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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시경캡 이야기] 회사가 출퇴근 시켜주는 두 명의 기자 중 한 명

사건기자들의 ‘두목’, 기자 훈련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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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직책 아니지만 사회부장·편집국장 버금가는 역할로 사회면 제작
⊙ 경찰기자에게 자질구레한 좀도둑 사건부터 강도·화재·대형사건 등 취재 지시
⊙ 필자의 경우, 시경 캡 때 마신 술이 그 이후 마신 술과 同量
⊙ 국내 언론사상 최초의 여성 시경캡은 동아일보의 허문명 기자,
    두 번째로 조선일보 김수혜 기자 등장

金孝在 국회의원(한나라당)
⊙ 1952년 충남 보령 출생.
⊙ 휘문고·고려大 사회학과 졸업.
⊙ 조선일보 국제부장·문화부장·기획취재부장·독자부장·논설위원,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선대위 언론특보, 인수委 기획조정분과 상임자문위원 역임.
    現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사회부 경찰출입 기자들.
  “캡 뗐어요.”
 
  “언제?”
 
  “지금 막요. 2시5분 의료진이 최종적으로 산소호흡기를 떼어 내고 곧 영안실로 옮긴답니다.”
 
  1987년 7월 5일 일요일 새벽 2시10분.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일요일 새벽 1시가 넘어 서울 광화문 朝鮮日報(조선일보) 본사에서 출발해 경기도 의왕에 있는 집에 막 도착하자마자 걸려온 전화.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다. 송화기 저편은 사회부 야근 데스크. 목소리는 다급했다.
 
  全斗煥(전두환) 정권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 도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한 달 가까이 뇌사 상태를 헤매던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가느다란 생명을 유지하던 산소호흡기를 결국은 떼어 냈다는 보고였다.
 
  일요일 오전 배달되는 신문 가운데 뉴스면 전체를 바꿔야 할 상황이었다. 이미 지방으로 내려가는 신문은 인쇄를 마치고 트럭에 실려 신나게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을 시각이다. 서울 시내 일부에 배달되는 신문이라도 대형 뉴스를 실어 내보내야 했다. 남은 시간은 많아야 한 시간.
 
  독자들이 4시쯤 신문을 받아 보기 위해서는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문사 지국에 최소 30분 전에 신문이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전 3시부터는 서울 시내판 신문이 윤전기에서 인쇄되어야 했다. 윤전기에서 3시에 신문이 쏟아져 나오려면 최소한 2시40분에는 윤전기에 걸려야 하고 기사 마감은 2시30분. 계산해보니 남은 시간은 대략 20분이었다. 당시 신문사 기자들은 토요일에 근무하고 일요일에 쉬었기 때문에 일요일자 신문은 배달이 되고 월요일자 신문이 없었던 시절이다.
 
  “당황하지 말고, 먼저 야간국장에게 알린 뒤 부장과 국장에게 윤전기를 세우겠다고 보고한 다음 윤전기를 즉각 세우고 내 책상 서랍 속에 미리 만들어 뒀던 이한열 관련 기사를 먼저 출고해.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윤전기가 돌아가지 않도록 잡아 두도록.”
 
  당시 필자는 사회부 시경캡을 맡고 있었다. 시경캡은 윤전기를 세울 권한이 없다. 그러나 권한을 따지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것보다는 일단 일부터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 낫다.
 
  경기도 의왕에서 광화문까지 정상적이라면 아무리 막히지 않아도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 요즈음 교통상황이라면 아무리 새벽시간이라고 해도 40분은 어림없을 시간이지만 당시만 해도 교통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더구나 새벽시간엔 차량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여유도 없이 뛰쳐나와 광화문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2시35분. 어떻게 그 거리를 그 시간 안에 운전해서 왔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불가사의하다. 그 시각이면 신문사 편집국은 일을 마치고 대부분 의자에 기대 선잠을 자거나 휴게실 의자에 몸을 구부려 의자 방석을 이불 삼아 눈을 붙일 상황. 편집국에서 넘어간 원고를 납 활자로 採字(채자)해 윤전부에 넘겨야 할 文選(문선)부 직원들 역시 일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쉬어야 할 시각이다. 편집국·문선부·윤전부에는 비상이 걸렸고 부장·국장도 속속 편집국에 도착했다. 신문사 전체가 비상이 걸린 것이다. 편집국은 새벽 경매 시장을 방불케 하는 고함소리와 욕설, 어수선함이 뒤엉켰다.
 
  다행히 이한열군 사망 관련 기사는 미리 만들어 둔 게 있었다. 이군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 것이 한 달 가까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 산소호흡기를 떼느냐가 관건이었다.
 
