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克日이 한국 경제의 궁극적 목표가 돼선 안 돼”
⊙ 韓 대법원 판결로 韓日 政經분리 원칙 깨져
⊙ 韓日 경제 갈등, 가장 큰 피해자이자 수혜자는 한국 반도체 기업
⊙ 日 수출규제, 사실상 무력화돼
⊙ 韓日 양국 넘지 말아야 할 線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
⊙ 韓 대법원 판결로 韓日 政經분리 원칙 깨져
⊙ 韓日 경제 갈등, 가장 큰 피해자이자 수혜자는 한국 반도체 기업
⊙ 日 수출규제, 사실상 무력화돼
⊙ 韓日 양국 넘지 말아야 할 線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
- 수출규제 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소부장 성과 간담회에 참석했다. 사진=뉴시스
“기습공격하듯이 시작된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자립’의 길을 걸은 지 2년이 됐습니다. ‘소부장 자립’을 이뤄낸 경험과 자신감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대재건’의 동반자로서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일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일본의 수출규제 2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 산업 성과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또, 문 대통령은 “(일본이 수출규제한) 3대 품목의 공급망이 안정적으로 구축됐다. 반도체 제조공정의 핵심으로 대일(對日)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던 소재들이다. 50% 육박하던 불화수소의 일본 의존도를 10%대로 낮췄다. 불화 폴리이미드는 자체 기술 확보에 이어 수출까지 하게 됐다. EUV 레지스트(포토레지스트) 또한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국내 양산을 앞두고 있다. 국내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00대 핵심 품목에 대한 일본 의존도를 25%까지 줄였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두고 반도체·소부장 업계 종사자와 관련 전문가들은 “사실과 사실이 아닌 내용, 확인할 수 없는 주장과 희망 사항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日, 3大 수출규제 발표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經濟産業省·경산성)은 앞서 문 대통령이 언급한 ‘3대 첨단소재’ 품목에 관한 대한(對韓) 수출관리 강화를 발표했다. 내용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작에 필수품목인 ▲불화수소(Hydrogen Fluoride)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감광제) ▲불화 폴리이미드(Fluorine Polyimide)의 첨단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조항 신설(이하 수출규제)이었다. 이로 인해 일주일 이내던 허가 신청과 심사 기간이 90일 전후로 바뀌었고, 신고 제출 서류도 2종에서 3~9종으로 늘었다. 여기에 허가 유효기간은 통상 3년에서 6개월로 줄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불화 폴리이미드는 디스플레이(출력 표시 장치) 생산에 필요하다.
당시 일본 경산성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대신(大臣·우리나라의 장관에 해당)은 수출규제 발표 이틀 뒤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한국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수출관리를 해나가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졌다고 판단해 엄격하게 제도를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올해(2019년) 들어 지금까지 양국이 쌓아온 우호 협력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강제동원문제(원문은 일조선반도출신노동자문제·日朝鮮半島出身勞動者問題)는 G20 정상회의 때까지도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등 한일 양국 간의 신뢰 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는 우리 대법원이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대응”이라고 했다. 이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지켜왔던 과거사와 경제 문제를 구분해온 정경(政經)분리 원칙이 깨졌다”고 했다.
지난 7월 1일 청와대 박수현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년 전 수출규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박 수석은 “(당시 문 대통령은) ‘이(수출규제)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면 영영 기술 독립의 길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 2년 전 ‘소부장 독립운동’의 방향이 결정됐다”면서 “(2021년 7월 현재) 소부장 독립운동은 성공적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소부장 100대 핵심 부품의 대일 의존도가 31.4%에서 24.9%로 낮아졌고 시총 1조원 이상의 소부장 중견·중소기업의 수도 13개에서 31개로 2배 이상 늘었다. 국민과 함께 마침내 ‘소부장 독립기념일’을 만들어낼 것이다. 소부장 독립운동 2주년에 대통령의 통찰과 결단, 국민에 대한 믿음에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文, 숫자놀이로 獨立 만세 외쳐”
현 정부의 이른바 ‘소부장 독립운동’ ‘소부장 국산화·자립화’에 대해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은 지난 7월 21일 칼럼 ‘文 정권, 숫자놀이로 독립 만세 외쳤다’를 통해 “대통령은 ‘3대 품목의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했다’고 했지만 (불화수소를 제외한) 두 품목에서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지표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산 불화수소만 점유율이 2018년 42%에서 13%로 하락했기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라는 발언은 이를 두고 한 듯하다. 그런데 이 품목에서 일본 점유율이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소부장 운동 이후가 아니다. 2012년 77%에서 2015년 41%로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선우 논설위원은 문 대통령이 강조한 불화수소 대일 수입 의존도 하락은 일본의 수출규제 전부터 시작됐기에 소부장 운동의 성과로만 볼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수입규제 이전에 국내 기업이 국내 공급을 늘리기 위해 불화수소 생산 시설을 증설했기 때문이다. 완공 시점이 우연히 일본 수입규제 시점과 맞아떨어졌다. 소부장 운동의 역할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 공세에 깜짝 놀란 정부가 인허가 규제를 완화해 양산이 빨리 시작됐다.”
