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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시민군 소년병’ 김윤이 말하는 5·18과 광주, 대한민국

“‘5·18 팔이’ 하는 사람들, 이제 제발 그만해라”

글 : 장원재  ㈜戰後 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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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민주화 운동권의 카르텔 깨는 것이 진정한 민주혁명으로 가는 길”
⊙ “5·18 유공자, 누군가가 서로 짜고 증언했다고 하면 眞僞 가릴 방법 없어”
⊙ “광주에서 5·18 유공자 문제 공론화 못 되는 건 일당독재 때문”
⊙ “국민의힘, 매력 창출에 실패… 정통 보수 기본으로 지지세를 확장했어야”
⊙ 김우중 회장의 ‘운동권 특채’로 대우車 입사, 세계경영기획단장으로 활동
  5·18 광주(光州) ‘시민군 소년병’ 출신으로 2024년 총선 때 광주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전 대우자동차 세계경영기획단장 김윤.
 
  그렇다. 그의 삶에는 1980년대의 피 끓는 청춘이 녹아 있다. 다른 길로 갔더라면 출세(出世)의 길이 활짝 열렸을 텐데, 그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자기만의 길을 갔다. 그의 우직한 선택에는 어떤 배경이 깃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 1963년 담양(潭陽)에서 태어났네요?
 
  “네. 수북면 삼인산 아래가 고향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종의 한학자(漢學者)셨죠. 우리 집안이 전통적으로 유학(儒學)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특별한 사회 활동은 하지 않고 선비적 삶을 사셨죠.”
 
  그가 소년 시절부터 한적(漢籍)과 친했던 배경이다. 아버지 친구분이 공부 잘하라고 써주신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붓글씨를 벽에 붙이고, 소년 김윤은 당시(唐詩)와 논어(論語)에 빠져 지냈다. 한문(漢文)은 그래서 그의 모태(母胎)신앙이다.
 
  ― 광주로는 언제 이사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로 전학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 서울로 오게 됐죠. 제가 맏아들인데, 그때 기준으로 아버지께서 저를 늦게 두신 거예요, 30세에. 제가 호기심 많고 학교 다니고 싶다고 하니까 5세에 입학시켰는데, 제가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고 보셨는지 대처(大處)로 빨리 보내자고 결정하신 겁니다.”
 
 
  “교장 선생님, ‘너 지금 나가면 죽는다’”
 
광주진흥고 재학 시절 교련복을 입고 행군(당시에는 소풍 가는 것을 행군이라 했음)을 가서 찍은 사진(앞줄 가운데). 이 교련복을 입고 1980년 소년시민군으로 참여했고, 44년 후인 2024년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때 다시 꺼내 입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타향(他鄕)에서 살았지만, 담양과 광주가 지척이라 낯선 느낌은 크지 않았다. 이런 중 광주 진흥고 3학년이던 1980년, 5·18이 터진다.
 
  ― 그날, 어디에 있었습니까?
 
  “제가 살던 곳이 광주 계림동입니다. 5월 18일에 공수부대가 시민들한테 잔혹한 행동을 했다는 소문이 시내에 쫙 퍼졌어요. 그래서 제가 19일, 20일 계속 시내에 나갔습니다. 거리를 공수부대가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굉장히 공포스러웠죠.”
 
  ― 바로 ‘시민군’에 들어간 겁니까.
 
  “아뇨. 5월 20일에 제가 광주 시민 중 돌아가신 분들 안치한 곳에 다녀왔어요. 옛날 도청 건물 바로 앞에, 지금도 그대로 있는데, 상무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험악했냐면, 핏자국이 그냥 그대로 다 보이고 관(棺)도 없어가지고…. 그걸 보고 제가 엄청나게 분노했어요.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김윤은 시위를 주동했다. 보고 온 바를 전하고 반마다 돌아다니며 ‘우리 고등학생들도 나서야 한다’고 외쳤다. “조규진 교장 선생님이 저를 상당히 예뻐하셨어요. 시민군에 참여하겠다는 저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너 지금 나가면 죽는다’라며 울면서 막으셨어요.”
 

  김윤은 교사들의 눈을 피해 담을 넘었다. 교련복 차림이었다.
 
