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요와 고민을 만든 1980년대의 대전환은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교실에서 이뤄졌다. 해방된 직후부터 불렸던 ‘졸업식 노래’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 1964년 6·3사태 당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1945년 해방둥이들이었다. 사진=조선DB
지난 8월 26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추모사를 읽었다. 쌍용그룹 회장으로서 한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작년 별세한 고(故) 해옹 김석원(海翁 金錫元) 회장 제1주기 추모식(강원도 용평)에서였다. 나는 같은 해방둥이로서 수십 년에 걸쳐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 인연이 있다.
해방둥이의 해방둥이에 대한 추모사
김석원 회장 1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아니 벌써 1년?”이란 놀라움과 함께 이참에 고인(故人)의 기억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1945년생 해방둥이 사이로서 1985년 8월호 《월간조선》에 ‘40대 기수’ 인터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 세대에 걸쳐 참으로 긴 대화를 나눈 관계였습니다. 1975년 선친 성곡(省谷) 선생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만 서른에 쌍용그룹 회장이 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김 회장은 ‘유쾌한 청년’ 같은 재벌 총수가 되어 있었고 “종합상사에 한국의 엘리트가 다 모여 있다”는 식으로 자신만만해하였습니다. 다시 그 9년 뒤 1994년에 열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했을 때는 제가 잡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해방둥이로서 한국 나이로 벌써 50세, 재벌 회장 재직 20년째를 맞은 김 회장은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조용한 말투로써 국제화, 교육, 자동차, 경영철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김 회장은 “국제적 규칙을 지키는 것, 폭넓은 교양,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가 바로 국제인의 3대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국제화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 3년 전 강원도 고성에서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던 김 회장이 당시 화두(話頭)가 되어 있었던 ‘세계화’에 대하여 한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한 편의 좋은 강의였습니다. 다시 그 1년 뒤, 추석을 앞둔 1995년 가을, 저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 회장을 만나 이태원 자택에서 또 밤새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는 벌써 세 번째 담뱃갑을 열었다. 보통 피우던 두 갑 수준을 넘어선 것은 스스로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총수로서 달려왔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20년 경력이 이전투구(泥田鬪狗)판의 정치 세계에서 어떻게 발휘될까. 해방둥이로서 만 50에 제2의 인생을 출발한 김 위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서니 보름달이 마당 가득 비추고 있었다.〉
제가 성곡언론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대학의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 니만 펠로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이 지난 1997년 가을, 외환 위기의 파도가 덮치고 있을 때, 이곳 용평에서 언론인 초청 만찬이 있었고 김석원 회장은 하회탈을 연상시키는 그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으로 재회를 반가워하면서도 “요사이 하루하루가 어렵다”고 약한 면을 보이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무렵인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김 회장은 그만두겠다는 임원에게 “난 그러면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험한 세상의 다리를 넘어 진격한 세대
[어려운 시절 많은 것을 이루시고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는 성곡 선생 같은 선배 세대의 시대적 역할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 즉 이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리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진격한 저희 해방둥이들은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는 첫 세대가 되었으며 가장 빨리 높게 멀리 달렸고 그래서 가장 크게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세대의 선두 주자 김석원 회장이 넘어졌을 때, 그 많던 친구들이 사라져 갈 때 그를 위하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셨던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체제로 건국한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인들이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들의 분투(奮鬪) 덕분에 우리는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즉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김석원 회장은 그 이야기의 주요 필자 중 한 분이십니다. 시대가 바뀌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士)자 계급에 속하는 신종 양반 세력, 언론인·검사·판사·학자·정치인·관료들이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되자 저는 어느덧 재판받는 김석원 회장에 대한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쓰는 처지가 되었고 김석원이란 이름 석 자는 잊혀가고 있었습니다.
2011년 7월, 한국이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권을 딴 직후 《조선일보》 최보식(崔普植) 기자가 김 회장 인터뷰를 통하여 스키 인구가 4000명일 때 용평을 개척하여 올림픽의 길을 연 ‘숨은 공로자’라고 쓴 것과 작년 별세 직전 새만금 잼버리가 파행을 하자 성공했던 고성 잼버리가 소환된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김 회장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교양인이셨고, 기업인, 스포츠맨, 국제인, 교육가, 언론인, 봉사자, 그리고 월남전 파병 해병대원으로서 그가 남긴 거대하고 다양한 유산과 기억들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고 대한민국 문명 건설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사표 내나?”
오늘은 김 회장을 추모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의 감정도 희미해지면서 기억으로 퇴색되고, 기록으로 변했다가 종국엔 기념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병주(李炳注) 선생의 말을 빌리면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된다”고 합니다. 김 회장 별세 20주년, 50주년, 100주년은 어떤 모습일까는 여기 모이신 분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큰 인물의 진짜 승부는 관뚜껑이 닫힌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억과 기록과 기념의 싸움이 될 것이며 후손과 후배들이 어떻게 무엇을 계승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입장에서 늘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답답함을 토로하던 김 회장이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했을 때의 그 절대고독은 한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해방둥이 세대의 잘못은 너무 바쁘게 살았다는 핑계로 선배 세대의 위대한 이야기들을 자랑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추모식은 슬픔의 추억이 아니라 김 회장의 성공과 실패를 다 아울러 그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자는 다짐과 희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김석원 회장님, 당신은 좋은 세상을 만나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떠났으니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저희는 자유통일을 보고 가겠습니다.
大轉換의 年代記
내가 김석원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1980년대의 정중앙인 1985년 여름이었다. 그해 2·12 총선으로 정치에 복귀한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세력의 신민당은 강력한 제1야당이 되어 재야(在野) 세력과 손잡고 전두환 정권을 밀어붙이며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제적 삶은, 요사이 말로 하면 민생(民生)은 소란 속에서도 발전하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표정을 입혀 나라 분위기는 밝았다. 1980년대 후반, 거리의 민주화운동은 베이비 붐 세대(당시의 2030 세대)가 주도했지만 정치, 군대, 기업, 문화, 언론 등 국가의 중추부는 해방둥이들이 핵심인 40대가 장악, 격동의 시대를 이끌고 있었다. 1980년대, 특히 후반기 역사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4050 세대와 2030 세대의 공동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석원 같은 해방둥이들이 한국 사회의 주력군인 3040 세대로 뛰었던 1980년대의 한국은 대전환(大轉換)의 시대였다. 5·18로 시작되어,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향하여 미래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의원이 명패를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이 10년 동안 한국은 유례가 없는 성장과 변모를 거듭했다. 해방둥이들과 베이비 붐 세대가 일으킨 국민적 에너지의 대폭발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세계사의 대전환 흐름에 편승했으므로 가능했다. 그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였다. 국제 공산주의 붕괴라는 천하대세(天下大勢)에 한국을 올라타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1980년대의 지도 그룹이다. 전두환·노태우(盧泰愚)·이병철(李秉喆)·정주영(鄭周永)·김영삼·김대중·박세직(朴世直)·이어령(李御寧) 등등, 이들 밑에서 핵심적인 실무를 맡았던 정치와 경제 부문의 40대 스타 그룹은 살아 있으면 지금 80대다. 이명박(李明博)·김재익(金在益, 아웅산 테러로 사망)·이종찬(李鍾贊)·박철언(朴哲彦)·오명(吳明)·김종인(金鍾仁) 등. 1980년대의 주력인 4050 세대는 일제 교육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첫 세대였다. 이들이 1980년대의 10년간 한국을, 경제성장률 1위(연평균 10.1%) 국가로 만들고 민주화의 길을 열어 극일(克日)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30년 뒤 약소국이니 강소국 대신 강대국, 글로벌 중추국가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를 하고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넘고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세계 7대국 중 하나다.
