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태의 근본 원인… 美의 아프간 철수가 촉발 원인”
⊙ “2014년 크름반도 합병 이후 민족 正體性 강화”
⊙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보다는 조금 가까운 정도… 러시아어 알아도 30~40%밖에 이해 못 해”
⊙ 러시아인은 집단주의·절대주의 성향, 우크라이나인은 개인주의·자유주의적(러시아 역사학자 코스토마로프)
⊙ “코자크, 군사 집단으로는 훌륭했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눈 부족”
⊙ “自國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조심해야”
⊙ “2014년 크름반도 합병 이후 민족 正體性 강화”
⊙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보다는 조금 가까운 정도… 러시아어 알아도 30~40%밖에 이해 못 해”
⊙ 러시아인은 집단주의·절대주의 성향, 우크라이나인은 개인주의·자유주의적(러시아 역사학자 코스토마로프)
⊙ “코자크, 군사 집단으로는 훌륭했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눈 부족”
⊙ “自國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조심해야”
- 사진=배진영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對)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우리(러시아)와 분리할 수 없는 역사, 문화, 정신의 일부이다.
- 독립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만든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였던 것을 분리시켰다.
- 우크라이나 당국은 공격적인 반(反)러시아주의, 네오나치즘에 사로잡혀 있다.
- 우크라이나는 단 한 번도 안정된 전통이나 국가성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완강하게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조롱받던 볼로지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수도 키이우(러시아어 키예프)에 남아 항전(抗戰)을 독려하고 있다. 해외로 이민을 갔던 예비군, 해외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귀국해 총을 들었다. 젊은 연인들은 날짜를 앞당겨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향토방위군(민병대)에 입대했다. 반역 혐의를 받고 폴란드에 체류 중이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도 귀국, 총을 잡았다. 《월간조선》 1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권위주의와의 전면전(全面戰)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했던 올렉시 혼차루크 전 총리도 총을 들었다. 그는 1월 말 조국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미국 스탠퍼드대를 떠나 귀국했다.
개전(開戰) 직후만 해도 금방 함락될 것 같았던 키이우가 건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소식이 이어지자 각국 국민들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당초 소극적이던 미국과 유럽연합(EU) 각국 정부도 국제금융결제망(SWIFT) 퇴출 등 고강도 대러시아 제재에 들어가는 한편,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에 착수했다.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21세기에 강대국이 무력(武力)으로 이웃 나라를 침공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두 차례나 ‘혁명’을 겪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던 나라가 일치단결해서 자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적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진짜 우크라이나 전문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바로 그날, 기자는 허승철(許勝澈·63)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를 만나고 있었다. 작년 말부터 급격히 악화되어 온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허승철 교수는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슬라브어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학교 러시아연구소(현 Davis Center for Russian Studies)에서 연구교수(Mellon Fellow)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러시아어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어까지도 구사하는 그는 고려대 러시아문화연구소장, 한국우크라이나학회장,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장 등을 거쳐 2006~2008년 주(駐)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냈다. 《우크라이나 현대사》 《우크라이나 문화와 지역학》 《벨라루스의 역사》 《조지아의 역사》 《코카서스 3국의 역사와 문화》 등의 저서와 《타라스 셰브첸코》 《코자크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체르노빌 히스토리》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크림반도 견문록(1, 2)》 등의 역서(譯書)가 있다. 《실용적인 러시아어-한국어 포켓사전》 《한국어-우크라이나어 사전》 등의 사전도 펴냈다. 우크라이나 관련 저술, 번역만 10권이 넘는다.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역서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Ukraine and Russia)》 《잃어버린 왕국(Lost Kingdom)》도 곧 나올 예정이다.
본인은 ‘준(準)전문가’라고 겸양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많이 등장한 요즘, 허승철 교수는 경력과 저작들에서 보듯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의 언어, 역사, 문화, 문학에 해박하고 우크라이나 대사 근무까지 한 ‘진짜 우크라이나 전문가’다.
인터뷰는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낮에 진행되었지만,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허승철 교수와의 논의를 거쳐 현재의 상황을 일부 반영했다.
“한국어-일본어보다 조금 가까운 정도”
― 한국인들은 우크라이나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인종적·언어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나라(민족)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어느 정도입니까.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는 모두 슬라브어족(語族) 동(東)슬라브어군에 속하는데, 차이가 큽니다.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어를 30~40%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저도 미국에 가서 처음 우크라이나어를 공부할 때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노문과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어 자료를 주면 읽지를 못해요. 현지를 방문한 국내 노문과 교수들도 우크라이나어 방송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두 언어는 별개의 언어로 봐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어는 서부 우크라이나가 과거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어서 서(西)슬라브어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차이를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에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일까요.
“아마 한국어와 일본어보다는 조금 가까운 정도일 겁니다. 물론 소련 시절을 겪었던 나이 든 세대 사이에서나 도시 지역에서는 러시아어가 널리 통용이 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거의 두 언어를 다 구사합니다.”
모스크바공국이 키이우공국의 변방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9세기 키이우공국(公國)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들이 그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나라(민족)는 어떤 계기로 역사의 진로가 달라진 것인가요.
“키이우공국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기보다는 여러 공국의 느슨한 연합체 성격이 강합니다. 우크라이나 학자들은 훗날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모스크바공국은 키이우공국의 변방(邊方) 공국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변방’이라는 의미라고 들었는데, 모스크바공국이 오히려 키이우공국의 변방이었다니 재미있네요.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소(小)러시아라고 하면서,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19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미 13세기에 우크라이나라는 말이 쓰였다고 주장하죠.
주우크라이나 일본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黑川祐次)가 쓴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보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모스크바공국을 포함한 당시 키예프루스공국의 동쪽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핀란드의 주류 민족-기자 주)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 핀족의 활동범위가 그렇게 넓었다니 놀랍습니다.
“강(江)이 발달되어 있으면 아무리 내륙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차이
―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어떻게 다릅니까.
“같은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정교회 신앙 등 공통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1861년에 〈두 루스(Rus’) 민족〉이라는 논문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민족성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첫째, 우크라이나인은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고, 러시아인은 집단주의를 중요시한다.
둘째, 우크라이나인은 최소한의 통제 질서를 가진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반면, 러시아인은 한 사상으로 통합된 확고한 집단적 체제를 선호한다.
셋째, 우크라이나인은 연방제를 선호하는 반면, 러시아인은 절대주의나 왕정(王政)을 선호한다.
코스토마로프는 ‘러시아적 요소는 거대하고 창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전체주의적 정신, 통일적 의식, 실용적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는다. 러시아인들은 모든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행동에 나서기에 가장 좋은 시간과 환경을 선택한다’면서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러한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신은 사회적 제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끌거나, 모든 방향으로 민족적 노력을 분산시키는 소용돌이 같은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했어요.”
―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혼란 끝에 푸틴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복귀한 러시아와 두 차례 시민혁명을 겪었던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에서 재선(再選)에 성공한 유일한 대통령은 1991년 독립 이후 1994~2004년 재임했던 레오니드 쿠치마뿐인데, 그도 정권을 연장하려고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자,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후계자로 내세워 부정선거를 했다가 오렌지혁명을 맞았지요.”
