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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리포트

중국 최고 엘리트 집단 淸華大 개교 100주년

“칭화대는 중국민족의 운명” (후진타오 국가주석)

글 : 김남성  월간조선 기자·現 淸華大 공공관리학원 석사 과정  suls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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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 출신 고위인사: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 시진핑 차기 국가주석, 우방궈 전인대 위원장 등 중국 국가서열 9위 내 3명, 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9명, 전인대 상임위원 8명, 최고인민법원장·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 중국과학원·공정원 원사(院士) 479명, 성장(省長)·장관급 400여 명, 대학총장·당위서기 240명, 인민해방군 장군 70명, 공기업 CEO 284명…

⊙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국가서열 9위 내 지도자 6명 출동
⊙ 英 왕자 세기의 결혼식 생중계 안 한 CCTV, 네 개 채널에서 기념식 동시 생방송
⊙ 수소·원자 폭탄, 인공위성, 수력발전 핵발전소 등 중국 과학기술의 寶庫
⊙ 중국 국가 엠블럼, 인민대회당, 톈안먼 광장, 인민혁명탑도 칭화대에서 설계…

취재지원 : 金勇煥 베이징대 신방과 3학년
  지난 4월 24일 오전 10시 중국 베이징 장안대로에 있는 인민대회당(중국 국회 격인 全人代가 열리는 곳) 안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곧이어 현장을 생중계하던 중국국영방송 CCTV 화면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좀처럼 활짝 웃지 않는 후 주석은 이날만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후 주석 뒤로 국가서열에 맞춰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국가서열 2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3위),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4위),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6위), 리커창(李克强) 부총리(7위) 등이 박수를 치면서 차례로 입장했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미국인 라리사(칭화대 公共管理學院 석사 과정) 씨는 “마치 중국 의회인 전인대가 다시 열리는 것 같았다”며 “국가지도자 6명이 입장할 때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다”고 했다. 이들 국가지도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단상에 서 있던 후허핑(胡和平) 칭화대 공산당위원회 서기가 마이크 앞에서 힘차게 외쳤다.
 
  “지금부터 칭화대(淸華大)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후허핑 서기의 개회식 선언과 함께, 6명의 국가지도자와 인민대회당 안에 있던 8000명의 내·외빈은 모두 일어나 칭화대 교가(校歌)를 힘차게 불렀다. CCTV 카메라는 공중에서 후진타오 주석부터 6명의 지도자를 훑었다. 이 가운데 후 주석, 우방궈 위원장, 시진핑 부주석(차기 중국 국가주석) 등 세 명은 칭화대 동문이다.
 
 
  후진타오, “칭화대는 시대와 함께 걸어와”
 
후진타오 주석이 칭화대 엠블럼 앞에서 칭화대 100주년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칭화대 교가 제창이 끝나자 구빙린(顧秉林) 칭화대교장(총장), 저우지펑(周基風) 베이징대교장, 리처드 레빈(Richard C. Levin) 예일대 총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특히 리처드 레빈 예일대 총장은 축사를 하기 전, 후진타오 등 중국 지도자들과 칭화대 원로교수들이 모여 있는 연단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바람에 좌중에 가벼운 웃음꽃이 폈다. 축사에서도 그는 “칭화대의 첫 번째 총장부터 다섯 번째 총장까지 모두 우리 예일대에서 공부를 했다”며 칭화대와 예일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해 장내에 흐뭇한 웃음과 박수가 쏟아졌다.
 
  레빈 예일대 총장의 축사가 끝난 후, 후진타오 주석이 나섰다. 그는 칭화대 수리공정학 계열 1965년 입학생으로 부인도 같은 과 동기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숨죽였다. 후 주석은 “칭화대는 개교 이래 중국민족과 운명을 같이했고 시대와 함께 걸어왔으며, 우수한 문화 전통을 통해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을 이뤄냈다”고 치하했다.
 
  후 주석은 약 20여 분 넘게 이어진 축사에서 “중국의 부흥을 위해 과학기술 발전이 관건이고 인재는 필수이며 대학교육은 기초”라며 “고등교육의 질을 높이고 인재배양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후 주석은 연설 중간에 “중국의 고등교육 발전 수준이 경제사회 발전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고 선진국과 격차가 있다”고 지적한 뒤 “중국이 인재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일류대학 몇 곳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진타오 주석의 연설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칭화대 100주년 기념식은 끝났다. 이날 모두 4개 채널을 동원해 기념식을 생방송했던 CCTV는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칭화대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느라 바빴다. 중국의 이 자존심 높은 국영방송은 며칠 후 벌어진 영국의 윌리엄 왕자 결혼식 생중계조차 생략한 곳이다.
 
