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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이명박 정부 납북자委에 ‘재취업’한 노무현 정부 과거사委 조사관들

글 :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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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 절반 이상이 ‘이념편향 논란’ 진실화해委 조사관 출신
⊙ 노무현 정부 진실화해위 조사 놓고 공정성 논란 끊이지 않아
⊙ 진실화해위 일부 조사관들은 불법, 탈법적 행동
지난해 12월 13일 본격적인 진상규명 활동에 착수한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의 출범회의 모습.
  2010년 12월 13일, 6·25전쟁 중 북한이 저지른 납북(拉北) 피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첫 진상규명이 시작됐다. 지난해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관련법을 근거로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전쟁납북자위)’가 이날 출범회의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한 것이다. 위원장을 맡은 김황식(金滉植) 국무총리는 “정확한 납북피해 진상규명을 통해 납북자와 그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시(戰時) 납북피해 가족들의 60년 숙원을 푸 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전쟁 납북은 북한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정치인과 공무원 등 대한민국 엘리트를 강제로 끌고 간 ‘조직적 전쟁범죄’다. 지금까지 북한은 우리 국민 납치를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계획적 납북의 실체는 곧 6·25전쟁이 남침(南侵)으로 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제성호(諸成鎬·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위원은 “전쟁 납북의 진상규명은 일차적으로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 주고 권리회복을 시켜 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지만, 올바른 현대사 정리 및 국가 정체성 확립이란 면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입맛대로 보고서 쓰고, 위원회 공개비난한 조사관도 있어
 
  공무원 12명과 조사관 7명 등 총 20명으로 구성된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은 지난해 말 공고를 내고 조사관과 전문관(2명)을 모집해 지난 1~2월 총 9명을 최종합격 처리했다. 합격한 조사관 7명 중 4명은 지난해 말 활동을 마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출신이다.
 
  진실화해위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출범해 4년여 활동기간 동안 좌·우파 간 이념대립과 피해자 유족 및 국가기관과의 갈등으로 많은 정치적, 역사적 논란을 일으켜 온 위원회다.
 
  진실화해위는 다수 위원의 반대의견에도 육영수(陸英修) 여사 저격사건에 조작의혹이 있다며 직권으로 조사를 결정하고, 실체가 분명한 간첩사건까지 ‘조작’으로 왜곡 보도하게 했다. 이 때문에 진실화해위가 처음부터 진실을 보려 한 게 아니고 우파를 뿌리째 흔들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심을 사는 등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25전쟁 당시 발생한 ‘고창 11사단 사건’의 경우에는 최종결정이 사실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드러나 전면 재조사 결정이 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을까. 일부 위원과 조사관들의 ‘노무현 코드’에다 일부 조사관들의 편법과 탈법 행태가 도마위에 올랐다. 몇몇 조사관은 내부에서조차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일부 편향된 조사관들은 자기들 입맛대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내부 전산망의 자유게시판에서 위원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올리는 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월간조선》은 지난해 8월 <진실화해위엔 진실도 없고 화해도 없었다>란 기사를 통해 일부 조사관들의 행태를 지적한 바 있다. 이들은 소위원회에서 상정 요건이 되지 않는 법원 확정판결 사건 5건 등 총 6건의 사건을 전원위원회 통과과정에서 끼워넣는가 하면, 위원들의 보고서 수정 지시를 무시하고 보고서 내용을 왜곡해 외부에 유출했다. 위원회 활동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했다.
 
  진실화해위의 한 위원은 “해당 조사관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정이 나자 수정을 하지 않은 채 슬쩍 올려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며 “그들의 지나친 행위에 대해 심지어 좌파적 시각을 가진 위원들이 화를 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당시 몇몇 조사관은 진실규명에 대한 예정사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언론에 공개했다. 이들은 위원회의 결정이 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일부 진실규명’ 방식을 추진 중”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월권행위 논란이 끊일 날이 없었다.
 
 
  “채용과정에서 제대로 검증했는지 의문”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후 위원장 등 위원회의 구성이 바뀌면서 우파 성향의 위원과 조사관들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고,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자 일부 조사관들은 종합보고서가 부실하다며 별도로 보고서를 발간한다고 해 논란이 가중됐다. 진실화해위의 위원들은 “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모든 결정과 책임은 위원이 진다”며 “개인적인 정치성향과 맞지 않는다고 보수와 진보성향을 아우르는 위원들의 합의로 작성된 종합보고서를 부정하고 별도의 보고서를 낸다는 것은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가 해체된 후에도 별도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등의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진실화해위 공무원직장협의회(직협)에 소속됐던 조사관들이다. 직협은 진실화해위 해체에 즈음해 자유게시판에 공개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글을 통해 “다수의 사건이 충분한 심의 없이 불능·각하 처리됐고, 이영조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조직을 운영했으며, 종합보고서가 부실하게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여러 좌파매체를 통해 수차례 비판한 이영조(李榮祚) 위원장은 한나라당 추천 인사다.
 