키이우公國
9세기 이후 키이우공국은 이고르 공, 올가 여공(女公), 스뱌토슬라프 공, 볼로디미르(러시아어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현공(賢公) 시대를 거치면서 13세기까지 번성했다. 우크라이나의 국장(國章)인 삼지창(三枝槍·Tryzyb), 화폐 단위인 흐리우냐는 키이우공국의 유산(遺産)이다. 988년에는 볼로디미르 대공이 비잔틴제국으로부터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리스정교는 폴란드를 제외한 슬라브 공통의 유산이 되었다.
― 누가 키이우공국의 계승자인지를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다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키이우공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개 지방에 불과했다가 1991년에 독립한 신생국가인지, 아니면 1000여 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가 결정되니까요.
모스크바 크렘린궁 옆에는 2014년 크름(러시아어 크림)반도 합병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의 거대한 동상이 만들어졌어요. 그 의미는 중의적(重意的)인데, 키이우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는 푸틴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푸틴 대통령의 이름이 블라디미르거든요.”
키이우공국은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동서(東西)교통로의 중심에 있던 우크라이나 지역은 킵차크칸국[汗國]의 지배를 받았다. 반면에 키이우공국의 변방이었던 모스크바공국은 여러 키이우공국에서 모은 조공(朝貢)을 몽골에 바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공국은 1480년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동슬라브 여러 민족의 종가(宗家)가 되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 역사를 가른 분기점(分岐點)이 몽골의 침략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근무하던 시절 키이우의 한국 대사관저가 있던 동네는 타타르스키라이온이라고 불렸는데 타타르구(區)라는 뜻입니다. 옛날 몽골군 병영이 있던 지역이라 이런 지명이 나온 것입니다. 대통령궁은 옛날 칸(몽골계 민족의 지배자)의 관저가 있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하면서 자국(自國)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와 다른 후진적(後進的) 경로를 밟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죠.
“조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10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전제정(專制政)이 되었고 후진국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보다는 두 나라의 지리적 환경의 차이가 지배체제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로버트 카플란이 쓴 《지리의 복수》라는 책을 보면, ‘러시아의 전제정은 춥고 혹독한 기후 때문에 강력한 감독 밑에서 집단적 노동을 필요로 했고, 그 때문에 농노(農奴)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반면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비옥한 흑토(黑土)지대에 자리 잡은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런 정치체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었고 자유로운 기질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허 교수는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키이우루스(키이우공국)가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와 흑해 일대는 물론 지중해까지 세력을 뻗치는 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부드럽지만 한번 폭발하면 무서울 정도”
― 직접 관찰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국민성은 어떻습니까.
“러시아인들은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절대 권력자 앞에서는 약합니다. 스탈린의 학정(虐政) 밑에서도 암살 시도나 봉기 한 번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보다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타국(他國)이 좀 건드리거나 찔러대도 그냥 참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유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모스크바공항은 참 시끌시끌한데, 우크라이나행(行) 비행기 탑승구 앞에 가면 아주 조용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우크라이나로 가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이지요. 표정만 봐도 러시아인인지 우크라이나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한번 폭발하면 무서울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부정선거나 독재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2004년의 오렌지혁명, 2013년의 유로마이단혁명이 그 예입니다.”
허승철 교수의 이 말은 푸틴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이 결사항전(決死抗戰)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 독립하고 불과 30년 만에 두 차례 시민혁명(오렌지혁명·유로마이단혁명)이 있었다는 것은 정치가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부정선거와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문화는 굉장한 ‘사회적 자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워라’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구(舊)소련 국가 중 우크라이나는 아주 특이한 존재입니다.”
자유로운 戰士 집단 코자크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코자크다. 변방으로 도망친 농노(農奴)의 후예로 알려진 전사(戰士) 집단인 코자크는 1492년 크림칸국(크림반도에 있었던 몽골족의 나라)의 서간에 처음 등장한다. 1530년경에는 드니프로 강변에 코자크의 중심지인 자포로지아(자포로제) 시치(요새)가 건설된다. 코자크는 헤트만이라고 하는 군(軍)지휘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헤트만은 장교회의(Starshina)나 전체회의(Rada)에서 선출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국회를 라다라고 칭하는 것은 코자크의 전체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정치적 통일체를 만들지는 못하고, 이웃 강국인 러시아, 폴란드, 오스만튀르크 같은 외세(外勢) 사이에서 때로는 이 나라, 때로는 저 나라와 손잡으면서 살았다. 이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 19세기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타라스 불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장 부리바》로 더 유명한 이 소설은 1962년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헤트만은 우리나라 고대(古代)의 부족장(部族長)과 비슷한 건가요.
“아닙니다. 부족장은 세습이 가능했지만, 헤트만은 라다에서 선출되었습니다. 헤트만에 따라 다르지만, 선출되었기 때문에 능력만 있다면 세습 부족장보다 훨씬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코자크 전통은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적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 건설의 길을 걸은 러시아와 정치적 차별성을 이루는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코자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헤트만)을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 권리가 코자크 자유의 기초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후 대통령의 재임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독재에 항거한 것도 코자크 정치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 대제국을 건설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그러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앞에서 말한 지리적 이유, 거기서 비롯된 기질적 차이도 있지만, 지도자 운(運)도 작용한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大帝), 예카테리나 여제(女帝) 등 강력하고 뛰어난 군주들이 잇달아 출현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페레야슬라프조약
코자크에도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그단 흐멜니츠키(1595~1657년)가 그 사람이다. 흐멜니츠키는 1649년 8월 폴란드와 즈보리프조약을 체결, 키이우 등 3개 주(州)와 자포로지아를 통치하는 사실상의 코자크 자치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 1651년 폴란드와의 평화가 깨지고 다시 전쟁이 일어나 흐멜니츠키는 같은 슬라브족이자 정교회 국가인 모스크바공국에 동맹을 요청한다. 그래서 맺어진 것은 1653년의 페레야슬라프조약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 페레야슬라프조약을 보는 눈은 극(極)과 극이다. 러시아는 이 동맹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귀속되고, 과거 키이우공국의 영토가 러시아의 주도하에 재통일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이 조약이 코자크가 폴란드, 오스만튀르크, 크림타타르, 러시아 등과 수시로 맺었다가 뒤집곤 했던 수많은 군사동맹조약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953년 당시 소련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페레야슬라프조약 체결 300주년을 기념해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우의(友誼)의 표시’로 크름(크림)반도를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양여(讓與)했다. 물론 소련 해체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크름반도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화약고(火藥庫)였다가 2014년 러시아에 병합됐다(국제사회와 우크라이나는 이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페레야슬라프조약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사실 조약 내용이 제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코자크가 러시아 차르(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러시아 측의 주장일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같은 슬라브 형제국가라고 믿고 군사동맹을 맺었던 것이고, 당시에 흔한 동맹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죠.”
―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페레야슬라프조약이 통한(痛恨)으로 남겠군요.
“코자크는 군사 집단으로는 훌륭했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눈이 부족했어요.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장 위대한 헤트만으로 꼽는 흐멜니츠키가 활동한 시기는 유럽에서 근대 주권국가의 등장을 알린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 시기(1648년)와 일치합니다. 근대 국가로 발돋움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지요.
