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검증 취재

광복군 587명 功績조서 全數조사해보니

광복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일본군 兵籍 기록 간 불일치 다수 발견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장경순 前 국회부의장이 말하는 日本軍 學徒兵 출신 光復軍 7人
⊙ 광복군 敍勳 인정 최저 연한은 6개월… 광복 6개월 전인 1945년 2월15일자 광복군 入隊 급증
⊙ 광복회에 당사자 입장 듣고자 연락했으나 회신 없어
뤄양에서 촬영한 광복 후 광복군의 모습. 해방 후 일본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은 한국광복군으로 흡수된다. 사진=독립기념관
  올해 8월 15일은 제77주년 광복절이자 제74주년 건국절이었다. 앞서 지난 7월 자신을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밝힌 이요한(36)씨가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증조부가 일제 시절 평안도 원탄면 면서기였고 비밀 결사(향촌회)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으고 선전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옥고(2년)를 치렀다는 내용이다. 이씨의 조부가 원호처(국가보훈처의 전신)를 여러 번 찾았지만 담당 공무원은 증조부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지 않았고 관련 자료도 없다”고 했다.
 
1977년 한국광복군동지회가 자체 제작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광복군 활동 기간 확인서. 입대일이 모두 1945년 4월 8일이다.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조부가 사망한 뒤 이요한씨는 2011년 7월경부터 증조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증명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이어 2012년 10월에는 증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할 사료를 보훈처에 제출했다. 증조부는 2013년 삼일절 독립유공자(만주 방면 운동 계열)로 서훈(敍勳)됐다.
 
  이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이기에 광복군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데 과거 사료를 정리하던 중, 광복군 자격으로 독립유공자가 된 이들 중 행적이 석연치 않은 사례를 다수 발견했다.
 
 
  洪○○와 미쓰이 마사오
 
유수명부. 사진=이요한 제공
  이요한씨는 기자에게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이하 전자사료관)’에서 홍○○씨에 대한 자료를 보여줬다. 그는 광복군 활동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상훈법이 개정돼 대통령 표창은 1990년 훈장인 애족장(5등급)으로 승격됐다. 홍○○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홍○○는 1923년 1월 10일 태어나 2000년 11월 16일 사망했다. 본적은 ‘충남 논산 상목(上目)면 한천(寒泉)리’.
 
  국가보훈처는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심의 후 포상(서훈 또는 표창)한다.
 
  홍○○는 독립유공자 신청 당시 아래와 같은 공적조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1. 1944. 2 중국 구이더(貴德)에서 일본군 기병소사로 복무 중 광복군 제2지대 장이호 정일명과 접선 지하 공작 활동하다가
 
  2. 1944. 12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일본군을 탈출 광복군 제2지대에 현지 입대 전방 공작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적(韓籍) 사병 포섭 공작 활동을 함.〉
 
  이요한씨는 일본군이 작성한 ‘유수명부(留守名簿)’를 기자 앞에 내놓았다. 유수명부는 전쟁 당시 특정인의 신상(본적, 후견인, 생년월일, 계급 등)을 기록한 문서이다. 임금을 지급하는 데 참고한 ‘간이 병적(兵籍) 기록’이다.
 
  ‘지나북지방면군제13군예하부대 유수명부(支那北地方面軍第十三軍隷下部隊 留守名簿)’라고 적힌 고문서였다. 오래된 원본 문서를 스캔(scan)한 뒤 이를 출력한 인쇄물이라 글자가 뭉개지고 흐릿해져 선뜻 식별하기 어려웠다. 이씨는 유수명부에서 창씨명 미쓰이 마사오(三井正夫)를 소개했다.
 
  미쓰이 마사오의 본적은 ‘조선(朝鮮) 충청남도 논산군 상월(上月)면 한천리 237’. 생년월일은 ‘다이쇼(大正) 12(1923년) 1. 10’.
 
  상월면 한천리는 남양 홍씨 당홍계 집성촌이다. 전자사료관에 기록된 홍○○의 본적은 ‘충남 논산 상목(上目)면 한천리’. 이는 ‘월(月)’을 ‘목(目)’으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논산에는 상목면이라는 지명이 없다.
 