수출규제 3개 품목 중 2개 품목(불화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입 시장 점유율은 94~95%다. 정부는 수입처 다변화로 포토레지스트의 일본 지배력이 줄어들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업체인 일본 JSR은 벨기에 연구센터 IMEC의 합작법인을 통해 한국에 포토레지스트를 ‘우회 공급’ 중이다. 이 때문에 벨기에산 포토레지스트 수입이 늘었다. 2위 신에츠화학공업도 여전히 한국 기업과 거래를 유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이 2년 만에 소부장 산업에서 원천기술 내지 핵심기술을 개발해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년 만에 소부장 산업 기술을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금오공대 총장을 지낸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경북 구미을)은 “정부의 소부장 육성 정책이 맞는 방향”이라면서도 “하루아침에 우리가 국산화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라고 했다.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정승연 교수(교토대 경제학 박사)는 “대통령이 사용한 ‘자립’ ‘국산화’라는 용어에 어폐가 있다”며 “극일(克日) 경제관을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인천 연수갑 당협위원장이기도 한 정 교수는 “최근 2년 동안 정부가 5조원가량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일부 국산화가 진행돼 환영할 만하다”면서도 “정부 지원만으로 단기간에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對日무역적자와 한국의 수출액은 逆비례
“소재 산업은 연구·개발을 통해 비교적 일찍 성과를 낼 수 있지만, 부품과 장비 분야는 생산 현장에서 오랜 숙련과 노하우가 축적돼야 합니다. 이 분야는 일본이 독보적입니다. 한국의 대일(對日)무역적자의 80%가량은 부품·장비 산업 분야에서 발생해요. 2년이 채 안 됐는데 정부 지원으로 일본 기술을 금방 따라잡는다? 불가능한 일이죠.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국제 분업 체제, 협업 관계를 잘 발전시켜야 해요. 한일 경제의 특징은 일본이 생산한 양질의 자본재를 한국이 수입해 자본재나 최종재(완성품)로 만든 뒤 미국이나 중국 같은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구조예요. 대일무역적자를 나쁘게 봐선 안 됩니다. 대일무역적자가 크다는 말은 일본에서 이른바 질 좋은 소부장을 많이 수입했다는 의미잖아요? 왜 수입했겠습니까. 우리 기업이 이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세계 시장에 많이 팔았다는 뜻이에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래 한국은 대일무역에서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대일무역적자가 크면 클수록 한국 전체의 수출액은 많아졌죠.
한국은 반일 감정, 일본은 혐한 감정을 서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어요. ‘소부장 국산화’ ‘소부장 독립운동’이라는 표현도 굉장히 정치적이죠.”
