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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문제 제기

통일신라의 국경은 만주에 있었다

글 : 허우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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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흥왕 때 황초령·마운령까지 진출했던 신라의 東北 영토가 통일 후에는 원산만 이남으로 후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
⊙ 신라-발해 국경선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톈산(天山)산맥 - 지린성(吉林省) 지린합달령 -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목단령(牧丹嶺)으로 이어지는 線
⊙ 日帝의 滿鮮史觀에 따라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데서 誤認 시작돼
⊙ 대동강으로 알려진 浿河는 랴오닝성 盖州에 있었다
⊙ 발해와의 국경이었던 신라의 井泉郡은 ‘용두레 우물’이 있는 지금의 룽징(龍井)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융합고고학 박사 / 인하대 홍보팀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초빙교수 / 저서 《여말선초 서북국경과 위화도》 《삼국지기행》 《술술삼국지》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등
중국 지린성 룽징시 용두레우물 앞에 있는 연혁비.
  신라는 처음 경상도 지역에서 건국하여 점차 영토를 확장하였다. 6세기 중반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함경남도의 함흥과 단천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진흥왕은 자신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4곳(함남 함흥, 함남 단천, 북한산, 경남 창녕)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을 기준으로 대륙 쪽의 땅은 당이 차지하고, 한반도 쪽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였는데, 이에는 백제의 땅이 모두 포함되었다. 우리의 역사교과서에 비정(比定)된 통일신라의 강역은 현재의 평양 아래쪽 대동강에서 동해안의 원산만까지 잇는 선(線)으로 되어 있다. 이미 진흥왕대에 개척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있는 함경남도 지역이 제외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발해의 공격으로 신라가 원산만 이북 지역을 상실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교과서의 통일신라 강역.
  신라는 전투의 승패에 따라 영토를 잃기도 하였지만 다시 회복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흥왕 시기에 확보했던 영토가 그 이후에 상실한 경위는 사료(史料)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의 영토는 삼국통일 때까지 줄곧 확장되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의 국경선을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로 못 박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滿鮮史觀
 
  그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05년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가로 삼았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만주경영(滿洲經營)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하나의 역사 단위로 파악하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만들었다. 이 사관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주된 연구대상은 한국의 고대사, 한국 식민지화와 만주 진출을 추진하는 데 용이(容易)한 역사지리의 고증(考證)이었다.
 
  일제(日帝)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은 것은 미성숙한 조선인들을 성숙하게 완성시켜주기 위한 것이며, 일본과 조선은 한 조상이었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우며 조선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일제는 고조선의 평양을 현재 북한의 평양이라고 하고 이로부터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려의 역사지리를 모두 한반도 안에 욱여넣는 반도사관을 정립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식민사관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로 하여금 《만주역사지리》와 《조선역사지리》를 완성토록 하였다. 이 작업에 책임자로 참여한 시라토리는 ‘책임자의 변(辯)’에서 말하기를,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우리도 적극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두 책의 목적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라는 자연지리를 경계로 그 동쪽과 남쪽은 한국사, 서쪽은 중국사, 북쪽은 여진족 등등의 역사 영역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1913년에 완성된 이후 조선 역사 연구에 필수도서로 활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38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조선사》의 국경사 부분을 설명하는 근간(根幹)이 되었다.
 
 
  “고려 西京=고구려 평양=지금의 평양”
 
  삼국(三國)의 국경 관련 연구에 참가한 일본 학자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야나이 와타리(箭內亙) 등이 있다. 이들의 신라 강역 연구는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 역사의 공간을 한반도 안으로 비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을 사료 검토도 없이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고려의 서경(西京)이 고구려의 평양이고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어떤 고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야나이 와타리)
 
  일제가 제일 중시한 역사지리는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이다. 나당(羅唐)연합군이 고구려 영토를 분할할 때 그 기준이 평양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서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평양을 확정 지으면 통일신라와 고려의 영토도 자연스럽게 확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을 우선적으로 비정하였는데, 마침 평안도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이곳이 곧 고구려의 평양이요, 고려의 서경이라고 확정 지어버린 것이다.
 
