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朴達의 연락병이었다』
- 李善鎬씨
지난 10월 말 金漢植(김한식·한사랑선교회 대표) 목사와 함께 한 노인이 月刊朝鮮을 찾아 왔다. 노인의 이름은 李善鎬(이선호·84). 전직 경찰관이라는 그의 입에서는 놀라운 얘기가 나왔다.
『나는 普天堡(보천보) 사건 당시 朴達(박달)의 연락병으로 金日成 장군과의 연락을 맡았었소』
普天堡 사건이 무엇인가? 북한이 金日成의 가장 대표적인 抗日투쟁 업적으로 내세우는 사건 아닌가? 普天堡 사건은 1930년대 후반 日帝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金日成 장군」이라는 다섯 글자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朴達은 당시 만주와 함경남·북도 일대에 조직되었던 지하통일전선 조직인 「조국광복회」의 국내 총책이었다.
李善鎬씨는 자신이 普天堡 출신으로 1936년 朴達의 연락병이 됐으며, 이후 10여 차례 朴達의 심부름으로 「金日成 장군」을 만났고, 1937년 7월 普天堡 사건 때에는 보천보로 쳐들어 온 金日成 부대를 안내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金日成은 그 때 내가 만났던 金日成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했다.
李善鎬씨는 『光復 후인 1946년 함남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때, 현장 시찰을 나온 가짜 金日成을 만났다』며 『普天堡 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내가 만났던 金日成 장군과는 다른 가짜였다』고 주장했다.
李씨는 보천보 사건을 前後한 시기,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증언을 정리한 「만주독립군 보천보 기습사건 槪要(개요)」라는 文件을 주고 갔다.
지난 11월11일 李善鎬씨가 다시 한번 月刊朝鮮 사무실을 찾아왔다. 李씨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는 李明山(이명산)씨가 함께 했다. 李明山씨는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했던 북한 전문가로 金日成의 행적을 오랫동안 추적해 왔다.
그와 함께 李善鎬씨의 증언을 검증하기로 했다.
『공산주의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李善鎬씨는 1920년 함남 정평군 신상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孔孟(공맹) 사상에 투철한 아버지 밑에서 16세 때까지 「四書三經」을 배웠는데,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마을에 소문이 났다고 했다. 李善鎬씨는 朴達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6세 되던 해 3, 4월경, 집으로 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는 내게 「공부는 얼마나 했느냐」고 묻더니, 무슨 암호문 같은 것이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건네 주면서 그것을 외워 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이니 돈 3원을 주더군요. 그리고는 다음 번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주고 돌아갔어요.
며칠 후에는 암호문이 적혀 있는 종이 두 장을 주면서 외워 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이니 또 3원을 주면서,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얘기해 주고는 가버렸습니다. 세 번째 만났더니, 그는 「두 번째 만났을 때 외웠던 내용을 외워 볼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였더니, 그는 「나는 만주에 있는 독립군 총사령관인 金日成 장군 다음가는 국내 책임자인 朴達이라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락병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아버지와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를 따라 나선 李善鎬는 朴達로부터 연락병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기자) 朴達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물푸레 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칼처럼 사용해서 산짐승이나 산적에 대처하는 방법, 일본 경찰의 검문을 피하는 방법 등을 배웠어요. 朴達은 判任官시험(보통문관시험·日帝 시대 하급 공무원 시험. 현재의 7·9급 공무원 시험) 교재 17권을 사주면서, 열차 등에서 일본 경찰이 검문할 때 수험생 행세를 하라고 하더군』
李씨는 『실제로 나중에 경찰들이 나를 검문하다가 수험서를 보고는 무사통과시키면서 「잘 해 보라」고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기자) 朴達이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지는 않던가요.
『공산주의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는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말만 했지』
―(기자) 조국광복회라고 들어봤습니까.
『못 들어봤어』
―(기자) 朴達이 李선생님이 속하게 된 조직의 이름 같은 것은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런 얘긴 없었어요』
―(기자) 朴達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축구를 참 잘했어요. 甲山 인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는 마음만 먹으면 축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남·북 일대에서 수백 명을 거뜬히 모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李明山) 朴達의 연락병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만주에 있는 독립군 사령부에서 국내 사정에 대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내가 전달해야 할 내용을 암기한 후 백두산을 넘어 사령부로 가서 金日成 장군에게 口頭로 보고하곤 했어요. 독립군 자금이 떨어지면 아편을 짊어지고 백두산을 넘어 만주로 가서 그것을 팔아 자금을 만들어 오기도 했소. 그 일로 백두산을 마흔 번 정도 넘었을 게요』
『내가 만난 金日成은 50代의 柔한 인상』
―(기자) 「金日成 장군」을 정말로 만났습니까.