지난해 수출규제 3개 품목을 수입하는 데 총 3억7304만 달러(약 4321억원)를 썼다. 한국이 지난해 이 소재를 이용해 반도체를 팔아 번 돈이 369억 달러(42조7500억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소속 한무경 위원(비례대표)은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체를 운영했다. 한 의원은 “‘국산화’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국산화’는 별개”라면서 “현재 정부가 시행하는 소부장 국산화 추진은 나눠주기식 R&D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 의원은 “국산화 이후 벌어질 일본 기업과의 특허 소송도 대비해야 한다”며 “일본이 지금은 아무런 대응 없이 한국의 소부장 국산화를 지켜보고 있지만, 향후 우리가 개발한 기술에 대해 특허 침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립’ ‘국산화’에 대해 산자부는 “산자부의 정책 목표는 공급망 안정화에 있다”면서 “국제 분업 체계가 있기에 모든 물품을 한국 기업의 자체 기술로 생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기업의 원천기술은 아니지만) 일본 기업이 한국에서 생산하는 것도 국내 생산 기반을 확충해 공급 안정에 기여하므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정부, 100大 핵심 품목 비공개
문 대통령은 “국내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00대 핵심 품목에 대한 일본 의존도(31.4%)를 25%(24.9%)까지 줄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이 100대 핵심 품목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수출규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산업 전략과 우리 기업의 대응 전략이 노출될 수 있어 이 100대 품목 리스트는 비공개”라며 “기업들도 구체적인 품목이나 기술 사양 등이 공개되면 거래 조건이나 신인도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비공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산자부는 국회 산자위 소속 일부 위원에게 ‘100대 핵심 품목 리스트’를 공개했다. 국민의힘 양금희 의원(대구 북구갑)은 “100대 품목을 확인해보니 중요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서도 “계속 이 품목을 비공개로 둘 필요는 없다”고 했다. 경북대 전자공학과 80학번인 양 의원은 “소부장 지원 정책을 펼친 지 1년 반 정도 됐다. 문 대통령의 주장대로 이렇게 단기간에 성과를 냈다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분야는 굉장히 오랜 기간 투자를 해야 한다”면서 “불화수소 국내 생산을 제외하곤 딱히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양 의원은 “글로벌 공급 체계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지 무조건 국산화에만 목적을 둬선 안 된다”고 했다.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수출 절차 변경을 두고 한국은 ‘수출규제’, 일본은 ‘수출관리강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은 강제동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이른바 3대 수출규제 품목을 별도 지정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white list·백색 국가)’에서 배제했지만, 일본이 3대 소재 품목에 대한 수출을 불허한 사례는 아직 없다.
전직 고위 외교 당국자 A씨는 “두 용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권유로 ‘비확산 조치’에 동참하기 위해 ‘전략물자 수출 통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수출품이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테러나 대량살상무기(WMD) 제작에 전용(轉用)되는 일을 막기 위한 목적이죠. 한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2004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들어갔지만, 일본은 대법원 판결 이후 이 백색 국가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한 겁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간소화했던 통제 절차를 정상적으로 바꿔 특혜를 거둬들였을 뿐’이라는 입장이고, 우리 정부는 ‘권리까지는 아니지만, 그간 누렸던 특혜를 잃게 됐다’는 입장이죠.”
수출규제는 일본이 만든 ‘수도꼭지’
A씨는 “수출규제 조치는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을 대비해 만들어놓은 수도꼭지”라고 표현했다.
“일본의 조치는 강제동원 문제(과거사 문제) 해결을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수출규제’라는 수도꼭지를 만들어놓고는 ‘한국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한다는 명목으로 한국 내 일본 자산을 현금화할 경우 이 수도꼭지를 잠그겠다’고 위협한 겁니다. 이 수도꼭지는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실탄입니다.”
일본은 2019년 7월 수출규제를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의 캐치올 규제가 미흡하다’는 등 안보상의 이유를 들었다. 불화수소 등이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유입된다는 식의 주장을 흘렸다. 이에 한국은 관련 법령을 개정해 일본의 수출규제 사유를 모두 해소했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수출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수출규제 발표 직후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국 경제의 상징인 반도체 산업을 공격하기 위해 첨단 소재 수출을 규제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삼성전자 상무 출신으로 당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의원은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갖는 것을 일본은 두려워한다. 일본의 조치는 현재보다 미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A씨는 이러한 주장이 “음모론에 불과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미 반도체 산업이 망했습니다. 지금은 소재·부품·장비 등의 영역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됐어요. 일본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공격하려고 작심한다면, 3대 첨단소재 수출규제 말고도 할 게 많아요. 글로벌 가치 사슬(GVC·Global Value Chain) 무역에서 볼 때, 반도체에 대한 공격은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이라고 카드가 없습니까? 우리가 반도체를 일본에 팔지 않으면 일본도 손해 아닙니까. 한국이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요. 정말로 우리 반도체 산업을 타격하려 했다면 부품이나 장비에 대한 수출을 불허했겠죠.”
GVC 무역이란,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여러 나라를 거쳐 다양한 생산 단계를 통해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된다는 의미로, 세계 시장이 상호 의존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정승연 교수는 “일본이 정말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가하고 싶었다면 소재가 아닌 부품과 장비 분야 수출을 금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재·장비 산업이 日 주류 산업 돼
도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수출규제’라는 주장에 “인과관계가 바뀌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 산업은 자동차를 제외하곤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완성품 업체들이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를 주로 중간재, 자본재를 생산해 수출하는 소재·장비 업체들이 대신하고 있죠. GVC에 따라 화학·소재를 생산하는 업체가 일본 산업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가장 영향력 있다고 판단한 분야가 화학·소재 산업 분야입니다. 이 때문에 수출규제로 인한 타격은 결과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받게 된 셈이죠.”
