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심층 분석

北送사업 실체 밝힌 북한인권시민연합 보고서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강제이주이자 현대판 인신매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北, 조총련 앞세워 在日동포 노예로 만들어
⊙ 日, 韓日 외교 마찰 피하려 국제적십자위원회 통해 北送
⊙ 北送者의 80% 이상은 38선 以南 출신
⊙ 인권은 인류 보편적 가치… 左右 문제 아니야
⊙ 북송사업 책임 주체는 북한·조총련·일본·소련·국제적십자사
⊙ 日, 정부 차원 위원회 구성해 진실 규명해야
1959년 12월 14일, 재일동포 975명은 지상낙원을 꿈꾼 채 니가타항에서 생지옥행 편도선에 올랐다. 사진=《마이니치 신문》
  2020년 11월 9일 북한인권시민연합(시민연합·이사장 김석우)은 영문(英文) 보고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저자 김소희・이지윤)을 발표하고 ‘재일(在日)교포 북송(北送)사업(이하 북송사업)’의 실체를 공개했다. 현재 한국어로 된 보고서 발표를 위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다.
 
  북송사업은 일본과 북한이 맺은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간 187회에 걸쳐 재일동포 9만4340명(일본인 6839명 포함)을 입북(入北)시킨 사건을 말한다.
 
  북송사업은 일본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의 자발적 귀국을 지원하는 ‘귀국사업’, 인도주의 사업으로 포장돼 왔다.
 
  저자들은 “북송사업은 인도적 귀국사업이 아닌 사실상의 강제이주, 노예화 또는 현대적 개념의 인신매매”라고 밝힌다.
 
  보고서(영문판 기준 106페이지)가 완성되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처음부터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북송사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계획은 아니었다. 시작은 UN 등 국제 인권기구에 진정서를 접수할 때 첨부할 5~10페이지짜리 ‘요약본’이었다.
 

  저자들은 “조사하면 할수록 북송사업의 실체를 밝힐 단서가 모여들었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북송사업의 진실을 퍼즐 맞추듯 맞춰나갔다”고 했다. 여기에 코로나19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국제 인권 운동 활동이 축소되자 ‘북송사업 보고서 만들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공저자인 시민연합 국제협력캠페인팀 김소희 선임간사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부터 탈북자 수기를 찾아 읽는 게 취미였다. 북한과 북한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참에 권유를 받고 2013년 시민연합에서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김 간사는 “북한 인권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민연합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인권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며 “납북자라는 단어도 이곳에서 일하며 처음 접했다”고 했다. 북한 인권에 대한 호기심이 지금은 생업이 됐다.
 
  김 간사는 2016년 석사 논문으로 〈북한이탈주민 20·30대의 이념구성 요인 분석: 남한 20·30대와 비교〉를 썼다.
 
  공저자인 국제협력캠페인팀 이지윤 간사는 2017년부터 시민연합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석사 과정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며 단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 방안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이 간사는 “졸업을 할 때쯤 개인 차원에서는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고 생각했다”며 “북한 인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단계적·평화적 통일도 이뤄지기 어렵다고 느껴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민연합에서 근무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제협력캠페인팀은 북한이 저지른 강제실종 문제와 관련해 전후 납북자 진정서 제출, 인권 옹호(human right advocacy) 운동 등을 한다.
 
  인권 침해 피해 사례를 모아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UN Working Group on Enforced or Involuntary Disappearances·WGEID)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일도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시인 박노해 등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됐던 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가 현재 WGEID 의장이다.
 
  강제실종이란 국가기관, 국가 요원 또는 국가의 역할을 자임하는 단체가 피해자를 체포·구금·납치해 실종시킨 뒤 이를 인정하지 않는 범죄 행위를 뜻한다.
 
 
  코로나19 때문에 탄생한 보고서
 
북한인권시민연합 김소희 선임간사. 사진=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 어떻게 보고서를 만들게 됐습니까.
 
  김소희(이하 김): “캠페인팀에서 강제실종 문제는 주로 전후(戰後) 납북자 문제를 다뤘어요. 지금까지 WGEID 등 국제 인권기구에 100여 건의 진정서를 제출했죠. 전후 납북자 문제를 조사하던 중 재일동포에게 북송사건에 대해 듣게 됐죠.”
 
