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업주 朴仁天, 美 중고 택시 2대로 시작해 타이어·버스 등 사업 확대… 호남 대표 재벌로 성장
⊙ 아시아나항공 사업권 획득 때부터 ‘특혜 논란’…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가 결국 ‘족쇄’
⊙ 계열분리로 독립하려는 弟 박찬구 회장, 속도조절 하는 兄 박삼구 회장
⊙ 아시아나항공 사업권 획득 때부터 ‘특혜 논란’…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가 결국 ‘족쇄’
⊙ 계열분리로 독립하려는 弟 박찬구 회장, 속도조절 하는 兄 박삼구 회장
2008년 4월 7일 금호아시아나 본사 강당. 박삼구(朴三求)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밝은 표정으로 기자 간담회에 참석했다. 회사 창립 62주년 행사 자리였다.
“숙원사업인 대한통운을 인수했습니다. 그룹 계열사 주가(株價)가 10만원까지 갈 겁니다. 앞으로 안정과 성장을 통해 500년 영속기업으로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3일. 박삼구 회장의 동생인 박찬구(朴贊求) 금호석유화학(금호석화) 회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벌써 세 번째 조사다. 박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 불똥은 박삼구 그룹 회장으로까지 튈 가능성이 크다. 박찬구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형인 박삼구 회장과 임원 4명을 사기 및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재계는 박삼구 회장의 검찰 소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 서열 10위권에 랭크된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500년 영속기업’을 선언한 지 불과 3년 만이다.
“현대 계열분리와 비슷한 수순 밟을 수 있다”
그동안 그룹의 사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으로 금호그룹의 순위(자산규모 기준ㆍ공기업 포함)는 전년 대비 12위에서 16위로 뚝 떨어졌다. 재벌그룹 순위가 1년 만에 네 계단이나 하락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계열사 숫자는 45개에서 36개로 줄었다. 그룹 사세가 확 줄어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금호그룹이 인수한 대우건설과 관련 계열사들을 재(再)매각했기 때문이다.
사세가 약해졌다고 ‘위기’라 하긴 어렵다. 박삼구 그룹 회장은 대우건설을 도로 토해내는 과정에서 ‘경영상의 책임’을 이유로 금호산업 지분 2.14%(2009년 말 기준) 중 대부분을 순차적으로 소각하고 채권단에 담보로 제출했다. 금호산업은 그룹 계열사를 묶는 사실상 지주회사다. 게다가 동생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과의 정면충돌이 예견된 상태다. 회사는 회사대로, 집안은 집안대로 풍비박산이 난 형국이다.
이들 형제의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창업주인 박인천(朴仁天ㆍ1901~1984) 회장은 슬하에 다섯 형제를 뒀는데 장남과 차남은 작고했고, 3남이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인 박삼구씨, 4남이 금호석화 회장인 박찬구씨다. 이들 형제는 지난 2009년 6월에 한 차례 싸웠다. 형제의 재산싸움으로 그룹은 당시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주축으로 하는 금호그룹(박삼구 몫)과 금호석화(박찬구 몫)로 쪼개졌다. 두 형제는 동반 퇴진을 했다가 지난해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그런데 지난 4월 돌연 검찰이 금호석화에 대해 내사를 시작했고, 금호그룹 박씨 일가에 관한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다. 박찬구 회장은 이 때문에 검찰에 세 번 출두했다. 그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금호석화) 비자금 조성 사건에 금호아시아나가 개입했다.”
박찬구 회장은 형을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벌그룹에서 재산 문제로 형제, 사촌 간에 회사를 분할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금호그룹처럼 내부의 속사정을 검찰에서 낱낱이 말하고 폭로전을 벌이는 일은 흔치 않다. 두 형제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볼 수 있다. 검찰 수사가 끝난 다음에 사실상 그룹이 소그룹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그룹의 계열분리와 비슷한 형국이 벌어질 수 있다.”
현대그룹은 2011년 4월 현재 재계 서열 27위, KCC는 33위, 현대백화점그룹은 36위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된 이유는 뭘까. 다수의 재계 전문가는 금호그룹이 ‘호남 유일의 재벌’로서 연고권을 주장하며 사세를 넓히는 과정에서 잘못된 경영상 판단과 야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금호의 급성장과 몰락을 재구성했다.

