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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대만 스케치

한국 넘어 일본도 추월할 기세의 善進國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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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모습은 동남아 중진국 같아 보이지만, 경제력·시민의식은 선진국 수준
⊙ 장제스는 동상 철거 논의될 정도로 낮은 평가 받고 있지만, 그의 아내 쑹메이링은 현대 여성의 롤모델로 인기
⊙ 2023년 글로벌 상위 상장기업 7914개 중 대만 기업 97개, 시가총액 1조1670억 달러
⊙ 국민당의 억압적 통치, 중국공산 정권 겪으면서 식민지배했던 일본에 대한 호감 형성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내년 1월 총통 선거를 앞두고 국민당은 중국과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국민당 지지자들은 대개 60대 이상층이다. 사진=유민호
  ‘정신 차리고 보니, 미국 일방 승리.’
 
  최근 일본 신문에 실린 사설의 제목이다. 해학적 타이틀이지만, 내용은 정치·경제·군사·외교 문제로 채워져 있다. 3년간 팬데믹을 거친 뒤 나타난 2023년 이후 글로벌 현황을 다루고 있다. 결론은 ‘미국 1강(?)’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서방 선진국과 중국·러시아를 제치고 팬데믹 이전 상태에 도달한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올해 3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1년 전과 비교해 4.9%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0.6%, 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0.1%를 기록했다. 기대를 모았던 중국 또한 4.9% 상승. 하지만 이는 공산당 정부의 반짝 이벤트에 불과하다. 부동산 추락, 수출 침체로 인해 중국 경제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전체주의·공산주의 역사가 그러하듯, 세우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빠르다. 금융 시장을 봐도 달러 초강세와 함께 전 세계 돈이 미국으로 몰려든다. 반도체와 전기자동차(EV)를 비롯한 첨단 기업도 전원 미국행이다. 대적할 라이벌 자체가 없는 미국 1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 전쟁은 미국의 의미와 역할을 한층 더 절실하게 만드는 아메리카 파워의 현장이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을 경우, 푸틴의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연합(EU) 전체로 퍼질 것이다. 유럽 내 반미(反美) 선두 주자 독일이나 프랑스조차도 갑자기 미국에 매달리는 이유다. 이미 두 달째 접어든 가자 전쟁도 마찬가지다. 원만하게 매듭짓지 못할 경우, 피해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슬람권에 밀려들 것이다. 유가 급등으로 전 세계 겨울 난방비도 급등할 것이다. 이슬람권은 입(口) 지원만 할 뿐, 하마스 지원에 소극적이다. 이슬람권 대부분은 석유 자금으로 지탱되는 독재 정권 국가들이다. 가자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반대파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의 내분이 한층 더 우려된다. 결국 사방팔방이 달러와 무기는 물론 미국의 권위에 매달리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망하든, 가자 전쟁이 주변 전쟁으로 확산되든 말든, 미국 1강과는 무관하다.
 
 
  미국 ‘1 強’ 시대와 대만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11월 미중(美中)정상회담의 칼자루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쥐고 있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의 체면도 살려주고, 급추락하는 중국 경제를 조금이나마 붙잡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필자의 지론이지만, 미국은 중국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없이 살 수 없다. 미중 디커플링 이후 두 나라의 상황이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5년 만에 대만(臺灣)의 타이베이(臺北)를 방문했다. 초읽기에 들어섰다는 중국의 대만 침략, 내년 1월에 시행될 총통 선거를 앞두고 현지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크게 보면 대만 전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하자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대만의 모습을 정확히 보려면 책이나 비디오에 쏟는 100시간보다, 현장 공기를 1시간 정도 살피는 것이 더 낫다.
 
  한국인들의 평균 정서일 듯하지만, 대만에 대한 인지도나 평가는 ‘아주’ 낮다. 중국이 워낙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섬나라 대만이라고 하면 작고 무시해도 될 만한 대상으로 여긴다.
 

  대만의 글로벌 위상은 한국이 보는 것과 많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작지만 크고, 외면보다는 내실, 총론보다 각론, 말보다 행동에 근거한 나라가 대만이다. 눈에 보이는 파워가 아니라 영향력으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나라다. 국가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메이드 인 타이완(Made in Taiwan)’이란 브랜드로 생존해나간다. 모두를 놀라게 할 슈퍼파워나 만리장성급 이벤트는 ‘전혀’ 없다. 그러나 잠시라도 안 보이면 주변 모두가 찾고 그리워할 대상이다. 그린(Green) 시대의 총아인, 신소재로 만든 1만 달러짜리 대만제 자전거는 그 예이다.
 
