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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玄의 하얼빈 특종 인터뷰] 『나의 전우 金日成은 개인숭배와 후계자를 잘못 선택한 과오를 범했다』

피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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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 빨치산 시절 金日成 일가와 한 식구처럼 지낸 陳雷 (前 흑룡강성 省長)-李敏(조선족 여성) 부부가 처음 털어놓는 東北抗日聯軍의 실상, 소련 密營의 金日成과 金正日, 그리고 文革期의 수난
에드거 스노의 친구라는 위력
  李敏(이민) 여사는 자신의 항일운동 내력, 특히 金日成(김일성) 父子(부자)와 가까웠던 얘기는 아무에게나 잘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입 다물었던 얘기를 내게 털어놓게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에드거 스노(Edgar Snow)의 친구라는 인연으로 나는 1980년 5월 당시 朝鮮族(조선족)이 아닌 在外 韓人(재외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中共(중공)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은 바로 黃華(황화) 外相(외상)이었는데, 1930년대 초 毛澤東(모택동)이 머물고 있던 延安(연안) 동굴을 찾아온 젊은 미국기자 에드거 스노의 통역을 맡았던 분이다. 그때 인터뷰가 나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책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로 나온 것은 유명한 얘기다.
 
  당시 중국에서 스노는 중국 공산혁명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기자로 존경과 추앙을 받아왔다. 그런 스노의 친구였던 나는 물론 VIP(要人) 대접이었다. 덕분에 그때 나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 孫文(손문)의 미망인 宋慶齡(송경령) 같은 저명 인사를 만났다. 宋慶齡 여사는 바로 국민당 蔣介石(장개석) 총통 부인 宋美齡(송미령) 여사의 언니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에드거 스노와 가까운 친구였다는 인연 덕분에 나를 위해 짜놓은 공식초청 계획조차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원래는 上海(상해), 南京(남경), 延安 등 에드거 스노의 발자취를 따라 짜여진 여행 스케줄이었다. 가는 곳마다 지방 당국은 「미국에서 온 에드거 스노의 옛 친구」를 맞는 환영위원회를 준비하고 있어 도저히 스케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옛날 스노와 알고 지내던 중국인 친구들까지 모아 놓았다는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를 환영하는 만찬 석상에서 마오타이를 마시고 상당히 취한 김에 농담처럼 떼를 썼다. 옛날 滿洲(만주), 지금 東北(동북)지방에 가야만 한다. 한민족 해방군을 조직하여 고구려 왕국의 舊土(구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거기 가야 한다고 했더니, 모두들 처음엔 啞然失色(아연실색) 어리둥절했다가 한참 뒤에야 농담인 줄 깨닫고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꼭 가셔야지요. 스케줄을 바꿔 선생을 동북지방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가셔서 선생의 꿈 같은 포부를 한번 펴보시지요. 하하하』
 
  이번엔 내 쪽에서 놀랐다. 중국인들의 넓은 마음씨는 감동적이었다. 농담처럼 던진 내 제의를 선뜻 들어주다니! 실은 나로서는 동북지방에 가는 문제가 절실했다. KBS 다큐멘터리와 한국의 한 일간신문에 기사를 쓰기로 하고 두 군데서 이번 중국 여행에 재정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북지방에 가서 그곳 조선족과 만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었다. 그때 내가 에드거 스노와 그렇게 가까운 우정을 쌓지 않았던들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내게 好意(호의)를 베풀었을까 의문이다.
 
 
  14년 만의 再會
 
 
  그후 나는 중국을 수십 번 들락거리면서 중국의 한인 인사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중에서도 李敏이라는 여인을 잊을 수 없다. 1985년 여름 하얼빈 국제호텔 로비에서 그때 동행했던 작은 형님 玄鳳學(현봉학) 박사와 함께 만난 분이다. 黑龍江省(흑룡강성) 省長(성장) 부인으로서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과 소수민족위원회 주임을 맡아 활동이 많은 李여사가 바쁜 시간을 내서 형님과 나를 호텔까지 직접 찾아와 준 것은 여간 영광이 아니었다.
 