  역사에서의 지명은 전쟁이나 반란, 또는 군현(郡縣)의 조정 등에 따라 변동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모두 8번에 걸쳐 천도(遷都)를 하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천도를 모두 현재의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와 평안도의 평양(平壤)을 오간 것으로 배웠다. 그런데 8번의 천도를 두 곳으로만 반복하였다는 사료 설명은 없다. 진정 평양은 오직 현재의 평양뿐이었단 말인가.
 
 
  평양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
 
일제가 구축한 통일신라 강역.
  고려의 서경은 반란이 자주 일어난 지역이었다. 금·원(金元)대에는 서경을 총괄하는 장수가 인근의 성들과 함께 적에게 귀부(歸附)하기도 하였다. 《원사(元史)》의 기록을 보면 이때 귀부한 고려의 땅을 원(元)은 동녕로(東寧路)에 편입시키고 그 지역의 연혁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동녕로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 했다. (중략) 진(晉) 의희(義熙) 이후 그의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주했다.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빼앗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鴨綠水)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 때에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년)에 이연령(李延齡), 최탄(崔坦), 현원렬(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鎭) 등 60개의 성을 이끌고 귀부했다. 지원 8년(1271년)에 서경이 동녕부(東寧府)로 개칭됐다.〉(《원사·지리지》, 동녕로)
 
  고련은 고구려 장수왕의 이름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遼陽)이다. 이는 아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검성이라고 하며 기자의 고국(故國)이다. 성 밖에는 기자묘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 치소였는데 진(晉) 의희(義熙) 이후 왕 고련이 이 성에 처음으로 기거했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명(明)이 건국 후 국가가 안정되자 자국의 영토와 주변국의 현황을 정리한 사료다. 이 기록은 명의 영토인 랴오양 지역의 연혁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이고, 기자의 땅이며,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이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사》의 기록에서는 평양이 한 곳이 아니었고, 현재의 압록강도 고구려 시대의 압록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400km 이상 떨어진 곳에 평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西京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다
 
  현재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이 다른 곳이었음은 우리의 사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우(辛禑·우왕)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 배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가재(家財)를 서경(西京)으로 운반하여 군수물자를 준비하게 하였고, 또 온 나라의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군사로 삼았다〉(《고려사·열전》, 최영)
 
  고려 우왕은 명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자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위의 기록은 이를 위하여 군수물자와 군사들을 징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군사 징발을 독려하는 장소는 평양이고, 군수물자를 준비하여 두는 곳은 서경이다. 평양과 서경이 같은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수물자를 배를 이용하여 서경으로 운반하였다는 것은 압록강 위쪽에 서경이 있다는 뜻이다. 5만여 명의 대군이 요동으로 출병하려면 많은 군수물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군수물자는 압록강 건너에 위치한 서경에서 보급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우리는 《고려사》의 기록에서도 현재의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 될 수 없음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곳은 모르겠다”
 
  조선은 건국(建國)과 수성(守城)이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자 세종대(世宗代)에 이르러 조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사업은 조선의 영토 안에 조선 이전의 선대(先代) 역사의 표식물을 설치하는 것인데, 그 장소는 각각의 왕성에다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이 기록에서도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시 조선 영토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고려 때는 임금들이 서경에 자주 다녔는데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식민사관을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이 위의 사료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아무런 고증도 필요하지 않다’라는 한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를 이렇게 왜곡해놓았던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대의 평양이 랴오양이라면 압록강도 당연히 다시 살펴봐야 한다. 최근의 연구에서 고구려 시대의 압록강은 현재의 랴오허(遼河)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통일신라의 강역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圖北과 眞北
 