  8년간에 걸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리더십은 소프트웨어(software) 강국, 세계 최첨단 ‘메이드 인 타이완’을 창조해냈다. 지도자 하나 잘 만나면 나라 전체가 비약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차이 총통이 보여줬다.
 
  뉴스로도 전해졌지만, 지난해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을 앞질렀다. 한국은 3만2886달러, 대만은 3만3565달러로 한국보다 679달러 높다. 올해는 한층 더 벌어질 전망이다.
 
 
  대만 기업, 질적으로도 한국 능가
 
11월 9일 열린 ‘제1회 리궈징상’ 시상식. 가운데가 차이잉원 총통, 그 오른쪽이 TSMC 창업자이자 리궈징상 수상자인 모리스 창, 맨 오른쪽은 미국 반도체회사 엔비디아 CEO인 젠슨 황. 사진=차이잉원 페이스북
  미중 디커플링의 결과지만, 대만 기업은 글로벌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2023년 글로벌 상위 상장기업 7914개 가운데, 대만 기업은 97개에 달한다. 한국은 하나 더 많은 98개다(11월 3일 기준). 그러나 기업 시가총액으로 본다면 대만이 앞서 있다. 97개 대만 기업의 시가총액은 1조1670억 달러다. 한국은 1조570억 달러로 1100억 달러 열세다.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구 비례로 보면 달라진다. 한국 인구는 5100만 명, 대만은 2300만 명이다. 인구 비례로 따진다면, 한국 글로벌 상장기업 규모나 시가총액이 대만의 두 배 이상에 달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다.
 
  대만은 양(量)으로서만이 아닌, 산업구조의 질(質)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을 제압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하이테크 산업이 대만의 주력 산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만 최고 기업은 반도체 전문 TSMC다. 글로벌 13위 기업으로, 시가총액이 4692억 달러에 달한다. 한국의 간판 삼성전자는 어떨까? 글로벌 24위, 시가총액 3466억 달러다. 미중 디커플링 이후 상황이지만, 전 세계가 보조금까지 제공하면서 특급 손님으로 모시는 기업이 TSMC다. TSMC는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에도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다.
 
 
  대만의 親日, 한국의 反日
 
  한국인이 갖는 대만에 관한 일반적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인 입장에서 타이베이 도착 즉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바로 친일(親日) 공기다. 대만은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을 최고 모델로 삼으면서 일본 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출세의 하나로 여긴다. 일본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도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는 나라가 대만이다. 도시 어디에 가도 일본어가 통하고, 일본 노래도 들린다. 젊은이들의 일본에 대한 열의나 관심도 대단하다. 수많은 번역판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케이블 채널로 24시간 방영된다. 과정과 수단이 아니라, 일상과 목적으로서의 일본이다.
 
  한국만큼 전 세계에서 일본을 눈 아래에 두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도든, 한국인 상당수는 ‘공식적으로’ 일본을 무시한다. ‘눈 아래에 두는 것이 잘못된 거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무조건’ 눈 아래로 처리한다는 점에 있다. 도쿄발(東京發) 뉴스의 상당 부분은 ‘일본=내일이 없거나 한물간 나라’로 묘사돼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이 우월감을 느낄 만한 얘기들도 넘친다. 일본 전체가 K-팝에 난리라는 식의 보도가 일상적이다. ‘흠뻑, 발칵’과 같은 부사와 함께 K-세계가 일본을 제압한 느낌이다. 거꾸로 J-팝 콘서트 한국 공연이 전원 매진 상태에서 거의 매달 펼쳐진다는 얘기에는 귀를 닫는다.
 
  한국인 대부분은 대만의 친일 공기를 접하는 순간 의문이 든다. “왜 일본을 이렇게 좋아하지?” 사실, 의문 속에는 ‘50년에 걸친 식민지 교육의 잔재’라는 나름의 답안도 갖고 있을 듯하다. 주자학적(朱子學的) 세계관의 극치지만, ‘정체성(正體性)과 혼(魂)을 잃은 나라’라는 식의 단정도 한다.
 
  대만은 묻는다.
 
  “왜 한국은 일본을 싫어하는가? 일본 음식도 좋아하고, 일본 노래도 즐기면서 일본을 찾는 최대 관광객이 한국이라는데, 왜 한국은 일본을 멀리하는가?”
 