 
  70여 명의 인민해방군 老將들, 母校귀환 보고
 
지난 4월 24일 칭화대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리처드 레빈 미(美)예일대 총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뒤에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 시진핑 국가부주석 등 요인들이 앉아 있다.
  기념식에 참석했던 최낙섭(崔落燮·43) 칭화대 한국동문회 베이징 지회장(SK 중국경영경제연구소 경제연구팀장)은 “베이다(北京大·중국에서 베이징대를 부르는 말) 100주년 때와 달리 이번 행사에는 중국 지도부가 대거 참여한 게 흥미로웠다”며 “중국 국가지도자들이 칭화대를 어떤 의미로 바라보는지 짐작할 수 있는 행사였다”고 했다.
 
  다음 날 칭화대 교정에서 만난 기자의 칭화대 공공관리학원 외국인 동기들도 고무되고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인터넷으로 생방송을 본 후 ‘네가 다니는 학교가 그렇게 중요한 곳인 줄 몰랐다’고 전화를 했다”(미국인 개빈·공군간부출신) “대학교 개교 기념식을 이렇게 대우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나?”(일본인 노부·총무성고급관료) “일본에서 도쿄대가 100주년이었다고 해도 개교기념식을 이렇게 성대하게 하지 않았을 것”(한국인 김정호씨·도쿄대 법대 출신) 등의 반응이었다.
 
  이날 열린 인민대회당 기념식은 칭화대 100주년 행사의 일부였다. 칭화대는 지난 4월 17일부터 24일까지 교내·외에서 다양한 100주년 행사를 열었다. 여러 행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칭화대 졸업생들의 모교(母校) 방문행사였다.
 
  지난 1940년대 입학생들부터 역대 칭화대 총장까지 중국 근대사를 이끌어온 노장(老將)들이 졸업한 지 반세기 만에 학교를 찾아왔다. 4월 24일 교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머리가 희끗한 역대 중국인민해방군 장군 70여 명이 관등성명과 입학연도를 외치며 모교귀환을 보고했다. 이때 자리에 있던 1958년 입학생 왕다중(王大中) 전(前) 칭화대 교장이 흥에 겨워 단상으로 올라가 이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전·현직 지도자들의 모교 방문
 
쑨저 교수(칭화대 동문회보 편집장).
  중국 전·현직 지도자들의 모교 방문도 줄을 이었다. 지난 4월 20일 오전 칭화대 교정은 조금 과장하면 학생보다 중국 공안의 숫자가 더 많았다. 공안들은 학교 정문부터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진(陣)을 치고 출입하는 사람과 차량을 검사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 출입 통제가 심해지기는 했지만 이날만큼은 아니었다. 이유는 조금 후 밝혀졌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가 “방금 후진타오 주석이 학교를 방문했다”고 말했다. 공공관리학원 셰진(謝金) 교수에 따르면, 후진타오 주석을 포함해 역대 주석이 모교 개교기념식에 참석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4월 22일에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주룽지(朱鎔基·83) 전 중국 총리가 자신이 초대 학장으로 있던 경제관리학원을 찾았다. 기자가 다니는 공공관리학원 옆에 있는 경제관리학원 앞에서 학생들이 “주룽지 총리 환잉이라이팡(歡迎來訪)”이라고 외치는 함성이 드높았다. 경제관리학원 정문에는 주룽지 총리의 글이 적힌 커다란 조형물이 있다. 글 끝에 주룽지 총리의 이름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대신 ‘경제관리학원학장’라는 직책이 적혀 있다.
 
  역시 칭화대 동문인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부주석도 개교기념주간 전후로 학교를 찾았다.
 
  중국의 대표 대학교인 칭화대는 2011년 전(全) 중국적인 관심과 환호 속에서 다음 100년을 시작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칭화대의 다음 100년은 ‘더 밝고 화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칭화대 공산당위원회 부서기 전쉬(陣旭)는 4월 24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2020년까지 전 분야 세계 일류 대학, 2050년 세계 최고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여러 외국 학생들의 반응처럼 칭화대 100주년에 보여준 중국 정부와 사회의 관심은 사실 상상 이상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서울대 100주년을 이렇게 특별하게 대우하면, ‘서울대 폐지론’ ‘학벌 망국론(學閥 亡國論)’ 등 별별 소리가 다 나올 것이다.
 
  아무리 예외를 인정해 주는 중국이라도 칭화대를 예외 중 예외, 특별 대우하는 것은 역시 칭화대의 역사와 역할 때문일 것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기념식에서 말한 것처럼 칭화대의 지난 100여 년 역사는 중국 민족의 역사와 일치한다. 칭화대 동문회보 편집장인 쑨저(孫哲) 교수는 이를 두고 ‘중국근·현대사 여행’이라고 했다. 1968년 공정물리학과(핵물리학과) 입학생인 그는 칭화대 동문회보인 《수목칭화》(水木淸華) 《칭화대학교》(淸華大學校)등 두 개의 잡지를 만들고 있다. 그는 100주년 동문회보 특별판을 토대로 기자에게 칭화대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줬다. 그의 설명을 따라 칭화대 역사로 들어가 보자.
 