  “저랑 얘기가 많이 통했다고 할까, 제 멘토 역할을 했던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했거든요. 전남대·조선대 선배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시민군에 많았죠. 제가 가니까 저를 많이 보호해줬습니다, 고등학생이라고. 도청 들어갈 때도 제가 형들 따라서 같이 들어갔었는데… 그 형들이 기어이 저를 도청 밖으로 내보냈어요.”
 
  이번 총선에서 김윤은 바로 그 교련복을 입고 유세를 했다. 44년 된 옷인데도 보존 상태가 좋았다. 고3 김윤이 학교 담을 넘은 건 1980년 5월 22일 혹은 23일이다. 이후로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총 뺏고 도청 밖으로 내보낸 형들
 
  ― 실제로 무기도 지급했습니까.
 
  “지급했다기보다는, 제가 총을 잡았죠. 덜덜덜 떨면서요. M1 소총으로 기억합니다. 딱 한 번 잡아봤고 실제로 쏴보거나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 실제로 총알이 오갔을 때, 총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을 텐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저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무지무지한 공포, 또 하나는 분노. 이 두 가지 마음이 계속 교차했죠. 정말 두려우면서도 ‘어쨌든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하여튼 그랬습니다.”
 
  필자는 5·18 진압군으로 광주에 갔던 분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논란이 됐던 발포 명령 얘기에 대해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무장한 시위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몰려오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포감 때문에 전원 실탄을 장전했다. 조준 사격? 못 한다. 그냥 눈 감고 머리 위로 총 들고 쏘는 거다. 그 공포감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얘기를 했더니 김윤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심정에 120% 공감합니다. 그리고 저는 총을 잡아만 본 거지 실제로 쏴보지는 못했어요. 제가 키도 작고 고등학생 교련복 입고 있으니까 형들이 절대 못 하게 했습니다. 제가 총을 잡으면 뺏고 또 뺏고 그랬죠.”
 
  ― 광주 도청 사수대(死守隊)로 마지막까지 있었던 건가요?
 
  “그렇게까지는 못 있었죠. 그러니까 공수부대가 들어오기 이틀 전에 형들이 기어이 저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고등학생들은 여기 있지 말고 다 나가서 공부해야 한다면서….”
 
 
  “대한민국 중심의 역사관”
 
  ― 선거 유세 때 5·18 정신에 대해 말했는데, 5·18 정신이라는 것은 뭡니까.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저는 대한민국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눈부신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냉전(冷戰)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처럼 굉장히 탁월한 지도자의 선택이 있었죠. 6·25의 잿더미 위에서 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산업화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끌어갔습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남은 과제가 있었죠.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대한민국의 내부 공동체 운영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는 ‘건국(建國)과 산업화(産業化)의 가치 위에 세워진 민주화(民主化)’를 말했다. ‘산업화’의 의미를 필자는 ‘절량농가(絶糧農家)’의 근절, 그러니까 이 땅에서 최초로 밥 굶는 사람들을 없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1970년대 말이 저는 과도기의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다소 권위적인 리더십이 바뀌어야 할 시점이 그때였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연장했던 것이 전두환(全斗煥) 군부(軍部)의 등장이었고, 와중 핵심적인 타깃이 됐던 것이 광주가 아닌가, 의도했던 건 아닐지 몰라도 결과가 그렇단 말씀입니다.”
 
  필자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민주화 열기가 높았던 곳은 광주라고 생각한다. 여러 원로 언론인을 만나본 뒤 내린 결론이다. 소년병 김윤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데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했어야 했느냐. 가만히 있었어야 했느냐. 가만히 있었다면 이 뒤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됐을 것인가? 이렇게 저는 질문을 한 번 던지고 싶습니다.”
 
 
  ‘북괴는 오판 마라’
 
  ― 당시 광주 시민의 염원은 무엇이었습니까.
 