흐멜니츠키의 행태는 그때그때 러시아 편에 섰다 서방 편에 섰다 하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가벼운 외교 행태와 비슷한 것 같아요. 역사의 DNA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역사적으로 중국 눈치를 보며 살아온 우리 한국인에게도 외교·안보 관련 DNA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곧잘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나라 밖으로 본격적으로 나가본 것은 너희 세대가 처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만 갇혀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뛰어난 국제 전략가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외교력은 30~40위권일 겁니다. 능력도, 경험도, 경륜도, 절박함도 부족해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몸과 영혼을 희생하자”
페레야슬라프조약 이후 러시아의 종주권 아래서도 헤트만 체제는 80년간 유지되다가 예카테리나 여제 때 폐지된다. 1775년에는 자포로지아 시치가 철폐된다. 이후 코자크의 러시아화(化)가 급속히 진행된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862년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이자 시인(詩人)인 파블로 추빈스키는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를 하나 지었다.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아직 죽지 않았다.
형제들이여, 운명은 그대들에게 미소 짓고 있도다.
우리의 적들은 아침 태양의 이슬처럼 사라지리라,
형제들이여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영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자크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임을 보여주리라.〉
이듬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신부였던 미하일로 베르비츠키가 이 시에 곡(曲)을 붙였다. 이 노래는 1917~1921년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우크라이나에 잠시 독립국가가 들어섰을 때에 국가(國歌)가 되었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다시 국가가 되었다. 푸틴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의 영웅적인 항전을 보면, 이 국가의 가사 그대로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그들의 몸과 영혼을 희생하면서 위대한 전사 집단 코자크의 후예임을 보여주고 있고, 그 결과 운명은 그들에게 미소 짓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또 다른 우크라이나, 할리시아
소련의 지배 아래서 우크라이나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32~ 1933년 스탈린이 강행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300만~800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는 3000만 명 수준이었다. 이 대기근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한다. 홀로드(Holod)는 ‘굶주림’, 모르(mor)는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상반된 주장을 한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다른 러시아 지역에서도 기근이 있었다는 이유로 ‘자연재해’임을 강조하는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소련 제2의 민족인 우크라이나인 농민층을 굴복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인재(人災) 내지 인종학살(Genocide)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스탈린 시절 이래 중화학공업 건설이 진행되면서 동부 지역(돈바스)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유입됐다. 인종적으로도 러시아인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2014년 러시아의 괴뢰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이번에 푸틴이 독립(?)을 승인한 소위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
여태까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사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흔히 할리시아(갈리치아·갈리시아)라고 일컬어졌던 서부 지역이다. 폴란드의 영역이었던 이 지역은 18세기 말 폴란드가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분할되면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정교회 일색인 동부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가톨릭 및 연합교회(정교식 제례를 행하면서도 로마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는 가톨릭 교파)가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같은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을 강행한 반면, 소수(少數)의 독일계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제국은 서부 우크라이나(할리시아)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을 널리 인정해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1991년 이후 독립 우크라이나의 큰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선언한 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수립된 우크라이나국민공화국에 합류했으나, 이후 폴란드에 합병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이 동부 폴란드를 합병하면서 이 지역은 소련의 일부인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7세기 이후 처음으로 동서 우크라이나가 다시 통합된 것이다. ‘독립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만든 것’이라는 푸틴의 주장이 아주 엉터리는 아닌 셈이다.
기본적으로 슬라브 문화권의 일부였던 동부 우크라이나와 서방(오스트리아, 폴란드) 문화의 세례를 받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차이는 1991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서부는 나토와 EU 가입을 꾀하면서 친(親)서방노선을, 동부는 친(親)러시아노선을 추구했다. 2013년 EU 가입 문제를 놓고 불거진 유로마이단혁명은 친러시아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항거였다. 2004년 오렌지혁명이나 대선, 총선 등은 예외 없이 동부와 서부의 충돌이었다.
“크름반도 합병 이후 正體性과 반러 감정 강화”
― 동서 우크라이나 간의 역사적·종교적 차이를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하나의 민족(nation) 정체성(正體性)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하나의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이웃 폴란드는 러시아 및 소련 지배하에서도 봉기하고 1차 대전에 참전해 싸우면서 독립을 쟁취(爭取)했는데,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로 어느 날 갑자기 독립을 얻었으니까요. 우크라이나인들 스스로도 ‘우리는 뭔가? 우리가 러시아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해소한 것이 2014년 러시아가 크름(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에 루한스크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사건입니다.”
― 왜 그런가요.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크름반도가 러시아로 넘어가고, 동부 지역도 사실상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인구 구성은 55(친서방 성향)대 45(친러 성향)에서 75대 25로 바뀌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배 아래 남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계가 확실하게 다수(多數)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러시아 입장에서는 크름반도와 동부 지역을 손에 넣기보다는 그냥 수중에 놔두면서 계속 동서가 대립하게 만드는 것이 우크라이나를 조종하는 데는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정체성과 반러시아 감정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그걸 체감할 수 있습니까.
“우크라이나와의 교류 초기에 고려대에 온 우크라이나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습니다. 근래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러시아어 문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중급러시아어 과정에 등록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아는 우크라이나 학생은 ‘전에는 집안에서 나이 든 어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는데, 크름반도 합병 이후에는 온 가족이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문득 소셜미디어(SNS)에서 본 ‘푸틴이야말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아버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허승철 교수가 말한 사정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이들일 것이다. 허승철 교수는 자신이 주우크라이나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도 이야기해주었다.
“당시 타라슈크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친서방 인사였는데, 내가 대화를 나누다가 무심코 러시아어를 하면 말없이 쳐다보곤 했어요. ‘당신, 우크라이나어를 할 줄 알면서 왜 러시아어로 말하느냐’는 무언(無言)의 항의였죠.”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 안 해”
작년 말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곧 침공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결국 금년 2월 24일 러시아는 ‘특별군사작전’이라는 허울을 쓰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인(根因)과 근인(近因)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근본 원인, 중간 원인, 촉발 원인과 같은 단계적 모색을 적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근본 원인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에 대한 러시아의 실질적(de facto) 인식과 국제법적(de jure) 현실의 괴리(乖離)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승철 대사는 이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러시아어에서 지역을 지칭할 때에는 앞에 나(na·러시아어 Ha), 국가를 지칭할 때에는 브(v·러시아어 B)라는 전치사를 붙이는데,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언급할 때는 ‘브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나 우크라이나’라고 합니다. 또 러시아인들과의 모임에 나갔을 때 나를 ‘전(前) 우크라이나 대사’라고 하지 않고 ‘전 키예프(우크라이나어 키이우) 대사’라고 소개하더군요.”
나토의 東進
― 중간 원인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 중간 원인은 1990년대 말부터 EU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확장시킨 미국 등 서방과 과거의 강대국 지위를 내세우면서 주변 지역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흡수하려는 러시아의 충돌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푸틴은 나토의 동진(東進)과 관련해서 미국이 6번이나 말을 바꾸었다고 주장했어요.”