 
 
미국 유학길 나선 공학도들이 선구자

 
칭화원. 칭화대 옛 정문. 청나라 정부는 왕실 정원이었던 칭화원을 미국유학준비반에 하사했다. 이를 모태로 칭화학당이 1911년 탄생했다.
  칭화대 개교는 1911년이지만 역사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淸)나라 정부는 ‘의화단 사건’(열강의 침략에 저항한 중국인들이 1900년 외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1901년 신유(辛酉)조약을 맺는다. 칭화대 100주년 역사관에 따르면, 당시 청나라는 미국을 포함해 8개 연합군에 약 4억5000만 냥(兩)의 배상금을 지급했다(경자배곡·庚子賠穀-경자배상). 이후 청 정부는 미국과 교섭을 벌여 1909년부터 1940년까지 자신이 지급한 배상금 중 3200만 냥(당시 미화 2400만 달러)을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았다. 쑨 교수의 설명이다.
 
  “청 정부는, 1909년 되돌려받은 첫 배상금으로 미국유학생사무처(留美學務處)를 설립하고 청나라 황실 공원인 칭화원(淸華園)을 사무처에 내려줬어요. 당시 청 정부는 ‘중국의 독립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국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사(賜)한다’고 했죠. 중국의 힘을 기르기 위해 인재를 미국으로 유학시키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1909년 8월 대미유학준비처는 1차 유학생 선발 시험을 베이징에서 치렀다. 첫 시험은 모두 630명이 응시해 47명의 합격생을 뽑았다. 이 중에는 공학(工學) 중심의 칭화대 전통을 마련한 메이이치(梅貽琦) 전 칭화대 교장, 화학자 장즈가오(張子高), 생물학자 빙즈(秉志), 법학자 왕스제(王士杰) 등이 포함됐다.
 
1909년 칭화원 지도.
  이들 47명은 같은 해 10월 탕궈안(唐國安)의 인솔 아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탕궈안은 칭화대 첫 총장으로 1872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유미유동(留美幼童) 계획에 선발돼 일찍이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했다. 앞서 100주년 기념식에서 리처드 레빈 예일대 총장이 언급한 예일대에서 공급한 초대 5명의 칭화대 총장 중 첫 번째 인물이다.
 
  미국유학생사무처의 실무조직인 ‘유학생준비관’이 1911년 4월 29일 칭화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학교 이름을 ‘칭화학당’으로 정했다. 칭화대 동문회보 《수목칭화》 100주년 특별본에 나온 설명이다.
 
  “첫 학생을 뽑기 위해 베이징 선무문(宣武門)에서 시험을 쳐 486명이 합격했다. 이 가운데 5분의 2가 대학과정에 입학해서 최초의 칭화학당 입학생이 됐다. 그중에는 중국 현대철학의 창시자인 진웨린(金岳霖), 중국 화학의 아버지 허우더방(侯德榜·1943년 동양인 최초의 영국왕실화학아카데미 회원), 중국균학의 창시자 다이팡란(戴芳瀾) 등이 포함됐다.”
 
  칭화대의 첫 100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부정입학 시비 이후 공개시험으로 전환
 
  당시 중국 전역에서 칭화대의 인기는 높았다. 학비가 싼데다, 당시 중국에서 미국 유학을 보내주는 학교가 칭화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쑨저 교수의 설명이다.
 
  “칭화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지역유지 자제들의 부정입학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칭화대 입학 정원의 반은 시험을 쳐서 입학했고, 나머지 반은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었어요. 지역유지나 베이징 명문집안의 형제, 숙부와 조카가 함께 칭화대 학생인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신장성(新疆省)에 할당된 신입생이 칭화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신장성 출신 대신 다른 지역유지 자제들을 입학시킨 겁니다. 이 때문에 1925년 칭화학교는 완전 공개시험으로 학생을 뽑게 됩니다.”
 
  1912년 칭화학당은 칭화학교로 개명하고 첫 교장으로 탕궈안이 임명됐다. 탕궈안과 부교장 주이춘은 칭화학교를 기존 미국유학준비학교에서 더 나아가 중국을 이끌어갈 인재(領袖人才·영수인재) 양성학교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이들은 10여 년간의 노력 끝에 1925년 칭화학교 내에 대학부를 설립했다.
 
