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공군참모총장들 반대로 공사·공군교육사에만 최용덕 흉상 세워
⊙ 공사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상도 ‘보라매상’에서 ‘최용덕상’으로 변경
⊙ 김정렬, 일본 육사 나와 초대 공사 교장·공군참모총장 역임… 돈암동 김정렬 자택에서 공군 태동
⊙ 최용덕, 의열단 출신의 독립운동가… 초대 국방부 차관, 공군참모총장 지내
張浩根
1946년생. 공군사관학교(17기) 졸업, 전북대 정치학 박사 / 공군 작전사령부 참모장, 한미연합사 공군구성군사령부 부참모장, 공군 전투비행단장, 연합사 정보참모부장, 국방대학교 부총장, 공군 소장 전역, GE 군용엔진 동북아판매담당 전무이사·고문, 공군협회 연구위원장, (사)한국독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임 / 저서 《예방외교》
⊙ 공사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상도 ‘보라매상’에서 ‘최용덕상’으로 변경
⊙ 김정렬, 일본 육사 나와 초대 공사 교장·공군참모총장 역임… 돈암동 김정렬 자택에서 공군 태동
⊙ 최용덕, 의열단 출신의 독립운동가… 초대 국방부 차관, 공군참모총장 지내
張浩根
1946년생. 공군사관학교(17기) 졸업, 전북대 정치학 박사 / 공군 작전사령부 참모장, 한미연합사 공군구성군사령부 부참모장, 공군 전투비행단장, 연합사 정보참모부장, 국방대학교 부총장, 공군 소장 전역, GE 군용엔진 동북아판매담당 전무이사·고문, 공군협회 연구위원장, (사)한국독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임 / 저서 《예방외교》
- 문재인 정권은 공군 창군의 주역으로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이 아닌 최용덕 장군을 띄우면서, 2019년 공사에 최용덕 장군 동상을 세웠다. 사진은 제막식에서 축사를 하는 원인철 당시 공군참모총장. 사진=뉴시스/공군
10월은 기념일이 많은 달이다. 하나 필자의 기억 속에는 군(軍)과 관련된 달로 자리 잡혀 있다. 대표적인 날이 국군의 날이다. 물론 개천절과 한글날도 있고, 유엔의 날도 있지만, 특히 1949년 10월 1일은 한국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창설된 날이고, 1950년 10월 1일은 6·25전쟁 중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北進)을 개시한 날로써 10월 1일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날이다. 더구나 70년 전 10월 1일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뜻깊은 날이기도 하고, 올해는 6·25전쟁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년 되는 해이기도 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이제 희수(喜壽)의 나이로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 보라매 축에 속하는 필자는 1949년 10월 1일이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해 창군한 날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서울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이날을 공군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 1956년에 육·해·공군을 통합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였다.
공군 창설의 7인
공군이 창설된 날, 즉 공군의 날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이 어려운 창군을 누가 시작했는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중국, 일본, 만주,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항공인들이 대거 귀국해 국내 항공 분야를 새롭게 일궈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들은 비록 소속과 출신 성분이 달랐지만, 대한민국 공군 창설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이들 중에서 공군 창설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공군 창설 7인’ 덕분이었다. 최용덕(崔用德·1898~1969년. 국방부 차관, 제2대 공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역임), 김정렬(金貞烈·1917~1992년. 초대·제3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주미 대사, 국무총리 역임), 박범집(朴範集·1917~1950년. 공군 소장 추서), 이근석(李根晳·1917~1950년. 공군 준장 추서), 장덕창(張德昌·1903~1972년. 제4대 공군참모총장), 이영무(전 육군항공사령관), 김영환(金英煥·1921~1954년. 공군 준장 추서) 등이 그분들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세 분(최용덕, 김정렬, 김영환)의 공로가 가장 컸다”라고 김두만(金斗萬) 장군(6·25전쟁 100회 출격,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은 회상한다. “왜냐하면, 당시 김정렬이 주도했던 돈암동 자택 모임에서 ‘공군 창설 7인’으로 명명된 사람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그곳에 모여서 공군 창설을 실질적으로 주도해나갔기 때문이다. 또 그곳은 국내에 있던 항공인들이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다녀갔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정렬 장군이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돈암동 자택에 대해 김두만 장군은 2017년 그의 회고록에서도 이렇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집안 인심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항공인들의 방문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고 식사와 잠자리 제공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 공군 창설은 그들 가족의 따듯한 ‘밥 인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고맙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작은 부탁으로 “더 늦기 전에 김정렬 장군의 돈암동 자택을 찾아낸 후, 그곳에 ‘이곳이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발상지입니다!’라는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놓고 죽고 싶다”고 했다.
