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무슬림 인구의 1% 미만, 오만 인구의 60% 차지
⊙ 정의(正義) 관념 강하고 능력 중시
⊙ 불신자와 비무슬림을 ‘육체적으로는 멀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기초해 다른 종파와의 화합 중시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 정의(正義) 관념 강하고 능력 중시
⊙ 불신자와 비무슬림을 ‘육체적으로는 멀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기초해 다른 종파와의 화합 중시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 오만의 수도 무스카르에 있는 술탄 카부스 대모스크. 이바디파인 오만은 종파 종교간 화합에 힘쓰고 있다.
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중동이나 이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슬람에는 수니와 시아라는 양대 종파가 있다는 것, 사우디아라비아를 종주국으로 하는 수니가 다수(85~90%)이고 이란을 종주국으로 하는 시아가 소수(10~15%)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밖에도 수니와 시아의 교리가 혼합된 소수 종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바디(Ibadi)라고 하는 종파다. 걸프협력기구(GCC) 소속 6개국 중 하나인 오만이 바로 이바디 무슬림들이 세운 나라다. GCC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만은 인구 399만명의 소국이지만, 국민소득이 2만500달러에 달하고, 확인된 천연자원 매장량만 해도 가스가 9310억m³, 원유가 53억600만 배럴에 이른다.
오만 국민의 약 60%가 이바디 무슬림이다. 이바디 무슬림은 오만 외에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튀니지,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에 흩어져 있다. 이바디 무슬림 인구는 전 세계 무슬림 인구 대비 1%에도 못 미친다.
이바디는 관용정신이 뛰어난 종파다. 이바디가 다수인 오만의 경우, 소수인 수니나 시아와 아무런 문제 없이 어울려 잘 산다. 종파 분쟁이 없다. 비록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이바디는 자신과 믿음이 다르다고 수니와 시아를 박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통혼(通婚)도 문제가 없다.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종파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가장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용의 종파가 이바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소수로 살다 보니 시아처럼 자신이 이바디라는 것을 감추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이바디는 어떻게 시작된 종파일까? 역사의 시계를 7세기로 돌려 보자.
이슬람의 분열
632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없지만, 예언자가 남긴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는 필요하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렀는데, (예언자의) 계승자라는 의미다. 요즘 IS(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세운 국가를 칼리파 국가라고 하는데, 칼리파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역사적으로 첫 번째 칼리파는 무함마드를 처음부터 옆에서 도왔으면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의 아내로 내어준 장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년)였다. 두 번째는 역시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인 우마르(재위 634~644년) 였다.
이슬람의 분파 문제는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 때 똬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무함마드를 반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항복한 부족 출신이었다. 자신이 속한 부족과 달리 그는 일찍이 무함마드를 따랐고 무함마드는 그러한 우스만을 아꼈다. 그런데 우스만은 칼리파가 되자 자신의 부족 출신을 중용하였다.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볼 리 만무하였다.
656년 우스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메디나로 몰려왔다. 그들은 결국 우스만을 살해하였다. 당시 이들과 우스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했던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였기에 사위였다. 그런데 우스만 친족들은 알리가 우스만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우스만의 친척이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657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현재 IS가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의 라까(Raqqah) 인근 시핀(Siffin)에서 알리의 군대와 맞대결을 벌인다.
양쪽 공히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전면적인 맞대결은 피하고 부분적인 전투만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 같은 부족 사람들이 서로 다른 편에 있었으니 전투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골육상쟁이었으니 말이다. 긴 대치전과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던 중, 우스만 쪽 군인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을 창에 걸고 코란에 결정을 맡기자고 주창하였다. 이에 알리의 진영이 술렁거렸고, 결국 알리는 중재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것이 기나 긴 비극과 참화의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리.
칼리파 시대의 종언
알리의 진영에는 중재를 부당하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리가 코란 계시를 어겼다고 생각하였다. 코란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만일 믿는 자들 중 두 파가 싸움에 이르면 해결책을 찾아라. 그러나 만일 한쪽이 다른 쪽에게 잘못을 범하면 잘못을 범한 쪽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까지 싸워라.”(49장 9절).