  통일신라의 국경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역사지리는 니하(泥河)와 정천군(井泉郡)이다. 니하는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발해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이고, 정천군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는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먼저 니하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발해의) 남쪽은 신라와 니하를 경계로 견주고 동쪽은 바다로 막히고 서쪽은 거란이다.〉(《신당서·열전》, 발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도에서 방위를 계산할 때 위쪽은 북쪽, 오른쪽은 동쪽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도에서만 표현되는 도북(圖北) 방위다. 고대(古代) 사서의 방위 기록은 모두 북극성(北極星)을 기준으로 하는 진북(眞北) 방위를 사용하였다. 도북이 ‘더하기(+)’ 형태라면 진북은 ‘곱하기(×)’ 형태다. 즉 지도에서 고대의 방위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서북쪽이 서쪽이 되고, 동북쪽이 북쪽이 되며, 동남쪽이 동쪽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지리 연구는 사서에 기록된 방위를 도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방위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후대(後代)의 학자들은 당시 기록자가 방위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사서의 기록 또한 잘못되었다면서 멋대로 고쳐서 주장하였던 것이다.
 
  〈근래 다시 (김)사란의 표문을 보고 경이 패강(浿江)에 군사를 두고 지키고자 함을 알았다. 패강은 발해의 요충지이자 녹산(綠山)과 마주 보는 곳으로, 원대한 계획을 마련한다면 이야말로 좋은 대책이다. 또한 발해(渤海)는 오래전에 토벌에서 벗어나서 거듭 군사를 수고롭게 하였지만 아직 멸망시키지 못했다. 경이 항상 미워하니 매우 가상하다. 도적을 경계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무슨 못 할 일이 있겠는가? 다 처리하고 나면 사신을 보내 아뢰도록 하라.〉(《장구령집》2, 칙신라왕김흥광서(勅新羅王金興光書))
 
 
  浿河는 랴오닝성 盖州에 있었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당이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자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패강(浿江)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발해를 견제하였다. 그렇다면 패강은 고구려의 평양인 랴오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또한 다음의 기록에서 패강은 니하와 같은 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니하(泥河)는 일명 패수(浿水)이며 헌우락(軒芋樂)이라고도 한다. 물에 헌우초가 많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니하’)
 
  〈청하(淸河)는 개주위(盖州衛)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주남하(州南河)라고도 한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니하(泥河)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청하’)
 
  신라군이 주둔했던 패강은 곧 신라와 발해의 경계인 니하인 것이다. 그리고 이 니하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가이저우(盖州)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이저우시를 흐르는 강은 다칭허(大淸河)인데 강의 흐름이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다칭허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합류하는 강은 유니허(淤泥河)이다. 따라서 유니허가 곧 니하이며 패수가 되는 것이다. 유니허는 가이저우시 서쪽의 렌윈다오(連雲島)와 맞닿아 있는데 렌윈다오에는 예부터 군사들이 주둔하는 관소(關所)가 있었다. 유니허는 다스차오시(大石橋市)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은 옛 해성현(海城縣) 지역으로 육로로도 평양(遼陽·랴오양)까지 진격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한다. 이처럼 유니허는 육지와 바다를 통해 평양을 공략하는 가장 근접한 요충지인 것이다.
 
 
  新羅山
 
  통일신라의 서북쪽(眞北) 경계는 다음의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다.
 
  〈함주(咸州)를 출발하여 북으로 가니 땅이 평탄하여 각지에 취락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경작지가 두루 퍼져 있고 땅은 곡물을 심기에 적당하다. 동으로는 멀리 천산(天山)이 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은 이를 채(彩)라고 하는데, 이는 신라산(新羅山)이다. 산 안이 깊고 멀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다. 그곳에서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깊숙한 곳은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이 기록은 북송(北宋)의 허항종(許亢宗)이 함주(咸州)에서 북으로 금(金)나라 상경(上京)인 현재의 하얼빈시 아래에 위치한 아청(阿城)으로 가는 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함주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이다. 허항종이 하얼빈으로 가는 중에 동쪽 멀리에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신라산(新羅山)이며 신라의 경계가 그곳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현재 카이위안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의 동쪽은 지린합달령(吉林哈達嶺)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허항종이 말한 신라산은 바로 지린합달령의 어느 높은 봉우리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금나라 때에는 이미 신라가 고려에 병합된 시기이지만 오랫동안 신라와의 경계였기에 시대가 바뀌었어도 함주 일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신라산으로 불렀던 것이다. 허항종은 관료였기에 민가에서 불리는 신라산에 대한 기록과 함께 그 지역이 지금은 고려의 경계임을 밝혀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지린합달령이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이자 고려의 국경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사지리는 신라의 정천군(井泉郡)과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발해의 동경을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시의 반라청(半拉城)에 비정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정천군은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에 비정하고 있다.
 