공군 창설의 발상지 ‘돈암동’
공군본부(이하 공본)에서는 공군 창군 70주년을 기념하여 (2019년 9월 19일) 창군 발상지 표지석을 설치했다. 필자는 표지석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표지석은 동대문을 지나 성신여대로 가는 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도로(서울 성북구 동선동, 과거에는 돈암동)의 작은 빌딩 앞 보도에 있었다. 첫 느낌은 매우 초라해 보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그러나 공군에서 외부에 크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소규모 행사로 설치한 것은 매우 섭섭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 연배의 예비역들은 이런 역사적인 행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 답사가 필자에게 뜻깊은 이유는 또 있다. 1980년대 말 필자가 미국 워싱턴 대사관에서 공군무관으로 근무할 때, 고(故) 김영환 장군(김정렬 장군의 동생, 1954년 비행사고로 순직)의 부인을 자주 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공군 창설을 논의할 때 김영환 장군 부부도 돈암동의 부모님 댁에서 함께 살았다고 김두만 장군은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국방경비대와 해상경비대를 만들어, 육군과 해군은 그들의 토대가 마련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의 경우는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항공 기술이라는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시작된 것이라 이런 기술이 우리나라에 있을 리가 없었다.
‘공군 창설 7인’은 항공부대 창설을 승인받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적지 않은 나이들이었음에도, 장교 최하위 계급인 소위로 임관해 군 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대를 창설시킨 후에는 독립을 위해 항공기 도입과 같은 전력(戰力) 증강에 전력(全力)을 다했다. 그 결과 1948년 9월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락기로 여순반란 사건에 참가해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더 나은 성능의 L-5 연락기 10대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공군이 독립하였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었다. 비록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기, 그리고 연간 유지비가 1만 달러 정도로 초라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공군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이었다. 김정렬 장군이나 김두만 장군 모두 그의 회고록에서 해방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군의 독립은 기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공군 창설의 7인’
공군은 전통적으로 공군 창설의 주역 7인 중에서 어느 한 분을 콕 집어 창설의 아버지라고 내세우지 않아 왔다. 8·15해방 후 중국, 일본, 만주,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항공인들이 대거 귀국해 불모지의 국내 항공 분야를 일궈보려고 노력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한 분을 창설의 주역으로 내세우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고참 예비역들 사이에는 김두만 장군처럼 은연중에 창군에 공이 많았던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분들이 많았다. 김정렬 장군은 일본 육사(陸士)를 나온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전략가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19년 11월(19일) 갑자기 최용덕 장군을 ‘공군 창군의 아버지’라고 내세우면서 공군사관학교와 공군교육사령부에 동상을 건립했다. 대부분 예비역은 알지도 못했다. 코로나19의 만연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필자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2019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공군 모든 비행단에 최용덕 장군 동상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알려졌다. 그러자 역대 공군참모총장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 창설 7인’의 한 분으로 존경받는 분인 건 맞다. 최 장군은 일제(日帝)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고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펼쳤고, 항공학교에 입교해 조종사가 됐다.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도 고위직에 있었고, 해방 후에는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하여 공군을 창군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 장군은 당시 최연장자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인 높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최 장군은 초대 국방부 차관을 거쳐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공군 선후배들이 항상 부르는 ‘공군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 장군은 김정렬 장군보다 19세 연장자로 대우를 받았지만, 특별한 업적은 없었다.
2019년 갑작스러운 최 장군 동상 건립은 추측건대 2018년 육사 홍범도 외 4인 흉상 건립과 일맥상통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정권에서 중국·만주 독립군 출신들을 부각시키면서 일본군 출신의 흔적을 지우려던 시도의 하나로 보인다.