  이지윤(이하 이): “일본에 거주하는 어떤 분이 ‘강제실종 피해자’라고 하시며 북송사건과 관련해 WGEID에 개인 진정서를 내고 싶다고 했어요. 사례 수집을 위해 일본에 가니 북송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엔 인권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UNHRC)에서 부대 행사로 납북자 문제, 강제실종, 북송사건 등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가 예정돼 있었죠. 이때 발표할 목적으로 5~10페이지 분량의 요약본(summary)을 만들 계획을 짰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행사가 취소돼버렸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조사해보자’고 마음먹고는 북송사업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죠. 양이 점점 늘었고 2년이나 걸렸습니다.”
 
  보고서에 등장하는 증언자는 19명이다. 저자는 증언자들과 인터뷰해 개인정보 식별이 가능한 북송 강제실종 사례 102건(강제실종 피해자 가족 증언 17건, 목격 사례 85건)을 수집했다.
 
 
  북송사업은 노예무역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지윤 간사. 사진=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 북송사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김: ‘북송사업은 노예무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사, 국제적십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ICRC), 소련 등의 동조와 묵인, 지원이 있었죠. 북송자(北送者)들은 결과적으로 노예화(奴隷化)됐습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노예무역의 전위대(前衛隊) 역할을 했습니다.”
 
  — 김일성은 왜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불러들였습니까.
 
  김: “정치적·외교적·경제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1958년 김일성이 펠리센코(V. Pelisenko) 주평양 소련 대리대사와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죠.”
 
  —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이: “북한 입장에서 대규모 재일동포 입북(入北)은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한 체제라는 점을 내보일 수 있는 방안이었습니다. 국제사회에는 인도주의적인 모습도 부각할 수 있고요.
 
  경제적으로는 재일동포를 활용해 전후 국가 재건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력,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었죠. 이 때문에 북한은 조총련을 앞세워 기술자, 지식인, 자본가, 기업가 등을 북송사업의 주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 일본 정부는 북송을 왜 방관했습니까.
 
  김: “방관이라는 단어는 책임을 묻기에 부족한 단어입니다. 일본이 가장 먼저 북송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일본은 1952년 재일조선인(재일동포)의 시민권을 박탈합니다. 이 때문에 재일동포는 굉장히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 됐죠. 일본 정부도 재일동포를 시한폭탄과 같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당시 일본에는 재일동포 약 240만 명이 거주했다. 광복 직후 상당수가 귀국해 잔류 재일동포는 60만~70만 명 수준이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체결 이후 재일동포들은 국적을 박탈당했다.
 
 
  北, 北送으로 韓日 국교 정상화 방해
 
  김: “북한이 북송사업을 통해 일본과의 외교를 더욱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북한은 재일동포 안위와 북송사업을 논의한다는 구실로 일본을 설득해 조선적십자사의 일본 주재(駐在)를 허가받고 양국 간 비공식적 외교 경로를 마련했죠. 이는 당시 세 차례의 양자 회담을 통해 진전되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저지하는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 한국 정부는 왜 재일동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까.
 
  이: “당시 이승만 정부는 재외동포를 수용할 재정이나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재일동포들이 한국이 아닌 북한으로 대규모 이주할 경우 한반도에서 정통성을 가진 나라가 북한이 될 것을 우려해 북송사업을 강력히 반대했죠.”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공작원을 파견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 한국 정부가 항의했지만 일본은 북송을 강행했습니다.
 
  김: “당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논하던 시기였기에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개입할 순 없었습니다. 일본은 외교 마찰을 피하고자 북송사업 중개자로 국제적십자사가 적극 개입하길 원했죠. 일본 적십자사를 통해서는 북한 조선적십자사와 협력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적십자를 통로로 삼아 북송사업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독립된 인도적 귀국 운동으로 포장했습니다.”
 
  이: “일본 적십자사는 사실상 일본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외교관 출신으로 일본 적십자사 외무부장으로 선출된 이노우에 마스타로는 조총련이 북송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3년 전인 1955년에 이미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북송사업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죠.”
 
  — ‘ICRC가 개입했다’는 내용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국제적십자는 인도주의 활동을 하는 단체 아닙니까.
 
  김: “ICRC는 북송사업 시작 전부터 이미 그 성격이 인도적이 아닌 정치적이라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묵인했습니다.
 