  최근 전쟁납북자위에 채용된 조사관 4명 중 3명은 직협 정회원, 1명은 후원회원 출신이며, 조사관과 별도로 채용된 조사전문관은 직협의 수석부대표 출신이다. 수석부대표는 일반기업 노조의 부위원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소속 위원회와 갈등을 일으킨 직협의 핵심 인사가 전쟁납북자위에 채용돼 자료수집과 관리를 맡게 된 셈이다.
 
  진실화해위의 한 위원은 “진실화해위의 모든 조사관이 편향된 생각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쟁납북자위 채용에서 이들을 무조건 배제할 순 없지만, 조사관 중 절반이 넘는 진실화해위 출신 조사관 4명 모두가 직협 출신인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 측 한 관계자는 “당시 직협 소속 조사관 중 일부는 상습지각, 음주 후 시간 외 근무 기록, 근무시간 회의소집 등 불법적, 비도덕적 행태를 일삼았다”며 “전쟁납북자위 관련법이 입법예고될 때 이미 진실화해위 내부 게시판에 곧 사람을 뽑을 예정이란 글이 올라오는 등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진실화해위 직협 간부들을 둘러싸고 제기된 논란을 두고 직협 출신 직원 전원에게 결격사유가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진실화해위는 별정직(6급이하) 모두가 직협 회원 소속인 데다 직협의 활동과 무관하게 객관적 업무에 충실한 조사관도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전쟁납북자위에 채용된 5명 중 2~3명은 공무원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소속된 위원회에 반하는 활동을 직접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이라며 “전쟁납북자위 사무국과 통일부에서 이들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전쟁납북자 관련 민간단체 회원들의 인사검증 요구에 사무국 측은 “합법적 절차에 의한 채용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며 오히려 모집 당시 “진실화해위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지원해 잘될 것”이란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민간인 조사관은 단순히 자료를 발굴하고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누가 하든 괜찮다”고 했다.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은 관련 논란에 대해 “자료수집관리전문관(전문계약직 ‘나’급) 및 조사원(예산범위내에서 채용하는 상시근로자) 채용시 공개경쟁 채용절차를 거쳐, 공정하고 신중하게 선발했다”며 “신원조회 과정에서 채용 결격사유가 없다는 점과, 이전 근무기관 경력조회를 통해 징계처분 등 물의를 야기한 바 없었다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혀왔다.
 
 
  명부 원본과 다른 통일부 DB
 
  조사관 등 직원채용 논란과 함께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의 업무방식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에서 작성한 ‘신고접수 및 조사업무 지침’에 따르면,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의 명부 DB를 통해 납북자를 확인해야 한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족회)의 DB는 ‘참고자료’로 활용하게 돼 있다.
 
  통일부의 DB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8만2959명의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와 1950년 공보처에서 작성한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2438명) 등을 토대로 만든 자료다. 그런데 원본을 있는 그대로 DB화하지 않고 인적사항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소속 및 직위’, ‘납치 지역’, ‘납치 장소’ 등의 항목을 없애고 원본에 없는 ‘본적’과 ‘기타’ 항목을 추가하는 등 임의로 수정했다. 통일부 측은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때문에 통일부 DB로 제대로 작업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또 가족회 측은 “가족회의 명부 DB도 최근 일부 명단이 누락됐음이 확인되는 등 자료 보완과 전문가의 검수가 필요할 정도인데, 통일부 자료도 다시 한번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납북자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납북자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다.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납북자의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선 가장 정확한 명부 DB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 현재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은 DB에 대한 전문가 검수 계획이 없다고 한다.
 
