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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록

이어령의 마지막 나날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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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피시스와 노모스, 세미오시스지”
⊙ “난 그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 “애통해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지난 3월 2일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이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지난 2월 26일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마다하고 사실상 곡기를 끊고 오랜 시간을 버텼다. 기자는 선생이 세상과 이별한 그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회사 선배가 전화를 걸어 선생의 죽음을 알려왔다. 곧이어 소설가 이인화(류철균, 전 이화여대 교수)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떨리는 음성이었다.
 
  가끔 우리는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쯤이었다. 선생이 이인화 교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 역시 마지막 당부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몰라보게 야윈 선생을 보고 이 교수는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볼이 눈에 띄게 움푹 파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생전 마지막으로 본 선생의 모습을 시(詩)처럼 표현했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불행과 지혜가 아로새겨진 야윈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소 짓는 우수였고 기도하는 달관이었다.”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핸드 프린팅. ‘펴면 다섯 쥐면 하나’라는 글이 적혀 있다.
  퇴원한 후 빈소를 찾았다. 2월 28일이었다. 고급 외투와 짙은 정장을 차려입은 구두들로 붐볐다. 눈부신 난(蘭)과 흰 국화, 검은 장례 리본이 빈소를 가득, 가득 메웠다. 하염없이 울거나 목멘 소리로 통곡하는 이는 다행히 없었다.
 
  대개는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기자와 안면이 있는 분이 있어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조성관 《주간조선》 전 편집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휠체어를 탄 김남조 시인 등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무렵이었다. 취재로 만났지만, 감히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을, 그의 말을 겨우 식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기자는 늘 말문이 막히곤 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음성이 아니라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경계를 뛰어넘는 비유로 달려갔는데 논점을 엉뚱하게 비약하거나 고약하게 비꼬는 식의 잘록한 편견은 없었다. 갈피를 못 잡고 화제의 수미(首尾)가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대개는 당장의 일상과 거리가 먼 관념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불모의 관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살아 있었거나 잊힌 관념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들이었다.
 
  깊이 있는 문장 역시 문학적 모조품이나 부자연스러운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천하의 이야기꾼이자 시인이었다.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만나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시작한 뒤로는 매달 3~4번씩은 만났다. 선생이 떠나기 두 달여 전인 작년 12월 13일을 기점으로 12월 20일(전화통화), 그리고 지난 1월 7일과 11·18일, 2월 4·10·17·23일 만났다.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을 때여서 기껏 20~30분 정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슬픔이 북받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적이거나 느긋한 잡담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은 고장이 나버린 생(生)의 시계를 곁눈질하며 초조했을지 모른다.
 
  지난 2008년 선생이 펴낸 시집 《무신론자의 기도》에 ‘메멘토 모리’라는 시가 실려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M자 3개가 겹쳐져 있는 아름다운 라틴어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먹고 마셔라, 내일은 죽으니까’라는 향락적 찰나주의의 경구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러니 오만하지 말고 성실하고 경건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한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 숨소리를 엿듣던
  긴 겨울밤
  어머니 손 움켜잡던
  내 작은 다섯 손가락.
 
  애들은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가고
  애들은 새둥지 따러 산으로 가고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 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 전문

 
  이어령 선생은 말하곤 했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이라고. 기껏 여섯 살 코흘리개가 죽음이라는 말을 몸 전체로 느꼈다고 고백했다. 아이가 느꼈던 수의의 까칠한 촉감, 혹은 혼자 굴렁쇠를 굴리다 흘렸던 눈물의 기억이 바로 메멘토 모리이고, 그 기억을 평생 간직해왔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어령의 생전 마지막 저서가 또한 《메멘토 모리》였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
 
  기자는 선생이 생과 사투하던 마지막 나날들을 문장으로 옮기려 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생전의 당부를 미화하거나 억지로 비단을 덧댈 생각은 없다. 연재를 기다리는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선생의 음성을 글로 보여주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리는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선생의 음성이 낮아서 들리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선생은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목소리 톤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니야. 보통 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 말 속에 선생의 눈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연달아 무언가를 쏟아낼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동안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버캐 같은 굵은 소금언어들이 들렸다.
 
 
  2021년 12월 13일
 
이어령 선생과 소설가 이인화(왼쪽), 김태완 기자.
  서울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를 찾았다. 평소에는 회의 탁자에 앉았지만 이날은 소파에 앉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앉기보다 누워 있었다고 해야겠다.
 