  “민주화로 한 걸음 전진해야지 더 억압적인 독재 체제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이 문제의식으로 맞섰던 것이고, 이런 것들이 자양분(滋養分)이 되어 대한민국이 민주화 부분에서도 상당히 빠르게 압축성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확실하게 광주 시민들이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룩한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라고 하는 삼박자의 눈부신 성취의 한 축으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동욱(李東昱) 전 《월간조선》 기자는 5·18 정신의 핵심 중 하나가 ‘반공친미(反共親美)’였다고 썼다. 김윤이 답했다.
 
  “그건 100% 사실입니다. 그때 ‘북괴는 오판(誤判) 마라’고 시민군이 내건 플래카드를 제가 봤습니다. 대자보에서도 봤고요. 그리고 결국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들을 했었죠. 당시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의 항공모함이 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을 듣고 제가 안심을 했어요. ‘국제사회가 우리를 인정하는구나. 우리의 정당한 뜻을 주장하면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시민군이 북이 파견한 간첩을 잡아 계엄군에게 인계한 사실도 나온다.
 
  “그건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가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광주 시민에게는 ‘북이 이 상황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광범위한 컨센서스가 있었습니다. 이 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직구(直球)를 던지겠습니다.”
 
  ― 좋습니다.
 
  “당시 광주 상황에서, 대부분의 광주 시민이 다 시민군이었습니다. 주먹밥 나르고 물 떠 주고…. 일부 몇 사람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독점(獨占)해 마치 자기들이, 자기들만이 주연인 것처럼 행세하는 부분에 대해 저는 굉장히 강력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실에도 맞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말이 좀 거칠지 모르지만, ‘5·18 팔이’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해라.”
 
  ―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잖아요.
 
  “저는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것이 아니고 민주화 유공자입니다.”
 
  ― 유공자 등록 신청 안 했습니까?
 
  “안 했죠. 왜 그랬느냐. 솔직히 제가 소년 시민군으로 나갔던 사실을 고등학교 친구들, 선생님, 부모님, 흥사단 선배들 등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5·18 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는 것이 5·18 정신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신청만 하면 바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5·18 민주화 유공자 공적 조사하는 곳에 제가 아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래서 ‘야, 윤아, 너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신청 안 하느냐?’고 해요. 신청만 하면 바로 된다고. 그럴 때마다 전 ‘그건 광주 민주화 운동 정신에 역행하는 거다’라고 얘기하고 끝까지 안 했습니다.”
 
 
  “누구도 시비 못 걸더라”
 
  ― 이번에 그 점을 분명하게 밝혔죠?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밝혔죠. 왜 그랬느냐? 이제는 광주가 5·18을 넘어서야 하는데, 계속 그걸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걸림돌, 발목을 잡고 있는 그런 요소로 광주가 더 이상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얘기를 당사자였던 제가 당당하게 한 번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봤습니다.”
 
  ― 시비는 없었습니까.
 
  “누구도 시비를 못 걸었습니다. 이번에 광주 내려갈 때 주변에서 ‘야, 윤아, 그거 정면으로 대결하면 누가 너한테 돌도 던지고 혹시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더군요. 제가 볼 때는, 저처럼 그때 진짜로 분노하고 교련복 입은 채 실제로 시민군 활동을 했던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 방금 했던 ‘일부 세력이 5·18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까? 지금 5·18 같은 경우에는 유공자 명단도 비공개로 돼 있고, 일반인 입장에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기에 말씀드립니다. 또한 ‘누군가가 5·18 정신을 독점해 사적(私的) 이익을 취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100% 확실한 객관적 증거를 가지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어서 어느 정도 제 나름의 주관적 소견일 수밖에 없지만, 예를 들면 아까 제가 공적 조서 작성하는 문제 얘기했잖습니까? 그건 뭐냐면, 서로서로 간에 증언이 일치하면 됩니다. 간단히 얘기해서, 누군가가 서로 짜고 증언했다고 하면 그 진위(眞僞)를 가릴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에, 이 틈을 파고든 사람이 있을 거다, 그러니까 실제로 당시 일반 보통 광주 시민보다도 활동을 안 했던 사람들이 심지어 유공자로 등록, 행세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계속 계란으로 바위 치며 부딪쳐야”
 
지난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 후보로 출마한 김윤씨는 ‘돌아온 소년군’임을 내세웠다.
  ― 이 문제가 지역사회에서는 왜 공론화되지 못하는 겁니까.
 