『모두 열두세 번쯤 만났어』
―(李明山) 그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에 7~8번은 그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을 모르고 만났어. 내가 朴達씨에게 「金日成 장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피식 웃기만 했어요. 내가 자꾸 조르니까, 「네가 만주에 가서 만났던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다」라고 하더군요』
―(이명산) 그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몇 번 더 만났습니까.
『그 후에는 서너 번 정도 더 만났나?』
―(기자) 그러니까 朴達이 「그 사람이 金日成」이라고 얘기를 해 줘서 안 것이지, 金日成 장군 스스로 「내가 金日成이다」라고 얘기한 것은 아니죠.
『그렇지』
―(李明山)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던가요.
『50세 정도?』
李明山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李明山씨의 설명이다.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던 진짜 金日成 장군은 1901년 생입니다. 山中에서 유격대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10여 세 정도 나이가 들어보일 수는 있었을 겁니다』
―(기자) 金日成 장군은 어떤 인상이었습니까?
『사람이 柔(유)해 보였어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독립군 총사령관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러면서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기자) 혹시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1930년대 末 만주 일대에서 결성됐던 중국공산당 산하의 抗日유격부대·金日成은 이 부대에서 활동했다)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듣는 얘기요. 부대 이름 같은 건 몰라요. 그런데 부대가 작전할 때는 단위 부대장들을 모두 金日成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金日成 장군이 축지법을 쓴다고 했어요』
―(기자) 광복 후에 북한의 金日成을 만나봤다고 하셨죠.
『1946년 2월, 내가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때 金日成이 순시를 나왔어요』
―(이명산) 普天堡 사건 전후해서 만났던 그 金日成 장군이던가요.
『무슨 소리! 전혀 아니야. 내가 만난 金日成 장군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이명산) 普天堡 사건 때, 그곳에서 그를 봤습니까.
『아뇨. 普天堡에서 본 「金日成 장군」과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해방 후에 만난 金日成은 전혀 다른 사람』
―(이명산) 정평군에서 만난 金日成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30代 중반의 젊은이인데, 말하는 게 꼭 깡패 같았어. 사람을 억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있는 것 같았고…. 말은 잘 못 했어. 인물은 준수하더군. 자기가 조국독립을 위해 백두산을 수백 번 넘나들었다고 말하는 데 「뭐 저런 거짓말을 다 하나」 싶어 기가 찼어요. 나중에 인민위원회 사람들도 「가짜 金日成 장군 아니냐」며 수군거렸어요. 잘못될까 봐 남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했고…』
―(기자) 普天堡 사건 때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朴達씨 연락병이 된 지 얼마 후 만주의 본부에서 普天堡 시내에 대한 상황 보고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朴達씨가 시키는 대로 상황을 조사해서 문서로 정돈해 암기한 후, 간도성 조양천 연락소에 가서 金日成 장군에게 전했어요. 그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열흘 정도 지나서 본부에서 내가 보고한 게 맞는지 확인하러 세 사람이 보천보로 왔어요. 그리고 昭和(소화·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 12년(1937년) 7월10일경, 만주 본부에서 武裝兵(무장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 여덟 명이 와서 사흘 동안 보천보 마을 지리를 확인하고, 공격시 병영 배치 등을 계획했어요. 나는 그들이 왔을 때 안내하는 일을 했어요. 7월13일 새벽 1시경 독립군들이 쳐들어왔어요』
―(기자) 당시 신문 보도를 비롯해 史料에 의하면 普天堡 사건이 있었던 것은 1937년 6월4일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난 7월로 기억하고 있어요』
李明山씨는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한 달 정도의 착오는 있을 수 있다』면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 정황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普天堡 사건 정황은 상세히 기억
―(이명산) 보천보로 쳐들어 온 독립군들이 몇 명이나 됐어요.
『300명이었습니다. 150명은 혜산진에서 보천보로 오는 길에, 50명은 보천보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大鎭坪(대진평)에 매복했고…』
―(이명산) 보천보 마을 안으로 들어온 병력은 얼마나 됐어요.
『100명이오』
이명산씨는 『그럼 맞아. 그때 普天堡로 들어온 병력이 90명 정도였으니까』라고 했다. 李善鎬씨는 普天堡 습격 당시 마을의 피해상황을 설명했다.