  “12월 27일이 89세 되는 생일이야. 그때 침대[의료 침대]가 들어오면 침대 생활을 하게 돼. 병원에서처럼 누워 지내게 된다고. 그러나 뭐가 가능하냐 그러면, 지금도 하고 있지만 녹음기를 매달아 놓고, 의식이 있는 동안 내 음성을 녹음하려고 해.”
 
  그러더니 시간이 없다고 느꼈던지, 말의 방향을 틀어 이달에 기자가 썼던 기사[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③ 식민지인(人)]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했다.
 
  “‘패럴리즘(Parallelism)’을 대구법(對句法)이라고 하지만 병렬법이라고 반드시 해줘야 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라는 구절에서 보듯 (문장의 흐름이 갔다 왔다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이론이야. 자칫 (해석에)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지.”
 
 
  四角의 저주
 
  선생은 동양의 사고를 지배한 중국의 한문 문장 구조, 의식을 지배한 한자(漢字) 언어의 틀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국 나라들은 반드시 외 글자야. 진나라, 한나라 식으로. 그런데 변방의 나라는 반드시 두 자잖아. 한 자를 못 써. 신라, 고구려, 백제. 지명(地名)은 다 두 자야. 조치원, 삼랑진은 예외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지. 사각(四角)의 저주… 중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말이 안 되는 거야.”
 
  사각의 저주는 사각형 글꼴의 한자 형태가 한중일(韓中日)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의미였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두고 ‘나라가 망하니 산하가 있다’로밖에 안 읽혀. 나라가 망해도 산하는 있는 것인지, 나라가 망하니 남은 건 산하뿐인지…. 하나는 포지티브, 하나는 네거티브야. 하나님이 와도 못 풀어. 전체 문맥을 봐야 하는 거야.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의 ‘귀거래사(歸去來辭)’도 보라고. 관직을 그만둔 거지 세상을 은퇴한 거 아니거든. ‘귀거래사’를 전부 은퇴하는 걸로 알아. 관직만 그만둔 거지 북쪽의 여산(廬山) 속으로 안 들어간 거예요. 여산 속으로 들어가야 은둔이지 끝내 안 들어가.
 
  그리고 ‘귀거래사’는 죽어서 여산에 들어가는 것, 살아서 가는 것, 벼슬을 그만두고 여산 근처에서 사는 것 등 3가지 패러다임이 있어. 또 ‘귀거래사’에 등장하는 배[舟]도 실제로 배를 타고 간다, 꿈결에서 배를 탄다, 혹은 죽어서 배를 타고 간다는 해석이 다 가능한 거예요. 이런 해석은 바둑으로 치면 단수 중에서도 알파고 수준의 바둑을 두듯이 풀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해석을) 반절도 못 하는 거지. 쓰지 못하는 거예요.”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평창동 서재에서 컴퓨터로 작업 중인 이어령 선생.
  “옛날에는 전부 문맥으로 해석했지만, 오늘날처럼 (문장 속) 단어가 제 몫을 하기 시작한 건 근대 개인주의가 시작되면서야. 이 문제로 들어가면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누구도 못 올라가는 거야.
 
  그리고 한자는 이미 표의문자가 아니고… 세상에 간자체가 무슨 한자야. 상형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고 발음부호가 돼버린 거야.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이걸 안 하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냥 보통 에세이를 쓸 바에야 그걸 뭐하러 죽으면서까지 해.”
 
  선생은 지금까지 탐사해온 ‘한국인 이야기’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리히스토리(prehistory·선사시대), 히스토리 이야기야.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젓가락’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인류 최초의 전사(戰士), 최초의 요리사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밝히려고 해. 사람들이 기록된 역사, 문자로 기록된 역사만을 인정하지만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내가 얘기하는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 세미오시스(Semiosis·기호상징계), 추리력, 유추, 메타포지.”
 
 
  피시스, 노모스, 세미오시스
 
  “그 프리히스토리 이야기만 써도 엄청난 거라고. (기록된 역사만 인정하는 이들은) 패륜아들이야. 350만 년 전 인간의 인지능력 혁명을 전혀 인정 안 하는 것들이야, 이것들은….
 
  (선사시대 인간을) 뼈다귀나 던지는 줄 알고, 곤봉이나 휘두르는 침팬지인 줄 알았던 역사관을 여지없이 죽여버리려 하거든. (젓가락을 통한) 식사 공동체를 통해 말이지. 고릴라하고 인간만이 함께 나눠 먹어. 딴 짐승들은 음식을 두고 싸워. 다른 짐승하고 싸우고, 지들끼리 싸우고 그랬어. 그게 생존경쟁이야. 암컷 놓고 죽어라 싸우고.
 