  편집국에 도착해 문선부로 이미 넘어간, 미리 만들어 뒀던 원고를 다시 그날의 상황에 맞게 손질해 최종 마감한 시각은 정상적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새벽 3시쯤이었다. 지방판에 실린 1면 기사를 들어내고, 사회면 톱기사는 사이드로 밀어낸 다음 이한열군 사망 기사로 대체했다.
 
  “李韓烈군 死亡”.
 
  시커먼 바탕에 굵고 흰 고딕체 ‘내리다지(세로)’ 제목과 “오늘 새벽 최루탄 負傷(부상) 27일만에”라는 副題(부제)는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신문지면에서 파닥파닥 뛰었다.
 
  일요일이었던 1987년 7월 5일 새벽 5시를 전후해 서울 지역 조선일보 독자들은 두세 시간 전에 일어났던 뉴스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1987년 6·10 항쟁과 6·29 선언, 그리고 5공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장식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한 명은 편집국장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을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떼고 영안실로 옮겨지자 모든 언론이 ‘이한열군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언론사 사회부 시경캡. 모자(Cap)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언론사에서는 캡틴(Captin)을 그렇게 줄여 불렀다. 경찰기자의 대장쯤으로 부를 수 있겠는데, 사실은 ‘두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주로 이런 ‘막일’을 한다. 정식 직책도 아니다. 간혹 신문에 ‘편집국장 누구, 정치부장 누구, 경제부장 누구, 사회부장 누구’ 이런 식으로 인사발령 기사가 보도될 때 ‘시경캡 누구’는 보도되지 않는다. 정식 직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사나 방송사 내부 인사 발령에도 ‘시경캡 누구’ 이런 식으로 사령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사회부장이 “당신 내일부터 市警(시경)을 맡아주지”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임의직책이다. 물론 사회부장 마음대로 시경캡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시경캡을 정할 때 편집국장과 상의하고 회사 간부들의 의사도 듣는 것이 관행이다.
 
  시경캡은 최근 들어 정식 명칭이 ‘기동취재팀장’으로 바뀌었지만 대부분의 언론사는 그저 ‘캡’이라고 부르고 있다.
 
  언론사 내부에서 시경캡이 갖는 권한은 ‘막강’하다. 사실상 기자훈련소장이자 사건 데스크이며, 紙面(지면) 결정에 많은 권한을 갖는다.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가장 상징적인 것이 승용차 배정이다. 언론사에서는 요즈음에는 임원들에게 승용차가 배정되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임원들에게도 승용차가 배정되지 않았다.
 
  지금도 대개 언론사에서 기자들 중에는 단 두 명에게 승용차가 배정된다. 한 명은 편집국 최고 책임자인 편집국장(방송의 경우 보도국장)이고 다른 한 명은 정치부장도 경제부장도 사회부장도 아닌 시경캡이다. 회사에서 출퇴근을 시켜주는 것이다. 그만큼 하는 일이 고되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지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론사 내부 인사구조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문사든 방송사든 통신사든 일단 수습기자 시험을 통과하면 거의 모든 기자들이 배치되는 곳이 사회부다. 이곳에서 취재를 하는 방법, 기사를 작성하는 방법, 송고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데, 이때의 훈련소장이 바로 시경캡이다.
 
  市警(시경)은 서울지방경찰청의 전신인 서울시경을 뜻한다. 서울지방경찰청은 현재 정부중앙청사 뒤편에 있으나 그 이전에는 서울 남대문시장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시경이 있던 자리는 요즈음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찰조직은 金泳三(김영삼) 정부 첫해였던 1993년 당시 내무부의 한 개 조직(치안본부)에서 내무부 외청인 ‘경찰청’으로 독립했다.
 
  치안본부 시절 경찰총수는 내무부 치안본부장(차관보급)이었고, 그 아래에 각 지방마다 경찰국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경찰청은 서울시 경찰국, 경기경찰청은 경기도 경찰국 이런 식이었다. 서울시 경찰국에 출입하던 기자가 시경 출입기자였고, 그를 시경캡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울시경 출입기자를 시경캡이라고 부른 것은 대부분의 중앙 언론사가 사회부로 배치된 수습기자와, 수습기간(대개 6개월)을 마친 기자들이 주로 경찰서를 주요 출입처로 서울 전역을 분할해 취재했기 때문이다. 언론사에서는 이를 라인이라고 부른다. 가령 동대문 라인이라면 동대문경찰서에 기자실을 두고, 이를 활동 축으로 해서 청량리경찰서, 태릉경찰서 등을 동시에 담당하는 방식이다.
 


