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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물밑에서 급진전되는 中日관계 개선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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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 들어 中日 防災장관 회담, 차관보급 안보회담, 관광장관 회담, 자민당 간사장 訪中 등
    양국교류 급증
⊙ 1972년 中日수교 단행한 다나카 人脈, 親中的인 오키나와 등이 일본과 중국 연결
⊙ 아베의 8·15담화 관계 없이, 中日은 영토·과거사 문제 피해가며 상호 이익 추구할 것
⊙ ‘美日동맹2.0’에 이어 한국 배제한 中日화해 이루어지면 한국의 갈 길은?

劉敏鎬
⊙ 5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한일이 대립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과 중국은 정상회담을 갖고 관계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합성사진임.)
  “중국 정부가 일본인 여행객에게 선상(船上) 피란을 제안해 본인(일본인)이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 (일본인 피란 문제를) 제안한 적은 없지만, 중국 정부가 제안해서 (일본인의) 이송이 가능하게 된 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4월 7일 오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官房)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이다. 예멘에 머물던 일본인 한 명이 중국 측의 도움으로 피란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역사·영토·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사건건 각을 세운 지 오래다. 지난해 11월 신화통신이 조사한 중국인의 대일(對日) 호감도는 3%에 불과하다. 83%의 중국인이 ‘일본이 매우 싫다’고 답했다. 일본의 대중(對中) 감정도 마찬가지다. 4월 8일 프린스턴대학의 여론조사기관 PEW에 따르면, 일본인 가운데 중국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가 장관의 발언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이런 일본 정부의 자세는 한국과 비교해 볼 때 확연히 구별된다. 2009년 3월 10일 새벽 2시, 일본 남쪽 오시마(大島) 섬 주변에서 한국 선박이 침몰했다. 사건 직후 일본 해상보안청과 해상자위대가 구조에 나섰다. 강풍과 2m가 넘는 파도 속에서 이뤄진 위험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인 등 모두 16명이 실종됐다.
 
  당시 한국 외교부가 일본의 구조 작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했다. 외교부 인터넷 공식사이트에 들어가, 2009년 3월 10일 이후의 공식성명이나 발표를 전부 훑었다. 결과는 무(無). 일본 해상보안청과 자위대의 구조 노력에 대한 사의(謝意) 같은 것은없었다.
 
  2009년 3월 12일 한일 외무장관 전화통화가 15분 이뤄졌다는 자료가 있어 살펴봤지만, 실종 선원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오히려 이날 통화에서 일본 측이 한국에 감사하고 축하한다는 얘기를 전해왔다. 당시 한국 정부가 김현희와 일본인 납치자 가족 간의 만남을 주선한 데 대해 감사하고, 송상현 재판관이 국제형사재판관(ICC)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였다. 새삼스럽게 6년 전 한일 외무장관 전화통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국 외교가 이웃 일본과 비교할 때 얼마나 다른지 말하고 싶어서다.
 
 
  외교교섭과 외교정책
 
《외교》의 저자 해럴드 니컬슨.
  한일 외교의 양상을 보면 유럽 외교관 사이에 바이블로 통하는 《외교(Diplomacy)》라는 책의 핵심 내용이 떠오른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영국 외교 수장(首長)이었고 역사저술가로 유명한 해럴드 니컬슨(Sir Harold Nicolson)이 1939년 쓴 책이다. ‘외교 문제에 관한 행동양식 가이드북(A Basic Guide to the Conduct of Contemporary Foreign Affairs)’이란 긴 부제(副題)를 단 책으로, 유럽 외교의 정수(精粹)를 알 수 있는 기본서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지켜본 현장 외교관으로서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혜를 모은 책이다.
 
  니컬슨은 좋은 외교관의 필수조건으로, 정확성, 신뢰, 충성, 온화, 그리고 호감을 주는 성격을 강조한다. 유능한 외교관이 풀어가야 할 외교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기술적, 전술적 차원에서의 외교교섭, 국가적 이익과 대의명분으로서의 외교정책이다.
 