  우리 인간은 안 그래. 결혼제도라는 게 있어서 싸움을 안 하는 거야, 대놓고. 그리스 신화에, 그리고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신들의 대리전인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나오잖아. (제우스의 딸인) 헬렌을 두고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싸우는데 손님으로의 모럴을 (파리스가) 어겼던 거지.
 
  그리스는 해양국가이자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도시에서 도시로 가려면 참 힘이 들어. 그러니까 낯선 나그네들은 먹여줘야 해. 발을 닦아주고. ‘친절’이란 뜻의 독특한 단어가 있는데….
 
  나그네한테 잘해줘야 자기도 길을 떠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지금도 몽골에서는 (어딘가로 떠날 때) 텐트에다 밥을 차려놓고 간다고 하잖아. 왜? 길 잃은 사람이 왔다가 먹으라고.”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생각에 잠긴 이어령 선생.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의 말 속에 날이 서 있었다.
 
  “(나그네에게) 선심 쓰는 게 아니야. 그래야 자기도 살아. 그걸 어기면 질서가 무너지는 거야. 그런데 나그네로 환대받던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렌을 빼앗아간 것이지.
 
  포세이돈은 트로이를 지켜주는 신(神)이야. 말[馬]이 상징이지.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바퀴 달린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잖아. 트로이 입장에선 자기들의 상징인 말인데 아무렇게나 두면 되겠어? 자기들의 신인데. ‘너희 신이다. 전쟁 안 하겠다’는 뜻인 줄 알고 (성 안으로) 목마를 끌고 들어간 것이지.
 
  그런 이면을 모르고 목마를 가져갔겠어? 바보야?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해석이라는 게, 우선 자료가 없어.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문학 시간에 배우고 있는 거예요. 나처럼 트로이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해봐. 납득이 갈 거야.
 
  옆구리가 저려 말을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 난 그런 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아무리 잘 전하려고 해도 엉뚱한 얘기로 돼서 나오면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안 하는 게 낫다는 거지. 이미 한 말을 다시 쓸 바에야, 하나도 새로운 말이 없을 바에야….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눈부시던 교정…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어. ‘니들(너희)은 아무리 쉽게 말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니 비유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플라톤도 그랬거든. ‘이데아가 뭡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으니 ‘내가 말 못 한다. 그걸 말로 옮길 수가 없다’고 했어. 자꾸 조르니까 ‘굳이 비유로 말하자면 태양 같은 것’이라고 했지.”
 
  선생은 전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 구어체가 문어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는 행간의 오류와 해석의 차이를 안타까워했다.
 
  “어린 시절, 내 필통 속에 서양이 있었어. 셀룰로이드(합성수지)로 된 작은 필통 속에 서양의 문명이 들어 있던 것이지. 지우개가 풍기는 향내. 제삿날 향불에 익숙하던 내 후각에겐 경이로운 것이었어.
 
  연필은 또 어떻고. 나무 속에 물질이 들어 있잖아. 광맥이 들어 있는 거야. 나이가 들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상상력을 보면서 느꼈던 것과 같아.
 
  텅 비어 있는 운동장이 마음을 끌었어. 햇빛으로 꽉 차 있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운동장이 내게 강력한 학교의 이미지였어.
 
  아이들이 없는, 그래서 쓸모없을 것 같은 텅 빈 운동장,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꽃과 화단이 눈부시던 교정…. 기껏 집 툇마루 아래 작은 마당밖에 모르던 아이에겐 큰 충격이었어.
 
  교실 안은 어둡지만, 바깥 운동장은 환한 햇살이 쏟아졌어. 센티멘털한 감상주의가 아니고 인간 존재의 생명에서 오는 것 같은….”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김 기자가) 말랑말랑한 지우개를 미각적이고 촉각적인 부분까지 아주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써주길 원하는데, 그거는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그거 하면 내 마음속에 들어가서 이어령처럼 해야지. 그러나 내가 한 말인데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된 말들 되어버리면 끝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게 되거든.
 
  내 얘기들이 (바르게) 전해졌을 때 독자들이 ‘야, 읽을 만하다. 신문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이 어떻고 하는 데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깊은 동굴의 울음소리가 있구나. 그래도 우리나라에 형이상학이 있구나. 이념적 사고가 아니라 관념적 사고가 있구나. 추상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지 않겠어?”
 
  선생은 소변이 안 나온다고 했다. “대변이 나오면 소변이 안 나오고, 소변이 나오면 대변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빈혈에서 오는 거야. 거의 보름 가까이가 됐어. 암 환자들은 이런 증상들이 있거든.
 