『노획물부터 얘기할게요. 시험장(농업시험장)에서 기관총 하나, 보호국(산림보호국)에서 하나, 주재소에서 하나, 이렇게 해서 기관총 세 자루를 노획했고. 그 다음에 보천국민학교가 전소되고, 보천면사무소가 전소되고, 보천우체국이 전소되고, 보호국이 전소되고, 시험장이 半破(반파)되고,주재소가 전부 돌로 쌓은 집인데 그게 반이 무너졌고…』
이명산씨는 『맞아, 맞아』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李善鎬씨는 말을 이어갔다.
『일본 사람의 피해를 보면, 일본인 40명을 인질로 잡아 보따리를 독립군 본부까지 짊어지고 가게 했어요』
―(이명산) 맞아요. 그때 조선 사람이 하던 병원이 하나 습격 당했죠.
『金榮會 상점이라고…』
李明山씨가 『거기 있던 약품을 몽땅 가져갔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李善鎬씨가 말했다.
『거기에 배급 물자가 모두 있었는데, 그걸 몽땅 털어갔어요』
―(이명산) 일본 사람들 피해는 어땠어요.
『일본 사람들의 피해가 컸지요. 오래 전부터 일본 사람이 하던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피해가 제일 컸고…』
―(이명산) 일본 사람은 안 죽었어요?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명산) 주재소에서 일본 여자아기가 하나 죽었는데 몰라요?
『죽은 사람 없어요』
―(이명산) 그건 모를 수도 있고…. 조선 사람은 안 죽었어요?
『한국 사람 죽은 것은 면장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건 전투에 죽은 게 아니에요. 나중에 趙來淑(조래숙) 면장이 독립군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 해서 혜산경찰서에 잡혀가서 심리(조사)를 받다가 혈압으로 죽었어요』
李善鎬씨는 당시 副면장에 대한 얘기도 했다.
『김명천씨라고 副면장이 있었는데, 그는 독립군이 들어오자 화전지서로 신고하러 가다가 독립군에게 잡혔어요. 그는 독립군에게 「지금 신고하러 가지 않으면 나는 독립군과 내통했다고 잡혀가 죽는다」고 사정했어요. 독립군은 「그럼 우리가 떠난 다음에 신고하라」고 했어요. 金부면장은 도중에 시간을 끌다가, 뒤늦게 경찰에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그는 살았어요』
『삐라 살포와 연설은 없었다』
―(기자) 그때 선생님은 뭐 하셨어요.
『복면을 쓰고 독립군들을 데리고 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기가 국민학교다」,「여기가 주재소다」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기자) 북한에서는 『정치공작원들은 金日成이 작성한 조국광복회 10大 강령과 포고문, 「조선인민에게 격함」 등 수많은 격문과 삐라를 살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때 빨치산들이 조선독립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삐라를 뿌렸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불태우고 부수고 털었지, 삐라 같은 건 안 뿌렸어』
―(기자) 金日成 장군이 마을 사람들 모아 놓고 조선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 내가 金日成 장군, 朴達씨 하고 같이 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
기자는 『金日成 장군이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이른바 「흰말을 탄 金日成 장군」 神話 때문이었다. 李善鎬씨는 『거기에 말을 탈 데가 어디 있어?』라고 반문하더니, 『독립군 사령부에 가도 말은 없었다』고 말했다.
李善鎬씨는 『普天堡에 들어왔던 金日成 부대는 철수하면서 만주 通化省 二十道溝라는 곳에서 일본 국경경비대 60여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십도구 부근 도로에 양쪽 높이가 100m 정도 되는 협곡이 있는데, 거기에 양쪽에 100명씩 매복해 있다가 추적해 오는 국경경비대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어요. 국경경비대 60명이 죽었는데, 일본군은 3~4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어요』
―(이명산) 그건 직접 목격하신 겁니까.
『나중에 독립군들이 朴達씨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은 거예요』
李明山씨는 李善鎬씨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는다고 했다. 李明山씨의 설명이다.
『普天堡 사건 후 金日成 부대와 추적하는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양측에서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어요. 李善鎬씨는 이것을 국경경비대원들만 60여 명이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명산) 국경경비대는 일본 사람들이었습니까.
『대부분 조선사람들이었어요』
金光瑞
李善鎬씨에 의하면, 사건 다음날 金錫源(김석원) 大佐의 일본군 74연대 병력이 普天堡로 들어왔다고 한다.
『金錫源씨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실 金日成이는 나와 일본 陸士 同期다. 金日成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마 자기가 하는 얘기가 金日成 장군에게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두 사람 사이에 묵계가 이루어져 광복될 때까지 더 이상 불상사는 없었어요』
李善鎬씨는 6·25때 수원에서 金錫源 장군과 만나 金日成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普天堡에서 金日成 장군을 만났다고 했더니 金錫源 장군은 깜짝 놀라더군요. 이건 그때 金錫源 장군에게서 들은 얘깁니다. 金日成 장군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분의 자손으로, 부모님이 金日成 장군을 일본 陸士로 유학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金錫源이 언급했다는 「金日成」은 일본 陸士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金光瑞(김광서·일명 金擎天)를 지목한 것으로 추정된다.
