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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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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
 
 
  1988년 9월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은 국배판 124페이지의 대외비(보존연한은 영구) 문서이다.
 
  이 책의 목차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 身元 사항
 
  1. 인적 사항
 
  2. 출생 및 성장
 
  3. 學·경력
 
  4. 前科 관계
 
  5. 가족 사항(家系圖. 본인 및 처가)
 
  6. 재산관계
 
  7. 인간성
 
  2. 思想 성분
 
  1. 建準 가담 등 좌익 활동
 
  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接線
 
  3. 韓民統 결성, 反國家 활동
 
  4.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주장
 
  5.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주동
 
  6. 기타 문제 발언
 
  3. 조직 관리
 
  1. 조직 현황
 
  2. 조직 특성
 
  3. 私組織 현황
 
  4. 최근 동향
 
  1. 주요 동향
 
  2. 特異 동향
 
  3. 주요 동향 분석
 
  첨부:주요 접촉 인물 현황
 
 
  「金大中 관찰기록」 중 가치 있는 부분만을 골라 아래에서 요약하고 해설한다.
 
  1. 身元 사항
 
  1-1. 인적 사항
 
  일제시대 金大中이 한 創氏改名은 豊田大中, 본인은 생년월일이 1923년 1월6일(양력)이라고 언명, 혈액형은 A형, 영세명은 金토마스, 代父는 張勉 前 국무총리.
 
  1-2. 출생 및 성장
 
  출생:1924년 1월6일 전남 신안군 荷衣面 五村里 132번지에서 張之淑의 장녀 張鹵島의 아들로 출생. 같은 해 金云式의 庶子로 入籍. 1943년 7월10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3일로 訂正. 1960년 6월5일 父 金云式, 母 張鹵島의 혼인신고로 兩人間에서 출생한 嫡子로 호적 정리. 그러나 金大中의 출생지 주민들에 의하면 金大中은 金云式-張鹵島 사이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고 尹○○(편집자가 익명화)와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는 說이 있는 등 그 출생 혈통이 불분명함.
 
  소년기:1939년 3월25일 목포 北橋 국민학교 졸업시 성적은 72명 중 1등. 같은 해 목포 상업중학교 입학. 1학년 때 161명중 1등. 1, 2학년 때 級長. 2, 4학년 때 품행 단정상 수상. 5학년 때 修養위원 겸 문화반 활동. 졸업시 성적 150명(한국인 82명, 일본인 68명) 중 39등.
 
  청·장년기:1945년 4월9일(호적상 19세) 목포시 거주 車寶輪의 딸 車蓉秀와 혼인, 金弘一과 金弘業 출산. 車蓉秀는 1927년 10월26일 출생, 1960년 5월27일 음독자살. 목포여고 출신.
 
  金大中은 1954년 5월20일 목포에서 제3代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9명 중 5위로 낙선. 낙선 후 서울 서대문구 大峴洞으로 이사. 金哲 등 정치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張澤相 前 총리를 알게 되어 측근 참모로 일시 활동.
 
  1955년 소설가 朴花城의 소개로 朴順天 여사, 曺在千 등 야당의원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했다.
 
  1-3 學·경력
 
  1953년 10월10일 건국大 정외과 3년 중퇴, 1964년 9월20일 고려大 경영대학원 연구과정 수학, 1967년 2월20일 경희大 산업경영대학원 수료, 1969년 2월20일 경희大 대학원 경제정책과 수료.
 
  1-6 재산관계
 
  총 42억7,750만원(부동산 20억7,750만원. 동산 22억원)
 
  (편집자 注:李姬鎬·金弘一 및 金弘業 부부 명의의 재산을 포함한 것임)
 
  1-7 인간성
 
  가. 임기응변에 능하고 출세욕이 강하며 信義가 없다.
 
  나. 再婚을 정략적으로 이용.
 
  다. 종교를 편의적 수단으로 이용.
 
  라. 독선적 성격과 폭력적 대중 선동.
 
  마. 집요한 大權 집념.
 
  바. 기회주의적이고 變身의 천재.
 
  사. 학생·노동자 등 자신에게 이익만 되면 받아들이는 정치인.
 
  아. 환경에 적응을 잘한다.
 
  2. 思想 성분
 
  2-1. 建準 가담 등 좌익 활동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 宣傳責이며 그 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林永春의 추천으로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 지부에 가입, 선전책으로 종사하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담 활동 중, 그해 10월경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新民黨 목포시당 위원장이며 그 후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타가 행방불명된 李彩鉉의 추천으로 同黨(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共産系 행동 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盟員 장금성(9·28 수복 후 사망) 등과 당원 徐得均(6·25시 월북) 등에게 국내외 정세 및 공산주의 이론 등 정치학습과 민주청년동맹사업 요지 등을 교양했다.
 
  ■1946년 10월31일 목포 경찰서 南橋洞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 소실케 한 소위 「목포시민 항쟁의 날」 폭동사건을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의 지위에서 배후 조종한 혐의로 목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10여 일간 구속 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당시 장인 車寶輪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 후 訓戒 방면됨.
 
  ■1949년 2월경 사상적으로 전향한 양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전남 신안군 荏子面 출신으로서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兪在植에게 同人의 당 연락 활동과 관련한 上京 여비 등 활동자금을 제공하여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10여 일간 구속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헌병대장이던 朴成哲(前 金大中 경호실장)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되고서도 목포시내 세포 조직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 후 보도연맹으로 被檢, 我軍 후퇴시 美 CIC에 의해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金眞夏(목포상업中 선배)의 호명착오로 救命되었으며 1950년 6월25일 당시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 노임 횡령 사건으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 9·28 수복시 탈옥했다.
 
 
  필자의 검토:「호명착오로 救命」 부분은 과연 사실인가
 
 
  김진하씨의 「호명착오」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지금 워싱턴 근교에서 살고 있는 김진하씨의 이름은 金大中씨와 관련하여 관계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김영훈 목사는 1995년 현지 한국어 신문에, 일본 산케이 신문 칼럼니스트 시바다 미노루(紫田穗)는 1980년 7월호 일본 잡지 「中央公論」에 金大中씨가 보도연맹원 집단 처형 직전에 김진하씨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 내용은 안기부 내부에서 존안되어 온 정보인데, 시바다씨의 글이 이 정보를 근거로 했을 가능성은 있다. 김영훈 목사는 별도로 김진하씨를 만나서 증언을 들은 뒤 썼다고 한다. 김진하씨가 말한 요지는, 6·25 남침 직후 목포에서 보도연맹원(전향한 前 좌익활동가들) 소집과 집단처형이 있을 때 창고에 갇혀 있던 金大中씨를 당시 영어교사이던 자신이 찾아가 자신의 명찰을 주면서 『金大中을 호명할 때 나서지 말고 이 명찰을 보이면서 사람을 잘못 끌고왔다고 이야기하라』고 하여 救命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金大中씨는 그러나 일관되게 자신은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말해 왔다. 그는 또 인천상륙 직후 목포가 수복되었을 때 자신은 인민군한테 구속되어 감옥에 있다가 탈출했다고 말했다. 안기부 기록을 보아도 金大中씨가 목포 교도소에 수감된 것이 인민군에 의한 것인지, 국군에 의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활동이 구속의 이유라면 국군에 의한 구속이란 말이 된다. 그렇다면 목포가 敵의 治下가 되어 있던 약 두 달간 목포 교도소에 계속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인민군이 金大中씨를 구속했다면 金大中씨의 우익활동 때문이든지 다른 非理念的 범죄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씨는 우익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안기부의 金大中 기록에 쓰여진 대로 「부채 및 滯拂 노임 횡령」으로 인민군이 金大中씨를 구속한 것인가. 현재는 이런 의문과 가능성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안기부(현재는 국정원)에 좀더 명확한 증거물이 확보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예컨대 김진하의 자필 진술서나 보도연맹 사살대상자 명부 같은 것), 이 기록만으로는 金大中씨가 주장해 온 것을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2-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接線
 
