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에 패한 후 맥아더의 통치 아래서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헤겔이 말한 ‘主-奴 변증법’의 主-奴관계로 들어가게 됐다. 과거 청산을 모르는 원천에 奴的 국가 일본이 있는 것이다.
-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일본군 대표. 이후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노적(奴的)입장으로 전락했다.
주인에 대한 순종과 주인이 내린 계율을 지키는 것이 노예도덕의 모든 것이다. 노예는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노예인간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노적(奴的) 인간은 독립인격의 윤리적 자립이나 덕성의 개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노적 인간은 자기를 회복하여, 윤리적으로 재활의 발판을 얻지 못하는 한, 과거를 돌이켜 보는 반성이나 참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글은 과거 청산 못한 것이 한일(韓日) 공통의 국익에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을 앞에 하여, 반성과 참회를 끝없이 거부하는 일본적 심성의 연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거기에 극복책이 있을 것이다. 입론(立論)을 위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개념용구를 빌릴 것이다.
일본쪽에 과거 청산 자세가 없이 시작된 1950년대의 한일회담은 세 걸음을 못 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6·25전쟁 중이기도 해서, 극동에 강력한 반공전선 형성을 바라는 미국측의 작용으로 도쿄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다.
70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국부(國父)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오만했던 귀족적 외교관 출신의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만났다. 이 대통령은 요시다 수상에게 “일본은 40년에 걸친 조선통치를 한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요시다는 “그건 일본 군벌(軍閥)이 한 것이다”라며 피해 갔다.
외교적 말놀음에 그친 일본
15년 끈 국교(國交)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이었던 한일합방조약의 무효 확인을 명문화하지 못하고 끝났다. 과거 청산 없이 국교는 정상화된 것이다. 작년에 한일 강제합방 100년의 해를 넘기면서, 일본 수상이 한마디 했지만 합방조약의 강제성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조약의 원천무효를 천명하지도 못했다.
일본쪽에서는 그동안 과거문제를 두고 유감이다, 반성이다, 통석(痛惜)이다, 사과다, 사죄다로 말을 굴려 왔지만, 청산해야 할 근본원천을 그대로 둔 채 이말 저말 해 봤자 결국은 외교적인 말놀음에 그칠 뿐이었다. 외교가 두 민족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런데 경제로 세계정상까지 갔던 일본이 한국 사람들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얼씬거리는 사이에 아시아대륙에 세계사적 대변전(大變轉)이 일어났다. 서구인들이 오래 ‘잠자는 사자’라 했던 중국이 드디어 잠을 깨어 일어난 것이다.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의 접점에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세계평화의 부동의 안정축이 불가결한 형국인데 그 잘나가던 일본이 아직도 과거를 털지 못해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들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은 어쩌다가 과거청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는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그렇게 본받고자 했던 독일이 철저한 과거청산으로 이웃 신뢰를 회복하고 통합유럽에 앞장서고 통일까지 가게 된 것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과거청산을 하고 통일까지 한 독일은 지금부터인 것 같은데, 일본은 이제 내려가려 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일본이 과거청산을 모르는 나라가 된 연유를 알아보고 제언 한마디 했으면 한다.
主從관계의 구조화, 독립후에도
일본은 침략전쟁인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을 아우름)과 식민침탈을 통해 조선인 약 100만, 중국인 약 1500만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전쟁에 죽은 일본사람들은 300만명이나 된다. 일본을 참담한 패전으로 몰고 간 똑똑한 제국엘리트들 입에서 이웃을 향한 반성이나 참회의 언사를 듣지 못한다. 일본사람들은 어찌된 사람들이란 말인가.
일본은 패전하자 연합군이라지만 주로 미국에 점령통치를 당했다. 미군에 의한 점령통치는 제국일본의 비(非)군사화와 민주주의화를 지향하여 관대하고 시혜적이었다.
그러나 이 점령통치를 통해 일본이란 나라 됨됨이에 어떤 질적(質的)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아메리카 메시아니즘의 화신(化身) 같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효율적인 통치가 일본에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동안의 눈들이 이를 넘어서서 맥아더가 일본사람들의 혼(魂)에 일으킨 변화를 잘 짚어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
점령통치에서 점령군과 피(被)점령국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주종(主從)관계이다. 일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점령 통치관계 연구의 압권이라 할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는 그 때 한 저널리스트가 일본의 수상들은 모두 점령군에게 ‘예스맨’이라고 썼다가 검열당국에 삭제당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점령국 수상으로서는 빨리 평화조약을 맺고 독립이라는 조기 강화(講和)가 우선적인 정치목표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 후에도 의식의 주종관계가 미일(美日)관계 속에 구조화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헤겔의 거작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개념용구를 빌리고자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 철학을 연구한 철학자 알렉산더 코제브를 따라 힘자라는 대로 주-노(主-奴) 변증법을 더듬어 일본의 점령통치 분석에 도움받을 수 있는 논리구조와 개념용구를 얻고자 한다. 이하에서 간추린다.
처음으로 존재를 맞닥뜨린 두 인간은 눈앞에 있는 타자(他者)의 승인을 바라고, 목숨을 건 투쟁 속에 뛰어들게 된다. 이 인간의 존엄을 건 원초적 투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을 관철한 자는 주(主·주인)가 되고, 죽음이 두려워 생명을 건지고자 물러선 자는 노(奴·노예)가 된다.
이 ‘승인을 구하는 투쟁’의 간단없는 지향이 역사를 전진시키는 에너지인 것이다. 주노(主奴)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승인 투쟁이므로 상대의 목숨을 뺏는 것은 의미가 없다. 승인해 줄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主) 입장에 서게 된 자는 노(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그 투쟁성만 파괴하고 노(奴)의 생명과 의식은 남겨 둔다.
노(奴)는 생사(生死)를 건 투쟁에서 주(主)가 살려 남겨 준 목숨을 감수했기에 노(奴)는 상대인 주(主)에게 종속된다. 그는 죽음보다는 예속을 택한 것이다.
이상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전반이다. 후반에서는 노(奴)의 노동에 의해 해방의 계기가 만들어지고 주-노(主-奴) 입장의 전반적 역전이 일어난다.
주(主)는 명령하고 지배하며, 노(奴)는 복종하고 봉사한다. 노(奴)의 행위는 본래적으로 주(主)의 행위이다. 노(奴)가 물(物)을 소유함은 향수(享受)를 위한 것이 아니고 가공·노동하기 위해서다. 노(奴)는 노동하고 주(主)는 향수한다.
노(奴)의 복종과 봉사는 노동에 의해서다. 노동은 형성하고 교화하고, 세상을 변모하고, 끝내는 자신을 변모시킨다. 주(主)는 향수하기 위해 노(奴)의 노동에 의존하므로 변화가 없다. 노(奴)는 노동에 의해 포기했던 자기 자신에 도달하고 자기를 회복한다. 이리하여 노(奴)의 의식은 노동 속에서 자기 해방의 계기를 맞는다.
헤겔은 노(奴)가 자기의식을 높여 해방에까지 달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죽음의 외포(畏怖)이며, 주(主)에의 두려움임을 강조한다. 외포에 의한 봉사, 복종, 노동이라야 노(奴)의 의식은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구약 시편(111:10)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은 ‘봉사와 노동과 함께 외포(畏怖)가 노(奴)의 자립성을 가져오는 동인(動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주-노(主-奴)의 변증법이 보여주는 것은, 종국에서 주-노(主-奴)는 입장을 뒤바꾸어 역전한다.