중고 美 택시 2대로 창업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시작은 미국산 중고 택시 2대로 차려진 ‘광주고속’이었다. 창업주 박인천 회장은 모아뒀던 17만원(圓) 자본금으로 광복 직후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운수사업은 재벌 수준의 규모였다.
운수업에 성공한 박 회장의 눈에 타이어 사업이 들어왔고 큰조카 박상구(朴祥求ㆍ現 부산저축은행 명예회장)씨와 함께 ‘삼양타이어’를 설립해 크게 성공했다. ‘광주고속’은 ‘금호고속’으로 이름을 바꿨고,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호남지역에 대한 배려로 고속버스 운영권을 따냈다. 고속버스와 타이어 사업은 금호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1973년 1월 1일 그룹이 출범하면서 박인천 회장이 초대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금호실업은 장남인 성용(晟容ㆍ2005년 작고), 광주고속은 차남인 정구(定求ㆍ2002년 작고), 금호타이어는 3남인 삼구, 삼화교통은 맏사위 배영환(裵英煥)씨가 맡았다.
1980년대 들어 ‘숙질의 난’이 벌어졌다. 박인천 회장의 아들들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삼양타이어 대주주이자 사촌형인 박상구씨를 쫓아낸 것이다.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은 사촌들로부터 퇴출당한 박상구 회장은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릴 만큼 극도로 흥분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1년 삼양타이어 주식을 25억원에 모두 처분했습니다. 이후 부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부산저축은행(부산상호신용금고)을 인수했습니다.”
요즘 최대 이슈인 부산저축은행 사건에는 ‘광주제일고’ 인맥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부산저축은행의 태동 자체가 광주에 기반을 둔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큰조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금호그룹은 다소 혼란을 겪었지만 건재했다.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전국적 인지도는 다소 약했다. 이때 금호의 돌파구가 된 것이 ‘아시아나’였다. 한진그룹이 이미 ‘대한항공’이라는 국적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당시 산업계에서는 제2민간항공 자체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당시 재계를 담당했던 한 언론인의 설명이다.
“산업계에서는 특히 반대가 컸죠. 국적 항공사가 굳이 2개일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여러 말이 나돌았습니다. ‘대한항공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찍혀서 또 다른 항공사를 만든다’는 얘기 등이었습니다. 결국 제2민항은 추진됐고, 산업계에선 이왕 비행기 회사를 할 바에는 재계서열 1~2위의 대기업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항공산업은 비행기 구입 등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제대로 사업을 하려면 규모가 큰 곳이어야 했습니다.”
1997년에 부채비율 약 950%
우왕좌왕 말이 많은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13일, 금호그룹을 제2민항 사업자로 선정했다. 본인의 퇴임 하루 전날이었다. 재계서열 1~2위는 고사하고, 기업규모가 10위권에도 들지 않는 금호그룹이 사업권을 부여받자, 이곳저곳에서 특혜의혹이 불거졌다.
금호는 이에 대해 “한진과 같이 우리도 물류회사다. 국내의 고속버스 시장에서 사업을 제대로 한 부분이 인정받은 것 같다”고 반박했다.
특혜 논란을 떠나 당시 환경은 금호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사업에 뛰어든 대한항공은 저금리로 돈을 빌려 항공기를 구입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나 설립 땐 금리가 높아져 항공기를 리스(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논란과 위기상황을 극복해낸 금호는 1990년대 말 ‘IMF 사태’를 맞으며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졌다. 중견 재벌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는 상황에서, 부채비율이 높았던 금호는 혹독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부채비율은 대차대조표의 부채총액을 자본으로 나눈 비율을 뜻한다. 보통 대기업들이 100%대의 부채비율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금호는 1997년 말 기준 부채비율이 947.14%로 재무구조가 약했다.
금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적으론 대형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 체질을 개선했고, 외부적으론 해외 생산기지 건설 등 공격적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2005년 부채비율이 191.91%까지 떨어질 정도로 기업 상태가 회복됐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금호는 2000년 들어 “지속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며 신규 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룹의 본격적인 ‘외형 부풀리기’가 시작된 시점이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2004년 회사 명칭을 ‘금호’에서 ‘금호아시아나’로 바꿨다.
