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서 공연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바다로, 세계로 열린 부산은 살기에 좋다. 살아봐서 알고 여러 나라, 특히 항구 도시들을 많이 돌아봐서 안다. 사람이 좋고, 자연이 좋고, 역사가 좋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는 시드니도, 나폴리도 아닌 부산이다. 바다, 강, 산이 거대한 항만과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어우러진 곳은 달리 없다. 큰 부두, 해운대 백사장, 태종대 절벽, 낙동강의 낙조(落照), 시가지를 굽어보는 금정산·장산·구덕산, 색깔이 다른 동해와 남해의 만남 등.
부산은 해양수도(海洋首都)이다. 1876년 개항 이후 본격화된 약 150년의 해양화 과정에서 부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매축(埋築) 등으로 거주면적과 항만이 커지고 관부(關釜)연락선으로 일본과, 경부선을 통해 대륙과 연결됨으로써 한반도는 15세기 조선왕조가 바다에서 철수한 이후 500년 만에 처음으로 해양 문화권과 대륙 문화권을 연결하는 땅값을 비싸게 치르게 되었다. 그 땅값은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치러지기도 하고 경제 및 민주 발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38도선 분단 이후 한국이 사실상 섬으로 변하여 무역과 해외 진출이 생존의 조건이 됨으로써 무역 전초기지 부산의 역할은 더욱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계의 주(主)항로와 연결된 항도(港都)에선 해양 문화의 중추 세력인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시민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외래 문물을 맨 먼저 받아들였고, 공산 침략에 맞서 부산 교두보를 지켜냈으며, 임시수도 때는 타지(他地)에서 몰려드는 동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국제시장은 이들을 먹여 살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 줄 아는 습관을 익힌 부산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자유의 가치나 개인의 존엄성에 대하여 민감하다. 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서 공연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4·19의 선도 세력은 마산·부산 사람들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붕괴를 부른 4·19의 선도 세력은 마산·부산 사람들이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시민들을 향하여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생기고 시위가 격화되었는데 이를 부산이 받아 확산시키고(주력은 고등학생들) 불씨가 서울로 튀어 대학생 시위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부산은 1960~70년대 박정희(朴正熙) 정부에 의한 수출입국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하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 파병, 그리고 무역 붐으로 부산은 생동했다. 해양대학과 부산수산대학이 배출한 우수한 선장들이 외항선과 원양어선을 몰면서 5대양을 누비고, 목재 및 신발 산업으로 시작된 수출 산업은 울산·창원·마산의 중화학 공업으로 바통 터치되어 지금은 부·울·경으로 불리며 수도권 못지않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성공은 아파트와 마이카로 상징되는 중산층을 키웠고 배가 불러지니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1975년 나는 부산역 앞 광장에서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상봉 장면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 전해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대하여 박정희 정부는 조총련 동포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고차원적 대응을 했다. 이게 북한노동당의 일본 지부인 조총련을 거의 소멸로 몰고 가는 시작이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타고 리바이벌되어 크게 히트한 노래가 조용필이 새로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 노래에선 1970년대 부산 냄새가 난다.
1979년 10월 16일 밤 남포동. 나는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부산 출신 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釜馬)사태는 장기 집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날 오전 부산대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하다가 해산당하자 오후에 남포동, 중앙동으로 옮겨서 시위를 계속했다. 부가가치세 실시에 불만이 많던 상인들이 이들을 응원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이 사태를 민란(民亂)이라고 본 이유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과격해졌고 경찰 작전차를 뒤집어 새어 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철통 같았던 유신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였다.