  1925년 당시 베이징은 군벌이 실권을 장악한 이른바 베이양(北洋)정부 통치하에 있었다. 난징(南京)에 있던 장제스의 난징국민정부가 북벌(北伐)을 시작해 1928년 베이양 정부는 해체되거나 국민정부로 귀속됐다. 이에 따라 칭화학교도 난징국민정부 관할이 되었다. 난징국민정부는 1928년 칭화대를 국립칭화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에 뤄자룬(羅家倫)을 임명했다. 뤄자룬은 베이징대 시절인 1919년 《신차오》(新潮)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 잡지를 통해 소설가 루쉰(魯迅), 시인 뤄자룬·위핑보(兪平伯)·후스(胡適) 등이 등단했다. 그가 만든 신자오는 《신친녠》(新靑年)과 함께 중국 문학혁명 운동의 근원지이자 5·4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장제스 집권 후 과학교육특화 기관이 된 칭화대

 
메이이치 총장은 17년 동안 칭화대에 재임하면서 칭화대를 오늘날의 이공계 중심 대학으로 육성했다. 사진은 시난연합대 시절의 메이이치 총장(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1928년 국립칭화대학으로 승격한 칭화대는 다음 해인 1929년 약 20년간 지속된 미국유학준부를 폐지했다. 이제 유학준비학교라는 시대적인 소임을 다하고 명실공히 대학교로서 역할을 시작한 셈이다. 비록 정식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칭화학당 개교 이래 20년간 칭화대는 중국의 인재양성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칭화대 동문회에 따르면, 1948년 중국중앙연구원(현 중국과학원)에서 수리조, 생물조, 인문조 등 세 분야에서 81명의 원사(院士)를 뽑았다. 원사란 ‘박사 중의 박사’로 중국 국가가 인정한 학자를 일컫는다.
 
  이 가운데 약 36%인 29명이 1911년부터 1929년까지 칭화학당·칭화학교·국립칭화대학 입학생들이었다. 중국 화학의 아버지 허우더방, 시인 후스, 중국 국학의 사대도사(四大導師·선구자) 중 한 명인 자오위안런(趙元任), 중국 건축의 아버지 량쓰청(梁思成·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장남), 중국 현대철학의 선구자 진웨린 등이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칭화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한 후, 칭화대는 기존의 문·사·철(文·史·哲: 문학, 사학, 철학을 일컬음)과 자연과학 모두에 강했던(文理渗透·文實會通) 전통에서 다소 벗어나게 된다. 1928년 북벌을 통해 베이징을 장악한 장제스의 난징국민당정부는 칭화대에 과학기술교육을 강화하고 인문사회과학을 억제하는 정책 방침을 적용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칭화대는 과학기술교육 특화(特化) 교육기관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중국에서 흔히 듣게 되는 “베이다는 대륙의 정신을, 칭화대는 대륙의 기술을 담당한다”는 얘기가 이때부터 비롯되는 셈이다. 이 얘기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칭화대의 전설적인 총장인 메이이치의 취임이다.
 
  메이이치 총장 취임 이후, 칭화대가 이공계열을 육성하기는 했지만, 문·사·철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는 않았다. 메이이치는 그의 저서 《대학일해》(大學一解)에서 “진정한 이공계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심리학·사회학·윤리학 등 일체의 인문과학, 문화배경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한다”고 적었다. 또 칭화대 초대 건축학장인 량쓰청은 “우리 칭화대 건축학과는 인문학을 모르는 인재를 기르지 않는다”며 “인문학을 모르는 이공계를 일컬어 ‘반인(半人)’, 즉 불완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다.
 
 
  칭화연구원과 4대도사
 
  인문학에 대해 칭화대가 애정을 잃지 않은 터전은 1925년 설립한 칭화연구원(淸華硏究院)이다. 청조(淸朝) 패망과 서방열강에 사분오열(四分五裂)되던 20세기 초 중국. 칭화연구원은 중국의 전통 사상·언어·역사(이를 아울러 國學)를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하고 전수했다. 이를 통해 중국인의 자긍심을 키우고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4년 후인 1929년 칭화연구원은 문을 닫았다. 당시 연구원을 이끌었던 왕궈웨이가 중국이 서방에 침략당하는 걸 비관해 1927년 이화원(臣頁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자살하고 2년 후에는 량치차오가 사망하면서 연구원을 이끌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배출한 70명의 인재들이 이후 중국국학을 이끌었다.
 