 
  사회부장에게 ‘협박’당하기도
 
사회부 기자들은 전국에서 벌이지는 대형 사건사고 현장에 투입돼 취재한다. 사진은 2003년 2월 발생한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 현장.
  서울시경 출입기자가 사건기자들을 총지휘하는 ‘두목’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다른 연유도 있었다. 바로 통신 사정 때문이었다. 요즈음이야 모든 사람들이 전화기 한 대씩을 갖고 다니지만 15년 전에만 해도 사정이 전혀 달랐다. 개인 전화기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화기 자체가 귀한 물건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전화 좀 쓰게 해 달라”며 사정을 해야 했다.
 
  그런 마당에 가장 광범위한 통신망을 유지하고 있던 기관이 경찰서였다. 경비전화라고 불리는 경찰 별도의 통신망을 전국 경찰서는 물론 파출소까지 갖고 있었다. 때문에 전국 어디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도 가장 편리한 것이 경찰 경비전화였고, 그 경비전화를 원활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이 서울시경이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 당시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봉쇄돼 외부와 통신이 두절됐을 때도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통신이 바로 경찰 경비전화였다. 그 덕분에 당시 광주 취재차 파견되어 있던 徐淸源(서청원) 당시 조선일보 시경캡(現 친박연대 대표)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광주상황을 광주에 있던 전남도경 경비전화를 이용해 서울시경 기자실로 전했고, 이 보고를 토대로 조선일보 사회부는 광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울시경은 일종의 사건 지휘소였던 셈이다.
 
  시경캡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일은 그날그날 발생한 사건을 경찰서 담당기자 또는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로부터 아침 일찍 보고를 받아 취합, 이를 정리한 다음 어떤 기사를 어떤 시각으로 다뤄야 할지를 결정해 사회부 차장과 부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보고는 주로 아침 8시쯤부터 30분 정도에 이뤄진다. 이 보고를 위한 취합은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시경캡은 다음날 오전 보고를 위해 전날 밤 일을 마친 사건기자들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 했다.
 
  보고 내용은 자질구레한 좀도둑 사건에서부터 강도·화재·대형사건 등을 망라한다. 적절하게 사회면에 올릴 기사가 있는 날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변변한 기사가 없거나 부장·차장의 마음에 쏙 드는 기사거리가 없는 날이면 괴롭기 짝이 없다. 시경캡은 사회부장으로부터 “너는 아이디어도 없느냐?”며 ‘협박’을 당하기가 일쑤다. 일반 회사와 달리 언론사는 대개 선배가 후배에게 반말을 한다. 하긴 요즈음은 이런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요즈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살인마 강호순 사건이나 유영철 사건, 큰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 용산 참사가 벌어졌을 때 현장 취재를 하는 기자들이 사건기자들이고 이들의 취재 내용을 취합해 어떤 기사를 다룰 것인지, 어떤 크기로 어떤 시각에서 다룰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기자가 시경캡이다.
 
  시경캡이 하는 일 가운데 더욱 중요한 일은 수습기자로 입사한 기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기자 훈련은 일반 회사의 사원교육과는 좀 다르다. 대기업의 경우 일단 입사를 하면 꽉 짜인 교육프로그램에 따라 연수원 같은 곳에서 여러 날 숙식을 하며 업무 매뉴얼 같은 것을 가지고 강사가 교육을 한다.
 
  언론사는 이런 프로그램 자체가 거의 없다. 수습기자로 합격해 간단한 회사소개, 선배 기자들의 경험담 정도의 교육을 받고 난 다음 사회부에 배치되는 그날부터 현장에 투입되어 일을 하며 배운다. 교육이라 하지 않고 훈련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말이 오갈 리 없다. 육두문자는 예사고 자존심의 마지막 부분을 건드리는 어투가 난무한다. 이제 갓 입사한 사회 초년생 기자가 뭘 알겠는가. 언론사에 입사하기 위해 이른바 ‘언론고시’를 통과했다고 하지만 사건 현장은 책에서 배운 이론과는 전혀 다르다.
 
 
  술도 잘 마셔야 하는 시경캡
 
2004년 7월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
  현장은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지난번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좌충우돌은 당연하지만 선배 기자들은 이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게 언론사의 전통이기도 하다.
 
  요즈음이야 컴퓨터로 모든 기사를 작성하고 送稿(송고) 역시 컴퓨터로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전화로 부르고 이를 편집국 서무가 원고지에 받아 적어 시경 캡에게 넘기는 방식이었다. 가끔 TV 드라마 같은 데서 언론사 간부가 원고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역할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을 시경캡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부, 나아가 편집국의 惡役(악역)을 맡아 하는 셈이다.
 