  내가 소변 안 나온다든지 해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죽을 사람의 몸을 째고 했을 거야. 그걸 안 하려고 재택의료로 바꾼 거지.
 
  나, 안 하겠다는 거야. 그거 안 하겠다는 거야. 얼마 전 수혈받으러 병원에 가서 일곱 시간 있었는데 죽을 것 같더라고. 나 수혈 안 받겠다고 했어.
 
  해서는 안 될 소리지만,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년)도 그렇고, 가와바타(川端康成· 1899~1972년·소설 《설국》 작가)도 그랬고, 대개 지성인들이 죽을 때 보면 자살하거든.”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인터뷰 도중 이어령 선생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한국인 이야기’의 지적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의 이 말에 기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방법을 강구 중인데, 시각 잃고 청각 잃고 막 이런 데 붓고… 도저히 못 견뎌, 진짜…. 창피한 얘기지만, 자의식이 강해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만 밤중에 막 아프면, 아픈 거는 말하지 않고 욕을 한다고.
 
  (의사들이) 병을 뭘 알아? 한 인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난도질을 하느냐 이거야. 그렇게 해서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거야. 한 인간이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설령 내 죗값이라고 치자. 나, 죄가 많다. 그러나 (아픈 병이) 죄보다는 무거운 형벌일지도 모르지.
 
  그래, 나 이렇게 살아왔다, 지금까지…. 위선자고 표리부동하고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사람이) 다 그래. 그렇게 잘난 사람 없어. 인간이 완벽하다면 뭣 하러 예수님이 오셨겠어?
 
  또 예수님도 그러셨어.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분 아니야?”
 
  선생은 그러나 당신 생명의 소중함도 이야기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죄로 생각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아. 다비(茶毘)한다고 불 속에 들어가는 거? 태워가지고 뭐 사리(舍利) 나오는 거? 기독교에서는 용납 못 하는 거야. 생명인데 지(자기) 생명인데 그걸 어떻게 불에다가 태워?”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기독교는 생명주의 종교거든. 다른 종교하고는 달라. 그리고 ‘고통…,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기독교를 안 믿어도 애통하는 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야. 삼성 이병철 회장이 물었어. ‘기독교를 안 믿으면 천국에 못 갑니까?’ 하고.
 
  애통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사람들은 천국을 어떻게 해석할까? 금은보화가 주렁주렁 달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천국은 지루해서 못 살아.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이 말했다지. ‘청와대에 갇혀 바깥에도 못 나가고 감옥살이가 지겨웠다’고. 그랬는데 또 감옥에…. 결국 자기를 잃잖아.”
 

  선생은 작년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빈소를 찾았다. 그는 6공화국 초대 문화부 장관(재임 1989년 12월~1991년 12월)이었다.
 
  “그 몸으로 어디 가느냐”며 주변이 다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노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였다.
 
  선생은 “몸이 성치 않아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 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이 헌시는 대통령 유족들이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 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이어령의 ‘질경이 꽃’ 일부

 
  시 끝자락에 ‘참용기’, 풀이하자면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생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관 시절 선생에게 한 말이자 평소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선생은 이 시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언론의 관심에 흡족해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이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담아왔다”며 거실 한쪽 눈에 띄는 자리에 세워놓았다. “시가 너무 좋아 직접 써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편에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조갑제 대표도 유튜브를 통해 이 시를 두 번이나 읽고 소개해줬어요.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죽어 누가 날 위해 시를 써줄까?”
 
 
  2022년 1월 7일
 
  이후 기자에게는 가족 상(喪)이 있었다. 한동안 선생을 만날 수 없었다. 전화통화는 그사이 한 번 했다.
 
  선생은 목이 잠긴 채 쉬어 있었다. 누워서 일어서지 못했다. 의료 침대는 서재 안쪽 방에 놓여 있었다. 기자는 침대 곁으로 가 선생과 마주 앉았다.
 
  선생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John Updike·1932~2009년)가 쓴 소설 《음악학교(The Music School)》에 관해 쓴 글을 찾아준다며 일어섰는데 걷는 것이 거의 불편했다. 보행기로 겨우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를 켜고 한참을 뒤져도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음성 역시 낮고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선생의 마지막 저서인 《메멘토 모리》의 출판을 앞둔 때였다.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사제에게 질문한 24가지 질문에 대한 책은 인문학자의 글이지 종교인의 글이 아니야.
 
  (책에 담긴) 기독교적 관점, 가톨릭적 관점의 차이는 인간들이 만든 인스티튜션(Institution·제도 관습)이야. 대학교 같은 거야. 서울대, 연세대 같은….
 
