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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한 외교관 호리구치의 편지

130년 전의 비밀편지, ‘우리가 왕후를 죽였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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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 주모자,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친구에게 쓴 비밀 편지 8통
⊙ 나라의 고문(古文) 학자 3명이 2년 동안 해독 성공
⊙ “호리구치가 친구에게 쓴 여덟 통의 편지는 그 맥락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부합”(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
⊙ 소장자 하세가와 스티브, “이 편지가 한국에 남길 원한다. 일본에 있으면 없어질 가능성 높아”
  그날 밤 그녀는 달구경을 했다. 궁녀들과 함께였다. 명성황후 민씨. 닥쳐올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몇 시간 후 명성황후와 궁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믿었을 궁궐에서였다. 1895년 10월 8일, 지금으로부터 129년 전 일이다. 을미(乙未)년에 일어났기에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일본 외교관의 비밀 편지
 
호리구치의 편지를 소장한 일본계 미국인 수집가 하세가와 스티브.
  길었던 여름 어느 날 이돈수 한국해연구소 소장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는 아주 중요한 편지가 한국에 와 있다.’ 이 소장은 고지도(古地圖)와 한국 근현대 자료 전문 수집가다. 전문적인 수집가끼리는 서로 친분을 맺고 교류도 하는 게 골동(骨董)의 세계다.
 
  편지의 소장자는 일본계 미국인 하세가와 스티브(長谷川·Stephen J. Hasegawa·80). 하세가와 씨는 동아시아 근현대 유물(遺物) 수집가다. 특히 우표와 인지(印紙)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0년 전엔 한국 전쟁 기간 국군과 북한이 제작한 포스터 100여 점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월간조선》에 포스터를 분석하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하세가와 씨를 만났다. 조심스럽게 그가 파일을 펼쳤다. 일본어로 쓰인 편지와 봉투들이 보였다. 흘리는 필기체로 쓰여 있는데다 고어(古語)가 섞여 있었다. 알아보기 매우 힘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 단어가 읽혔다. 대원군(大院君), 왕후(王后), 죽이다(殺)… 바로 을미사변의 진실을 증언하는 편지였다.
 
  편지를 쓴 이는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년). 을미사변 당시 주(駐)조선 일본 영사관에 영사관보(補)로 재직 중이었던 인물이다. 고향 친구였던 한학자 다케이시 사다마쓰(1868~1931년)에게 보냈다. 총 8통이다. 1894년 11월 17일 자부터 1895년 10월 18일 자까지다. 편지지엔 ‘재조선국 경성일본영사관’이라 쓰여 있었다. 이 소장은 ‘한지가 아닌 일본 종이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이 편지는 일본 언론을 통해 한 차례 공개된 적이 있다. 《아사히신문》이 2021년 11월 16일 자에 보도했다. 편지가 세상에 공개된 경위와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진입은 내가 담당했으며, 담을 넘고 (중략) 겨우 안궁에 도달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뜻밖에 일이 쉽게 이루어져 오히려 허무할 정도였다.’ 기사에 편지의 자세한 내막은 담기지 않았다. 당시 편지가 제대로 독해되지 않아서다.
 
2021년 11월 16일자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호리구치 서간. 사진=아사히 신문 캡처
 
  2년 만에 해독 성공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라에서 고(古)문학을 전공한 교수진 3명이 2년간 달라붙어 읽어냈다. 그 내용을 재일사학자 김문자(金文子·73)씨가 분석했다. 편지 해독에 2년이나 걸린 이유는 편지 원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필기체를 알아보는 것도 문제지만, 만연체 형식도 난관이다. 한 문장이 끝도 없이 계속되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는 부분도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일본어 표현을 비롯해 중국 한자까지 섞여 있다. 이를테면 흥선대원군이 쓴 한시(漢詩)를 인용한 대목이다. 하세가와 씨 역시 “(현대 일본어로) 번역 전에는 대략적으로만 이해했고, 자세히는 이해 못 했다”고 말했다.
 