金光瑞는 일본 기병 중위로 복무하다가 3·1운동 직후 일본군에서 탈출, 주로 남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러시아혁명 후 일본군이 볼셰비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출병하자 그는 볼셰비키軍과 함께 反日투쟁을 했다.
이때 그는 「金日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李善鎬씨의 설명 가운데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예」라는 부분은 史實(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다.
李明山씨는 『李善鎬 선생이 만났던 「金日成 장군」은 金光瑞가 아닌,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동북항일연군 6師長 金日成일 것』이라고 했다.
『金錫源 장군은 보천보로 쳐들어 갔던 金日成을 자신이 알고 있는 金光瑞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金錫源 장군과 李善鎬씨는 서로 다른 金日成을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네요. 金光瑞는 나중에 소련으로 들어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장교로 獨蘇戰(독소전)에서 戰死했다는 說이 있어요』
일본 陸士 재학 시절 愛馬(애마) 옆에서 찍은 金光瑞의 사진을 李善鎬씨에게 보여주면서, 그가 普天堡 사건 전후에 만났던 金日成과 같은 사람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日帝경찰에 잡혀 2년 복역
―(기자) 1937년 朴達 등 수백 명이 체포된 혜산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혜산사건」은 普天堡 사건이 있은 후인1937~1938년, 普天堡 사건 당시 국내에서 內應(내응)했던 朴達 등 조국광복회 관련자 739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검거된 사람 가운데는 이제순(1960년대 對南공작총책이었다가 1967년 숙청된 이효순의 兄), 박금철(북한 노동당 조직副위원장까지 올라갔다가 1967년 숙청됨) 등이 있다. 혜산사건 관련자들은 후일 북한 정권에 참여해 金日成의 親衛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들이 바로 「甲山派(갑산파)」이다. 甲山派는 金日成 유일체제가 확립되어 가던 1967년 숙청됐다.
「朴達의 연락병」이라는 李善鎬씨가 혜산 사건을 모른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李善鎬씨는 『朴達이 普天堡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체포됐으며, 그렇게 무거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朴達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됐고, 1945년 광복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 후 越北한 朴達은 북한에서 영웅대접을 받다가 1960년 사망했다.
李善鎬씨에게 『박금철 등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李善鎬씨는 1939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내가 「공산군」-그때는 金日成 장군의 독립군 부대를 공산군이라고 불렀어요-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된 형이 친구에게 내 얘기를 했어요.그런데 형의 친구가 자기 친구였던 혜산경찰서의 崔鈴(최령: 나중에 崔燕으로 改名. 무장독립군을 잡는 데 惡名을 떨쳤던 고등경찰로 광복 후 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의 고문을 지냄) 警部에게 그 얘기를 하는 바람에 잡혀 가게 된 것이죠』
경찰에 잡혀 가기 1주일 전, 李善鎬씨는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菊씨 姓을 쓰는 조선인 경찰서장이 산골마을에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나를 무척 좋게 봐 줬어요. 그가 최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혐의를 많이 줄여 준 덕분에 2년 정도 복역하고 나왔어요. 나를 기소했던 검사는 제1공화국 때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韓格晩(한격만)씨인데, 나중에 나와 妻 五寸 당숙이 됐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 菊서장의 주선으로 농사시험장에 취직했어요』
李善鎬씨는 『朴達씨와는 普天堡 사건 이후에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접촉을 했다』고 주장했다.
越南 後 경찰 투신
李善鎬씨는 1947년 6월 越南했다고 했다.
『「가짜」가 金日成 장군 행세를 하는 마당에, 내가 진짜 金日成 장군을 안다는 사실을 「가짜」가 알게 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나기도 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越南했어요』
越南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6·25 전에는 송악산 전투, 6·25 중에는 경북 영천 전투와 지리산 공비 토벌전 등을 치렀고, 경위로 경찰에서 나온 뒤에는 변호사 사무장 등으로 일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李善鎬, 李明山씨와 식사를 같이 했다.
