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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대구 지하철참사 10주기 - 우리에게 남긴 것은

제대로 된 백서나 위령탑조차 없어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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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매일신문사 제공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에서 숨진 희생자의 시신을 소방대원들이 중앙로역 밖으로 옮기고 있다.
  2003년 2월 18일. 여느 때와 별다를 것 없는 화요일 아침이었다. 대구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김충국 목사는 여느 때처럼 교회에 가 새벽 기도를 했다. 몇 가지 사소한 일이 있었다. 감기에 걸렸는지 김 목사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졸음이 쏟아져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교회 강대상에 잠시 기댄다는 게 일어나 보니 벌써 몇 시간이 흘러버렸다. 사택에 가보니 둘째 지현이는 이미 학원에 가버리고 없었다. 아내가 언뜻 아침에 지현이와 투닥거렸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안 했던가.
 
  지현이가 다니는 학원은 중앙통에 있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첫째 아이와 중학교 2학년을 앞둔 지현이는 같은 학원에 함께 다니고 있었다. 첫째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검정고시 시험일이 다가오고 있어서였을까. 공부할 게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유족, 김충국씨 이야기
 
2003년 2월 18일 불이 번지기 직전 연기가 들어찬 1080호 전동차의 내부 모습. 이미 자욱해진 연기 속에서 침착하게 앉아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사진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생존자 유호정씨가 자신의 카메라로 촬영해 매일신문사에 제공했다. 참사 직전의 모습을 담은 거의 유일한 사진으로, 당시 거의 모든 일간지의 1면에 실렸다.
  낮 12시가 조금 넘었을 시각, TV를 틀었는데 난리가 났다. 중앙로역에 불이 났단다. 아이의 학원은 중앙로역 부근이다. 아이는 지하철을 타고 갔다. 혹시나 해서 학원에 전화를 했다.
 
  “지현이 학원 잘 갔습니까?”, “어데요, 안 왔는데요.”
 
  지현이는 휴대전화도 안 가지고 다녔다. 강하게 키운다고 휴대전화 하나 안 사준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대책위원회에 수십 번 전화를 했다. 아이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김 목사는 다급해졌다. 중앙로역으로 달려갔다. 중앙로역 근방은 아수라장이었다.
 
  봄이 성큼 다가온 건지, 날씨가 전날보다 풀려 있었다. 그것 빼고는, 사소한 몇 가지 일 빼고는 별다를 것 없던 하루였는데, 그 하루가 이렇게 길게 계속될 줄은 몰랐다.
 
  기억이 원근법의 질서를 벗어난 걸까. 10년 전 어떤 일은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 뒤의 어떤 일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게 있다. 도시락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온 법의관들이 아이의 복장과 신체 특징 같은 걸 알려달라고 했다. ‘도시락을 들고 나갔음.’
 
  유골 옆에 아이의 도시락이 있었단다. 수저와 반찬통. 또래에 비해 체구가 유난히 작은 아이였다. 시신 안치소가 임시로 차려진 월배차량기지에서 아이의 유골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이 일기장에서 본 구절도 기억난다. ‘참고서가 필요한데 세금 못 내 걱정하시는 부모님 얘기를 듣고서는 말을 못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아이 엄마는 4년 전 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살아 있을 때, 아내는 그날 아침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지현이는 그날 아침 유별나게 굴었다고 한다. 학원 가기 싫다고, 오후에 가면 안 되냐고 떼를 썼다고 한다. 아이를 꾸짖어 억지로 학원에 보낸 그날 이후 아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김 목사와 같은 삶이었다면, 사람들과 멀쩡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지하철에 갇힌 채 고통에 몸부림쳤을 아이가 생각나 엉엉 울음이 터지는,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어느 한순간 2003년 2월 18일로 돌아가 버리는 그런 삶이었으리라.
 