  한국은 대만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고, 대만은 거꾸로 한국이 왜 일본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다. 출발점 자체가 180도 다르다. 따라서 서로가 납득할 만한 답을 얻기 어렵다. 일본을 대하는 눈은, 한국인과 대만인이 가진 유전자(遺傳子)의 차이 그 자체일지 모른다.
 
 
 
‘구관이 명관’

 
  대만이 친일국가가 된 이유는, 역사적·환경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대만 출신자와 중국 출신 외지인(外地人) 사이 모순과 갈등이 친일의 가장 큰 배경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도 중요하지만, 냉전(冷戰) 당시 ‘점령군’ 중국국민당이 보여준 공포정치와 이후 공산독재 정권 중국이 보여준 위압적인 자세가 ‘대만=친일’로 몰아세운 일등공신이다. 전부 악랄하고 잔인한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것이 어제의 식민지배자였던 일본이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인 셈이다.
 
  대만은 단순히 감정 차원의 친일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익히고 배우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일본도 1970년대부터 대만에 적극 투자하면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修交)하면서 대만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했다. 대만인들은 단교(斷交) 당시 한국이 보여준 차갑고도 무례한 외교 모습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은 한중수교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이래 지속된 자유우방 대만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쳤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대만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가장 믿었던 친구가 칼로 등을 찌른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20년 전인 1972년 대만과 단교했다. 한국과는 달리 대만인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위로하면서 끝낸 ‘아름다운 단교’였다. 정부 간 공식 채널은 끊어졌지만, 반민반관(半民半官) 형식의 일본-대만 교류협회를 만들어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걸친 다양한 만남이 이어졌다. 대만인들은 대만과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를 지금도 기리고 있다.
 
 
  대만은 善進國
 
타이베이그랜드호텔. 대만 근현대사가 얽혀 있는 곳이다. 사진=유민호
  대만 체재 중 머문 곳은 타이베이그랜드호텔(圓山大飯店)이다. 호텔로서가 아니라, 대만 근현대사의 무대란 점에서 오래전부터 관심이 가던 곳이다.
 
  그랜드호텔 자리는 한국 남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남산에는 일본 천황을 기리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다. 그랜드호텔 자리에는 대만신궁(臺灣神宮)이 있었다. 남산처럼 타이베이 전체를 내려다보는 명당자리다.
 
  그랜드호텔은 1949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대만으로 피란 온 뒤 곧바로 지은 당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텔이다. 대만신궁을 허물고 중국풍 초대형 호텔을 지은 것이다. 호텔 건설비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부담했다. 따라서 호텔 주인이자 총책임자는 쑹메이링이었다. 대만을 찾는 외국 정상(頂上)의 숙소로 활용되고 장제스 또한 이 호텔을 자주 찾아 사실상 총통의 개인사무실로도 활용되었다.
 
  타오위안(桃園)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로컬 버스로 이동했다. 항상 강조하지만, 느리고 싼 로컬 버스가 이국(異國) 체험의 첫 출발점이다. 함께 자리한 현지 사람들과 천천히 펼쳐지는 차창 밖 풍경을 통해 현지 공기를 체득할 수 있다.
 
  로컬 버스터미널은 공항 뒤 구석에 있다. 차비가 얼마인지, 현금으로도 지불할 수 있는지 여성 경찰에게 물어봤다. 그는 며칠이나 머무를 건지 되물었다. 한 달 이상이라고 답하자, 따라오라더니 대중교통 한 달 이용카드 판매기 앞으로 안내했다. 한국도 유사한 카드를 곧 도입한다고 들었는데, 버스·전철·모노레일 심지어 자전거도 한 달 내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카드(5만원대)다. 도심까지의 고속기차가 왕복 1만3000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싸다. 50대 여성 경찰은 자신도 이용하는 교통카드라면서, “타이베이에 머무는 한 택시 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국격(國格)의 지표로, ‘선진국(善進國)’ 지수(指數)에 관한 것이 있다. 농담 같은 지표지만, 선의를 얼마나 베푸느냐에 따라 국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디지털 경쟁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선(善)진국’ 결정 요소다. 1인당 소득 10만 달러인 나라라도, 불친절하고 어두울 경우 ‘선(善)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여유롭고 친절하며 밝은 자세는 ‘선(善)진국’ 대만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대만에 36일간 머무르면서 실감했지만, 대만인은 잘 웃고 친절하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일제 흔적 보존하고 있는 대만·중국