  교육이 대학이야? 웃기는 사람들이야. 무교(無敎), 그러니까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지.
 
  아니, 예수님이 계실 때 언제 무슨 가톨릭이고, 기독교가 어디 있었어?”
 
  평소 선생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주기도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주기도문이 뭐야. 웃기는 거야. 왜들 그러지?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이 이름을 안 가르쳐주니까 모세가 ‘당신은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있는 나다(라틴말로 Ego sum qui sum)’라고 하신 것이지.”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이어지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끝마다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말해.
 
  하나님으로 하는 것[기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 대단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킹덤, 왕이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에게 있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당신을 지상의 왕이 되게 하겠다’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노(No)! 하셨어.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지상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지상의 권력과 권세를 드린다고? 그건 지상의 왕에게나 하는 말이야. 내 말 반박해보라고. 반박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번에는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신약(新約)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오병이어, 그거 기적이 아니야. 모세와 나그네 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었다는 ‘만나(manna)’는 기적이 아니야. 먹으면 죽는 거요.
 
  그거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오병이어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만나를 먹은 놈들, 다 죽었어.
 
  (예수님은) 죽지 않는 빵을 주려고 왔는데 너희는 먹으면 죽는 빵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그래? 오병이어라는 이름을 단 교회까지 있어. 성경을 어떻게 읽은 거야?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있는데 악마가 나타나 유혹하잖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바꿔보시오’라고.”
 
 
  “五餠二魚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기자는 숨죽인 채 선생의 말을 경청했다.
 
  “예수님이 돌을 빵으로 바꾸셨겠어? 생각해보라고. 세상의 모든 돌을 빵으로 바꾸면, 당장은 그 빵을 먹어 배가 부를지 몰라도 돌이 모두 사라지지 않겠어? 이후에는 배가 고파 죽지 않겠어? 그게 올바른 것이야?
 
  예수님이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신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씀이 아니지.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생명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 죽는 생명이 뭐 그리 대단해. 가장 어려운 것은 영생이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독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지.”
 
  처음에는 자그마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원래 목소리처럼 커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힘이 납니다. 조금 전까지 녹다운되어 쓰러져 있었잖아. 이게 영(靈)이야. 육체보다 강한 영이야.”
 
  그러더니 죽음을 앞둔 자신을 달래듯 덧붙였다.
 
  “(하늘에서) 내가 이 책(《메멘토 모리》)을 통해 ‘올바른 소리를 했구나’ ‘착한 일을 했구나’ 해서 데려가려 하시는 건지, ‘너 어디서 망측한 소리, 니 멋대로 떠들어서’ (웃음)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난 내 나름대로 인간 예수의 입장에서 ‘네가 나를 이해했다’… (고 하시지 않을까.)”
 
 
  1월 11일
 
  선생의 침대 앞에 마주 앉아 20여 분간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④ 맛과 멋, K-푸드’에 모두 녹였다.
 
  선생이 설명하는 존 업다이크가 쓴 소설 《음악학교》와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기자는 선생과 헤어진 뒤 도서관을 찾았다. 《단식 광대》는 빌려서 읽었지만 《음악학교》는 국내 소개되지 않은 듯 보였다.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월간조선》에 싣지 않은 존 업다이크의 《음악학교》에 관한 선생의 육성을 요약해 전한다.
 
  “존 업다이크라는 소설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해. ‘오늘날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고.
 
  진리라는 것은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지. 딱딱한 음식을 어금니로 깨물어 먹듯 진리도 깨물어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가톨릭의 성체성사를 보면 엄지손톱만 한 작고 얇은 밀떡을 신자들에게 나눠주거든. 초대교회 때는 아마 무척 딱딱한 빵이었을 거야.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유동식을 먹고 전부 소프트드링크, 전부 소프트푸드야. 딱딱한 걸 씹질 않아. 그래서인지 어려운 걸 이겨내고 노력하고 추구하고 진리에 부딪힐 마음을 잊어버렸어.”
 
 
  아랫입술 꽉 깨물고…
 
  “소설에는 한 소녀가 음표로 새까만 악보를 치는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지. 요즘은 음악을 들을 때도 편안하고 소프트한 음악만 선호하잖아. 그러나 소설 속 소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려운 악보를 치면서 연주에 몰입하지. 음악은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게 아니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들어야 해).
 
  요즘 애들은 말이지, 씹질 않아가지고 옛날 석기시대보다 거의 4분의 1도 안 씹는다고 하잖아. 씹을 때마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는데 말이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빵은 딱딱한 빵, 얇은 빵, 녹여 먹는 빵 별것이 다 있는데 그게 정신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어. 유동식 대신 인생을 씹듯이, 도전하면서 싸우듯이 딱딱한 것을 먹어야 해. 물론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지. 인생을 안이하게 살지 말고 씹어서, 씹어 삼키듯이 살라는 것이야.”
 