주(主)는 노(奴)가 일해 얻은 바를 향수하고 노(奴)의 노동의 결과물에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主)는 드디어 노(奴)에 종속된다. 노(奴)는 주(主)가 향수하는 물(物)을 가공·형성함으로써, 교양을 결과함으로써, 물(物)에 대해 주(主)의 지위를 얻고 이를 통해 주(主)에 대해서도 주(主)의 자리를 얻게 된다. 노(奴)의 의식은 노동에 의해 스스로의 힘(力)과 능동성에 눈뜨고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드디어 전관계의 역전이 일어나서 주(主)는 노(奴)에 의존적으로 되고, 노(奴)는 주(主)에 비의존적으로 된다.
주-노(主-奴)로 출발했던 양자는 결국 상호승인의 단계 앞에 도달하여 역사는 완결된다.
예나에서 나폴레옹의 대포소리를 들으며 원고를 썼다는 헤겔은 주-노(主-奴) 역전의 경험적 사태를 세계사 속에서 제시한다. 이상이 주-노(主-奴) 변증법의 줄거리다.
태평양전쟁은 ‘승인전쟁’
태평양전쟁(1941~1945)은 명분의 시비를 제쳐두고 보면, 정확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승인전쟁이었다.
일본제국은 이 전쟁에서 “백인 블록의 ‘노예체제’로부터 태평양 지역과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의(大義)를 앞세웠고, 아메리카는 “세계를 정복하고 노예화하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응징”한다는 정의를 내걸었다.
청교도(淸敎徒) 국가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과 야마토(大和) 민족 세계제일주의가 서로를 향해 각기의 명분을 ‘승인’하라고, 생사를 건 투쟁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청교도 국가와 야마토 민족의 ‘존엄’을 건 투쟁이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월 9일 오전 4시, 소련의 모스크바 방송이 대일(對日) 선전을 포고했다. 이날 정오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날 밤 11시25분, 일본 황실의 지하 방공호에서 천황 임석하에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항복, 즉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찬반 동수(同數)였다, 수상이 천황의 결단을 유도하여 수락을 택했다. 이때 쇼와(昭和) 천황은 이유를 들고 있다. 이 속에 다음 구절들이 보인다.
“…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무고한 국민들의 고뇌만 늘어나고, 드디어는 민족 절멸이 될 뿐만 아니고, 세계 인류를 한층 불행에 빠뜨리게 된다. 고굉의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거두어 ….”
천황의 얘기는, 민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헤겔의 ‘승인전쟁’에서 빠져나와 몸을 지키겠다는 얘기가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함으로써 일본은 미국과의 사이에, 정확하게 ‘주-노(主-奴) 변증법’의 주-노(主-奴)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승(戰勝) 연합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시작되었다. 주재자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 주로 미국의 의지를 대표했다. 점령군은 일본정부를 없애지 않고 살려 놓고서 거기에 명령했고, 일본의 복종을 받아 냈다. 주-노(主-奴) 변증법적 주종(主從)관계가 점령통치 속에 있었다.
요시다 정치가 남긴 空洞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어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주의화를 본질적 과업으로 했던 점령통치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때에 수상 요시다(吉田)가 군비는 밀쳐 놓고 경제위주의 부국(富國) 정책을 펼친 데다가 6·25사변의 특수(特需)가 닥쳐, 독립한 일본은 발빠르게 번영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립한 일본에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남았음을 지적하는 눈들이 있었다.
한 정치평론가는 “요시다 시대의 가장 커다란 정신적 공동(空洞)은 내셔널리즘의 결여와 국민적 사명감의 상실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藤原弘達, <吉田茂 - その人その政治>)고 했다.
집권 마지막 무렵, 국민여론의 대대적 지탄 속에 있던 요시다의 정치를 일본국민에게 살 길을 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소장 정치학자가 있었다. 요시다는 무거운 정치 선택인 재(再)군비 거부와 분리 강화로 패전 일본의 구체적 국익을 챙겼다는 것이다(《宰相 吉田茂》, 高坂正堯).
그러나 이 소장 학자도 일본인들에게 남은 ‘정신적 진공감’을 지적하고 있다. 점령통치 속에 있었던 민주화 개혁을 통한 실질적 혁명에 국민의 주체적 결단의 결여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적 진공감’은 국민의 주체적 결단과 무관하게 국민의 사는 방식이 정해져 버린 것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앞에 나왔던 미국의 존 다우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한 일본의 독립을 ‘종속적 독립’이라 했다.
독립했지만 “일본은 군사적으로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시에 종속되어 있어서 외교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종속되어 왔다”고 지적하는 다우어 교수는 그동안의 일본의 앞뒤 안 가린 경제성장 몰두 그 자체가 상처받은 내셔널리즘 때문이라 하고 있다.
패전 일본의 ‘구세주’ 맥아더
위에서 본 독립 후 일본국가가 갖는, ‘비어 있는 것’에 관한 지적들은 단편적이고 일면적이다. 점령 일본에 본질적 변화의 핵을 짚어 내지 못하므로 그 출구를 제시할 수도 없다.
맥아더는 점령통치를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을 향해 항구적 노적(奴的) 국가이게 하는 조치에 손을 쓴 것 같다.
주-노(主-奴) 변증법에 따라 ‘노적 국가’를 규정해 본다. 노(奴)는 사생을 건 투쟁에서 존엄보다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노(奴)는 주(主)의 현존하는 외포(畏怖) 앞에서, 생명은 살아 있으되 적대성은 제거된 존재이다. 그리고 주(主)에 의존하고 노동한다. 항복하고 점령당해 무장해제당한 국가, 그리고 황금적 국익만 추구하는 나라는 ‘노적 국가’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미군에 점령당한 일본은 노적 국가가 된 것이다. 그저 그런 얘기다.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점령통치의 주재자 맥아더가 패전의 폐허 속에 허우적거리던 일본과 일본사람 위에 문자 그대로 구세주로 임했으되, 그 점령통치는 독립 후의 일본에 영속적인 ‘노적 국가’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점령통치 속에서 맥아더는 일본의 보통사람들에게 숭배와 사랑의 대상이었다. 1946년 9월부터 해임 직후인 1951년 5월까지 맥아더 앞으로 보내진 일본사람들의 편지와 엽서는 44만여 통에 달했다. 사령부 요원들에 의해 번역되고, 분류되어 처리되었다(《敗北を抱きしめて》).
그 모두는 하나같이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 그의 ‘한없는 관대함’에 대한 아낌없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神)과도 같은 고귀한 자비’라 떠받들었고, ‘살아있는 구세주(救世主)’라 하는 데 주저치 않았다.
고베(神戶)의 한 단체는 신약(新約)의 산상수훈(山上垂訓) 장면을 일본화(日本畵) 풍으로 그려 보내면서, ‘맥아더 원수의 지도는, 참으로 이 그림 속에 표현된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고 찬미하는 편지를 함께했다.
뭉뚱그려 보면, 맥아더는 악몽 같은 전쟁으로부터 일본사람들을 건져냈다고 숭앙받았고, 외국 군인에 의한 점령이란 미지(未知)의 사태에 겁먹은 일본인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었다고 감사를 받았다.
많은 일본 여성들은 천황이 구름 속의 존재였다면, 맥아더를 보다 근접성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여성들이 보낸 편지의 노골적인 한 구절에 담당관들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다수(多數)에 밀려 별도의 분류항목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항목은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였다 한다(《敗北를 껴안고》, 존 다우어).