  “일당독재(一黨獨裁) 때문이죠. 이런 부분까지 포함해서 지금 광주가 어떤 문제를 낳고 있느냐? 광주에서는 지금의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야당입니다. 시의회 의석이 없어요. 아예 그냥 배제되는 분위기입니다.”
 
  그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고 한다. ‘출마 취지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런데 당선 가능성은 0%다,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오면 표를 3배는 더 받을 거다’라고 했단다.
 
  ―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네요.
 
  “누군가는 계속 이렇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서 부딪쳐야죠. 어느 정도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하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 근거가 있습니까.
 
  “공천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사당화(私黨化)에 대한 우려가 높았거든요. 이재명 대표 측근 위주로 공천이 진행되면서 광주의 유력 국회의원, 현역 국회의원들이 다 낙천(落薦)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민형배 의원인데, 민 의원은 이재명 대표에게 충성하는 강경파 초선 모임 처럼회의 핵심이었죠.”
 
  ― 광주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까.
 
  “네.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어요. 이런 식의 공천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민주당과도 차이가 크게 나는 행위죠. 그래서 정통적인 민주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3월 중순 이후 ‘그래도 2번 찍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는 분위기로 다시 돌아갔죠. 광주의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물꼬를 터보자는 흐름이 줄어들고, 이재명 사당화에 대한 비판적 에너지가 국민의힘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조국혁신당으로 가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문제이자 과제입니다. 더 나은 대안(代案)으로서 국민의힘이 광주에서, 호남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제2의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에서 출마한 국민의힘 후보들이 광주 지역 공약을 발표했다. 가운데가 김윤.
  김윤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또 있었다. 지금 같은 투표 행태가 계속되는 한 광주의 미래는 없다는 점이다. 광주 시민들의 정치적 이익이 앞으로도 계속 전국 단위 선거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었다. 이건 무슨 얘기일까?
 
  “광주 시민은 무조건 민주당에 투표합니다. 광주 시민들의 근본적인 가치, 이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공약이나 정책을 내세워도 다 뽑아주죠. 현재 이재명 대표의 핵심적인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지 본인이 집권하는 겁니다. 그 수단에 지금 가장 큰 역할을 해주고 있는 그 부분이 어디냐? 광주입니다. 조금 더 나은 다른 대안이 있다면, 다른 정치 세력이든 국민의힘이든 얼마든지 투표할 겁니다. 바뀔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 에너지를 잡아야 광주의 정치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광주시의회나 전라남도 도의회가 사실상 일당독재로 가는 한, 오히려 호남에서는 전국적 정치인이 나오지 못할 겁니다.”
 
  ― 왜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재명 캠프의 핵심적인 전략 가운데 하나는 자기와 경쟁할 수 있는 호남 인물들을 완전히 원천 배제하는 겁니다. 광주에 8개 선거구가 있는데 7군데가 초선입니다. 이렇게 해도 표를 주는데, 호남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걸 타파하는 길이 시의회나 도의회, 총선에서의 일당독재를 깨는 것인데, 이게 지금 쉬운 문제가 아닌 거죠.
 
  이번에 TV 토론에 나가서도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이제 5·18을 넘어서서 확실하게 각성해야 한다. 광주 시민들 더 이상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이걸 끊어내고 광주가 다시 한 번 제2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킬 각오로 미래를 개척하자.”
 
 
  “확실한 자기 정체성 없이 무슨 싸움 하나”
 
  김윤은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청년당, 국민의당 등을 거치며 정치적 실험을 거듭했다. 통합민주당을 탈당하면서는 ‘민주화 운동의 경험과 나만 옳다는 교만함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바로 운동권들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그에게 상당한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다줬다. 혹시 후회는 없을까?
 
  “그때 당시에 제가 했던 것은 좀 우아한 발언이었죠, 하하. 그 뒤에 이들의 작태를 보면, 내로남불을 넘어 완전히 부패, 타락, 무능의 카르텔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죠. 이번 총선에서 의석수 기준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국민의힘이 패했습니다. 하지만 득표율을 보면 5% 남짓밖에 차이가 나지 않거든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맞느냐. 기존의 운동권 카르텔 세력들, 더더군다나 지금 변질된 이재명 사당화된 민주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야당에 정치적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여당은 그럼 왜 졌습니까.
 