  『먼 길 찾아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간신히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함께 온 조선족 직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때 우리는 항일투쟁과 우리나라 독립운동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분은 자신이 젊었을 때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게릴라 전투원으로 활동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全(전) 세계 해외동포들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함께 뭉치자고 역설했던 기억이 난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차림이지만 어딘가 고상한 매력이 풍기는 51세 된 중년 여인에게서 그 가슴에 간직한 열렬한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는 강인한 決意(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感動(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내 생애를 통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9년 10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세계 NGO 대회에 흑룡강성 소수민족 聯誼會(연의회) 명예회장 자격으로 그분이 참석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서울로 달려왔다. 형님 玄鳳學 박사는 그분을 위해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대접하였다. 李敏 여사는 하얼빈에서 우리가 서로 만난 지 14년 만의 再會(재회)를 몹시 반가워했다. 그날 저녁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중년의 조선족 학자 金宇鍾(김우종) 교수가 완벽한 한국말로 그분의 통역을 맡아주었다.
 
  우리는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金교수는 내 명함의 玄雄(현웅)이라는 한국 이름을 보더니 다시 묻는다.
 
  『몇 해 전에 베이징의 紅旗出版社(홍기 출판사)에서 나온 박정희 傳記(전기)를 쓰신 玄선생 아니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뜻밖에 만나 뵈니 반갑군요! 그 책이 나왔을 때 베이징 출판사에서 한 권 보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인간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李敏 여사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번역 원고의 복사본을 金正日(김정일)에게 주었지요. 아마 金正日이 그 책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과 경제발전 업적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朴正熙는 한국의 秦始皇』
 
 
  이런 뉴스를 듣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홍기 출판사가 내놓은 중국어판 박정희 전기는 지금도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槪要(개요)에 불과하고 아직 脫稿(탈고)가 안 끝난 상태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책은 故(고) 李先念(이선념) 전 국가주석의 사위 劉亞洲(유아주)가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PEN 대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내 영문 개요를 읽고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 정부 관리, 학자와 일반 독자들에게 읽히는 게 좋겠다고 하여 나오게 된 배경까지 털어놓았다. 劉亞洲 자신은 朴正熙의 뛰어난 업적에 감동한 나머지 그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金교수는 한마디 더 보탠다.
 
  『중국에서 홍기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권위입니다. 이 출판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이기 때문에 보통 중요한 책이 아니면 절대로 취급 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過讚(과찬)의 말씀』이라고 인사를 차릴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 가면서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하얼빈 손님들은 醉興(취흥)이 무르익었다. 李敏 여사는 일어서더니 愛唱曲(애창곡) 抗日 鬪爭歌(항일 투쟁가) 「어머님 울지 마세요」를 부른다. 그 옛날 젊고 용감한 항일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만주에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춘만 작사, 작곡의 「어머님 울지 마세요」의 가사는 원래 중국어로 된 것인데 李여사가 번역한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엄마 엄마 어머님은 왜 우십니까/ 어머니가 우시면 나도 울고 싶어요/엄마 품에 안기어서 나도 울고 싶어요.
 
  네 아버지 떠나신 후 오늘날까지/ 한번도 못 뵈옵고 해와 달이 바뀌어/ 어언간 삼년 세월이 흘러 가고나.
 
  네 아버지 떠나신 후 오늘날까지/ 밤마다 정성 들여 기도 드려왔지만/기도해도 허망한 일 쓸데가 없고나.
 
  엄마 엄마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아들아 수동아 네 아버지는/ 전선으로 왜놈들과 싸우러 가셨다.
 
  어머님 어머님 울지 마세요/ 어머님 어머님 울지 마세요/ 어머니가 우시면 나도 울고 싶어요』
 
  李여사는 청아하고 앳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감정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우리가 만주 벌판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릴 때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사기를 올렸습니다』
 
  李여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잔 다르크를 떠올렸다. 꿈과 용기와 자신을 던진 애국심으로 프랑스 역사의 자랑스럽고 전설적인 한 章(장)을 기록한 女人像(여인상) 말이다.
 