 
  대구 소방관들의 이야기
 
완전히 타버려 흉측하게 변한 전동차 내부 모습.
  2003년 2월 18일 아침 9시55분 북부 소방서. 아침 조회가 끝나고 소방관들은 각자 장비 점검을 하고 있었다. 장비 점검을 마칠 무렵, 출동 지령이 울렸다. “중앙로역에 화재 발생, 출동하라.” 서봉수 소방교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콘크리트뿐인 지하철역에서 무슨 화재가 났을까.’ 황윤찬 소방위도 ‘보통 발생하는 간단한 화재겠지…’라고 생각하며 소방차를 탔다. 서 소방교를 포함해 7명의 대원이 중앙로역으로 향했다.
 
  중앙로역은 행정상으로는 대구 중부소방서 관할이지만, 위치상으로는 북부소방서와 더 가깝다. 약 500m 거리다. 북부서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150m 가량을 가서 코너를 돌면 중앙로 지하역사가 있는 거리가 보인다. 소방차가 코너를 도는 순간, 시커멓게 하늘로 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서 소방교는 생각했다. ‘아, 뭔가 잘못됐구나.’
 
  소방차 안이 급해졌다. “라이트 라인 준비해!”, “방호복 입어라!”, “선착으로 먼저 들어갈 테니 후착 준비해라.” 라이트 라인(Light Line)은 지하 공간 등 어두운 곳을 진입할 때, 바닥에 늘어뜨리면 빛을 내는 줄이다. 바쁜 지시가 몇 번 오가니 벌써 중앙로역 4번 출구 도착. 그때 시각이 9시58분,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대였다.
 
  코밑이 새까매진 사람들이 출구 계단으로 올라와 푹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 큰일 났구나’ 서 소방교는 생각했다.
 
  중앙로역은 지하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 1층과 2층은 대합실이고 3층이 열차를 타는 승강장이다. 소방대원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지하 3층에서 난 불로 인해 지하 2층과 1층은 모두 농연(濃煙·짙은 연기)에 차 있었다. 대합실 천장의 불은 모두 켜져 있었지만, 연기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 라이트 라인을 깔며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까만 농연이 얼마나 심한지 공기호흡기의 공기잔량을 표시하는 표시계도 잘 안 보였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바닥에 쓰러진 채 부르는 사람도 있고, 위치상 벽을 잡고 서서 부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육안으로는 그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믿었던 라이트 라인은 제 역할을 못했다. 소방대원들은 소리를 질렀다. “구조대원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제 쪽으로 오세요!” 계속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이들을 계단 쪽으로 유도해 내보냈다. 사람들을 내보내고 잠시 조용해졌을까, 바닥 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일 수조차 없어 바닥에 쓰러진 채 하는 구조 요청이었다. 연기 속에서 누군가 발목을 잡았다. 또 다른 생존자였다. 이 사람들을 찾아 끌고, 메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그런 다음 연기가 점거해 버린 지하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때는, 더 이상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처 구하지 못한 희생자 잊을 수 없어
 
오열하는 유가족. 그날의 사고로 192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흐르고, 중부 소방서 등 다른 곳의 소방서의 구조대원들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더듬더듬 지하 1층과 2층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을 수색하고 있는 구조대원들에게 다급한 소식이 날아왔다. ‘지하 3층에 생존자 15명가량이 갇혀 있다고 함!’ 비보일까, 낭보일까. 그곳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동차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으리라고는. 그것도 그렇게 많이 갇혀 있으리라고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모두 대피했겠지, 생각했다.
 
  지하 3층 승강장은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거듭 진입에 실패했다. 앞은 보이지 않고 공기호흡기의 공기잔량은 너무 적었다. 당시 쓰인 공기호흡기는 한번 충전하면 20분에서 30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생존자가 쓸 공기호흡기를 손에 들고 몇 번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을까.
 
  몇 번을 재진입해 어둠 속을 헤매다 나온 A구조대원의 눈에 무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대원이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할 수 있겠나, 네가 못 가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없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를 믿고 가자.”
 