  ■金大中은 鄭泰默과 목포상업중학교 동창으로 鄭泰默의 1년 후배이다. 鄭泰默은 목포상업중학교 재학시 金大中의 장인 車寶輪의 집에서 2년간 하숙 생활을 한 관계로 金大中 처 車蓉秀 등 처가 식구와는 한집안같이 친숙한 관계.
 
  ■8·15 해방 후 金大中은 鄭泰默과 목포 공산청년동맹원으로 활동타가 1946년 남로당 활동을 일단 청산(편집자 注:金大中씨는 1946년까지 남로당의 前身인 신민당 목포지구당의 간부로 일했던 것이지 남로당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로당은 194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3당 합당하여 탄생했으므로 「1946년에 남로당 활동을 일단 청산했다」는 기록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金大中씨가 신민당에서 남로당으로 넘어갔다는 확증은 없다).
 
  鄭泰默은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법에서 재판에 계류 중 6·25 전쟁으로 북괴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953년 3월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이 확정되어 1960년 5월30일에 滿期 출소했다.
 
  ■그는 1965년 4월25일 오전 9시경 實弟인 鄭泰然의 안내를 받아 전남 무안군 임자면 삼두리 후면 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북괴 공작선과 접선, 공작선을 타고 北上하여 그 다음날 밤 9시 진남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평양시 교외 초대소에서 북괴 노동단 간부로부터 밀봉 수용되어 암호지령 방송의 청취 방법 등을 교육받은 후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포섭대상자로서 金大中, 金商玉, 朱燾允, 劉沃祐, 裵吉道 등의 성명·직책·친분관계 등을 기록하여 교부했다.
 
  ■1965년 4월30일 진남포를 통해서 돌아온 그는 1967년 4월22일 저녁 6시경 목포 소재 비원 다방에서 朴信奎와 만나 신민당이 승리하도록 지원하라는 중앙당의 지령을 전달한 다음, 대통령에 尹潽善, 국회의원에 劉沃祐, 金大中을 당선시키도록 공작할 것을 지령했다.
 
  ■鄭泰默은 1961년 당시 민주당 대변인 金大中을 서울 무교동 2층 다방에서 15년 만에 우연히 재회했으나 金大中은 냉담한 태도였다. 1963년 제6代 선거시 金大中이 정○○(사망)을 시켜 鄭泰默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鄭泰默은 2년 전 재회시의 金大中의 냉담한 태도에 감정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1967년 5월 金大中이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으로 鄭泰默을 방문하여 선거전략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鄭泰默은 두 차례 선거전략을 告知했다. 金大中은 鄭泰默이 직접 선거운동을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鄭泰默이 가르쳐 준 선거전략 중에는 「여당의 金力 공세를 막으려 애쓰지 말고 그대로 방임하면 효력이 감소한다」, 「선거유세시 官을 자극시켜 탄압을 유인함으로써 동정표를 흡수할 것」 등이 있었다.
 
  ■鄭泰默은 金大中이 국회의원 당선 후인 1968년 2월경 위장 사업체인 三創産業 운영 공작금을 조달하기 위해 金大中에게 전화를 걸어 300만원의 은행융자를 요청했으나 金大中은 2~3개월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연락이 끊겼다.
 
  ■鄭泰默 등 16명은 荏子島 간첩사건으로 1968년 7월에 구속되어 주범인 鄭씨는 1972년 7월28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편집자 검토:위의 기록은 金炯旭 부장의 정보부가 수사한 荏子島 간첩사건의 기록에 의존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金大中씨가 鄭泰默이 간첩인 줄 알고 접근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북한 정권이 남로당 출신을 통해 金大中씨를 포섭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 韓民統 결성 및 反國家 활동
 
  ■1973년 8월4일 金大中은 東京에서 북괴 선전활동 및 民團 파괴공작을 일삼는 소위 「베트콩파」인 在日동포 裵東湖, 金載華, 郭東儀, 金鍾忠, 趙活俊 등과 反國家단체인 韓民統 일본본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의장으로 한 임원선정 및 정강정책을 확정 후 8월13일 귀국했다.
 
  ■1978년 6월 대법원에서 韓民統 일본 본부와 연계된 재일동포 金整司 간첩사건 재판시 韓民統 일본본부가 反國家 단체로 규정된 사실을 알았음에도 1980년 3월 同 의장직 사임시까지 韓民統 일본 본부의 구성 주체로 활동했다.
 
  ■조총련 핵심 간부 金鍾忠 등으로부터 지원받은 일화 총 4740만 엔 중 「韓民統(한국민주회복 통일추진국민회의)」 결성자금으로 1740만 엔을 사용하여 각종 강연, 기자회견 등 反정부 활동을 전개했다. 韓民統의 핵심 구성원들은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북괴를 왕래한 바 있는 사람,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민단조직을 파괴하고 북괴 선전활동을 하다가 그 정체가 탄로되어 民團에서 축출된 사람들이다.
 
  (편집자 검토:위의 내용은 대부분 1980년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때 작성된 재판자료 속에 있는 정보들로서 새로운 것이 없다)
 
  2-4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주장
 
  ■金大中의 주장 내용:하나의 연방 아래 두 개의 독립된 공화국 형태를 취하는 것이 우선 가능하고 북한 공산정권의 존립을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남한에 있는, 민주정부의 존립도 완전히 보장받아야 하며 양 공화국은 서로 이해, 신뢰, 평온의 증진에 따라 합의된 만큼의 권한을 중앙연방에 점차적으로 이양해 감으로써 종국적이고 완전한 통일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 북괴의 고려연방제와 흡사함.
 
  ■고려연방제의 저의는 감상적 통일 논의를 유발하여 반공체제를 약화시키고 聯共합작의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駐韓미군 철수 촉진 및 韓美합동 공동 방위업체(「체제」의 誤記인 듯)를 와해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평화통일을 표방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흡수통합을 추진하려는 전략이다.
 
  2-5.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主動
 
  ■생략(이미 공개된 재판자료 및 발표문 수준).
 
  3. 조직 관리
 
  3-1. 조직 현황
 
  ■공조직은 평민당으로서 국회의원 71명, 전국 166개 지구당에 당원 100만여 명.
 
  ■사조직은 국내 11개(民靑聯 등) 회원35만여 명, 국외 7개(한국인권문제연구소 등) 회원 260여 명.
 
