관인 토머스 제퍼슨이 겸임했다. 링컨은 그 특허청을 강력한 연방기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링컨은 특허의 의의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위치한 미국 특허청 건물에 그 말이 새겨져 있다.
“The patent system added the fuel of interest to the fire of genius.(특허제도는 천재라는 불꽃에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 것이다.)”
최고 통치자급의 정치인이 이런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경우는 찾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게 미국의 힘이었다. 미국에서 발명왕 에디슨이 나오고 그 뒤로도 발명가들이 줄을 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힘이 미국의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옛 러시아에도 과학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과학자가 있다. ‘원소 주기율표’를 정립한 멘델레예프(1834~1907년)다. 멘델레예프의 업적은 슬라브주의나 유라시아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실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선 ‘그런저런 주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그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계속 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논리 속에는 그런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허세적 이데올로기의 한계
진짜 실력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인간은 과시성 허세(虛勢)가 없다. 열등감이 허세를 낳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콤플렉스가 허세의 이데올로기를 작화(作話)한다. 전체주의 체제는 특히 더 그렇다. 그 이념 자체가 본래 그런 식이다. 그런 이념은 대외정책화할 때면 거의 언제나 과시성 도발(挑發)의 양상을 보인다. 중공의 중국몽,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구상 모두 그렇다.
물론 그 같은 과시성 도발의 정책 추구는 결국 실패한다. 실질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 이념과 체제의 허위성에서 비롯되는 한계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된다. 전체주의 권력의 과시성 도발은 계속 반복된다. 그렇게 반복되면서도 제압되지 않는 도발은 폭주(暴走)로 이어지다 대란(大亂)으로 번질 수도 있다. 세계는 지금 그런 위험의 조짐이 이미 어른거리는 상태다. 과장된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세력균형 등에 미룰 문제가 아니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 차원의 문제다. 자유민주문명세계는 지금 그 결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자유민주문명 가치의 구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 힘으로 태어났고 지켜지고 성장해왔다. 지금의 국제적인 이념적 격돌은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적인 문제였다. 정권 교체로 고비는 넘었지만 도발적 저항이 만만치 않다. 압박은 ‘외부’에서도 엄습해 올 것이다. 당연히 그 모두에 강건하게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