  재일사학자 김문자씨는 을미사변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을미사변이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라는 걸 밝혀냈다. 저서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에 잘 정리되어 있다.
 
  김문자씨는 편지를 분석해 논문을 썼다. 2023년 12월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사연구회논문집》에 논문의 일부를 발표했다. 제목은 ‘왕비를 죽였다-새롭게 발견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서간에서’. 김씨의 논문을 바탕으로 편지가 담고 있는 을미사변의 진실을 살펴보겠다.
 

  1895년 10월 7일 밤 조선 군부 고문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구치, 영사관 경찰서장인 오기하라 히데지로 경부와 순찰들, 장사(壯士)라 불리는 자들 수십 명이 무장하고 용산에 집합한다. 이들은 공덕리에 머물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나온다.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 경성수비대와 합류해 경복궁에 침입한다.
 
  조선군 훈련대는 공사관 무관인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경성수비대 소속의 사관 및 하사관을 활용해 양성하고 있던 조선군이다. 구스노세는 훈련대의 양성에 관해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중장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훈련대는 사건 당일 밤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야간 훈련 명령을 받고 경복궁 앞으로 출동해 있었다.
 
 
  미우라 공사가 지휘한 을미사변
 
을미사변 당시 주조선 일본 영사관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
  경성수비대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탄생했다. 사건 당시, 제18대대가 경성수비대 임무를 맡고 있었다. 18대대는 3중대에 편제되어 있었다. 원래는 제1, 제2중대가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제3중대는 공사관과 영사관이 있는 일본인 거류지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10월 8일 새벽부터 제3중대도 광화문 앞으로 이동해왔다. 조선공사 미우라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해 의존한 군사력이 바로 이 경성수비대다.
 
  대원군을 태운 가마가 경복궁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광화문 앞에는 일본군이 증병되어 있었고, 일본군과 훈련대 병사들이 왕궁을 포위해버렸다. 보고를 받은 고종은 일본 공사관에 사자(使者)를 보내 미우라 공사를 호출한다. 이른 새벽이었음에도 미우라 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서기관, 통역관은 정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경성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왕궁수비병을 쫓아버리고, 호리구치와 오카모토 등의 암살단은 궁궐 가장 안쪽, 왕비의 침실로 진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 이외에도, 궁내대신, 훈련대 연대장, 궁녀들이 살해당했다. 이미 날이 밝아 10월 8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던 성공 소식을 받은 미우라 일행은 경복궁에 도착한다. 장사들에게 시체 인양을 명령하고, 고종을 알현한다. 알현 자리에는 일본군이 데려온 대원군도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미우라는 고종에게 세 통의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한 통에는 ‘이제부터 일절 국무는 내각에 맡겨 처리할 것’이라는 내용, 다른 두 통에는 궁내대신 등을 임명하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여기에 서명한다. 10월 7일 밤부터 10월 8일 아침까지 경복궁을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다.
 
 
  우정 깊었던 호리구치와 다케이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아들 호리구치 다이카쿠. 시인 겸 프랑스 문학자다.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1865년 1월에 현재의 니가타현 나카오카시 아타고 마을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사법성법학교의 관비학생이 되었다. 8년에 걸쳐 프랑스인 교사에게 프랑스어로 프랑스 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관비생은 수업료가 무료이고 매월 용돈까지 받았다. 입학시험은 자치통감, 논어, 맹자에서 출제했다. 이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호리구치는 나카오카의 한학숙, 성의숙에 들어갔는데, 바로 여기에서 다케이시 사다마쓰를 만난다. 다케이시는 호리구치보다 세 살 어렸지만 이미 그때부터 한학 실력이 출중했는지, 호리구치의 시험 공부를 상당히 도운 듯하다.
 
  호리구치가 입학한 직후 사법성법학교는 제국대학에 흡수된다.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이 된 거다. 호리구치는 대학 재학 중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제국대학의 아카몬 앞에 살던 시절이었기에 아들의 이름을 ‘다이가쿠(大學)’라 지었다.
 