  ■조직특성은 대권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전위조직과 지원조직으로 이원화. 공산당式 당조직 형태로 결성, 非노출 지하조직. 각 조직은 표면상의 역할 분담에도 불구, 내부적으로 金大中을 정점으로 한 일사불란한 상호 연계체제 유지.
 
  ■호남지역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재야, 종교, 학원, 노동 등 각 분야 불만세력들을 포섭, 지원세력으로 활용. 사회 부랑아들도 다수 포함시켜, 유사시 정치테러 조직으로 활용 예상.
 
  4. 최근 동향
 
  ■생략(거의가 공개된 활동의 요약임)
 
  이 문서의 끝에는 「첨부: 주요 접촉 인물 현황(1988.5.1-현재)」이란 자료가 붙어 있다.
 
  국내 인물로 盧泰愚(당시 대통령), 李賢宰(국무총리), 裵命仁(안기부장)이 필두에 올라 있다. 제1야당의 총재로서 당연히 접촉해야 할 인물이다. 다른 명단도 그런 수준의 의미 없는 것들이다. 관료적 타성에 젖은, 창의성이 전혀 없는 기관이나 사람이 만든 자료 같은 느낌을 준다.
 
 
  「金大中 관찰기록(1987년판)」 내용 요약
 
 
  1987년 1월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金大中 관찰기록」(이하 「1987년판」이라고 한다)은 1988년판의 약 네 배 분량이다. 536페이지의 이 책자 목차는 이렇게 되어 있다.
 
 
  1. 身元 사항
 
  1. 인적 사항
 
  2. 출생 및 성장
 
  3. 학력 및 경력
 
  4. 종교
 
  5. 前科 관계
 
  2. 金大中 정치입문 과정 및 정치활동 경력
 
  1. 정치입문 과정
 
  2. 정치경력
 
  3. 思想 성분
 
  1. 좌익단체 가담활동
 
  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접선
 
  3. 美日 등 해외에서 韓民統 결성, 反 國家 활동
 
  4. 金大中 여성 遍歷 및 李姬鎬와의 再婚 경위
 
  5. 金大中의 奸巧, 詐術的 행각 등 인간상
 
  6. 金大中의 인기영합적 선동적 주의 주장
 
  1.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2. 제3공화국 헌법 환원 주장
 
  3. 대중경제
 
  4. 金大中 관련 저서 현황
 
  7. 金大中의 정치적 야욕 및 투쟁목표
 
  1. 정치적 야욕 및 투쟁목표
 
  2. 金大中의 신한민주당內 계보 분석
 
  8. 金大中의 과시·소비적 생활실태
 
  1. 생활실태
 
  2. 재산관계
 
  9.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전모
 
  1. 사건개요
 
  2. 사형확정 후 恩典조치
 
  3. 관련자 처리
 
  10. 金大中, 在美 反정부 활동
 
  1. 渡美 경위
 
  2. 在美 反정부 활동 사항
 
  11. 金大中 귀국 후 주요 동향
 
  1. 귀국시 특이 동향
 
  2. 自家 도착 후 현재까지 동향
 
  3. 불법 정치활동 사례
 
  4. 현재까지의 金大中 경고조치 상황
 
  5. 金大中 방문, 접촉자 현황
 
  12. 金大中의 현재 법률상 신분
 
  13. 金大中의 건강상태 및 가족사항
 
  1. 건강상태
 
  2. 가족사항
 
  첨부: 장금성(장세철) 남로당 등록 청원서 寫本
 
 
  이 문서를 읽어보면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만든 金大中 문서보다도 살벌하고 비방적이다. 표현에서도 그렇고, 담고 있는 정보(또는 첩보 소문)의 질도 그렇다. 위에 열거한 제목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李姬鎬는 厚德한 여자」
 
 
  여기서도 1988년판과 마찬가지로 金大中씨가 1953년 10월10일에 건국대학교 정치과 3년을 중퇴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청와대 사이트의 金대통령 학력난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잘못된 주장을 확인하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이 1987년판에는 金大中씨가 1948년 9월 남로당 목포시당 청년부장(상임위원)이었고 목포보도연맹 총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은 신민당이 인민당과 공산당과 합당하여 남로당을 만들 때는 따라가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또 보도연맹에는 돈을 내는 운영위원으로 가입했을 뿐이며 실무 간부는 아니었다고 주장했었다. 1987년판에도 金大中씨가 미국 CIC의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김진하의 호명착오로 救命되었다고 되어 있다. 김진하가 여기서는 金鎭夏로 표기되어 있다.
 
  「여성○○」 항목에서는 1970년 3월24일, 1970년 12월6일, 1970년 12월13일, 1971년 1월3일식으로 날짜와 장소를 명기하고 있다. 정보부가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 신분이던 金大中씨를 근접 관찰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판 자료는 李姬鎬 여사를 좋게 평가하고 있다. 「李姬鎬 성품」이라는 항목에서 「無害無得한 성품, 평소 화를 내지 않는 성격, 慾心 없고 나눠먹는 厚德한 여자」라고 했다.
 
 
  안기부의 수준 낮은 표현-「천성적인 奸智」
 
 
  1987년판은 국가정보기관의 자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적인 인물평을 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과 감정적 분석을 혼재시킴으로써 이 자료를 읽는 사람이 선입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예컨대 1987년 12월19일 金大中씨가 옥중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된 첫날 있었던 이야기를 이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金大中은 처 李姬鎬가 준비한 융숭한 私食(숭어회, 찜) 등을 먹고 난 후 李姬鎬가 출국준비 관계로 바쁘므로 이후부터 아침은 官食(죽)을 먹겠다고 自請하였는데, 12.19(일요일) 朝食으로 쌀죽과 된장국의 병원식사를 제공한 바 집에서 가져온 銀수저를 넣어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毒物이 들었다」고 取食을 거부하여 소란을 피워 이에 교도관이 金大中의 면전에서 먹기를 거부한 식사를 즉시 먹어보이고는 中食부터 철저히 醫師檢食을 실시하겠다고 경고한 다음 中食 때 장남 金弘一 집에서 가져온 私食에 교도관이 銀수저를 넣어 감식하려 하자, 잘못했다, 아침것을 가지고 뭐 그러느냐, 앞으로 再論하지 말자, 이런 사실을 병원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등 교도관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였으나 이는 본래 천성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奸智가 不知不識間에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어 눈을 가린 채 배에 태워졌던 사람이, 그 자신은 죽음 직전에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이 타인이 내어오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의심이요, 당연한 自衛 조치일 것이다.
 
  이런 행위를 「천성적 奸智」라고 표현한 안기부 직원의 치졸한 언어감각은 안기부의 정보 분석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표현은 아마도 당시의 권력자를 의식한 언어선택일 것이다. 이런 보고서를 읽게 되는 그들이 가지게 되었을 인간 金大中에 대한 불신, 선입감, 의심은 金大中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詐術的 행각」
 
 
  「金大中의 奸巧·詐術的 행각」이란 항목에는 11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사례 1」은 이런 내용이다.
 