― 그게 사실입니까.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을 허용할 때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이동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 구 소련 영토였던 발틱 3국까지 나토에 가입한 지금,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이 허언(虛言)을 한 게 아니라 기만(欺瞞)을 한 것이라고 여길 만하지요.
돌이켜보면 부시(조지 H.W 부시. ‘아버지 부시’) 정권은 소련의 붕괴와 냉전(冷戰) 종식을 평화롭게 관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시기의 유라시아에 대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전략과 장기적 비전은 마련하지 못했어요.”
― 무슨 의미입니까.
“미국이 소련 붕괴 후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셜플랜 같은 것을 마련해서 러시아와 협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에 시민사회와 중산층(中産層)이 형성되었다면 러시아 정치는 오늘날과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으면 미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는 형국이 되고 말았어요. 물론 소련 붕괴 당시에는 중국이 이렇게 빨리 클 줄은 몰랐지만…”
― 두 번째 중간 원인은 무엇인가요.
“국제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입니다. 소련 지배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구 국가들은 나토라는 집단안보체제를 이용해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지만, 러시아는 외교적 대응을 넘어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하면서 다시 안보가 불안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군사·외교적 대응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2018년 러시아-벨라루스가 벌인 대규모 합동작전과 현재 러시아가 조성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자기들이 나토에 가입한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하겠지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에는 미군이나 나토군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반면, 폴란드나 발틱 3국 등에는 크고 작은 나토 군사력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옳았던 것은 나토 가입을 서둘렀던 나라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크라이나 역시 나토 가입을 좀 더 서둘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프간 철수가 촉발 원인”
― 그렇다고 해도 왜 이렇게 갑자기 상황이 전쟁으로까지 악화된 것입니까.
“그게 바로 촉발 요인인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원상회복 정책이 그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도망치듯 아프가니스탄을 탈레반에게 내주고 빠져나오자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고, 러시아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에서 최소한 미국의 의지를 시험해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최근 벨라루스가 러시아의 속국(屬國)에 가까운 지위로 전락한 것도 우크라이나까지 복속시키겠다는 러시아의 야심을 자극했다고 생각합니다.”
― 원상회복 정책이란 무엇입니까.
“트럼프 정권 시절 미국은 나토 동맹국을 홀대하고 갈등을 빚었잖아요. 바이든 대통령은 정권을 잡으면서 ‘미국이 돌아왔다’면서 나토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면서 우크라이나를 여러 번 방문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책을 직접 챙기면서 트럼프 정부 때 중단했던 나토의 흑해(黑海) 해상 보급 훈련[해풍(Sea Breeze) 훈련)을 재개했어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게 ‘원상회복’일지 몰라도,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현상타파’로 여겨졌을 겁니다.”
― 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배우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았을까요.
“기존 정치인들의 부패와 패거리 정치에 너무 실망을 한 것이 큰 원인입니다. 또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너무 오랫동안 곧 EU에 가입할 수 있고, 그러면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고문’을 받아왔어요. 그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기성 정치인들은 친러시아파와 친서방파로 나뉘어 싸움만 하고…”
― 러시아가 침공하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2014년과는 달라졌어요. 8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말도 못 하게 달라졌어요.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는 ‘러시아가 침략해오면 70대 노부모도 총을 들고 싸우겠다고 한다’고 했더군요. 전쟁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 러시아 정치에도 영향이 미칠 겁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허승철 교수와 인터뷰를 한 바로 그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코미디 배우 출신’이라고 조롱받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 아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영웅적인 항전을 벌이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크름과 우크라이나 동부 문제
― 차라리 우크라이나가 사실상 러시아 지배하에 있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름(크림)은 러시아에 주고 중서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존하는 방안은 어떨까요.
“키신저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크름 합병을 인정하고,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빠지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어요. 브레진스키는 크름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했고요. 사실 우크라이나인들도 러시아계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크름을 되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어느 정치인이든 국제법상 자국의 영토를 포기하자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건 정치적 자살을 의미하니까요.
또 크름과 동부를 포기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어요. 1938년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에서 히틀러가 요구하는 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을 내주었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잖아요.”
―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때문에 사태가 악화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후반부터 EU와 나토 가입을 장기적 국가 목표로 정하고 이를 추진한 건 사실입니다. 2019년에는 이를 헌법에 반영했고요. 하지만 최근에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위해 신청서를 제출한다거나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은 사실 없어요. 서방도 빠른 시일 안에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킨다는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았고요. EU 가입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오랜 숙원이지만 그것 역시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러시아가 동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 포기한 것은 잘못 아니다”
―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독립 후 ‘부다페스트 각서’ 한 장 받고 1800기(基)에 달하던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일 것 같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보면 핵무기를 계속 유지, 관리할 능력이 없었고, 국제사회의 압력도 컸어요. 핵무기를 포기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부다페스트 각서’를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지요.
지금 우크라이나는 동맹국 하나 없는 형편이에요. 양자(兩者)동맹을 맺은 나라도 없고, 미국의 구체적인 안전보장도 없지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혜안과 결기,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북아(東北亞)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역사논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어요. 러시아는 18세기 말 크름-돈바스 지역을 손에 넣고 이 일대를 ‘노보러시아(새 러시아)’라고 명명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중국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면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 역사라고 주장하고 시진핑(習近平)은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했잖아요. 저는 이런 사고방식이 북한 급변 사태 시에 어떻게 작용할지를 생각하면 무척 걱정이 됩니다.”
― 무슨 의미인가요.
“2013년 유로마이단혁명 당시 사태가 악화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달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 공백 상태에서 러시아가 개입했고, 크름을 합병하고 동부를 사실상 차지할 수 있었죠. 만일 북한에서 급변사태로 권력공백 사태가 발생하면 중국도 함경북도를 비롯해 북한의 일부를 차지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열려고 할 수 있어요.”
‘희망적 思考에 기반을 둔 외교’
― 우크라이나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경제와 안보를 강대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경우 반대쪽에서 오는 위협과 압박을 헤징(Hedging)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거나 최소한 이를 감내할 의지라도 있어야 하는데, 우크라이나는 외교의 기회비용을 간과하고 희망적 사고(思考)에 기반을 둔 외교를 펼칠 때가 많았습니다. 격화되는 미중(美中)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국방력과 자강(自彊) 의지입니다. 크름 병합 때 우크라이나는 동원할 병력이 5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국방력이 약화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안전보장도 동맹도 제 기능을 할 수 없어요.”
2014년 러시아의 크름 합병 때 우크라이나가 아무 항거를 하지 못한 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誤判)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허승철 교수는 “특히 자국(自國)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자주 주변 강대국들의 구애(求愛)와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대립하고 있는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약소국이 외교적 지렛대가 생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 큰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폴란드는 독일, 소련과 모두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다가 두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외교 수사(修辭)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말이 쓰인 적이 있는데, 러브콜은 언제든 압박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IT 인력 풍부”
허승철 교수는 “우리나라가 국제정세에 잘 대응하기에는 외교가나 학계의 인력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면서 “외교부에서도 통상(通商)·안보 등 직능(職能) 전문가들은 양성하고 있지만 지역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개탄했다.