  2009년 칭화대는 칭화연구원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80년 만에 ‘칭화대국학연구원을 재설립했다. 칭화대국학연구원 측은 칭화연구원 4년을 일러 “중국 국학계에서 다시는 복제할 수 없는 신화(神話)의 시기였다”며 “국학연구원을 세계적인 중국학연구원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칭화대국학연구원은 당시에 배출된 인재를 ‘칭화학파’(淸華學派)라고 하며, 그 가운데 4대 국학도사(國學導師)를 선정했다. 그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왕궈웨이(王國維:1877~1927년)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관념철학 등을 공부하고 청나라 정부 산하의 연구소에서 재직하면서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에게 문학을 가르쳤다. 1925년부터 칭화대 교수 생활을 했다. 왕궈웨이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철학과 미학(美學)의 관점에서 중국의 고문(古文)을 재해석해 내며, 고전문학·미학·고고학·음운학·금석학·갑골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광대한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고전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량치차오는 그를 일러 “중국이 독점할 수 없는 전 세계의 학자”라고 극찬했다.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캉유웨이(康有爲)를 만나 그에게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학(西學)을 배우고 공양학(公羊學)을 익혔다. 1895년 캉유웨이와 함께 베이징에 강학회(强學會)를 설립했고, 1895년 이후에는 탄쓰퉁(譚嗣同)과 함께 변법자강운동에 진력하였다. 문학·사학·철학·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었다.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천인커(陳寅恪:1860~1969)
  천인커는 현대 중국 4대 역사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칭화대 국학연구원은 그를 “20세기 중국에서 최고의 학식과 학문적 성취를 이룬 대학자”라고 평했다. 중국 중세사 분야의 대가로 《수당제도연원약론고》(隋唐制度淵源略論稿) 《당대 정치사술론고》(唐代政治史述論稿) 등을 저술했다. 칭화대 교수로 있던 시절 칭화대에 어문·역사·불교연구 등에 관한 과정을 개설했다. 칭화대에서 강의를 할 때, 여러 언어로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을 인용하기로 유명했다.
 
  ·자오위안런(趙元任:1892~1982년)
  1914년 미국 카네기 대학교에서 수학(數學)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1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부터 칭화대 교수로 있으면서 수학·물리학·중국보통언어학·중국현대방언·중국악보와 서양음악 등을 가르쳤다. 그는 33종의 중국어방언·영어·독어 ·프랑스어·일어·스페인어 등 수십 개 언어에 능통했다. 칭화대 국학연구원은 그를 ‘현대 중국언어학의 아버지’이며 ‘근대중국음악 선구자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중앙TV(CCTV) 등에서는 개교 100주년을 맞는 칭화대의 역사를 소개하는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총장 중의 총장’ 메이이치
 
  칭화대는 1937년 항일전쟁이 벌어지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자리를 옮긴 후, 베이징 대학, 난카이 대학과 연합하여, 국립 창사 임시대학을 설립했다. 1938년 쿤밍(昆明)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으며, 국립 시난 연합대학으로 개명한다. 1946년에 와서야 칭화대학은 원래의 자리인 베이징 칭화원으로 다시 옮겨와 문학·법학·이학·공학·농업 5개의 학부를 세우고, 26개의 과(科)를 설립하였다.
 
  서구열강과의 전쟁, 국공(國共)내전 와중에도 칭화대는 나름 건실하게 성장한다. 이 뒤에는 칭화대 ‘교장(총장) 중 교장’이라는 메이이치가 있었다. 메이이치는 1931년부터 1948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총장을 맡았다. 메이이치는 총장에 앉자마자 공학 관련 학과를 설립하고, 과학기술 교육강화를 위해 수학·물리학·토목공학·건축공학 등 관련 분야 저명한 학자들을 대거 임용했다.
 
  메이이치가 총장으로 재임 당시 칭화대 교수 중 절반가량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 90%는 해외 유학파로 미국유학이 70%를 차지했다. 이공대 우세 현상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문·사·철에도 쟁쟁한 교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쑨저 교수는 “중국 유명 철학자이자 시인 주쯔칭(朱自淸), 시인 원이둬(聞一多)·위핑보, 철학자 펑유란(馮友蘭), 진웨린 등이 교수로 활동했다”고 했다.
 
  1952년 중국 정부가 결정한 ‘전국 공학원(工學院) 조정방안’에 따라 칭화대 공학부에 베이징 대학과 옌징(燕京) 대학의 공학계통을 통합 흡수하고, 문학·이학·법학은 베이징 대학교로 옮겼다.
 
  신중국 건국 이후 칭화대에 대한 과학기술 교육특화가 더욱 강화되면서 인문사회과학의 비중이 크게 줄었다.
 