  <1960.7.29.(4·19 혁명 직후 제5代 국회의원 선거시). 4·19 혁명 후 처음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인 제5代 7·29 선거시 金大中은 강원도 麟蹄지구에서 당시 집권이 예상되던 張勉 박사의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경쟁자인 자유당 후보 全亨山을 「反혁명분자」라고 선동하면서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을 총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 「反혁명분자의 당선은 무효화시켜야 한다」며 개표장에 난입하여, 투표함 22개 중 15개를 强奪하여 그 속에 들어 있던 유효 투표지 2만7000여 매를 소각하는 등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사례 4:1971.1.18.(제7代 대통령 선거시). 金大中은 경기도 강화읍에서 대통령 선거 연설을 마치고 전방 경계지역內에 있는 군경 합동검문소를 통과할 때 초소의 병사가 검문을 하자 일부러 자신의 경호원으로 하여금 초소 병사의 총기를 탈취케 한 후 다음 유세지인 김포에서의 선거연설에서 청중들에게 「강화도의 검문소 초병이 상부지령을 받고 나를 쏘아 죽이려고 하기에 총을 빼앗아 버렸다」는 등 사실을 날조하여 청중들의 분노를 유발케 하는 치사한 모략극을 자행하였다>
 
  <사례 5:1971.1.27.(제7代 대통령 선거시).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金大中은 조카 金弘準(당시 15세)으로 하여금 파괴 위력이나 살상력이 없는 폭발물(완구용 화약)을 자기 집 앞뜰에서 폭발시키도록 해놓고, 이를 정부 측에서 행한 테러라고 과대선전하는 촌극을 연출하였다. 정부는 1971.2.10. 범인 金弘準을 검거하여 구속 수사 중이었는데 선거 분위기를 고려하여 金弘準을 석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사례 8:1971.5.24. 金大中은 승용차 편으로 목포에서 광주로 향하던 중, 전남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앞에서 신혼여행 차량 두 대의 뒤를 따라가다가 급커브 지역을 통과할 때 반대편에서 오던 화물 트럭이 신혼여행차와 충돌하는 순간, 金大中의 승용차 운전기사가 앞 차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핸들을 급회전시키는 바람에 길 아래 논두렁에 추락하였다. 金大中은 이 사고를 정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정보기관을 시켜 계획적으로 일으킨 테러였다고 뒤집어씌우는 간계를 꾸몄던 것이다. 金大中은 이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필자의 검토:안기부 주장이 맞는 것도 있다
 
 
  「사례 8」의 트럭 사고에 대해서 禹鍾昌 月刊朝鮮 차장은 지난 5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서 金大中씨의 암살 음모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밝힌 적이 있다. 「사례 4」의 사건이 났을 때 치안국장은 鄭相千(자민련 부총재)씨였다. 鄭부총재는 金大中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接敵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경찰지서 앞에 야간 교통통제 또는 검문검색을 하기 위해서 차단기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야당후보 일행이 김포 경찰서 고촌 지서 앞을 지나다가 차단기 앞에서 차를 멈추고 사설 경호원 10여 명이 지서에 난입하여 두 명밖에 없는 근무자에게 폭행하고 카빈소총을 비롯하여 공용 서류 등을 탈취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발령을 받고 1년 가까이 金大中 대통령을 수차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대통령께서는 당시 일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지나간 일로 이미 잊으셨는지 가끔 궁금하기도 하였다>
 
  당시 金大中 후보 경호원 咸允植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군경 검문소를 통과하려고 하는데 20여 명이 金후보 차를 향해서 총을 겨누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고 우리 경호원 중 한 명이 경찰관 총을 빼앗은 것을 뒤에 알았다. 즉시 파출소에 돌려 주었다. 경찰 쪽에서 대통령 후보를 상대로 과잉 검문을 한 것은 사실이다>
 
  「사례 5」의 폭발물 사고에 대해서 金大中 대통령은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란 제목의 자서전(1999년 2월 출판)에서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꾸민 짓이란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 자서전에는 7·29 선거 때의 투표지 소각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반군중이 투표함 소각」
 
 
  그는 다만 자신의 敗因은 자신에 대한 지지가 높던 軍人 표가 새로 도입된 부재자 투표제에 의하여 고향 선거구로 가게 되었던 점이라고 했다.
 
  신문기사 검색을 해보았더니 1960년 7월31일자 조선일보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강원도 인제군의 개표가 완료되어 자유당의 全亨山(전형산)씨가 7558표로 민주당의 차점자 金大中씨의 6538표보다 1020표 차로 당선이 확정되자 30일 하오 6시경 일반군중 약400명이 개표장에 난입하여 투표함과 투표용지 전부를 소각했다 한다>
 
  이때 金大中 후보는 여당이 확실시되던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 안기부 기록에 의하면 全亨山 후보는 무너진 자유당의 후보였다고 한다. 적어도 官權이 金大中 후보를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투표함을 불태우는 사고가 난 것일까.
 
 
  「북한, 金大中의 연방제를 남북 합작 전술에 활용 가능성」
 
 
  1987년판은 1988년판보다도 金大中씨의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을 심도 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 기록은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金大中의 연방안은 전제조건이었던 「外軍철수」를 은닉함으로써 북괴의 연방안과 다르다는 인식을 주려 하고 있으나, 연방성립 조건·남북한 현실을 외면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북괴 연방안과 大同小異한 것이며, 더욱이 연방구성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제시 없이 「작은 범위의 중앙연방기구 우선 설치」 운운함으로써 연방제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양 설명, 연방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국민들을 현혹케 할 소지가 많은 선전적 제안으로서 결국에는 북괴 주장에 대한 면역 효과까지 초래케 할 것이며 이러한 논리는 경우에 따라서 북괴가 이를 변용, 합작전술에 활용할 가능성도 농후하므로 경계가 요망됨>
 
  이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예언적이다. 金正日 정권은 6·15 남북 頂上회담을 기회로 삼아 고려 연방제 통일방안을 變用한 「낮은 단계 연방제」를 金大中의 연합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여 남북한이 추구할 통일방안으로 연결시킴으로써 「남북좌익합작 음모」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의 통일전선 분위기를 남한 사회에서 형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對南 적화전술인 북한 측 연방제는 金大中씨의 연합제에 편승함으로써 한국인들의 경계심을 무디게 하여 일종의 면역효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자필 탄원서
 
 
 
  1987년판 기록은 「생활실태」 항목에서 金大中씨의 사생활을 기술하면서 상당히 비방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일정한 수입원이 없음에도 월 1200만원 지출, 호화생활. 在美時 호화 아파트(月 임대 900달러)에 기거, 매월 5만여 달러 소비, 사치생활, 외부인사 접촉 등 용무 출타時는 승용차 2~3대(로얄살롱, 레코드, 포니 등)에 4~5명의 경호원 및 비서 대동 위세 과시」라고 했다.
 
  미국에서 월세가 900달러 정도이면 결코 호화 아파트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안기부는 또 金大中씨 집의 상근 비서가 13명이고, 고용인원이 8명이라고 적었다. 안기부는 「사생활 동정」에서 통계를 내고 있다. 외식 143회(호텔 67회, 고급식당 76회), 시내외 드라이브 17회, 연극관람 5회式이다. 이 1987년판 金大中 문서에는 「金大中 渡美 경위」가 이렇게 쓰여 있다.
 