  오전 일정은 주로 보고를 받고 부장과 회의를 거쳐 이를 다시 일선에 나가 있는 취재기자들에게 취재 지시를 내리는 일이지만, 오후가 되면 달라진다. 점심시간 이후 오후 2시와 4시에 있는 편집국 스탠딩 미팅(편집국장석 주변에 서서 회의하기 때문에 스탠딩 미팅으로 불림)에서 최종적으로 그날 지면이 결정되면 현장에서 들어오는 기사를 손질하는 시간이다.
 
  사회부 행정부처 출입기자의 기사는 캡의 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차장과 부장으로 가지만, 사건기자의 기사는 모두 캡의 손을 거친다. 이른바 캡이 데스크(원고 수정 및 검증)를 하는 것이다. 신문에 보도되는 사건 기사에는 기자의 이름이 나오지만 사실은 거의 모두 캡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기자 훈련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자리 훈련이다. 술에 대한 한국인들의 독특한 문화 때문인지 기자는 술을 많이 마셔야 하고, 또 많이 마시더라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있다. 술에 관한 한 언론사와 가장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조직이 바로 검찰 조직이다.
 
  당시 기자들의 술자리 훈련은 혹독했다. 맥주 컵으로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시게 하고는 선배보다 먼저 취하는 후배는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 술 못 마시는 것은 죄였다. 술에 관한 한 필자도 어디 가서 못 마신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는 편인데, 돌이켜 보면 당시 시경캡 1년 동안 마신 술의 양이 그 이후 마신 술의 양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언론사 간부들의 음주 습관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사회·정치부장을 거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崔秉烈(최병렬) 前(전) 의원은 후배들과 술을 마실 때면 소주를 맥주 컵에 가득 부어 한입에 벌컥벌컥 다 마신 다음 컵을 거꾸로 머리에 얹는 의식을 거쳤다. 술잔을 다 비우지 않으면 소주를 머리에 스스로 부어야 하는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大選(대선)후보 경선 때 朴槿惠(박근혜)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지냈던 安秉勳(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출판사 기파랑 대표)은 폭탄주의 大家(대가)였다. 칼럼니스트 金大中(김대중) 고문은 술잔을 돌리거나 폭탄주는 거의 즐기지 않았으나 주량으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아직도 그렇다. 선배 가운데에는 마시고 또 마신다고 해서 별명이 又醉(우취)라고 불리는 분도 있었다.
 
 
 
禁女의 城, 시경캡

 
조선일보 첫 여성 시경캡인 김수혜 기자.
  시경캡의 역할은 또 있다. 후배 기자들의 각종 불만과 인생 상담을 한다. 필자가 처음 경찰서 출입기자를 하던 1980년대 초반 시경캡이었던 林伯(임백) 기자(현 언론재단 이사)가 그랬다. 필자를 비롯한 당시 초년 기자들은 5공 정권의 군사독재에 불만이 많았다. 술 한두 잔으로 풀릴 수 있는 불만이 아니었고, 그 화풀이는 캡으로 향했다.
 
  당시엔 통행금지가 있었다. 기자들, 특히 사건기자들에겐 통금 이후에도 서울 시내를 활보할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이 주어졌다. 바로 야간통행증. 노란 바탕에 붉은색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어 이 증명서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사실 이 통행증은 기자들이 야근을 할 때 사용하라고 준 것이지만 여러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
 
  12시 넘어 술자리가 끝나면 시도 때도 없이 봉천동에 있는 캡의 집으로 향했다.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문을 여는 술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려 있다 해도 술을 마실 돈도 변변치 않을 때였다. 동네 입구에 가서 캡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사모님이 대문 밖으로 나와 우리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12시가 넘은 시각, 술상을 봐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술 더 달라”, “안주 달라”며 실컷 ‘난동’을 부린 뒤 그대로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양말은 빨아서 가지런히 개 놓고 해장국을 끓여주곤 했다. 시경캡 부인은 경찰기자들의 하숙집 안주인이나 다름없던 시절이다. 필자가 연애를 하던 시절, 지금의 아내를 부모님께 소개한 뒤 그날 데리고 간 곳이 시경캡 집이었다.
 
  그런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인지 필자가 1987년 시경캡이 되고 난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엔 이런 일도 있었다. 일을 마치고 새벽녘에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 온 내게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당신 혹시 후배들로부터 인심을 잃은 것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아내는 “양말도 여러 켤레, 내의도 충분히 사다 놨고 소주도 부족하지 않게 준비해뒀는데”라고 했다.
 