2년 차 기자로서 1972년 10월 17일, 청천벽력 같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유신체제 출범을 맛보았던 나는 그 순간 “내일은 계엄령이 선포되겠다”고 동료 기자에게 중얼거렸다. 부산 지역에 비상계염령이 선포된 다음 날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의 궁정동 총성.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시위와 경상도 사람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85년 2·12 총선 이변과 ‘욱’하는 성격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마감하고 12년 이어질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권의 문을 열었다. 군인 출신 세 대통령 시절에 이승만 통치 12년을 보태면 42년, 대한민국 나이의 딱 절반을 차지한다. 이 네 대통령의 영도하에 대한민국은 해양화(海洋化)의 길을 질주했는데 모든 해양 문화의 본질은 개방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법치 및 민주화이다. 그런 역사의 대세(大勢)를 타고 발전한 도시가 부산이고 그런 시대정신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이들이 부산시민이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퇴장에 큰 역할을 한 부산시민들은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거제도 출신 부산 사람 김영삼이 지휘한 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야권 분열책을 뒤엎고 대이변(大異變)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 2년 뒤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분수령(分水嶺)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12 총선 드라마의 주인공도 부산 사람들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그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야권 성향 정치인들을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한민주당(신민당)과 온건 민주한국당(민한당)으로 분열되어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신민당은 고분고분한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선거 결과는 이런 예측을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이었다. 전국에서 민정당 후보 다섯 사람이 낙선했는데(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을 때) 세 사람을 낙선시킨 곳이 부산이었다. 당시 내가 만난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습니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光州)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자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하고 치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
부산 사람들의 특징인 ‘욱!’하는 성깔이 1987년 6월 18일 다시 한 번 역사를 뒤흔든다. 그날 밤, 10만 명의 시위대가 밤중에 부산시청을 포위,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 무렵 전두환·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막후에서 6·29 선언을 협의하고 있었다.
부마민주화운동으로부터 29년이 흘러 2008년 4월 총선 때 부산 유권자들은 친박(親朴)연대와 무소속 후보를 일곱 명이나 당선시켜 2·12 총선에 이어 또 한 번의 이변을 연출했다(한나라당 후보는 11명 당선, 민주당 후보도 한 명이 당선되었다). 부마민주화운동 때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으나 이명박(李明博) 세력이 박정희의 딸을 구박한다고 생각한 부산시민들이 격분한 것이다. 부산식 정의감의 발로라고 할까? 내가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고 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 사람들은 ‘욱’하면서도 균형감각이 있다. 좀처럼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산 사람들의 특질은 거의가 바다로부터 온 것이다.
바다에서 결정된 신라의 삼국통일
우리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제1법칙 또한 “바다를 가까이하면 흥하고 멀리하면 망한다”이다. 그리스, 로마, 바이킹(노르만), 베니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일본, 미국, 명(明) 이전의 중국 또한 바다를 통해 번영했다.
선진 문명과의 교류, 과학과 군사 기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돈벌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그러나 규칙을 지키는) 인간형의 탄생 등 대부분 바다를 통해 이뤄졌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말 달리던 북방기마민족(아마도 흉노 계통) 출신인데 신라에 정착하면서 배도 잘 모는 사람이 되었다. 말 잘 타고 배도 잘 모는 민족은 속도를 장악함으로 바이킹과 노르만처럼 세계사의 최강이 된다.
신라 진흥왕은 서기 553년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빼앗아 오늘날 서울의 모태인 신주(新州)를 설치,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통하는 관문을 장악했다. 새로운 바닷길을 연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과 통하고 서해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지정학적 우위(優位)에 서게 되었다.
676년 신라 해군은 서해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해군에 이겨 7년간 계속된 나당(羅唐)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이해 당은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 지역으로 물리고 한반도를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내어준다). 문무왕은 선부를 병부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신라 말기까지 존속한다. 그 뒤 조선은 바다와 배를 관장하는 중앙부처를 만들지 않았다.
고려도 해양 국가적 면모를 이어갔다. 몽골의 침략에 고려가 수십 년간 저항한 것은 세계적 기록인데 그 힘은 해군·해운·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삼별초(三別抄)의 영웅적 저항과 두 차례 일본 원정은 그 저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이 바다에서 철수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조선의 바다에서의 철수는 명의 해금(海禁) 정책 및 주자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자폐증과 연관된다. 15세기, 명나라가 바다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조선도 내륙화(內陸化)의 길을 간다. 명과 조선 사이의 서해는 외항선이 다니지 않는 바다가 되어 400년이 흘러갔다. 명이 자유통항을 금지하니 사신들도 육로로 다녀야 했다. 명과 조선의 서해 폐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었다. 조선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을 대상으로 강제로 인구를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한다. 이영훈(李榮薰)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경제사》에서 “조선왕조에 이르러 바다는 넓은 개방의 통로가 아니라 높은 쇄국(鎖國)의 장벽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한국전쟁은 부산항 차지 경주
바다에서 철수했던 한국인을 다시 바다로 재진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1905년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수준 높은 해양법 관련 박사 논문을 썼다.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이 논문은 해양 문화와 해양 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깊은 사고(思考)의 시작이었고, 1951년의 평화선 선포(독도 영토화), 1953년의 한미동맹으로 결실되었다.