 
  평생 첫 인터뷰 허용
 
 
  李여사에게 그 옛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 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기에는 그날 저녁 자리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 헤어질 때 나는 李여사의 화려한 과거에 대하여, 특히 金日成 부자와의 오랜 우정에 관하여 좀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李여사는 주저하는 빛을 보이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李여사에게 다짐했다. 언젠가 李여사에 대한 글을 쓴다면, 중국 인민들이 바이블로 생각하는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처럼 절대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그러면서 1985년 「중국의 붉은 별」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베이징 대학에서 열린 에드거 스노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나의 연설문이 人民日報(인민일보)에 실린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날 발표자들 중에는 黃華 외상과 뉴욕타임스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sbury) 등 국내외 저명 인사들이 10여명이나 되었었는데 인민일보에 실린 연설문은 내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China Daily)가 「중국의 韓人(The Koreans in China)」이라는 나의 긴 기사를 실었다는 사실과 함께 나 자신이 黃華 전 외상이 회장으로 있는 중국 에드거 스노 연구회 명예理事(이사)의 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말했다.
 
  李敏 여사는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金교수가 나섰다. 그 문제는 李여사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한 2주쯤 됐을까, 그분들이 하얼빈으로 돌아간 다음에 장거리 전화로 金교수를 불러 졸랐다. 적당한 시간에 李여사와 그 문제를 꼭 의논하겠노라는 친절한 대답이었다. 며칠 뒤 다시 한번 전화했더니 李여사가 여지껏 아무한테도 한 일이 없는 인터뷰를 내게만 특별히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었다.
 
 
  항일투쟁의 살아 있는 증인
 
 
  무엇보다도 李敏 여사는 그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왔다. 특히 김일성 부자와 가까이 지낸 대목에 와서는 언제나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李여사는 누가 뭐래도 일본 식민지 통치시절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벌인 항일투쟁 경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생존자의 한 분이다. 이분이야말로 그동안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학자, 정치 지도자, 작가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章을 놓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혹은 조작해온 갖가지 잘못된 인식과 기록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獨步的(독보적)인, 살아 있는 증인이 아닌가.
 
  작년 12월 초 서울-하얼빈 직행 아시아나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반 동안 오직 한 가지 생각이 줄곧 나를 사로잡았다. 과연 李敏 여사가 자신의 항일 투쟁과 그의 오랜 동지 金日成 부자와의 관계를 내게 사실대로 말해줄까? 그분이 1930년대부터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이 그분의 생각과 판단을 지배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金日成의 행적에 관한 그분의 진짜 평가를 밝혀줄 것인가? 예컨대 金正日의 출생지에 관한 진실을 지금 북한에서 얘기하듯이 백두산 기슭이라고 우길 것인가, 아니면 소련의 기록과 다른 주장들처럼 하바로프스크였다고 할 것인가?
 
  한편, 나는 북한의 慘狀(참상)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북한과 같은 1인 독재국가에서 지도자의 특징, 인간성, 인생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金日成의 경우를 보라. 젊었을 때 겪었던 여러 가지 인생 경험들, 특히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시절 경험과 1940년대 스탈린주의 소련에서 직접 겪었던 체험이야말로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또 그 후 정치 권력을 잡아 북한이라는 독재 국가를 만들어 가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말이다. 나는 꼭 그렇다고 믿는다. 그럼, 李敏 여사의 理想(이상)과 思想(사상)은 어떤 것인가? 이분 역시 청춘을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으로 보내고 비록 잠깐이지만 소련 체재 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평생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점과 과거 中蘇(중소)간의 이념 대립이 심각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나는 제발 이분이 金日成 부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주기를 바랐다. 아니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얼빈의 북한 여성들
 
 
  하얼빈 취재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 여행은 태국의 비단결처럼 매끄러웠다. 공항에 도착하니까 아시아나 하얼빈 지점장 文明永(문명영)씨가 마중 나와주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 찾는 데로 가는데 관세 구역에 요란한 색깔의 치마 저고리를 입은 아가씨들이 우리들을 반긴다. 『하얼빈에 오신 것 환영합니다』고 인사하면서 명함을 나누어준다. 앞면에는 『조선-평양, 금강산 식당 어서 오세요』라고 적혔고 뒷면에는 식당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다.
 