“더 이상 분열이 없을 때까지 싸워서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라.”(8장 39절).
사실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의 죽음에 알리의 책임은 없다. 그리고 우스만은 자신이 행한 잘못 때문에 죽었다. 알리는 정당한 칼리파다. 알리에게 우스만의 죽음을 책임지라고 거병을 한 무아위야는 반란군이다. 반란군은 코란 계시에서 가르친 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잘못한 일이 없는 알리가 중재에 동의하였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이들이 보기에 알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대죄(大罪)를 지었고, 따라서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인의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재를 거부한 이들의 구호는 명료하였다. “라 후크마 일라 릴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리신다!
인간평등을 주장한 카와리즈
그리고 이들은 알리를 떠났다. 알리 쪽에서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떠나간 자들’이라고 해서 아랍어로 이들은 ‘카와리즈(Khawarij, 단수 카리지 Khariji)’라고 불렸다. 알리는 이들을 응징하였다. 많은 이가 어제까지 전우였던 사람들 손에 죽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븐 물잠 알-무라디가 661년 1월 금요일 이라크 쿠파 모스크에서 알리를 살해하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복수극이었다. 이로써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알리로 이어진 정통 칼리파 시대가 저물고 알리에 맞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이슬람사에서 부자(父子) 상속의 신왕조를 열었다.
카와리즈는 수니파나 시아파와 달리 누구나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흑인노예라도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통 칼리파처럼 예언자가 나온 꾸라이시 부족 출신일 필요도, 수니처럼 부자세습일 필요도 없고, 시아처럼 예언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 사람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들은 한 번 죄를 지으면 무슬림 지격이 없다고 믿었고, 무슬림이 아니면 죽여도 좋다고 여겼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인간평등을 주창한 점에서는 그 어떤 무슬림 공동체보다 현대적 평등사상을 견지하였지만, 정의사상이 지나치게 강하여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한 점은 극단주의에 가까웠다.
우마이야 칼리파 시대에 이들은 오늘날 이라크 바스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 초기 과격한 카와리즈파에서 온건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룬 파가 이바디파다. 이바디라는 이름은 당시 지도자였던 압드 알라 이븐 이바드에서 나왔다. 이바디는 카와리즈와 달리 일단 이바디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카와리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무슬림을 우상숭배자로 부르고 엄히 다스렸다. 수니는 무슬림이 중죄(重罪)를 짓더라도 여전히 무슬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바디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전히 유일신론자로 여기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불신자를 적대시 않는 이바디
이때 중요한 개념을 사용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가 불신(不信)이다. 아랍어로 쿠프르(kufr)라고 한다. 원래의 의미는 ‘감사하지 않는다’인데 불신으로 통용된다. 불신자는 카피르(kafir)다. IS가 사람을 죽일 때 잘 쓰는 용어가 바로 불신(쿠프르), 불신자(카피르)다. 대단히 엄중한 용어다.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신자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극형이다. 그런데 이바디는 이들 단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바디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않는 것(쿠프르 니으마)과 우상숭배의 불신(쿠프르 시르크)으로 나눈다. 전자(前者)는 이바디가 아닌 무슬림, 후자(後者)는 비무슬림의 상태를 각각 가리킨다. 이바디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무슬림은 여전히 무슬림으로 여긴다. 비무슬림은 말 그대로 유일신 신앙이 없는 사람이다. 이바디는 이 둘을 모두 멀리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육체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멀리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에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를 지배한 오만의 이바디를 두고 이슬람의 모든 종파 중에서 이바디가 가장 온건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수니나 시아와 문제 없이 잘 어울렸고,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들이 적대시한 대상은 정의(正義)롭지 못한 통치자였다. 올바른 지도자에 대한 의식이 7세기 때부터 변함없이 내려온다. 이바디는 수세기 동안 정의로운 이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금요일 합동예배를 준행하지 않았다. 금요 합동예배는 정의가 실행되는 대도시에서만 열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무슬림 금요 예배 때는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설교할 때 반드시 지역의 지배자 이름을 언급한다. 이는 오늘날과 같이 언론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지역의 실질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지금도 천주교회에서 미사 시간에 교황, 해당 성당이 속한 교구의 주교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바디는 지역의 통치자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설교 시간에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강렬한 정의의식의 발로다.