  신라의 정천군은 고구려 때는 천정군(泉井郡)이었고, 고려 초기에는 용주(湧州)라고 불렀다. 지명은 언제나 그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부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정천군이라는 지명은 자연지형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 틀림없다. 주거지 형성의 첫 번째 조건은 샘물, 즉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곳이어야 한다. 신라의 정천군은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샘물로 유명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 초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시의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에는 룽징시 지명의 유래가 되는 ‘용두레우물(龍井)’이 있다. 이 우물은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용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정천이다(龍井地名起源之井泉)’라고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다. 신라 정천군의 위치가 지린성 룽징시이면 그동안 학계의 문제가 되어왔던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의 해석도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발해 東京은 어디?
 
일제의 동경성 발굴보고서.
  룽징시가 신라의 정천군이라면 발해의 동경(東京)도 다시 살펴봐야만 한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가탐(賈躭)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四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신라 정천군에서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무릇 39역(驛)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지리4, ‘백제’)
 
  발해의 동경(東京)은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부른다. 신라의 정천군에서 발해 동경까지는 39역(驛)이라고 하였으니 현재의 길이로 변환하면 430km 정도다. 현재의 지린성 룽징시에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寧安)시의 발해 왕성까지의 거리는 390km이다. 현재의 도로가 국도(國道)임을 감안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한·중·일 학계 모두 닝안시의 발해왕성을 상경(上京)으로 보고 있지만 이곳은 옛날부터 동경성(東京城)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어떻게 동경성이 상경성이 되었는가. 이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 과정에서 바뀐 것이다.
 
  〈요양(遼陽)은 천회 10년(1132년)에 남경으로 고쳐졌으며, 그 후 정원 원년(1153년)에 다시 동경이라고 이름이 붙여지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사이인 21년 동안 별도로 동경이라고 부를 만한 지역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 일에 관하여 확실한 어떤 증거도 얻을 수는 없지만, 단지 금나라 시대의 옛터임에 틀림없는 오늘날의 동경성(東京城)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는 것이다. (중략) 지금의 동경성은 천회 연간에는 번화한 도시였으며, 한때 금나라의 동경(東京)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동경성이라고 하는 명칭도 아마 금나라 시대부터 생겨난 것일 것이다. 《금사(金史)》에 이 지역에 관한 기사를 싣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만주역사지리》2, 제2편, 159쪽)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
 
  현재의 랴오양은 금 시대에는 남경이었다가 동경으로 바뀐 것인데, 랴오양이 남경이었을 때의 동경은 현재 발해의 상경으로 비정한 헤이룽장성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를 옛날부터 동경성으로 불러온 것에 있다. 즉 이를 그대로 발해의 동경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금 시대의 동경일 것으로 ‘상상하고’ ‘추측하여’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그들 역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제는 사서(史書)에서 금 시대의 동경이라는 기록이 없자, 1939년에 닝안시의 동경성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이 금 시대의 동경성이고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였다는 발굴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발굴보고서의 발굴 현황을 살펴보면 금 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흔적조차 없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별도의 주석(註釋)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발해(渤海)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터가 남아 있는 곳이 현재 동경성(東京城)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에 관해, 고(故) 마쓰이 히토시(松井等)는 금 시대에 동경이라고 이르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금 시대에 이 지역이 동경이라고 불렸던 일에 대해서는 문헌(文獻)이 증명하는 것이 없고, 또 우리의 조사 결과 어떠한 금 시대의 유적, 유물을 접하지 못한 것을 보아도 이 주장을 급히 쫓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동경성_발해국 상경용천부지 발굴보고》, 서론, 1939)
 