신라가 동북아의 바다를 누빈 것처럼 한국인은 태평양을 포함한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게 된다. 박정희의 수출입국과 조선·해운 육성, 전두환의 경제 개방 정책, 노태우의 북방 정책은 이승만의 바다 재진입 전략의 확대판이었다. 이제 한국은 신라처럼 해양강국이 되었고 부산은 한국 해양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부산항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경주였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부산 근해에서 백두산함이 북한군 600명을 태운 적선(敵船)을 발견, 격침시키지 않았더라면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산을 향하여 밀려내려 오는 북한군을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으로 다부동에서 저지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는 무너지지 않았고,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길이 열렸다. 한국전에서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약 2500명의 소년병이 전사했는데, 대부분이 이 교두보를 지키기 위하여 투입된 아이들이었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부산수산대학 출신으로 원양어선 선장을 거쳐 동원그룹을 만든 김재철(金在哲) 전 무역협회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고 말하는 분이다. 한반도 지도를 180도 돌려놓으면 부산이 국토의 맨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 듯 웅크리고 있다. 부산 앞에 열린 태평양과 인도양, 그곳에 한국 문명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최근, 1980~90년대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기자를 만났다. 그는 서울 특파원을 지낸 뒤엔 방콕 특파원으로도 근무했는데 “한국 언론이 동남아를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지역에 특파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 기자들은 선진국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아픈 지적이었다. 머지않아 GDP 규모에서 인도네시아가 한국을 능가할 것이고 중국의 침체와는 달리 인도·베트남·태국이 올라오는데 언론이 무관심하니 한국인도 이 지역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인도는 이미 중국을 젖히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이 되었고,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또한 인구가 각 1억 명이 넘는다. 그는 인도의 모디 수상이 21세기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했다. 21세기 부산이 나아갈 방향을 시사(示唆)한 충고로 생각되어 소개했다.Ⓑ
부산은 해양수도(海洋首都)이다. 1876년 개항 이후 본격화된 약 150년의 해양화 과정에서 부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매축(埋築) 등으로 거주면적과 항만이 커지고 관부(關釜)연락선으로 일본과, 경부선을 통해 대륙과 연결됨으로써 한반도는 15세기 조선왕조가 바다에서 철수한 이후 500년 만에 처음으로 해양 문화권과 대륙 문화권을 연결하는 땅값을 비싸게 치르게 되었다. 그 땅값은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치러지기도 하고 경제 및 민주 발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38도선 분단 이후 한국이 사실상 섬으로 변하여 무역과 해외 진출이 생존의 조건이 됨으로써 무역 전초기지 부산의 역할은 더욱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계의 주(主)항로와 연결된 항도(港都)에선 해양 문화의 중추 세력인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시민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외래 문물을 맨 먼저 받아들였고, 공산 침략에 맞서 부산 교두보를 지켜냈으며, 임시수도 때는 타지(他地)에서 몰려드는 동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국제시장은 이들을 먹여 살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 줄 아는 습관을 익힌 부산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자유의 가치나 개인의 존엄성에 대하여 민감하다. 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서 공연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4·19의 선도 세력은 마산·부산 사람들
1979년 부마민주화운동은 유신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 사진=조선DB |
부산은 1960~70년대 박정희(朴正熙) 정부에 의한 수출입국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하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 파병, 그리고 무역 붐으로 부산은 생동했다. 해양대학과 부산수산대학이 배출한 우수한 선장들이 외항선과 원양어선을 몰면서 5대양을 누비고, 목재 및 신발 산업으로 시작된 수출 산업은 울산·창원·마산의 중화학 공업으로 바통 터치되어 지금은 부·울·경으로 불리며 수도권 못지않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성공은 아파트와 마이카로 상징되는 중산층을 키웠고 배가 불러지니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1975년 나는 부산역 앞 광장에서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상봉 장면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 전해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대하여 박정희 정부는 조총련 동포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고차원적 대응을 했다. 이게 북한노동당의 일본 지부인 조총련을 거의 소멸로 몰고 가는 시작이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타고 리바이벌되어 크게 히트한 노래가 조용필이 새로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 노래에선 1970년대 부산 냄새가 난다.