 
  1월 18일
 
부모님(가운데)과 5남 2녀의 가족 사진. 자전거 탄 꼬마가 여섯 살 이어령.
  이날 자리에는 출판사 관계자도 함께했다. 출판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선생이 별안간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슬픈 가정하에 앞으로 나올 《한국인 이야기》 후속편에 관한 당부가 이어졌다.
 
  선생의 길고 길었던 지적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한국인 이야기》는 현재 제1권 〈탄생 - 너 어디에서 왔니〉 편이 발간(2020년 2월)된 상태다. 앞으로 총 10권 발간이 목표다.
 
  우선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가제), 인공지능을 다룬 《알파고의 추억》(가제), 일제 강점기를 유년의 눈으로 들여다본 《회색 교실》(가제) 등을 차례로 출간할 계획이다.
 
  기자는 선생이 쓴 글과 전집 라이브러리, 각종 자료들, 신문 스크랩, 간단한 메모, 육성 녹음파일, PPT 파일, 동영상 파일 등을 모두 넘겨받았다. 방대한 자료였다. 읽고 이해하고 선생의 숨결로 재생산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일부 원고는 선생의 생전에 여러 차례 수정과 첨삭의 지난한 퇴고의 과정을 거쳐 90% 이상 완성된 상태다.
 
  다만, 선생이 기자에게 꼭 써달라고 당부한 ‘의·식·주(衣·食·住)’ ‘천·지·인(天·地·人)’ ‘진·선·미(眞·善·美)’와 관련된 주제의 ‘한국인 이야기’는 아직 날것 그대로다. 전혀 코딩이 안 된 빈 공책 같다.
 
  기자 업무 외에 퇴근 후 별도 작업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어설프게 글을 만지다 보면 선생이 바랐던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생이 구사하는 말의 밀도는 늘 상상을 초월했었다. 걱정이 태산이다. 선생은 “김 기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보태도 된다”고 허락은 했다.
 
  앞으로 긴 호흡을 갖고 선생의 자료들을 다독(多讀)·다상량(多商量)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월간조선》에 연재 형식으로 소개하는 방안도 고민해야겠다. 그렇게 되면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사후라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2월 4일
 
이어령 선생은 췌장암의 고통을 겪으며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거부했다. 사진=김용호 작가
  이날 오후 선생을 찾았다. 거의 보름 만이었다. 선생은 거동을 못 하는 상태였다. 거실 창을 바라보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사를 못 하고 물만 마신다고 측근이 전했다. 혹시나 선생은 일부러 곡기를 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선생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눈의 초점도 또렷해 보였다. 수수께끼 같은 비밀스러운 힘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대소변은 잘 나오는 거죠?
 
  “안 돼.”
 
  말문이 막혔다. 손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기부터가 취재가 되는 건데, ‘데자뷔’ 현상이 있어.”
 
  ― 예?
 
  “내가 처음 겪는 건데, 두 번째인 것처럼…, 그러니까 데자뷔처럼 계속 (사고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니까, 한 번 빠지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사람이 수렁이나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계속 같은 일[생각]을 반복한다고. 내가 지금 그렇게 돼버렸어. 데자뷔 병에 걸렸어. 그러니까 김 기자하고 이렇게 ‘액션’이 될 때는 그 현상이 멈춰. 그게 끝나면 전부 데자뷔처럼 돌아간다는 거지.
 
  그런 이상한 병에 내가 걸려 있는 거야. 그래도 김 기자와 만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 김 기자와 만나는 동안만은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좋고, 둘째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인터뷰)을 하게 되니까 좋고….”
 
  ― 저도 좋습니다. 다음 주에도 찾아뵐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데자뷔 병에 걸렸어”
 
  심리학에서 말하는 데자뷔 현상은 최초의 경험임에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고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나 환상을 말한다. 선생이 말하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적 사고가 데자뷔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사실과는 다른 생각,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異常)심리 현상을 겪고 있었다. 임계점에 이른 육체적 고통이 정신까지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때마침 선생의 전화로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개중에는 “3·9 대선 이후 향후 우리나라의 과제와 미래에 대해 생각을 듣고 싶다”는 방송사 기자의 전화도 있었다. 선생의 비서가 대신 전화를 받아 와병의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속으로 기자는 ‘선생이 건강하다면 얼마나 멋진 답을 할까’ 생각했다.
 