  <金大中은 1981년 1월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당일 무기로 감형되었다. 1982년 3월3일 20년형으로 特赦감형되어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그해 12월13일 대통령 각하께 신병(股關節炎) 치료를 받고자 석방을 탄원, 자필 탄원서를 제출했다. 12월16일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고, 12월23일 형집행정지 조치로 석방됨과 동시에 妻, 子(차남, 3남) 등 가족 3명과 함께 渡美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 양호
 
 
  1987년판 안기부의 金大中 문서는 「金大中 건강상태」란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金大中은 귀국 후 持病인 고관절염 증세로 불편을 느껴 1985년 5월30일 시내 종로3가 소재 고려 엑스선과에서 고관절부에 대한 엑스선 촬영 진찰 후 그해 12월13일 시내 강남구 서초동 소재 강남성모병원 정형외과장 文○○ 박사에게 「수술의 가능성 여부 등」에 대한 진찰을 받은 결과 『현재 걸어다닐 수 있으니 수술하지 말고 좀더 두고 관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진단.
 
  金大中 在美時 1983년 1월21일 미국 조지타운 대학병원 발표:耳鳴 증세는 있으나 고막은 정상이며 특별한 치료 방법은 없음. 관절염 증세는 수술을 요할 정도는 아니며 더 이상 악화될 염려 없음. 兩下肢 浮腫 증상이 있으므로 가벼운 운동 및 혈액순환 추진이 필요. 잇몸에 손상이 있으므로 수술치료 필요. 전반적인 건강상태는 양호. 처 李姬鎬는 持病인 관절염 증상(팔, 목, 머리 등 痛症)>
 
 
  『나를 죽이려고 한 정부가 나를 보호한다니…』
 
 
  1987년판 안기부의 金大中 문서는 「현재까지의 金大中 경고조치 상황」이란 항목을 두고 있다. 1985년 2월8일부터 1986년 12월6일 사이 39차에 걸쳐 관할 마포경찰서장이 찾아가서 「신변안전상 自家 보호 조치함을 告知」했을 때 金大中씨가 한 말을 적고 있다.
 
  안기부 문서는 이 조치의 법적인 근거를 이렇게 적고 있다.
 
  「형집행정지 중에 있는 법률상 신분이므로 정당법상 특정 정당의 정치활동 지원 및 방해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할 수 없음을 경고한 것임」
 
  1985년 2월8일 1차 경고 때 金大中씨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연금인가. 現정부에서 나를 죽이려 했는데 나를 보호한다니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1985년 10월19일 신민당, 民推協, 在野단체 공동기자회견 企圖와 관련하여 自家 보호 조치를 통보하러 온 마포경찰서장에게 金大中씨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법에 의하여 내 활동을 제한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법에 의한 것인가. 내가 1980년 이후 당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계속 당하고 있는데 차라리 나를 다시 구속하라. 나를 보고 自肅하라고 하는데 자숙할 사람은 나를 죄인으로 만든 정부다. 정 못 가게 한다면 안 가겠다』
 
  1985년 12월4일 인천 탑동 성당 인권강론 및 신민당 지구당원 단합 조찬회 참석을 막겠다고 통보한 마포경찰서장에 대해서 金大中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차라리 고위층에 얘기해서 나를 다시 감옥에 넣어라. 만일 나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서장이 못 가게 하겠다고 하자 한동안 熟考 끝에 「알았다」면서 체념하는 태도 示顯)』
 
  1986년 3월11일 신민당 개헌추진 본부 서울 지부 결성식 및 懸板式 참석을 막을 때의 金大中씨 언명.
 
  『정부에서는 왜 법을 안 지키나. 5·17 쿠데타를 일으켜 법을 만든 것은 현실이라고 하고, 내가 나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하자. 그러면 정부에서도 법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위법했으면 형집행정지 처분을 취소해서 감옥에 보내면 될 것이지 지난 번에 내 가족들, 비서들마저 출입통제를 시킨 것은 무슨 법적 근거인가. 정부에 전하라. 내가 언제 경거망동했는가. 경거망동이란 말을 어디다 하는가. 서장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나』
 
 
  『왜 사람을 때리나』
 
 
  1986년 4월26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충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하려는 金大中씨를 경찰이 막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4·19 행사時 비서들을 구타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앞으로 구타하는 일이 있으면 국회의원 등을 동원, 가만있지 않겠다. 4·19 묘소에 못 가게 한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 越權이 아닌가. 왜 나보고만 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경찰에서는 왜 법을 안 지키는가. 내가 지부 결성식 행사에 못 갈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일단은 시도 안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평소에 경찰차량이 나를 감시하는 것은 좋은데 석 대씩 따라다니니 남이 보기에 경호차를 많이 끌고 다닌다는 비난도 있으니 한 대 정도만 따라다니게 해달라. 내가 20년간 경찰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지만 경찰 몰래 숨어다니면서 골탕먹인 일은 없지 않은가. 청주행사에 가는 문제를 얘기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자. 지난 4·19 때 외신기자들이 촬영하기 위해 나보고 차에서 내려 설쳐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설치지 않았다』
 
  1986년 5월30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전북지부 결성식 참석을 막겠다고 하자 金大中씨는 서장에게 『매번 같은 이야기일 터이니 차나 마시고 가라』면서 커피를 권유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경찰에서는 사람을 때리나. 막더라도 사람을 때리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 막는 과정에서 서로 다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버스 안으로 끌고가 구타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어제와 오늘:이념적 일관성 추적
 
 
  前科는 말한다
 
 
  ■1946년 10월31일 목포에서 있었던 좌익들에 의한 파출소 방화 습격 경찰관 살해 등 폭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10여일간 구속 조사.
 
  ■1949년 2월경 남로당 지하당원 兪在植에게 활동자금 준 혐의로 10여 일간 구속 조사.
 
  ■1950년 6·25 직후 미국 CIC에 의해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호명착오로 救命.
 
  ■1950년 9·28 수복 때 목포 교도소에서 탈출.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부패 혐의로 구속 조사받고 3개월 만에 석방됨(金大中 자서전).
 
  ■1962년 5월20일 反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한 달 뒤 석방됨(자서전).
 
  ■1973년 8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 귀국당함.
 
  ■1975년 12월13일 서울 형사지법에서 대통령(6, 7代) 선거법 및 국회의원(7, 8代) 선거법 위반으로 금고 1년(벌금 5만원은 선고유예) 선고받고 항소. 1988년 2월5일 서울 고법에서 공소시효 완성(15년)으로 免訴 판결.
 
  ■1977년 3월22일 대법원에서 명동사건 관련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확정선고받음.
 
  ■1978년 12월27일 형집행정지 석방(1980년 3월1일 사면 복권).
 
  ■1981년 1월23일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등으로 사형선고, 무기로 특별사면(다음 해 3월3일 징역 20년형으로 특별감형).
 
  ■1982년 12월24일 형집행정지로 석방(1987년 7월10일 사면 복권).
 