개방화·민주화·국제화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손을 잡고 ‘악의 제국’을 압박하는 사이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이 확산되면서 스탈린식 국제 공산주의는 서울올림픽 성공 직후인 1989년에 대붕괴를 시작, 그해 12월 루마니아 차우세스쿠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한국의 대전환은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세계의 대격변과 맞물렸다. 1980년대 한국의 국가 지도부가 대전환을 주도한 세계 지도자들과 호흡이 맞는 실용적 국제파였다는 점은 행운이었다.
●1980년대 한국 경제는 초고속 성장으로, 소란스러운 민주화의 충격을 흡수하고도 남았다. 박정희(朴正熙)가 유신독재라는 욕을 무릅쓰고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힘으로 무역은 만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고, 삼성·현대 등 대기업은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갔다. 6·29 선언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딛고 펼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 시야(視野)의 대전략이 북방 정책이었고, 이는 경제의 지평뿐 아니라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혔다. 북방 정책의 세 주역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 수석은 50대, 박철언 정무장관은 40대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선제적 IT 인프라 확충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조선일보》의 구호대로 미래를 위한 거대한 투자가 되어 2024년의 한국인들이 그 과실을 따 먹고 있다(그러면서도 전두환에 대한 침 뱉기를 계속하고 있다).
●4050이 이끈 1980년대 한국은 개방화·민주화·국제화를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이뤘다. 이 거대한 대전환의 제도적 결과물이 제6공화국이다. 전두환·노태우가 합작한 6·29 선언은 당시의 2030 세대(주로 베이비 붐 세대)가 들고일어난 민주화의 에너지를 직선제 개헌으로 흡수, 유혈(流血) 사태를 피하고 평화적 체제 전환의 길을 열었다.
●1980년대는 그 후의 한 세대를 준비하고 규정한 셈인데 정신 면에서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4050이 막지 못한 종북(從北) 주사파의 등장과 한글 전용(專用)의 확산은 한국어의 반신불수(半身不隨)와 정치의 양아치화를 불렀다. 어휘력(語彙力) 감퇴에 따른 분별력의 약화, 국민 교양과 국가 엘리트의 실종 사태는 정치의 저질화를 가속화시켜 물질적 발전을 상쇄(相殺)할지도 모른다.
베이비 붐 세대가 변혁의 動力源
윤석열(尹錫悅) 대통령과 이재명(李在明)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80년대를 20대로 살았고 그 인격에 시대의 그림자가 보인다. 80년대의 사회적 변혁은 1955~1961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당시의 2030, 그 일부는 지금 586 세대가 되어 있다)가 동력원(動力源)이었다. 나는 1984년 7월호 《월간조선》에 이 세대의 역할을 분석한 기사를 썼다.
〈6·25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도 생명들은 솟아났다. 총칼이 솎아낸 수백만 명의 목숨들을 서둘러 보충하려는 듯 주렁주렁 태어난 그들에게 인구학자들은 ‘다출산(多出産) 세대’, 또는 ‘베이비 붐 세대’라는 학명을 붙였다.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높았던 1955~1961년 사이에 난 사람들이다. 만 23~29세의 청년들이다. 1984년 1월 1일 현재 567만 명, 전 국민의 14%, 전체 유권자의 24%를 차지하는 막강 파워 그룹이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가 그 이정표에서 한국 사회에 숱한 경쟁, 팽창, 홍수, 적체 현상을 일으켰는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주체 못 할 잠재력을 키워온 그들이 오늘날 드디어 대폭발의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체력, 욕구, 정열, 도전심, 문제의식 등 모든 부문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 집단은 면학, 취직, 결혼, 출산 등 이동과 활동이 가장 격렬한 생활 단계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수레를 끌고 달릴 준마가 될 것인데 문제는 수레가 너무 가볍고 고삐는 너무 약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주류인 20대는 전체 유권자의 36%나 되어 거대한 ‘표의 힘’으로 한국의 정치 기상도를 좌우할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세대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운명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고 했었는데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유권자의 약 60%를 차지한 당시의 2030 세대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학적 선거 전략을 일거에 깨부수고 민주화를 대세로 만드는 주권적 결단을 내렸다.
1985년 2·12 총선이 分水嶺
선거일 25일 전에 급조(急造)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김영삼 계열이 주도한 이른바 선거 투쟁을 통해 운동 기간에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직선제 개헌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방학 중이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야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집권 민정당은 35.2%의 득표율로 87명(전국구 포함 총의석은 148석)이 당선되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한 명씩, 부산에선 3명이 낙선했다. 전두환 정권 공격에 앞장섰던 신민당은 선명투쟁성으로 2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50석(전국구 포함 67석)을 차지했다. 얌전한 민한당(민주한국당)은 26석(전국구 포함 35석), 국민당 15석(전국구 포함 20석), 기타 6석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른바 구(舊)정치인들을,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이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김영삼·김대중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이런 잔재주를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김영삼씨가 비록 정치 활동은 금지당하고 있었으나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김영삼씨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야권을 결속시켰고, 김대중씨는 투표 직전 귀국을 강행했다. 두 김(金)씨가 5년 만에 한국의 정치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1985년 2·12 총선 이변(異變)의 진원지였던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 하고 치받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민정당의 정국(政局) 파트너였던 온건 야당 민한당은 선거 직후 신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100석이 넘는 거대 야당이 등장하여 민주화 투쟁을 이끌게 되었고 그 2년 뒤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 역사의 흐름으로 말한다면 야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데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 제6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2030의 에너지가 표심으로 폭발한 12대 총선은 한국 현대사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
40대가 해냈다!
1980년대의 성공적인 대전환은 2030의 열정과 4050의 경륜이 균형과 통합을 이룬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제기획원이 1985년 3월에 발표한 1984년도 연령계층별 직업 통계에 따르면 약 1440만의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장(長)자가 붙어 주로 사람을 부리는 직급인 ‘행정·관리직 종사자’는 20만9000명이었고, 이 중 43.5%가 40대였다. 서울 증권 시장에 상장된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의 임원들 평균 나이는 48세, 그해 초에 새로 뽑힌 매출액 기준 20대 기업의 이사들 가운데 40대가 약 82%였다. 12대 국회의원 276명 가운데 약 30%인 84명이 45~49세 사이였다. 그다음이 50~54세 사이로 82명. 국회의 이 연령 분포는 당시 국가가 50대 초반과 그 측근 참모역을 맡고 있던 40대 후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대통령과 수석 비서관들, 민정당 대표위원과 원내 총무의 연령 관계가 그 구체적 사례였다. 근대화의 횃불을 점화한 것은 1910~20년대생의 몇몇 선구자였지만, 그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1960~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질주해간 중심 집단은 1980년대에 주도권을 잡은 4050 세대였던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호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배라고 배우며 자랐던 그들은 그 세 배나 되는 배를 직접 만들었고, 미군이 던져주는 통조림 깡통에 이마가 터지던 전란 속의 어린이들은 1억 달러짜리 공사쯤은 우습게 보는 어른으로 변해 있었다. 맨해튼의 빌딩숲에서, 중동의 열사(熱沙)에서,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그들은 신들린 듯 일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의 변화를 목격했다. 야망의 크기가 이 세대처럼 컸던 적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물질의 성취를 위해선 정신의 황폐가 따라야 했고, 근대화란 화려한 명제의 뒤안길에선 민중의 소리 없는 침몰이 있었다. 이런 모순을 온몸으로 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온몸으로 밀면서 1980년대 한국을 세계의 한 중심국가로 만들었던 대전환의 주력군일진대 이들은 현재 김석원 회장처럼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해방둥이의 출생 인구는 약 54만5000명이었다. 40년 뒤인 1985년엔 12만6000명이 줄어 41만9000명이었다. 38년이 흐른 2023년엔 다시 14만1000명이 더 줄어들어 약 27만8000명이다. 출생자의 딱 절반이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기아도 전쟁도 아닌 질병이었다. 1950년 한국 영아(嬰兒) 사망률은 1000명당 232명이었다(우리 어머니는 열세 명을 낳았는데 일곱 명이 사망). 작년은 1000명당 2.2명. 한국을 최장수국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은 의사들이었다. 의료 개혁으로 포장된 의사 집단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적대적 자세는 한국전 이후 최대 규모의 인명(人命) 손실을 부를 위험이 있다.