IMF 이후 급성장한 금호를 두고도 각종 ‘특혜’ 논란이 많았다. 2004년 한 매체는 “금호가 항공 사업을 시작한 1988년부터 특혜 논란이 끊인 적이 없었다”며 ‘16년 특혜’라고 표현했다. 당시 제기된 의혹은 ‘코스닥 등록 과정에서 무리한 규정 개정’과 ‘DJ 정부의 편파적 항공 노선 배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았을까. 항공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자본잠식 상태이거나 부채비율이 동일업종 평균보다 높은 기업은 코스닥에 등록할 수 없었습니다. DJ 정부는 두 번에 걸쳐 규정을 개정했죠. 결과적으로 아시아나는 코스닥에 상장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 VIP가 대한항공을 이용했던 전례를 깨고 아시아나와 번갈아 탔습니다. 금호그룹에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구조조정 대신 몸집 키우기 선택
한 언론사는 이를 두고 ‘대통령 특별 전세기의 정권 교체’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최고의 베팅’은 노무현(盧武鉉) 정권 들어 시작됐다. 오늘날 그룹의 발목을 잡은 대우건설이 그것이다.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이유를 두고서는 여전히 말들이 많다. “기존의 금호건설과 합쳐서 건설을 그룹의 성장 축으로 넣고 싶어했다”, “대우건설 자체를 많이 탐냈었다”는 등의 얘기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재계 관계자의 시각은 좀 달랐다. 그는 “박삼구 회장의 무리한 선택을 개인적 야욕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며 “그룹이 생존하기 위해서 대우건설이 꼭 필요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대우건설이 아니더라도 어떤 자산이 탄탄한 회사를 꼭 인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대(大)비극으로 끝나버린 대우건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이렇다.
“IMF를 넘기면서 우리 기업들엔 ‘부채비율 낮추기’라는 숙명이 따라붙었습니다. ‘부채비율’, ‘BIS 비율’이라는 말 자체에 벌벌 떨던 상황이었죠.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부채총액을 낮춰야 하는 것은 상식이죠.”
회계의 기본에서 ‘자산=부채+자본’이다. 자산을 늘리면 당연히 부채비율은 줄어든다. 금호아시아나가 자산을 늘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산이 높은 회사(대우건설)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주장을 했다.
“자산이 늘어나 부채비율이 떨어지면 유동성이 확보돼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룹의 위기를 구조조정이 아니라, 당시 정권을 믿고 그룹의 몸집을 부풀려서 ‘규모의 경제’로 돌파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금호산업을 지주회사 격으로 만들어 대우건설과 엮는 것이 전략이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금호산업은 금호타이어를 앞세워 회사채를 대량 발행했는데, 우리은행 등을 비롯한 금융권에서 인수해 줬다. 당시 금호산업의 신용등급은 ‘BBB0’, 만기는 3년, 금리는 연 5.75%였다.
‘무리한 옵션’이 족쇄로
6조4255억원을 투입해 자산관리공사가 갖고 있던 대우건설 지분 72.1%를 인수한 금호아시아나는 3년 후 대우건설 평균주가가 기준가격을 웃돌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의 차액을 보전해 주는 ‘풋백옵션(put-back option)’을 내걸었다. 2009년 12월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을 밑돌면 주식을 되사는 조건이다. 박삼구 회장은 당시 대우건설 주가가 3년 내 4만원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무리한 옵션’은 금호의 족쇄가 됐다. 사실상 3만원대로 올라가야 할 주가는 1만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족쇄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하지만 2년 후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 인수에 나섰다. ‘비극’은 ‘절체절명의 위기’로 바뀌었다. 10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해 무리한 인수ㆍ합병(M&A)을 한 상황에서 미국발(發) 세계금융위기까지 닥쳐왔다.
2009년 회사채 만기가 다가왔고, 풋백옵션의 부담은 4조원대로 커졌다. 2009년 7월 대우건설을 시장에 도로 내놓았지만,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은 ‘워크아웃’이었다. 금호는 2009년 12월 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워크아웃 등을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했다. 회사채 발행 전에 해야 했을 구조조정을 무리한 몸집 부풀리기로 해결하려다 결국 3년을 지체한 셈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크게 금호타이어를 앞세운 금호산업, 그룹 내 ‘캐시 카우(Cash Cow)’ 역할을 하는 ‘효자회사’ 금호석화 등을 두고서도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를 추진하다 타이어와 건설 등 그룹의 축을 무너뜨린 우를 범한 것이다. 만약 대우건설을 제대로 인수해 또 하나의 효자회사로 키워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대우건설 인수 때로 돌아가 본다. 대규모 베팅을 앞두고 박삼구-박찬구 형제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박찬구 회장은 그동안 박삼구 회장에게 금호아시아나의 문제와 관련, 금호석화엔 불똥이 튀지 않게 하라는 의사를 밝혀왔지만, 대우건설 인수 건으로 모두 무산됐다.