  교섭을 통해 정책이 나타난다. 교섭과 정책은 반드시 상하, 수직관계는 아니다. 교섭을 통해 새로운 정책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필자는 외교교섭은 개별적인 외교관이, 외교정책은 국가가 주도하는 외교의 영역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소프트와 하드의 차이다. 소프트로서의 외교관이 구체적인 협상을 벌인 뒤, 하드로서의 국가 간 외교가 이뤄진다.
 
  한국의 경우, 외교정책은 많은데 외교교섭은 드문 나라다. 명분과 확고한 목표로서의 외교정책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거나 아름답게 만들 외교관의 역량은 빈약한 나라다. 겉으로 드러나는 프로토콜이나 공동성명 같은 하드로서의 외교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주고 보다 더 큰 효과를 낳는 소프트로서의 세심한 외교교섭은 드물다. 외교라는 하드는 있지만,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소프트는 없다는 말이다.
 
  스가 장관의 중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소프트로서의 외교교섭의 좋은 예에 해당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얘기, 뻔한 소리라도 사의를 표할 경우 그 효과는 엄청나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교정책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이다.
 
 
  이번에도 박근혜 먼저 찾은 아베
 
2014년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를 나누는 박근혜 대통령. 아베 총리는 한국어로 “박근혜 대통령님, 오늘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으나 박 대통령은 답을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 찾아온 아베,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성공개최 감사.’
 
  3월 29일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국장(國葬)에서 이뤄진 한일 정상(頂上)의 만남에 관한 기사 제목이다.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는 외교교섭에 무심한 한국 외교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박 대통령을 먼저 찾아왔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런 아베를 ‘박 대통령 스토커’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박 대통령은 수동적이고 아베는 능동적이다. 최근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면, 사실 일본보다 한국이 더 아쉬운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베가 먼저 박 대통령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3국 외교장관 회의의 성공적 개최에 감사한다”는 덕담을 건넸다.
 
  지난달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강조했듯이 일본은 3국 정상회담에 별로 관심이 없다. 역사・종군위안부 나아가 영토 문제와 관련해, 한중 두 나라가 목소리를 합쳐 일본을 공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체면을 지켜주고, 뭔가 문을 열어둔다는 의미에서 외교장관들이 인사치레로 만날 뿐이다.
 
  3년 만에 열린 3국 외교장관 회의는 외교적 수사(修辭)로 포장된 결론만 냈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윤병세 장관이 중간에 서서 3국 간 악수를 교환했지만, 회담의 결론은 ‘한중일 3국 정상회의 빠른 시일 개최 노력’이라는 것뿐이다.
 
  ‘빠른 시일 개최’가 아니고, 빠른 시일 개최 ‘노력’이다. ‘빠른 시일’이라는 애매한 말도 웃기지만, 개최에 합의한 것도 아니다. 그 같은 노력을 위해 언제 다시 외교장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도 없다. 사실 주최국인 한국에 감사하다고 말할 만한 건설적인 내용도 없다. 아베의 덕담은 그 같은 상황에서 ‘쥐어 짜낸’ 말이다.
 
 
  북한과는 무조건, 일본과는 조건부?
 
  박근혜 대통령은 종군위안부・역사 문제와 같은 하드, 즉 외교정책에 관해 나름의 소신(혹은 고집)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고 설득할 수 있을지에 관한 소프트, 즉 외교교섭에 대해서는 거의 무심하다. 외교정책과 외교교섭이 끊어져 있는 셈이다.
 
  스토커 소리를 들으면서 매번 먼저 박근혜 대통령을 찾아와 머리를 숙이는 아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베는 2012년 12월 집권 이후 한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외교정책을 펴왔다. 그러면서도 아베는 틈만 나면 한국과의 무조건 대화를 부르짖고 있다. 아베는 한 외신기자에게 “북한 김정은에 대해 무조건 대화를 주장하는 박 대통령이 왜 자신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조건부 만남을 원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정상회담이란 조건부로 만나서는 안 된다”는 훈계조의 말도 흘린다. 한국의 국익(國益)에 반하는 행보이고 정책이지만, 아베의 외교교섭과 외교정책은 일본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 줄로 강하게 연결돼 있다.
 