낙관론: 눈물겨운 이 ‘약간의 전진’
1985년 8월호 《월간조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쓸 때 만났던 이들은 거의가 엘리트였다. 그들은 비판적이긴 해도 비관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역사의 진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지요”란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런 글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25년 전쯤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 가는 수속을 밟기 위해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당시엔 한국을 떠난다는 그 기대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나는 미국으로 이민 가는 친구들을, 측은해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좋아짐’은 박정희나, 김지하나, 전태일 덕분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우리 국민들, 그중에서도 나 같은 해방둥이를 포함한 430여만 명의 40대가 성실하게 일한 결과이다.〉
1987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로 보내고 이듬해 귀국한 한 선배 기자는 나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 기자로서는 불행이란 생각이 든다. 6월 사태와 대통령 선거의 열광을 실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두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자니 뭔가 허술한 기분이다. 역시 기자는 현장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의도해서 이렇게 한 건 아닌데, 나는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기록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1970년대를 보냈던 내가 한국의 파워 센터인 서울 광화문에서 1980년대를 살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뜻깊은 사건들의 현장에 가깝게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1등석에 앉아 한국의 드라마를 공짜로 구경하고 글을 써 돈도 벌었다.
이 무렵 친구들이 모여 잡담하는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더럽고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언젠가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행복하게 기억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서울올림픽 두 달 전에 펴낸 1980년대의 르포 《대폭발》(조선일보 출판부)의 머리글에 이런 감상을 남겼다.
〈‘즐거운 것’보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분노하며 환호한 적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는, 아무리 캄캄했다 하더라도 소중하며 즐거운 추억인 것이다.
저 능선만 넘으면 정상이 보이겠지, 저 터널만 지나면 신천지가 전개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넘어지며, 실망하고, 또 일어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 역사의 행로(行路)도 같으리라. 이 고비만 넘기면 멋진 지평이 전개될 것이라고 가슴 부풀었지만, 그 고비를 넘겨도 기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약간 좋아졌을 뿐이었다. 다만 약간 정상에,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 가까이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이 ‘약간의 전진’은 얼마나 눈물겨운 성취인가. 봉건의 나라에서,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반동강 난 나라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 나라에서 눈물·피·땀·함성·비명, 그리고 목숨 걸고 쌓아 올린 이 ‘약간의 전진’이란 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 ‘우리’의 기록을, 이 금자탑을 쌓는 데 돌을 놓아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바친다.〉
보수의 키다리 아저씨
나는 지난 8월 12일엔 해방둥이보다 세 살이 많은 또 다른 기업인이 상[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애국상]을 받는 자리에 가서 축사를 했다. 그도 김석원 회장처럼 1980년대를 40대로서 치열하게 산 분이지만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란 점에서 결이 다르다.
오늘 우남 이승만 애국상을 받으신 김박(金博) 회장은 이름대로 80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한자 이름 풀이를 하면 돈(金)을 많이 벌어 널리 공평하게(博) 쓸 인물이란 뜻입니다. 김 회장의 삶을 요약하면 기업인으로서 한국적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나라에 보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적 현실을 직시, 장학재단 운영, 애국운동 지원,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건립 등을 통하여 우남 선생의 반공(反共)자유민주 정신을 이어가는 일에 정진(精進)하여왔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체제는 부자와 기업인들이 먼저 법을 지키고 용감하게 행동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김 회장의 생애가 참 아름답습니다.
〈전쟁으로 여덟 살 때부터 날품을 팔아야 했던 소년은 여간해선 울지 않았다. 피같이 모은 종잣돈으로 뛰어든 공구(工具)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주먹으로 짓이긴 눈물이 전부였다.
백발의 그가 다시 눈물을 흘린 건, 지난달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서다.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백선엽 장군의 동상과 이웃해 세워지던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7년을 기다린 일이거든요. 저의 오늘을 있게 해준 두 생명의 은인이 다시 살아 온 듯합니다.” 보수우파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김박 앨트웰 회장 이야기다.〉
작년 8월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의 인터뷰에 실린 내용입니다. 제가 작년에 읽은 인터뷰 중 가장 감동적인 인터뷰이기도 합니다. 명언들이 많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 그리고 경제 부흥은 세계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 주역들을 우리 스스로 박해하고 있어요. 동상 하나 세우는 일이 이렇게 괴로워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가장(家長) 역할을 해서 잘 알아요. 전쟁 3년 동안 미국의 원조 물자, 양곡, 구호품이 없었다면 우리 여덟 식구는 다 굶어 죽었을 겁니다.”
“그때 전쟁이 났어요. 일본서 대학 나온 아버지는 책만 읽는 지식인이어서, 6남매 중 제일 사나운 제가 생업에 뛰어들었죠(웃음). 서산 피란 시절엔 지게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녔고, 시골서 농산물을 떼다 오일장에서 팔았어요. 경기상고 시절엔 학교 파하면 명동으로 달려가 고려은단 가게에서 은단을 떼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으며 팔았지요. 교복을 입은 채로요. 집에 오면 밤 11시 반.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죠.”
“장학증서 수여할 때 간곡히 당부해요. 여러분이 성공해 먹고살 만하게 되면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봐 달라. 그리고 당신들이 속한 조직이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 나나 우리 회사가 불법에 연루되면 가중 처벌로 다스려달라.”
자유투사형 기업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포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주역은 유럽의 경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무장한 부자와 기업인 등 자본가였습니다. 그들은 청빈(淸貧)사상을 경멸하고 오히려 깨끗하게 번 돈, 즉 청부(淸富)로써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럽에서 좌우(左右) 대결이 벌어지면 오른쪽으로 자동적으로 정렬하곤 했던 이들이 장교단, 자본가, 성직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윤리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한국에서 자본가들은 권력자와 관료의 밥이 되어 좌(左)든 우(右)든 가리지 않고 권력에 봉사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김박 회장이 특별한 점은 깨끗하게 돈을 벌었기에 용감하게 쓸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인, 자유투사형 기업인으로서 연구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싸우는 자본가이자 콧대 높은 사람입니다.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박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업 시작하고 첫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2300만원의 과세를 당했어요. 부당하다고 여겨 국세청을 제소(提訴)했지요. 당시 여러 사람이 국세청을 상대로 싸우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래서 재벌 되겠냐 말렸지만, 저는 법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해 2300만원을 되찾고 이자 300만원까지 받아냈지요. 명색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기업인이 1원이라도 탈세를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요?”