“대사는 주재하는 나라나 그와 유사한 나라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중견 외교관 시절에 해당 국가에서 근무하면서 현지 언어도 완벽하게 익히고, 인맥(人脈)을 만든 다음 그 나라에 대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공관장 임명 관행을 보면 현지어 구사 능력, 지역 전문성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요. 공관장 임명 후에야 그 나라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통상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대선 후보들이 기본소득 얘기나 하고 외교역량 강화에는 관심이 덜한 것이 아쉽습니다.”
― 우크라이나의 장래를 어떻게 봅니까.
“우크라이나는 한반도의 세 배에 이르는 넓은 국토에 비옥한 경작지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공관장으로 재직하던 2006~2008년 5000만 톤이었던 연간 곡물 생산량은 2021년 기준 1억 톤에 육박할 정도로 세계적인 농업국가입니다. 한국의 곡물 생산량이 800만 톤 내외인 것을 생각하면 식량안보 차원에서 협력의 여지가 많습니다. 또 소련 시절 안토노프 비행기, SS-21을 비롯한 대륙간탄도탄, 우주정거장 발사체를 만들었을 정도로 항공우주산업이 발달한 나라여서 이 분야에서의 협력도 기대됩니다. IT 인력도 풍부해서 삼성 갤럭시폰의 초기 모델 소프트웨어 작업의 상당 부분은 키이우의 삼성R&D센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서유럽의 경우보다 절반 정도의 임금으로 우수한 IT 인력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그 가능성은 무척 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우리(러시아)와 분리할 수 없는 역사, 문화, 정신의 일부이다.
- 독립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만든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였던 것을 분리시켰다.
- 우크라이나 당국은 공격적인 반(反)러시아주의, 네오나치즘에 사로잡혀 있다.
- 우크라이나는 단 한 번도 안정된 전통이나 국가성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완강하게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조롱받던 볼로지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수도 키이우(러시아어 키예프)에 남아 항전(抗戰)을 독려하고 있다. 해외로 이민을 갔던 예비군, 해외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귀국해 총을 들었다. 젊은 연인들은 날짜를 앞당겨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향토방위군(민병대)에 입대했다. 반역 혐의를 받고 폴란드에 체류 중이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도 귀국, 총을 잡았다. 《월간조선》 1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권위주의와의 전면전(全面戰)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했던 올렉시 혼차루크 전 총리도 총을 들었다. 그는 1월 말 조국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미국 스탠퍼드대를 떠나 귀국했다.
개전(開戰) 직후만 해도 금방 함락될 것 같았던 키이우가 건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소식이 이어지자 각국 국민들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당초 소극적이던 미국과 유럽연합(EU) 각국 정부도 국제금융결제망(SWIFT) 퇴출 등 고강도 대러시아 제재에 들어가는 한편,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에 착수했다.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21세기에 강대국이 무력(武力)으로 이웃 나라를 침공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두 차례나 ‘혁명’을 겪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던 나라가 일치단결해서 자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적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진짜 우크라이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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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에 남아 항전을 독려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AP/뉴시스 |
본인은 ‘준(準)전문가’라고 겸양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많이 등장한 요즘, 허승철 교수는 경력과 저작들에서 보듯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의 언어, 역사, 문화, 문학에 해박하고 우크라이나 대사 근무까지 한 ‘진짜 우크라이나 전문가’다.
인터뷰는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낮에 진행되었지만,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허승철 교수와의 논의를 거쳐 현재의 상황을 일부 반영했다.
“한국어-일본어보다 조금 가까운 정도”
― 한국인들은 우크라이나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인종적·언어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나라(민족)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어느 정도입니까.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는 모두 슬라브어족(語族) 동(東)슬라브어군에 속하는데, 차이가 큽니다.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어를 30~40%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저도 미국에 가서 처음 우크라이나어를 공부할 때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노문과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어 자료를 주면 읽지를 못해요. 현지를 방문한 국내 노문과 교수들도 우크라이나어 방송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두 언어는 별개의 언어로 봐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어는 서부 우크라이나가 과거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어서 서(西)슬라브어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차이를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에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일까요.
“아마 한국어와 일본어보다는 조금 가까운 정도일 겁니다. 물론 소련 시절을 겪었던 나이 든 세대 사이에서나 도시 지역에서는 러시아어가 널리 통용이 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거의 두 언어를 다 구사합니다.”
모스크바공국이 키이우공국의 변방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9세기 키이우공국(公國)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들이 그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나라(민족)는 어떤 계기로 역사의 진로가 달라진 것인가요.
“키이우공국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기보다는 여러 공국의 느슨한 연합체 성격이 강합니다. 우크라이나 학자들은 훗날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모스크바공국은 키이우공국의 변방(邊方) 공국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변방’이라는 의미라고 들었는데, 모스크바공국이 오히려 키이우공국의 변방이었다니 재미있네요.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소(小)러시아라고 하면서,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19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미 13세기에 우크라이나라는 말이 쓰였다고 주장하죠.
주우크라이나 일본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黑川祐次)가 쓴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보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모스크바공국을 포함한 당시 키예프루스공국의 동쪽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핀란드의 주류 민족-기자 주)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 핀족의 활동범위가 그렇게 넓었다니 놀랍습니다.
“강(江)이 발달되어 있으면 아무리 내륙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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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토마로프 |
“같은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정교회 신앙 등 공통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1861년에 〈두 루스(Rus’) 민족〉이라는 논문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민족성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첫째, 우크라이나인은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고, 러시아인은 집단주의를 중요시한다.
둘째, 우크라이나인은 최소한의 통제 질서를 가진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반면, 러시아인은 한 사상으로 통합된 확고한 집단적 체제를 선호한다.
셋째, 우크라이나인은 연방제를 선호하는 반면, 러시아인은 절대주의나 왕정(王政)을 선호한다.
코스토마로프는 ‘러시아적 요소는 거대하고 창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전체주의적 정신, 통일적 의식, 실용적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는다. 러시아인들은 모든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행동에 나서기에 가장 좋은 시간과 환경을 선택한다’면서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러한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신은 사회적 제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끌거나, 모든 방향으로 민족적 노력을 분산시키는 소용돌이 같은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했어요.”
―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혼란 끝에 푸틴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복귀한 러시아와 두 차례 시민혁명을 겪었던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에서 재선(再選)에 성공한 유일한 대통령은 1991년 독립 이후 1994~2004년 재임했던 레오니드 쿠치마뿐인데, 그도 정권을 연장하려고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자,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후계자로 내세워 부정선거를 했다가 오렌지혁명을 맞았지요.”
키이우公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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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國章인 삼지창은 키이우공국에서 비롯되었다. |
― 누가 키이우공국의 계승자인지를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다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키이우공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개 지방에 불과했다가 1991년에 독립한 신생국가인지, 아니면 1000여 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가 결정되니까요.
모스크바 크렘린궁 옆에는 2014년 크름(러시아어 크림)반도 합병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의 거대한 동상이 만들어졌어요. 그 의미는 중의적(重意的)인데, 키이우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는 푸틴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푸틴 대통령의 이름이 블라디미르거든요.”