  『저 아가씨들이 어떻게 관세 구역 안에서 손님 끄는 영업행위를 하는 거요?』
 
  文 지점장에게 물어보았다.
 
  『와이로요, 여기서는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아가씨들은 서울발 아시아나 항공이 도착하는 시간에 늘 이 자리에 나옵니다. 금강산 식당 음식 형편없어요. 전 거기 절대 안 갑니다』
 
  호텔로 오면서 보니까 1980년대 중엽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공항부터 새로 지은 현대식 시설이고 시내로 들어오면서 수십 채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길도 많이 넓어졌다. 1980년대에는 鄧小平(등소평)의 경제개혁과 근대화 정책이 이곳 동북지방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중국 어디 가나 드러난다.
 
  수많은 外製車(외제차)들이 한길을 메우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섭씨 영하 10도의 거리에서 핸드폰을 들고 통화하면서 바삐 걸어간다. 하얼빈도 베이징, 상하이, 홍콩, 아니 서울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두 군데나 있어서 안심이었다. 내가 묵을 샹그릴라 호텔은 개장한 지 불과 몇 달 안된 별 다섯 개짜리였다.
 
  12층에 있는 내가 묵을 방은 세계 다른 도시의 샹그릴라 호텔이나 다름없이 우아하고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아, 넓은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松花江(송화강)의 傳說(전설)어린 壯觀(장관)이여! 지금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나는 1985년 여름에 왔을 적에 본 유유히 흐르던 물결을 눈에 그릴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출신 항일 빨치산들이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이 강을 건넜던고! 그날 밤 이름난 항일 빨치산 두 분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하고 조바심이 났다.
 
 
  빨치산 출신 老신사의 풍모
 
 
  李敏 부인과 그 남편인 前 흑룡강성 성장 陳雷(진뢰)가 나를 위해 베풀어준 화려한 저녁 모임은 하얼빈에서 유명한 식도락 궁전 雪龍酒家(설룡주가)에서 열렸다.
 
  모두들 내가 동북지방에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중국공산당 中央顧問委員會(중앙고문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省長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몸이 장대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83세의 중국인 老紳士(노신사)는 뿔테 안경 너머로 사물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분이 젊었을 때 용감한 항일 빨치산이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요, 또 흑룡강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省長이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風貌(풍모)였다. 비록 연로했지만 분명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리 있게 환영사를 해주었다.
 
  중국 동북지방 최고의 요리사가 특별히 마련한 산해진미가 끊임없이 서브되는 동안 새 접시가 나올 때마다 乾杯(간빠이)를 계속했다. 우리들은 알코올 도수 38도짜리 白酒(백주)를 마셨지만 李敏 여사는 중국산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다른 젊은 손님들에게 지지 않는 省長의 酒量(주량)에 놀랐다.
 
  省長과 다른 손님들이 간빠이를 제의할 때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재빨리 잔을 비우고 진짜 友情(우정)을 나누는 분위기에 동참하였다. 나로서는 省長과 李여사의 나에 대한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분들이 나를 믿으면 믿는 그 만큼 앞으로 사흘간 가질 인터뷰에서 솔직한 얘기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人民日報(인민일보)와 영자신문 차이나 데일리에 난 내 기사와 중국 에드거 스노 연구회 명예이사 임명장 카피까지 그분들에게 보여주었다. 省長이 나를 좋아하는 빛을 보고 나도 그가 좋아졌다. 따뜻한 우정은 서로 오고가게 마련이다. 이번 취재 여행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 같은 육감이 느껴졌다. 못해도 50%는 성공한다는 자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하얼빈 도심 省 정부 청사에서 가까운 鞍山路(안산로)에 있는 省長의 저택을 찾아갔다. 거대한 저택의 정원 담은 漢詩(한시) 구절을 새긴 석판으로 장식되어 주인의 詩(시)와 서예에 대한 조예를 짐작하게 한다. 널찍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한가운데 작은 亭子(정자)가 있어서 흡사 露天(노천)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자연과 예술의 완벽한 調和(조화)여!
 