李善鎬씨는 자신이 普天堡 사건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자식들에게도 이번에 처음으로 그 사실을 얘기했다고 한다. 李明山씨는 李善鎬씨의 증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李씨는 조국광복회나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가입해서 움직이지 않고, 朴達의 개인 연락병으로 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만났다는 「金日成 장군」도 동북항일연군 6사장 「金日成」이 아니라, 중간 간부급 지휘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보천보 습격의 현장을 북한의 金日成이 지휘했다」는 北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점차 밝혀져 가고 있습니다. 「단위 부대가 작전을 할 때는 부대장을 다 金日成으로 불렀다」, 「현장에서 북한의 金日成을 보지 못했다」는 李善鎬씨의 증언은 학술적으로도 의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普天堡(보천보) 사건 당시 朴達(박달)의 연락병으로 金日成 장군과의 연락을 맡았었소』
普天堡 사건이 무엇인가? 북한이 金日成의 가장 대표적인 抗日투쟁 업적으로 내세우는 사건 아닌가? 普天堡 사건은 1930년대 후반 日帝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金日成 장군」이라는 다섯 글자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朴達은 당시 만주와 함경남·북도 일대에 조직되었던 지하통일전선 조직인 「조국광복회」의 국내 총책이었다.
李善鎬씨는 자신이 普天堡 출신으로 1936년 朴達의 연락병이 됐으며, 이후 10여 차례 朴達의 심부름으로 「金日成 장군」을 만났고, 1937년 7월 普天堡 사건 때에는 보천보로 쳐들어 온 金日成 부대를 안내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金日成은 그 때 내가 만났던 金日成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했다.
李善鎬씨는 『光復 후인 1946년 함남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때, 현장 시찰을 나온 가짜 金日成을 만났다』며 『普天堡 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내가 만났던 金日成 장군과는 다른 가짜였다』고 주장했다.
李씨는 보천보 사건을 前後한 시기,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증언을 정리한 「만주독립군 보천보 기습사건 槪要(개요)」라는 文件을 주고 갔다.
지난 11월11일 李善鎬씨가 다시 한번 月刊朝鮮 사무실을 찾아왔다. 李씨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는 李明山(이명산)씨가 함께 했다. 李明山씨는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했던 북한 전문가로 金日成의 행적을 오랫동안 추적해 왔다.
그와 함께 李善鎬씨의 증언을 검증하기로 했다.

李善鎬씨는 1920년 함남 정평군 신상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孔孟(공맹) 사상에 투철한 아버지 밑에서 16세 때까지 「四書三經」을 배웠는데,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마을에 소문이 났다고 했다. 李善鎬씨는 朴達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6세 되던 해 3, 4월경, 집으로 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는 내게 「공부는 얼마나 했느냐」고 묻더니, 무슨 암호문 같은 것이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건네 주면서 그것을 외워 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이니 돈 3원을 주더군요. 그리고는 다음 번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주고 돌아갔어요.
며칠 후에는 암호문이 적혀 있는 종이 두 장을 주면서 외워 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이니 또 3원을 주면서,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얘기해 주고는 가버렸습니다. 세 번째 만났더니, 그는 「두 번째 만났을 때 외웠던 내용을 외워 볼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것을 외워 보였더니, 그는 「나는 만주에 있는 독립군 총사령관인 金日成 장군 다음가는 국내 책임자인 朴達이라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락병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아버지와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를 따라 나선 李善鎬는 朴達로부터 연락병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기자) 朴達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물푸레 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칼처럼 사용해서 산짐승이나 산적에 대처하는 방법, 일본 경찰의 검문을 피하는 방법 등을 배웠어요. 朴達은 判任官시험(보통문관시험·日帝 시대 하급 공무원 시험. 현재의 7·9급 공무원 시험) 교재 17권을 사주면서, 열차 등에서 일본 경찰이 검문할 때 수험생 행세를 하라고 하더군』
李씨는 『실제로 나중에 경찰들이 나를 검문하다가 수험서를 보고는 무사통과시키면서 「잘 해 보라」고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기자) 朴達이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지는 않던가요.
『공산주의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는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말만 했지』
―(기자) 조국광복회라고 들어봤습니까.
『못 들어봤어』
―(기자) 朴達이 李선생님이 속하게 된 조직의 이름 같은 것은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런 얘긴 없었어요』
―(기자) 朴達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축구를 참 잘했어요. 甲山 인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는 마음만 먹으면 축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남·북 일대에서 수백 명을 거뜬히 모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李明山) 朴達의 연락병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만주에 있는 독립군 사령부에서 국내 사정에 대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내가 전달해야 할 내용을 암기한 후 백두산을 넘어 사령부로 가서 金日成 장군에게 口頭로 보고하곤 했어요. 독립군 자금이 떨어지면 아편을 짊어지고 백두산을 넘어 만주로 가서 그것을 팔아 자금을 만들어 오기도 했소. 그 일로 백두산을 마흔 번 정도 넘었을 게요』

―(기자) 「金日成 장군」을 정말로 만났습니까.