  발해의 상경이자 금 시대의 동경이라고 믿었던 닝안시의 발해왕성 터를 발굴한 결과, 금 시대의 유물과 유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 금 시대의 동경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경성이 금과는 상관없는 발해의 유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곳의 지명이 예전부터 동경성으로 불려 왔던 점을 고려할 때 발해의 동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더욱이 앞서 살펴본 신라의 정천군인 지린성 룽징시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사서에 기록된 거리와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일본 학자들은 아무런 기록도, 아무런 흔적도 나오지 않은 곳을 금 시대의 동경이라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의 유물이 나오자 상경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역사지리 연구는 신라의 북계(北界)인 정천군을 원산만의 문천에 비정하였기 때문에 발해의 영역을 상대적으로 함흥까지 내려야만 하였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발해의 상경으로 비정하고 있는 헤이룽장성 닝안시의 발해왕성 터는 발해의 동경으로 보아야만 한다.
 
 
  국경선과 국경지대
 
통일신라 국경 예상도.
  이제까지 통일신라 강역과 관련된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세(中世) 시기까지의 국경 개념은 국가 간에 상호 보장하는 선(線)과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동 가능한 유동적인 지대(地帶)로 구분하여 살펴야 한다. 이때 상호 보장하는 국경선은 자연지형의 안쪽이며, 유동적인 국경지대는 지정학적 요충지를 관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의하여 신라의 국경선을 고찰하면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톈산(天山)산맥에서 지린성(吉林省)의 지린합달령, 그리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목단령(牧丹嶺)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국경지대는 랴오닝성 가이저우시의 다칭허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가는 수분하까지를 국경지대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의 강역과 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키고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영토가 현재의 한반도를 넘어 앞 페이지 지도의 지역까지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의 사료에서도 알 수 있다.
 
  〈9주(九州)가 관할하는 군(郡), 현(縣)은 무려 450개였다. 신라 지리의 넓고 먼 것이 이와 같이 극성하였다.〉(《삼국사기》, 지리1, ‘신라’)
 
 
  實證 없는 實證史學
 
  조선은 세종대에 이르러 통치 영역에 필요한 강역과 조세 및 부역 등에 필요한 군현을 정비하여 지리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조선 팔도의 주·부·군·현의 개수는 모두 334개였다.
 
  역사교과서에 설명된 우리의 영토사는 통일신라 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확장되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전체로 영토를 확장한 조선 시대 군현의 수가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는 통일신라의 군현의 수보다 적다면 이는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하는가. 특히 조선 시대의 인구가 통일신라 시대의 인구보다 적지 않았을 것임을 고려한다면 통일신라의 영토는 당연히 현재의 한반도를 넘어 앞 페이지의 지도가 가리키는 영토여야만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제는 우리의 역사지리를 한반도 안에 비정하면서 사서의 기록이 맞지 않으면 ‘괴이하다’ ‘고증이 필요 없다’ ‘상상할 수 있다’ 등의 주장으로 합리적인 논거와 실증적인 연구를 무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영토사에서 중요한 지명인 압록강(鴨綠江), 평양(平壤), 서경(西京), 자비령(慈悲嶺), 철령(鐵嶺) 등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비정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비정한 우리의 영토사는 오늘날 오히려 ‘실증(實證)사학’임을 표방하며 이를 더욱 견고하게 이어가고 있다. 수많은 사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고고학적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어찌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있는가.
 
  신라는 경상도에서 출발하였지만 삼국을 통일하며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1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명국이었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영토가 진정 어디까지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되찾는 것이자, 후손에게도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는 중차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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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최초 언어    (2022-06-11) 찬성 : 0   반대 : 0
인류의 언어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IKvZJVcsMcIt=2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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