김윤덕 기자가 “보수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는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리사욕(私利私慾)과 부정부패를 멀리해 종북좌파들이 공격할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네 가지 원칙이 있어요. 국세청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금융기관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검찰·경찰로부터 자유로울 것, 언론과 시민단체로부터 자유로울 것. 이 원칙을 지켜 빚 하나 없는 10층 회사를 강남에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식당에서 김재규가 쏜 총탄에 가슴 관통상을 당하여 등판에서 피가 샘솟듯 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괜찮아.”
저는 마지막 만찬장의 두 생존자, 신재순씨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난 괜찮아”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두 사람의 말은 일치했습니다.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모든 고통을 참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난 괜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민족중흥의 기수(旗手) 박정희 대통령은 갔고, 이제 그 세대의 마지막 주자(走者) 김박 회장은 이승만 정신의 계승자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묻고 있습니다. “내가 든 이 횃불을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다짐을 담아 김 회장에게 기립 박수를 보냅시다.
못 배운 한을 아시나요?
나는 1945년 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나서 그 이듬해 부모 품에 안겨 고향인 경북 청송(靑松)으로 돌아왔다. 6·25 때는 유엔군의 오폭(誤爆)으로 죽을 뻔했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지에서 석 달을 보냈다(나는 다섯 번 국적을 바꿨다. 일본 국적에서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북조선, 다시 대한민국).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이 우리 밭에서 익어가던 누런 오이(내가 따 먹으려고 벼르고 있었다)를 가져간 것이 계기가 되어 반공의식이 또렷한 아이로 자랐다(가까운 친족이 보도연맹원으로 재판 없이 사살되었지만). 부산으로 이사, 수정국민학교에서 분교(分校)된 수성(水城)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요사이도 서울에 사는 동기생 10여 명과 석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올해 팔순(八旬) 잔치를 해야 할 것인데 만(滿) 나이를 채택한 국가시책에 협조한다고 하여 내년으로 미루는 이들이 태반이다.
김석원 회장 추모식이 있었던 주의 토요일 박성호(朴聖浩) 동기가 자신이 관여하는 단체의 행사에 초대를 하여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김석원, 김박, 조갑제와는 다른 해방둥이 세대를 거기서 만난 것이다.
서울 명동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여성생활연구원 창립 46주년 행사였다. 한글을 읽지 못하거나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이들(주로 60~80대 여성)이 입학, 초등 과정은 연간 240시간씩 3년, 중학 과정은 연간 450시간씩 3년을 이수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주는 학교였다.
그날은 재학생들이 시 낭송, 노래 등 발표회를 하였는데 강당 벽엔 동시(童詩) 같은 글들이 순진한 그림들을 배경으로 붙어 있었다. 배고픔보다 더한 못 배운 한(恨)이 서린 글들이었다.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기 시작한 첫 세대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 잊힌 감상(感傷)이 되살아났다. 글 몇 편을 소개한다.
●보인다 보인다(김선숙)
보인다 보인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보인다 보인다
가나다라마바사
보인다 보인다
간판이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세상이 보인다
좋다!
●늦깎이 공부(박귀자)
교복 입은 친구들 모습이
너무나 부러워
나무 뒤에 숨어서 울기도 했네.
늦깎이 공부 배우고 익혀서
한 맺힌 배움의 꿈을 버릴 수 없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선택 창체(창작체험)
내 마음속에 고이 품고 모두 다
내 것으로 만들어보세.
●배움(정규순)
배움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아프고 슬프고
부러움이 있었다.
그런 배움이 늦은 나이의
나에게 찾아왔다. 행운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셨다.
자신감 있게 용기 있게
열심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배움은 나의 영원한 친구!!
●학교(함일연)
어린 시절 가고 싶었던 학교
아들만 가는 학교
딸인 나는 못 간 학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 손자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하루하루
팔순을 바라보며
늦게나마 다니는 학교
보람되고 행복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길(권태성·남성)
꽁보리 밥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났네. 첫돌 되기 전 6·25 한국전쟁 나 전쟁 중 나 돌봐준
큰 누님 힘들게 하고 눈떠 보니 왜 이리 배고프니
돌아서면 배고프고.
학교 가고 싶어 부모님 졸라 또래보다 1년 전에 입학
하여 이십 리 길 멀다 않고 재미나게 학교 다녔지.
6년 세월 금방 지나 중학교 시험 봐서 합격되어 다니는데
집안 형편 좋지 않아 자진하여 그만두니 이것이 나의 최종
학교 졸업 증명서. 중학교 1년 중퇴.
온 가족 이사하여 서울 생활 살아보니 세월은 빨라 내 나이 내년이면
70대 중반이라 잠자리에 누워보니 학교 가는 꿈만 꾸니 왜 이리
눈물 나는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용기 내어 창피함 무릅쓰고
중학교 입학하여 국, 영, 수 공부하니 왜 이리 기쁘노. 그 옛날 서러움
조금씩 풀어지네.
남은 시간 열심하여 건강 허락한다면 고등까지 도전하여 최종학교 고졸이라는
소리 듣는 것 희망사항이라네.
눈만 뜨면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 설레는 이 마음 감출 수 없다.
아직도 수업시간 2시간이나 남았는데
늦었다고 생각되어 나만 혼자 분주하네.
●노년의 행복(서화옥)
꽃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나!
서산에 넘어가는 노을이 된 지금
지난날 접어둔 배움의 꿈
발걸음 가볍게 학교에 간다.
어느새 내 머리는 은빛으로 변하고
열심히 가르쳐주신 선생님 말씀
학교를 나서면 잊어버리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힌다.
배운 모든 것이 나의 즐거움에
꽃으로 피어나는 그날
내 인생은 다시 한 번 피어나리.
●배움길(임경순)
집에서 손자 보는 할매에게 열린 배움길
중학생이 된 지 벌써 2년 반
공부는 너무 어려워
머릿속에는 안 들어온다
그러나 재미있고 즐겁다
아침 먹고 가방 메고 집을 나서면
모르는 것 많아도
나는 학생이다. 힘이 생긴다.
건강하고 즐거운 배움길
●연필(최재임)
너를 다시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너와 헤어진 반평생 그 긴 세월
가슴 깊은 곳에 늘 네가 있었어
세상살이 돌고 돌아
너를 다시 만나니
행복해서 눈물이 나
오래여서 좀 서툴고 어설퍼도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거들고 있어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네 덕에 다시 떠올리네
할 수 있다 가다듬고
오늘도 가방 메고 학교에 간다.
●빛이 보인다(신재옥)
내 나이 어느덧 팔십 셋
세월 참 빠르지요
웃음 조금 눈물 많이 섞어 살아온 세월
못 배운 한 너무 커서 마음 아팠네.
큰딸 주선으로 학교에 와서
초등공부를 시작하고
중학생이 되었네
이제는 나도 모르게 힘이 솟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학우들 도움으로 정말 재미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건강하기만 기도합니다.
