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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노계현 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한국의 정치외교사학·국제법학 분야 개척

글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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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뿌리, 고려·조선 영토사, 간도·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 대해 선구적 업적 남겨
⊙ 신라 통일외교 높이 평가… 김춘추를 비스마르크, 김유신을 몰트케에 비교
⊙ 지도층이 대외관계에 어두워 강대국 권력 정치에 희생되었음을 상기시켜
  현재(玄齋) 노계현(盧啓鉉) 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이 지난 4월 4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이 계제에, 필자는 한국 학계에서 주로 구한말 동북아 국제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외교사 및 국제법 분야에서 선구적 저술을 발표했으며, 특히 간도(間島) 연구를 비롯한 조선=한국의 영토 연구와 한반도 분단의 기원 연구를 선도했던 노 교수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면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자 한다.
 
  노 교수는 1932년 7월 29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3월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데 이어 1958년 3월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서석순(徐碩淳) 교수의 지도를 받아 〈동간도(東間島) 귀속 문제를 논함〉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대한국제법학회 상임간사 및 국학대학 강사로 출발해 1967년 3월~1969년 2월에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봉직했으며, 연세대·이화여대·성균관대·중앙대·건국대·한국외대 등에서 강사로 강의를 이어갔다.
 
  노 교수는 1969년 3월 1일 국토통일원이 출범하면서 곧바로 정치외교정책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국토통일원 산하 통일연구소 교수를 거쳐 1980년 8월 국토통일원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했으며, 1981년 8월~1983년 3월에 문교부 산하 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이어 1983년 3월 9일 국립마산대학 제2대 학장으로 봉직하고, 1985년 3월 1일 국립마산대학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창원대학으로 개명함에 따라 초대 학장으로 봉직하다가 1987년 3월 8일 정년 퇴임했다. 학계와 대학 행정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마산대학 학장 때인 1985년 2월 단국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1년에는 대한국제법학회장으로 봉직했다.
 
 
  구한말 국제관계 연구의 선구자
 
  이 과정에서 노 교수는 구한말의 국제관계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연구〉(《국제법학회논총》 제6권 제2호, 1961년 10월) 및 〈한영수호통상조규 연구〉(앞과 같음)를 시발로, 〈한로외교관계연구: 보호밀약사건을 중심하여〉(《국제법학회논총》 제7권 제1호, 1962년 3월) 및 〈한일수호조규연구〉(앞과 같음) 등을 발표했으며, 〈동학난이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국제법학회논총》 제7권 제2호, 1962년 9월)을 발표하고, 〈신라의 통일외교정책 연구〉(《국제법학회논총》 제9권 제1호, 1964년 3월) 및 〈P. G von Möllendorff가 한국외교에 끼친 영향〉(성균관대학교 《국제문화》 창간호, 1964년 12월) 등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 가운데 〈한로외교관계 연구〉는 《한국근현대사논문선집 대외 1》(삼귀문화사, 1999)에, 〈P. G von Möllendorff가 한국외교에 끼친 영향〉은 《한국근현대사논문선집 5》(삼귀문화사, 2000)에 재수록되었다. 그만큼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노 교수는 이 논문들 이외의 여타 논문들을 모아 《한국외교사 연구》(해문사, 1967년 1쇄, 1968년 2쇄)를 출판했고, 이후 구한말의 동북아 국제관계에 관해 발표한 일련의 논문들을 모아 《한국외교사론》(대왕사, 1984)을 출판했다. 여기에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한국의 철퇴교섭〉(《박재섭박사회갑기념논집》 1976년 12월) 등이 포함되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앞의 책에 수록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그의 학문세계를 살펴보았다.
 

  이 논문들 모두 1차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담아 학술적 가치가 높아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후학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필자로서는 우선 〈신라의 통일외교정책 연구〉에 주목했다. 이 논문은 통설에 수정을 요구하는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노 교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통일’을 ‘역사상 처음으로 보는 대규모의 통일’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통일’이 아니며 ‘민족의 소통일(小統一)’이라고 보았다.
 
  둘째, 우리는 흔히 백제가 신라와 당(唐)의 연합군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한 660년에 멸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 교수는 의자왕이 항복한 뒤 백제의 왕족과 백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국왕으로 옹립해 나당연합군에 저항해 200여 성(城)을 확보하다가 670년에 멸망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고구려의 멸망 시점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했다. 흔히 보장왕(寶藏王)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669년에 멸망했다고 말하는 데 대해, 노 교수는 비록 국왕이 항복했다고 해도 백성들이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해 국가체제를 정비해 대항한 사실에 주목하고 안승마저 항복한 676년에 멸망한 것으로 해석했다.
 