대우건설을 내놓고 결국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25년 동안 유지된 ‘형제경영’은 막을 내렸고, 그룹의 지분 구조는 몇 년 만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채권단 관리 중이던 금호산업 대신 금호석화가 중심이 됐고, 대우건설 계열사도 모두 떨어져 나갔다.
“오판, 분란, 야욕이 몰락의 원인”
금호석화는 현재 박찬구 회장의 몫이지만, 형제가 2차까지 이어진 ‘형제의 난’의 시나리오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금호석화는 박삼구-세창(世昌ㆍ금호타이어 전무) 부자(父子)와 박찬구-준경 부자(금호석화 상무보)가 고르게 지분을 갖고 있다. ‘두 집안’의 갈등에 대해 현재 캐스팅 보트를 쥔 사람은 다름 아닌 박철완(朴哲完ㆍ33) 금호석화 상무보다. 두 형제의 둘째 형인 고(故) 박정구 회장의 아들로 지난 6월 말 기준 금호석화 지분의 10.69%를 보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삼구 부자는 9.33%(4.73+4.6), 박찬구 부자는 14.55%(6.88+7.67)를 보유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금호석화의 개인 최대주주인 박철완 상무보가 처음엔 박삼구 회장 편이었는데, 최근 박찬구 회장 쪽으로 돌아섰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며 “형제의 난 2라운드로 비자금 사실이 폭로되고 검찰이 드나드는 가운데 서로 그룹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지만, 계열분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열분리를 하기 위해선 한쪽의 지분을 살 만한 자금이 확보돼야 하는데, 박삼구-박찬구 양쪽 모두 그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박찬구 회장은 소송도 불사하며 계열분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박삼구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영 정상화가 우선이라며 막아서는 모양새다.
금호석화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제외해 달라”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두 차례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삼구 회장이 실질적으로 두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금호석화는 이에 행정소송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그룹에서 제외되면 주요 계열사는 사실상 금호석화만 남게 된다. 그룹 내 박삼구 회장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게 되고, 박찬구 회장은 그룹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금호석화는 이미 ‘분리경영’의 일환으로 금호산업 지분을 전량 매각했고, 금호타이어 지분도 곧 전량 처리할 계획이다.
호남 최대 재벌 ‘금호’의 지난 10년은 ‘곡절(曲折)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영진의 오판(誤判) ▲가족 간의 분란(紛亂) ▲사주의 야욕(野慾)과 불운(不運) 등으로 분석된다. 한국 재벌 그룹의 ‘성장과 몰락’, 그 전형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금호가 ‘첩첩산중’ 위기를 극복하고 과거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결국 열쇠는 ‘두 형제’와 그 일가가 쥐고 있다.⊙
“숙원사업인 대한통운을 인수했습니다. 그룹 계열사 주가(株價)가 10만원까지 갈 겁니다. 앞으로 안정과 성장을 통해 500년 영속기업으로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3일. 박삼구 회장의 동생인 박찬구(朴贊求) 금호석유화학(금호석화) 회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벌써 세 번째 조사다. 박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 불똥은 박삼구 그룹 회장으로까지 튈 가능성이 크다. 박찬구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형인 박삼구 회장과 임원 4명을 사기 및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재계는 박삼구 회장의 검찰 소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 서열 10위권에 랭크된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500년 영속기업’을 선언한 지 불과 3년 만이다.
“현대 계열분리와 비슷한 수순 밟을 수 있다”
그동안 그룹의 사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으로 금호그룹의 순위(자산규모 기준ㆍ공기업 포함)는 전년 대비 12위에서 16위로 뚝 떨어졌다. 재벌그룹 순위가 1년 만에 네 계단이나 하락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계열사 숫자는 45개에서 36개로 줄었다. 그룹 사세가 확 줄어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금호그룹이 인수한 대우건설과 관련 계열사들을 재(再)매각했기 때문이다.