『모두 열두세 번쯤 만났어』
―(李明山) 그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에 7~8번은 그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을 모르고 만났어. 내가 朴達씨에게 「金日成 장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피식 웃기만 했어요. 내가 자꾸 조르니까, 「네가 만주에 가서 만났던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다」라고 하더군요』
―(이명산) 그 사람이 金日成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몇 번 더 만났습니까.
『그 후에는 서너 번 정도 더 만났나?』
―(기자) 그러니까 朴達이 「그 사람이 金日成」이라고 얘기를 해 줘서 안 것이지, 金日成 장군 스스로 「내가 金日成이다」라고 얘기한 것은 아니죠.
『그렇지』
―(李明山)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던가요.
『50세 정도?』
李明山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李明山씨의 설명이다.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던 진짜 金日成 장군은 1901년 생입니다. 山中에서 유격대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10여 세 정도 나이가 들어보일 수는 있었을 겁니다』
―(기자) 金日成 장군은 어떤 인상이었습니까?
『사람이 柔(유)해 보였어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독립군 총사령관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러면서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기자) 혹시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1930년대 末 만주 일대에서 결성됐던 중국공산당 산하의 抗日유격부대·金日成은 이 부대에서 활동했다)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듣는 얘기요. 부대 이름 같은 건 몰라요. 그런데 부대가 작전할 때는 단위 부대장들을 모두 金日成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金日成 장군이 축지법을 쓴다고 했어요』
―(기자) 광복 후에 북한의 金日成을 만나봤다고 하셨죠.
『1946년 2월, 내가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때 金日成이 순시를 나왔어요』
―(이명산) 普天堡 사건 전후해서 만났던 그 金日成 장군이던가요.
『무슨 소리! 전혀 아니야. 내가 만난 金日成 장군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이명산) 普天堡 사건 때, 그곳에서 그를 봤습니까.
『아뇨. 普天堡에서 본 「金日成 장군」과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30代 중반의 젊은이인데, 말하는 게 꼭 깡패 같았어. 사람을 억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있는 것 같았고…. 말은 잘 못 했어. 인물은 준수하더군. 자기가 조국독립을 위해 백두산을 수백 번 넘나들었다고 말하는 데 「뭐 저런 거짓말을 다 하나」 싶어 기가 찼어요. 나중에 인민위원회 사람들도 「가짜 金日成 장군 아니냐」며 수군거렸어요. 잘못될까 봐 남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했고…』
―(기자) 普天堡 사건 때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朴達씨 연락병이 된 지 얼마 후 만주의 본부에서 普天堡 시내에 대한 상황 보고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朴達씨가 시키는 대로 상황을 조사해서 문서로 정돈해 암기한 후, 간도성 조양천 연락소에 가서 金日成 장군에게 전했어요. 그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열흘 정도 지나서 본부에서 내가 보고한 게 맞는지 확인하러 세 사람이 보천보로 왔어요. 그리고 昭和(소화·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 12년(1937년) 7월10일경, 만주 본부에서 武裝兵(무장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 여덟 명이 와서 사흘 동안 보천보 마을 지리를 확인하고, 공격시 병영 배치 등을 계획했어요. 나는 그들이 왔을 때 안내하는 일을 했어요. 7월13일 새벽 1시경 독립군들이 쳐들어왔어요』
―(기자) 당시 신문 보도를 비롯해 史料에 의하면 普天堡 사건이 있었던 것은 1937년 6월4일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난 7월로 기억하고 있어요』
李明山씨는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한 달 정도의 착오는 있을 수 있다』면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 정황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이명산) 보천보로 쳐들어 온 독립군들이 몇 명이나 됐어요.
『300명이었습니다. 150명은 혜산진에서 보천보로 오는 길에, 50명은 보천보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大鎭坪(대진평)에 매복했고…』
―(이명산) 보천보 마을 안으로 들어온 병력은 얼마나 됐어요.
『100명이오』
이명산씨는 『그럼 맞아. 그때 普天堡로 들어온 병력이 90명 정도였으니까』라고 했다. 李善鎬씨는 普天堡 습격 당시 마을의 피해상황을 설명했다.
『노획물부터 얘기할게요. 시험장(농업시험장)에서 기관총 하나, 보호국(산림보호국)에서 하나, 주재소에서 하나, 이렇게 해서 기관총 세 자루를 노획했고. 그 다음에 보천국민학교가 전소되고, 보천면사무소가 전소되고, 보천우체국이 전소되고, 보호국이 전소되고, 시험장이 半破(반파)되고,주재소가 전부 돌로 쌓은 집인데 그게 반이 무너졌고…』
이명산씨는 『맞아, 맞아』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李善鎬씨는 말을 이어갔다.