 
 
3년 만에 중국 장관 訪日

 
중국 장관으로는 3년 만에 처음 일본을 방문한 리리궈 중국 민정부장.
  한국의 대일(對日) 외교는 최근 중일(中日) 두 나라 간 외교와 뚜렷이 대비(對比)된다. 한국이 역사·영토와 같은 외교정책에 올인(All in)을 하는 동안 일중 양국 간에는 외교교섭, 즉 소프트로서의 외교가 조용히, 그리고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국가 주도하의 외교정책이란 측면에서 보면 한국과 중국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소프트로서의 외교교섭이란 측면에서 보면 중일관계는 한일, 한중관계보다 한 수 위다. 외교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서로 간의 물밑을 오가는 외교교섭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영토와 역사 문제로 각을 세우고는 있지만, 상호 이익을 증진할 창(窓)은 열어두고 있다. 한반도 머리 위를 넘어서 이뤄지고 있는 일중 두 나라의 소프트 외교를 살펴보자.
 
  먼저 지난 3월 14일 센다이시(仙台市)에서 열린 유엔방재(防災)세계대회다. 반기문 사무총장도 참석한 이 회의에는 리리궈(李立國) 중국 민정(民政)부장도 참석했다. 아베 등장과 함께 중국 장관의 일본 방문은 전면 중단됐었다. 리리궈 부장은 중국 장관으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을 찾은 것이다. 리 부장은 야마타니 에리코(山谷えり子) 방재장관과 만나 중일 간 방재협력 문제도 논의했다.
 
  3월 19일에는 도쿄에서 차관보급 일중안보회담이 열렸다. 4년 만에 열린 회담이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自衛權), 적극적 평화주의, 중국의 국방비 증강과 영토 문제가 중심 이슈였다. 평행선을 달리는, 양국의 입장차만 확인한 자리지만, 일중 안보관계자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고,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다.
 
  3월 21일 서울에서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의가 열렸다. 이 기간 중 일중 외교장관이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 어떤 내용이 거론됐는지는 알 수 없다.
 
 
  中日 집권당 간 대화도 再開
 
  3월 23일 자민당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간사장, 공명당의 이노우에 요시히사(井上義久) 간사장이 베이징을 공식 방문해 왕자루이(王家瑞) 대외연락부장, 공산당 서열 제4위의 위정성(兪正聲)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과 만났다. 2009년 이래 중단된 일중여당교류협의회가 재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올해 중에 중국 지방도시에서 일중여당교류협의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당초 중국이 가을에 열자고 제의했지만, 자민당 측이 9월 자민당 총재선거 이후의 인사이동을 이유로, 겨울에 치르기로 했다. 일중 양국은 아무리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1년에 한 번씩은 여당끼리 만나자는 데 동의한다.
 
  4월 8일 자민당 총무회장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가 중국 하이난(海南)에서 열린 보아포럼에 참석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만났다. 보아포럼 이사장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도 동석했다. 30여 명의 일본인과 만난 자리에서 시진핑은 “양국 간의 민간교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4월 9일, 중국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 사절단이 일중의회교류위원회 참가를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부총리급인 전인대 부위원장 지빙쉬안(吉炳軒)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다. 중국 부총리급 이상 요인의 일본 방문은 센카쿠(尖閣)열도 문제가 터진 2012년 9월 이후 처음이다. 사절단은 중의원 의장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와 민주당 대표인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와 만났다. 자민당 측 국회의원과도 만났다. 영토 문제, 중국의 국방비 문제 등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양국 정치인들이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4월 11일 오키나와(沖縄) 지사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가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1993년 고노 담화로 잘 알려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前) 중의원 의장이 이끄는 일본국제무역촉진협회 관계자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중국 요인들과 만나 경제교류에 대해 논의했다.
 
  오키나와는 미군시설과 관련해, 중앙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고, 중국에 대해서는 관계정상화를 주장하고 있다. 1997년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가 망명 직전에 주체사상 강연을 위해 들른 곳이 오키나와일 정도로 이 지역 정계(政界)인사들 중 상당수가 사회민주당(구 사회당)이나 공산당과 연결돼 있다. 오키나와는 평소에는 일본 정계 내에서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지만, 일중관계가 어려울 때는 협상카드가 되기도 한다.
 