재임 5년8개월이 지난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되었을 때, 평소에 리버럴한 《아사히(朝日)신문》(1951년 4월 12일자)이 <맥아더 원수를 아쉬워한다>라는 사설을 썼다. 사람들의 감동을 불렀다. 존 다우어가 인용한 이 사설은 맥아더가 일본에서 했던 일을 압축해서 알려준다.
“우리들은 종전(終戰) 이래 오늘까지 맥아더 원수와 함께 살아왔다. … 일본 국민이 패전이라는,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사태에 직면하여 허탈상태에 빠졌을 때,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어떻게 좋은가를 알려주고 일본국민을 이 밝은 길로 친절히 인도해 준 것은 맥아더 원수였다. 어린이의 성장을 기뻐하듯이 어제까지 적이었던 일본국민이 한걸음 한걸음 민주주의에의 길을 밟아가는 모습을 기뻐하며, 이를 줄곧 격려해 준 것도 맥아더 원수였다.”
유력지 《마이니치(每日)신문》(1951년 4월16일자)은 맥아더의 전용기가 하네다공항을 뜨는 정경을 전하면서, 흥분과 감동이 범벅이 되어 절규하듯 써댔다.
“아아, 맥아더 원수, 일본을 혼미와 기아로부터 구출해 준 원수, 원수! 기창 너머로 푸른 보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올해의 결실은 풍요하지요. 그것은 모두 원수의 5년8개월에 걸친 노력이 내려준 것이고, 동시에 일본국민의 감사의 표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魂의 승리를 지향했던 군인 맥아더
이상의 일본 최유력지 두 신문이 매긴 맥아더 성적표는 우리에게 맥아더가 패전 일본에 강림하여 도쿄만의 미조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을 받은 후 행한 연설을 상기케 한다.
“우리들 주요 참전국의 대표는 여기에 모여 평화회복을 위해 엄숙한 합의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 상이한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에워싼 다툼은 세계의 전장에서 해결되었고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지구상의 대다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우리들은 불신과 악의와 증오의 정신을 안고서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승국과 패전국이 손을 잡고서, 우리들이 기여하려는 신성한 목적이 부수하는 더 한층 높은 위엄을 향해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책무이다. ….
이 엄숙한 식전을 기회로 하여 과거의 만행으로부터 빠져나와 신뢰와 이해 위에 세워지는 세계, 인간의 존엄 및 인류가 끌어안아야 할 희망, 즉 자유와 관용 및 정의의 실현을 위해 바쳐지는 세계가 수립되는 것이야말로 나의 최대의 소망이고, 실로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이기도 하다.”(《日米戰爭と戰後日本》, 五百旗頭眞)
양대 신문이 제시한 맥아더 통치의 도달점과 통치의 시작 부분에 있었던 미조리 함상의 스피치를 겨눠 보면, 그가 인류의 이상을 스스로의 정치목표로 하여 영웅적 실천력으로 추구해 들어간 불퇴전의 신념가임을 알게 된다.
그의 해임 시점이 태평양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던 한국을 인천상륙 작전으로 살려낸 지 6개월 남짓한 때였음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맥아더는 무력(武力)을 넘어 혼(魂)의 승리를 지향했던 군인으로 보인다. 미국으로 돌아간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의 후배들에게 했던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다.
“용감함과 인내 많은 전사(戰士)이면서도, 마주 싸운 적이 무릎을 꿇고 화(和)를 빈 다음에는 패자에 대해 자애를 갖는 것이 아메리카군(軍)의 자랑스런 전통인 것이다.”
평화헌법과 맥아더
맥아더가 점령통치에서 지향했던 평화주의의 극치는 새 일본헌법 9조인 평화조항 속에 구현되어 있다. 이 조항은 전쟁포기와 전력(戰力) 불보지(不保持)를 선언하고 교전권(交戰權)을 부인하고 있다.
새 헌법의 초안은 맥아더가 1946년 2월 지시하여, GHQ 요원들이 1주일 걸려 성안한 것을 일본정부가 1946년 3월 자안(自案)으로 발의하여 개정절차를 밟았고, 1947년 5월부터 시행되었다.
많은 역사가와 연구자들이 평화헌법, 그중에서도 제9조의 성립과정에 대해서 쓰고 있다.
맥아더 원수와 당시의 일본수상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의 1946년 1월 24일의 3시간 만남에서 신헌법 9조는 성안되었다 한다. 논란은 주로 초안의 전쟁포기 선언을 맥아더-시데하라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입에 올렸느냐는 것이다.
기록에 철저한 외교관 출신 시데하라가 3시간 만남에 대해 단 한 줄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끝내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맥아더의 회고록은 “시데하라가 입을 열었다” 하고 있는데, 일본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믿지 않으려 한다.
이날의 만남은 급성폐렴에 걸렸던 시데하라가 그 무렵 막 개발되어 미국측에만 있던 페니실린을 맥아더가 제공하여 살아나게 되자 인사차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그 전후에 천황과 천황제의 온존을 두고 심각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天皇의 ‘인간선언’
이해(1946년) 초 처음으로 천황이 국민에게 연두조서(年頭詔書)를 발표했다. 유명한 천황의 <인간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천황은 스스로의 신격(神格)을 부정했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아라히토카미)이라 하던, 전시(戰時) 중의 통념을 천황 스스로 부정해 버린 것이다. 점령기간 중에 여러 가지 개혁선언이 있었지만, 현인신(現人神)을 위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던 일본사람들한테 이 선언만큼 쇼크를 준 것은 없었다고 한다(<天皇と東大>, 立花隆).
이 천황의 조서는 먼저 GHQ에 의해 기초되었고 시데하라 내각과의 사이에서 번역, 수정의 왕복이 있었다. 천황 존재의 유지를 필요로 했던 GHQ의 천황 이미지 개선 의도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불과 10여일 전 연말에는 GHQ로부터 신도지령(神道指令)이 있었다. 신사(神社)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끝내게 하고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지령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과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대동아전쟁의 슬로건이 팔굉일우(전 세계를 하나의 지붕 밑에 둠)였다. 팔굉일우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세계제국=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을 세운다’는 뜻이었다.
GHQ는 포츠담선언의 정신에 따라 일본을 비군사화함에 있어서, 선민(選民)사상적 독단이나 과대망상에 불과한 그들의 신화적(神話的) 세계인식을 침략전쟁의 연원으로 보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들어갔던 것이다.
맥아더는 한편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의 결론을 받아 1946년 1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일명 동경재판) 설치를 명해 놓고 있었다.
시데하라가 1946년 1월 24일 맥아더를 만났을 때 이미 기가 많이 죽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수상이 직접 뒷바라지해야 하는 연두의 천황의 ‘인간선언’의 쇼크에다가, 1월 4일에는 실력 각료인 내무상과 관방장관을 위시한 4각료의 공직 추방령이 GHQ로부터 떨어졌다. 병중이기도 했지만 더할 수 없는 굴욕으로 받아들인 시데하라는 정권을 던지려 했다. 추방령을 받은 각료들이 “대안(代案)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할 때”라고 말려, 번의(翻意)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데하라에게는 패배의 실존적 수용이 있었고 그 내면에 문민(文民)의 패전의식이 자리 잡았다 할 것이다. 주-노(主-奴) 변증법으로 보건대, 주(主) 앞에 존엄을 버리고 추종키로 한 노(奴)의 확실한 등장이 있었다 하겠다.
전쟁포기와 천황제 보전
이런 시데하라가 맥아더가 준 페니실린으로 목숨을 건진 75살의 노구를 끌고 맥아더를 만난 것이다.