  李敏 여사의 한국어가 서툴고, 그 남편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르기 때문에 黨史연구소 소장 金宇鍾 교수와 흑룡강신문사 李太福(이태복) 부주임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다. 사실 陳성장이야말로 만주 시베리아 항일 투쟁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력자이면서, 한국인 항일 빨치산들과 공동 작전도 펴왔고, 그러다가 李여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金日成 부자와 각별히 친한 사이인 만큼, 나는 그와 먼저 인터뷰할 필요를 느꼈다. 아니, 내가 첫 질문을 떼기도 전에 陳성장은 자신의 獨白(독백)을 읊어나갔다.
 
 
  조선족 反日투쟁 보고 中2 때 혁명 가담
 
 
  『나는 1917년 흑룡강성 佳木斯(가목사)시 서쪽 교외 火龍溝(화룡구)라는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淸朝(청조) 말엽, 원래 산동성에 살던 증조부는 이 고장에 와서 말을 달려 금을 그어 백ha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여 제법 큰 地主(지주)가 되었지요. 말을 달려 땅을 차지하게 한 것은 그 당시 淸朝의 변방 개발 장려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家門(가문)이 기울어진 것은 가족간의 訟事(송사) 때문이었어요. 종부 한 분이 증조부의 재산분배가 불공정하다고 관청에 고발하자 증조부도 맞고소하여, 아무튼 이 송사가 베이징의 大理院(대리원)까지 올라가면서 몇 년이 걸리는 동안 家産(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했지요. 결국 증조부는 땅을 열 몫으로 나누어 나의 조부에게만 부모를 모신다고 하여 20ha를 물려주고 나머지 일곱 아들에게는 11ha 남짓 되는 땅들을 쪼개어 주었답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해졌지요.
 
  1929년 열두 살 나던 해에 樺川縣(화천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고 내 장래에 큰 희망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점쟁이까지 불러서 내 운명을 점쳤으니까요. 그 점쟁이는 기껏 좋은 소리 한다는 것이 내가 크면 管帶(관대) 벼슬에 오르겠다고 했다나요. 지금 대대장 급에 해당하는 당시 군대 계급이지요. 할아버지께서 그 말을 듣고도 몹시 기뻐했다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점쟁이 담이 작았던 모양이지요. 흑룡강성 省長까지 된 사람을 겨우 관대 벼슬이라니. 하하하』
 
  이제부터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이 아주 어려서부터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투쟁에 가담하게 된 動機(동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혁명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른바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 9월18일 이후였다고 기억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지요. 당시 동북지방에서 제일 먼저 反日(반일)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조선족들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조선족들은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 와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저렇게 희생적으로 反日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 우리도 일어나 日帝(일제)에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 이런 생각에 나도 反日 활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反日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일본군이 가목사를 점령한 것은 1932년, 그 바람에 우리 학교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 1년 넘게 농사를 지었지요. 짧은 경험이었지만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가, 농촌의 깊숙한 裏面(이면)을 좀 깨닫게 되었지요. 이 귀중한 체험은 나의 진로 선택과 인생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만주사변 후 동북지방의 애국 將領(장령) 馬占山(마점산)이 嫩江(눈강) 다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들의 항일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지요. 우리는 그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항일 운동을 선전하는 연극을 만들어 거리에 나가 공연하고 또 義捐金(의연금)을 모아 항일 전선의 장병들을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골 농촌까지 내려가서 농민들에게 反日 애국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1933년 화천중학교 사범반에 들어갔습니다. 학비가 면제되는 사범반을 지원한 것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지요. 1936년 졸업하자마자 나는 가목사 동문소학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사범학교 졸업반 때 共産黨 입당
 
 
  ―중국 공산당에 入黨(입당)한 것은 언제입니까? 그 당시 동북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중국 공산당 입당은 1935년, 아직 사범학교 졸업반 학생 때였지요. 졸업 후 중국 공산당 가목사 지하당 조직위원을 맡았고, 1937년 가목사 市(시)위원회 서기로 활동했습니다. 市委(시위) 서기로 약 반년 일했지요. 1938년 3월15일 가목사에서 中共 지하당 당원들이 日帝(일제)에 대거 검거되었습니다. 이 「3·15 사건」으로 많은 동지들과 나를 이끌어주던 선생님까지 체포되는 바람에 지하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동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는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을 찾아 나서야 했지요.
 