  무슨 말을 한들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공기호흡기 속 산소가 고갈되면 생명의 끈도 끊긴다. 그렇지만 생명의 끈을 잡고 버티고 있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6명의 ‘특공대’가 조직됐다. 중앙로역과 바로 연결돼 있는 ‘대구역’으로 갔다. 거기서부터 선로를 따라 중앙로역으로 들어갔다. 선로 길이는 860m. 지하철 역사 내 지리를 잘 아는 역사 직원과 함께였다. 중앙로역을 100m 남짓 남긴 지점. 드디어 연기가 앞을 막아섰다. 앞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들어가서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바닥에 숨져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특공대에 포함된 구조대원 B씨는 생존자가 있다는 곳까지 필사적으로 연기를 헤치고 나갔다. 40m쯤 갔을까, 사람들이 보였다. 숨을 쉬고 있었다. 일곱 명…. 다 함께 나갈 수는 없었다. 먼저 3명을 구조했다. 그런 다음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공기호흡기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조할 수 없었다. 한 분을 두고 돌아서야 했다. 다시 돌아와 구조하리라 다짐하며 선로를 되짚어 나왔다.
 
  활활 불타는 전동차. 화염이 내뿜는 검은 농연…. 결국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그를 두고 나오던 순간을 언젠가는 잊을 수 있을까. 그날의 그 시커먼 승강장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까.
 
 
 
역대 최악 지하철 사고 2, 3위 모두 대구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됐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다쳤다. 방화에 의한 인재였다. 당시 56세였던 김모씨는 인화물질이 담긴 플라스틱통을 든 채 전동차 1079호에 타고 있다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서자 라이터를 켰고 거기서 시작된 불이 전체 차량으로 빠르게 번졌다. 잠시 후 반대쪽 선로에 전동차 1080호가 들어왔고, 불이 옮아붙었다. 1080호의 출입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사망자 중 대다수가 1080호에 탔던 승객들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세계 지하철 역사상 최악의 사고 중 2번째로 꼽힌다. 사망자 수 기준이다. 역대 최악의 사고는 1995년 10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에서 일어난 열차 화재사고다. 289명이 사망했다. 전동차의 출입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사망자가 대량으로 발생한 점이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다. 세계 지하철 역사상 최악의 사고 세 번째 또한 공교롭게도 대구에서 일어났다.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1호선 제1~2구간 공사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다친 사고다. 씁쓸한 2, 3위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대형 사고는 일어났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대형 참사마다 맺힌 국민의 ‘한(恨)’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사회는 잇달아 일어난 대형 재난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재난에서 교훈을 배워나가는 유기체적 학습구조를 한국사회는 지니고 있는가. 지난 10년간 대구 지하철 참사가 정리되고 기억된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이 그 답을 알아낼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로 갔다.
 
  대구에서 만난 사람들 중 지하철 참사를 잊고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공중에서 흩뿌려진 파편처럼 그때의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모두다 기억하고 있지만 굳이 들춰내고 싶지는 않은 일이었다. 유족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에게 지하철 참사는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었다.
 
 
  기록하지 않는 문화, 人災에 白書도 없어
 
서울시립대 도시방재안전연구소 윤명오 교수.
  딸을 잃은 김충국 목사는 “지하철 사고의 진상은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2003년 당시 개척교회의 목사였다. 사고 후 대구의 목회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영천으로 돌아가 5년간 사슴을 키웠다. 그의 말이다.
 