바로 그때는 천황문제와 헌법문제가 최고의 정치현안이었을 때였다. 맥아더는 연합국의 반(反)천황 여론이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GHQ의 상부 의결기관으로 출발하게 될, 11개 연합국으로 구성되는 극동위원회의 분위기가 천황의 전쟁책임을 두고서 심히 불온하다는 것, 맥아더 본인은 어떻게든 천황 호지(護持)를 하기 원하나 언제까지 이 자리에 버틸지 몰라 매우 불안하다는 것, 도쿄 전범(戰犯)재판을 앞두고 앞으로 등장할 간섭기관과 연합국 여론이 심히 우려스럽다는 것, 군사력을 전혀 갖지 말고 전쟁포기를 선언하는 등으로 흠 잡을 데 없는 최고의 리버럴한 헌법을 만드는 것이 천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등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점령통치 상황을 간추리면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맥아더 회고록에 보이는 “(시데하라)수상은 신헌법을 만들 때에 이른바 ‘전쟁포기’ 조항을 포함하여, 일본은 군사기구를 일절 갖지 않는 쪽으로 정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 나는 허리가 빠질 만큼 놀랐다. …”를 일본측 연구자들은 믿지 않는 모양인데(岡崎久彦, 《吉田茂とその時代》), 나는 믿고 싶다.
노(奴)의 자리(位)에 처한 충신 시데하라가 천황문제를 제기하고 나오는 맥아더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월 24일의 시데하라의 반응에 힘을 얻었던지 맥아더는 다음날 미국의 상부 군(軍)당국에 대해 천황제를 지킬 결의를 확실히 해 보이고 있다.
천황의 인간선언이 발표되고 얼마 있지 않아 “워싱턴으로부터 발해진 일본국 헌법의 기초에 관한 지령은 ‘천황제’를 폐지하든지, 혹은 ‘보다 민주적인 노선에 따라’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더 이상 천황의 지위를 애매한 상태에 둘 수 없는 입장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시데하라를 만난 다음 날인 1월 25일 당시의 미국 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기밀전보를 보내 ‘천황의 전면적 무죄(無罪)를 확신’한다고 천황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나왔다(허버트 빅스, 《昭和天皇》).
일본의 새 헌법과 主-奴변증법
새 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서 …’로 천황의 호지를 확실히 하고 있다. 구(舊)일본에서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핵은 천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로써 일본의 생명은 살아남은 것이다. ‘승인투쟁’에 뛰어들었던 일본은 새 헌법 구조가 전쟁포기를 선언하고 군사기구를 전폐함으로써 국가체제를 들어 적대성(敵對性) 양기를 확실히 해 놓았다.
‘승인투쟁’의 결과로 적의 생명은 살린 채 적대성이 양기되면 주-노(主-奴) 변증법에서의 노(奴)가 등장하는 것이다. 새 헌법에는 노적(奴的) 국가 일본이 확실히 구현되어 있다 하겠다. 이 일본은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 중국 등을 제쳐놓고 미국과 분리강화를 하여 독립하고, 방위를 미국에 맡기는 주군(駐軍)조약인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은 독립했으나 실질적 무력인 경찰예비대나 보안대가 전력인 것을 헌법은 부정하고 있고, 일본에 계속 주둔하는 미군이 일본을 지켜 주는 ‘외포(畏怖)’로서 일본인들 눈앞에 현존하게 되고, 맥아더의 뜻을 이어받는 요시다(吉田) 수상이 부국노선(主-奴 변증법의 노동)에 전심함으로써 일본은 미국을 향해 영구적 주-노(主-奴)관계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맥아더, 일본의 재군비에 강력 반대
맥아더에게 점령통치에서 미·일 간에 있었던 주-노(主-奴)관계를 독립 후에도 영구화시키겠다는 의식이 있었을까.
그동안 일본이 경(輕)무장, 경제중시의 부국노선을 걷게 된 것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전후에 요시다 수상이 미국의 재군비 요구에 반대하거나 저항하여 완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고, 요시다의 재군비 반대를 그의 큰 공으로 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요시다의 재군비 반대가 엄격하게 맥아더의 의향에 부합하는 선에 있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동서냉전(東西冷戰)의 설계자인 국무성의 브레인 조지 케넌이 냉전이 본격화하는 1948년 3월 일본에 왔다가 맥아더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그때 마침 도쿄에 와 있던 미 육군장관 드레이퍼도 동석했다. 케넌과 드레이퍼는 이제 일본에 대해 비군사화, 즉 일본 무력화(無力化) 조치도 적당히 하고, 다시 방위력을 갖춰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맥아더는 일본 재군비를 강력히 반대하며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중 두 가지는, 첫째 이미 행한 아메리카의 신성한 국제약속에 반하게 되고,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두려워하는 아시아 제국의 반발을 부른다.
둘째는 점령군의 일본국에 대한 위신을 실추시킨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든 위신실추의 문제는 주-노(主-奴) 변증법의 도식에 관계한다. 일본이 점령하에서 재군비를 하게 되면, 주-노(主-奴) 변증법에서 주(主)측이 포지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외포(畏怖)는 사라지고, 정신의 주-노(主-奴)관계는 해소되고 마는 것이 주-노 변증법의 논법이다.
어쨌든 맥아더는 계제가 되면 일본 재군비는 반대했다. 맥아더가 일본의 재군비를 본국의 의지에 확실하게 반해 거부하는 장(場)이 벌어졌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3일 전인 1950년 6월 22일 덜레스 특사는 일본에 왔다. 덜레스에게 패전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기 위한 전권이 주어져 있었다.
미 본국에서는 1949년에 중국이 대륙에 등장함으로써 일본의 강화 독립을 서둘러야 할 필요를 느꼈는데, 문제는 군대가 없는 일본의 안보였다. 국방성 쪽은 장기 주둔 쪽이었다. 논란을 거쳐 일단 일본을 재무장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어쨌든 안보대책 없이 일본을 독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입장이었다.
도쿄에서 요시다 수상을 만난 덜레스는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지켜본 사람들의 얘기는, 요시다가 횡설수설로 논리도 추리지 않고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요시다는 도중에 덜레스에게 같이 맥아더를 만나보자 했고, 함께 일어섰다.
요시다는 반대 이유로 재군비를 감당할 경제비용이 일본에 없고, 평화헌법에 길들기 시작한 국민일반의 격렬한 항의를 감당할 여유가 정부에 없다고 했다.
맥아더는 요시다가 든 이유에 동조하는 모양을 취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뒀던 일본정부의 유휴(遊休) 군사공장의 두꺼운 일람표를 꺼내 즉석에서 덜레스에 건네줬다. 그러고는 일본에는 그 같은 공장이 다수 있으니까 이를 잘 활용하여 ‘아메리카의 군비재건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덜레스에게 제안했다. 덜레스는 우선 맥아더의 타협안을 받았다(《吉田茂とその時代》, 존 다우어).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맥아더가 재군비를 반대하는 요시다에 동조했다는 것과, 미국의 군사적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유휴 군사시설이라는 일본의 경제와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군사력을 갖지 않는 일본의 노적(奴的) 신분의 유지에 맥아더는 철저했다 하겠다.