 
 
日관광업자 3000명 訪中

 
  4월 11일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관광장관 회의에는 리진짜오(李金早) 중국 국가여유(旅遊)국장이 참석, 오타 아키히로(太田昭宏) 국토교통장관과 만나 양국 간 관광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과거에는 일본 관광객의 중국행이 압도적이었지만, 최근은 역전됐다. 설날연휴(春節)가 낀 올해 2월 중 일본을 찾은 중국 관광객은 32만1000여 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6배가 증가했다. 2월 한 달 동안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은 51만6000여 명이었다. 지난해에 비해 54.8% 증가했다.
 
  아직까지는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일본의 관광 관계자들은 빠르면 내년 중으로 한국보다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본 정부가 중국인을 대상으로 비자를 쉽게 발급하고 8% 소비세 면세(免稅)를 내걸면서 중국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일본을 찾은 중국인 방문객은 152만명이지만, 올해는 적어도 400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올해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500만명으로 예상된다.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급증하는 반면, 중국을 찾는 일본인은 급감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측이 양국 간의 관광교류에 매달리는 양상이다.
 
  5월 중에도 양국 간 교류증진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다. 하나는 5월 상순 열릴 일중우호연맹의 베이징 방문이다. 회장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를 단장으로 해서 전직 재무장관 등 경제 관련 중의원 10여 명이 동행할 예정이다.
 
  5월 하순에는 자민당 니카이 총무회장의 인솔하에 3000명의 관광업자가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일중 간의 관광교류와 2020년 하계올림픽과 관련된 관광특수(特需)를 겨냥한 방문이다. 니카이 회장은 지난 2월 13일에는 한국을 찾아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 한일 간 관광교류 증진을 역설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관광업자는 1400여 명이었다. 방문단 규모만을 놓고 볼 때 중국에 대한 일본관광업체의 기대가 한국의 두 배 이상인 셈이다.
 
  일중교류가 재개된 계기는 지난해 11월 13일 일중정상회담에 따른 것이다. 시진핑과 아베는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기간 중 잠시 만났다. 당시 공표된 사진을 보면 시진핑은 아베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를 가르는 아베의 멋쩍은 웃음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후 당시 합의한 대로 실무 차원의 양국 간 교류는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中日은 상호의존관계
 
  종전(終戰) 70주년인 오는 8월 15일, 역사 문제와 관련해 아베가 어떤 발언을 할지에 따라 이후 중일관계의 흐름이 잡힐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필자는 다르게 본다. 아베가 어떤 식의 발언을 해도 중국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진핑이 아직 국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권력형 비리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시진핑 반대 세력이 있다는 의미다. 반일(反日)은 그 같은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아베가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얘기를 할 리 없지만, 설령 아베가 중국의 역사관에 동의한다 해도 시진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도 비슷하게 나아가고 있지만, 중국에 있어서 일본은 국내 정치의 연장선일 뿐이다. 일본이 원인 제공을 하는 측면도 있지만, 시진핑도 자신의 권력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일 슬로건에 의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8월 15일 이후 일중관계가 한층 더 악화될 것이란 의미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해럴드 니컬슨의 외교논리를 빌리자면, 외교정책에 관한 부분은 각을 세울 가능성이 높지만, 거꾸로 외교교섭에 관련된 것은 화해무드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하드로서의 역사·영토·군사 문제에 관한 갈등은 지속되겠지만, 소프트로서의 양국 간의 인적 교류는 상당히 진전될 것이다. 명분만 앞세운 외교정책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동안 양국이 잃는 부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경제다. 중국 경제 성장이 한계에 왔고, 앞으로는 버블 경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란 것은 국제 경제계의 상식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일본은 그런 상황에서 빨리, 확실히 그리고 장기적이면서도 대규모로 함께 일할 수 있는 나라다. 중국에서 발을 빼는 일본 기업의 수가 늘고 있지만, 중국에 기대를 거는 기업도 많다. 정치를 빼고 서로 간의 경제적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양국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992년 노태우 대통령 때다. 일본은 한국보다 20년 전인 197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사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화(中華)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혀온 나라가 일본이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원한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깊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한국이 모르는 부분을 많이 공유(共有)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이 알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과, 일본이 알고 있는 중국, 중국이 알고 있는 일본은 여러 각도에서 차이가 난다. 인식의 폭이나 깊이가 전혀 다르다. 때문에 중국과 일본은 서로 전쟁에라도 들어갈 것처럼 으르렁거리지만,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한국보다 더한 반일(反日)정서로 무장한 듯한 중국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과 대화의 장(場)을 넓혀가고 있다. 종군위안부와 독도 문제로 인해 사실상 일본에 대해 문을 닫아걸은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일본 對中 외교의 저력
 