박정희와 女工
1950년대 부산의 국민학교 시절 한 반이 70명쯤 되었는데 10% 정도는 고아원생이었다. 그들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영민한 친구들도 집안이 가난하면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제외되었다. 숨어서 친구들이 학교 가는 걸 지켜보면서 눈물짓던 아이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대통령이 한 사람 있었다. 아래 글은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동자부 장관 에세이집》 (42~44쪽)에 실린 박충훈(朴忠勳) 전 국무총리의 회고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타고난 손재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배우겠다는 향학열(向學熱) 또한 세계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날짜가 확실치 않은데 어느 날 구로공단 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은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소녀가 제 옆에 대통령이 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소녀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제야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박 대통령은 군인이면서 다정다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 없이 시행됐다. 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야근(夜勤)을 마치고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어떤 졸업장과도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졸업장을 주도록 하라 엄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 소녀가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직장에서도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인가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나는 19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포항서 양질의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했을 때 의문을 가지고 취재하여 경제성이 없는 기름이란 글을 썼다가 신문사에서 추방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신발공장(국제상사)에 들어가 기획실에서 일할 때 위에 나오는 산업체 특별학교 설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승만·박정희는 위대한 교사의 품성을 가진 분이었다. 시대가 흘러 베이비 붐 세대인 대통령의 난폭한 의료 정책으로 1만2000명의 수련의와 1만8000명의 의대생들이 병원과 학교를 떠나 5년간 의사 1만 명을 늘리겠다는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이 났다. 결국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졸업식 노래
오늘의 풍요와 고민을 만든 1980년대의 대전환은,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교실에서 이뤄졌다. 해방된 직후부터 불렸던 ‘졸업식 노래’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1.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윤석중(尹石重) 작사, 정순철(鄭順哲) 작곡. 1946년 문교당국에 의하여 제정된 초등학교의 졸업가. 광복 후 첫 졸업식부터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으며, 4분의 4박자 다장조의 엄숙하면서 다정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1절은 재학생이, 2절은 졸업생이, 3절은 다 함께 부르도록 작사되었다.⊙
해방둥이의 해방둥이에 대한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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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사진=조선DB |
〈해방둥이로서 한국 나이로 벌써 50세, 재벌 회장 재직 20년째를 맞은 김 회장은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조용한 말투로써 국제화, 교육, 자동차, 경영철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김 회장은 “국제적 규칙을 지키는 것, 폭넓은 교양,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가 바로 국제인의 3대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국제화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 3년 전 강원도 고성에서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던 김 회장이 당시 화두(話頭)가 되어 있었던 ‘세계화’에 대하여 한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한 편의 좋은 강의였습니다. 다시 그 1년 뒤, 추석을 앞둔 1995년 가을, 저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 회장을 만나 이태원 자택에서 또 밤새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는 벌써 세 번째 담뱃갑을 열었다. 보통 피우던 두 갑 수준을 넘어선 것은 스스로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총수로서 달려왔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20년 경력이 이전투구(泥田鬪狗)판의 정치 세계에서 어떻게 발휘될까. 해방둥이로서 만 50에 제2의 인생을 출발한 김 위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서니 보름달이 마당 가득 비추고 있었다.〉
제가 성곡언론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대학의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 니만 펠로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이 지난 1997년 가을, 외환 위기의 파도가 덮치고 있을 때, 이곳 용평에서 언론인 초청 만찬이 있었고 김석원 회장은 하회탈을 연상시키는 그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으로 재회를 반가워하면서도 “요사이 하루하루가 어렵다”고 약한 면을 보이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무렵인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김 회장은 그만두겠다는 임원에게 “난 그러면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험한 세상의 다리를 넘어 진격한 세대
[어려운 시절 많은 것을 이루시고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는 성곡 선생 같은 선배 세대의 시대적 역할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 즉 이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리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진격한 저희 해방둥이들은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는 첫 세대가 되었으며 가장 빨리 높게 멀리 달렸고 그래서 가장 크게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세대의 선두 주자 김석원 회장이 넘어졌을 때, 그 많던 친구들이 사라져 갈 때 그를 위하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셨던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체제로 건국한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인들이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들의 분투(奮鬪) 덕분에 우리는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즉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김석원 회장은 그 이야기의 주요 필자 중 한 분이십니다. 시대가 바뀌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士)자 계급에 속하는 신종 양반 세력, 언론인·검사·판사·학자·정치인·관료들이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되자 저는 어느덧 재판받는 김석원 회장에 대한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쓰는 처지가 되었고 김석원이란 이름 석 자는 잊혀가고 있었습니다.
2011년 7월, 한국이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권을 딴 직후 《조선일보》 최보식(崔普植) 기자가 김 회장 인터뷰를 통하여 스키 인구가 4000명일 때 용평을 개척하여 올림픽의 길을 연 ‘숨은 공로자’라고 쓴 것과 작년 별세 직전 새만금 잼버리가 파행을 하자 성공했던 고성 잼버리가 소환된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김 회장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교양인이셨고, 기업인, 스포츠맨, 국제인, 교육가, 언론인, 봉사자, 그리고 월남전 파병 해병대원으로서 그가 남긴 거대하고 다양한 유산과 기억들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고 대한민국 문명 건설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사표 내나?”
오늘은 김 회장을 추모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의 감정도 희미해지면서 기억으로 퇴색되고, 기록으로 변했다가 종국엔 기념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병주(李炳注) 선생의 말을 빌리면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된다”고 합니다. 김 회장 별세 20주년, 50주년, 100주년은 어떤 모습일까는 여기 모이신 분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큰 인물의 진짜 승부는 관뚜껑이 닫힌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억과 기록과 기념의 싸움이 될 것이며 후손과 후배들이 어떻게 무엇을 계승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입장에서 늘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답답함을 토로하던 김 회장이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했을 때의 그 절대고독은 한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해방둥이 세대의 잘못은 너무 바쁘게 살았다는 핑계로 선배 세대의 위대한 이야기들을 자랑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추모식은 슬픔의 추억이 아니라 김 회장의 성공과 실패를 다 아울러 그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자는 다짐과 희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김석원 회장님, 당신은 좋은 세상을 만나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떠났으니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저희는 자유통일을 보고 가겠습니다.
大轉換의 年代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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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현대건설 회식에서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사장. 정주영 회장 세대가 그 시절 지도 그룹이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 세대는 실무 그룹이었다. 사진=조선DB |
김석원 같은 해방둥이들이 한국 사회의 주력군인 3040 세대로 뛰었던 1980년대의 한국은 대전환(大轉換)의 시대였다. 5·18로 시작되어,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향하여 미래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의원이 명패를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이 10년 동안 한국은 유례가 없는 성장과 변모를 거듭했다. 해방둥이들과 베이비 붐 세대가 일으킨 국민적 에너지의 대폭발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세계사의 대전환 흐름에 편승했으므로 가능했다. 그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였다. 국제 공산주의 붕괴라는 천하대세(天下大勢)에 한국을 올라타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1980년대의 지도 그룹이다. 전두환·노태우(盧泰愚)·이병철(李秉喆)·정주영(鄭周永)·김영삼·김대중·박세직(朴世直)·이어령(李御寧) 등등, 이들 밑에서 핵심적인 실무를 맡았던 정치와 경제 부문의 40대 스타 그룹은 살아 있으면 지금 80대다. 이명박(李明博)·김재익(金在益, 아웅산 테러로 사망)·이종찬(李鍾贊)·박철언(朴哲彦)·오명(吳明)·김종인(金鍾仁) 등. 1980년대의 주력인 4050 세대는 일제 교육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첫 세대였다. 이들이 1980년대의 10년간 한국을, 경제성장률 1위(연평균 10.1%) 국가로 만들고 민주화의 길을 열어 극일(克日)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30년 뒤 약소국이니 강소국 대신 강대국, 글로벌 중추국가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를 하고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넘고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세계 7대국 중 하나다.
개방화·민주화·국제화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손을 잡고 ‘악의 제국’을 압박하는 사이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이 확산되면서 스탈린식 국제 공산주의는 서울올림픽 성공 직후인 1989년에 대붕괴를 시작, 그해 12월 루마니아 차우세스쿠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한국의 대전환은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세계의 대격변과 맞물렸다. 1980년대 한국의 국가 지도부가 대전환을 주도한 세계 지도자들과 호흡이 맞는 실용적 국제파였다는 점은 행운이었다.