늦게나마 나이 먹은 예비역(늙은) 보라매들이 이런 식으로 공군 창설의 역사를 흔드는 것을 바로잡으려고 움직이고 있다. 직접적인 동기는 금년도 3월 공사 졸업식에서 ‘최용덕 상’이라는 명칭의 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공사 졸업식에는 공사총동창회장이 졸업생에게 수여하는 상이 있는데, 원래는 ‘공사총동창회장상’이었다가 ‘보라매상’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이 상의 이름이 어느 사이엔가 ‘최용덕 상’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총동장회장이 선배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필자는 최용덕 장군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분도 공군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선배이다. 하지만 공군은 전통적으로 ‘공군 창설의 7인’ 모두를 ‘공군의 아버지’로 기려왔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누구의 흔적은 지우고 누구는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정렬 장군
필자는 미국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 김정렬 장군을 두 번 만나 뵌 적이 있다. 당시 공군의 원로들이었던, 워싱턴 보라매 선배들은 공군 역사의 산증인이신 김 장군님께 더 늦기 전에 자서전을 쓰라고 권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김정렬 장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49년 1월에 육군항공사관학교(1949년 10월 1일 공군이 독립하자 공군사관학교로 명칭 변경)를 개설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49년 4월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주변에 북한의 위협을 각성시킨 바도 있었다. 그는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차원 높은 군사 전략가였다.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독립하자 그는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임 후에도 전역하지 않고, 도쿄의 극동공군사령부 연락단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 시절의 미군 고위층과의 인맥은 후에 대방동 공군본부를 신축하고, 한국 공군이 F-86F 세이버(Saber) 최신예 제트전투기를 보유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 공군에 F-80 슈팅스타(Shooting Star)를 주려고 했었다. 이처럼 공군 초창기 기록을 보면 공군 창설을 주도하고 정착시킨 분이 김정렬 장군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공군의 군번 1번(50001번)인 김정렬 장군을 기리는 기념물은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계룡대 공본 대회의실에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말은 들은 바 있다. 내년이면, 공군 창설 75주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공군 창설 7인’ 중의 한 분이고,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초대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김정렬 장군의 기념물 건립 논의를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떠할는지 생각해본다. (과거에 공군 창군 60주년, 공사 개교 60주년을 맞아 1기생 선배들이 김정렬 장군 동상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한 바 있었다.)
혹자는 김정렬 장군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전(前) 정권에서는 공군의 역사에서 그분을 지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난 2005~2009년 특별법으로 설치했던 대통령 소속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완성한 1005명의 친일파 명단에 그분의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김정렬 장군을 기리자는 것은 특정인을 특별히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기리고 보존해야 될 공군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우리 공군은 광복군 출신, 일본군 출신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는 분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켰다. ‘공군 창설의 7인’ 가운데 박범집, 이근석, 김영환 세 분은 하늘에서 산화했다.⊙
이제 희수(喜壽)의 나이로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 보라매 축에 속하는 필자는 1949년 10월 1일이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해 창군한 날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서울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이날을 공군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 1956년에 육·해·공군을 통합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였다.
공군 창설의 7인
공군이 창설된 날, 즉 공군의 날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이 어려운 창군을 누가 시작했는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중국, 일본, 만주,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항공인들이 대거 귀국해 국내 항공 분야를 새롭게 일궈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들은 비록 소속과 출신 성분이 달랐지만, 대한민국 공군 창설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이들 중에서 공군 창설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공군 창설 7인’ 덕분이었다. 최용덕(崔用德·1898~1969년. 국방부 차관, 제2대 공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역임), 김정렬(金貞烈·1917~1992년. 초대·제3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주미 대사, 국무총리 역임), 박범집(朴範集·1917~1950년. 공군 소장 추서), 이근석(李根晳·1917~1950년. 공군 준장 추서), 장덕창(張德昌·1903~1972년. 제4대 공군참모총장), 이영무(전 육군항공사령관), 김영환(金英煥·1921~1954년. 공군 준장 추서) 등이 그분들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세 분(최용덕, 김정렬, 김영환)의 공로가 가장 컸다”라고 김두만(金斗萬) 장군(6·25전쟁 100회 출격,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은 회상한다. “왜냐하면, 당시 김정렬이 주도했던 돈암동 자택 모임에서 ‘공군 창설 7인’으로 명명된 사람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그곳에 모여서 공군 창설을 실질적으로 주도해나갔기 때문이다. 또 그곳은 국내에 있던 항공인들이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다녀갔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정렬 장군이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돈암동 자택에 대해 김두만 장군은 2017년 그의 회고록에서도 이렇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집안 인심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항공인들의 방문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고 식사와 잠자리 제공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 공군 창설은 그들 가족의 따듯한 ‘밥 인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고맙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작은 부탁으로 “더 늦기 전에 김정렬 장군의 돈암동 자택을 찾아낸 후, 그곳에 ‘이곳이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발상지입니다!’라는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놓고 죽고 싶다”고 했다.
공군 창설의 발상지 ‘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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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선동에 있는 공군 창군 발상지 표지석과 동판을 살펴보는 필자. |
이곳 답사가 필자에게 뜻깊은 이유는 또 있다. 1980년대 말 필자가 미국 워싱턴 대사관에서 공군무관으로 근무할 때, 고(故) 김영환 장군(김정렬 장군의 동생, 1954년 비행사고로 순직)의 부인을 자주 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공군 창설을 논의할 때 김영환 장군 부부도 돈암동의 부모님 댁에서 함께 살았다고 김두만 장군은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국방경비대와 해상경비대를 만들어, 육군과 해군은 그들의 토대가 마련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의 경우는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항공 기술이라는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시작된 것이라 이런 기술이 우리나라에 있을 리가 없었다.