  한천리 237번지는 1914년 기준 홍○○의 조부로 추정되는 홍△△ 소유의 토지였다. 남양 홍씨 항렬 32세(世)는 가운데 돌림자가 ‘종’, 33세는 가운데가 ‘순’, 34세는 마지막을 ‘표’로 지었다. 홍○○ 부친의 이름은 홍□□이다.
 

  유수명부에는 미쓰이 마사오가 광복을 11일 앞둔 ‘쇼와(昭和) 20(1945년) 8. 4 도망(逃亡)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쓰이 마사오가 도망 당시 속했던 부대와 계급은 ‘26연대 현역 보병 견사(見士)’. 견사는 견습사관(見習士官)을 말한다. 6개월간 훈련받은 뒤 소위로 임관한다.
 
  홍○○의 탈출일과 미쓰이 마사오의 도망일은 약 8개월의 시차가 있다. 홍○○와 미쓰이 마사오는 동일인일까. 동일 인물이라면 홍○○가 작성해 정부에 제출한 공적조서와 일본군이 천황(天皇)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미쓰이 마사오의 병적기록(유수명부) 중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韓聖洙와 아사미야 세이슈
 
  2005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한성수(韓聖洙). 1977년 독립장(3등급)을 서훈받았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그의 출생은 1920년 8월 18일, 사망은 1945년 5월 13일이다. 본적은 평안북도 신의주 낙청동 102.
 
  한성수의 공적조서다.
 
  〈1944. 4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일본군으로부터 탈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초모 및 정보 공작 활동하다가 1944.11 상해지구 특파공작조장으로 항일공작활동 중 1945. 3. 13 일본 특무부대에 체포되어 보안유지법 위반죄로 사형 선고받고 1945. 5. 13 참수형에 집행됨.〉
 
  일본이 작성한 유수명부, 임시군인군속계(臨時軍人軍屬系), 피징용사망자연명부에는 한성수로 추정되는 이도 있었다. 임시군인군속계는 집안에서 자식이 군대에 가면 면사무소에 신고할 때 작성한다.
 
  창씨명은 아사미야 세이슈(朝宮聖洙). 본적은 ‘평안북도 신의주부 낙청동 102’. ‘쇼와 20(1945년) 5월 13일 장쑤성(江蘇省) 상하이(上海) 사형.’
 
  사형 당시 계급은 상등병(上等兵), 도망 당시 소속 부대는 ‘65사단 통신대(專7993부대)’, 붙잡혀온 부대는 ‘제13군사령부(登7331부대)’였다.
 
  유수명부에는 아사미야 세이슈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지 않아 임시군인군속계도 확인했다. ‘다이쇼(大正) 10(1921년) 8월 18일.’ 한성수의 출생연도와는 1년 차이가 났다. 이는 오기(誤記)일 수 있다. 한성수의 생일·본적·참수일과 아사미야 세이슈의 생일·본적·처형일은 같기 때문이다.
 
  이요한씨는 “한성수 지사의 사례는 유수명부가 신뢰할 만한 1차 사료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활용한 留守名簿
 
  일부는 “유수명부가 일본 측 자료이기에 신뢰할 수 없고 또 광복군을 폄훼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미 일본의 조선인 강제동원을 증명하기 위해 유수명부를 활용한 바 있다.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대일항쟁지원위원회)’는 2010년 강제징용자의 명부와 연락처가 담긴 유수명부를 바탕으로 강제징용자의 한국 이름과 창씨명, 부대, 근무지, 생년월일을 정리해 일본 정부에 2011~2012년 약 4600명에 대한 우편저금 자료를 요청한 적이 있다.
 
  대일항쟁지원위원회는 2010년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동남아 등지로 강제동원한 한국인 위안부들을 군 간호사 신분으로 위장시켰다는 사실을 유수명부에 기초해 밝혀냈다.
 
  광복군이 공적조서에서 밝힌 ‘탈출’ 시점과 일본군 유수명부(병적기록) 등에 기록된 ‘도망’ 시점은 왜 다를까. 그 답은 광복군 서훈 기준에 있다.
 