키이우공국은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동서(東西)교통로의 중심에 있던 우크라이나 지역은 킵차크칸국[汗國]의 지배를 받았다. 반면에 키이우공국의 변방이었던 모스크바공국은 여러 키이우공국에서 모은 조공(朝貢)을 몽골에 바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공국은 1480년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동슬라브 여러 민족의 종가(宗家)가 되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 역사를 가른 분기점(分岐點)이 몽골의 침략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근무하던 시절 키이우의 한국 대사관저가 있던 동네는 타타르스키라이온이라고 불렸는데 타타르구(區)라는 뜻입니다. 옛날 몽골군 병영이 있던 지역이라 이런 지명이 나온 것입니다. 대통령궁은 옛날 칸(몽골계 민족의 지배자)의 관저가 있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하면서 자국(自國)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와 다른 후진적(後進的) 경로를 밟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죠.
“조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10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전제정(專制政)이 되었고 후진국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보다는 두 나라의 지리적 환경의 차이가 지배체제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로버트 카플란이 쓴 《지리의 복수》라는 책을 보면, ‘러시아의 전제정은 춥고 혹독한 기후 때문에 강력한 감독 밑에서 집단적 노동을 필요로 했고, 그 때문에 농노(農奴)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반면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비옥한 흑토(黑土)지대에 자리 잡은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런 정치체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었고 자유로운 기질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허 교수는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키이우루스(키이우공국)가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와 흑해 일대는 물론 지중해까지 세력을 뻗치는 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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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오렌지혁명은 독재에 굴종하지 않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질을 보여준다. 사진=AP/뉴시스 |
“러시아인들은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절대 권력자 앞에서는 약합니다. 스탈린의 학정(虐政) 밑에서도 암살 시도나 봉기 한 번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보다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타국(他國)이 좀 건드리거나 찔러대도 그냥 참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유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모스크바공항은 참 시끌시끌한데, 우크라이나행(行) 비행기 탑승구 앞에 가면 아주 조용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우크라이나로 가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이지요. 표정만 봐도 러시아인인지 우크라이나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한번 폭발하면 무서울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부정선거나 독재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2004년의 오렌지혁명, 2013년의 유로마이단혁명이 그 예입니다.”
허승철 교수의 이 말은 푸틴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이 결사항전(決死抗戰)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 독립하고 불과 30년 만에 두 차례 시민혁명(오렌지혁명·유로마이단혁명)이 있었다는 것은 정치가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부정선거와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문화는 굉장한 ‘사회적 자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워라’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구(舊)소련 국가 중 우크라이나는 아주 특이한 존재입니다.”
자유로운 戰士 집단 코자크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코자크다. 변방으로 도망친 농노(農奴)의 후예로 알려진 전사(戰士) 집단인 코자크는 1492년 크림칸국(크림반도에 있었던 몽골족의 나라)의 서간에 처음 등장한다. 1530년경에는 드니프로 강변에 코자크의 중심지인 자포로지아(자포로제) 시치(요새)가 건설된다. 코자크는 헤트만이라고 하는 군(軍)지휘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헤트만은 장교회의(Starshina)나 전체회의(Rada)에서 선출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국회를 라다라고 칭하는 것은 코자크의 전체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정치적 통일체를 만들지는 못하고, 이웃 강국인 러시아, 폴란드, 오스만튀르크 같은 외세(外勢) 사이에서 때로는 이 나라, 때로는 저 나라와 손잡으면서 살았다. 이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 19세기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타라스 불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장 부리바》로 더 유명한 이 소설은 1962년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헤트만은 우리나라 고대(古代)의 부족장(部族長)과 비슷한 건가요.
“아닙니다. 부족장은 세습이 가능했지만, 헤트만은 라다에서 선출되었습니다. 헤트만에 따라 다르지만, 선출되었기 때문에 능력만 있다면 세습 부족장보다 훨씬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코자크 전통은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적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 건설의 길을 걸은 러시아와 정치적 차별성을 이루는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코자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헤트만)을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 권리가 코자크 자유의 기초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후 대통령의 재임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독재에 항거한 것도 코자크 정치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 대제국을 건설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그러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앞에서 말한 지리적 이유, 거기서 비롯된 기질적 차이도 있지만, 지도자 운(運)도 작용한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大帝), 예카테리나 여제(女帝) 등 강력하고 뛰어난 군주들이 잇달아 출현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페레야슬라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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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에 입성하는 흐멜니츠키. 코자크 자치국가를 수립했지만 페레야슬라프조약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종속되는 길을 열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 페레야슬라프조약을 보는 눈은 극(極)과 극이다. 러시아는 이 동맹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귀속되고, 과거 키이우공국의 영토가 러시아의 주도하에 재통일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이 조약이 코자크가 폴란드, 오스만튀르크, 크림타타르, 러시아 등과 수시로 맺었다가 뒤집곤 했던 수많은 군사동맹조약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953년 당시 소련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페레야슬라프조약 체결 300주년을 기념해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우의(友誼)의 표시’로 크름(크림)반도를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양여(讓與)했다. 물론 소련 해체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크름반도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화약고(火藥庫)였다가 2014년 러시아에 병합됐다(국제사회와 우크라이나는 이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페레야슬라프조약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사실 조약 내용이 제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코자크가 러시아 차르(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러시아 측의 주장일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같은 슬라브 형제국가라고 믿고 군사동맹을 맺었던 것이고, 당시에 흔한 동맹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죠.”
―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페레야슬라프조약이 통한(痛恨)으로 남겠군요.
“코자크는 군사 집단으로는 훌륭했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눈이 부족했어요.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장 위대한 헤트만으로 꼽는 흐멜니츠키가 활동한 시기는 유럽에서 근대 주권국가의 등장을 알린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 시기(1648년)와 일치합니다. 근대 국가로 발돋움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지요.
흐멜니츠키의 행태는 그때그때 러시아 편에 섰다 서방 편에 섰다 하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가벼운 외교 행태와 비슷한 것 같아요. 역사의 DNA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역사적으로 중국 눈치를 보며 살아온 우리 한국인에게도 외교·안보 관련 DNA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곧잘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나라 밖으로 본격적으로 나가본 것은 너희 세대가 처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만 갇혀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뛰어난 국제 전략가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외교력은 30~40위권일 겁니다. 능력도, 경험도, 경륜도, 절박함도 부족해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몸과 영혼을 희생하자”
페레야슬라프조약 이후 러시아의 종주권 아래서도 헤트만 체제는 80년간 유지되다가 예카테리나 여제 때 폐지된다. 1775년에는 자포로지아 시치가 철폐된다. 이후 코자크의 러시아화(化)가 급속히 진행된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862년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이자 시인(詩人)인 파블로 추빈스키는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를 하나 지었다.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아직 죽지 않았다.
형제들이여, 운명은 그대들에게 미소 짓고 있도다.