‘공군 창설 7인’은 항공부대 창설을 승인받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적지 않은 나이들이었음에도, 장교 최하위 계급인 소위로 임관해 군 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대를 창설시킨 후에는 독립을 위해 항공기 도입과 같은 전력(戰力) 증강에 전력(全力)을 다했다. 그 결과 1948년 9월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락기로 여순반란 사건에 참가해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더 나은 성능의 L-5 연락기 10대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공군이 독립하였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었다. 비록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기, 그리고 연간 유지비가 1만 달러 정도로 초라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공군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이었다. 김정렬 장군이나 김두만 장군 모두 그의 회고록에서 해방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군의 독립은 기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공군 창설의 7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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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 제2대 공군참모총장 |
그런데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19년 11월(19일) 갑자기 최용덕 장군을 ‘공군 창군의 아버지’라고 내세우면서 공군사관학교와 공군교육사령부에 동상을 건립했다. 대부분 예비역은 알지도 못했다. 코로나19의 만연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필자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2019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공군 모든 비행단에 최용덕 장군 동상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알려졌다. 그러자 역대 공군참모총장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 창설 7인’의 한 분으로 존경받는 분인 건 맞다. 최 장군은 일제(日帝)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고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펼쳤고, 항공학교에 입교해 조종사가 됐다.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도 고위직에 있었고, 해방 후에는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하여 공군을 창군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 장군은 당시 최연장자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인 높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최 장군은 초대 국방부 차관을 거쳐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공군 선후배들이 항상 부르는 ‘공군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 장군은 김정렬 장군보다 19세 연장자로 대우를 받았지만, 특별한 업적은 없었다.
2019년 갑작스러운 최 장군 동상 건립은 추측건대 2018년 육사 홍범도 외 4인 흉상 건립과 일맥상통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정권에서 중국·만주 독립군 출신들을 부각시키면서 일본군 출신의 흔적을 지우려던 시도의 하나로 보인다.
늦게나마 나이 먹은 예비역(늙은) 보라매들이 이런 식으로 공군 창설의 역사를 흔드는 것을 바로잡으려고 움직이고 있다. 직접적인 동기는 금년도 3월 공사 졸업식에서 ‘최용덕 상’이라는 명칭의 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공사 졸업식에는 공사총동창회장이 졸업생에게 수여하는 상이 있는데, 원래는 ‘공사총동창회장상’이었다가 ‘보라매상’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이 상의 이름이 어느 사이엔가 ‘최용덕 상’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총동장회장이 선배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필자는 최용덕 장군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분도 공군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선배이다. 하지만 공군은 전통적으로 ‘공군 창설의 7인’ 모두를 ‘공군의 아버지’로 기려왔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누구의 흔적은 지우고 누구는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정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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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초대·3대 공군참모총장 |
앞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김정렬 장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49년 1월에 육군항공사관학교(1949년 10월 1일 공군이 독립하자 공군사관학교로 명칭 변경)를 개설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49년 4월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주변에 북한의 위협을 각성시킨 바도 있었다. 그는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차원 높은 군사 전략가였다.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독립하자 그는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임 후에도 전역하지 않고, 도쿄의 극동공군사령부 연락단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 시절의 미군 고위층과의 인맥은 후에 대방동 공군본부를 신축하고, 한국 공군이 F-86F 세이버(Saber) 최신예 제트전투기를 보유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 공군에 F-80 슈팅스타(Shooting Star)를 주려고 했었다. 이처럼 공군 초창기 기록을 보면 공군 창설을 주도하고 정착시킨 분이 김정렬 장군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공군의 군번 1번(50001번)인 김정렬 장군을 기리는 기념물은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계룡대 공본 대회의실에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말은 들은 바 있다. 내년이면, 공군 창설 75주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공군 창설 7인’ 중의 한 분이고,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초대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김정렬 장군의 기념물 건립 논의를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떠할는지 생각해본다. (과거에 공군 창군 60주년, 공사 개교 60주년을 맞아 1기생 선배들이 김정렬 장군 동상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한 바 있었다.)
혹자는 김정렬 장군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전(前) 정권에서는 공군의 역사에서 그분을 지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난 2005~2009년 특별법으로 설치했던 대통령 소속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완성한 1005명의 친일파 명단에 그분의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김정렬 장군을 기리자는 것은 특정인을 특별히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기리고 보존해야 될 공군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우리 공군은 광복군 출신, 일본군 출신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는 분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켰다. ‘공군 창설의 7인’ 가운데 박범집, 이근석, 김영환 세 분은 하늘에서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