『일본 사람의 피해를 보면, 일본인 40명을 인질로 잡아 보따리를 독립군 본부까지 짊어지고 가게 했어요』
―(이명산) 맞아요. 그때 조선 사람이 하던 병원이 하나 습격 당했죠.
『金榮會 상점이라고…』
李明山씨가 『거기 있던 약품을 몽땅 가져갔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李善鎬씨가 말했다.
『거기에 배급 물자가 모두 있었는데, 그걸 몽땅 털어갔어요』
―(이명산) 일본 사람들 피해는 어땠어요.
『일본 사람들의 피해가 컸지요. 오래 전부터 일본 사람이 하던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피해가 제일 컸고…』
―(이명산) 일본 사람은 안 죽었어요?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명산) 주재소에서 일본 여자아기가 하나 죽었는데 몰라요?
『죽은 사람 없어요』
―(이명산) 그건 모를 수도 있고…. 조선 사람은 안 죽었어요?
『한국 사람 죽은 것은 면장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건 전투에 죽은 게 아니에요. 나중에 趙來淑(조래숙) 면장이 독립군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 해서 혜산경찰서에 잡혀가서 심리(조사)를 받다가 혈압으로 죽었어요』
李善鎬씨는 당시 副면장에 대한 얘기도 했다.
『김명천씨라고 副면장이 있었는데, 그는 독립군이 들어오자 화전지서로 신고하러 가다가 독립군에게 잡혔어요. 그는 독립군에게 「지금 신고하러 가지 않으면 나는 독립군과 내통했다고 잡혀가 죽는다」고 사정했어요. 독립군은 「그럼 우리가 떠난 다음에 신고하라」고 했어요. 金부면장은 도중에 시간을 끌다가, 뒤늦게 경찰에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그는 살았어요』

―(기자) 그때 선생님은 뭐 하셨어요.
『복면을 쓰고 독립군들을 데리고 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기가 국민학교다」,「여기가 주재소다」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기자) 북한에서는 『정치공작원들은 金日成이 작성한 조국광복회 10大 강령과 포고문, 「조선인민에게 격함」 등 수많은 격문과 삐라를 살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때 빨치산들이 조선독립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삐라를 뿌렸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불태우고 부수고 털었지, 삐라 같은 건 안 뿌렸어』
―(기자) 金日成 장군이 마을 사람들 모아 놓고 조선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 내가 金日成 장군, 朴達씨 하고 같이 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
기자는 『金日成 장군이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이른바 「흰말을 탄 金日成 장군」 神話 때문이었다. 李善鎬씨는 『거기에 말을 탈 데가 어디 있어?』라고 반문하더니, 『독립군 사령부에 가도 말은 없었다』고 말했다.
李善鎬씨는 『普天堡에 들어왔던 金日成 부대는 철수하면서 만주 通化省 二十道溝라는 곳에서 일본 국경경비대 60여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십도구 부근 도로에 양쪽 높이가 100m 정도 되는 협곡이 있는데, 거기에 양쪽에 100명씩 매복해 있다가 추적해 오는 국경경비대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어요. 국경경비대 60명이 죽었는데, 일본군은 3~4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어요』
―(이명산) 그건 직접 목격하신 겁니까.
『나중에 독립군들이 朴達씨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은 거예요』
李明山씨는 李善鎬씨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는다고 했다. 李明山씨의 설명이다.
『普天堡 사건 후 金日成 부대와 추적하는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양측에서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어요. 李善鎬씨는 이것을 국경경비대원들만 60여 명이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명산) 국경경비대는 일본 사람들이었습니까.
『대부분 조선사람들이었어요』


『金錫源씨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실 金日成이는 나와 일본 陸士 同期다. 金日成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마 자기가 하는 얘기가 金日成 장군에게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두 사람 사이에 묵계가 이루어져 광복될 때까지 더 이상 불상사는 없었어요』
李善鎬씨는 6·25때 수원에서 金錫源 장군과 만나 金日成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普天堡에서 金日成 장군을 만났다고 했더니 金錫源 장군은 깜짝 놀라더군요. 이건 그때 金錫源 장군에게서 들은 얘깁니다. 金日成 장군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분의 자손으로, 부모님이 金日成 장군을 일본 陸士로 유학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金錫源이 언급했다는 「金日成」은 일본 陸士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金光瑞(김광서·일명 金擎天)를 지목한 것으로 추정된다.