사세가 약해졌다고 ‘위기’라 하긴 어렵다. 박삼구 그룹 회장은 대우건설을 도로 토해내는 과정에서 ‘경영상의 책임’을 이유로 금호산업 지분 2.14%(2009년 말 기준) 중 대부분을 순차적으로 소각하고 채권단에 담보로 제출했다. 금호산업은 그룹 계열사를 묶는 사실상 지주회사다. 게다가 동생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과의 정면충돌이 예견된 상태다. 회사는 회사대로, 집안은 집안대로 풍비박산이 난 형국이다.
이들 형제의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창업주인 박인천(朴仁天ㆍ1901~1984) 회장은 슬하에 다섯 형제를 뒀는데 장남과 차남은 작고했고, 3남이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인 박삼구씨, 4남이 금호석화 회장인 박찬구씨다. 이들 형제는 지난 2009년 6월에 한 차례 싸웠다. 형제의 재산싸움으로 그룹은 당시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주축으로 하는 금호그룹(박삼구 몫)과 금호석화(박찬구 몫)로 쪼개졌다. 두 형제는 동반 퇴진을 했다가 지난해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그런데 지난 4월 돌연 검찰이 금호석화에 대해 내사를 시작했고, 금호그룹 박씨 일가에 관한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다. 박찬구 회장은 이 때문에 검찰에 세 번 출두했다. 그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금호석화) 비자금 조성 사건에 금호아시아나가 개입했다.”
박찬구 회장은 형을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벌그룹에서 재산 문제로 형제, 사촌 간에 회사를 분할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금호그룹처럼 내부의 속사정을 검찰에서 낱낱이 말하고 폭로전을 벌이는 일은 흔치 않다. 두 형제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볼 수 있다. 검찰 수사가 끝난 다음에 사실상 그룹이 소그룹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그룹의 계열분리와 비슷한 형국이 벌어질 수 있다.”
현대그룹은 2011년 4월 현재 재계 서열 27위, KCC는 33위, 현대백화점그룹은 36위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된 이유는 뭘까. 다수의 재계 전문가는 금호그룹이 ‘호남 유일의 재벌’로서 연고권을 주장하며 사세를 넓히는 과정에서 잘못된 경영상 판단과 야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금호의 급성장과 몰락을 재구성했다.

중고 美 택시 2대로 창업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시작은 미국산 중고 택시 2대로 차려진 ‘광주고속’이었다. 창업주 박인천 회장은 모아뒀던 17만원(圓) 자본금으로 광복 직후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운수사업은 재벌 수준의 규모였다.
운수업에 성공한 박 회장의 눈에 타이어 사업이 들어왔고 큰조카 박상구(朴祥求ㆍ現 부산저축은행 명예회장)씨와 함께 ‘삼양타이어’를 설립해 크게 성공했다. ‘광주고속’은 ‘금호고속’으로 이름을 바꿨고,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호남지역에 대한 배려로 고속버스 운영권을 따냈다. 고속버스와 타이어 사업은 금호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 |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 회장. |
1980년대 들어 ‘숙질의 난’이 벌어졌다. 박인천 회장의 아들들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삼양타이어 대주주이자 사촌형인 박상구씨를 쫓아낸 것이다.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은 사촌들로부터 퇴출당한 박상구 회장은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릴 만큼 극도로 흥분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1년 삼양타이어 주식을 25억원에 모두 처분했습니다. 이후 부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부산저축은행(부산상호신용금고)을 인수했습니다.”
요즘 최대 이슈인 부산저축은행 사건에는 ‘광주제일고’ 인맥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부산저축은행의 태동 자체가 광주에 기반을 둔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큰조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금호그룹은 다소 혼란을 겪었지만 건재했다.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전국적 인지도는 다소 약했다. 이때 금호의 돌파구가 된 것이 ‘아시아나’였다. 한진그룹이 이미 ‘대한항공’이라는 국적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당시 산업계에서는 제2민간항공 자체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당시 재계를 담당했던 한 언론인의 설명이다.