 
  좌익 경험자의 대한민국은?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金大中씨는 李承晩 정권 때 두 번, 朴正熙 정권 때 세 번, 全斗煥 정권 때 한 번, 모두 여섯 번 구속조사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실형 확정 선고는 두 번). 납치를 포함하면 일곱 번, 인민군 治下 때를 포함하면 여덟 번 옥살이를 한 사람이 金大中씨이다. 자신의 책임 有無를 떠나서 金大中씨는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던 前 정권에 대하여 유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약 6년에 걸친 옥살이를 한 사람이 聖人이 아니라면 그런 정권에 대해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권에 당한 사람이 정권과 국가를 구별하여 정권만 미워하고 국가, 즉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가. 사려 깊은 사람이 아니면 이 또한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상당 부분은 정부이고 검찰이며, 대법원이고 그를 단죄한 법률체계이기 때문이다. 정권에 대한 분노는 국가에 대한 분노 내지 섭섭한 감정으로 확산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金大中씨는 한창 젊었을 때 좌익 행동대원이었다. 좌익이란 의미의 상당 부분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金日成·朴憲永·白南雲 등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세력의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국가관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세계관은 좀처럼 바뀌어지지 않는다.
 
  朴正熙처럼 전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될 때 전향하든지, 자신의 내면적인 각성에 의하여 긴 고뇌와 고통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전향을 한다. 金大中씨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는지의 여부는 더 깊은 연구를 해보아야 알 것 같다.
 
  위의 前科 기록을 보면 金大中씨는 역대 정권에 의하여 수사를 받고 투옥된 것이 그런 기회를 빼앗아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좌익 경험자에게 대한민국이란 존재는 거북한 것이다. 몸은 대한민국의 울타리안에 살면서,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심정적으로나 관념적으로 대한민국을 수용할 수 없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金大中 8·15 경축사-건국의 의미에 대해 침묵
 
 
  金大中 대통령이 제2의 건국위원회를, 야당과 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족시킨 底意 속에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엿보인다. 제2의 건국이란 말은 제1의 건국을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1의 건국은 李承晩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이다.
 
  그래서 필자는 金大中 대통령의 다섯 차례 8·15 경축사를 읽어 보았다.
 
  우선 8월15일을 광복절 겸 정부수립기념일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1948년 8월15일은 정부가 수립된 날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운영자를 뽑는 이른바 국민국가가 수립된 날이다. 국가 아래에 정부가 있다. 8월15일을 정부수립기념일이라고 한다면 張勉 정부 수립기념일, 朴正熙 정부 수립기념일, 金大中 정부 수립기념일도 있어야 한다. 8월15일은 광복절인 동시에 건국절이다.
 
  8월15일의 가장 큰 의미는 광복이라기보다는 건국이다. 광복은 우리 힘으로 해낸 것이라기보다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했기 때문에 이뤄졌다. 대한민국 건국만은 李承晩이란 위대한 지도자가 애국세력의 힘을 모으고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원과 공인을 받아내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이룩한, 우리의 의지가 담긴 우리의 작품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2002년 8월15일 57주년 광복절(54주년 건국절)을 맞아 경축사를 했다(張大煥 총리서리가 대신 읽음). 연설 내용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한 마디 이야기가 없었다. 독립운동과 광복의 의미만 이야기했다. 金대통령은 다섯 차례의 8·15 경축사 중에서 건국 50주년인 1998년 경축사에서만 건국에 대해서 짧게 언급했을 뿐(그것도 제2의 건국 운동을 길게 언급함으로써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 한 번도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다.
 
 
  前 정권에 대한 가혹한 평가, 金日成의 전쟁범죄에 대한 침묵
 
 
  李哲承씨 말대로 건국절을 무시하고 광복절만 모시는 것은 아버지 제사는 모시지 않고 할아버지 제사만 모시는 격이다.
 
  1945년 8월15일의 광복으로 우리가 자동적으로 주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3년 뒤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국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국민국가를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으로 그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공인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라 없는 민족에서 비로소 국민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민족보다도 한 단계 더 성숙한 존재인 것이다.
 
  한국의 좌파세력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가볍게 본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은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법통을 계승해야 할 의무를 진 사람이므로 건국을 부정할 수 없다.
 
  金大中 대통령은 올해 8·15 경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국민은 수없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뒤에는 다시 국토가 분단되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권위주의 정부 치하에 억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선열들의 기백과 정신으로, 우리 국민의 땀과 눈물 위에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발전한 것입니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이제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자부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권위주의 정부의 압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전쟁의 참화가 金日成의 남침에 의한 것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도 월드컵을 유치한 金泳三 정부의 치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다만 金泳三 정부 시절의 외환위기를 거듭해서 강조했다.
 
  요약하면 前 정권에 대한 가혹하고 냉담한 평가, 金日成의 전쟁범죄에 대한 언급회피, 前 정권의 치적에 대한 묵살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권위주의 정부 치하에 억눌려 살았다』고 했지만 이는 일면적인 관찰이다. 朴正熙 권위주의 정부 시절 「억눌려」 살았다는 국민들이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全斗煥 권위주의 정부 시절 「억눌려」 살았다는 국민들이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뜻을 모아 땀흘렸던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 시절 정치적으로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동시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 보람을 느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자들의 일면적 체험을 역사의 흐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민족사의 정통적 흐름을 계승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의 資産과 負債를 동시에 지고 가야 하는 존재이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의 실정을 비판하되 불멸의 치적인 건국과 護國의 의미를 균형 있게 언급할 수 있는 中庸의 德이 소위 문민 대통령 가운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건국 50주년에 제2의 건국 운동 역설
 
 
  8·15 연설문 조사 결과 金大中 대통령이 8·15를 대한민국 건국과 연결시켜서 설명한 것은 1998년 8월15일 한 번뿐이었다. 이날 연설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언급은 「오늘은 광복 53주년 기념일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는 문장 하나였다. 민족사에서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고 유엔의 공인下에 국민의 뜻을 모아 탄생했고, 이 점에서 민족사의 정통성은 소련의 조종下에 만들어진 북한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도 다짐도 想起도 없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 연설 서두에서부터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定立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민족의 再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제2의 건국」을 제창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 건국을 낮게 평가함(또는 부정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 「제2의 건국」 운동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가 가진 한국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視覺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렇게 요약했다.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波瀾의 시기였습니다. 국토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수십년간의 군사독재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우리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 땅에 건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50년 만에 이룩한 與野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국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50여 년의 현대사 흐름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1997년 大選과 국민들이 독재와 전쟁을 이겨내고 이룩한 경제대국 건설뿐이다. 그의 論法에 따르면 경제대국 건설의 주인공은 李承晩·朴正熙 세력이 아니라 「전쟁과 독재를 이겨낸 국민들」이다. 군사독재는 오히려 경제건설의 장애물이었는데 국민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苦鬪를 통해서 경제대국을 건설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선배 대통령들의 업적에 대한 전면적 묵살(또는 부정)이 깔린 말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역사를 지도층과 국민들이 한 덧灑리가 되어 만들어 간 것으로 보지 않고 「나쁜 지도자」와 「좋은 국민들」로 대립시키는 視覺을 보여 주었다.
 