  ICRC는 북송 신청 절차, 귀환안내서 작성 및 배포 등 본국(입북) 송환사업 절차에 대한 관리·감독 의무를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사에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했죠.”
 
  — 어떻게 회피했습니까.
 
  이: “북송 희망자들은 북송선에 탑승하기 전 3박 4일 동안 니가타에 위치한 일본 적십자센터에 머물렀습니다. 당초 일본 적십자사가 이곳을 관리하는 데 합의했지만, 조총련이 적십자센터에 상주하며 실질적으로 북송 업무를 맡아 진행했습니다. 이 때문에 ICRC가 북송선 승선 의사를 확인하는 최종 의사 확인 절차는 형식적으로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북송자들은 협박과 강요에 시달렸습니다. 북송 결정을 철회하는 것에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김: “‘귀환안내’를 보면, ‘귀환 희망자는 일본 적십자가 정한 귀환 신청서를 본인이 직접 일본 적십자사에 제출하고 필요한 귀환 신청을 스스로 진행해야 한다’고 했지만 조총련 관계자들이 대리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총련, 北送 서류 代筆
 
  보고서에 등장하는 증언자 ER#1의 이야기다.
 
  “재일동포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일체 수속은 대부분 조총련이 대리해 진행했어요. 저처럼 조총련을 통하지 않고 신청한 사람은 정말 드물었죠.”
 
  일본 정부와 ICRC 대표단은 북송자들이 일본 적십자센터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ICRC 대표단이 일본 경찰에게 받은 극비 메모가 실려 있다.
 
  “현행 귀국사업(북송사업)은 일본에서 북한 정부를 대신해서 조총련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 북한 정부에 의해 결정되고 조총련에 의해 적용된 방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는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에서는 당국에서, 일본에서는 조총련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가 없다.”(보르싱거가 ICRC 앞으로 보낸 극비 메모)
 
  — 적십자센터에서는 북송 희망 의사를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이: “최종 의사 확인 절차가 이루어지는 ‘특별실’에는 한 사람씩 들어가지 않고, 가구 단위로 들어갔어요. 재일동포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 북송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이는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자발적인 의사 표출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됐죠.
 
  특별실은 밀실(密室)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무용 방에 문을 떼어낸 채 칸막이만 두고 목소리는 (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표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북송 의사를 확인하는 질문도 ‘이 게시문을 잘 이해하셨고 변함없으시지요?’라는 질문으로 한정됐죠.”
 
  이지윤 간사는 “ICRC가 참관했던 북송자의 마지막 의사 확인도 의례적이었다”며 “ICRC도 북송사업의 정치적 맥락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ICRC는 1863년에 설립된 국제 인도주의 기구이다. ICRC는 “무력충돌 상황에서 중립적 중재자로서, 자발적으로 혹은 제네바협약을 근간으로 국제적·비국제적인 무력분쟁, 내란 혹은 긴장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한다”고 밝힌다.
 
 
  北送船 거부하면 물리력 동원
 
1959년 2월, 재일동포 북송을 반대하는 시위가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사진=조선DB
  조총련 출신 장명수씨 증언에 따르면, 북송선 출항을 앞두곤 북송 의사를 철회하는 사람이 매번 나왔다. 조총련은 이를 ‘불명예스러운 사태’로 규정하고 ‘의사 변경’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했다.
 
  조총련은 북송을 두고 동요하는 사람(의사 변경자)을 사전 조사해 북송선이 출발하기 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장씨는 처음에는 설득으로 시작했지만, 설득을 통해서도 의사를 변경하지 않는 이에게는 거짓말을 하거나 물리력을 동원해 승선시켰다고 했다.
 
  장씨의 증언이다.
 
  “그럴 때(승선을 거부하는 의사 변경자가 있으면)는 내가 나섰다. ‘부모의 처지를 생각해서 배에 타기까지만 하라. 내가 배에서 내리게 해줄 테니까.’ 이 경우 자유로이 드나드는 내 권위를 내세워 귀국선(북송선)에 출입하는 완장을 건네기도 했다. 대개의 사람은 내 말을 믿고 귀국선에 탔다. 귀국선 측도 그런 사정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특별하게 처리해줬다.”
 