1979년 10월 16일 밤 남포동. 나는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부산 출신 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釜馬)사태는 장기 집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날 오전 부산대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하다가 해산당하자 오후에 남포동, 중앙동으로 옮겨서 시위를 계속했다. 부가가치세 실시에 불만이 많던 상인들이 이들을 응원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이 사태를 민란(民亂)이라고 본 이유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과격해졌고 경찰 작전차를 뒤집어 새어 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철통 같았던 유신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였다.
2년 차 기자로서 1972년 10월 17일, 청천벽력 같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유신체제 출범을 맛보았던 나는 그 순간 “내일은 계엄령이 선포되겠다”고 동료 기자에게 중얼거렸다. 부산 지역에 비상계염령이 선포된 다음 날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의 궁정동 총성.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시위와 경상도 사람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85년 2·12 총선 이변과 ‘욱’하는 성격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마감하고 12년 이어질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권의 문을 열었다. 군인 출신 세 대통령 시절에 이승만 통치 12년을 보태면 42년, 대한민국 나이의 딱 절반을 차지한다. 이 네 대통령의 영도하에 대한민국은 해양화(海洋化)의 길을 질주했는데 모든 해양 문화의 본질은 개방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법치 및 민주화이다. 그런 역사의 대세(大勢)를 타고 발전한 도시가 부산이고 그런 시대정신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이들이 부산시민이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퇴장에 큰 역할을 한 부산시민들은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거제도 출신 부산 사람 김영삼이 지휘한 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야권 분열책을 뒤엎고 대이변(大異變)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 2년 뒤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분수령(分水嶺)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12 총선 드라마의 주인공도 부산 사람들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그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야권 성향 정치인들을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한민주당(신민당)과 온건 민주한국당(민한당)으로 분열되어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신민당은 고분고분한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선거 결과는 이런 예측을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이었다. 전국에서 민정당 후보 다섯 사람이 낙선했는데(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을 때) 세 사람을 낙선시킨 곳이 부산이었다. 당시 내가 만난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습니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光州)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자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하고 치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
부산 사람들의 특징인 ‘욱!’하는 성깔이 1987년 6월 18일 다시 한 번 역사를 뒤흔든다. 그날 밤, 10만 명의 시위대가 밤중에 부산시청을 포위,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 무렵 전두환·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막후에서 6·29 선언을 협의하고 있었다.
부마민주화운동으로부터 29년이 흘러 2008년 4월 총선 때 부산 유권자들은 친박(親朴)연대와 무소속 후보를 일곱 명이나 당선시켜 2·12 총선에 이어 또 한 번의 이변을 연출했다(한나라당 후보는 11명 당선, 민주당 후보도 한 명이 당선되었다). 부마민주화운동 때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으나 이명박(李明博) 세력이 박정희의 딸을 구박한다고 생각한 부산시민들이 격분한 것이다. 부산식 정의감의 발로라고 할까? 내가 부산 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고 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 사람들은 ‘욱’하면서도 균형감각이 있다. 좀처럼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산 사람들의 특질은 거의가 바다로부터 온 것이다.
바다에서 결정된 신라의 삼국통일
2023년 8월 1일 부산 중구 부산항 옛 연안여객선부두에서 출항하는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조선은 조선통신사 왕래를 제외하면 나라의 문을 닫아걸었다. 사진=조선DB |
선진 문명과의 교류, 과학과 군사 기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돈벌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그러나 규칙을 지키는) 인간형의 탄생 등 대부분 바다를 통해 이뤄졌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말 달리던 북방기마민족(아마도 흉노 계통) 출신인데 신라에 정착하면서 배도 잘 모는 사람이 되었다. 말 잘 타고 배도 잘 모는 민족은 속도를 장악함으로 바이킹과 노르만처럼 세계사의 최강이 된다.