金光瑞는 일본 기병 중위로 복무하다가 3·1운동 직후 일본군에서 탈출, 주로 남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러시아혁명 후 일본군이 볼셰비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출병하자 그는 볼셰비키軍과 함께 反日투쟁을 했다.
이때 그는 「金日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李善鎬씨의 설명 가운데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예」라는 부분은 史實(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다.
李明山씨는 『李善鎬 선생이 만났던 「金日成 장군」은 金光瑞가 아닌,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동북항일연군 6師長 金日成일 것』이라고 했다.
『金錫源 장군은 보천보로 쳐들어 갔던 金日成을 자신이 알고 있는 金光瑞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金錫源 장군과 李善鎬씨는 서로 다른 金日成을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네요. 金光瑞는 나중에 소련으로 들어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장교로 獨蘇戰(독소전)에서 戰死했다는 說이 있어요』
일본 陸士 재학 시절 愛馬(애마) 옆에서 찍은 金光瑞의 사진을 李善鎬씨에게 보여주면서, 그가 普天堡 사건 전후에 만났던 金日成과 같은 사람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자) 1937년 朴達 등 수백 명이 체포된 혜산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혜산사건」은 普天堡 사건이 있은 후인1937~1938년, 普天堡 사건 당시 국내에서 內應(내응)했던 朴達 등 조국광복회 관련자 739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검거된 사람 가운데는 이제순(1960년대 對南공작총책이었다가 1967년 숙청된 이효순의 兄), 박금철(북한 노동당 조직副위원장까지 올라갔다가 1967년 숙청됨) 등이 있다. 혜산사건 관련자들은 후일 북한 정권에 참여해 金日成의 親衛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들이 바로 「甲山派(갑산파)」이다. 甲山派는 金日成 유일체제가 확립되어 가던 1967년 숙청됐다.
「朴達의 연락병」이라는 李善鎬씨가 혜산 사건을 모른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李善鎬씨는 『朴達이 普天堡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체포됐으며, 그렇게 무거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朴達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됐고, 1945년 광복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 후 越北한 朴達은 북한에서 영웅대접을 받다가 1960년 사망했다.
李善鎬씨에게 『박금철 등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李善鎬씨는 1939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내가 「공산군」-그때는 金日成 장군의 독립군 부대를 공산군이라고 불렀어요-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된 형이 친구에게 내 얘기를 했어요.그런데 형의 친구가 자기 친구였던 혜산경찰서의 崔鈴(최령: 나중에 崔燕으로 改名. 무장독립군을 잡는 데 惡名을 떨쳤던 고등경찰로 광복 후 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의 고문을 지냄) 警部에게 그 얘기를 하는 바람에 잡혀 가게 된 것이죠』
경찰에 잡혀 가기 1주일 전, 李善鎬씨는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菊씨 姓을 쓰는 조선인 경찰서장이 산골마을에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나를 무척 좋게 봐 줬어요. 그가 최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혐의를 많이 줄여 준 덕분에 2년 정도 복역하고 나왔어요. 나를 기소했던 검사는 제1공화국 때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韓格晩(한격만)씨인데, 나중에 나와 妻 五寸 당숙이 됐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 菊서장의 주선으로 농사시험장에 취직했어요』
李善鎬씨는 『朴達씨와는 普天堡 사건 이후에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접촉을 했다』고 주장했다.

李善鎬씨는 1947년 6월 越南했다고 했다.
『「가짜」가 金日成 장군 행세를 하는 마당에, 내가 진짜 金日成 장군을 안다는 사실을 「가짜」가 알게 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나기도 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越南했어요』
越南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6·25 전에는 송악산 전투, 6·25 중에는 경북 영천 전투와 지리산 공비 토벌전 등을 치렀고, 경위로 경찰에서 나온 뒤에는 변호사 사무장 등으로 일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李善鎬, 李明山씨와 식사를 같이 했다.
李善鎬씨는 자신이 普天堡 사건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자식들에게도 이번에 처음으로 그 사실을 얘기했다고 한다. 李明山씨는 李善鎬씨의 증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李씨는 조국광복회나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가입해서 움직이지 않고, 朴達의 개인 연락병으로 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만났다는 「金日成 장군」도 동북항일연군 6사장 「金日成」이 아니라, 중간 간부급 지휘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보천보 습격의 현장을 북한의 金日成이 지휘했다」는 北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점차 밝혀져 가고 있습니다. 「단위 부대가 작전을 할 때는 부대장을 다 金日成으로 불렀다」, 「현장에서 북한의 金日成을 보지 못했다」는 李善鎬씨의 증언은 학술적으로도 의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