  “지하철 참사 자체의 진상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후에 대구시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수습을 했는지, 바르게 조사가 안 됐습니다. 시간을 들여 유류품과 유골을 수색하지 않고, 왜 서둘러 청소를 했는지, 누가 왜 지시한 건지, 진상이 진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것이지요. 유족들이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사회가 맞닥뜨린 어떤 문제를 제대로 극복했는가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바로 ‘백서(白書)’다. 백서는 ‘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문제에 대하여 그 현상을 분석하고 장래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발표하는 보고서’를 가리킨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는 어떨까. 사고가 일어난 지 2년 후인 2005년, 대구시는 ‘지하철 백서’를 발간했다. 753쪽 분량의 방대한 문서다. 방재 관련 전문가들은 이 백서가 ‘시정홍보 자료’ 혹은 ‘행정 일지’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서울시립대 도시방재안전연구소의 윤명오 교수는 “사고를 되돌아보는 백서는 기본적으로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백서를 사고의 책임이 있는 관리주체가 직접 집필하면, 책임 소재를 감추기 위해 사실관계를 감추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간 기관이라든가, 제3의 사고조사전문기관이 참여해야 신빙성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전문성도 중요합니다. 유족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투명하게 사건을 되짚어봄으로써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경북대 건축학부의 홍원화 교수는 대구 지하철 참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사고 직후 대학원 석·박사 과정 재학생 16명과 함께 중앙로역 현장을 가보고 소방본부 등 관련 기관과 생존자와 유족들을 찾아다녔다. 2년간 1000여 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 결과가 2004년 2월 출간된 ‘2·18 대구 지하철 화재 연구조사 보고서’다. 여기에 소요된 경비는 홍 교수 개인이 충당했다. 보고서는 2005년에 《2·18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기록과 교훈》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홍 교수의 연구실 책꽂이에는 사건 당시의 기록물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교수로 막 임용된 후,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터진 사건입니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부상자들이나 소방관들 인터뷰를 확보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이런 인재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자들의 진술이 점점 진실과 멀어지곤 합니다. 살이 덧붙여지고, 상상이 가미되는 거죠. 빨리 기록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홍 교수 또한 대구시가 낸 백서에 대해 “행정 조치를 중심으로 사건경위를 정리해 놓은 일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백서라는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전반적인 사항을 담아야 합니다. 학자가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해 총체적으로 정리해 놨어야 하는데 행정에 관한 부분, 시가 겪은 어려움 이런 부분을 짜깁기해 놓은 거죠. 사실 백서를 만들었느냐, 만들지 않았느냐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고 이후로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 단초가 백서라는 거죠. 이것은 국가의 리더십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대구 참사 현장에 일본은 연구원 파견

 
경북대 건축학부 홍원화 교수는 지난 2005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기록한 책을 펴냈다.
  ‘냉철한 분석’이 부재한 풍토는 비단 대구 지하철 참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일어난 대형 사고 대부분 백서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다. 1993년 청주 우암아파트 사고(사망 27명, 부상 48명)와 구포 열차전복 사고(사망 78명, 부상 105명), 1995년 대구 상인동 지하철 가스폭발 사고(사망 101명, 부상 202명), 1999년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망 23명, 부상 5명), 2005년 양양 낙산사 화재, 2006년 수원 화성 화재, 2007년 여수 출입국관리소 화재(사망 10명, 부상 17명) 등은 백서 한 권 없이 흘려보낸 경우다.
 
  좋은 백서의 예로는 무엇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컬럼비아호 폭발 추락 사고’ 백서를 예로 들었다. 2003년 2월 1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귀환하던 중 폭발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사고 직후, 컬럼비아호 사고조사위원회(CAIB)를 꾸렸다. 위원회에는 정부 관계자뿐 아니라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했다. 조사위가 꾸려지고 6개월 후에 나온 6권 분량의 백서에는 그야말로 ‘컬럼비아호 폭발 사고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NASA는 위원회가 백서에서 지적한 29개의 권고 항목을 모두 수용했다.
 
  지진, 쓰나미 등 대형 재난이 잦은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행정 중심의 백서를 내는 경우가 많다. 책임 관계나 관련자의 신원 노출 등의 문제로 백서를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차츰 가고 있다고 한다. 대신 재난에 관한 자료 축적과 공유에는 국가기관과 관련 학계가 나서서 힘을 쏟고 있다. 자국에서 일어나지 않은 재난이라도 조사단을 파견해서 자료를 확보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에도 일본은 조사단을 파견했다. 일본 소방청 소방연구원과 도쿄소방청이 연구원 7명을 파견했고, 이들은 지하철 참사의 개요를 정리해 발표했다. 이후 일본 지하철은 내장재의 내화기준, 화재 대응 매뉴얼 등을 바꾸었다. 홍원화 교수는 “어떤 조치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더 빨리 반영했다”고 했다.
 