  “정치력에서 진 거죠. 매력(魅力) 창출에 실패한 겁니다. 정통 보수를 기본으로 해서 지지세를 확장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어요. 보수의 중심 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일관된 스토리와 비전, 힘이 없었죠. 확실한 자기 정체성(正體性) 없이 무슨 싸움을 합니까?”
 
  ― ‘이념(理念) 논쟁을 하지 않은 것이 패인(敗因)’이라는 얘기네요.
 
  “그렇죠.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저는 이게 핵심이라고 보는데, 저쪽에서 제일 잘하는 게 뭐냐면 정치적인 선전 선동입니다. 이 분야의 달인들이 뭉쳐서 움직이는데 여기에 번번이 깨지면서도 계속 속수무책(束手無策)이잖습니까.”
 
 
  “전체적 흐름은 비관적이지 않아”
 
  ― 그럼 앞으로 지방선거, 총선, 대선에서도 우익 정당에는 미래가 없는 겁니까.
 
  “저는 대한민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비관적이지 않아요. 승리를 견인할 수 있는 이쪽의 주체적 역량, 리더들의 문제가 훨씬 더 본질적이죠. 어떻게든 전열(戰列)을 재정비해서, 그러니까 우익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자기정립(自己正立)해서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야죠.”
 
  그는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체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했다. 정치력 무능이 역사적 비극을 부를 수도 있다고 했다.
 
  “역사를 보면 많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비근한 예로 히틀러 같은 사람도 선동으로 선거에서 이겼죠.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고 난 뒤에 그런 황당한 짓을 벌일 것이라고 그 당시 독일 국민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한민국에 그런 상황이 안 오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총선의 압도적 패배가 오히려 우익에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심 세력으로 우익이 거듭나야 합니다.”
 
  ― 그동안 주사파(主思派)와 공산주의 세력의 체제를 뒤흔들려는 야욕은 멈춘 적이 없다고도 말했더군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죠. 계속 외양(外樣)을 바꾸면서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종북(從北)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종북 세력들이 호남과 광주를 숙주(宿主)로 해서 강력히 결합하는 전략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 광주에서 그렇게 말하면 돌 맞지 않습니까.
 
  “저는 각오했는데 그러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 자기들 스스로도 정당성이 현재 약화돼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원희룡과 비주사파 NL 활동
 
  그는 주사파 전문가다. 대학 운동권 시절부터 북의 주사파에 반발해 비(非)주사파 NL(민족해방)이라는 소수파를 이끌었다. 당시 주사파들에게 이미 한 번 조리돌림을 당했다.
 
  “당시 운동권들이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의 대한민국이 무슨 봉건주의 사회입니까? 이건 사실에 안 맞는 거다, 억지 프레임이다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 반제(反帝)는요?
 
  “저는 미국에 대해 ‘우리가 좀 종속적인 면이 있는데, 이건 좀 벗어나야 한다’는 자주적(自主的)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주사파는 북한에서 보내는 방송을 그대로 적어가지고 녹음기 재생하듯이 기계적으로 외웠죠.
 
  당시에 유행했던 책 중에 김정일이 쓴 책이 있어요. 《주체사상에 대하여》였던가? 읽어보니까, 무슨 중학교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아주 유치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매우 진지하게 무슨 성경책 보듯이 외우고…. 황당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반미주의자는 아니고, 자주적인 것을 추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적어도 김일성의 주체사상, 그리고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운동은 옳은 길이 아니다!’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우리가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담아 붙인 이름이 ‘자주파NL’이다. 원희룡(元喜龍)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이 모임의 동지였다.
 
  “저는 81학번이고 원희룡 전 장관은 82학번이었죠.”
 