  ‘특별 처리’는 북송선에서 내리려는 의사 변경자를 물리력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의미다.
 
  — 소련은 북송사업에 어떻게 관여했습니까.
 
  김: “소련은 1959년 12월 14일 처음 북송선이 출항할 때부터 선박을 제공했습니다. 북송사업 초기만 해도 북한은 대규모 인원을 실을 선박이 없었죠. 다른 국가들도 한국이 강하게 반대해 자국 선박을 지원하지 않았고요. 1971년 북한이 만경봉호(號)를 건조하기 전까지 북송사업은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 “소련 해군이 나서 북송선을 호위했습니다. 첫 번째 북송선 출항 하루 전인 1959년 12월 13일, 한국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한국 해군에 경계 태세를 내렸습니다. 이에 소련은 ‘만약 배가 공격받는다면 적십자사기(旗)와 소련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죠.
 
  또 북한 적십자 협상단이 제네바에 체류할 때 비용 등을 부담해주며 북송사업을 전폭 지원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은 북송을 희망했을까. 1956년 2월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의는 ‘귀국 희망자에 관한 문제’ 심의에서 북송을 원하는 인원을 ‘일반 귀국 희망자 1100명,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된 귀국 희망자 71명, 부재자 가족 120명, 진학 희망 학생 133명’으로 봤다.
 
 
  나카도메 결의
 
  1959년 12월 14일, 재일동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니가타항을 출항하기 1년 전까지만 해도 북송 희망자는 많지 않았다. 재일동포 대다수는 남한 출신이었기에 북한에는 연고가 없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총련도 1958년 이전에는 일본 내 재일동포 생활 안정에 주력했다. 하지만 1958년 8월 11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나카도메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이 집회를 열어 북한으로 갈 것을 결의하고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나카도메 결의’다. 이에 북한도 호응하며 재일동포 ‘귀국’에 관심을 표명한다.
 
  보고서는 “재일교포들이 북송을 희망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 집회로 알려진 나카도메 결의는 사실 북한의 철저한 기획하에 진행된 각본 있는 드라마”라고 했다.
 
  나카도메 결의 다음 날인 1958년 8월 12일, 김일성은 소련 펠리센코 대사에게 “재일조선인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 문제는 재일조선인들 자신이 직접 제기한다. 이후 조총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해당 요청을 제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성명이 뒤따를 것”이라고 북한의 계획을 알렸다.
 

  보고서는 “북한이 조총련을 이용해 북송 의사를 재일교포 사회의 열망으로 둔갑시킨 후, 실제로 북송선에 오를 재일교포 모집에 착수했다. 북송 대상자 모집은 북한과 조총련에 의해 체계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진행됐다”고 했다.
 
  재일동포 북송 전위대 조총련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며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을 선전하고 재일동포별로 맞춤형 선전사업을 벌였다.
 
  남한이 고향인 증언자 ER#2의 아버지의 경우 “곧 통일되니 먼저 북쪽에 있다가 통일되면 그때 남쪽으로 내려가면 된다”며 입북 설득을 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는 증언자 ER#6의 누나에게는 “우리 공화국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무상교육이 가능하다”고 선전하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대학 졸업장을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고 한다.
 
 
  재일동포 중 기술자·기업인 집중 공략
 
  재일동포 전체를 대상으로 벌인 선전 활동은 북송사업 시작 1년 후 방향이 바뀌었다. 북한은 조총련을 앞세워 전후 복구 사업에 필요한 기술자, 사업가, 지식인 등 엘리트 계층을 공략해나갔다. 당시 북한은 ‘7개년 경제 건설’을 추진 중이었다.
 
  조총련은 일본 각지에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지역별, 직업별로 25~60명씩 ‘귀국집단’을 조직해 이들을 북송시켰다. 오사카에서는 비닐가공기술 집단, 미싱제조업자 집단, 메리야스 집단, 비닐제화 집단, 양말 집단, 교토에서는 니시진 비단 집단, 아이치에서는 어망 집단, 베니어판 집단, 도장도금 집단, 제본인쇄 집단 등 갖가지 직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조직돼 북송됐다.
 