이바디,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
이바디는 전반적으로 수니와 가까운 편이지만 이바디 특유의 독특한 점이 꽤 많다. 하나님의 손, 분노와 같이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설명한 코란 구절의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표현을 이바디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경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극단주의적 사유의 지름길이다. 이바디는 그리스의 이성적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아 코란의 신인동형적 표현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읽었다.
그런데 코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12세기 아부 아미르 알-꾸라시는 “맨 허벅지가 드러나는” 최후의 심판일이라는 코란 68장 42절의 표현을 두고 자신의 허벅지를 치면서 “바로 여기 이처럼 진짜 허벅지”라고 설명하였다. 또 14세기 한발리 법학파의 저명 인사 이븐 타이미야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코란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설교대에서 몇 발자국 내려오면서 “내가 지금 내려오는 것과 똑같이”라고 말하였다.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이처럼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주변에서 극단주의는 결코 없앨 수 없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코란을 그렇게 읽는 IS가 2014년 6월부터 우리에게 잔인한 모습을 얼마나 보여주었는가! 극단주의자들은 문자주의에 기생해서 자란다. 이바디는 그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이바디는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니의 입장과 달리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바디는 이외에도 신(神)을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죄인을 위해 중재 역할을 한다는 수니 일반의 믿음을 거부한다. 지옥에 간 자들이 지옥 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3번째 칼리파 우스만, 4번째 칼리파 알리, 알리와 맞서 싸운 무아위야를 모두 비판한다.
화합 위해 노력하는 오만 정부
오늘날 이바디의 나라 오만은 가급적 학교에서 이슬람 분파의 역사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피하고, 이슬람 교육을 이바디, 수니, 시아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중심으로 실시하고 있다.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서로 같은 점에 방점을 두어 종파 차이에 따른 불필요한 다툼을 방지하여 국민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국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오만에서 이슬람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바디의 견해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다만 이바디 관련 출판물을 후원하면서 이바디 전통을 이어 간다. 현재 오만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마드 이븐 하마드 알-칼릴리는 “이바디와 다른 종파의 차이는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슬림 사회의 통합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이미 표명한 바 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후 거대한 시아국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하여 결성된 것이 GCC다. 2011년 이래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에서 이란을 제압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아랍국가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오만은 그러한 대오에서 조용히 발을 빼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오만은 외교적으로도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직 서로 종파로 형성되기 전인 657년 시핀 전투에서 시아, 수니, 이바디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다고 볼 수 있다. 시아 이란, 수니 걸프 아랍국, 이바디 오만. 거기에 알카에다나 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슬람=극단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오만과 이바디의 사례는 이슬람 세계가 분열을 씻어내고, 타 종파, 타 종교와 화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참고로, 국내 오만 대사관은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도심 속의 작은 궁전의 모습인데 외양에서 아랍풍이 물씬 풍긴다.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기하학적인 외부 문양이 마치 종파의 조화를 상징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중 하나가 이바디(Ibadi)라고 하는 종파다. 걸프협력기구(GCC) 소속 6개국 중 하나인 오만이 바로 이바디 무슬림들이 세운 나라다. GCC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만은 인구 399만명의 소국이지만, 국민소득이 2만500달러에 달하고, 확인된 천연자원 매장량만 해도 가스가 9310억m³, 원유가 53억600만 배럴에 이른다.
오만 국민의 약 60%가 이바디 무슬림이다. 이바디 무슬림은 오만 외에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튀니지,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에 흩어져 있다. 이바디 무슬림 인구는 전 세계 무슬림 인구 대비 1%에도 못 미친다.