이 교수는 공저 《대전환시대의 한일관계》(2021년)에서 “일본 경제가 침체의 길을 걷는 중에도 세계 3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소부장 분야의 중견·중소기업의 선전 덕분”이라면서 “일본 재계의 파워가 과거 자동차 산업과 전자 산업에서 화학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일본 게이단렌(경단련)과 경제동우회 회장이 화학 산업 분야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진 점을 들었다. 현재 경단련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로 스미토모화학 회장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수출규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한국은 국산화된 게 거의 없는데도 국산화를 이뤘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규제가 명확함에도 ‘수출규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불화수소 對日 의존도 감소?
中國에 從屬
“소부장 산업은 단기간에 국산화를 이뤄 양산 단계에 이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소재 산업은 천연자원을 1차 가공해 화학 소재로 만드는 분야입니다.
정부가 ‘불화수소에 대한 대일 의존도가 줄었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중국산 불화수소에 종속됐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화수소는 형석(螢石)이 원료고, 중국이 형석을 가장 많이 생산해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본에서 1차 가공한 질 좋은 불화수소를 사용할지, 중국에서 질 낮은 원료를 우리나라로 가져와 가공한 뒤 일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불화수소를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겁니다. 불화수소를 만드는 과정은 위험하고 환경오염도 많습니다. 정제하는 데 높은 기술력도 필요하고요. 일본이 만든 질 좋은 불화수소를 사용하면 되는데, 굳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국산화할 필요가 있습니까.”
한국무역협회·산자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77%였던 불화수소 대일 의존도는 2021년 13%로 줄었다. 대신 중국산 불화수소 의존도가 지난해 기준 73%(2012년 20%대)로 증가했다.
이 명예교수는 수출규제를 회피하고자 한국에서 생산하는 고순도 불화수소에는 일본 기술이 적용됐다고 한다. 국내 생산이기에 수출입 통계에는 반영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수출규제 당시 정부와 언론은 “국내 업체 솔브레인이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를 양산한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1994년 솔브레인(지분 49%)과 일본 기업 스텔라 케미파(39%)·마루젠케미칼(10%)이 합작해 국내에 만든 ‘훽트(FECT)’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출규제 이전부터 스텔라 케미파, 모리타화학 등 고순도 불화수소(HF) 생산업체와 JSR, 도쿄오카공업(TOK), 신에츠(信越)화학 등 포토레지스트 생산업체, 스미토모화학 등 불화 폴리이미드(FPI) 생산업체들은 모두 양국 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국에서 소재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日 기업, 수출규제 이전부터 한국에 공장 지어
일본에서 처음 불화수소 상업 생산에 성공한 모리타화학은 2010년 ㈜이엔에프, 한국알콜산업, 삼성물산 등과 함께 충남 아산에 ‘팸테크놀로지’라는 소재 생산법인을 만들었다.
JSR은 2004년 자회사 ‘JSR마이크로코리아(지분 100%)’를 충북 청주에 설립하고 포토레지스트 상업 생산을 시작해 삼성전자에 납품해왔다. TOK도 2012년 인천에 ‘티오케이첨단재료’를 설립해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에는 불화 폴리이미드가 필요하다. 이 폴리이미드는 전량 ‘동우화인켐’이 납품한다. 동우반도체약품으로 시작한 동우화인켐은 일본 스미토모화학이 1991년 한국에 세운 자회사(지분 100%)다. 동우화인켐의 지난해 매출은 2조8785억원이다. 스미토모화학의 매출액은 한화로 23조원이었다.
이 명예교수는 “국제 분업, 협업 질서를 무시하는 과도한 국산화는 오히려 우리 산업을 망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음식점에 비유해 국산화를 비판했다.
“식당은 좋은 재료를 싸게 구매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이를 좋은 가격에 많이 팔아 매출을 올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 좋은 재료를 구하거나 음식을 잘 만들려는 생각보다는 가게 뒤편에 텃밭을 얻어놓고는 채소 종자(種子)부터 비료, 포장지, 주방 세제, 그릇까지 전부 자기 손으로 하겠다고 하면 이 식당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차별적인 산업의 국산화, 자립도 이와 다를 게 없어요. 자재를 저렴하게 사와 부가가치를 불어넣고 이를 비싸게 파는 게 합리적인 겁니다.”