우리의 적들은 아침 태양의 이슬처럼 사라지리라,
형제들이여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영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자크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임을 보여주리라.〉
이듬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신부였던 미하일로 베르비츠키가 이 시에 곡(曲)을 붙였다. 이 노래는 1917~1921년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우크라이나에 잠시 독립국가가 들어섰을 때에 국가(國歌)가 되었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다시 국가가 되었다. 푸틴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의 영웅적인 항전을 보면, 이 국가의 가사 그대로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그들의 몸과 영혼을 희생하면서 위대한 전사 집단 코자크의 후예임을 보여주고 있고, 그 결과 운명은 그들에게 미소 짓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또 다른 우크라이나, 할리시아
소련의 지배 아래서 우크라이나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32~ 1933년 스탈린이 강행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300만~800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는 3000만 명 수준이었다. 이 대기근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한다. 홀로드(Holod)는 ‘굶주림’, 모르(mor)는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상반된 주장을 한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다른 러시아 지역에서도 기근이 있었다는 이유로 ‘자연재해’임을 강조하는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소련 제2의 민족인 우크라이나인 농민층을 굴복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인재(人災) 내지 인종학살(Genocide)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스탈린 시절 이래 중화학공업 건설이 진행되면서 동부 지역(돈바스)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유입됐다. 인종적으로도 러시아인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2014년 러시아의 괴뢰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이번에 푸틴이 독립(?)을 승인한 소위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
여태까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사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흔히 할리시아(갈리치아·갈리시아)라고 일컬어졌던 서부 지역이다. 폴란드의 영역이었던 이 지역은 18세기 말 폴란드가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분할되면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정교회 일색인 동부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가톨릭 및 연합교회(정교식 제례를 행하면서도 로마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는 가톨릭 교파)가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같은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을 강행한 반면, 소수(少數)의 독일계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제국은 서부 우크라이나(할리시아)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을 널리 인정해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1991년 이후 독립 우크라이나의 큰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선언한 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수립된 우크라이나국민공화국에 합류했으나, 이후 폴란드에 합병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이 동부 폴란드를 합병하면서 이 지역은 소련의 일부인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7세기 이후 처음으로 동서 우크라이나가 다시 통합된 것이다. ‘독립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만든 것’이라는 푸틴의 주장이 아주 엉터리는 아닌 셈이다.
기본적으로 슬라브 문화권의 일부였던 동부 우크라이나와 서방(오스트리아, 폴란드) 문화의 세례를 받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차이는 1991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서부는 나토와 EU 가입을 꾀하면서 친(親)서방노선을, 동부는 친(親)러시아노선을 추구했다. 2013년 EU 가입 문제를 놓고 불거진 유로마이단혁명은 친러시아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항거였다. 2004년 오렌지혁명이나 대선, 총선 등은 예외 없이 동부와 서부의 충돌이었다.
“크름반도 합병 이후 正體性과 반러 감정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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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AP/뉴시스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하나의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이웃 폴란드는 러시아 및 소련 지배하에서도 봉기하고 1차 대전에 참전해 싸우면서 독립을 쟁취(爭取)했는데,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로 어느 날 갑자기 독립을 얻었으니까요. 우크라이나인들 스스로도 ‘우리는 뭔가? 우리가 러시아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해소한 것이 2014년 러시아가 크름(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에 루한스크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사건입니다.”
― 왜 그런가요.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크름반도가 러시아로 넘어가고, 동부 지역도 사실상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인구 구성은 55(친서방 성향)대 45(친러 성향)에서 75대 25로 바뀌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배 아래 남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계가 확실하게 다수(多數)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러시아 입장에서는 크름반도와 동부 지역을 손에 넣기보다는 그냥 수중에 놔두면서 계속 동서가 대립하게 만드는 것이 우크라이나를 조종하는 데는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정체성과 반러시아 감정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그걸 체감할 수 있습니까.
“우크라이나와의 교류 초기에 고려대에 온 우크라이나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습니다. 근래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러시아어 문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중급러시아어 과정에 등록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아는 우크라이나 학생은 ‘전에는 집안에서 나이 든 어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는데, 크름반도 합병 이후에는 온 가족이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문득 소셜미디어(SNS)에서 본 ‘푸틴이야말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아버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허승철 교수가 말한 사정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이들일 것이다. 허승철 교수는 자신이 주우크라이나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도 이야기해주었다.
“당시 타라슈크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친서방 인사였는데, 내가 대화를 나누다가 무심코 러시아어를 하면 말없이 쳐다보곤 했어요. ‘당신, 우크라이나어를 할 줄 알면서 왜 러시아어로 말하느냐’는 무언(無言)의 항의였죠.”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 안 해”
작년 말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곧 침공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결국 금년 2월 24일 러시아는 ‘특별군사작전’이라는 허울을 쓰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인(根因)과 근인(近因)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근본 원인, 중간 원인, 촉발 원인과 같은 단계적 모색을 적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근본 원인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에 대한 러시아의 실질적(de facto) 인식과 국제법적(de jure) 현실의 괴리(乖離)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승철 대사는 이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러시아어에서 지역을 지칭할 때에는 앞에 나(na·러시아어 Ha), 국가를 지칭할 때에는 브(v·러시아어 B)라는 전치사를 붙이는데,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언급할 때는 ‘브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나 우크라이나’라고 합니다. 또 러시아인들과의 모임에 나갔을 때 나를 ‘전(前) 우크라이나 대사’라고 하지 않고 ‘전 키예프(우크라이나어 키이우) 대사’라고 소개하더군요.”
나토의 東進
― 중간 원인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 중간 원인은 1990년대 말부터 EU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확장시킨 미국 등 서방과 과거의 강대국 지위를 내세우면서 주변 지역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흡수하려는 러시아의 충돌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푸틴은 나토의 동진(東進)과 관련해서 미국이 6번이나 말을 바꾸었다고 주장했어요.”
― 그게 사실입니까.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을 허용할 때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이동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 구 소련 영토였던 발틱 3국까지 나토에 가입한 지금,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이 허언(虛言)을 한 게 아니라 기만(欺瞞)을 한 것이라고 여길 만하지요.
돌이켜보면 부시(조지 H.W 부시. ‘아버지 부시’) 정권은 소련의 붕괴와 냉전(冷戰) 종식을 평화롭게 관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시기의 유라시아에 대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전략과 장기적 비전은 마련하지 못했어요.”
― 무슨 의미입니까.
“미국이 소련 붕괴 후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셜플랜 같은 것을 마련해서 러시아와 협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에 시민사회와 중산층(中産層)이 형성되었다면 러시아 정치는 오늘날과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으면 미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는 형국이 되고 말았어요. 물론 소련 붕괴 당시에는 중국이 이렇게 빨리 클 줄은 몰랐지만…”
― 두 번째 중간 원인은 무엇인가요.
“국제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입니다. 소련 지배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구 국가들은 나토라는 집단안보체제를 이용해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지만, 러시아는 외교적 대응을 넘어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하면서 다시 안보가 불안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군사·외교적 대응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2018년 러시아-벨라루스가 벌인 대규모 합동작전과 현재 러시아가 조성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자기들이 나토에 가입한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하겠지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에는 미군이나 나토군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반면, 폴란드나 발틱 3국 등에는 크고 작은 나토 군사력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옳았던 것은 나토 가입을 서둘렀던 나라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크라이나 역시 나토 가입을 좀 더 서둘러야 하지 않았을까?