  칭화대 공공관리학원 셰진 교수는 “칭화대에서 인문계열이 베이다로 갔지만, 인문사회 정신의 전통 속에서 단순한 공대로 전락하지 않고 독특한 전통을 지닌 학교로 변신하게 된다”고 했다. 칭화대 동문회 측은 이 같은 칭화대의 변신이 장난샹(蔣南翔) 총장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현대 중국 인재의 寶庫
 
장난샹.
  장 총장은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1966년까지 총장을 지내면서 기존 칭화대가 가진 과학기술 특성에다 정치적 이념성을 더하는 데 주력했다. 장 총장은 당시 대부분 동료들이 과학기술 분야를 전공한 것과 달리 칭화대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대학에서 당서기를 지내며 주로 항일운동, 공산주의운동 등에 참여했고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서기를 지냈다.
 
  그의 경력과 사상은 칭화대 책임자로 앉으면서 그대로 정책 방향에 반영됐다. 칭화대가 오늘날처럼 수많은 테크노크라트를 배출하며 칭화방(淸華幇), ‘후진타오-시진핑’이라는 두 명의 국가주석을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칭화대는 1978년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이과·경제경영·인문사회과학·건축학·법학·의학 부문 등을 만들었고 다시 종합대학교가 됐다.
 
  칭화대 역사가 중국근현대사였다면, 칭화대가 배출한 졸업생은 바로 현대 중국을 이끄는 인재다. 우선 중국공산당에서 보면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1965년 수리공정과), 시진핑 차기 국가주석(1979년 공정화학과),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1966년 무선전기과) 등 중국 국가서열 9위 내 3명을 배출했다.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상무위원 9명, 중앙정치국 위원 25명 가운데 현재 중앙정치국 위원인 류치(劉淇), 류옌둥(劉延東 1970년 공정화학과)을 포함해 역대 14명,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 각각 49명, 26명, 기율검사위원회 18명(서기 1명)을 배출했다. 전인대에서는 화젠민(華建敏) 현 전인대 상임위 부위원장을 포함해 76명의 상무위원(위원장 1명, 부위원장 8명), 국무원에서는 총리·부총리·국무위원 합쳐서 10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마오쩌둥의 비서 출신인 후차오무(胡喬木) 전 상무위원,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후원자로 그가 주석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쑹핑(宋平) 전 간쑤성 당서기, 야오이린(姚依林) 전 중앙정치국 위원, 왕한빈(王漢斌) 전 전인대 상무부위원장, 리시밍(李錫銘) 전 베이징시 당서기, 후치리(胡啓立)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주룽지 전 총리, 황쥐(黃菊) 전 정치국원 겸 상무부총리, 우관정(吳官正) 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이다.
 
  이 밖에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쩡페이옌(曾培炎), 왕셩쥔(王勝俊) 중국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검찰원검찰장 자춘왕(賈春旺),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급부상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우사오쭈(吳紹祖), 국가개발은행장 천위안(陳元), 쓰촨성(四川省) 성장 쑹바오루이(宋寶瑞) 등도 모두 칭화대 출신이다.
 
  또 성장(省長)·장관급 400여 명, 대학총장·당위서기 240명, 인민해방군 장군 70명, 공기업 CEO 284명이 칭화대를 졸업했다.
 
 
  兩彈一星에서 베이징올림픽 엠블럼까지
 
  1999년 10월 1일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을 맞아 과학자 23명에게 국가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 이름은 이른바 ‘양탄일성(兩彈一星) 훈장’. 원폭(原爆)-수폭(水爆)-인공위성 개발에 기여해 수여하는 훈장이라는 의미다. 이 가운데 첸웨이창(錢偉長)·궈융화이(郭永懷)·첸쉐썬(錢學森) 등 모두 14명이 칭화대 졸업생, 교수 출신이다. 이 가운데 첸쉐썬은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08년 조카인 로저첸 미 샌디에이고대 교수가 노벨화학상을 타서 다시 중국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수소폭탄의 아버지 주광야(朱光亞), 원폭실험을 최초로 성공시킨 덩자셴(鄧稼先), 중국의 퀴리부부라고 알려진 첸싼창(錢三强) 허쩌후이(何澤慧) 부부가 여기에 속한다. 또 칭화대 출신인 양전닝(楊振寧) 박사, 리충다오(李崇道) 박사가 각각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을 받았다. 2005년 10월 발사에 성공한 유인우주선 선저우 6호의 총시스템을 칭화대 출신인 왕융즈(王永志) 원사가 개발했다.
 

  또 국가최고과학기술진보훈장을 받은 18명 가운데 6명이 칭화대 출신이다. 자연과학과 공학분야 최고 학술기관인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과 공정원(工程院)의 역대원사 중 333명(26.8%), 146명(17.6%)이 칭화대를 졸업했다.
 
  건축학에서도 칭화대 출신의 활약은 눈부시다. 현대 중국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량쓰청이 이끌었던 칭화대 건축학과는 수도 베이징의 설계를 도맡았다. 칭화대 건축학과 교수와 학생들은 1958년부터 베이징의 10대 건축물(인민대회당, 혁명기념탑, 국가대극원, 혁명역사박물관) 등의 설계에 참여하거나 완성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공원 등의 설계도 칭화대 건축학과 교수 손에서 나왔다.
 