넘지 말아야 할 線
이창민 교수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사실상 형해화(形骸化)됐다”며 이는 양국 기업이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합리적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양국 기업은 이번 수출규제에 대해 제3국 우회 수출이라든지 한국 내 공장 설립 등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는 무력화됐죠. 과거 미국이 자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 연 168만 대로 제한하는 수출자율규제 조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미국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방식으로 규제를 돌파했죠. 이번 한일무역 마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기업 입장에선 굳이 일본에서 생산할 필요 없어 한국 현지 생산을 택하게 된 거죠.”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부정적 효과는 사실상 없다고 평가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대학교수인 B씨는 “극일이 한국 경제의 궁극적 목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반도체 업계와 반도체 협회 관계자들은 “오히려 이번 수출규제를 계기로 소재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등 공급망 다양화를 이뤘다. 유통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유통비도 줄어 긍정적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전문가들은 한일 양국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하나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선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지급을 위한 일본 기업(PNR)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이다. 지난 8월 11일 대구지법은 일본제철 측이 낸 즉시항고를 기각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경고해온 ‘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이라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 힘들다는 속내다. 이 때문에 임기가 9개월 남은 현 정부에서는 시간을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 선을 넘는 순간 일본이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 전망했다.⊙
지난 7월 2일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일본의 수출규제 2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 산업 성과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또, 문 대통령은 “(일본이 수출규제한) 3대 품목의 공급망이 안정적으로 구축됐다. 반도체 제조공정의 핵심으로 대일(對日)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던 소재들이다. 50% 육박하던 불화수소의 일본 의존도를 10%대로 낮췄다. 불화 폴리이미드는 자체 기술 확보에 이어 수출까지 하게 됐다. EUV 레지스트(포토레지스트) 또한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국내 양산을 앞두고 있다. 국내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00대 핵심 품목에 대한 일본 의존도를 25%까지 줄였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두고 반도체·소부장 업계 종사자와 관련 전문가들은 “사실과 사실이 아닌 내용, 확인할 수 없는 주장과 희망 사항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日, 3大 수출규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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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웨이퍼. 반짝이는 표면 위에 포토레지스트를 바른 후 광선을 쪼여 회로를 만든다. 이후 불화수소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한다. 사진=뉴시스 |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불화 폴리이미드는 디스플레이(출력 표시 장치) 생산에 필요하다.
당시 일본 경산성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대신(大臣·우리나라의 장관에 해당)은 수출규제 발표 이틀 뒤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한국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수출관리를 해나가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졌다고 판단해 엄격하게 제도를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올해(2019년) 들어 지금까지 양국이 쌓아온 우호 협력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강제동원문제(원문은 일조선반도출신노동자문제·日朝鮮半島出身勞動者問題)는 G20 정상회의 때까지도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등 한일 양국 간의 신뢰 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는 우리 대법원이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대응”이라고 했다. 이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지켜왔던 과거사와 경제 문제를 구분해온 정경(政經)분리 원칙이 깨졌다”고 했다.
지난 7월 1일 청와대 박수현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년 전 수출규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박 수석은 “(당시 문 대통령은) ‘이(수출규제)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면 영영 기술 독립의 길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 2년 전 ‘소부장 독립운동’의 방향이 결정됐다”면서 “(2021년 7월 현재) 소부장 독립운동은 성공적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소부장 100대 핵심 부품의 대일 의존도가 31.4%에서 24.9%로 낮아졌고 시총 1조원 이상의 소부장 중견·중소기업의 수도 13개에서 31개로 2배 이상 늘었다. 국민과 함께 마침내 ‘소부장 독립기념일’을 만들어낼 것이다. 소부장 독립운동 2주년에 대통령의 통찰과 결단, 국민에 대한 믿음에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文, 숫자놀이로 獨立 만세 외쳐”
현 정부의 이른바 ‘소부장 독립운동’ ‘소부장 국산화·자립화’에 대해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은 지난 7월 21일 칼럼 ‘文 정권, 숫자놀이로 독립 만세 외쳤다’를 통해 “대통령은 ‘3대 품목의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했다’고 했지만 (불화수소를 제외한) 두 품목에서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지표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산 불화수소만 점유율이 2018년 42%에서 13%로 하락했기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라는 발언은 이를 두고 한 듯하다. 그런데 이 품목에서 일본 점유율이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소부장 운동 이후가 아니다. 2012년 77%에서 2015년 41%로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선우 논설위원은 문 대통령이 강조한 불화수소 대일 수입 의존도 하락은 일본의 수출규제 전부터 시작됐기에 소부장 운동의 성과로만 볼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수입규제 이전에 국내 기업이 국내 공급을 늘리기 위해 불화수소 생산 시설을 증설했기 때문이다. 완공 시점이 우연히 일본 수입규제 시점과 맞아떨어졌다. 소부장 운동의 역할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 공세에 깜짝 놀란 정부가 인허가 규제를 완화해 양산이 빨리 시작됐다.”