 
대만 총통부 건물은 일제의 대만총독부 건물이다. 사진=대만 총통부
  그랜드호텔은 이름에 걸맞게 초대형 빌딩이다. 황금색 지붕에다 높이 87m에 12층으로 된 건물이다. 대만신궁 흔적을 보고 싶었지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만신궁은 예외적이지만, 대만은 식민지 당시 건물이나 흔적을 거의 대부분 보존하고 있다. 타이베이 곳곳에 식민지 당시 건물이 남아 있다. 총독부 건물을 아예 없애버린 한국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대만은 일제의 대만총독부 건물을 지금도 총통부(總統府)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공산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면 만주 철도와 일본군이 사용했던 건물 대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고 재활용되고 있다.
 
  대만신궁의 풍수를 보기 위해 호텔 최고층에 올라가 보았다. 왼쪽으로 강이 흐르고 호텔 정면 남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1945년 이전에는 나무로 빽빽하게 뒤덮인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남산처럼 서울을 완전히 내려다볼 수 있는 파노라마 풍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이베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그랜드호텔 풍수를 살펴본 뒤, 현대 대만 역사 발굴에 들어갔다. 호텔 지배인에게 장제스가 남긴 문장이나 글씨가 있는지 물어봤다. 놀랍게도 호텔 안에는 장제스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장제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관련 기념물을 호텔 안에 둘 수 없다고 한다.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1949년 중국에서 피란 온 국민당 출신자들과 그 가족들이 줄고,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응원하는 대만 출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장제스는 대만에서 1949년부터 1975년까지 26년간 1인 독재자로 군림했다. 집권 기간 중 중국공산당의 무력(武力)침략도 막아냈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파를 처단하고 일반인도 공산당과 연관 지어 무차별 투옥·처벌했다. 그 주된 피해자는 현 집권당인 민진당의 기반인 대만 출신자들이다. 1947년 1만8000명의 대만 출신자들이 희생된 백색테러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필자가 보기에 20대 이하 대만인들에게 장제스는 악(惡)의 대명사다.
 
 
  차이잉원, 쑹메이링 장학금으로 유학
 
중정기념관에 있는 장제스 동상은 철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진=유민호
  장제스상(像)이나 기념관 폐쇄도 이어지고 있다. 타이베이 한복판에 있는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中正)기념관 내 동상 철거 문제는 이번 총통 선거의 이슈로 떠올랐다. 대만 출신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상은 물론 기념관 자체도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쑹메이링 기념우표. 사진=유민호
  이에 반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은 현대 여성의 롤모델로 부상(浮上)하고 있다. 쑹메이링은 장제스가 숨진 뒤 대만을 영원히 떠났다. 장제스의 첫째 부인이 낳은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 되면서 사실상 미국 망명을 떠난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뉴욕으로 간 쑹메이링은 칩거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활동도 거의 중단했다. 자신이 만든 장학재단을 통해 대만 젊은이의 해외 유학을 돕는 활동 정도만 했다. 차이 총통이 1980년대에 쑹메이링이 세운 장학재단의 도움으로 해외 유학을 한 주인공이다. 평소 쑹메이링은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응원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쑹메이링은 상하이(上海) 출신 쑹 씨 세 자매[쑹아이링(宋藹齡)·쑹칭링(宋慶齡)·쑹메이링(宋美齡)] 중 막내다. ‘돈을 사랑한 첫째 쑹아이링, 중국을 사랑한 둘째 쑹칭링, 권력을 사랑한 셋째 쑹메이링’이란 수식어로 표현되는, 현대 중국의 역사 그 자체다. 파란만장한 세 자매의 인생을 통해 중국과 대만 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쑹메이링의 노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현재 대만 여성의 정치 참여 비율은 아시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거의 50%대로, 북유럽권에 육박할 정도다.
 