  그제서야 난 아내의 걱정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알았다. 캡이 됐다고 해서 ‘습격당할’ 각오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아무도 집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안도감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걱정돼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선배 집을 무시로 드나들던 그런 문화는 1980년대 중반 들어 거의 사라졌다. 통행금지도 풀려 갈 수 있는 술집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선배 집이라고 마음대로 찾아 다니는 문화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거칠고 고된 일자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기자 직종이 남성 위주로 짜여 있었기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최근 여성들이 대거 언론사에 입사하기 시작한 뒤에도 사회부 시경캡 자리는 여전히 禁女(금녀)의 城(성)이었다.
 
  사관학교에 여성들이 대거 입교하고, 전방에 여성 소대장이 배출될 때에도 여기자 시경캡은 배출되지 않았다.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순보>가 창간된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여성 시경캡을 배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 금녀의 벽을 최초로 허문 것이 동아일보였다. 1991년 입사한 동아일보 허문명 기자가 2000년 11월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여기자 시경캡이 된 것이다. <한성순보> 창간 이후 한국 언론 117년 만이었다. 허 기자는 1년여의 시경캡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이후 논설위원을 거쳐 올 초 국제부 차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다.
 
  그 이후 여기자 시경캡이 없다가 올해 1월 조선일보가 1997년에 입사한 김수혜 기자를 시경캡으로 임명했다. 중앙언론사상 두 번째다. 체력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전투기 조종사에 여성이 진출한 것이 2002년(공군사관학교에 1997년 입교한 장세진 대위와 편보라 대위가 2002년에 한국 여성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이니 여기자 시경캡도 그 정도의 체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
 
  언론인으로서 시경캡이란 고되긴 하지만 영광스런 자리다. 동아일보의 경우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주간으로 퇴임해 지금은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을 지내고 있는 최규철씨가 시경 캡 출신이고, 논설위원실에 근무하고 있는 육정수·권순택 위원이 시경캡 출신이며, 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심규선씨도 시경캡 출신이다.
 
  정치인으로는 4選(선) 의원인 李允盛(이윤성·한나라당) 국회부의장과 柳根粲(류근찬·자유선진당) 의원도 KBS 시경캡을 지냈다.
 
 
  시경캡 출신 기자들
 
시경캡 출신인 필자가 소말리아 내전을 취재할 당시의 모습(오른쪽에서 두번째).
  조선일보의 경우 6선 의원으로 친박연대 대표인 서청원 의원, 曺然興(조연흥·사회부장과 조선일보 상무이사 거쳐 現 방일영재단 이사장), 李赫周(이혁주·사회부장과 정치부장을 거쳐 現 CS본부장)씨 등이 시경캡 출신이다. 현재 조선일보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崔普植(최보식·전 사회부장), 尹泳信(윤영신·경제부장), 金演光(김연광·전 월간조선 편집장), 朴斗植(박두식·논설위원), 崔有植(최유식·베이징 특파원), 朱庸中(주용중·정치부 차장), 鮮于鉦(선우정·도쿄특파원) 등도 시경캡 출신이다.
 
  조선일보 첫 여성 시경캡인 김수혜 기자는 “여기자 시경캡이 아니라 그냥 시경캡이라고 불러 달라”며 “여자라서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은 결코 듣지 않도록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했다. 필자가 김 기자와의 대화에서 느낀 점은 그녀가 기사 기획이면 기획, 정보 취합이면 취합, 기사 손질이면 손질, 수습기자와 신참기자 훈련이면 훈련, 술이면 술, 어느 하나 전임 남자 시경캡에게 뒤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신문사 선배들은 김 기자가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했다. 김 기자 휘하에 현재 경찰기자 8명과 수습기자 14명이 배속돼 있다.
 
  필자는 정치,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질 때면 가끔 조선일보 시경캡 시절이 떠오른다. “기자들 죽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쓴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후배들이 몇몇 있다. 선배들로부터 온갖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다 듣던 金昌洙(김창수) 기자는 대전 대덕구청장을 거쳐 18대 국회의원(자유선진당 수석 부대표)이 되었고, 崔球植(최구식) 기자는 정치부를 거쳐 재선의원(한나라당)이 됐다. 현직에 있는 朴勝俊(박승준) 기자는 베이징지국장, 洪準浩(홍준호) 기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楊相勳(양상훈) 기자는 정치부장을 거쳐 워싱턴지국장, 金民培(김민배)·李鍾遠(이종원) 기자는 차례로 정치부장을 거쳐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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