  ― 청년 시절의 원희룡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큰 정치인으로 성장한 원희룡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을 텐데, 제가 본 원희룡은 무엇보다도 명석한 인물입니다. 이건 확실해요. 학력고사 전국수석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내면이 맑고 자긍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원희룡 전 장관이 지금까지 정치적으로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마는 어쨌든 본인 나름대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김우중, “나도, 자네들도 애국자”
 
김윤씨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에 공감해 ‘운동권 특채’로 대우그룹에 입사했다.
  김윤은 학생 운동을 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1년간 복역도 했다. 졸업 후 구로공단, 부천, 인천에서 렌즈공장, 인쇄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인천노동교육연구소를 만들어 상담·교육·조직 활동을 했다. 1992년 사회주의권이 무너지자 운동의 방향성과 목표를 상실했고 이념적 회의가 생겼다. 1992년 결혼 후 번역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1995년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과 인연이 닿았다.
 
  “그때 마침 김우중 회장님이 ‘세계 경영’을 내걸고 인재들을 찾고 있었어요. ‘세계 경영’의 기본 취지가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아웅다웅 살지 말고 세계로 나가자!’였죠. 회장님 생각으로는, 세계 시장을 개척하는 데 진취적인 사람이 필요한데 운동권이 적격이라고 보시고 저희를 대거 영입하셨습니다.”
 
  힐튼호텔 중식당에서 만난 김우중 회장은 ‘나도 애국자고 자네들도 애국자다. 배고픔에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으라고 일했다. 산업전사들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다음은 이 바탕 위에서 자네들이 좀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달라. 젊은 나이에 목숨 걸고 운동했다면 애국한 거다. 나의 애국과는 시절과 조건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애국자들끼리 모여서 한번 무대를 넓히자. 나랑 같이 손잡고 크게 한번 뛰어보자. 너희라면 정말 잘할 거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뛰었어요. 그 자리에서 입사원서를 썼죠. 그러니까 ‘내일부터 나랑 같이 일하자’라고 하시더군요.”
 
  일벌레 김우중 회장의 출근 시각에 맞춰, ‘운동권 특채’들은 매일 아침 7시까지 출근했다. 김우중 회장은 ‘운동권 활동’을 경력으로 인정, 이들을 일반 사원이 아니라 대리로 발령했다. 그의 꿈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노하우(know-how) 자체를 동구권 및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세계경영기획단장’
 
우크라이나 현지합작법인에서 경영관리담당 디렉터로 일할 때의 모습.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하면서 사회주의의 잔재를 벗어버렸다.
  어느 날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의 요청으로 김윤 대리는 ‘혁신안’을 냈다. 한 사람이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운동권식 멀티플레이 개념을 인사(人事) 경영에 도입, 급격한 확장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사람을 자르지 않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새벽 5시부터 한 시간 동안 보고받던 김태구 회장은 ‘당장 하자’면서 바로 김우중 회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날부터 김윤은 ‘세계경영기획단장’으로 직함이 바뀌었다. 대우그룹은 의사 결정이 아주 빨랐다. 과감하게 역할을 주고 아이디어를 현실에 접목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밀어줬다. 김윤의 생활반경도 세계로 확장되었다. 베트남, 인도, 동유럽 가리지 않고 출장을 다녔고 1997년부터는 우크라이나에서 3년 넘게 주재원으로 생활했다.
 
  우크라이나 생활은 관념적으로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던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향한 관심을 완전히 뿌리 뽑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공산당이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우리 1세대 기업인들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절감했다. 과거 담론,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의 담론으로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끌고 나갈 수 없다는 판단도 했다. 이미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보다 더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유다. 여러 시도를 했지만, 아직까지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전두환, 공과 분명”
 
  ―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고 했는데,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국부(國父)다,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냉전 체제하에서 정확한 국제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를 단호히 반대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셨죠.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 등 호남 우익의 협조로 단행한 농지 개혁도 엄청난 업적이라고 봅니다. 그 과업을 합리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공산당을 막아낼 수 있는 민중적 힘이 생겼다고 확신합니다.”
 
  ― 박정희 대통령은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핵심 문제는 ‘어떻게 해야 빨리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경제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이 과제를 탁월하게 수행한 분이죠.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분기점은 내수(內需) 경제, 자력(自力) 경제를 관념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과감하게 수출 경제, 개방 경제로 나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가 이렇게까지 고도성장을 해온 건 그 갈림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경우는 공과가 분명하다고 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같은 경우는 어떤 기준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죠. 그러나 결과론적일 수 있습니다마는 지금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수준의 경제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시기가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 시기거든요. 전두환 대통령이 다른 건 몰라도 경제 운영과 관련해서는 잘했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한테 확실하게 권한을 위임했죠. 긍정적 리더십입니다.”
 