●1980년대 한국 경제는 초고속 성장으로, 소란스러운 민주화의 충격을 흡수하고도 남았다. 박정희(朴正熙)가 유신독재라는 욕을 무릅쓰고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힘으로 무역은 만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고, 삼성·현대 등 대기업은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갔다. 6·29 선언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딛고 펼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 시야(視野)의 대전략이 북방 정책이었고, 이는 경제의 지평뿐 아니라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혔다. 북방 정책의 세 주역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 수석은 50대, 박철언 정무장관은 40대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선제적 IT 인프라 확충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조선일보》의 구호대로 미래를 위한 거대한 투자가 되어 2024년의 한국인들이 그 과실을 따 먹고 있다(그러면서도 전두환에 대한 침 뱉기를 계속하고 있다).
●4050이 이끈 1980년대 한국은 개방화·민주화·국제화를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이뤘다. 이 거대한 대전환의 제도적 결과물이 제6공화국이다. 전두환·노태우가 합작한 6·29 선언은 당시의 2030 세대(주로 베이비 붐 세대)가 들고일어난 민주화의 에너지를 직선제 개헌으로 흡수, 유혈(流血) 사태를 피하고 평화적 체제 전환의 길을 열었다.
●1980년대는 그 후의 한 세대를 준비하고 규정한 셈인데 정신 면에서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4050이 막지 못한 종북(從北) 주사파의 등장과 한글 전용(專用)의 확산은 한국어의 반신불수(半身不隨)와 정치의 양아치화를 불렀다. 어휘력(語彙力) 감퇴에 따른 분별력의 약화, 국민 교양과 국가 엘리트의 실종 사태는 정치의 저질화를 가속화시켜 물질적 발전을 상쇄(相殺)할지도 모른다.
베이비 붐 세대가 변혁의 動力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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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시가 폐지된 1969년 은행알 추첨기(속칭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를 배정받는 모습. 1950년대 중반 태어난 이들 세대가 베이비 붐 세대를 형성했다. 사진=조선DB |
〈6·25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도 생명들은 솟아났다. 총칼이 솎아낸 수백만 명의 목숨들을 서둘러 보충하려는 듯 주렁주렁 태어난 그들에게 인구학자들은 ‘다출산(多出産) 세대’, 또는 ‘베이비 붐 세대’라는 학명을 붙였다.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높았던 1955~1961년 사이에 난 사람들이다. 만 23~29세의 청년들이다. 1984년 1월 1일 현재 567만 명, 전 국민의 14%, 전체 유권자의 24%를 차지하는 막강 파워 그룹이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가 그 이정표에서 한국 사회에 숱한 경쟁, 팽창, 홍수, 적체 현상을 일으켰는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주체 못 할 잠재력을 키워온 그들이 오늘날 드디어 대폭발의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체력, 욕구, 정열, 도전심, 문제의식 등 모든 부문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 집단은 면학, 취직, 결혼, 출산 등 이동과 활동이 가장 격렬한 생활 단계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수레를 끌고 달릴 준마가 될 것인데 문제는 수레가 너무 가볍고 고삐는 너무 약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주류인 20대는 전체 유권자의 36%나 되어 거대한 ‘표의 힘’으로 한국의 정치 기상도를 좌우할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세대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운명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고 했었는데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유권자의 약 60%를 차지한 당시의 2030 세대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학적 선거 전략을 일거에 깨부수고 민주화를 대세로 만드는 주권적 결단을 내렸다.
1985년 2·12 총선이 分水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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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6·29 선언은 4050 기성세대와 2030 세대의 합작품이었다. 사진=조선DB |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집권 민정당은 35.2%의 득표율로 87명(전국구 포함 총의석은 148석)이 당선되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한 명씩, 부산에선 3명이 낙선했다. 전두환 정권 공격에 앞장섰던 신민당은 선명투쟁성으로 2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50석(전국구 포함 67석)을 차지했다. 얌전한 민한당(민주한국당)은 26석(전국구 포함 35석), 국민당 15석(전국구 포함 20석), 기타 6석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른바 구(舊)정치인들을,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이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김영삼·김대중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이런 잔재주를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김영삼씨가 비록 정치 활동은 금지당하고 있었으나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김영삼씨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야권을 결속시켰고, 김대중씨는 투표 직전 귀국을 강행했다. 두 김(金)씨가 5년 만에 한국의 정치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1985년 2·12 총선 이변(異變)의 진원지였던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 하고 치받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민정당의 정국(政局) 파트너였던 온건 야당 민한당은 선거 직후 신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100석이 넘는 거대 야당이 등장하여 민주화 투쟁을 이끌게 되었고 그 2년 뒤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 역사의 흐름으로 말한다면 야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데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 제6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2030의 에너지가 표심으로 폭발한 12대 총선은 한국 현대사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
40대가 해냈다!
1980년대의 성공적인 대전환은 2030의 열정과 4050의 경륜이 균형과 통합을 이룬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제기획원이 1985년 3월에 발표한 1984년도 연령계층별 직업 통계에 따르면 약 1440만의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장(長)자가 붙어 주로 사람을 부리는 직급인 ‘행정·관리직 종사자’는 20만9000명이었고, 이 중 43.5%가 40대였다. 서울 증권 시장에 상장된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의 임원들 평균 나이는 48세, 그해 초에 새로 뽑힌 매출액 기준 20대 기업의 이사들 가운데 40대가 약 82%였다. 12대 국회의원 276명 가운데 약 30%인 84명이 45~49세 사이였다. 그다음이 50~54세 사이로 82명. 국회의 이 연령 분포는 당시 국가가 50대 초반과 그 측근 참모역을 맡고 있던 40대 후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대통령과 수석 비서관들, 민정당 대표위원과 원내 총무의 연령 관계가 그 구체적 사례였다. 근대화의 횃불을 점화한 것은 1910~20년대생의 몇몇 선구자였지만, 그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1960~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질주해간 중심 집단은 1980년대에 주도권을 잡은 4050 세대였던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호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배라고 배우며 자랐던 그들은 그 세 배나 되는 배를 직접 만들었고, 미군이 던져주는 통조림 깡통에 이마가 터지던 전란 속의 어린이들은 1억 달러짜리 공사쯤은 우습게 보는 어른으로 변해 있었다. 맨해튼의 빌딩숲에서, 중동의 열사(熱沙)에서,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그들은 신들린 듯 일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의 변화를 목격했다. 야망의 크기가 이 세대처럼 컸던 적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물질의 성취를 위해선 정신의 황폐가 따라야 했고, 근대화란 화려한 명제의 뒤안길에선 민중의 소리 없는 침몰이 있었다. 이런 모순을 온몸으로 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온몸으로 밀면서 1980년대 한국을 세계의 한 중심국가로 만들었던 대전환의 주력군일진대 이들은 현재 김석원 회장처럼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해방둥이의 출생 인구는 약 54만5000명이었다. 40년 뒤인 1985년엔 12만6000명이 줄어 41만9000명이었다. 38년이 흐른 2023년엔 다시 14만1000명이 더 줄어들어 약 27만8000명이다. 출생자의 딱 절반이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기아도 전쟁도 아닌 질병이었다. 1950년 한국 영아(嬰兒) 사망률은 1000명당 232명이었다(우리 어머니는 열세 명을 낳았는데 일곱 명이 사망). 작년은 1000명당 2.2명. 한국을 최장수국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은 의사들이었다. 의료 개혁으로 포장된 의사 집단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적대적 자세는 한국전 이후 최대 규모의 인명(人命) 손실을 부를 위험이 있다.