  1893년, 호리구치는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대학 졸업 이듬해인 1894년 9월, 제1회 외교관급 영사관 시험에 합격한다. 합격자는 단 4명이었다. 호리구치가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시작됐을 때다. 호리구치는 11월에 조선의 인천영사관에 영사관보로 부임한다. 이듬해 3월에는 경성영사관으로 이동한다. 약 반년 후인 10월 8일, 황후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서간 8통은 호리구치의 인천 부임 직후부터 사건 이후까지 두루 걸쳐 쓰였다.
 
  호리구치와 다케이시의 우정은 니가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둘의 우정을 기리는 동상도 있을 정도다. 나카오카시 와카미야신사의 경내에 세워져 있는데, 일본 전통복 차림의 다케이시와 양복을 입은 호리구치가 손을 잡고 있는 흉상이다. 그 고장의 유지가 돈을 모아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동생, 다케이시 히로사부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히로사부로는 당시 저명한 조각가였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 중 제3서간에 히로사부로의 얘기가 나온다. 호리구치는 히로사부로가 미술학교를 경험해보길 강하게 권한다. 결과적으로 히로사부로는 조각가가 됐다.
 
 
  “대원군에게 쓸 답시 고쳐달라”
 
  편지가 쓰인 건 1894(메이지 27)년 11월 16일부터 1895(메이지 28)년 10월 18일까지의 11개월간이다. 제1서간부터 제4서간까지는 거의 매월 1회꼴이다. 7개월 반 정도 흐른 후 제5서간, 즉 사건 전일의 편지가 쓰인다. 서간의 전부가 남아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편지를 보면, 매번 다케이시로부터 빌린 돈의 상환 계획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빌려준 돈에 대한 기록이 담긴 편지만 다케이시가 선택해 남겨둔 것일 수도 있다.
 
  제1서간에는 ‘지난 7일에 (다케이시가) 보내준 편지를, 16일 오후에 읽음’이라 쓰여 있다. 우편으로 니가타에서 인천까지 9일이 걸렸단 얘기다. 서울에서 니가타까지도 역시 열흘 정도 걸렸을 터다. 따라서 사건 전날(10월 7일)의 제5서간, 사건 다음 날(10월 9일)의 제6서간을 다케이시가 받은 것은 각각 10월 17일, 19일로 추정된다. 8통의 편지 중 제5서간과 제6서간이 가장 중요하다.
 
  제5서간은 1895년 10월 7일, 황후가 살해되기 전날에 쓰였다. ‘대원군으로부터 한시를 받았고, 답시(答詩)를 만들어보았다, 더 좋게 다듬어주지 않겠나’라며 한학자였던 다케이시에게 부탁하는 내용이다. 호리구치가 대원군과 면담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들은 언제 만났을까. 1932년, 호리구치는 대원군과의 한시(漢詩) 응수 장면을 상세하게 재연한 회상기 〈10월 8일 사건의 발단〉을 《문예춘추》 11월호에 게재했다. 이것을 자신의 수필집 《외교와 문예》에 다시 실었다. 또다시 제목을 〈민비 사건의 추억〉으로 변경해 《군사사연구》에 실었다. 이 글들은 아직도 ‘을미사변 대원군 주도론’, 혹은 ‘대원군-미우라 공모론’을 논할 때 근거로 쓰인다. 김문자씨는 ‘호리구치의 회상기는 창작’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던 차에 사건 전일 호리구치가 쓴 서간을 보고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예상보다 앞당겨진 시해작전
 