主-奴관계의 영속화
6·25전쟁과 함께 맥아더는 7만5000명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령하여 일본이 실질적인 무력을 만들게 했다. 상징관리의 감이 뛰어났던 맥아더가 스스로의 명령의 산물에 쫓기듯이 ‘경찰예비대’라는 위장적 명칭을 붙여 도피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의 통설은 요시다 수상이 미국의 재군비 요구를 거부하고 맥아더가 이를 거들 듯 도와준 것이라 하고 있으나, 실질은 맥아더의 구상을 요시다가 충실히 따랐고 맥아더가 해임된 후에는 스스로의 노선으로 답습했다 해야 맞을 것이다.
평화헌법이 있는 한 군대가 있다 해도 무용(無用)의 장물일 뿐이어야 한다고 맥아더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맥아더가 그린 미·일의 헤겔적 주-노(主-奴)관계를 영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과거 청산 못한 것이 한일(韓日) 공통의 국익에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을 앞에 하여, 반성과 참회를 끝없이 거부하는 일본적 심성의 연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거기에 극복책이 있을 것이다. 입론(立論)을 위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개념용구를 빌릴 것이다.
일본쪽에 과거 청산 자세가 없이 시작된 1950년대의 한일회담은 세 걸음을 못 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6·25전쟁 중이기도 해서, 극동에 강력한 반공전선 형성을 바라는 미국측의 작용으로 도쿄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다.
70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국부(國父)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오만했던 귀족적 외교관 출신의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만났다. 이 대통령은 요시다 수상에게 “일본은 40년에 걸친 조선통치를 한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요시다는 “그건 일본 군벌(軍閥)이 한 것이다”라며 피해 갔다.
외교적 말놀음에 그친 일본
15년 끈 국교(國交)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이었던 한일합방조약의 무효 확인을 명문화하지 못하고 끝났다. 과거 청산 없이 국교는 정상화된 것이다. 작년에 한일 강제합방 100년의 해를 넘기면서, 일본 수상이 한마디 했지만 합방조약의 강제성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조약의 원천무효를 천명하지도 못했다.
일본쪽에서는 그동안 과거문제를 두고 유감이다, 반성이다, 통석(痛惜)이다, 사과다, 사죄다로 말을 굴려 왔지만, 청산해야 할 근본원천을 그대로 둔 채 이말 저말 해 봤자 결국은 외교적인 말놀음에 그칠 뿐이었다. 외교가 두 민족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런데 경제로 세계정상까지 갔던 일본이 한국 사람들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얼씬거리는 사이에 아시아대륙에 세계사적 대변전(大變轉)이 일어났다. 서구인들이 오래 ‘잠자는 사자’라 했던 중국이 드디어 잠을 깨어 일어난 것이다.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의 접점에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세계평화의 부동의 안정축이 불가결한 형국인데 그 잘나가던 일본이 아직도 과거를 털지 못해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들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은 어쩌다가 과거청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는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그렇게 본받고자 했던 독일이 철저한 과거청산으로 이웃 신뢰를 회복하고 통합유럽에 앞장서고 통일까지 가게 된 것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과거청산을 하고 통일까지 한 독일은 지금부터인 것 같은데, 일본은 이제 내려가려 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일본이 과거청산을 모르는 나라가 된 연유를 알아보고 제언 한마디 했으면 한다.
主從관계의 구조화, 독립후에도
일본은 침략전쟁인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을 아우름)과 식민침탈을 통해 조선인 약 100만, 중국인 약 1500만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전쟁에 죽은 일본사람들은 300만명이나 된다. 일본을 참담한 패전으로 몰고 간 똑똑한 제국엘리트들 입에서 이웃을 향한 반성이나 참회의 언사를 듣지 못한다. 일본사람들은 어찌된 사람들이란 말인가.
일본은 패전하자 연합군이라지만 주로 미국에 점령통치를 당했다. 미군에 의한 점령통치는 제국일본의 비(非)군사화와 민주주의화를 지향하여 관대하고 시혜적이었다.
그러나 이 점령통치를 통해 일본이란 나라 됨됨이에 어떤 질적(質的)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아메리카 메시아니즘의 화신(化身) 같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효율적인 통치가 일본에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동안의 눈들이 이를 넘어서서 맥아더가 일본사람들의 혼(魂)에 일으킨 변화를 잘 짚어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
점령통치에서 점령군과 피(被)점령국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주종(主從)관계이다. 일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점령 통치관계 연구의 압권이라 할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는 그 때 한 저널리스트가 일본의 수상들은 모두 점령군에게 ‘예스맨’이라고 썼다가 검열당국에 삭제당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점령국 수상으로서는 빨리 평화조약을 맺고 독립이라는 조기 강화(講和)가 우선적인 정치목표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 후에도 의식의 주종관계가 미일(美日)관계 속에 구조화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헤겔의 거작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개념용구를 빌리고자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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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主-奴)의 변증법에 대해 논한 헤겔. |
처음으로 존재를 맞닥뜨린 두 인간은 눈앞에 있는 타자(他者)의 승인을 바라고, 목숨을 건 투쟁 속에 뛰어들게 된다. 이 인간의 존엄을 건 원초적 투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을 관철한 자는 주(主·주인)가 되고, 죽음이 두려워 생명을 건지고자 물러선 자는 노(奴·노예)가 된다.
이 ‘승인을 구하는 투쟁’의 간단없는 지향이 역사를 전진시키는 에너지인 것이다. 주노(主奴)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승인 투쟁이므로 상대의 목숨을 뺏는 것은 의미가 없다. 승인해 줄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主) 입장에 서게 된 자는 노(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그 투쟁성만 파괴하고 노(奴)의 생명과 의식은 남겨 둔다.
노(奴)는 생사(生死)를 건 투쟁에서 주(主)가 살려 남겨 준 목숨을 감수했기에 노(奴)는 상대인 주(主)에게 종속된다. 그는 죽음보다는 예속을 택한 것이다.
이상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전반이다. 후반에서는 노(奴)의 노동에 의해 해방의 계기가 만들어지고 주-노(主-奴) 입장의 전반적 역전이 일어난다.
주(主)는 명령하고 지배하며, 노(奴)는 복종하고 봉사한다. 노(奴)의 행위는 본래적으로 주(主)의 행위이다. 노(奴)가 물(物)을 소유함은 향수(享受)를 위한 것이 아니고 가공·노동하기 위해서다. 노(奴)는 노동하고 주(主)는 향수한다.
노(奴)의 복종과 봉사는 노동에 의해서다. 노동은 형성하고 교화하고, 세상을 변모하고, 끝내는 자신을 변모시킨다. 주(主)는 향수하기 위해 노(奴)의 노동에 의존하므로 변화가 없다. 노(奴)는 노동에 의해 포기했던 자기 자신에 도달하고 자기를 회복한다. 이리하여 노(奴)의 의식은 노동 속에서 자기 해방의 계기를 맞는다.
헤겔은 노(奴)가 자기의식을 높여 해방에까지 달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죽음의 외포(畏怖)이며, 주(主)에의 두려움임을 강조한다. 외포에 의한 봉사, 복종, 노동이라야 노(奴)의 의식은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구약 시편(111:10)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은 ‘봉사와 노동과 함께 외포(畏怖)가 노(奴)의 자립성을 가져오는 동인(動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주-노(主-奴)의 변증법이 보여주는 것은, 종국에서 주-노(主-奴)는 입장을 뒤바꾸어 역전한다.