  독립유공자로 포상받기 위해선 1945년 8월 14일 이전까지 최소 6개월 이상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이 기준에 따라 광복군 서훈 대상자는 적어도 1945년 2월 15일 이전에는 광복군에 입대해야 한다. 1945년 2월 16일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서훈 기준’ 때문에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와 일본군 유수명부 간에 탈출 시기에 대한 ‘불일치’가 발생한다.
 
 
  7人의 탈출
 
책 《7인의 탈출》 표지. 사진=이요한 제공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 청년 7인(김○○, 성○○, 류○○, 박○○, 정○○, 최○○, 김△△)이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탈출한 이들 모두 광복군에 입대했고 5명은 광복군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류○○은 애족장(5등급)을 받았다.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입대 과정을 담은 자서전 《7인의 탈출》(1984년)도 냈다.
 
  모(某)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일본군 60사단 46대대에 배속된 류씨는 “일본군에 있으면 결국 방패용으로 이용돼 죽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 일본인에게 당했던 수모를 갚고 나아가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자”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46·47대대에 소위로 임관한 6명과 탈출을 모의, 2개월간의 준비 끝에 소총 6자루와 경기관총 1정, 탄환 500발을 갖고 훈련 가는 것처럼 위장·탈출했다고 밝힌다.
 
  이어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부구대장으로 저장성(浙江省) 왕가탑 일대에서 10여 차례 일본분견대를 습격했고 부상도 입어 이시영 선생 댁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임정(臨政) 요인이었던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중국 충칭(重慶) 투차오(土橋)에 머물렀다. 류○○이 전투를 벌인 저장성에서 투차오까지는 직선거리로 1500km이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류○○은 생년월일이 1919년 8월 6일, 본적은 ‘충청남도 금산 상옥리(上玉里) 86’이다.
 
  류○○의 공적조서다.
 
  〈1944년 6월 일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진영에 가담한 사실이 중국신문에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44년 11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이요한씨는 유수명부와 임시군속계에 기록된 야나기 자이에이(柳 在榮)를 보여줬다. 생년월일은 ‘다이쇼 8(1919년) 8. 6’. 본적은 ‘전라북도 금산군 상옥리 186’. 금산군은 1962년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됐다. 그는 독립보병 제46대대(矛2317부대) 소속이었다. 도망일은 ‘쇼와 20(1945년) 3. 10’.
 
  유수명부에는 ‘쇼와 20(1945년) 3. 13’ 기준 계급은 ‘現(현) 步(보) 一(일)’. 현역 보병 일등병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등병 시절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류○○은 자서전에서 1944년 메이지(明治)대 3학년 재학 중 학병(學兵)을 피하고자 만주 투먼(圖們)으로 도주하던 중 붙잡혀 간부후보생에 편입됐다고 했다.
 
 
  700병력의 대부대로 확대
 
  1990년 애족장을 서훈받은 성○○의 경우를 보자.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성○○의 생년월일은 1912년 8월 9일, 본적은 ‘전라남도 순천 행동(幸洞) 98’.
 
  성○○의 공적조서 중 일부를 소개한다.
 
  〈1. 1944 일본 규슈(九州) 제대(帝大) 법과 졸업. 학병으로 강제동원. 중국 쑤저우(蘇州) 일군 60사단에 배치. 을종(乙種) 간부 후보생으로 훈련받는 동안 의거 계획. 다수 동지 포섭에 나섬.
 
  2. 1945. 2 일요일 외출시간을 이용 김○○, 정○○, 유○○, 최○○, 박○○, 전○○(기자 주-김△△의 오기) 등의 동지와 기관총 1정, 소총 7정, 대검, 실탄 300발, 방독면 9개 등 무기와 비서 문서 휴대하고 최전선 시찰 가장하고 탈출에 성공, 충칭(重慶)으로 향하다.
 
  (중략)
 
  4. 1945. 3 이 한중(韓中)합동유격대를 인솔하고 승산(昇山)의 일군 분견대를 습격하여 일군을 몰살하고 70여 정의 무기를 노획하고 중국인 70여 명을 새로 가입시킴. 또 촉산(蜀山)의 친일 중국보안대를 습격하여 20명을 포로로 하고 소총 20정을 뺏음. 또 일군 점령하의 경덕(慶德)을 습격하여 소총 70정을 노획.
 