  북송 재일동포 후손인 증언자 ER#7 의 증언에 따르면, 기술자였던 조부 역시 조총련 선전 활동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제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부유한 기술자였어요. 할아버지는 일본인으로 귀화했기에 조총련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죠. 그런데 할머니 쪽은 완전 골수 조총련계였어요. 조총련 소속 외삼촌 할아버지가 성공한 사업가였던 할아버지를 목표물로 삼아 북한으로 가라고 계속 회유했어요. 북한에 가면 차별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고 선전했죠.”
 
  자본가 중 거물급은 공작 활동을 통해 공략했다. 자본가의 가족을 북한으로 데려간 뒤 자본가에게서 자금을 유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른바 ‘인질 경제’였다.
 
  조총련이 선전한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었지만 재일동포 사회의 일반 대중, 지식인 모두 조총련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조총련 간부 자제 합숙
 
2019년 재일동포 강제 북송사업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적십자센터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김소희 선임간사, 이지윤 간사, 박향수씨. 사진=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조총련 간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은 조총련 간부들이 변절할까 간부 자녀들도 북송 대상에 포함했다. 공식 명칭은 ‘조총련 간부 자제 합숙’이다. 조총련 간부를 부모로 둔 자식들은 홀로 북송선에 올라야 했다. 혹시나 변절할까 조총련 간부를 인질로 삼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총련이 열성적으로 선전사업을 벌인 결과 첫 번째 북송선이 출발한 1959년 12월 14일부터 1960년까지 전체 북송자 중 절반이 넘는 5만1978명이 북한으로 갔다. 하지만 1961년 중반부터 북송자 수는 급감했다.
 
  북송자는 1961년 11월 8156명에서 12월에는 278명으로 급감했고 승선율(할당 인원과 북송 인원의 비율)도 7월에 60% 이하로 떨어진 이후 12월에는 8%로 감소했다. 이렇게 북송자 수가 급감한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북한이 기술자나 기업가, 지식인 등과 같은 엘리트 재일동포를 모집하는 것으로 전략 방향을 변경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북한에 간 북송자들이 전해온 북한의 실상이 일본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북(日北) 간 맺은 북송협정에 따라 1959년 12월 14일 재일동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니가타항에서 출항한 뒤 187회에 걸쳐 총 9만3340명이 북송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업 초기 3년 동안 전체 인원 중 81%가 북송됐다. 이들의 출신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북한 정부의 공식 발표인 조선중앙연감에 1962년 3월까지 입북한 북송자 7만5057명 중 95.9%가 남한 출신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미뤄 북송자 대부분이 38선 이남 출신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송자 9만3340명 중 6730명은 재일동포의 일본인 국적 배우자 또는 자녀들이었다. 이 중 재일동포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처는 1831명이었다. 이들은 지상낙원을 꿈꾸며 북송선에 몸을 실었지만, 이 배는 생지옥으로 가는 편도선(片道船)이었다.
 
  — 보고서를 만들 때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김: “강제실종 피해자나 그 가족을 만나는 게 쉽지 않죠. 강제실종을 겪은 뒤 연좌제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죠.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는 걸 꺼립니다. 또 만난다고 해도 바뀌는 게 없으니까요. 자료 수집이나 조사를 위해선 인터뷰를 많이 해야 하는데, 북송사업이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사람을 만나기도 참 어렵습니다. 의사소통도 쉽지 않아 일본에 있는 인권 단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 보고서에 담긴 증언은 신뢰할 수 있습니까.
 
  이: “기존 연구를 참조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와 문헌을 확보한 뒤 교차 검증했습니다. 엠네스티가 북한에 직접 들어가 획득한 자료도 활용했죠. 그동안 축적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강제실종이나 북한 정권이 저지른 인권 침해의 특성을 패턴화(유형화)해 분석했습니다.”
 
  김: “무엇보다 피해자의 증언이 가장 강력한 증거죠. 강제실종은 사람이 곧 증거입니다. 유가족이 있다면 이들의 기억이 바로 증거가 됩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면 여러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보완해나갔습니다.”
 
 
  “열기구를 보내달라”
 
1996년 두 번째로 방북 당시 외삼촌 가족을 만난 박향수씨. 외삼촌은 사진에 없다. 박씨를 제외한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다. 사진=박향수씨 제공
  — 기억에 남는 피해자 증언이 있습니까.
 
  김: “박향수씨가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 경험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박씨는 재일동포 3세다. 외삼촌이 북송선을 탔다. 외삼촌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박씨는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두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다.
 