  호리구치는 ‘회상기’에 ‘미우라 공사 부임 후, 즉 1895년 9월 이후에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 썼다. 김문자씨는 두 사람이 만난 게 1895년 4월경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준용 역모 사건’ 이전에 만났을 걸로 보기 때문이다. 이준용 역모 사건은 대원군의 손자이자 국왕의 조카인 이준용(후일 이준으로 개명)이 1895년 4월 18일 막 신설된 재판소에 소환된 사건이다. 청국군·동학농민군과 연계해 일본군을 공격하고, 왕위를 찬탈해 반일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 재판은 법부 고문 호시 도루(星亨·1850~ 1901년)가 지휘했다.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1844~1897년) 외무대신과 이노우에 구 조선공사는 외교기밀비로 호시 도루의 빚을 청산해주고, 조선의 법부 고문에 앉혔다. 호시 도루는 시해 사건 전날인 메이지 28년 10월 7일 미우라 공사 앞으로 법부 고문으로서의 업무보고서를 제출한 후 10월 11일에 인천을 거쳐 귀국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호시는 1895년 4월 15일에 법부 고문에 임용되고, 조선의 재판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재판소 구성법을 편제하고 발포, 이에 근거해 4월 20일에 특별법원을 설립하고, 이준용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후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8월에 석방된다.
 
  대원군은 손자를 만나러 한강 선착장까지 간 것이 발각되어 공덕리의 별저(別邸)에 연금되었다. 석방된 이준용도 여기에 들어와 대원군과 함께 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준용 역모 사건 이전 대원군은 부담 없이 일본인을 만났다. 대원군 방문기가 일본의 신문에 실렸을 정도다. 사건 이후엔 대원군 면회가 쉽지 않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리구치가 회상기에 일본인 여행객으로 위장해 경비원들에게 돈을 내고 대원군을 면회해 필담으로 한시를 나누며 궐기를 촉구했다고 썼는데,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제5서간을 보면, 호리구치는 자신의 한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다케이시에게 좀 더 잘 만들어주지 않겠냐고, 빨리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서울과 니가타 사이를 우편이 왕복하려면 적어도 20일이 걸렸다. 당시 조선에 체재하면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년)과 같이 호리구치의 동료였던 오사노 뎃칸(與謝野鐵幹·1873~1935년)이 후에 말한 것처럼, 호리구치도 11월 상순에 왕비를 시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3시간 버틴 대원군
 
  제6서간은 1895년 10월 9일, 즉 사건 다음 날에 쓰였다. 하세가와 씨의 파일을 보니 편지지는 8장인데, 봉투는 9개다. 8통 중 이 서한만 이중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편지의 끝부분에는 다른 서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현이 쓰여 있다. ‘입 밖에 내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이 서간의 내용이 기밀로 남아야 한다는 걸 호리구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편지엔 현직 외교관이 임지(任地)의 왕궁에 침입해 왕비를 죽였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사 중에서도 드문 사료다.
 
  제6서간엔 7일 오후 7시 영사관을 출발한 후 경복궁에 침입해 황후를 살해할 때까지의 경로와 시각이 적혀 있다. 호리구치는 용산에서 오카모토 야나유스케, 영사관 순사들, 장사라고 칭하는 자들과 함께 공덕리의 대원군 별저로 이동한다. 대원군을 데리고 나온 다음 조선훈련대·경성수비대와 합류해 경복궁에 침입, 왕비를 살해했다고 쓰여 있다. 장사 중 한 명인 고바야카와 히데오(당시 《한성신문》 편집장)가 쓴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시각에 대한 기술에 두 개의 글이 서로 다른 대목이 있다. 고바야카와는 대원군과의 교섭에 꽤 시간이 걸렸다고 기록했다. 대원군이 일본 측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호리구치는 편지에 ‘담판’이라고 썼다. 고바야카와는 남대문 부근, 다시 서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약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기록했다. 원래 오전 4시경 경복궁 침입 예정이었던 것이 크게 지체됐다고 기록했지만, 호리구치는 이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호리구치의 조작
 
호리구치가 쓴 편지.
  이 때문에 호리구치가 쓴 ‘시각’은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대원군 별저습격 시각 8일 오전 1시경/ 대원군 데리고 나온 시각 2시 반경/ 경복궁 침입 시각 4시 반경’으로 썼다. 이것은 명확히 사실과는 다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산 명령에 화가 난 훈련대가 대원군을 앞세워 왕궁에 침입해 왕궁수비병과 충돌했다, 소동을 다스리기 위해 경성수비대가 출동했다, 이 소동 속에서 황후가 죽었다’고 하는 잘 만들어진 연극이 완성됐을 터다.
 