  5. 효풍(孝豊)에 주둔 중인 충의구국군별운동대에 도착할 때는 700병력의 대부대로 확대되어 큰 개가를 올림.
 
  (중략)
 
  10. 계속하여 유격전에 참전하다가 광복을 맞아 상해로 와서 상해교민단의 박○○, 구○○ 등과 귀환 교포들의 입국 편의를 돕다가 광복군의 일원으로 귀국.〉
 
 
  7명이 700명이 돼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산하 부대로 항일 투쟁과 팔로군(八路軍·중국 공산당 소속 부대) 견제 활동을 했다. 성○○은 공적조서에 7명이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700명을 휘하에 둔 것처럼 묘사돼 있다.
 
  유수명부에서 나리타 도요키치(成田豊吉)를 발견했다. 출생 ‘다이쇼 2(1913년) 8, 9’. 본적은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행(幸)○(식별 불가) 98’. ‘도망 쇼와 20(1945년) 3. 10’. 쇼와 19(1944년) 12월 15일 기준 계급은 ‘현 보 오(伍)’, 현역 보병 오장. 오장은 지금의 하사이다. 을종(乙種) 간부 후보생 출신이다.
 
  갑종(甲種) 간부 후보생은 소위로, 을종 간부 후보생은 오장(하사)으로 임관한다.
 
  박○○은 1990년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출생은 1921년 12월 20일. 본적은 ‘경상남도 울산 신정(新亭)’.
 
  박○○의 공적조서다.
 
  〈1944. 6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에 가담한 사실이 당시 중국 각 신문에 보도되어 한국 학병의 항일 대적 정신이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으며, 충의구국군에 파견되어 일군 포로 심문과 일군의 염전(厭戰) 격문을 작성하였을 뿐 아니라 기관총을 탈취하여 탈출한 특별공적이 인정됨.〉
 
  유수명부에서 독립보병 제48대대(矛2319부대) 소속 나가이 타케시(永井毅)를 찾았다. 생년월일은 ‘다이쇼 10(1921년). 12. 20’. 본적은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신정리 9’. 도망일은 ‘쇼와 20. 3. 9’. 당시 계급은 ‘간오(幹伍)’. 을종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추정된다.
 
  김○○은 7인의 집단 탈출을 주도했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생년월일은 1922년 11월 23일. 본적은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106’. 1990년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6·25전쟁 당시 29세를 일기로 경북 예천에서 전사(1950년 7월 29일)했다.
 
  그의 공적조서다.
 
  〈1. 일본군 학병으로 출정하였다가 1944년 12월 박종선 등 78명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참전국 충의구국군사령부를 거쳐 아국(我國) 광복군 징모처(徵募處) 삼분처에 입대, 항일 투쟁에 참가.
 
  2. 6·25 당시 안동 전투에서 전사.〉
 
 
  장경순이 말하는 김○○
 
장경순(1922~2022) 전 국회부의장. 사진=조선DB
  국회부의장(6~8대)을 지낸 장경순(張坰淳·1922~2022년)은 자서전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2007년)에서 이렇게 밝힌다.
 
  “김○○은 정말 대담무쌍하고 용기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유수명부에서 독립보병 제49대대(矛2320부대) 소속 가네무라 아키오(金村映男)를 발견했다. 본적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106’. ‘쇼와 20(1945년). 3. 10.’ 생년월일이 기 재돼 있지 않아 임시군속계를 확인했다. ‘다이쇼 11(1922년). 11. 23.’
 
  임시군속계는 가네무라 아키오가 ‘쇼와 20년 1월 25일’ 자로 가족에게 통신을 보냈고 가족은 이 통신을 ‘쇼와 20년 2월 5일’에 수령해서 가네무라 아키오가 일본군 2320부대에 배속된 것을 알게 됐다고 밝힌다.
 
  최○○은 1990년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생년월일은 1920년 5월 20일. 본적은 ‘경상남도 남해 삼동(三東) 영지(靈芝) 2532’.
 
  그의 공적조서는 이렇다.
 
  〈1944. 6월 탈출하여 광복군 진영에 가담한 사실이 중국신문에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1944. 11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유수명부에는 그를 이렇게 기록한다. 생년월일은 ‘다이쇼 19. 5. 20’. 본적은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2532’. 도망일은 ‘쇼와 19(1944년) 3. 10’. 도망 당시 계급은 ‘보병 일등병’. 유수명부에 기록된 류 토쿠의 도망일은 오기로 보인다.
 