 
  국민성금 670억원 어디에 썼나 봤더니…
 
  머리로 기억하지 않은 재난은 가슴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대구시 어디에 가도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설물은 없다. 팔공산에 있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내에 불타버린 전동차 1079호 중 한 량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테마파크 건물 뒤편에 세워진 추모 조형물도 인근에서 영업을 하는 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추모 시설물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기록은 없어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유족과 당시 부상자들은 현재도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유족들은 “사망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추모시설이 없다”고 성토했다. 당시 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은 박성찬씨는 “10년이 되도록 위령탑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2003년 당시 국민들이 지하철 사고 피해자를 위해 낸 성금은 약 670억원이다. 이 중 약 410억원은 사망자 192명에게 지급됐다. 1인당 2억2100만원이다. 부상자 148명은 부상 정도에 따라 1000만원에서 2억2100만원을 받았다. 여기에 집행한 돈은 모두 100억원가량이다. 남은 성금 중 154억원가량은 추모사업에 써야 할 돈이었다. 이 중 58억여 원은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와 상징조형물 조성비로 쓰였다. 문제는 여기에 쓰고 남은 돈이다. 이자를 포함해 약 109억원이 통장에 예치돼 있다. 이 예산으로 가칭 ‘2·18안전문화재단’을 설립할 예정이었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 유족들은 재단의 운영 등을 두고 양편으로 갈려 있는 상태다.
 
  당시 부상자들은 ‘부상 후유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동우 부상자대책위원장은 “그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질환도 나타나고 있다. 부상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며 “남은 성금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구시청 재난관리과 지하철사고수습담당계의 윤병현 계장은 “대구시가 부상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근거가 되는 제도나 장치가 없다”고 했다.
 
  “부상자에게 법적 보상을 하는 법령은 있지만, 그 뒤를 책임지는 사회적인 제도가 없습니다. 2003년 당시 국비와 특별교부세를 합쳐 50억여 원 상당의 진료 지원금이 있었습니다. 이걸 기금화해서 상시적으로 의료 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부상자들이 일시 지불 형식으로 나눠서 받아갔습니다. 어떤 제도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부상자 문제는 1세대, 2세대 어떤 형태로든 민원이 계속될 겁니다. 납북자 문제, 제주 4·3사건도 지금까지 민원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구에 드리운 그늘
 
지난 1월 6일, 10년 전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정대술씨가 중앙로역을 둘러보고 있다.
  직접 관련자뿐 아니라 당시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도 지하철 참사는 ‘트라우마’다. 트라우마(trauma)는 ‘정신적 외상’을 뜻한다. 2003년 당시 대구시 의회에서 경제교통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김충환 전 시의회 부의장은 “돌아보면 미련이 많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참사 이후 대구시 행정 자체가 마비됐습니다. 그때 전동차 내장재로 불연재를 쓰지 않아 사망자가 늘어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전동차를 제작한 로템을 상대로 시의회 차원에서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필후 대구경북발전포럼 사무처장은 “지하철 참사의 그늘이 아직도 대구에 드리워져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참사 이후 인터넷에 ‘고담 대구’니 하는 말이 돌았잖아요.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처럼 범죄의 천국 아니냐는 말이지요. 사실 대구도 그 그늘을 떨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영남일보》 전영 기자는 “참사 이후 대구가 전 국민한테 욕먹는 암울한 도시가 된 것 아니냐”고 했다.
 