  사무국의 홍보가 지나치게 미온적이란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현재 사무국은 납북피해 신고를 알리는 포스터를 전국 시·군·구에 배포하고 일간지 5곳에 광고를 게재한 상태다. 하지만 납북자 가족들은 “포스터를 부착한 곳을 발견하기 어렵고, 신문광고도 신고 안내보다는 납북자 문제와 관련 없는 이미지만 크게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납북신고가 아니라 출산장려 포스터 같다”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이 제작한 신고안내 포스터(왼쪽)와 민간단체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만든 포스터 시안(가운데와 오른쪽).
  사무국이 제작한 포스터의 원래 목적은 납북피해 신고 안내이지만, 헤드라인 문구를 ‘2011년 1월 3일! 6·25전쟁 납북피해… 정부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門을 엽니다’로 표기해 정책홍보 광고로 착각하게 만든다. 한 가족회 회원의 설명이다.
 
  “납북자 문제는 신고 안내 홍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납치 문제가 일어난 지 이미 60년이 흘렀습니다. 1세대 중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 많아요. 생존한 분들이나 2세대도 이미 고령화돼 정부가 직접 피해신고를 접수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야죠. 그런데 타 정부부처에서 하는 행정광고 형식으로 홍보하면 누가 그걸 보겠습니까. 포스터를 본 사람들은 모두 출산장려 광고인지 납북피해 신고 광고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고를 안내하는 부분은 돋보기 없이 보기 어려울 정도예요.”
 
  가족회는 답답한 마음에 포스터 시안을 직접 만들었다. 사무국의 광고 형식과 달리 정부가 납북피해 신고를 직접 받는다는 문구를 부각시키고, 신고 안내 부분을 더 잘 보이게 확대했다. 가족회는 직접 만든 포스터를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사무국 측은 “가족회 측의 간섭이 심하다”며 곤란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전쟁납북자위는 위원장인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통일부·국방부·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 정부위원, 전시 납북자 가족 3명, 민간위원 6명 등 총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회는 올해 1월부터 전국 기초자치단체 및 151개 재외공관 등에서 납북피해 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10만명을 웃돌 것으로 추산되는 전쟁 납북자에 대해 위원회는 법정 조사활동 기간인 4년 안에 진상규명을 완료하고 조사활동 종료 후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진상조사가 완료되는 시점에 납북자 명예회복을 위한 각종 기념사업 등 중요 사업 역시 특별법 시행기한 내에 완료돼야 한다.⊙
 
[인터뷰] 李美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단 한 명의 납북자도 누락되는 일 없어야”

 
   전쟁납북자위의 조사관 채용 등 논란에 대해 이미일(李美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정부 차원에서 이미 본격적인 납북피해 조사를 시작한 만큼, 세부적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이 이사장은 8만2959명 납북자 명단이 수록된 명부를 직접 발굴해 내고 관련 법안까지 통과시킨 납북자 운동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다른 문제보다 단 한 명의 납북자도 누락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한 가족회 회원이 국가기록원을 통해 발굴한 새로운 문헌자료를 통해 1952년과 1953년 납북자 전체 통계가 다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명부는 현재 1952년 자료밖에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명부가 발견될 것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가족회 회원이 입수한 문서는 <1954년 1월 28일자 인천지역 전쟁피해에 대한 조사보고서>로, 당시 각 동별 추가 납치자 수와 납치 귀환자 수가 기록돼 있다. 가족회는 이를 분석한 결과 1953년 통계가 1952년보다 증가하는 과정에서 여성 4565명이 증가하고 남성 2992명이 감소하는 등 현재까지 발굴된 납북자 명단 DB 외에 훨씬 많은 납북자가 존재함을 밝혀냈다.
 
  전쟁납북자위 사무국의 지침은 납북자 명부 사본 또는 2명 이상의 목격자 보증서를 증거자료로 제출해야 신고를 받는다. 이 이사장은 두 요건을 명부와 목격자란 요건을 갖추지 못한 납북자가 있을 것에 대비해 유보대장을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과 납북을 겪은 지 이미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납북 목격자가 세상을 떠났고, 더욱 완전한 명부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구체적 수치의 통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 관련 명부가 존재함을 의미해요. 그때를 대비해 납북자의 인적사항과 신고인의 연락처라도 따로 기록해 두면 후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겠죠. 명확한 납북인데 현재 확보된 명단에 없어 누락되는 납북자를 구제할 수 있는 이러한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6·25전쟁 때 유망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납북된 이 이사장은 2000년부터 납북자 단체를 결성해 <실향사민 등록자명부> <서울특별시 피해자명부>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 등 전쟁 직후 작성된 명부들을 발굴해 공개하고, 납북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아 사료원을 여는 등 납북자 운동을 주도해 왔다.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한 관련법은 2003년부터 이 이사장과 가족회 회원들이 7년 동안 추진해 빛을 본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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