이바디는 관용정신이 뛰어난 종파다. 이바디가 다수인 오만의 경우, 소수인 수니나 시아와 아무런 문제 없이 어울려 잘 산다. 종파 분쟁이 없다. 비록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이바디는 자신과 믿음이 다르다고 수니와 시아를 박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통혼(通婚)도 문제가 없다.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종파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가장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용의 종파가 이바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소수로 살다 보니 시아처럼 자신이 이바디라는 것을 감추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이바디는 어떻게 시작된 종파일까? 역사의 시계를 7세기로 돌려 보자.
이슬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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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를 개창한 예언자 무함마드. |
역사적으로 첫 번째 칼리파는 무함마드를 처음부터 옆에서 도왔으면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의 아내로 내어준 장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년)였다. 두 번째는 역시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인 우마르(재위 634~644년) 였다.
이슬람의 분파 문제는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 때 똬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무함마드를 반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항복한 부족 출신이었다. 자신이 속한 부족과 달리 그는 일찍이 무함마드를 따랐고 무함마드는 그러한 우스만을 아꼈다. 그런데 우스만은 칼리파가 되자 자신의 부족 출신을 중용하였다.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볼 리 만무하였다.
656년 우스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메디나로 몰려왔다. 그들은 결국 우스만을 살해하였다. 당시 이들과 우스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했던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였기에 사위였다. 그런데 우스만 친족들은 알리가 우스만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우스만의 친척이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657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현재 IS가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의 라까(Raqqah) 인근 시핀(Siffin)에서 알리의 군대와 맞대결을 벌인다.
양쪽 공히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전면적인 맞대결은 피하고 부분적인 전투만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 같은 부족 사람들이 서로 다른 편에 있었으니 전투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골육상쟁이었으니 말이다. 긴 대치전과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던 중, 우스만 쪽 군인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을 창에 걸고 코란에 결정을 맡기자고 주창하였다. 이에 알리의 진영이 술렁거렸고, 결국 알리는 중재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것이 기나 긴 비극과 참화의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리.
칼리파 시대의 종언
알리의 진영에는 중재를 부당하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리가 코란 계시를 어겼다고 생각하였다. 코란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만일 믿는 자들 중 두 파가 싸움에 이르면 해결책을 찾아라. 그러나 만일 한쪽이 다른 쪽에게 잘못을 범하면 잘못을 범한 쪽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까지 싸워라.”(49장 9절).
“더 이상 분열이 없을 때까지 싸워서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라.”(8장 39절).
사실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의 죽음에 알리의 책임은 없다. 그리고 우스만은 자신이 행한 잘못 때문에 죽었다. 알리는 정당한 칼리파다. 알리에게 우스만의 죽음을 책임지라고 거병을 한 무아위야는 반란군이다. 반란군은 코란 계시에서 가르친 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잘못한 일이 없는 알리가 중재에 동의하였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이들이 보기에 알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대죄(大罪)를 지었고, 따라서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인의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재를 거부한 이들의 구호는 명료하였다. “라 후크마 일라 릴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리신다!
인간평등을 주장한 카와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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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핀전투를 계기로 무슬림세계는 수니와 시아로 분열되고 이바디파가 생겨났다. |
카와리즈는 수니파나 시아파와 달리 누구나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흑인노예라도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통 칼리파처럼 예언자가 나온 꾸라이시 부족 출신일 필요도, 수니처럼 부자세습일 필요도 없고, 시아처럼 예언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 사람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들은 한 번 죄를 지으면 무슬림 지격이 없다고 믿었고, 무슬림이 아니면 죽여도 좋다고 여겼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인간평등을 주창한 점에서는 그 어떤 무슬림 공동체보다 현대적 평등사상을 견지하였지만, 정의사상이 지나치게 강하여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한 점은 극단주의에 가까웠다.