주(主)는 노(奴)가 일해 얻은 바를 향수하고 노(奴)의 노동의 결과물에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主)는 드디어 노(奴)에 종속된다. 노(奴)는 주(主)가 향수하는 물(物)을 가공·형성함으로써, 교양을 결과함으로써, 물(物)에 대해 주(主)의 지위를 얻고 이를 통해 주(主)에 대해서도 주(主)의 자리를 얻게 된다. 노(奴)의 의식은 노동에 의해 스스로의 힘(力)과 능동성에 눈뜨고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드디어 전관계의 역전이 일어나서 주(主)는 노(奴)에 의존적으로 되고, 노(奴)는 주(主)에 비의존적으로 된다.
주-노(主-奴)로 출발했던 양자는 결국 상호승인의 단계 앞에 도달하여 역사는 완결된다.
예나에서 나폴레옹의 대포소리를 들으며 원고를 썼다는 헤겔은 주-노(主-奴) 역전의 경험적 사태를 세계사 속에서 제시한다. 이상이 주-노(主-奴) 변증법의 줄거리다.
태평양전쟁(1941~1945)은 명분의 시비를 제쳐두고 보면, 정확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승인전쟁이었다.
일본제국은 이 전쟁에서 “백인 블록의 ‘노예체제’로부터 태평양 지역과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의(大義)를 앞세웠고, 아메리카는 “세계를 정복하고 노예화하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응징”한다는 정의를 내걸었다.
청교도(淸敎徒) 국가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과 야마토(大和) 민족 세계제일주의가 서로를 향해 각기의 명분을 ‘승인’하라고, 생사를 건 투쟁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청교도 국가와 야마토 민족의 ‘존엄’을 건 투쟁이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월 9일 오전 4시, 소련의 모스크바 방송이 대일(對日) 선전을 포고했다. 이날 정오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날 밤 11시25분, 일본 황실의 지하 방공호에서 천황 임석하에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항복, 즉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찬반 동수(同數)였다, 수상이 천황의 결단을 유도하여 수락을 택했다. 이때 쇼와(昭和) 천황은 이유를 들고 있다. 이 속에 다음 구절들이 보인다.
“…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무고한 국민들의 고뇌만 늘어나고, 드디어는 민족 절멸이 될 뿐만 아니고, 세계 인류를 한층 불행에 빠뜨리게 된다. 고굉의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거두어 ….”
천황의 얘기는, 민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헤겔의 ‘승인전쟁’에서 빠져나와 몸을 지키겠다는 얘기가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함으로써 일본은 미국과의 사이에, 정확하게 ‘주-노(主-奴) 변증법’의 주-노(主-奴)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승(戰勝) 연합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시작되었다. 주재자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 주로 미국의 의지를 대표했다. 점령군은 일본정부를 없애지 않고 살려 놓고서 거기에 명령했고, 일본의 복종을 받아 냈다. 주-노(主-奴) 변증법적 주종(主從)관계가 점령통치 속에 있었다.
요시다 정치가 남긴 空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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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輕)무장-부국(富國)노선을 추진한 요시다 시게루 수상. |
이때에 수상 요시다(吉田)가 군비는 밀쳐 놓고 경제위주의 부국(富國) 정책을 펼친 데다가 6·25사변의 특수(特需)가 닥쳐, 독립한 일본은 발빠르게 번영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립한 일본에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남았음을 지적하는 눈들이 있었다.
한 정치평론가는 “요시다 시대의 가장 커다란 정신적 공동(空洞)은 내셔널리즘의 결여와 국민적 사명감의 상실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藤原弘達, <吉田茂 - その人その政治>)고 했다.
집권 마지막 무렵, 국민여론의 대대적 지탄 속에 있던 요시다의 정치를 일본국민에게 살 길을 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소장 정치학자가 있었다. 요시다는 무거운 정치 선택인 재(再)군비 거부와 분리 강화로 패전 일본의 구체적 국익을 챙겼다는 것이다(《宰相 吉田茂》, 高坂正堯).
그러나 이 소장 학자도 일본인들에게 남은 ‘정신적 진공감’을 지적하고 있다. 점령통치 속에 있었던 민주화 개혁을 통한 실질적 혁명에 국민의 주체적 결단의 결여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적 진공감’은 국민의 주체적 결단과 무관하게 국민의 사는 방식이 정해져 버린 것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앞에 나왔던 미국의 존 다우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한 일본의 독립을 ‘종속적 독립’이라 했다.
독립했지만 “일본은 군사적으로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시에 종속되어 있어서 외교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종속되어 왔다”고 지적하는 다우어 교수는 그동안의 일본의 앞뒤 안 가린 경제성장 몰두 그 자체가 상처받은 내셔널리즘 때문이라 하고 있다.
위에서 본 독립 후 일본국가가 갖는, ‘비어 있는 것’에 관한 지적들은 단편적이고 일면적이다. 점령 일본에 본질적 변화의 핵을 짚어 내지 못하므로 그 출구를 제시할 수도 없다.
맥아더는 점령통치를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을 향해 항구적 노적(奴的) 국가이게 하는 조치에 손을 쓴 것 같다.
주-노(主-奴) 변증법에 따라 ‘노적 국가’를 규정해 본다. 노(奴)는 사생을 건 투쟁에서 존엄보다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노(奴)는 주(主)의 현존하는 외포(畏怖) 앞에서, 생명은 살아 있으되 적대성은 제거된 존재이다. 그리고 주(主)에 의존하고 노동한다. 항복하고 점령당해 무장해제당한 국가, 그리고 황금적 국익만 추구하는 나라는 ‘노적 국가’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미군에 점령당한 일본은 노적 국가가 된 것이다. 그저 그런 얘기다.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점령통치의 주재자 맥아더가 패전의 폐허 속에 허우적거리던 일본과 일본사람 위에 문자 그대로 구세주로 임했으되, 그 점령통치는 독립 후의 일본에 영속적인 ‘노적 국가’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점령통치 속에서 맥아더는 일본의 보통사람들에게 숭배와 사랑의 대상이었다. 1946년 9월부터 해임 직후인 1951년 5월까지 맥아더 앞으로 보내진 일본사람들의 편지와 엽서는 44만여 통에 달했다. 사령부 요원들에 의해 번역되고, 분류되어 처리되었다(《敗北を抱きしめて》).
그 모두는 하나같이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 그의 ‘한없는 관대함’에 대한 아낌없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神)과도 같은 고귀한 자비’라 떠받들었고, ‘살아있는 구세주(救世主)’라 하는 데 주저치 않았다.
고베(神戶)의 한 단체는 신약(新約)의 산상수훈(山上垂訓) 장면을 일본화(日本畵) 풍으로 그려 보내면서, ‘맥아더 원수의 지도는, 참으로 이 그림 속에 표현된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고 찬미하는 편지를 함께했다.
뭉뚱그려 보면, 맥아더는 악몽 같은 전쟁으로부터 일본사람들을 건져냈다고 숭앙받았고, 외국 군인에 의한 점령이란 미지(未知)의 사태에 겁먹은 일본인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었다고 감사를 받았다.
많은 일본 여성들은 천황이 구름 속의 존재였다면, 맥아더를 보다 근접성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여성들이 보낸 편지의 노골적인 한 구절에 담당관들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다수(多數)에 밀려 별도의 분류항목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항목은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였다 한다(《敗北를 껴안고》, 존 다우어).
재임 5년8개월이 지난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되었을 때, 평소에 리버럴한 《아사히(朝日)신문》(1951년 4월 12일자)이 <맥아더 원수를 아쉬워한다>라는 사설을 썼다. 사람들의 감동을 불렀다. 존 다우어가 인용한 이 사설은 맥아더가 일본에서 했던 일을 압축해서 알려준다.