1972년 9월 20일 다나카 일본 총리는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함께 양국 국교정상화를 단행했다.
  전후(戰後) 일중 양국 간의 교류사에는 두 번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다. 1972년과 1992년이다.
 
  1972년은 일중 국교정상화의 해이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로 알려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양국 국교정상화의 주역이다. 다나카는 취임 직후인 1972년 9월 25일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닷새 뒤인 9월 29일, 두 나라는 정식수교(修交)를 선언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 공항에서 연출된, 그 유명한 ‘닉슨 쇼크’가 있은 지 7개월 만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양국 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고립되어 있던 중국을 국제무대에 올라오도록 도와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79년이다.
 
  수교 당시 중국은 일본에 전쟁배상금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중국과 수교한 이후 ‘과거사 배상’ 차원에서 대규모 국제협력개발원조(ODA)를 중국에 제공했다. 1972년 이래 매년 10억 달러 가까운 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아베가 줄이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지난해에도 일본이 중국에 제공한 ODA는 6억 달러에 달한다.
 
  현재 일본 정계의 중국통(中國通)들은 대부분 다나카 전 총리와 연결된 사람들이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 고무라 마사히코 전 외무장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중국의 ‘라오펑요우(老朋友)’들이다.
 
  최근에는 뜸해졌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중국 고관(高官)이 일본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다나카 전 총리의 집을 찾아갔다. 다나카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다나카의 딸로 중의원과 외무성 장관을 역임한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와 만나 1972년 상황을 회상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인들은 다나카 전 총리에 대한 마음을 ‘물을 마실 때는 함께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渴水不忘控井人)’라는 중국 속담을 빌려 표현한다. 다나카 전 총리-다나카 마키코-다나카 파벌 정치인으로 이어지는 인맥은 일중 외교의 저변에 흐르는 깊은 강물과 같은 것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위기시에는 힘을 발휘한다.
 
  1992년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중국 방문도 일중관계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키히토 천황이 중일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중국을 공식 방문한 1992년 무렵 중국은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과 EU는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들어갔다. 1979년 개방 이후 성장세를 유지하던 중국 경제는 급추락했다. 소련·동구(東歐)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도 중국에 고립감을 안겨주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밀리에 천황의 방중(訪中)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해주었다. 중국을 방문한 일본 천황의 행보는 전 세계에서 중요한 뉴스로 다루어졌다. 이후 미국, EU는 대중 경제제재를 슬그머니 풀었다. 천황의 방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중국이 극도로 고립되어 있을 때 일본이 준 도움을 중국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 문제 등을 보면 일중 양국은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양국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데에는 양국이 1972년과 1992년에 판 ‘우물’이 있기 때문이다. 외교정책과 외교교섭을 하나로 연결해 최선을 다하는, 일본 특유의 외교력도 양국관계를 극단에 이르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美日동맹 2.0’
 
  4월 29일 아베는 미・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한다. 현재 일본의 우향우(右向右)는 미국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회 백악관 국무부・국방부는 ‘미일동맹 2.0’을 통한 ‘리밸런스(rebalance)’ 정책을 확고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2012년 오바마 행정부가 결정한 ‘아시아회귀전략(Pivot to East Asia)’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일본을 통한 중국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다. 냉전 당시 미국 대외(對外)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던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의 봉쇄정책이 21세기 아시아에 재(再)등장한 것이다.
 
  중국에 대한 완전한 봉쇄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적어도 중국이 주변국을 무력(武力)으로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견제장치를 일본과 함께 추진하고 있다. 4월 말 아베의 연설은 대중견제, 나아가 중국 봉쇄를 위한 ‘미일동맹 2.0’ 선언문이 될 것이다.
 