낙관론: 눈물겨운 이 ‘약간의 전진’
1985년 8월호 《월간조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쓸 때 만났던 이들은 거의가 엘리트였다. 그들은 비판적이긴 해도 비관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역사의 진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지요”란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런 글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25년 전쯤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 가는 수속을 밟기 위해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당시엔 한국을 떠난다는 그 기대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나는 미국으로 이민 가는 친구들을, 측은해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좋아짐’은 박정희나, 김지하나, 전태일 덕분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우리 국민들, 그중에서도 나 같은 해방둥이를 포함한 430여만 명의 40대가 성실하게 일한 결과이다.〉
1987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로 보내고 이듬해 귀국한 한 선배 기자는 나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 기자로서는 불행이란 생각이 든다. 6월 사태와 대통령 선거의 열광을 실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두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자니 뭔가 허술한 기분이다. 역시 기자는 현장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의도해서 이렇게 한 건 아닌데, 나는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기록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1970년대를 보냈던 내가 한국의 파워 센터인 서울 광화문에서 1980년대를 살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뜻깊은 사건들의 현장에 가깝게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1등석에 앉아 한국의 드라마를 공짜로 구경하고 글을 써 돈도 벌었다.
이 무렵 친구들이 모여 잡담하는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더럽고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언젠가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행복하게 기억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서울올림픽 두 달 전에 펴낸 1980년대의 르포 《대폭발》(조선일보 출판부)의 머리글에 이런 감상을 남겼다.
〈‘즐거운 것’보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분노하며 환호한 적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는, 아무리 캄캄했다 하더라도 소중하며 즐거운 추억인 것이다.
저 능선만 넘으면 정상이 보이겠지, 저 터널만 지나면 신천지가 전개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넘어지며, 실망하고, 또 일어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 역사의 행로(行路)도 같으리라. 이 고비만 넘기면 멋진 지평이 전개될 것이라고 가슴 부풀었지만, 그 고비를 넘겨도 기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약간 좋아졌을 뿐이었다. 다만 약간 정상에,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 가까이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이 ‘약간의 전진’은 얼마나 눈물겨운 성취인가. 봉건의 나라에서,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반동강 난 나라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 나라에서 눈물·피·땀·함성·비명, 그리고 목숨 걸고 쌓아 올린 이 ‘약간의 전진’이란 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 ‘우리’의 기록을, 이 금자탑을 쌓는 데 돌을 놓아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바친다.〉
보수의 키다리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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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 앨트웰 회장. |
오늘 우남 이승만 애국상을 받으신 김박(金博) 회장은 이름대로 80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한자 이름 풀이를 하면 돈(金)을 많이 벌어 널리 공평하게(博) 쓸 인물이란 뜻입니다. 김 회장의 삶을 요약하면 기업인으로서 한국적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나라에 보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적 현실을 직시, 장학재단 운영, 애국운동 지원,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건립 등을 통하여 우남 선생의 반공(反共)자유민주 정신을 이어가는 일에 정진(精進)하여왔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체제는 부자와 기업인들이 먼저 법을 지키고 용감하게 행동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김 회장의 생애가 참 아름답습니다.
〈전쟁으로 여덟 살 때부터 날품을 팔아야 했던 소년은 여간해선 울지 않았다. 피같이 모은 종잣돈으로 뛰어든 공구(工具)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주먹으로 짓이긴 눈물이 전부였다.
백발의 그가 다시 눈물을 흘린 건, 지난달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서다.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백선엽 장군의 동상과 이웃해 세워지던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7년을 기다린 일이거든요. 저의 오늘을 있게 해준 두 생명의 은인이 다시 살아 온 듯합니다.” 보수우파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김박 앨트웰 회장 이야기다.〉
작년 8월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의 인터뷰에 실린 내용입니다. 제가 작년에 읽은 인터뷰 중 가장 감동적인 인터뷰이기도 합니다. 명언들이 많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 그리고 경제 부흥은 세계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 주역들을 우리 스스로 박해하고 있어요. 동상 하나 세우는 일이 이렇게 괴로워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가장(家長) 역할을 해서 잘 알아요. 전쟁 3년 동안 미국의 원조 물자, 양곡, 구호품이 없었다면 우리 여덟 식구는 다 굶어 죽었을 겁니다.”
“그때 전쟁이 났어요. 일본서 대학 나온 아버지는 책만 읽는 지식인이어서, 6남매 중 제일 사나운 제가 생업에 뛰어들었죠(웃음). 서산 피란 시절엔 지게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녔고, 시골서 농산물을 떼다 오일장에서 팔았어요. 경기상고 시절엔 학교 파하면 명동으로 달려가 고려은단 가게에서 은단을 떼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으며 팔았지요. 교복을 입은 채로요. 집에 오면 밤 11시 반.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죠.”
“장학증서 수여할 때 간곡히 당부해요. 여러분이 성공해 먹고살 만하게 되면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봐 달라. 그리고 당신들이 속한 조직이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 나나 우리 회사가 불법에 연루되면 가중 처벌로 다스려달라.”
자유투사형 기업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포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주역은 유럽의 경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무장한 부자와 기업인 등 자본가였습니다. 그들은 청빈(淸貧)사상을 경멸하고 오히려 깨끗하게 번 돈, 즉 청부(淸富)로써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럽에서 좌우(左右) 대결이 벌어지면 오른쪽으로 자동적으로 정렬하곤 했던 이들이 장교단, 자본가, 성직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윤리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한국에서 자본가들은 권력자와 관료의 밥이 되어 좌(左)든 우(右)든 가리지 않고 권력에 봉사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김박 회장이 특별한 점은 깨끗하게 돈을 벌었기에 용감하게 쓸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인, 자유투사형 기업인으로서 연구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싸우는 자본가이자 콧대 높은 사람입니다.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박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업 시작하고 첫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2300만원의 과세를 당했어요. 부당하다고 여겨 국세청을 제소(提訴)했지요. 당시 여러 사람이 국세청을 상대로 싸우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래서 재벌 되겠냐 말렸지만, 저는 법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해 2300만원을 되찾고 이자 300만원까지 받아냈지요. 명색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기업인이 1원이라도 탈세를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요?”
김윤덕 기자가 “보수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는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리사욕(私利私慾)과 부정부패를 멀리해 종북좌파들이 공격할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네 가지 원칙이 있어요. 국세청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금융기관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검찰·경찰로부터 자유로울 것, 언론과 시민단체로부터 자유로울 것. 이 원칙을 지켜 빚 하나 없는 10층 회사를 강남에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식당에서 김재규가 쏜 총탄에 가슴 관통상을 당하여 등판에서 피가 샘솟듯 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괜찮아.”
저는 마지막 만찬장의 두 생존자, 신재순씨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난 괜찮아”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두 사람의 말은 일치했습니다.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모든 고통을 참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난 괜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민족중흥의 기수(旗手) 박정희 대통령은 갔고, 이제 그 세대의 마지막 주자(走者) 김박 회장은 이승만 정신의 계승자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묻고 있습니다. “내가 든 이 횃불을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다짐을 담아 김 회장에게 기립 박수를 보냅시다.
못 배운 한을 아시나요?