  우관중(吳冠中) 등의 유명 화가를 배출한 미술학과에서는 중국 국가 엠블럼, 인민대회당 내부 설계, 마카오 국가 엠블럼, 베이징 올림픽 문양과 마스코트 등을 설계했다.
 
 
  벤처기업의 요람
 
허쩌후이, 첸싼창 부부.
  칭화대가 우수한 이공계 인재를 배출하는 배경에는 국가의 막대한 지원이 있다. 칭화대 안에는 12개 국가중점 연구실, 6개 공학센터, 3개 국가공학실험실, 17개 국립연구소, 교육부 산하 주요 연구소 등이 들어와 있다. 기계공학과 출신인 셰진 공공관리학원 교수는 “전체 랩(Lab)을 다 합치면 수백 개가 될 텐데 매달 늘어나기 때문에 정확히 몇 개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칭화대는 순수 과학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대학이 만든 기술을 사업화하는 데도 가장 앞서 있다. 지난 1980년 중국 대학 내 처음으로 칭화기술서비스공사를 설립했다. 2003년도에 칭화대학기업그룹, 칭화쯔광그룹, 칭화과기원을 통합·재편하여 설립한 칭화홀딩스라고 하는 지주(持株)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산하에 칭화둥팡(東方)그룹, 칭화쯔광그룹 등 3개의 상장(上場)회사와 30여 개의 자(子)회사를 포함하여 90여 개의 출자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칭화둥팡은 지난해 약 182억 위안(3조9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칭화홀딩스와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합작 설립한 벤처캐피털, 국제 기술이전 및 사업화를 전담하는 칭화코웨이라는 사업화전문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최낙섭 칭화대 한국동문회 베이징지회장은 “지주회사 내 상장회사의 시가총액을 합하면 중국 상장기업 10위권 규모”라며 “서울대가 법인화를 추진하면서 칭화대를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칭화대는 TSC(칭화과학기술원)라는 브랜드를 중국지방정부가 세운 과학기술단지에 수출하고 있다. 최 회장은 “칭화대의 노하우, 브랜드, 인력과 지방정부의 투자가 합쳐져 지방에서도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칭화대 동문회보에 따르면, 지난 1999년부터 칭화대 출신이 세운 기업들이 미국 나스닥에 대거 입성하고 있다고 한다. 자동화과 1980년 입학생인 왕시(王犀)의 인터넷 보안업체 비아돌(Viador)을 시작으로 중국 대표 포털업체인 Sogou 등 12개 업체가 나스닥에 진출해 있다. 지난해에는 2010년 우톈취안(吳天全·경제관리 1986년 입학)이 만든 세계 최대 부동산 중개 인터넷 사이트 써우팡왕(搜房網)이 나스닥 입성에 성공했다.
 
 
  “칭화대는 카이스트+고려대”
 
4월 24일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최고 지도자 6명이 박수를 치며 칭화대 개교 100주년 행사장인 인민대회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칭화대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약 17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한국 졸업생의 숫자는 얼마일까. 칭화대 동문회 베이징지회를 찾았다. 칭화대 한국 총동문회는 지난 2007년 결성돼 한양대 건축학과 한동수 교수가 초대회장을 맡았고 현재 용인대 경영학과 박승찬 교수가 2대 회장을 맡고 있다. 최낙섭 한국동문회 베이징지회장에 따르면 학교 명성에 비해 한국 졸업생의 숫자는 베이징대 졸업생보다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2003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와, 2007년 칭화대 경제관리학원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얘기다.
 
  “칭화대는 인문계보다 이공계가 훨씬 많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국 유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진출 분야도 이공계나 경제 쪽 연구원, 교수들이 대부분이에요. 칭화대 학부에 한국인 입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1994년이니까, 이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문들이 많습니다.”
 
  외국 유학생으로 칭화대를 졸업한 손익계산서를 알아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칭화대를 한국인들이 졸업할 만한지가 궁금했다. 한국인 졸업생들은 대부분 매우 긍정적이었다. 박장혁(朴章赫ㆍ36) 모닝캄호텔 사장은 “칭화대 졸업장은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사업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96년 칭화대 중문과에 입학했고 그의 누나도 1995년 입학생이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중국인 파트너가 처음에는 저를 못 믿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칭화대를 졸업했다고 하면 바로 태도가 달라집니다. 한국인이라도 상관없어요. 그 후론 일사천리입니다. 또 사회 곳곳에 칭화대 출신이 박혀 있는데, 제가 동문이라고 하면 뭐든지 도와주려고 합니다. 칭화대 출신들이 이공계가 많아서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것 같은데, 오히려 베이다 출신보다 훨씬 더 잘 뭉칩니다.”
 