  실제로는 고바야카와가 증언한 대로였다. 대원군 가마 앞뒤에 훈련대를 붙이고, 그 훈련대가 도망치지 않도록, 그 앞뒤를 경성수비대가 둘러싼 대열이 경복궁에 침입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이 때문에 서양인을 포함한 많은 목격자가 나왔다. 일본인 및 일본군의 관여를 숨길 수 없게 됐다.
 
  호리구치는 10월 11일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긴 편지를 쓴다. 거기에는 시각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원군 별저 습격 시각 8일 오전 2시/ (대원군 데리고 나온 시각은 안 쓰여 있음)/ 서대문 도착 시각 4시 반/(경복궁 침입 시각 안 쓰여 있음).
 
  그리고 계속해서 ‘내실에 들어간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다. 때는 5시 반. 하늘은 완전히 밝았다’라고 썼다.
 
  2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동일 인물이 쓴 시각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원군 주모론’을 날조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던 호리구치가 대원군이 쉽게 동행에 응하지 않았다고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김문자씨는 분석했다. 다케이시에게는 계획보다 30분 지연된 시각을 썼지만, 온갖 정보가 모이는 하라에게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대원군을 데리고 나온 시각과 경복궁 침입 시각을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10월 8일 서울의 일출 시각은 6시 반경이었다. 하늘이 완전히 밝았다는 것은 적어도 일출 시각이 지났다는 뜻이다. ‘때는 5시 반’이라고 쓴 것 역시 작전이 크게 늦어진 것을 감추려 호리구치가 조작한 걸로 추측된다.
 
 
  사실 담은 우치다의 편지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사다쓰치 영사는 하라 외무차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오늘 아침 5시 반경, 포성에 놀라 일어나 나가 보니…’ 이것은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최초의 총격전이 있었던 시각을 말한다. 즉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은 이후 꽤 시간이 경과한, 완전히 밝아진 후였다.
 
  〈민비조락사건〉을 보면, 원래 계획은 남대문으로 들어가 오전 4시경 경복궁에 침입할 예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는 급하게 서대문으로 들어가는 걸로 변경됐다. 공덕리와 서대문을 연결하는 길은 2개가 있는데 일본군과 대원군의 가마를 멘 일행이 서로 다른 길로 가고 말았다. 말에 타고 있던 호리구치와 오기와라가 군대를 찾으러 갔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 4시 왕성에 진입한다는 예정은 전부 어긋나서 시간은 크게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민비조락사건〉에는 쓰여 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으로 급히 변경한 이유는 대원군 때문이었다. 일본도를 든 살기등등한 일본인들이 침입했는데도, 대원군은 3시간여를 안 나가고 버텼다. 이 때문에 남대문의 새벽 시장에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사관은 급히 서대문에서 입성하는 걸로 변경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는데, 지시 전달이 잘 안 된 거다.
 
  호리구치는 계획대로 잘 진행된 것처럼 썼다. 이것은 미우라 공사와 상의해 결정한 줄거리라고 볼 수 있다. 우치다 영사가 10월 9일 하라에게 쓴 편지에는 범행에 가담했던 장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신문기자였다. ‘어제 오후 이들이 모여들어 미우라 공사의 방에서 본토(일본) 신문에 낼 통신을 협의’라고 썼다.
 
  범행 당일인 8일 오후 미우라 공사의 지시 아래, 관계자가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호리구치도 이 자리에 있었을 터다.
 