나는 1945년 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나서 그 이듬해 부모 품에 안겨 고향인 경북 청송(靑松)으로 돌아왔다. 6·25 때는 유엔군의 오폭(誤爆)으로 죽을 뻔했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지에서 석 달을 보냈다(나는 다섯 번 국적을 바꿨다. 일본 국적에서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북조선, 다시 대한민국).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이 우리 밭에서 익어가던 누런 오이(내가 따 먹으려고 벼르고 있었다)를 가져간 것이 계기가 되어 반공의식이 또렷한 아이로 자랐다(가까운 친족이 보도연맹원으로 재판 없이 사살되었지만). 부산으로 이사, 수정국민학교에서 분교(分校)된 수성(水城)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요사이도 서울에 사는 동기생 10여 명과 석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올해 팔순(八旬) 잔치를 해야 할 것인데 만(滿) 나이를 채택한 국가시책에 협조한다고 하여 내년으로 미루는 이들이 태반이다.
김석원 회장 추모식이 있었던 주의 토요일 박성호(朴聖浩) 동기가 자신이 관여하는 단체의 행사에 초대를 하여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김석원, 김박, 조갑제와는 다른 해방둥이 세대를 거기서 만난 것이다.
서울 명동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여성생활연구원 창립 46주년 행사였다. 한글을 읽지 못하거나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이들(주로 60~80대 여성)이 입학, 초등 과정은 연간 240시간씩 3년, 중학 과정은 연간 450시간씩 3년을 이수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주는 학교였다.
그날은 재학생들이 시 낭송, 노래 등 발표회를 하였는데 강당 벽엔 동시(童詩) 같은 글들이 순진한 그림들을 배경으로 붙어 있었다. 배고픔보다 더한 못 배운 한(恨)이 서린 글들이었다.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기 시작한 첫 세대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 잊힌 감상(感傷)이 되살아났다. 글 몇 편을 소개한다.
●보인다 보인다(김선숙)
보인다 보인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보인다 보인다
가나다라마바사
보인다 보인다
간판이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세상이 보인다
좋다!
●늦깎이 공부(박귀자)
교복 입은 친구들 모습이
너무나 부러워
나무 뒤에 숨어서 울기도 했네.
늦깎이 공부 배우고 익혀서
한 맺힌 배움의 꿈을 버릴 수 없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선택 창체(창작체험)
내 마음속에 고이 품고 모두 다
내 것으로 만들어보세.
●배움(정규순)
배움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아프고 슬프고
부러움이 있었다.
그런 배움이 늦은 나이의
나에게 찾아왔다. 행운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셨다.
자신감 있게 용기 있게
열심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배움은 나의 영원한 친구!!
●학교(함일연)
어린 시절 가고 싶었던 학교
아들만 가는 학교
딸인 나는 못 간 학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 손자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하루하루
팔순을 바라보며
늦게나마 다니는 학교
보람되고 행복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길(권태성·남성)
꽁보리 밥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났네. 첫돌 되기 전 6·25 한국전쟁 나 전쟁 중 나 돌봐준
큰 누님 힘들게 하고 눈떠 보니 왜 이리 배고프니
돌아서면 배고프고.
학교 가고 싶어 부모님 졸라 또래보다 1년 전에 입학
하여 이십 리 길 멀다 않고 재미나게 학교 다녔지.
6년 세월 금방 지나 중학교 시험 봐서 합격되어 다니는데
집안 형편 좋지 않아 자진하여 그만두니 이것이 나의 최종
학교 졸업 증명서. 중학교 1년 중퇴.
온 가족 이사하여 서울 생활 살아보니 세월은 빨라 내 나이 내년이면
70대 중반이라 잠자리에 누워보니 학교 가는 꿈만 꾸니 왜 이리
눈물 나는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용기 내어 창피함 무릅쓰고
중학교 입학하여 국, 영, 수 공부하니 왜 이리 기쁘노. 그 옛날 서러움
조금씩 풀어지네.
남은 시간 열심하여 건강 허락한다면 고등까지 도전하여 최종학교 고졸이라는
소리 듣는 것 희망사항이라네.
눈만 뜨면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 설레는 이 마음 감출 수 없다.
아직도 수업시간 2시간이나 남았는데
늦었다고 생각되어 나만 혼자 분주하네.
●노년의 행복(서화옥)
꽃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나!
서산에 넘어가는 노을이 된 지금
지난날 접어둔 배움의 꿈
발걸음 가볍게 학교에 간다.
어느새 내 머리는 은빛으로 변하고
열심히 가르쳐주신 선생님 말씀
학교를 나서면 잊어버리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힌다.
배운 모든 것이 나의 즐거움에
꽃으로 피어나는 그날
내 인생은 다시 한 번 피어나리.
●배움길(임경순)
집에서 손자 보는 할매에게 열린 배움길
중학생이 된 지 벌써 2년 반
공부는 너무 어려워
머릿속에는 안 들어온다
그러나 재미있고 즐겁다
아침 먹고 가방 메고 집을 나서면
모르는 것 많아도
나는 학생이다. 힘이 생긴다.
건강하고 즐거운 배움길
●연필(최재임)
너를 다시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너와 헤어진 반평생 그 긴 세월
가슴 깊은 곳에 늘 네가 있었어
세상살이 돌고 돌아
너를 다시 만나니
행복해서 눈물이 나
오래여서 좀 서툴고 어설퍼도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거들고 있어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네 덕에 다시 떠올리네
할 수 있다 가다듬고
오늘도 가방 메고 학교에 간다.
●빛이 보인다(신재옥)
내 나이 어느덧 팔십 셋
세월 참 빠르지요
웃음 조금 눈물 많이 섞어 살아온 세월
못 배운 한 너무 커서 마음 아팠네.
큰딸 주선으로 학교에 와서
초등공부를 시작하고
중학생이 되었네
이제는 나도 모르게 힘이 솟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학우들 도움으로 정말 재미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건강하기만 기도합니다.
박정희와 女工
1950년대 부산의 국민학교 시절 한 반이 70명쯤 되었는데 10% 정도는 고아원생이었다. 그들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영민한 친구들도 집안이 가난하면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제외되었다. 숨어서 친구들이 학교 가는 걸 지켜보면서 눈물짓던 아이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대통령이 한 사람 있었다. 아래 글은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동자부 장관 에세이집》 (42~44쪽)에 실린 박충훈(朴忠勳) 전 국무총리의 회고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타고난 손재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배우겠다는 향학열(向學熱) 또한 세계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날짜가 확실치 않은데 어느 날 구로공단 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은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소녀가 제 옆에 대통령이 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소녀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제야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박 대통령은 군인이면서 다정다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 없이 시행됐다. 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야근(夜勤)을 마치고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어떤 졸업장과도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졸업장을 주도록 하라 엄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 소녀가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직장에서도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인가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나는 19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포항서 양질의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했을 때 의문을 가지고 취재하여 경제성이 없는 기름이란 글을 썼다가 신문사에서 추방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신발공장(국제상사)에 들어가 기획실에서 일할 때 위에 나오는 산업체 특별학교 설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승만·박정희는 위대한 교사의 품성을 가진 분이었다. 시대가 흘러 베이비 붐 세대인 대통령의 난폭한 의료 정책으로 1만2000명의 수련의와 1만8000명의 의대생들이 병원과 학교를 떠나 5년간 의사 1만 명을 늘리겠다는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이 났다. 결국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졸업식 노래
오늘의 풍요와 고민을 만든 1980년대의 대전환은,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교실에서 이뤄졌다. 해방된 직후부터 불렸던 ‘졸업식 노래’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1.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윤석중(尹石重) 작사, 정순철(鄭順哲) 작곡. 1946년 문교당국에 의하여 제정된 초등학교의 졸업가. 광복 후 첫 졸업식부터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으며, 4분의 4박자 다장조의 엄숙하면서 다정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1절은 재학생이, 2절은 졸업생이, 3절은 다 함께 부르도록 작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