 
  박정희 사진을 만나다
 
그랜드호텔에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 방문 당시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오른쪽부터 박정희 대통령, 장제스, 육영수 여사. 사진=유민호
  기념품을 사러 호텔 내 선물 코너에 들렀다. 쑹메이링 관련 우표와 사진은 넘치지만, 장제스와 관련한 기념물은 하나도 없었다. 종업원에게 장제스에 대해 묻자, 호텔 로비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끝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말한다. 귀빈(貴賓)들의 호텔 방문 당시 기념사진이 전시된 곳이다. 50여 장의 흑백사진이 길게 장식돼 있었다. ‘반공전선(反共戰線)’ 대만을 찾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존슨을 비롯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장제스와 함께하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세계 지도자와 별도로 만나는 쑹메이링의 사진도 많았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1966년 대만 방문 당시의 흑백사진도 걸려 있어 반가웠다. 연미복(燕尾服) 차림을 한 49세의 젊은 대통령과 한복 차림의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장제스의 안내로 로비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다. 쑹메이링의 모습도 사진 속에 있었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연령대인지, 어디 출신인지에 따라 이 사진들에 대한 감회나 해석도 다를 듯하다. 분명한 것은 복수적(複數的)·입체적 세계관에 기초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제를 오늘의 잣대로, 오늘을 어제의 잣대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의 역사관은 조화·평화·교훈이 아닌, 투쟁·반목·전쟁으로서의 역사관일 뿐이다. 한여름밤 폭죽처럼, 눈요깃감은 되겠지만 결코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숨어 있는 대만의 진짜 모습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보다 높지만 타이베이 시내의 이발요금은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에 불과하다. 사진=유민호
  대만에 머물면서 내린 결론이지만, 대만은 이미 아시아의 최첨단 선진국 자리에 오른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나 TSMC의 세계 제패(制霸)는 우등생 대만이 가진 수많은 얼굴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만은 한국을 이미 추월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도 따라잡을 나라가 대만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필자의 이러한 평가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타이베이를 장식하는 도시 풍경이라고 하면, 거리에 촘촘히 늘어선 싸구려 식당이나 발마사지 센터부터 떠오른다. 곳곳에 펼쳐지는 야시장(夜市場)과 만둣집 방문이 대만 관광의 일상이다. 미국·유럽 나아가 일본 같은 선진국의 모습과는 다른, 동남아시아의 중진국(中進國) 같은 풍경이 대만의 일상이다. 사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미국 1강도 알아채기 어렵다.
 
  대만의 진짜 모습은 타이베이에서 벗어나야 보인다. 대만 경제의 원동력은 서쪽의 신주(新竹)와 남쪽의 가오슝(高雄), 나아가 중국에 포진해 있다. TSMC 공장 하나의 규모는 서울 월드컵경기장 3개 정도 크기에 달한다. 단일 건물로, 대략 가로·세로 600m에 달한다. 주변 부대시설을 합칠 경우, 가로·세로 3km 정도의 부지다. TSMC는 이 같은 초대형 공장을 대만 안에서만 무려 17개, 외국에는 신규 공장을 포함해 6개나 갖고 있다. 이런 모습은 도심지에서는 안 보인다.
 
  1970년대 한국 풍경과 겹쳐지는 타이베이지만, 반대로 해석해 보면 대만의 저력(底力)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경쟁력의 원천이 20세기풍(風) 대만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 수준의 시민의식
 
  허름하고 작지만, 가게를 보면 거품 하나 없이 ‘꽉 차’ 있다. 최저가 물건을 제공하기 위해, 장식이나 부수적인 모든 것을 전부 생략한다. 아파트를 봐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곧바로 자기 집 문 앞으로 연결되는 식의 구조다. 로비도 없이, 공간 활용의 극대화라 할 수 있다. 외면이 아닌 내실이 우선이다.
 
  이 결과, 대만 물가는 합리적이다. 필자가 체험한 서민 시장에서의 체감 물가는 생필품의 경우 한국의 거의 절반 정도다. 음식과 관련된 물가는 한국의 3분의 1, 아니 4분의 1 정도에 그친다. 거리 식당에서의 식사 한 끼도 2000원 정도면 해결된다. 소모품의 경우 1000원 이하 상품들이 즐비하다. 옷이나 신발도 1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한국인이라면 대만에 발을 딛는 순간, 부자가 된 느낌이 들 것이다.
 
  높은 시민의식은 대만을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만인들의 준법정신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다. 횡단보도를 오가는 사람, 오토바이와 자동차 사이의 신호등 질서가 거의 완벽하게 지켜진다.
 

  줄 서기 문화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새치기 없이 줄을 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버스가 올 경우라도 허물어지지 않고 지켜지는 줄 서기 문화가 진짜 선진국형이다.
 