 
  ‘왕비를 죽였다’
 
을미사변 당시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편지에는 ‘진입은 담을 넘어 문을 여는 것을 열대여섯 번 하고 겨우 안쪽 어전에 도착, 왕비를 살해했다’라고 쓰여 있다. 생략되어 있는 주어(主語)는 ‘우리’일 것이다. 호리구치는 장사대의 지휘관을 자임하고 있었다.
 
  호리구치는 10월 11일 하라에게 쓴 편지에 ‘미우라 공사 입관, 대원군과 담화. 소생은 계속 미우라 공사의 옆에 대기’라고 썼다. 미우라가 입궁하고, 장사들이 일제히 왕궁 밖으로 나갔지만 호리구치만은 미우라 일행과 함께 있었다. 왕궁을 나온 것은 오후 3시였다.
 
  호리구치는 다케이시에게 쓴 편지 외에는 어디에도 ‘왕비를 죽였다’고 쓰지 않는다. 살해 작전의 흥분이 식지 않은 채, 고향 친구에게 ‘왕비를 죽였다’고 고백한 제6서간이 특히 귀중한 사료인 이유다.
 
  이들의 목적지는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던 왕가의 거주지 건청궁이었다. 경복궁 안에는 문과 담으로 둘러싸인 다수의 건물군이 있었다. 건청궁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건물군의 담을 뛰어넘어서, 안쪽에서 문을 여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호리구치가 ‘담을 넘어 문을 여는 것을 열대여섯 번 하고 겨우 안쪽 어전에 도착했다’라고 쓴 것도, 과장이 아니다. 공사관에서는 미리 사다리와 도끼를 준비해놨다.
 
  결국 제6서간을 통해 황후 살해를 꾀한 자들이 사전에 사다리와 도끼를 준비한 후, 일직선으로 안쪽 어전, 건청궁에 침입해 들어간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스로 장사 대장을 자임하고 국왕의 면전에서 장사들의 폭행을 지휘한 영사관 호리구치의 손을 통해 ‘왕비를 죽였다’는 명백한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을미사변 직후 이미 일본 신문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대원군이 훈련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다. 왕비는 행방불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호리구치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전자에서는 대원군의 한시에 답시의 대작을 의뢰하고, 후자에서는 왕비를 살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케이시는 꽤 놀랐을 터다.
 
  김문자씨는 을미사변이 ‘명성황후 살해’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고 봤다. 진짜 목적은 친일 정권 수립이었단 얘기다. 왜 대원군과 훈련대를 작전에 참여시켜야만 했을까. 이 사건을 조선인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해산 명령을 받은 훈련대가 격노해 대원군을 모시고 왕궁으로 갔다는 이야기와 대원군이 정권 재탈환 의지를 호리구치와의 한시 대담을 통해 미우라 공사에게 전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다. 호리구치 서간은 특히 두 번째 이야기를 일소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정부가 계획
 
  129년 전의 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일본 현직 외교관이 ‘왕비를 죽였다’고 자백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가 을미사변을 일본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여기고 있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정부는 가담한 자들을 일본으로 소환했다. 이들은 재판을 통해 ‘증거 불충분’ 면소(免訴) 처분을 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 뒤늦게 영사관이 나서서 시해 작전을 지휘했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들이 나왔다. 일본의 학자 야마베와 재일사학자 박종근은 일본공사 미우라가 사건을 주모해 일본 군인, 외교관, 영사관, 경찰, 대륙낭인 등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둘째,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암살이었다는 점이다. 을미사변을 연구한 사학자 신국주 역시 명성황후 살해가 일본의 ‘대한(對韓) 비상수단’으로 사전에 계획된 정략이었다고 주장했다. 미우라 공사가 주모해, 일본수비대가 주역을 맡고, 일본 민간인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자체가 거의 안 알려져 있다. 학계의 연구도 많지 않다. 그나마 쓰노다 후사코의 책 《민비암살》로 알려진 정도다. 지속적으로 을미사변을 연구하는 김문자씨 같은 일본 학자가 소중한 이유다. 편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하세가와 씨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편지가 진품일까 의심할 수 있다. 김문자씨는 호리구치가 쓴 다른 서간과 필체를 비교했다. 호리구치가 하라 다카시에게 쓴 편지 원본이 하라 다카시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와 비교해보니 같았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영수 연구위원 역시 이 편지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 말했다.
 