  최낙섭 회장도 박 사장의 말에 동의하며 “칭화대는 마치 한국의 카이스트와 고려대를 섞어놓은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엄청난 학교에 와버렸구나’
 
  중문학과 학부를 졸업한 중문학 석사 출신 유형석(柳炯碩·40) 베이징 제일학원 원장의 얘기다.
 
  “지방에 가서 칭화대나 베이다를 졸업했다고 하면 그 자체가 ‘신앙’이에요. 베이다 자전거 동아리 출신인 한국인 후배 한 명이 동아리 친구들과 자전거로 중국일주를 했다고 해요. 그 친구가 중국 내륙에 갔을 때 인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베이다 학생이 우리 마을에 왔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의 태도는 과거 우리 한국 시골 사람들이 서울대생에 대해 갖던 동경과 많이 달라요.”
 
  ―어떻게 다릅니까.
 
  “중국 사람들이 칭화대나 베이다 출신을 신앙처럼 받드는 건, 자기 자식을 그들처럼 만들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가 아닙니다. 이들은 항상 이들 학교 출신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중국을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존재, 그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먹고살 수 있다’ 뭐 이런 종류의 경외심입니다.”
 
  SK 중국에너지 임기택(林杞澤·46·칭화대 경영학 박사) 총경리도 “중국인들은 칭화대나 베이다를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대하듯 한다”며 “중국을 위해 뭔가를 해왔고 해주는 곳이라고 느낀다”고 했다.
 
  박장혁 사장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지난 1997년 칭화대와 베이다의 첫 조정경기에 칭화대 대표로 참여했다. 푸젠성(福建省)에서 조정 경기가 열렸는데, 당시 푸젠 성장이 직접 나와서 선수, 코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그는 처음 푸젠에 도착했을 때 두 학교 학생들을 보겠다고 길가에 도열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정말 엄청난 학교에 와버렸구나!’
 
 
  칭화대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칭화대 갈 만해서 성공한다
 
칭화대 100주년 역사관에 칭화대 출신 유명 학자, 교수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우측에 보이는 인물이 현 칭화대 교장 구빙린.
  칭화대 100주년을 취재하며 만난 중국인들은 칭화대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칭화 대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중국 사회에서 이점이 있거나 특별한 혜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칭화 대학교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이 모두 칭화대 출신일 뿐이다.”(쑨저 동문회보 편집장)
 
  “후진타오니 우방궈, 주룽지 모두 나중에 잘되고 나서 보니 칭화대를 나온 선배고 후배였구나 알았어. 칭화대 출신이라고 서로 연락하고 어쩌고 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100주년 행사를 하고 학교에서 또 초청을 해주니까 학교 구경이라도 했지 지금껏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고 살았어.”(칭화대 59년 입학생 리싱이·李星飴·69)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칭화대 학생들보다 베이징 대학교 학생들이 더 똑똑한 것 같아요. 칭화대 학생들은 공무원같이 무언가 틀에 박힌 것 같다면 베이징대 학생들은 더 자유롭고 활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칭화대는 기술을 만들고 베이다는 정신을 다룬다는 이야기가 맞을지도 몰라요.”(칭화대 경제학과 졸업생 왕밍밍·王明明·34)
 
 
  임무는 위중하고 갈 길은 멀다
 
  이번 100주년을 맞아 칭화대 안팎에서 찬사와 낙관적인 전망만 나온 것은 아니다.
 
  후진타오, 주룽지 등은 “칭화대가 아직 세계 수준의 대학이 되려면 멀었고 학문적 업적이 높지 않다”고 비판했다. 국영통신사인 신화사(新華社)는 지난 4월 24일자 시론에서 “칭화대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에 비하면 아직 미숙하고 어리다. 현재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썼다. 홍콩의 최대 신문 《밍바오》(明報)도 “칭화대가 자화자찬(自畵自讚) 할 것이 아니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바라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국제대학교육조사기구(QS)는 세계 대학의 최신 순위를 공표했는데 그중 홍콩대, 홍콩과기대, 베이징대가 세계 50위 안에 진입했으나 칭화대는 54위였다. 도쿄대는 홍콩대 바로 다음이었고 칭화대보다 앞서 있었다. 신화시론은 칭화대의 이 같은 성적표를 제시하면서 논어(論語) 태백(泰伯) 편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100년을 맞은 칭화, 임무는 막중하고 갈 길은 멀다.(百年校慶淸華, 任重而道遠)”
 
  2111년 4월 24일. 세 번째 100년이 시작될 때, 칭화호가 긴 세월 막중한 임무를 어떻게 완수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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