“산업계에서는 특히 반대가 컸죠. 국적 항공사가 굳이 2개일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여러 말이 나돌았습니다. ‘대한항공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찍혀서 또 다른 항공사를 만든다’는 얘기 등이었습니다. 결국 제2민항은 추진됐고, 산업계에선 이왕 비행기 회사를 할 바에는 재계서열 1~2위의 대기업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항공산업은 비행기 구입 등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제대로 사업을 하려면 규모가 큰 곳이어야 했습니다.”
1997년에 부채비율 약 950%
![]() |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큰조카 박상구 부산저축은행 명예회장. |
금호는 이에 대해 “한진과 같이 우리도 물류회사다. 국내의 고속버스 시장에서 사업을 제대로 한 부분이 인정받은 것 같다”고 반박했다.
특혜 논란을 떠나 당시 환경은 금호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사업에 뛰어든 대한항공은 저금리로 돈을 빌려 항공기를 구입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나 설립 땐 금리가 높아져 항공기를 리스(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논란과 위기상황을 극복해낸 금호는 1990년대 말 ‘IMF 사태’를 맞으며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졌다. 중견 재벌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는 상황에서, 부채비율이 높았던 금호는 혹독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부채비율은 대차대조표의 부채총액을 자본으로 나눈 비율을 뜻한다. 보통 대기업들이 100%대의 부채비율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금호는 1997년 말 기준 부채비율이 947.14%로 재무구조가 약했다.
금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적으론 대형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 체질을 개선했고, 외부적으론 해외 생산기지 건설 등 공격적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2005년 부채비율이 191.91%까지 떨어질 정도로 기업 상태가 회복됐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금호는 2000년 들어 “지속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며 신규 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룹의 본격적인 ‘외형 부풀리기’가 시작된 시점이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2004년 회사 명칭을 ‘금호’에서 ‘금호아시아나’로 바꿨다.
IMF 이후 급성장한 금호를 두고도 각종 ‘특혜’ 논란이 많았다. 2004년 한 매체는 “금호가 항공 사업을 시작한 1988년부터 특혜 논란이 끊인 적이 없었다”며 ‘16년 특혜’라고 표현했다. 당시 제기된 의혹은 ‘코스닥 등록 과정에서 무리한 규정 개정’과 ‘DJ 정부의 편파적 항공 노선 배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았을까. 항공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자본잠식 상태이거나 부채비율이 동일업종 평균보다 높은 기업은 코스닥에 등록할 수 없었습니다. DJ 정부는 두 번에 걸쳐 규정을 개정했죠. 결과적으로 아시아나는 코스닥에 상장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 VIP가 대한항공을 이용했던 전례를 깨고 아시아나와 번갈아 탔습니다. 금호그룹에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한 언론사는 이를 두고 ‘대통령 특별 전세기의 정권 교체’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최고의 베팅’은 노무현(盧武鉉) 정권 들어 시작됐다. 오늘날 그룹의 발목을 잡은 대우건설이 그것이다.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이유를 두고서는 여전히 말들이 많다. “기존의 금호건설과 합쳐서 건설을 그룹의 성장 축으로 넣고 싶어했다”, “대우건설 자체를 많이 탐냈었다”는 등의 얘기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재계 관계자의 시각은 좀 달랐다. 그는 “박삼구 회장의 무리한 선택을 개인적 야욕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며 “그룹이 생존하기 위해서 대우건설이 꼭 필요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대우건설이 아니더라도 어떤 자산이 탄탄한 회사를 꼭 인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대(大)비극으로 끝나버린 대우건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이렇다.
“IMF를 넘기면서 우리 기업들엔 ‘부채비율 낮추기’라는 숙명이 따라붙었습니다. ‘부채비율’, ‘BIS 비율’이라는 말 자체에 벌벌 떨던 상황이었죠.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부채총액을 낮춰야 하는 것은 상식이죠.”
회계의 기본에서 ‘자산=부채+자본’이다. 자산을 늘리면 당연히 부채비율은 줄어든다. 금호아시아나가 자산을 늘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산이 높은 회사(대우건설)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주장을 했다.
“자산이 늘어나 부채비율이 떨어지면 유동성이 확보돼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룹의 위기를 구조조정이 아니라, 당시 정권을 믿고 그룹의 몸집을 부풀려서 ‘규모의 경제’로 돌파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금호산업을 지주회사 격으로 만들어 대우건설과 엮는 것이 전략이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금호산업은 금호타이어를 앞세워 회사채를 대량 발행했는데, 우리은행 등을 비롯한 금융권에서 인수해 줬다. 당시 금호산업의 신용등급은 ‘BBB0’, 만기는 3년, 금리는 연 5.75%였다.