수출규제 3개 품목 중 2개 품목(불화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입 시장 점유율은 94~95%다. 정부는 수입처 다변화로 포토레지스트의 일본 지배력이 줄어들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업체인 일본 JSR은 벨기에 연구센터 IMEC의 합작법인을 통해 한국에 포토레지스트를 ‘우회 공급’ 중이다. 이 때문에 벨기에산 포토레지스트 수입이 늘었다. 2위 신에츠화학공업도 여전히 한국 기업과 거래를 유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이 2년 만에 소부장 산업에서 원천기술 내지 핵심기술을 개발해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년 만에 소부장 산업 기술을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금오공대 총장을 지낸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경북 구미을)은 “정부의 소부장 육성 정책이 맞는 방향”이라면서도 “하루아침에 우리가 국산화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라고 했다.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정승연 교수(교토대 경제학 박사)는 “대통령이 사용한 ‘자립’ ‘국산화’라는 용어에 어폐가 있다”며 “극일(克日) 경제관을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인천 연수갑 당협위원장이기도 한 정 교수는 “최근 2년 동안 정부가 5조원가량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일부 국산화가 진행돼 환영할 만하다”면서도 “정부 지원만으로 단기간에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對日무역적자와 한국의 수출액은 逆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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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V 장비를 살펴보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진=삼성전자 제공 |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국제 분업 체제, 협업 관계를 잘 발전시켜야 해요. 한일 경제의 특징은 일본이 생산한 양질의 자본재를 한국이 수입해 자본재나 최종재(완성품)로 만든 뒤 미국이나 중국 같은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구조예요. 대일무역적자를 나쁘게 봐선 안 됩니다. 대일무역적자가 크다는 말은 일본에서 이른바 질 좋은 소부장을 많이 수입했다는 의미잖아요? 왜 수입했겠습니까. 우리 기업이 이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세계 시장에 많이 팔았다는 뜻이에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래 한국은 대일무역에서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대일무역적자가 크면 클수록 한국 전체의 수출액은 많아졌죠.
한국은 반일 감정, 일본은 혐한 감정을 서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어요. ‘소부장 국산화’ ‘소부장 독립운동’이라는 표현도 굉장히 정치적이죠.”
지난해 수출규제 3개 품목을 수입하는 데 총 3억7304만 달러(약 4321억원)를 썼다. 한국이 지난해 이 소재를 이용해 반도체를 팔아 번 돈이 369억 달러(42조7500억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소속 한무경 위원(비례대표)은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체를 운영했다. 한 의원은 “‘국산화’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국산화’는 별개”라면서 “현재 정부가 시행하는 소부장 국산화 추진은 나눠주기식 R&D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 의원은 “국산화 이후 벌어질 일본 기업과의 특허 소송도 대비해야 한다”며 “일본이 지금은 아무런 대응 없이 한국의 소부장 국산화를 지켜보고 있지만, 향후 우리가 개발한 기술에 대해 특허 침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립’ ‘국산화’에 대해 산자부는 “산자부의 정책 목표는 공급망 안정화에 있다”면서 “국제 분업 체계가 있기에 모든 물품을 한국 기업의 자체 기술로 생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기업의 원천기술은 아니지만) 일본 기업이 한국에서 생산하는 것도 국내 생산 기반을 확충해 공급 안정에 기여하므로 의미가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국내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00대 핵심 품목에 대한 일본 의존도(31.4%)를 25%(24.9%)까지 줄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이 100대 핵심 품목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수출규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산업 전략과 우리 기업의 대응 전략이 노출될 수 있어 이 100대 품목 리스트는 비공개”라며 “기업들도 구체적인 품목이나 기술 사양 등이 공개되면 거래 조건이나 신인도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비공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산자부는 국회 산자위 소속 일부 위원에게 ‘100대 핵심 품목 리스트’를 공개했다. 국민의힘 양금희 의원(대구 북구갑)은 “100대 품목을 확인해보니 중요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서도 “계속 이 품목을 비공개로 둘 필요는 없다”고 했다. 경북대 전자공학과 80학번인 양 의원은 “소부장 지원 정책을 펼친 지 1년 반 정도 됐다. 문 대통령의 주장대로 이렇게 단기간에 성과를 냈다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분야는 굉장히 오랜 기간 투자를 해야 한다”면서 “불화수소 국내 생산을 제외하곤 딱히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양 의원은 “글로벌 공급 체계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지 무조건 국산화에만 목적을 둬선 안 된다”고 했다.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수출 절차 변경을 두고 한국은 ‘수출규제’, 일본은 ‘수출관리강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은 강제동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이른바 3대 수출규제 품목을 별도 지정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white list·백색 국가)’에서 배제했지만, 일본이 3대 소재 품목에 대한 수출을 불허한 사례는 아직 없다.