  시간 엄수도 마찬가지다. 대만 체재 중 대학 수영장에 매일 다녔는데 개장·폐장 시각이나 청소·휴식 시각이 1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수영장은 대만의 복지 수준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일반 시민도 이용할 수 있는 50m 올림픽 사이즈 수영장이 도시 곳곳에 널려 있다. 5만원 정도만 내면 한 달 내내 이용할 수 있다.
 
  거리 청결도 세계 최고다. 쓰레기통이 아예 없고 청소부도 보이지 않지만, 도시 전체가 깨끗하다. 일본인처럼 쓰레기는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갖고 간다.
 
 
  자유세계, 대만 수호 의지 강해
 
관광상품용 티셔츠들. ‘臺灣’ ‘FOMOSA’라는 표기나 디자인은 대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진=유민호
  중국-대만 전쟁이 3~4년 내에 터질 것이란 얘기가 무성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곧바로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3번이나 공언했다. 반도체 때문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수호라는 점에서 대만 수호를 약속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자유세계의 대만 수호 결의는 한국 방어 의지보다 한층 더 강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대만과 한국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만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다.
 
  왜일까? 한반도보다 대만과 관련한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최첨단 반도체도 문제지만, 대만이 중국에 점령될 경우 중국의 태평양 진출은 물론 해상운송로(Sea Lane)도 차단될 수 있다. 한국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고, 미국·유럽·일본의 국익(國益)에 반하는 대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의 대만 수호 의지는 이미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다. 영국·프랑스·독일은 최근 일본과 함께 남중국을 무대로 한 합동군사훈련에 들어갔다. 대만전쟁 발발 시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유럽·호주 모두가 지원에 나선다는 의미다.
 
  한국은 아직 대만지원전선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토(NATO)에 대한 외교를 막 시작했지만, 한반도 전쟁 시 과연 EU가 도와줄지는 의문이다. 대만 지원 동참은 대만과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토를 포함하는 자유세계 전체와 연결되는 ‘안보보험’에 해당된다. 하루라도 빨리 구체화하는 것이 가치와 원칙에 근거한 외교에도 어울린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란 프리미엄 하나에 매달린다. 그러나 지정학적(地政學的) 차원의 글로벌 역학(力學)관계로 보면 대만의 위상이 한국을 능가한다.
 
 
  一枝草 一點露
 
  2024년은 글로벌 선거의 해다. 4월에는 한국 총선이, 11월에는 미국 대선이 있다. 전쟁 중인 러시아는 3월에, 우크라이나는 여름에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5월에는 인도가 총선을 치른다. 러시아처럼 결과가 뻔한 선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선거 결과에 따라 국가 정책이 180도 돌변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정치 현상인데, 타협이나 중간이 없다.
 
  대만도 1월 총통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결과에 따라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 국민당 후보는 ‘더러운 평화론’ 신봉자다. 전쟁 대신 대화를 통해 중국과 평화롭게 살자고 주장한다. 민진당 지지자들은, ‘국민당 총통 탄생=중국공산당의 대만 안방 점령’으로 본다. 홍콩보다 더 쉽게 중국이 무혈(無血)입성하고 결국은 중국과의 합병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대만의 순수 고사성어(故事成語)로 ‘일지초 일점로(一枝草 一點露)’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약하고 작은 풀잎에라도 이슬 한 점이 내려올 수 있다’는 의미다. 대만인들이 평소 자주 인용하는 말로, 하늘의 선물(이슬)은 금수저·흙수저, 갑을(甲乙)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내려진다는 뜻이다. 기아와 전쟁을 포함한 그 어떤 시련이 와도 헤쳐나갈 길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본인 스스로에게 있을 뿐, 적든 많든 자기에게 내려진 이슬의 가치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 탓과 남의 떡에 주목하는 2023년 한국 세태와 정반대 되는 세계관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미국 일방 승리와 대만 비약(飛躍)’이라고 할까? 일본을 모델로 삼으며 배우고 익힌 결과 조만간 일본 추월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나라가 대만이다. K-국뽕과 내로남불에 취해 있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중국을 상대로 한 생존에 모든 것을 건 나라다. 대만은 풀 하나, 이슬 하나 전부 모아 대항하는 총력(總力) 생존 전략을 펴고 있다.
 
  한때 한국이 대만을 앞서가면서 대만의 롤모델로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은 갔다. 대만을 여전히 우리보다 뒤처진 동남아 중진국 정도로 여기는 한, 한국과 대만의 국격과 국력차는 한층 더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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