“우리들은 종전(終戰) 이래 오늘까지 맥아더 원수와 함께 살아왔다. … 일본 국민이 패전이라는,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사태에 직면하여 허탈상태에 빠졌을 때,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어떻게 좋은가를 알려주고 일본국민을 이 밝은 길로 친절히 인도해 준 것은 맥아더 원수였다. 어린이의 성장을 기뻐하듯이 어제까지 적이었던 일본국민이 한걸음 한걸음 민주주의에의 길을 밟아가는 모습을 기뻐하며, 이를 줄곧 격려해 준 것도 맥아더 원수였다.”
유력지 《마이니치(每日)신문》(1951년 4월16일자)은 맥아더의 전용기가 하네다공항을 뜨는 정경을 전하면서, 흥분과 감동이 범벅이 되어 절규하듯 써댔다.
“아아, 맥아더 원수, 일본을 혼미와 기아로부터 구출해 준 원수, 원수! 기창 너머로 푸른 보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올해의 결실은 풍요하지요. 그것은 모두 원수의 5년8개월에 걸친 노력이 내려준 것이고, 동시에 일본국민의 감사의 표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魂의 승리를 지향했던 군인 맥아더
이상의 일본 최유력지 두 신문이 매긴 맥아더 성적표는 우리에게 맥아더가 패전 일본에 강림하여 도쿄만의 미조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을 받은 후 행한 연설을 상기케 한다.
“우리들 주요 참전국의 대표는 여기에 모여 평화회복을 위해 엄숙한 합의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 상이한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에워싼 다툼은 세계의 전장에서 해결되었고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지구상의 대다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우리들은 불신과 악의와 증오의 정신을 안고서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승국과 패전국이 손을 잡고서, 우리들이 기여하려는 신성한 목적이 부수하는 더 한층 높은 위엄을 향해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책무이다. ….
이 엄숙한 식전을 기회로 하여 과거의 만행으로부터 빠져나와 신뢰와 이해 위에 세워지는 세계, 인간의 존엄 및 인류가 끌어안아야 할 희망, 즉 자유와 관용 및 정의의 실현을 위해 바쳐지는 세계가 수립되는 것이야말로 나의 최대의 소망이고, 실로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이기도 하다.”(《日米戰爭と戰後日本》, 五百旗頭眞)
양대 신문이 제시한 맥아더 통치의 도달점과 통치의 시작 부분에 있었던 미조리 함상의 스피치를 겨눠 보면, 그가 인류의 이상을 스스로의 정치목표로 하여 영웅적 실천력으로 추구해 들어간 불퇴전의 신념가임을 알게 된다.
그의 해임 시점이 태평양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던 한국을 인천상륙 작전으로 살려낸 지 6개월 남짓한 때였음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맥아더는 무력(武力)을 넘어 혼(魂)의 승리를 지향했던 군인으로 보인다. 미국으로 돌아간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의 후배들에게 했던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다.
“용감함과 인내 많은 전사(戰士)이면서도, 마주 싸운 적이 무릎을 꿇고 화(和)를 빈 다음에는 패자에 대해 자애를 갖는 것이 아메리카군(軍)의 자랑스런 전통인 것이다.”
평화헌법과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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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헌법 제정 당시 일본 수상이던 시데하라. |
새 헌법의 초안은 맥아더가 1946년 2월 지시하여, GHQ 요원들이 1주일 걸려 성안한 것을 일본정부가 1946년 3월 자안(自案)으로 발의하여 개정절차를 밟았고, 1947년 5월부터 시행되었다.
많은 역사가와 연구자들이 평화헌법, 그중에서도 제9조의 성립과정에 대해서 쓰고 있다.
맥아더 원수와 당시의 일본수상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의 1946년 1월 24일의 3시간 만남에서 신헌법 9조는 성안되었다 한다. 논란은 주로 초안의 전쟁포기 선언을 맥아더-시데하라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입에 올렸느냐는 것이다.
기록에 철저한 외교관 출신 시데하라가 3시간 만남에 대해 단 한 줄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끝내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맥아더의 회고록은 “시데하라가 입을 열었다” 하고 있는데, 일본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믿지 않으려 한다.
이날의 만남은 급성폐렴에 걸렸던 시데하라가 그 무렵 막 개발되어 미국측에만 있던 페니실린을 맥아더가 제공하여 살아나게 되자 인사차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그 전후에 천황과 천황제의 온존을 두고 심각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天皇의 ‘인간선언’
이해(1946년) 초 처음으로 천황이 국민에게 연두조서(年頭詔書)를 발표했다. 유명한 천황의 <인간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천황은 스스로의 신격(神格)을 부정했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아라히토카미)이라 하던, 전시(戰時) 중의 통념을 천황 스스로 부정해 버린 것이다. 점령기간 중에 여러 가지 개혁선언이 있었지만, 현인신(現人神)을 위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던 일본사람들한테 이 선언만큼 쇼크를 준 것은 없었다고 한다(<天皇と東大>, 立花隆).
이 천황의 조서는 먼저 GHQ에 의해 기초되었고 시데하라 내각과의 사이에서 번역, 수정의 왕복이 있었다. 천황 존재의 유지를 필요로 했던 GHQ의 천황 이미지 개선 의도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불과 10여일 전 연말에는 GHQ로부터 신도지령(神道指令)이 있었다. 신사(神社)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끝내게 하고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지령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과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대동아전쟁의 슬로건이 팔굉일우(전 세계를 하나의 지붕 밑에 둠)였다. 팔굉일우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세계제국=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을 세운다’는 뜻이었다.
GHQ는 포츠담선언의 정신에 따라 일본을 비군사화함에 있어서, 선민(選民)사상적 독단이나 과대망상에 불과한 그들의 신화적(神話的) 세계인식을 침략전쟁의 연원으로 보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들어갔던 것이다.
맥아더는 한편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의 결론을 받아 1946년 1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일명 동경재판) 설치를 명해 놓고 있었다.
시데하라가 1946년 1월 24일 맥아더를 만났을 때 이미 기가 많이 죽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수상이 직접 뒷바라지해야 하는 연두의 천황의 ‘인간선언’의 쇼크에다가, 1월 4일에는 실력 각료인 내무상과 관방장관을 위시한 4각료의 공직 추방령이 GHQ로부터 떨어졌다. 병중이기도 했지만 더할 수 없는 굴욕으로 받아들인 시데하라는 정권을 던지려 했다. 추방령을 받은 각료들이 “대안(代案)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할 때”라고 말려, 번의(翻意)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데하라에게는 패배의 실존적 수용이 있었고 그 내면에 문민(文民)의 패전의식이 자리 잡았다 할 것이다. 주-노(主-奴) 변증법으로 보건대, 주(主) 앞에 존엄을 버리고 추종키로 한 노(奴)의 확실한 등장이 있었다 하겠다.