  며칠 전 출간된 선생의 저서 《메멘토 모리》를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책 뒷면 표사(表辭)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한 아이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죽지 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그의 어머니는 선생이 겨우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선생의 감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선생의 저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2010)에는 불안과 경계심이 가득한 열한 살 소년의 고백이 담겨 있다. 1943년, 어머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고비였던 시절, 어머니는 변변한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았다. 그런 경황에도 예쁜 필통과 귤을 보내왔다. 병문안 손님들이 가지고 온 귤을 먹지 않고 머리맡에 놓고 보다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어머니와 귤, 하얀 상자 속 유골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저서 《메멘토 모리》. 지난 1월 발간됐다.
  그러고 얼마 후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왔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소년 이어령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고 어머니와 함께 땅에 묻혔다. 선생은 《어머니를 위한…》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로 떠나시는 마지막 날 어머니는 나보고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다. 열한 살이었으니까 이젠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정말 다리가 아프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어린 것이라 늘 걸려 하셨는데 그만큼 자란 것을 확인하고 싶으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내 손을 가까이 느끼시며 마지막 작별을 하려고 하신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을 때의 어머니는 외로워 보이셨다.
 
  왜 그랬던가, 어머니에게 나는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제대로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나는 어머니의 신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인지 몰랐던 것이다.〉(24~25쪽)
 
  어쩌면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라는 선생의 말은 이별의 말조차 없이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담겨 있는 표현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선생은 책 제목 《메멘토 모리》를 마뜩잖게 여기는 듯했다.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가 제목이라 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는 선생의 음성이 점점 거칠어졌다.
 
  “책 제목이 ‘메멘토 모리’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한 말이야. 그래서 부활한 것이야.
 
  그리고 책 뒤표지에다 분명하게 썼잖아. 아이들이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해지면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죽지 마’, 그러면 엄마는 ‘너 두고 절대로 안 죽어’라고 말하잖아. 이게 책 제목이야.
 
  그래야 ‘메멘토 모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야. 참 큰일이네.
 
  그러니까, 내 얘기는… 메멘토 모리가 책 제목이 아니라니까….”
 
 
  2월 10일
 
  오늘은 이인화 교수와 함께 선생을 찾았다. 이 교수는 선생의 부탁으로 이어령 평전과 ‘디지로그’와 관련한 책 집필을 준비 중이었다. 이날 이 교수와 기자의 머리에 심어준 선생의 유언 같은 당부는 지면에 다 옮길 수 없다.
 
  우리는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2~3일 전쯤 한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측근이 전했다. 이후로 완전히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지금은 스스로 일어서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측근은 “선생이 탈수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거의 못 드세요. 알갱이 있는 것을 못 넘기시고 못 드시니까. 링거 일주일에 한 번 1000ml를 맞으시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물만 드신다고 보면 돼요. 못 드시니 배에서 항상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시는 겁니다. 배고플 때 나는 그 소리….”
 
  다소 그렁그렁해진 이인화 교수가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곱 살 때 선생님을 처음 뵀으니 올해로 반세기가 됐어요. 대구 대명동 영남대에서, 지금은 영남공업전문대 건물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뵈었습니다. 그때 《문학사상》을 창간하시고 1년 후인데 전국을 다니시면서 정기구독을 권하셨어요.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얼굴에 하얀 철 가면을 쓴 것 같은 젊은 신사의 모습이… 그때 얼마나 젊으셨는지….”
 
  이 교수는 여러 차례 선생과의 면담과 취재를 거쳐 200자 원고지 700장 분량의 평전을 최근 완성했다고 한다.
 
 
  2월 17일
 
  이날 오후 20여 분 정도 선생과 만났다.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 전 이인화 교수와 왔을 때보다 몸이 더 나빠 보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목이 타는지 물을 찾았고 입술만 조금 축이는 정도로 마셨다. 젖은 거즈를 입에 대었다. 목이 쉬었으며 기력을 다해 말하는 듯했다.
 
  답답한지 거실 창문을 열라고 했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멀리 북악산 능선이 긴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북악산 팔각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자주 평창동 언덕을 오르내렸지만 맞은편 산을 응시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우리는 숲의 숙영지라도 찾으려는 듯 북악산을 응시했다. 어느새 눈을 감은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세기 전쟁의 유혈과 통곡, 이념의 광기와 무지가 몰아치던 시대에 진지한 통찰의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권위를 내세운 세력의 이끌림이나 억지로 강요된, 어리석고 거창한 호언(豪言) 대신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던 지성인이었다.
 