  집단 탈출한 7인 중 2명인 정○○·김△△은 현재 서훈되지 않아 공적조서가 없다. 류○○이 쓴 책에 따르면 정○○은 전북 진안, 김△△은 전북 군산 출신이다.
 
  유수명부에서 마쓰시마 히로시(松島炳薰)와 가네우미 도리타마(金海鳳玉)를 발견했다. 마쓰시마 히로시는 생년월일이 ‘다이쇼 8(1919년) 5. 4’. 본적은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86’이었다. 당시 계급은 ‘간오(幹伍)’로 기록돼 있다. 을종 간부 후보생 출신이다. 도망일은 ‘쇼와 20. 3. 10’.
 
  가네우미 도리타마는 출생일이 ‘다이쇼 11(1921년) 10. 22’, 본적은 ‘전라북도 군산부 강호정(江戶町) 14’이다. 당시 계급은 ‘현보을간(現步乙幹)’, 현역 보병 을종 간부 후보생이었다. 도망일은 ‘쇼와 20. 3. 9’.
 
  집단 탈출을 벌인 7인 중 공적조서가 있는 5인(광복군 서훈자)은 서로 탈출 시점에 차이가 있다. 공적조서에서 류○○·박○○·최○○은 1944년 6월, 김○○은 1944년 12월, 성○○은 1945년 2월 탈출을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광복군동지회가 1977년 작성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성○○·김○○은 광복군 입대 시점이 1944년 8월, 류○○은 1944년 11월이었다. 박○○·최○○은 찾지 못했다.
 
  유수명부는 7인의 집단 탈출이 1945년 3월 9~10일에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광복 한 달 남겨두고 재교육받은 7人
 
  이요한씨는 7인의 탈출과 관련해 중국 측 사료를 소개했다. 1945년 7월 14일 중화민국(대만군) 국방부장대행과 참모총장을 지낸 구주퉁(顧祝同)이 당시 장제스에게 보낸 전문(電文)이다.
 
  “장 위원장님 보십시오. 현재 제3전구에는 적 점령 구역을 탈출한 한인(韓人) 김○○, 김△△, 최○○, 정병장, 구재영 등 5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군사위원회의 4월 3일 자 ○○○○○(기자 주-문서 번호로 추정) 대전의 지시에 따라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넘겨 감화(感化)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감화훈련은 일본군에서 이탈한 한인 병사를 재교육하는 과정이다. 구주퉁이 장제스에게 보낸 문서를 바탕으로 추정한다면 ‘1945년 3월 중순 일본군을 탈출한 7인이 얼마 안 돼 국민당 군에게 붙잡혔고 장제스 군대는 이들을 4월 초 한국광복군에 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중국 측 사료를 종합하면 7인은 광복을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광복군이 되기 위한 ‘재교육’을 받고 있었다.
 
  7인은 왜 탈출했을까.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정안기 박사는 “일본군에 입대한 학도병들이 갑종 간부 후보생이 돼 소위로 임관할 줄 알았지만 을종 간부 후보생이 돼 오장으로 임관하는 바람에 이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으로 집단 탈출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장경순은 일본 학도병 출신으로 갑종 간부 후보생이었다.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광복군 잠편지대 참모조장을 지냈다. 하지만 장경순은 광복군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았다.
 
  장경순은 김○○·류○○과 일본에서 함께 지낸 친구 사이다. 또 성○○과도 교분이 있다. 그런 장경순이 자서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훗날 당시의 기념사진 한두 장을 근거 삼아 단체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인들한테 힘없이 끌려가 일본군 행세를 한 주제에 독립운동이라니, 무슨 망발이야. (중략)”라고 나무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으로 신청해 버젓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하며 연금까지 타 먹고 있는 양심 불량자들을 본다. (중략)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역사란 것이 얼마나 진실과 적당히 버무려진 허위와 조작과 왜곡으로 쓰이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토교대
 