  1999년 8월15일 경축사에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手苦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도 감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독재체제 아래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의 희생과 헌신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97년 12월18일,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국민의 투표로 與野간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金泳三 정부뿐 아니라 민주화를 시작한 盧泰愚 직선 정부까지 「반세기에 걸친 독재체제」에 포함시키는 듯한 唯我獨尊의 자랑이었다.
 
 
  건국 공로자에 대해서만 한 마디 감사도 없음
 
 
  6·15 남북 頂上회담 직후인 2000년 8월15일 경축사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었지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반세기 동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적대와 반목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남북간 무장대치 상황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중립지대에 선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도록 만든 것은 金日成의 6·25 남침이었다는 사실을 왜 분명히 적시하지 않는가.
 
  적대와 반목은 대한민국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金日成·金正日의 남침과 도발과 테러와 암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金日成 父子를 敵對할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 피해자인 대한민국의 자위조치를 설명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적대와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는 중립적인 언어를 동원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을 불리하게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은 남북한 적대와 반목의 공범자도 從犯(종범)도 아니다. 북한 정권이 반목과 적대의 유일한 주범인데 왜 피해자 측의 대표가 피해자에게 책임의 일단을 지게 만드는 語法을 쓰고 있는가.
 
  金日成·金正日의 反인류, 反민족적 범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摘示(적시)하지 않으면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또 「독재체제의 삼엄한 탄압과 횡포 아래서」란 말을 썼다.
 
  그의 다섯 번에 걸친 8·15 경축사에서는 독재체제(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빠짐없이 등장한 반면, 金日成·金正日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그같은 직설적 공격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後代 학자들이 金大中 경축사를 분석하면 『아, 이 사람은 主敵인 북한 정권보다도 대한민국의 前 정권들을 더 미워했구나. 彼我 구분이 뒤집어진 사람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2000년 6월25일은 金日成 남침전쟁 50주년이었다. 이 뜻깊은 기념사에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놀랍게도 6·25 전쟁이 金日成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한만 공산화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의 목적은 당시 취약했던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산지배에 대한 음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金大中 대통령은 6·25 남침의 주범으로 스탈린을 등장시켰다. 스탈린이 남침을 사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범 金日成을 직접 책임자라고 언급한 뒤에 스탈린을 비판해야 하는데 金日成을 빼버리니까 스탈린이 주범처럼 된 것이다.
 
  金대통령은 또 『도대체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습니까』라고 自問한 뒤 이런 답을 내린다.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총칼로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원인은 일제 지배에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서구의 물결이 도도히 동쪽으로 흘러들어올 때 (하략)』
 
 
  좌파적 역사관에 더 가깝다
 
 
  그는 6·25 전쟁의 原因이 아니라 遠因을 찾고 있다. 6·25 전쟁의 원인은 金日成의 남침이다. 이 原因을 이야기한 다음에 遠因으로 넘어가야 설명이 되는데 原因을 빼버리니까 遠因이 原因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내 아들을 죽인 살인이 왜 일어났습니까」라고 自問한 피살자의 아버지가 「그것은 우리 집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꼴이다. 집의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은 살인의 原因이 아니라 여러 遠因 중의 하나일 뿐이다.
 
  2001년 8월15일 경축사에서도 金大中 정부는 이날이 건국기념일이란 사실을 전혀 연설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는 北美회담이니 北美관계란 말을 썼다. 우리의 主敵이자 우리가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권력실체로서는 인정하지만) 북한 정권을 우리의 血盟인 미국보다도 우대하는 비뚤어진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상의 다섯 차례 8·15 경축사에 나타난 金大中 대통령의 역사관은 대강 이러하다.
 
  첫째, 그는 8·15 기념일이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다.
 
  둘째,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
 
  셋째,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전쟁을 일으킨 金日成 부자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公墳心을 보여주지 않았다.
 
  넷째, 그는 歷代 정부와 대통령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했다. 그는 현대사의 업적을, 그런 잘못된 정부들의 압제 등을 극복한 국민들에게만 돌렸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국가이며 민족사의 정통국가라는 확신을 그의 연설에서 누락시켰다. 이는 그 자신이 그런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역사관은 대한민국 국가원수(국군통수권자)의 역사관이라기보다는 좌파적 역사관에 더 가깝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남북무장 및 이념 대치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국민들에게 不眠의 밤을 선물했다.
 
  부정적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부정적 국가관을 낳는다. 부정적 국가관이란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없거나 약하다는 의미이다. 줄여서 얘기하면 애국심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 혼란을 결과한다.
 
  역사관과 국가관이 분명하지 않으면 누가 적이고 동지인가 하는 彼我 구분에서 혼란이 생긴다. 金대통령이 主敵인 金正日보다 경쟁자인 李會昌 총재를 더 미워하는 것 같은 행동을 보였다면 그 원인은 이런 彼我 구분 기능의 마비 때문이든지 구분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조국에 대한 자랑과 사랑이 약한데 적에 대한 증오심과 용기가 솟아날 수는 없다. 정의감이란 不義에 대한 公墳이자 弱者에 대한 동정심이다. 공분심과 동정심이 없으니 正義感이 생기지 않는다. 金正日이 밉지 않고 탈북자가 불쌍하지 않은 것이다.
 
 
  땅에 떨어진 태극기
 
 
  金大中 대통령의 부정적인 역사관과 국가관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것이 부산 아시안게임 입장식에서 남북한 팀이 태극기를 치워 버리기로 합의한 다음 한국內 좌익세력의 상징물이 된 한반도旗를 들기로 한 조치일 것이다. 친북좌익세력명단공개 추진본부(본부장/육해공군해병대(예) 대령연합회 회장 徐貞甲)가 신문에 낸 광고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시안게임 입장식에서 대한민국의 국기 대신에 친북 좌익세력의 깃발과 인공기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은 金大中 세력과 金正日 정권 및 남한內 친북세력 사이에 통일 전선적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국민들은 대통령이 적과 내통하고 있는지 여부를 감시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두 아들이 부패혐의로 구속되고, 총리서리가 두 차례 국회의 임명동의에 실패하여 사실상 국정수행 능력을 상실한 金大中 대통령은 金正日 세력과 한국의 친북 좌익세력이 소요, 폭동을 일으킬 때, 과연 이를 진압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金大中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는 한 국민들은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다>
 
  2002년 9월7일 저녁에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 축구 시합 때 태극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을 경찰이 단속한다는 소식을 전날 밤에 들은 애국 단체는 사발통문을 돌려 이날 오후 약1000명이 경기장 앞에 모였다. 대령연합회, 재향군인회, 자유시민연대, 6·25군경유자녀회, 무공자 수훈회 사람들은 준비해 간 종이 태극기를 입장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경기장 관리자들은 입구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통과시켜 주고 태극기를 들고 들어가는 사람들로부터는 태극기를 빼앗기 시작했다. 빼앗은 태극기를 소중히 보관하지 않고 땅바닥에 팽개치다시피했다. 이 장면을 본 육해공군대령연합회 회장 徐貞甲씨 등 애국단체 회원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 누가 이런 일을 시켰는가』
 
  이렇게 따지자 관리자들은 『상황실에서 시킨 대로 한다. 태극기를 들고 들어가면 북한이 항의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徐회장이 『당장 상황실장을 대라. 기자들을 부르겠다』고 나무라고 여러 명이 합세하자 관리자들은 마지못해 태극기 입장을 허용했다고 한다. 한 시민은 태극기를 금지시킨 자들을 고발하겠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國旗는 국가 그 자체이므로 어떤 때, 어느 장소에서도 내려질 수 없는 것이다. 전쟁에 지더라도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國旗는 휘날리게 되어 있다. 헌법상의 반란집단인 金正日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남북축구시합 주최 측이 자국민의 국기 소지를 금지시킨 것은 그 성격상 국가를 적에게 팔아넘긴 반역적 賣國행위이다.
 