 
  “유의미한 리더는 이승만·박정희·김대중”
 
  ― 노태우 대통령은요?
 
  “당대에는 카리스마가 좀 약하신 분이어서 높은 평가를 못 받았지만, 군부독재 시대를 넘어 민주화 시대로 대한민국이 한 단계 높은 곳에 연착륙(軟着陸)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특히 북방외교 같은 경우도, 쉽게 얘기하면 발전된 대한민국 수준에 맞게 국제적으로 외교 수준을 확장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적으로 좀 매력도가 떨어져 보여서 저평가돼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노태우 대통령도 과도기에 훌륭한 역할을 하셨다고 봅니다.”
 
  ― 김대중 대통령은 어떻게 보십니까.
 
  “공칠과삼(功七過三).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功)은 통합과 미래의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신 점이죠.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본인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념적인 잣대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대통령 될 때도 과감하게 DJP 연합을 했고, 김중권 비서실장 카드도 좋았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대한민국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했죠.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미래를 설계해 IT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과(過)는 북한에 현금 지원을 한 것입니다. 북한 문제가 핵심이죠. 햇볕 정책을 통해 얼마든지 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겠지만, 결과적으로 북 수뇌부를 꿰뚫어 보고 수립한 정책은 아니었죠. 김대중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북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 것은 심각한 문제죠. 결과론적일 수 있습니다만,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정권에 대해 단호함과 유연함을 겸비했더라면 역사적인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 그 뒤로도 여러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유의미한 리더들은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세 분이라고 봅니다. 다 공과(功過)가 있으시죠. 그 뒤로는 대한민국이 새롭게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어떻게든 대한민국이 더 이상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중한 요청인지를 윤석열(尹錫悅) 대통령께서 절실하게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익 강화의 본질은 뭐냐? 무조건 과거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의식을 가지고 대한민국 전체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려는 주류 정체성이 우익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를 하셔야 합니다. 바뀌면 희망이 있습니다.”
 
 
  “광주 기득권 카르텔, 완전히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부패”
 
  ― 정치인 김윤의 미래의 꿈은 무엇입니까.
 
  “광주가 지금같이 이재명 사당의 숙주 역할을 하는 걸 막는 겁니다. 이것이 광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권의 카르텔, 강력한 기득권을 깨고자 합니다. 광주 기득권 카르텔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닙니다. 광주에 대해서 걱정하는 광주 시민들의 얘기를 요약한 겁니다. 그 카르텔을 깨는 것이 진정한 민주혁명으로 가는 길이죠. 광주 민주화 운동의 목표가 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운동권 카르텔과 싸워서 광주 시민들이 다시 주인이 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2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고, 저는 거기에 일단 삑 소리라도 내보자는 마음으로 출마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운동을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하나 더 있습니다.”
 
  ― 무엇입니까.
 
  “2027년 대선에서 대한민국 체제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세력이 나온다면, 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일이 있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뭉쳐서 이번에는 0.7%가 아니고 상당히 큰 차이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대한민국의 압도적 다수이고 주류다’라는 메시지를 반(反) 대한민국적 세력에게 확실하게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작게나마 그 역할을 하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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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원    (2024-06-07) 찬성 : 0   반대 : 0
김윤 씨는 전두환 소장에 대해서 잘 모르고 계시네요. 전두환 소장은 5.18 사태 당시 계엄군에게 어떠한 명령도 내릴 상황도 아니었고 지휘선상에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높이 사는 것은 시민군이라고 할 수 없는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내용과 자신의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박성일    (2024-06-03) 찬성 : 18   반대 : 0
광주 5.18 혁명군 출신으로 광주 5.18에 대하여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네요.
5.18 민주화 유공자에 대해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하고, 공개 되어야 합니다.
떳떳하면 무엇이 두려워서 숨기고 있습니까?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김선생의 용기에 격려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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