  생존해 있는 오○○는 토교대(土橋隊) 출신이다. 충칭 투차오에 있었다고 해 ‘토교대’라고 불렀고 ‘경위대(警衛隊)’로도 표현했다. 토교대는 일종의 보충대(補充隊)였다. 임정 요인의 가족을 위해 경비를 섰다. 이를 바탕으로 토교대 활동이 독립운동으로 인정돼 토교대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전자사료관에는 현재 오씨의 생년월일과 본적이 비공개로 돼 있다. 그는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오씨는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우리는 광복군 조국의 영원한 용사-독립유공자 구술자료집 2》(2016년, 이하 구술자료집)에서 자기 고향을 “진천군 백곡이여. 백곡면 성대리 414번지요”(구술자료집 154페이지)라고 밝힌다.
 

  전자사료관 공훈록에 따르면 충북 진천 출신인 오씨는 충칭에 있는 토교대에 배속되어 임시정부 요인들의 경호와 그 가족들에 대한 안전 등을 위해 복무했다. 오씨의 공적조서는 이렇다.
 
  〈1944. 12.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중경[重慶]토교)〉
 
  이요한씨는 일본군 유수명부에서 우미다 아이네(海田相根)를 발견했다. 오씨는 구술자료집에서 자신이 “해주 오씨”라며 일본인들이 자신을 ‘우미데쿤(海君)이라고 불렀다’(증언록 161페이지)고 했다.
 
  유수명부에 기록된 우미다 아이네의 생년월일은 ‘다이쇼 13(1924년) 1. 25’, 본적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414’이다. 그의 임시군인군속계에도 생년월일은 ‘다이쇼 13. 1. 25’였다. 도망일은 ‘쇼와 20. 6. 18’. 당시(쇼와 19. 9. 25 기준) 계급은 ‘현역 보병 이등병’.
 
  구술자료집에서 오씨는 학예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학예사: 그러면 지사님 생년월일은 언제이십니까?
 
  오○○: 이사공일이오(240125)예요.
 
  오씨는 언제 징병됐을까. 구술자료집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학: 그러면 1943년 9월 25일 평양에 가셔서 육군학교를 가셨잖아요? 제42부대.
 
  오: 42부대.
 
  2019년 오씨는 자신이 1942년 강제징집됐고 중국 구이린(桂林)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아라시 부대에 배치됐다고 밝혔다(2019년 8월 13일 《충청타임즈》).
 
 
  우미다 아이네와 아라시 부대
 
  임시군인군속과 유수명부에 따르면 우미다 아이네는 ‘1944년 9월 25일 보병 41 보(補) [부대]’ 소속으로 기록돼 있다. 보병 제109연대(嵐6262부대)는 일명 ‘아라시(嵐) 부대’이다.
 
  구술자료집과 공적조서에는 오씨의 일본군 탈출 시점이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탈출 당시 자신을 포함해 4명(신○○, 유△△ 등)이 동반 탈출했다고 밝혔다.
 
  학: 혼자서 탈출하셨어요?
 
  오: 4명이서 도망을 했어.
 
  학: 그분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오: 신○○하고 유△△하고 또 한 사람하고 이렇게 넷이.
 
  학: 유△△ 이분은 어디 분이세요?
 
  오: 문래면 옥성리 사람이여. 근데 시방 서울에 있어.
 
  학: 그분들은 어디서 만나셨어요? 모두 다 아라시 부대 소속이셨나요?
 
  오: 그럼 같은 부대지.
 
  (증언록 164~165페이지)
 
  신○○과 류△△도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신○○의 생년월일은 1924년 3월 3일, 류△△은 1924년 4월 12일이다. 본적은 신○○이 ‘충청북도 청원 북일(北一)○구성(九城) 33’, 류△△은 ‘충북 진천’이다. 이 둘의 공적조서는 이렇다.
 
  〈1943. 10월 일제에게 징집되어 중지파견 남경지구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중국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탈출을 기도하다 성공하여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 활동 중 1945. 4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입대하여 광복에 이르기까지 4월간 복무하였으나 탈출 시기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확인됨.〉(신○○)
 
  〈1944년 1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중경토교)〉(류△△)
 
  오○○이 속했던 아라시 부대의 유수명부에서 마쓰다 히토시(松田仁植)와 야나기 하루오(柳春雄)를 발견했다.
 