  “수도권에서 보는 지방과 지방에서 보는 지방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서울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어도 과연 고담시티니 하는 얘기가 나왔을까요. 대구가 갖고 있는 ‘보수 우파’ 이미지와 맞물려, ‘대통령도 배출하고 우리가 최고다’라고 하는 도시가 방재시스템도 제대로 못 갖췄느냐, 서울에서는 이런 인식을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만 트라우마를 앓는 걸까. 막내딸을 떠나보낸 유족 정대술씨는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그와 함께 중앙로역에 갔다. 기자의 눈에는 중앙로역도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겉에서 보기엔 그날의 기억을 지워버린 중앙로역이었지만 한 꺼풀 뒤에는 그날의 흔적이 있었다.
 
  정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중앙로역 지하 1층 대합실을 왔다갔다하며 살폈다. 이곳저곳 살핀 그가 ‘찾았다’고 중얼거리며 어느 가벽(假壁)에 다가섰다. 10여m 길이의 벽 한쪽에는 문이 달려 있었다. 잠겨 있는 문을, 역무원을 불러 연 다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가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문이 달린 임시 공간인 곳, 그 안에 2003년 2월 18일의 기억이 고스란히 있었다.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사물함과 수화기가 녹아내린 공중전화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옆에는 까맣게 타버린 플랫폼의 매점 부스가 있었다. 매점 안을 들여다 보니 화마를 피한 부적이 멋쩍게 걸려 있었다. 중앙로역 역무원은 ‘희생자대책위원회의 허가가 있을 때만 문을 연다’고 했다. 지금까지 개인이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도 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그 공간은, 대구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표상과도 같았다.
 
정낙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수석법의관 인터뷰
 
“대구 지하철 희생이 재난 수습 소프트웨어 개발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대구 지하철 참사를 각자의 시각에서 해석한다. 그러나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해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들, 10년 전 그날 전동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전동차 안에서 사망한 192명이다. 그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사람들이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집단사망자관리단이다. 단장을 맡고 있는 정낙은 수석법의관을 만났다. 정 법의관은 참사 당시 현장에서 총괄팀장을 맡았다.
 
  —참사 당시 국과수의 집단사망관리단은 2월 19일부터 4월 12일까지 시신의 신원 확인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추정 사망자의 숫자가 바뀌면서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요.
 
  “지하철 참사의 특징은 희생자가 ‘불특정 다수’라는 점입니다. 희생자 수가 몇 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신원 확인을 시작한 거죠. 희생자 숫자가 확인이 안 될 경우 맨 처음, 포괄적 추정시신 수를 발표합니다. 포괄적 추정시신 수를 통해 불확실하더라도 이 사건에 어느 정도의 사람이 연관되어 있는지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겁니다. 대구 지하철의 경우에는 초기에 신원 확인이 끝난 시신을 제외하고 149±α라는 포괄적 시신 수를 발표했습니다. 모든 검사를 진행한 후에는 추정시신 수를 142명이라고 발표했지요. 그랬더니 ‘국과수가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한다’, ‘초기에 실수를 했으면 솔직하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요설로 실수를 덮으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희생되는 재난의 특징을 잘 몰라서 하는 실수입니다.”
 
  —6구의 시신은 끝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3구는 유전자형이 나왔는데 관계유족을 찾을 수 없었고, 3구는 개체로는 인정이 되지만 모든 종류의 검사가 불가능한 경우였습니다. 지난 10년간 국과수 측으로 드물게 관계유족인지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조회 의뢰가 들어오곤 했지만 일치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재난 수습에 있어서 발전이 있었습니까.
 