신라 진흥왕은 서기 553년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빼앗아 오늘날 서울의 모태인 신주(新州)를 설치,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통하는 관문을 장악했다. 새로운 바닷길을 연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과 통하고 서해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지정학적 우위(優位)에 서게 되었다.
676년 신라 해군은 서해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해군에 이겨 7년간 계속된 나당(羅唐)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이해 당은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 지역으로 물리고 한반도를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내어준다). 문무왕은 선부를 병부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신라 말기까지 존속한다. 그 뒤 조선은 바다와 배를 관장하는 중앙부처를 만들지 않았다.
고려도 해양 국가적 면모를 이어갔다. 몽골의 침략에 고려가 수십 년간 저항한 것은 세계적 기록인데 그 힘은 해군·해운·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삼별초(三別抄)의 영웅적 저항과 두 차례 일본 원정은 그 저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이 바다에서 철수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조선의 바다에서의 철수는 명의 해금(海禁) 정책 및 주자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자폐증과 연관된다. 15세기, 명나라가 바다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조선도 내륙화(內陸化)의 길을 간다. 명과 조선 사이의 서해는 외항선이 다니지 않는 바다가 되어 400년이 흘러갔다. 명이 자유통항을 금지하니 사신들도 육로로 다녀야 했다. 명과 조선의 서해 폐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었다. 조선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을 대상으로 강제로 인구를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한다. 이영훈(李榮薰)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경제사》에서 “조선왕조에 이르러 바다는 넓은 개방의 통로가 아니라 높은 쇄국(鎖國)의 장벽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한국전쟁은 부산항 차지 경주
한국 해군 최초의 포함 백두산함은 6·25 개전 직후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무장선을 침몰시켜, 부산 함락을 막았다. 사진=조선DB |
신라가 동북아의 바다를 누빈 것처럼 한국인은 태평양을 포함한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게 된다. 박정희의 수출입국과 조선·해운 육성, 전두환의 경제 개방 정책, 노태우의 북방 정책은 이승만의 바다 재진입 전략의 확대판이었다. 이제 한국은 신라처럼 해양강국이 되었고 부산은 한국 해양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부산항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경주였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부산 근해에서 백두산함이 북한군 600명을 태운 적선(敵船)을 발견, 격침시키지 않았더라면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산을 향하여 밀려내려 오는 북한군을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으로 다부동에서 저지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는 무너지지 않았고,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길이 열렸다. 한국전에서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약 2500명의 소년병이 전사했는데, 대부분이 이 교두보를 지키기 위하여 투입된 아이들이었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부산수산대학 출신으로 원양어선 선장을 거쳐 동원그룹을 만든 김재철(金在哲) 전 무역협회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고 말하는 분이다. 한반도 지도를 180도 돌려놓으면 부산이 국토의 맨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 듯 웅크리고 있다. 부산 앞에 열린 태평양과 인도양, 그곳에 한국 문명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최근, 1980~90년대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기자를 만났다. 그는 서울 특파원을 지낸 뒤엔 방콕 특파원으로도 근무했는데 “한국 언론이 동남아를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지역에 특파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 기자들은 선진국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아픈 지적이었다. 머지않아 GDP 규모에서 인도네시아가 한국을 능가할 것이고 중국의 침체와는 달리 인도·베트남·태국이 올라오는데 언론이 무관심하니 한국인도 이 지역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인도는 이미 중국을 젖히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이 되었고,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또한 인구가 각 1억 명이 넘는다. 그는 인도의 모디 수상이 21세기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했다. 21세기 부산이 나아갈 방향을 시사(示唆)한 충고로 생각되어 소개했다.Ⓑ
조갑제 1945년생. 부경대(부산수산대) 2년 수료. 부경대 명예학사 / 《국제신보》 기자, 《월간 마당》 편집장, 《월간조선》 편집장, 월간조선사 대표, 현 조갑제닷컴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