우마이야 칼리파 시대에 이들은 오늘날 이라크 바스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 초기 과격한 카와리즈파에서 온건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룬 파가 이바디파다. 이바디라는 이름은 당시 지도자였던 압드 알라 이븐 이바드에서 나왔다. 이바디는 카와리즈와 달리 일단 이바디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카와리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무슬림을 우상숭배자로 부르고 엄히 다스렸다. 수니는 무슬림이 중죄(重罪)를 짓더라도 여전히 무슬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바디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전히 유일신론자로 여기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이때 중요한 개념을 사용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가 불신(不信)이다. 아랍어로 쿠프르(kufr)라고 한다. 원래의 의미는 ‘감사하지 않는다’인데 불신으로 통용된다. 불신자는 카피르(kafir)다. IS가 사람을 죽일 때 잘 쓰는 용어가 바로 불신(쿠프르), 불신자(카피르)다. 대단히 엄중한 용어다.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신자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극형이다. 그런데 이바디는 이들 단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바디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않는 것(쿠프르 니으마)과 우상숭배의 불신(쿠프르 시르크)으로 나눈다. 전자(前者)는 이바디가 아닌 무슬림, 후자(後者)는 비무슬림의 상태를 각각 가리킨다. 이바디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무슬림은 여전히 무슬림으로 여긴다. 비무슬림은 말 그대로 유일신 신앙이 없는 사람이다. 이바디는 이 둘을 모두 멀리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육체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멀리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에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를 지배한 오만의 이바디를 두고 이슬람의 모든 종파 중에서 이바디가 가장 온건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수니나 시아와 문제 없이 잘 어울렸고,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들이 적대시한 대상은 정의(正義)롭지 못한 통치자였다. 올바른 지도자에 대한 의식이 7세기 때부터 변함없이 내려온다. 이바디는 수세기 동안 정의로운 이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금요일 합동예배를 준행하지 않았다. 금요 합동예배는 정의가 실행되는 대도시에서만 열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무슬림 금요 예배 때는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설교할 때 반드시 지역의 지배자 이름을 언급한다. 이는 오늘날과 같이 언론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지역의 실질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지금도 천주교회에서 미사 시간에 교황, 해당 성당이 속한 교구의 주교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바디는 지역의 통치자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설교 시간에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강렬한 정의의식의 발로다.
이바디,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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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연안 지도. |
그런데 코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12세기 아부 아미르 알-꾸라시는 “맨 허벅지가 드러나는” 최후의 심판일이라는 코란 68장 42절의 표현을 두고 자신의 허벅지를 치면서 “바로 여기 이처럼 진짜 허벅지”라고 설명하였다. 또 14세기 한발리 법학파의 저명 인사 이븐 타이미야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코란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설교대에서 몇 발자국 내려오면서 “내가 지금 내려오는 것과 똑같이”라고 말하였다.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이처럼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주변에서 극단주의는 결코 없앨 수 없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코란을 그렇게 읽는 IS가 2014년 6월부터 우리에게 잔인한 모습을 얼마나 보여주었는가! 극단주의자들은 문자주의에 기생해서 자란다. 이바디는 그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이바디는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니의 입장과 달리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바디는 이외에도 신(神)을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죄인을 위해 중재 역할을 한다는 수니 일반의 믿음을 거부한다. 지옥에 간 자들이 지옥 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3번째 칼리파 우스만, 4번째 칼리파 알리, 알리와 맞서 싸운 무아위야를 모두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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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한 오만대사관.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 옆에 있다. 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
오만에서 이슬람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바디의 견해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다만 이바디 관련 출판물을 후원하면서 이바디 전통을 이어 간다. 현재 오만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마드 이븐 하마드 알-칼릴리는 “이바디와 다른 종파의 차이는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슬림 사회의 통합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이미 표명한 바 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후 거대한 시아국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하여 결성된 것이 GCC다. 2011년 이래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에서 이란을 제압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아랍국가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오만은 그러한 대오에서 조용히 발을 빼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오만은 외교적으로도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직 서로 종파로 형성되기 전인 657년 시핀 전투에서 시아, 수니, 이바디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다고 볼 수 있다. 시아 이란, 수니 걸프 아랍국, 이바디 오만. 거기에 알카에다나 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슬람=극단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오만과 이바디의 사례는 이슬람 세계가 분열을 씻어내고, 타 종파, 타 종교와 화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참고로, 국내 오만 대사관은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도심 속의 작은 궁전의 모습인데 외양에서 아랍풍이 물씬 풍긴다.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기하학적인 외부 문양이 마치 종파의 조화를 상징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