 
  「상부로부터의 반란」을 진압하기란 쉽지 않다
 
 
  金大中 정권下의 남북축구시합 주최 측이 태극기를 땅에 팽개치도록 공권력이 방치한 것은 반역적 정권이 등장하여 主敵과 손잡고 국가(태극기)를 뒤집어엎으려는 것을 상징(또는 예고)한다고 비난해도 논리상 큰 비약이 아니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다행히 애국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主敵을 위해 태극기를 죽이는 반역행위를 진압한 셈이다. 이 또한 상징적이다. 앞으로 좌익정권이 들어서서 대한민국을 金正日 정권한테 팔아넘기는 음모를 할 때는 主權을 가진 국민과 국군이 들고 일어나 헌법의 명령을 받들어 좌익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徐貞甲 회장 등 애국단체 사람들이 태극기를 압수하는 것에 대해서 관리자들에게 항의할 때 일반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편을 들지 않고 웅성웅성하는 정도의 응원만 하더라고 한다. 이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좌익정권이 보수로 위장하여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 공권력을 반역적으로 이용한다면(히틀러처럼) 일반시민들은 대항하기가 쉽지 않다.
 
  조직된 애국세력이 반역적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물리력을 반란 정권 타도에 쓰지 못한다면 한국의 좌익정권이 북한의 金正日 정권에게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을 막기는 매우 어렵다. 정권은 형식상 합법적으로 보이는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부로부터의 반란은 쉽다.
 
  태극기를 압수하라는 반역적 명령이 상암 경기장에서 실질적으로 먹혀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反憲法的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공직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앞으로 軍지휘권과 검찰 및 경찰통제권을 쥔 좌익정권이 들어선다고 치자. 이 자들이 金正日 정권의 지시를 받고 대한민국의 군인·검사·경찰에 대해 애국세력을 소탕하라고 지시할 때 간부들이 『이것은 반역적 명령이므로 거부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헌법에만 충성한다』면서 총부리를 그 좌익정권 쪽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어떤 권력에도 충성한다』면서 金正日 세상이 될 것에 대비하여 반역적 명령에 따를 것인가.
 
  「작은 반역」을 진압한 徐貞甲 회장은 『시민들이 태극기를 압수당하고도 아무 소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열이 오르면서 배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저건 가만둘 수 없다는 용기가 생기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태극기를 나눠 주는데 아주 적대적인 태도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 정권이 그동안 정말 나쁜 짓을 해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태극기를 빼앗아 땅에 처박을 수 있었던 배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종국적으로 金大中 대통령한테서 온 것이다. 태극기를 능멸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 상부로부터는 물론이고 언론으로부터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란 계산, 국기 모독 혐의로 수사기관에 불려다니지 않으리란 추정은 모두 金大中 대통령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들은 태극기를 빼앗고 정체불명旗를 권장한 반역적 행위를 정권이 지시하고 밀어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비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북한이 항의하기 때문에 태극기를 압수합니다』란 치욕적인 말이 그들의 입에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金大中 대통령의 이념성향이 공직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충성」을 금지한다
 
 
  金大中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태극기를 빼앗도록 시킨 것은 애국심을 금지한 행위이다. 조국에 대한 충성을 금지한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견제되지도 처벌받지도 않고 넘어간다면 국민들은 조국에 충성하는 데 있어서 눈치를 볼 것이다. 金正日의 눈치, 친북 좌익세력의 눈치, 어용방송의 눈치, 정권 홍위병 세력의 눈치, 그리고 金大中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기업인들은 좌익단체를 돕는 데는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탈북자나 反共·애국단체를 도울 때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듯이 하고 있다.
 
  金大中 정권의 정체와 本色은 아시안 게임 입장식에서 남북한 팀이 태극기를 치우고, 정체불명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친북좌익 깃발이 된 한반도旗를 들고 나오도록 합의해 줌으로써 확실하게 드러났다. 태극기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은 사라졌고, 한반도旗로 상징되는 남북한 좌익 합작은 성공했다. 이것이 반역이 아니면 태극기는 國旗가 아니다.
 
  만약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양키 스타디움에 성조기를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탈레반의 깃발만 들고 들어가도록 강제한다면 그는 다음날 하야하고 즉시 구속되거나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金大中은 사상이 다른 사람
 
 
  金大中씨가 해방 공간에서 좌익 행동대원이었다는 사실과 2002년 가을 한국에서 태극기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연결하는 線은 단절되지도 휘어지지도 않고 대충 직선을 그리고 있다. 이 일관성은 그의 세계관과 이념에서 나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金大中씨를 기회주의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정책적, 전술적인 면에선 기회주의적(또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념적, 역사적, 전략적 면에서는 首尾一貫하다. 對北·통일문제에 있어서 그는 여론에서 불리할 때도 좌파적(또는 친북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1994년 金日成이 사망했을 때 조문론을 놓고 보인 태도, 사형선고를 받아 가면서도 놓지 않았던 통일방안, 北核문제, 서울올림픽 공동개최론, 남북한 UN가입문제에서 취한 자세는 자신의 이념을 딛고서 부정적 世論에 맞선 대담한 것들이었다. 金大中씨가 기회주의자였다면 그에게는 대통령의 기회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李會昌씨의 한나라당이 이념형 지도자인 金大中씨를 과소평가하거나 잘못 보고서 그의 햇볕정책을 「정책의 차이」로 해석하여 대응해 온 것은 전략적 실수였다. 金大中 대통령의 이념에 기초한 對北정책은 그 지향점이 李會昌씨나 과거 어느 대통령의 정책과도 다른 것이다. 金대통령은 그들과 사상, 즉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념적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의 흐름과 맞지 않는 일관성의 끝은 절벽이다.
 
  1946년 무렵의 공산주의가 약간의 이상을 간직했었다면 지금의 金正日은 양심적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敵이 되어 있다(권력세습·부패·人民학살은 양심적 공산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증오하는 것이다. 즉, 김정일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이야기다). 金大中 대통령의 金正日觀과 對北정책이 化石처럼 느껴지는 것도 1946년 무렵에서 멈춰버린 이념의 시계를 고수하려는 일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남은 임기가 아주 짧지만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다면서 전전긍긍해 하는 이들도 많다. 安企部의 「金大中 파일」은 정확성과 객관성에 문제가 많지만 오늘과 내일의 金大中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휴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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