  마쓰다 히토시의 생년월일은 ‘다이쇼 13(1924년) 3. 3’, 본적은 ‘충북 청원군 남일면 상야리 38’. 도망일은 ‘쇼와 20(1945년) 6. 18’이다. 기자가 확인한 자료에선 탈출 당시 계급을 식별할 수 없었다. 마쓰타 히토시는 ‘보병 제109연대(嵐6212부대)’ 일명 아라시 부대 소속이다.
 
  야나기 하루오의 생년월일은 ‘다이쇼 13 4. ○2’, 본적은 ‘충북 진천군 문래면 옥성리 61’. 오○○은 앞서 구술 증언록에서 류△△의 고향이 ‘문래면 옥성리’라고 밝힌다. 야나기 하루오의 도망일은 ‘쇼와 20. 6. 18’.
 
  오○○는 앞서 2019년 기사에서 ‘동시에 미국 OSS(전략사무국·CIA의 전신)부대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해방 전쟁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OSS 부대는 광복군국내진공작전, 일명 독수리작전을 위해 미국이 지원한 부대이다. 미국은 주로 광복군 2지대원,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 출신을 독수리 대원으로 발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에 존재하는 ‘한국인 독수리 대원에 대한 인적사항자료’(1945년 10월 15일 자)에는 오○○이나 신○○, 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이 OSS 훈련을 받았다면 한 단계 높은 훈장인 애국장(4등급)을 서훈받았어야 한다. 장준하는 OSS 훈련을 받은 공로로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독립유공자포상심사자료(1977년 국가보훈처 총무과 작성)’ 중 세부 사항에 해당하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명단’에서 오○○, 신○○, 류△△을 찾을 수 있다.
 
  이요한씨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총사령부명단은 1977년 광복군동지회가 자체 작성했다. 당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에 참고하기 위해 한국광복군동지회에 개별 광복군의 활동 기간에 관한 확인서를 작성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문서는 ▲광복군 입대일과 ▲광복군 입대 전 활동 기간을 구분해 작성됐다. 이는 입대 전 활동(항일운동) 기간과 광복군 입대일을 합산해 서훈 기준인 6개월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 오○○, 류△△의 입대 기록이 적힌 페이지에는 하나같이 ‘1945년 4월 8일 광복군 입대’로 적혀 있다. 이들은 광복군 입대일로만 따지면 서훈 최저 연한(6개월) 미만이다.
 
  신○○은 1944년 12월 11일부터 1945년 3월 30일까지 광복군 입대 전에 중국군 유격대 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이어 오○○, 류△△이 상동(上同)이라고 적었다. 이로써 이 셋의 독립운동 기간은 8개월(광복군 입대 전 4개월, 광복군 입대 후 4개월)이 돼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었다.
 
 
  광복군 서훈받으려면 6개월 이상 활동해야
 
  2007년 8월 당시 국가보훈처 이병구 보훈선양국장은 “‘옥고 기간으로는 3개월, 활동 기간으로는 6개월 이상’이 독립유공자 여부의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공통된 산술적 기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11년 김재덕씨는 광복군 소대장이었던 형 김재기를 위해 독립유공자 인정 소송을 벌였다. 김재기는 1945년 해방 직전 광복군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했고 6·25 당시 국군으로 참전했으나 병환으로 사망했다.
 
  동생은 2001년부터 국가보훈처에 형 김재기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공적심사를 신청했지만 보훈처는 ‘광복군 입대시기 및 활동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입증자료 미비’라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2011년 법원도 보훈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김재기가 1945년 5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오○○씨에게 공적조서에 대한 내용과 일본군 탈출 시기, 광복 군 입대일 등을 묻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연락처는 개인 정보이기에 알려줄 수 없다”며 “대신 광복회를 통해 연락해보라”고 했다.
 
  기자는 지난 8월 3일 광복회 관계자에게 오○○씨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확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나 8월 11일 오전 11시까지 연락이 없다.
 
  이요한씨는 광복군 578명의 공적조서를 전수조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김원웅 전 광복회장의 부친 김근수와 관련한 내용도 기자에게 전했다. 《월간조선》은 이씨와 함께 광복군 서훈에 대해 추가로 보도할 예정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