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삼성전자가 수원에 공장을 지을 때의 일이다.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이병철(李秉喆) 회장은 “죽어도 공장 부지를 43만 평(142만1488m2)으로 정하라고 했다. 사장들은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죽어도 43만 평으로 해야겠다고 고집했다.
“일본 히다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노?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노? 어디 내 말이 틀렸노?”
삼성전자는 1988년 2월 4M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이미 일본 도시바는 1985년, 히다치는 1986년에 4MD램 개발을 마치고 양산(量産)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보다 앞선 1987년 가을 “우리나라 반도체는 전부 일본 것을 베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었고, 이는 후발 주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이 기사를 읽은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
이병철 회장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진대제(전 정보통신부 장관) 박사가 비장하게 말했다.
“반드시 16MD램을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 박사의 다짐을 듣고서야 이병철 회장의 노기는 풀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났다. 진 박사는 1989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16MD램을,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D램을 개발해 이병철 회장과의 약속을 지켰다.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
일본의 원로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 씨는 10년 전 《조선일보》 선우정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병철 회장은 자기를 만날 때마다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라면서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다”고 말했다.
선우정 특파원이 “정말로 ‘따라잡겠다’고 말씀하셨나요?”라고 묻자, 하세가와 씨는 이렇게 답했다.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세가와 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는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요. 일본의 힘이 아주 강할 때 그는 도전했고, 결국 세계 1위를 만든 것입니다.”
하세가와 씨는 이병철 회장을 혼다자동차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에 비견하면서 “공격적으로 파고든 강한 집념이 서로 닮았다”고 말했다. ‘무엇에 파고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꿈에.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이었지요. 수십 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꿈을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병철 회장의 못다 한 꿈은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았다. 1970년대에 사재(私財)를 털어가면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던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제1성(聲)으로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정말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끌어올렸다. 기자의 대학시절에만 해도 소니가 만드는 워크맨을 흉내 낸 ‘마이마이’나 만들어 팔던 삼성은, 오늘날 시가 총액이나 이익 면에서 소니·파나소닉·도시바 등 일본 상위 전자업체 3~4개를 모두 합친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이 한국을 경원(敬遠)하기 시작한 시점은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일본식 대처승(帶妻僧)의 아들인 어느 노(老)소설가는 얼마 전 일본 유학 다녀온 사람들을 친일파(親日派)로 모는 듯한 소리를 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말았고,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 ‘친일파’들이 일본을 넘어섰다.⊙
“일본 히다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노?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노? 어디 내 말이 틀렸노?”
삼성전자는 1988년 2월 4M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이미 일본 도시바는 1985년, 히다치는 1986년에 4MD램 개발을 마치고 양산(量産)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보다 앞선 1987년 가을 “우리나라 반도체는 전부 일본 것을 베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었고, 이는 후발 주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이 기사를 읽은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
이병철 회장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진대제(전 정보통신부 장관) 박사가 비장하게 말했다.
“반드시 16MD램을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 박사의 다짐을 듣고서야 이병철 회장의 노기는 풀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났다. 진 박사는 1989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16MD램을,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D램을 개발해 이병철 회장과의 약속을 지켰다.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
일본의 원로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 씨는 10년 전 《조선일보》 선우정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병철 회장은 자기를 만날 때마다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라면서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다”고 말했다.
선우정 특파원이 “정말로 ‘따라잡겠다’고 말씀하셨나요?”라고 묻자, 하세가와 씨는 이렇게 답했다.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세가와 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는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요. 일본의 힘이 아주 강할 때 그는 도전했고, 결국 세계 1위를 만든 것입니다.”
하세가와 씨는 이병철 회장을 혼다자동차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에 비견하면서 “공격적으로 파고든 강한 집념이 서로 닮았다”고 말했다. ‘무엇에 파고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꿈에.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이었지요. 수십 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꿈을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병철 회장의 못다 한 꿈은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았다. 1970년대에 사재(私財)를 털어가면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던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제1성(聲)으로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정말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끌어올렸다. 기자의 대학시절에만 해도 소니가 만드는 워크맨을 흉내 낸 ‘마이마이’나 만들어 팔던 삼성은, 오늘날 시가 총액이나 이익 면에서 소니·파나소닉·도시바 등 일본 상위 전자업체 3~4개를 모두 합친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이 한국을 경원(敬遠)하기 시작한 시점은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일본식 대처승(帶妻僧)의 아들인 어느 노(老)소설가는 얼마 전 일본 유학 다녀온 사람들을 친일파(親日派)로 모는 듯한 소리를 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말았고,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 ‘친일파’들이 일본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