  알맹이 없고 상투적인 글과 말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런 경우가 없었고, 구설에 오른 적도 없었다. 대신 좌와 우, 어느 편에 몸을 담지 않아 양쪽 모두에게 배척을 당했다. 외로웠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이런 일도 있었다. 지인이 10대 손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선생이 자신의 저서에다 사인을 해 줬는데 몇 장 들춰보다 말고 “할아버지, 글 잘 쓰시네요” 하더란다.
 
  책도 방송도 안 보는 아이여서 선생이 누군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선생은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그랬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학계에서 이어령 사단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잠시 선생의 연대기적 흔적을 그려보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논객으로 등장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한국 지성사에 일찌감치 금자탑을 세웠다.
 
  1967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벽을 넘어서’를 기치로 88서울올림픽의 개폐회식을 기획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IT 강국의 정신적 기반을 제시했으며 ‘디지로그 선언’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명 융합을 이끌었다. 80대에 들어선 ‘한국인 이야기’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런 거인이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서편을 향해 이제는 졸리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2월 23일
 
  오후 2시쯤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측근에 따르면 전날 호흡이 잠시 정지되었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선생에게 “고비를 잘 넘기셨다. 생명의 봄이 오면 몸이 반응하여 좋아지실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달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혹시 당선자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신지 조금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정치와 관련해 묻거나 화제로 꺼낸 적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이 조금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고 느껴졌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 미국 대통령의 경우는 대개 변호사 출신들이야.”
 
  ― 맞습니다.
 
  “변호사는 위임자가….”
 
  ― 위임된 총잡이라고 하지요.
 
  “투표권자는 위임자야.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옹호자야. 여(與)나 야(野)나.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리더를 선지자들이라 부르지.
 
  그 차이가 뭔지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와 위임받은 리더는 달라요. 예를 들면 지금 총을 가졌어. 강도가. 아주 흉악범이야. 이 사람을 죽이면 많은 이가 살 수 있어. 그런데 총에 맞아 병원에 왔어. 의사는 어떻게 해야 돼?”
 
  ― 그래도 의사라는 직분에 충실해야….
 
  “의사는 의사야. 수술을 해야 해. 환자는 고통받는 자야. 도와줘야 되느냐 안 도와줘야 되느냐? 도와주는 거야.”
 
 
  파뿌리 하나의 의미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이어령 선생. 외출하기 위해 서울 평창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는 살려야 해. 그게 크리스천의 정신이자 휴머니즘이고 다른 직업과 다른 거야. 내가 늘 얘기하는 파뿌리.… 파뿌리 하나야.”
 
  선생의 ‘파뿌리’ 비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소설 속 완벽한 성인이라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는다.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그의 시체가 썩어 들었다.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는 큰 절망에 빠진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 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음은 《메멘토 모리》에 실린 선생의 육성이다.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뿌리 하나야, 어서 와.”〉(30쪽)
 
  선생이 말한 ‘파뿌리 하나’의 당부는 자기편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렸다. 위임된 변호사형 리더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선지자가 되어, 누구에게나 ‘파뿌리 하나’를 건넬 수 있는, 건넬 줄 아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 앞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념의 갈등이 사라질까요?
 
  “(한반도가) 씨 파워[해양세력]와 랜드 파워[대륙세력]의 지정학적 ○○(목소리가 낮아 들리지 않았다.)인데 이게 코로나 때문에 더 심해졌어. 소셜라이즈화[사람들을 더 통제하게]됐다는 거지. 정부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선생은 지치는 듯했다. 낮은 목소리가 어느덧 날카로워졌다. 거의 들리지 않아 문장으로 옮기는 데 의역이 필요했다.
 
  “이따만한 큰 나무 아래 사는 것은 좋은 게 아니야. 바람을 많이 타고…. 대나무가 웃어, 대나무가. ‘이 병신들아. 바람이 불면 난 휘어’. 이따만한 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버려. (덩치 큰) 주먹(나무)들을 보고 풀이 웃어. ‘덩치가 크면 뭘 해?’라고.
 
  1년생 초목들을 보라. 장엄한 새 생명일세.”
 
  선생이 말한 ‘큰 나무’가 정부의 방역독재를 비판하려는 의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고쳐 물어볼 수 없었다. 이미 기력이 고갈한 상태였다. 기자가 듣기로는 ‘어린 초목’으로 상징되는 혹은 ‘파뿌리 하나’와 같은 생명, 다수 국민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이 아닐까.
 
  기자는 선생에게 인사하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일어섰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그 말이 기자가 들은 선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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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골샌님    (2022-04-04) 찬성 : 0   반대 : 0
패럴리즘 아닌 패러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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