  “호리구치가 친구에게 쓴 여덟 통의 편지는 그 맥락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합니다. 을미사변의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130년 만에 드러난 진실
 
  이 편지는 어떻게 13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편지의 수신인, 즉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인생을 잠깐 살펴보자. 다케이시는 호족 집안 출신으로 1868년에 태어났다. 1931(쇼와 6)년 6월 16일 63세로 사망했다. 《니가타신문》 6월 18일 자에 ‘시인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서 시는 한시(漢詩)를 뜻한다. 기사에는 ‘시문에 있어서는 현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대가’라 쓰여 있다. 사다마쓰의 장남 사다이치는 교토 근교에 있는 산토리 야마자키 공장에서 근무했다. 이때 부근에 주택을 지어 이사한다. 1957년 사다이치가 죽고, 그의 아들 사다오는 2000년에 사망했다. 이후 사다오의 부인, 그러니까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손자 며느리가 혼자 지냈다. 원래 며느리가 사망하기 전에 편지를 태웠어야 했는데 알츠하이머에 걸려 태우지 못했다고 한다. 며느리가 죽은 후 2017년 집이 매각되어 헐리게 된다. 대대로 깊숙이 보관해오던 호리구치 서간이 고서시장에 나온 것도 이때로 보인다.
 
  하세가와 씨의 설명이다.
 
  “어느 날 골동품 판매상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편지 봉투에 조선의 소인이 찍혀 있으니 연락을 한 겁니다. 제가 조선 관련 골동품을 수집하는 걸 아니까요. 소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했을지 모릅니다. 판매상은 편지의 내용을 몰랐습니다. 우표와 소인을 보고 ‘아 이건 조선에 관련된 거구나’ 생각하고 연락한 거죠.”
 
  ― 편지를 본 후 내용을 바로 짐작했나요?
 
  “그렇지요. 편지를 직접 보고 표정을 못 숨겼습니다.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그래서 판매상이 중요한 서간이라는 걸 눈치챘습니다. 싸게 사진 못했어요.”
 
  ― 《아사히신문》에 소개 기사가 나간 후 어떤 반응이었나요.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나고야에 살고 있다고 하니 서간을 들고 도쿄에 있는 대사관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안 갔어요. 한국에서 1932년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이 탄생했습니다. 셔우드 홀 박사가 만들었지요. 그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제가 영어로 출판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카탈로그지요. 그때 미국에 사는 홀 박사의 딸 필리스를 만나러 직접 갔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보러 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나고야로 왔다면 보여줬을 겁니다.”
 
  ― 이 편지가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합니까.
 
  “이 문서는 일본보다 한국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보낸 소인까지 그대로 찍혀 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이걸 기초자료 삼아 연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에 계속 있으면 없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죽기 전날 밤 명성황후는 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을까. 왕족의 평안을 바랐을까. 기억해야 할 점은 명성황후는 비참한 죽음을 통해 조선인들의 가슴에 은은한 한(恨)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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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튄매냐    (2024-10-05) 찬성 : 2   반대 : 2
민비가 일본에 의해 죽은것은 이미 알고있는것이며, 이것이 대원군과 조선훈련대가 어떻게 엮이었는지는 대략짐작은 하나,,, 가장 중요한 민비가 왜 ,,, 일본의 눈에 가시가 되어 죽을수밖에 없게 되었는지,,,그 역사적 흐름을 정확히 알려줘야지,,,,단지 민비 아니 명성황후라 호칭하며 그죽음이 한민족의 한,,,어쩌고 하는 감정적인 마무리로 어떤 선동을 하려는것인지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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