  “참사 당시에는 신원 확인을 위한 작업을 엑셀로 했습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자동화된 것이지만 불편했죠. 인터폴의 경우 신원 확인 정보를 취합해 자동으로 검색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카피당 10만 유로에서 20만 유로를 받고 다른 나라에 팔아요. 우리나라 돈으로 2억원에서 3억원 수준이죠. 우리도 이제 이런 게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이름은 Mass ID Manager(MIM)입니다. 개발이 완료되면 제3세계에 공여(ODA) 형식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검토 중입니다. 우리나라가 재난 수습 부문에서 발전한 것은 그동안 각종 사고 현장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입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의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귀한 희생이 우리에게 준 노하우를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 전해줘, 인권보호에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청소 음모론’의 진실
 
  대구 지하철 참사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재생산되고 있다. 재생산의 동력은 ‘불신’이다. 대표적인 소재는 ‘물청소’다.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내려온다고 해서 물청소를 했다’,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는 일명 ‘물청소 의혹’은 관련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인터넷의 관련 게시글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말은 이렇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2004년 2월 발간한 대구지하철참사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발생 당일인 2월 18일부터 국과수의 화재 감정 조사가 시작됐다. 사고 전동차는 2대 모두 그날 저녁 월배차량기지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후 1시30분 중앙로역 1층, 2층, 3층 전체에 물청소가 이뤄졌다. 기자는 당시 화재 감정에 참여했던 C씨로부터 ‘물청소 사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현장에 있는데 누가 와서 묻더라고요. ‘이제 여기 청소해도 됩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저희 쪽에서 할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그랬더니 ‘그럼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그러더군요. 그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수백 명이 양동이를 들고 와서 물청소를 하더라고요.”
 
  당시 현장에 있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사고 직후 대구시나 대구소방본부, 철도공사 모두 패닉 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물청소 사건이 단순히 수습지휘체계가 무너진 탓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혼란했던 현장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장 훼손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당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었던 윤진태(尹鎭泰)씨는 현장을 훼손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에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대법원은 윤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파기 환송했다.
 
  당시 《매일신문》 사회부 소속이었던 이창환 기자는 “당시 현장 훼손을 좀 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호외를 내야 해서 누군가는 들어가야 했습니다. 경찰한테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내 목숨 내가 책임지겠다, 하고 들어갔어요. 다른 기자들도 뒤따라 들어왔지요. 현장을 밟고 다녔으니까 훼손이 됐겠지요.”
 
  윤 교수는 “선진국이라면 뭐든지 다 공개할 것 같지만 재난에 관련한 사실은 철저히 국가의 이익을 고려한다”고 했다.
 
  “1987년에 영국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이때 사고난 다음 날 영국 언론에는 사고에 대한 반성이나 지적보다는 화재 진압에 대한 찬사, 소방대원의 영웅담이 가득했어요. 사회의 신뢰 유지를 위한 노력인 거죠. 그 당시 화재의 원인은 낙후된 관리체계였거든요. 2년이 지나고 영국의 연구기관이 철저히 연구한 대책을 내놓았죠.”
 
  감정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속보성 재난 보도의 무엇보다 큰 폐해는, 그것이 정부의 ‘땜질 대책’과 만나 ‘대증 처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국과수에서 31년간 화재감식을 담당하고 지난해 정년퇴임한 김윤회씨는 이 점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김씨는 2000건이 넘는 화재 현장을 누볐다.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와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 인천 호프집 화재, 이천 냉동창고 화재,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 현장 등 대형 화재 현장에는 김씨가 있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대구 지하철 현장에서 기자들이 묻더군요. 지하철역에서 화재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불은 기본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속성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지하철역에 불이 나면 선로로 내려가면 살 수 있다’는 보도가 일제히 나왔어요. 그 후 각 역 플랫폼마다 사다리가 비치됐습니다. 화재 시 선로로 내려가는 게 과연 안전한지 종합적으로 따져봤는지 의문입니다.”
 
  김씨는 ‘전동차 내장재 교체’도 대증 처방의 하나로 지적했다.
 
  “당시 전동차 내장재를 모두 불연성 소재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빗발쳤습니다. 사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전동차의 내장재가 싹 교체됐지요.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타지 않는다는 것은, 수명이 다 됐을 때 처리가 어렵다는 뜻이거든요.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엄청난 환경 오염거리를 만든 거죠. 다른 식으로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시간을 들여 연구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참사 이후 전국 지하철의 전동차 내장재가 교체됐다. 대구도시철도공사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내장재 교체를 위해 지출한 금액만 따져도 약 227억원이다.
 