‘무리한 옵션’이 족쇄로
6조4255억원을 투입해 자산관리공사가 갖고 있던 대우건설 지분 72.1%를 인수한 금호아시아나는 3년 후 대우건설 평균주가가 기준가격을 웃돌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의 차액을 보전해 주는 ‘풋백옵션(put-back option)’을 내걸었다. 2009년 12월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을 밑돌면 주식을 되사는 조건이다. 박삼구 회장은 당시 대우건설 주가가 3년 내 4만원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무리한 옵션’은 금호의 족쇄가 됐다. 사실상 3만원대로 올라가야 할 주가는 1만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족쇄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하지만 2년 후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 인수에 나섰다. ‘비극’은 ‘절체절명의 위기’로 바뀌었다. 10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해 무리한 인수ㆍ합병(M&A)을 한 상황에서 미국발(發) 세계금융위기까지 닥쳐왔다.
2009년 회사채 만기가 다가왔고, 풋백옵션의 부담은 4조원대로 커졌다. 2009년 7월 대우건설을 시장에 도로 내놓았지만,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은 ‘워크아웃’이었다. 금호는 2009년 12월 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워크아웃 등을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했다. 회사채 발행 전에 해야 했을 구조조정을 무리한 몸집 부풀리기로 해결하려다 결국 3년을 지체한 셈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크게 금호타이어를 앞세운 금호산업, 그룹 내 ‘캐시 카우(Cash Cow)’ 역할을 하는 ‘효자회사’ 금호석화 등을 두고서도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를 추진하다 타이어와 건설 등 그룹의 축을 무너뜨린 우를 범한 것이다. 만약 대우건설을 제대로 인수해 또 하나의 효자회사로 키워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대우건설 인수 때로 돌아가 본다. 대규모 베팅을 앞두고 박삼구-박찬구 형제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박찬구 회장은 그동안 박삼구 회장에게 금호아시아나의 문제와 관련, 금호석화엔 불똥이 튀지 않게 하라는 의사를 밝혀왔지만, 대우건설 인수 건으로 모두 무산됐다.
대우건설을 내놓고 결국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25년 동안 유지된 ‘형제경영’은 막을 내렸고, 그룹의 지분 구조는 몇 년 만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채권단 관리 중이던 금호산업 대신 금호석화가 중심이 됐고, 대우건설 계열사도 모두 떨어져 나갔다.
![]() |
금호가(家) 3세대. 왼쪽부터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 박준경 금호석화 상무보, 박철완 금호석화 상무보. |
업계 관계자는 “금호석화의 개인 최대주주인 박철완 상무보가 처음엔 박삼구 회장 편이었는데, 최근 박찬구 회장 쪽으로 돌아섰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며 “형제의 난 2라운드로 비자금 사실이 폭로되고 검찰이 드나드는 가운데 서로 그룹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지만, 계열분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열분리를 하기 위해선 한쪽의 지분을 살 만한 자금이 확보돼야 하는데, 박삼구-박찬구 양쪽 모두 그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박찬구 회장은 소송도 불사하며 계열분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박삼구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영 정상화가 우선이라며 막아서는 모양새다.
금호석화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제외해 달라”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두 차례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삼구 회장이 실질적으로 두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금호석화는 이에 행정소송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그룹에서 제외되면 주요 계열사는 사실상 금호석화만 남게 된다. 그룹 내 박삼구 회장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게 되고, 박찬구 회장은 그룹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금호석화는 이미 ‘분리경영’의 일환으로 금호산업 지분을 전량 매각했고, 금호타이어 지분도 곧 전량 처리할 계획이다.
호남 최대 재벌 ‘금호’의 지난 10년은 ‘곡절(曲折)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영진의 오판(誤判) ▲가족 간의 분란(紛亂) ▲사주의 야욕(野慾)과 불운(不運) 등으로 분석된다. 한국 재벌 그룹의 ‘성장과 몰락’, 그 전형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금호가 ‘첩첩산중’ 위기를 극복하고 과거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결국 열쇠는 ‘두 형제’와 그 일가가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