전직 고위 외교 당국자 A씨는 “두 용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권유로 ‘비확산 조치’에 동참하기 위해 ‘전략물자 수출 통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수출품이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테러나 대량살상무기(WMD) 제작에 전용(轉用)되는 일을 막기 위한 목적이죠. 한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2004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들어갔지만, 일본은 대법원 판결 이후 이 백색 국가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한 겁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간소화했던 통제 절차를 정상적으로 바꿔 특혜를 거둬들였을 뿐’이라는 입장이고, 우리 정부는 ‘권리까지는 아니지만, 그간 누렸던 특혜를 잃게 됐다’는 입장이죠.”
수출규제는 일본이 만든 ‘수도꼭지’
A씨는 “수출규제 조치는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을 대비해 만들어놓은 수도꼭지”라고 표현했다.
“일본의 조치는 강제동원 문제(과거사 문제) 해결을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수출규제’라는 수도꼭지를 만들어놓고는 ‘한국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한다는 명목으로 한국 내 일본 자산을 현금화할 경우 이 수도꼭지를 잠그겠다’고 위협한 겁니다. 이 수도꼭지는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실탄입니다.”
일본은 2019년 7월 수출규제를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의 캐치올 규제가 미흡하다’는 등 안보상의 이유를 들었다. 불화수소 등이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유입된다는 식의 주장을 흘렸다. 이에 한국은 관련 법령을 개정해 일본의 수출규제 사유를 모두 해소했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수출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수출규제 발표 직후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국 경제의 상징인 반도체 산업을 공격하기 위해 첨단 소재 수출을 규제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삼성전자 상무 출신으로 당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의원은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갖는 것을 일본은 두려워한다. 일본의 조치는 현재보다 미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A씨는 이러한 주장이 “음모론에 불과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미 반도체 산업이 망했습니다. 지금은 소재·부품·장비 등의 영역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됐어요. 일본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공격하려고 작심한다면, 3대 첨단소재 수출규제 말고도 할 게 많아요. 글로벌 가치 사슬(GVC·Global Value Chain) 무역에서 볼 때, 반도체에 대한 공격은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이라고 카드가 없습니까? 우리가 반도체를 일본에 팔지 않으면 일본도 손해 아닙니까. 한국이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요. 정말로 우리 반도체 산업을 타격하려 했다면 부품이나 장비에 대한 수출을 불허했겠죠.”
GVC 무역이란,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여러 나라를 거쳐 다양한 생산 단계를 통해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된다는 의미로, 세계 시장이 상호 의존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정승연 교수는 “일본이 정말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가하고 싶었다면 소재가 아닌 부품과 장비 분야 수출을 금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재·장비 산업이 日 주류 산업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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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작기계 생산업체로 유명한 화낙(FANUC). 사진=뉴시스/신화 통신 |
“현재 일본 산업은 자동차를 제외하곤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완성품 업체들이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를 주로 중간재, 자본재를 생산해 수출하는 소재·장비 업체들이 대신하고 있죠. GVC에 따라 화학·소재를 생산하는 업체가 일본 산업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가장 영향력 있다고 판단한 분야가 화학·소재 산업 분야입니다. 이 때문에 수출규제로 인한 타격은 결과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받게 된 셈이죠.”
이 교수는 공저 《대전환시대의 한일관계》(2021년)에서 “일본 경제가 침체의 길을 걷는 중에도 세계 3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소부장 분야의 중견·중소기업의 선전 덕분”이라면서 “일본 재계의 파워가 과거 자동차 산업과 전자 산업에서 화학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일본 게이단렌(경단련)과 경제동우회 회장이 화학 산업 분야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진 점을 들었다. 현재 경단련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로 스미토모화학 회장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수출규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한국은 국산화된 게 거의 없는데도 국산화를 이뤘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규제가 명확함에도 ‘수출규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장 산업은 단기간에 국산화를 이뤄 양산 단계에 이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소재 산업은 천연자원을 1차 가공해 화학 소재로 만드는 분야입니다.