“아프간 철수가 촉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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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이든 대통령. 나토를 중시하는 그의 원상회복정책은 러시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AP/뉴시스 |
“그게 바로 촉발 요인인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원상회복 정책이 그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도망치듯 아프가니스탄을 탈레반에게 내주고 빠져나오자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고, 러시아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에서 최소한 미국의 의지를 시험해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최근 벨라루스가 러시아의 속국(屬國)에 가까운 지위로 전락한 것도 우크라이나까지 복속시키겠다는 러시아의 야심을 자극했다고 생각합니다.”
― 원상회복 정책이란 무엇입니까.
“트럼프 정권 시절 미국은 나토 동맹국을 홀대하고 갈등을 빚었잖아요. 바이든 대통령은 정권을 잡으면서 ‘미국이 돌아왔다’면서 나토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면서 우크라이나를 여러 번 방문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책을 직접 챙기면서 트럼프 정부 때 중단했던 나토의 흑해(黑海) 해상 보급 훈련[해풍(Sea Breeze) 훈련)을 재개했어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게 ‘원상회복’일지 몰라도,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현상타파’로 여겨졌을 겁니다.”
― 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배우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았을까요.
“기존 정치인들의 부패와 패거리 정치에 너무 실망을 한 것이 큰 원인입니다. 또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너무 오랫동안 곧 EU에 가입할 수 있고, 그러면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고문’을 받아왔어요. 그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기성 정치인들은 친러시아파와 친서방파로 나뉘어 싸움만 하고…”
― 러시아가 침공하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2014년과는 달라졌어요. 8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말도 못 하게 달라졌어요.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는 ‘러시아가 침략해오면 70대 노부모도 총을 들고 싸우겠다고 한다’고 했더군요. 전쟁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 러시아 정치에도 영향이 미칠 겁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허승철 교수와 인터뷰를 한 바로 그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코미디 배우 출신’이라고 조롱받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 아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영웅적인 항전을 벌이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크름과 우크라이나 동부 문제
― 차라리 우크라이나가 사실상 러시아 지배하에 있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름(크림)은 러시아에 주고 중서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존하는 방안은 어떨까요.
“키신저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크름 합병을 인정하고,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빠지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어요. 브레진스키는 크름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했고요. 사실 우크라이나인들도 러시아계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크름을 되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어느 정치인이든 국제법상 자국의 영토를 포기하자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건 정치적 자살을 의미하니까요.
또 크름과 동부를 포기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어요. 1938년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에서 히틀러가 요구하는 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을 내주었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잖아요.”
―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때문에 사태가 악화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후반부터 EU와 나토 가입을 장기적 국가 목표로 정하고 이를 추진한 건 사실입니다. 2019년에는 이를 헌법에 반영했고요. 하지만 최근에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위해 신청서를 제출한다거나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은 사실 없어요. 서방도 빠른 시일 안에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킨다는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았고요. EU 가입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오랜 숙원이지만 그것 역시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러시아가 동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 포기한 것은 잘못 아니다”
―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독립 후 ‘부다페스트 각서’ 한 장 받고 1800기(基)에 달하던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일 것 같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보면 핵무기를 계속 유지, 관리할 능력이 없었고, 국제사회의 압력도 컸어요. 핵무기를 포기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부다페스트 각서’를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지요.
지금 우크라이나는 동맹국 하나 없는 형편이에요. 양자(兩者)동맹을 맺은 나라도 없고, 미국의 구체적인 안전보장도 없지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혜안과 결기,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북아(東北亞)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역사논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어요. 러시아는 18세기 말 크름-돈바스 지역을 손에 넣고 이 일대를 ‘노보러시아(새 러시아)’라고 명명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중국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면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 역사라고 주장하고 시진핑(習近平)은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했잖아요. 저는 이런 사고방식이 북한 급변 사태 시에 어떻게 작용할지를 생각하면 무척 걱정이 됩니다.”
― 무슨 의미인가요.
“2013년 유로마이단혁명 당시 사태가 악화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달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 공백 상태에서 러시아가 개입했고, 크름을 합병하고 동부를 사실상 차지할 수 있었죠. 만일 북한에서 급변사태로 권력공백 사태가 발생하면 중국도 함경북도를 비롯해 북한의 일부를 차지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열려고 할 수 있어요.”
‘희망적 思考에 기반을 둔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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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과 인터뷰했던 혼차루크 전 총리(오른쪽 끝)도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총을 들었다. 사진=혼차루크 인스타그램 |
“경제와 안보를 강대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경우 반대쪽에서 오는 위협과 압박을 헤징(Hedging)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거나 최소한 이를 감내할 의지라도 있어야 하는데, 우크라이나는 외교의 기회비용을 간과하고 희망적 사고(思考)에 기반을 둔 외교를 펼칠 때가 많았습니다. 격화되는 미중(美中)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국방력과 자강(自彊) 의지입니다. 크름 병합 때 우크라이나는 동원할 병력이 5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국방력이 약화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안전보장도 동맹도 제 기능을 할 수 없어요.”
2014년 러시아의 크름 합병 때 우크라이나가 아무 항거를 하지 못한 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誤判)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허승철 교수는 “특히 자국(自國)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자주 주변 강대국들의 구애(求愛)와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대립하고 있는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약소국이 외교적 지렛대가 생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 큰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폴란드는 독일, 소련과 모두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다가 두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외교 수사(修辭)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말이 쓰인 적이 있는데, 러브콜은 언제든 압박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IT 인력 풍부”
허승철 교수는 “우리나라가 국제정세에 잘 대응하기에는 외교가나 학계의 인력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면서 “외교부에서도 통상(通商)·안보 등 직능(職能) 전문가들은 양성하고 있지만 지역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개탄했다.
“대사는 주재하는 나라나 그와 유사한 나라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중견 외교관 시절에 해당 국가에서 근무하면서 현지 언어도 완벽하게 익히고, 인맥(人脈)을 만든 다음 그 나라에 대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공관장 임명 관행을 보면 현지어 구사 능력, 지역 전문성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요. 공관장 임명 후에야 그 나라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통상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대선 후보들이 기본소득 얘기나 하고 외교역량 강화에는 관심이 덜한 것이 아쉽습니다.”
― 우크라이나의 장래를 어떻게 봅니까.
“우크라이나는 한반도의 세 배에 이르는 넓은 국토에 비옥한 경작지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공관장으로 재직하던 2006~2008년 5000만 톤이었던 연간 곡물 생산량은 2021년 기준 1억 톤에 육박할 정도로 세계적인 농업국가입니다. 한국의 곡물 생산량이 800만 톤 내외인 것을 생각하면 식량안보 차원에서 협력의 여지가 많습니다. 또 소련 시절 안토노프 비행기, SS-21을 비롯한 대륙간탄도탄, 우주정거장 발사체를 만들었을 정도로 항공우주산업이 발달한 나라여서 이 분야에서의 협력도 기대됩니다. IT 인력도 풍부해서 삼성 갤럭시폰의 초기 모델 소프트웨어 작업의 상당 부분은 키이우의 삼성R&D센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서유럽의 경우보다 절반 정도의 임금으로 우수한 IT 인력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그 가능성은 무척 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