  백제의 경우와 고구려의 경우 모두 국왕의 항복 이후에 나타난 국가체제가 국제법이 말하는 이전 국가의 동일성(同一性)과 계속성(繼續性)을 유지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셋째, 노 교수는 훗날 29대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의 통일외교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부 민족주의적 또는 국수주의적 역사학자들은 김춘추를 당나라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논리로써 ‘매국노’라는 극렬한 표현으로 비난했었다. 그러나 노 교수는 김춘추의 통일 정책을 독일의 통일을 성취하는 프로이센왕국의 국무총리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통일 정책에 상응한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연장선 위에서, 노 교수는 김유신(金庾信)을 비스마르크를 도왔던 프로이센군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Johann Ludwig von Moltke)에 비유했다.
 
  노 교수의 논문들 가운데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한국분할안에 관한 역사적 고찰〉(《국제법학회논총》 제8권 제1호, 1963년 3월: “Territorial Division of Korea”, KoreanAffairs, Vol.3, No.2, July 1964)이다. 노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할이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깊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성장해 나타난 것임을 논증했다. 노 교수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에 놓였기에 두 세력의 갈등과 대립, 심지어 전쟁의 무대가 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미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제기된 한반도 분할안이 청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와 러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거듭 제기되었음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 설명이 오늘날에는 상식처럼 되어 있으나 노 교수가 이 설명을 개진한 1963년 3월의 시점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점에서 이 논문은 이후 후학들의 연구를 자극한 선구적 연구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뿌리 탐구
 
  둘째, 〈간도는 누구 땅이냐?〉(《최고회의보》 1963년 9월, 10월, 11월 분재) 그리고 이 논문을 발전시킨 〈간도협약에 관한 외교사적 고찰〉(《유진오박사회갑기념논문집》 1966년 4월)이다. 이 논문들은 앞에서 보았듯 그의 석사 학위 논문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해방 이후 간도에 관한 최초의 연구사례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 의미를 인정할 수 있다. 노 교수는 이 논문들에 이어 〈간도영유권문제에 관한 연구〉(《세림한국학논총》 1, 1977)도 발표해 매우 중요한 이 주제에 관한 관심을 계속해서 이끌었다.
 
  이 일련의 논문들을 통해 노 교수는 조선=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1차 자료들을 샅샅이 살핀 뒤, 간도는 조선=한국의 영토임을 논증했고, 명백한 조선=한국의 영토를 1909년 9월 4일에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약칭 간도협약을 통해 청에 자의적으로 넘긴 일제의 결정을 비난했다. 외교사학자이면서 국제법학자인 노 교수는 이 협약이 국제법적으로 무효임을 논증하면서,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를 상대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러한 간도에 관한 그의 연구는 마침내 〈간도영유권분쟁사〉(한국연구원, 2006)로 정점에 도달한다.
 

  간도에 대한 노 교수의 관심은 두만강 녹둔도(鹿屯島)의 영유권으로 확대되어 〈두만강 녹둔도 영유권 문제〉(《한국방송통신대학논문집》 21, 1996년 2월)로 나타났으며, 독도의 영유권으로도 이어져 〈독도영유권에 관한 몇 가지 새로운 논거〉(《통일》 188, 1997년 5월)로 나타났다. 노 교수는 《고려영토사》(갑인출판사, 1993)와 《조선의 영토: 우리의 영토는 어디까지인가?》(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97)를 출판함으로써 간도의 영유권 연구로 시작한 자신의 조선=한국의 영토에 관한 연구를 마무리했다.
 
  노 교수의 저술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흐름이 있다. 그는 지난날 우리 민족이, 특히 지도층이 대외관계에 어두워 강대국 권력 정치에 희생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반도 주변 상황을 언제나 면밀하게 살피며 적절한 대책을 세워 대응하지 않으면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때 주변국들이 조선의 분단을 협상하고 있었는데도 조선 조정에서는 누구도 그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대책을 세울 수 없었음을 개탄한 것이다.
 
 
  노계현 교수의 경고
 
  노 교수가 이 글들을 발표하던 때보다 우리는 대외관계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고 더 잘 대처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 교수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국제 정치에 대한,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뒷받침한 정책을 추진한 사례가 그것을 말해준다. 노 교수가 역설했듯, 국제 정치는 냉철한 현실주의적 판단 위에서 분석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영토에 대해서도 노 교수는 경고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명백백한 한국의 영토를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일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북한이 중국 및 구(舊)소련과 맺은 영토에 관한 조약들을 정확히 파악해 부당성을 지적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이 우리 모르게 그 나라들과 어떤 밀약을 맺는지 파악하지 않으면 훗날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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