전쟁포기와 천황제 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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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천황은 1945년 9월 27일 도쿄 아카사카의 미국 대사관으로 맥아더 원수를 예방했다. |
바로 그때는 천황문제와 헌법문제가 최고의 정치현안이었을 때였다. 맥아더는 연합국의 반(反)천황 여론이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GHQ의 상부 의결기관으로 출발하게 될, 11개 연합국으로 구성되는 극동위원회의 분위기가 천황의 전쟁책임을 두고서 심히 불온하다는 것, 맥아더 본인은 어떻게든 천황 호지(護持)를 하기 원하나 언제까지 이 자리에 버틸지 몰라 매우 불안하다는 것, 도쿄 전범(戰犯)재판을 앞두고 앞으로 등장할 간섭기관과 연합국 여론이 심히 우려스럽다는 것, 군사력을 전혀 갖지 말고 전쟁포기를 선언하는 등으로 흠 잡을 데 없는 최고의 리버럴한 헌법을 만드는 것이 천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등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점령통치 상황을 간추리면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맥아더 회고록에 보이는 “(시데하라)수상은 신헌법을 만들 때에 이른바 ‘전쟁포기’ 조항을 포함하여, 일본은 군사기구를 일절 갖지 않는 쪽으로 정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 나는 허리가 빠질 만큼 놀랐다. …”를 일본측 연구자들은 믿지 않는 모양인데(岡崎久彦, 《吉田茂とその時代》), 나는 믿고 싶다.
노(奴)의 자리(位)에 처한 충신 시데하라가 천황문제를 제기하고 나오는 맥아더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월 24일의 시데하라의 반응에 힘을 얻었던지 맥아더는 다음날 미국의 상부 군(軍)당국에 대해 천황제를 지킬 결의를 확실히 해 보이고 있다.
천황의 인간선언이 발표되고 얼마 있지 않아 “워싱턴으로부터 발해진 일본국 헌법의 기초에 관한 지령은 ‘천황제’를 폐지하든지, 혹은 ‘보다 민주적인 노선에 따라’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더 이상 천황의 지위를 애매한 상태에 둘 수 없는 입장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시데하라를 만난 다음 날인 1월 25일 당시의 미국 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기밀전보를 보내 ‘천황의 전면적 무죄(無罪)를 확신’한다고 천황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나왔다(허버트 빅스, 《昭和天皇》).
일본의 새 헌법과 主-奴변증법
새 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서 …’로 천황의 호지를 확실히 하고 있다. 구(舊)일본에서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핵은 천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로써 일본의 생명은 살아남은 것이다. ‘승인투쟁’에 뛰어들었던 일본은 새 헌법 구조가 전쟁포기를 선언하고 군사기구를 전폐함으로써 국가체제를 들어 적대성(敵對性) 양기를 확실히 해 놓았다.
‘승인투쟁’의 결과로 적의 생명은 살린 채 적대성이 양기되면 주-노(主-奴) 변증법에서의 노(奴)가 등장하는 것이다. 새 헌법에는 노적(奴的) 국가 일본이 확실히 구현되어 있다 하겠다. 이 일본은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 중국 등을 제쳐놓고 미국과 분리강화를 하여 독립하고, 방위를 미국에 맡기는 주군(駐軍)조약인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은 독립했으나 실질적 무력인 경찰예비대나 보안대가 전력인 것을 헌법은 부정하고 있고, 일본에 계속 주둔하는 미군이 일본을 지켜 주는 ‘외포(畏怖)’로서 일본인들 눈앞에 현존하게 되고, 맥아더의 뜻을 이어받는 요시다(吉田) 수상이 부국노선(主-奴 변증법의 노동)에 전심함으로써 일본은 미국을 향해 영구적 주-노(主-奴)관계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맥아더, 일본의 재군비에 강력 반대
맥아더에게 점령통치에서 미·일 간에 있었던 주-노(主-奴)관계를 독립 후에도 영구화시키겠다는 의식이 있었을까.
그동안 일본이 경(輕)무장, 경제중시의 부국노선을 걷게 된 것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전후에 요시다 수상이 미국의 재군비 요구에 반대하거나 저항하여 완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고, 요시다의 재군비 반대를 그의 큰 공으로 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요시다의 재군비 반대가 엄격하게 맥아더의 의향에 부합하는 선에 있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동서냉전(東西冷戰)의 설계자인 국무성의 브레인 조지 케넌이 냉전이 본격화하는 1948년 3월 일본에 왔다가 맥아더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그때 마침 도쿄에 와 있던 미 육군장관 드레이퍼도 동석했다. 케넌과 드레이퍼는 이제 일본에 대해 비군사화, 즉 일본 무력화(無力化) 조치도 적당히 하고, 다시 방위력을 갖춰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맥아더는 일본 재군비를 강력히 반대하며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중 두 가지는, 첫째 이미 행한 아메리카의 신성한 국제약속에 반하게 되고,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두려워하는 아시아 제국의 반발을 부른다.
둘째는 점령군의 일본국에 대한 위신을 실추시킨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든 위신실추의 문제는 주-노(主-奴) 변증법의 도식에 관계한다. 일본이 점령하에서 재군비를 하게 되면, 주-노(主-奴) 변증법에서 주(主)측이 포지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외포(畏怖)는 사라지고, 정신의 주-노(主-奴)관계는 해소되고 마는 것이 주-노 변증법의 논법이다.
어쨌든 맥아더는 계제가 되면 일본 재군비는 반대했다. 맥아더가 일본의 재군비를 본국의 의지에 확실하게 반해 거부하는 장(場)이 벌어졌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3일 전인 1950년 6월 22일 덜레스 특사는 일본에 왔다. 덜레스에게 패전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기 위한 전권이 주어져 있었다.
미 본국에서는 1949년에 중국이 대륙에 등장함으로써 일본의 강화 독립을 서둘러야 할 필요를 느꼈는데, 문제는 군대가 없는 일본의 안보였다. 국방성 쪽은 장기 주둔 쪽이었다. 논란을 거쳐 일단 일본을 재무장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어쨌든 안보대책 없이 일본을 독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입장이었다.
도쿄에서 요시다 수상을 만난 덜레스는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지켜본 사람들의 얘기는, 요시다가 횡설수설로 논리도 추리지 않고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요시다는 도중에 덜레스에게 같이 맥아더를 만나보자 했고, 함께 일어섰다.
요시다는 반대 이유로 재군비를 감당할 경제비용이 일본에 없고, 평화헌법에 길들기 시작한 국민일반의 격렬한 항의를 감당할 여유가 정부에 없다고 했다.
맥아더는 요시다가 든 이유에 동조하는 모양을 취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뒀던 일본정부의 유휴(遊休) 군사공장의 두꺼운 일람표를 꺼내 즉석에서 덜레스에 건네줬다. 그러고는 일본에는 그 같은 공장이 다수 있으니까 이를 잘 활용하여 ‘아메리카의 군비재건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덜레스에게 제안했다. 덜레스는 우선 맥아더의 타협안을 받았다(《吉田茂とその時代》, 존 다우어).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맥아더가 재군비를 반대하는 요시다에 동조했다는 것과, 미국의 군사적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유휴 군사시설이라는 일본의 경제와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군사력을 갖지 않는 일본의 노적(奴的) 신분의 유지에 맥아더는 철저했다 하겠다.
主-奴관계의 영속화
6·25전쟁과 함께 맥아더는 7만5000명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령하여 일본이 실질적인 무력을 만들게 했다. 상징관리의 감이 뛰어났던 맥아더가 스스로의 명령의 산물에 쫓기듯이 ‘경찰예비대’라는 위장적 명칭을 붙여 도피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의 통설은 요시다 수상이 미국의 재군비 요구를 거부하고 맥아더가 이를 거들 듯 도와준 것이라 하고 있으나, 실질은 맥아더의 구상을 요시다가 충실히 따랐고 맥아더가 해임된 후에는 스스로의 노선으로 답습했다 해야 맞을 것이다.
평화헌법이 있는 한 군대가 있다 해도 무용(無用)의 장물일 뿐이어야 한다고 맥아더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맥아더가 그린 미·일의 헤겔적 주-노(主-奴)관계를 영속시켜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