김범일 대구 시장 인터뷰
 
   대구는 중앙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경제적 위상의 차이가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다. 1인당 지역 내 총생산(GRDP) 조사에서 대구는 19년째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2012년도 통계에 따르면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12위를 차지했다. 김범일(金範鎰) 대구시장은 지난 2006년부터 대구시장을 맡아왔다. 대구시는 그동안 대구육상세계선수권대회나 세계소방관대회를 여는 등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나름 노력을 했다.
 
  —참사와 관련해 유족이나 부상자들이 느끼기에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사 자체는 슬픈 일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끝도 없지요. 대구시는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고, 재단 설립이나 백서 발행이 지연되는 문제는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시가 강제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고 이후 대구의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졌지요.
 
  “대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멍이 들었습니까. 이제는 앞으로 나가야지요. 다른 데서는 그렇게까지 큰 뉴스가 안 되는 일이, 대구에서 일어나면 뉴스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지난해 일어났던 학생들 자살 사건도 그렇고요. 손해 보는 게 많습니다.”
 
  —참사 후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대구가 안전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민안전테마파크도 짓고, 안전엑스포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습니다. 안전엑스포는 소방 관련 행사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세계적인 엑스포가 됐지요. 세계소방관대회나 대구육상세계선수권대회도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연 행사입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다 극복했다고 생각합니까.
 
  “극복 안 됐습니다.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안전도시가 되는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겁니다. 그런 노력만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사죄가 되겠지요.”
 
  희망은 있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내에는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불이 시작된 1079호 전동차의 한 칸이 전시되어 있다. 시민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대구 팔공산 자락에는 겉에서 보기엔 용도를 가늠하기 힘든 건물이 있다. 바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다. 2008년 개관한 테마파크는 지하철안전 전시관과 생활안전 전시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안전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그중에는 ‘지하철 화재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중앙로 화재를 재현하고 무사히 탈출하는 프로그램이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11명의 시민이 체험 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모두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었다. 지하철 참사를 소개하는 짧은 동영상을 본 후 다 함께 자그마한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전동차 한 량이 서 있었다. 서울 지하철에서 달렸던 전동차라고 했다. 탑승 후 얼마 있으니 연기가 나왔다. 흰 연기가 너울너울 천장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연기 너머로, 강사가 미리 일러준 대로 좌석 아래에 있는 밸브를 조작해 문을 손으로 여는 아이들이 보였다. 기자도 얼른 앞에 있는 문을 수동으로 열었다. 10년 전 그날 전동차 한 칸마다 수동으로 문을 여는 사람이 한 사람씩만 있었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동차를 나가니 이미 승강장은 시나리오대로 정전이 발생해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체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총 길이는 중앙로역 계단 총 길이의 1/4 길이라고 한다. 가상 상황인 것을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도 발밑도 안 보이는 어둠이 계속 이어지자, 언뜻 마음속에 떠오른 감정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공포’와 비슷한 모양을 한 감정이었다. 기자는 주어진 시간인 2분 안에 역을 빠져나오는 데 실패했다. 실제 지하철 화재 시 2분을 넘기면 질식사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가장 의지가 됐던 것은 바닥과 벽에 붙어 있는 ‘피난유도 축광타일’과 ‘앞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참사 당시 무사히 중앙로역을 빠져나온 생존자들도 ‘빛’과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피난에 가장 큰 도움이었다고 답했다. 지하철 참사 이후 대구를 비롯한 서울, 광주, 부산 등지의 지하철역에 정전 시 빛을 발하는 축광타일이 부착됐다.
 
  개관 이후 4년간 약 53만명의 시민이 테마파크를 방문했다. 더 이상 끔찍한 인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와 관련 기관이 시설을 보완하고 매뉴얼을 개선하는 것도 필수적인 조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민들 하나하나가 안전에 대한 의식을 갖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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