  지난해 12월 4일 토크 콘서트 ‘가라앉은 북송선의 꿈’에서 박씨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말했다.
 
  “외삼촌은 1967년 고베 조선학교에 다니던 중 홀로 북송선을 탔습니다. 당시는 북송 운동 열기가 식은 시점입니다만, 학교에서 사귀었던 여학생이 입북하는 바람에 삼촌도 그 여학생을 따라가듯 북한으로 갔습니다. 가족들이 반대하자 삼촌은 ‘북한이 싫으면 몇 년 후 탈북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한테 듣기로는 외삼촌이 북한에 도착한 뒤 처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보내달라. 열기구가 있으면 보내달라.’
 
  아마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서라도 일본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지를 읽고 가족들은 그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외삼촌에게 생활비와 각종 생필품을 보냈습니다.
 
북한에 거주하는 박향수씨 외삼촌이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사진=박향수씨 제공
  저는 1990년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차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했어요. 많은 현금과 짐을 들고 니가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갔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촌 동생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입던 빨간 원피스를 11세짜리 막내 여동생이 입고 있었거든요. 그 아이가 제게 자신도 ‘일본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 걸 잊을 수가 없어요.
 
  1996년 여름에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외삼촌은 만날 수 없었고 외숙모와 사촌 동생 3명만을 만났습니다. 21세였던 둘째 동생이 제게 일본어로 이렇게 속삭였어요.
 
  ‘누나 게슈타포라고 알아? 아빠는 아무 죄도 없는데 그런 곳으로 끌려갔어.’
 
  2017년에야 전해 듣게 된 내용인데, 삼촌이 사라진 그해 설에 삼촌은 국제전화가 도청당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일본에 있는 형에게 ‘루마니아도 붕괴돼 인민의 손에 독재자가 처형당했다. 북한도 오래 못 간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와 어머니가 외삼촌을 북한에서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이미 외삼촌은 돌아가셨던 거였습니다. 얼마 뒤 외숙모와 사촌 동생들도 요덕수용소로 끌려갔고, 더는 외삼촌 가족 소식을 접할 수 없게 됐습니다.”
 
 
  북송사업 진실 규명, 일본 정부가 나서야
 
1988년 조총련 결성 30주년 기념식.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가운데 있다.
  — 북송자 중 탈북한 이는 얼마나 됩니까.
 
  김: “한국에 100~200명가량, 일본에 약 200명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소희 선임간사는 일본 정부가 나서 국가 차원에서 북송사업 문제를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북송 재일동포와 관련된 자료는 일본 법무성이 갖고 있어요. 일본 적십자사는 북송 재일동포에 관한 자료를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제공하지 않죠. 연령이나 성별 비율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북송사업에 대한 규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2월 14일 북송사업 62주년을 맞아 유엔 강제실종실무그룹(WGEID)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북한 정부에 ▲현재까지 실종된 북송자들의 생사 및 행방 공개 ▲실질적 수사 시작 및 가해자 책임 규명 ▲이산가족 교류 창구 재정립 등을 촉구했다.
 
  이지윤 간사는 “국제사회가 북송사업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또 “북한은 WGEID가 요구한 내용만이라도 협력해 이행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 더 많은 분이 북송사업의 책임은 이를 기획하고 실행한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북송자들은 피해자들입니다. 일부에서는 북송자들이 자발적으로 북송을 선택했기에 책임도 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겁니다. 만약 제가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동포였다면 저 역시 북송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북한에서 예정된 삶은 차별과 착취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들이 자발적으로 북송선에 올랐을까요? 북송사업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랍니다.”
 
  김소희 선임간사와 이지윤 간사는 “한국에선 북한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바라봐 안타깝다”고 했다.
 
  이 간사는 “인간이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함에도 한국에선 정치적인 문제로 받아들여 충격을 받았다”며 “북송사업 문제 역시 보편적 인권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김 선임간사는 “이번 보고서는 북한과 조총련이 결탁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뒀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납북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보듬고 북송사업의 진실을 규명하는 거예요. 이를 통해 북송사업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지길 희망합니다. 앞으로도 국제사회에 북송사업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강제북송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국내에서도 북송사업에 관한 다양한 논의 및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하겠습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