  한국이 집중하는 역사・종군위안부·독도 문제는 미국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다. 아베는 역사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겠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그것은 ‘미일동맹 2.0’과는 무관한 것이다. 아베가 연설을 한 후 일부 정치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하겠지만, 대세와는 무관하다.
 
  중국은 남중국해 산호섬을 아예 군사기지로 만들면서 미국의 해양 패권(覇權)에 도전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중동(中東)에서 일본까지 1만2000km에 달하는 석유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일본도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의 미 의회 연설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년 동안 보여준 ‘슬로건 외교’의 참패(慘敗)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이자, 앞으로 도래할 ‘미일동맹 2.0’의 실체를 실감케 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미동맹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어떤 식으로든 ‘미일동맹 2.0’과 연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국은 ‘미일동맹 2.0’ 체제에서 ‘2중대’로 전락할 수도 있다. 늦으면 늦을수록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 아래서 한국은 하부구조로 전락할 것이다.
 
 
  중국에 ‘동맹’은 없다
 
  걱정되는 것은 미일관계만이 아니다. 8월 15일 종전 70주년 기념식이 끝난 뒤 진행될 일중 간의 급속한 관계개선도 걱정이다. 경제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관계개선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역사·영토 문제 등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뤄지는 소프트로서의 외교교섭도 속도를 더해갈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통해 동북아 문제를 풀어나가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3국 정상회담에 앞서, 일중 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것이다. 설령 박 대통령 주도하의 3국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도 3국 정상의 기념촬영이 끝나는 즉시 일중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다. 두 나라 간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배제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이미 지난 3월, 3국 외교장관 회의를 통해 증명됐다.
 
  워싱턴 내 일본인 전문가들의 전망이기도 하지만, 한중일 3국 간의 관계개선에 앞서 일중 두 나라의 관계개선이 먼저 이루어질 것이다. 세 나라 간의 대화보다는, 두 나라 간의 대화가 더 빠르고 쉽다.
 
  1972년 중일수교, 1992년 일본 천황의 방중에서 보듯, 일본과 중국 두 나라는 대국적(大局的) 차원의 협상을 경험해 본 나라다. 한반도 머리 위에서 이루어질 일중 양국 간의 협상은 ‘미일동맹 2.0’보다 한국에 주는 충격이 더 클 수 있다. 일중 협상의 결과는 싫든 좋든 곧바로 한반도에 밀어닥친다. 중국과 일본의 이익이 한국의 국익과 배치(背馳)될 수도 있다. 한국이 친구라고 믿고 있는 중국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일본으로부터 얻을 이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도 순진하다.
 
  중국은 최근 한국전쟁 당시 100만명 이상의 자국군(自國軍)을 희생시켜 가면서 지켜낸 ‘혈맹(血盟)’ 북한을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란 나라에는 아예 동맹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중국에는 중국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나라다.
 
 
  한국이 믿고 갈 나라는 미국
 
  한국 외교부장관은 “한국이 강대국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면서, 미국과 중국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 비교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친미(親美)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은 ‘결코’ 동일선상에 둘 수 없는 나라다. 친미·반미 이전에 미국은 60년 이상의 동맹국이다.
 
  경제적 중요성과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이유에서 중국과 미국을 동일선상에 두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중국 경제가 나빠질 때, 혹은 한국 이상 가는 경제강국이 중국에 접근할 때, 한국은 어떻게 될지 묻고 싶다. 설령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할 경우, 통일 이후 중국이 자신의 지분(持分)을 요구하고 나서면 어떻게 감당할지 묻고 싶다.
 
  미국은 그 같은 걱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다. 자신을 공격했던 일본을 경제·군사·외교 파트너로 삼는 나라가 미국이다. 완벽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믿고 함께 갈 수 있는 동맹국이 미국이다.
 
  아베의 미 의회 연설과 8월 15일 이후부터 본격화될 일중 관계개선은 한국 외교에는 엄청난 시련이 될 것이다. 한국이 믿어왔고, 믿고 싶어했던 모든 상황과 환경이 거꾸로 돌아갈 것이다. 한국이 과연 이런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잃어버린 외교’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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