정부가 ‘불화수소에 대한 대일 의존도가 줄었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중국산 불화수소에 종속됐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화수소는 형석(螢石)이 원료고, 중국이 형석을 가장 많이 생산해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본에서 1차 가공한 질 좋은 불화수소를 사용할지, 중국에서 질 낮은 원료를 우리나라로 가져와 가공한 뒤 일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불화수소를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겁니다. 불화수소를 만드는 과정은 위험하고 환경오염도 많습니다. 정제하는 데 높은 기술력도 필요하고요. 일본이 만든 질 좋은 불화수소를 사용하면 되는데, 굳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국산화할 필요가 있습니까.”
한국무역협회·산자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77%였던 불화수소 대일 의존도는 2021년 13%로 줄었다. 대신 중국산 불화수소 의존도가 지난해 기준 73%(2012년 20%대)로 증가했다.
이 명예교수는 수출규제를 회피하고자 한국에서 생산하는 고순도 불화수소에는 일본 기술이 적용됐다고 한다. 국내 생산이기에 수출입 통계에는 반영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수출규제 당시 정부와 언론은 “국내 업체 솔브레인이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를 양산한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1994년 솔브레인(지분 49%)과 일본 기업 스텔라 케미파(39%)·마루젠케미칼(10%)이 합작해 국내에 만든 ‘훽트(FECT)’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출규제 이전부터 스텔라 케미파, 모리타화학 등 고순도 불화수소(HF) 생산업체와 JSR, 도쿄오카공업(TOK), 신에츠(信越)화학 등 포토레지스트 생산업체, 스미토모화학 등 불화 폴리이미드(FPI) 생산업체들은 모두 양국 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국에서 소재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日 기업, 수출규제 이전부터 한국에 공장 지어
일본에서 처음 불화수소 상업 생산에 성공한 모리타화학은 2010년 ㈜이엔에프, 한국알콜산업, 삼성물산 등과 함께 충남 아산에 ‘팸테크놀로지’라는 소재 생산법인을 만들었다.
JSR은 2004년 자회사 ‘JSR마이크로코리아(지분 100%)’를 충북 청주에 설립하고 포토레지스트 상업 생산을 시작해 삼성전자에 납품해왔다. TOK도 2012년 인천에 ‘티오케이첨단재료’를 설립해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에는 불화 폴리이미드가 필요하다. 이 폴리이미드는 전량 ‘동우화인켐’이 납품한다. 동우반도체약품으로 시작한 동우화인켐은 일본 스미토모화학이 1991년 한국에 세운 자회사(지분 100%)다. 동우화인켐의 지난해 매출은 2조8785억원이다. 스미토모화학의 매출액은 한화로 23조원이었다.
이 명예교수는 “국제 분업, 협업 질서를 무시하는 과도한 국산화는 오히려 우리 산업을 망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음식점에 비유해 국산화를 비판했다.
“식당은 좋은 재료를 싸게 구매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이를 좋은 가격에 많이 팔아 매출을 올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 좋은 재료를 구하거나 음식을 잘 만들려는 생각보다는 가게 뒤편에 텃밭을 얻어놓고는 채소 종자(種子)부터 비료, 포장지, 주방 세제, 그릇까지 전부 자기 손으로 하겠다고 하면 이 식당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차별적인 산업의 국산화, 자립도 이와 다를 게 없어요. 자재를 저렴하게 사와 부가가치를 불어넣고 이를 비싸게 파는 게 합리적인 겁니다.”
넘지 말아야 할 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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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철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가 소송을 앞두고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뉴시스 |
“양국 기업은 이번 수출규제에 대해 제3국 우회 수출이라든지 한국 내 공장 설립 등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는 무력화됐죠. 과거 미국이 자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 연 168만 대로 제한하는 수출자율규제 조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미국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방식으로 규제를 돌파했죠. 이번 한일무역 마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기업 입장에선 굳이 일본에서 생산할 필요 없어 한국 현지 생산을 택하게 된 거죠.”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부정적 효과는 사실상 없다고 평가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대학교수인 B씨는 “극일이 한국 경제의 궁극적 목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반도체 업계와 반도체 협회 관계자들은 “오히려 이번 수출규제를 계기로 소재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등 공급망 다양화를 이뤘다. 유통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유통비도 줄어 긍정적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전문가들은 한일 양국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하나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선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지급을 위한 일본 기업(PNR)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이다. 지난 8월 11일 대구지법은 일본제철 측이 낸 즉시항고를 기각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경고해온 ‘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이라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 힘들다는 속내다. 이 때문에 임기가 9개월 남은 현 정부에서는 시간을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 선을 넘는 순간 일본이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