  일제의 검거 소식을 듣고 나는 그 길로 松花江(송화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습니다. 東北抗日聯軍이 강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抗日聯軍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하여 이미 강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차 편으로 가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수상한 사람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일제의 끄나풀 같았어요.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기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송화강 다리를 지나느라고 마침 기차가 속력을 줄여 느린 속도로 가는 틈을 이용한 거지요. 풀밭에 숨어 가면서 가목사로 돌아왔지만 집으로 가지 못하고 무슬림 교회당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한적하고 외딴 곳이라 안전했습니다. 아침에 몰래 집에 들러 식구들과 작별하고 고향 화룡구로 가서 숨었습니다.
 
  고향 친척집에 한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사람의 눈을 피하여 낮에는 밀짚더미에 가서 종일 몸을 숨기다가 밤이면 친척집에 들어가 잤지요. 화룡구 지하당 조직이 아직 살아 있어서 기회를 보아 나를 抗日聯軍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어요. 과연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抗日聯軍 연락병이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 말을 타고 抗日聯軍의 주둔지 後石山(후석산) 기슭의 吳小號屯(오소호둔)으로 갔지요. 이곳 부대는 6군 4사 23대대였어요. 李淸剛(이청강) 정치위원은 환영하면서 내가 黨신분 회복을 위해 北滿省共産黨委員會(북만성공산당위원회)로 찾아가야 한다니까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십여 일간 그 부대에 머무는 동안 세 차례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일본군과 우리 軍(군)이 모두 말을 타고 싸운 騎兵戰(기병전)이었지요. 나는 이 전투에서 말이 수렁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그 후 또 한 차례의 전투에서는 23대대 정치부 주임이 말을 탄 채 敵彈(적탄)에 맞아 희생되었어요. 우리는 후석산 동쪽 기슭에 그를 묻었습니다. 아, 그 어렵고 참혹한 항일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烈士(열사)들이 그렇게 귀한 생명을 바쳤는지요』
 
  ―송화강을 건넌 뒤의 여러 가지 활동을 들려주세요.
 
  『가목사市 서쪽 교외에서 23대대장을 만나 함께 송화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이미 再建(재건)된 가목사市 黨 지하조직이 돛배 세 척으로 우리 부대를 渡江(도강)시켜 주었지요. 부대와 함께 湯原縣(탕원현)으로 나가니 그곳에서 抗日聯軍 6군 4사 정치위원으로 있던 조선족 출신의 吳玉光(오옥광)을 만났습니다. 1939년 4월 늦은 눈이 내리는 어느 날 黑金河(흑금하)로 가서 6군 정치위원 장수천, 곧 李兆麟(이조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李兆麟은 抗日聯軍의 중요한 영도자이며 해방 후 하얼빈 市委(시위) 제1서기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장수천 동지도 북만성위에 갈 일이 있다고 나와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敵(적)의 점령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버리고 도보로 보름 걸려서 마침내 북만성위에 도착했지요.
 
  당시 북만성위 秘書長(비서장) 馮中雲(풍중운)은 내가 가목사 서기직에 있을 때 자주 만나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가 증명해주어서 나의 黨 신분은 곧 회복되었지요. 북만성위는 나를 抗日聯軍 제6군에 배치했고 군부 조직과장 일을 맡겼습니다. 함께 갔던 장수천(李兆麟)은 정식으로 6군 정치위원에 임명되었구요』
 
 
  金策이 抗日聯軍 정치위원으로 임명
 
 
  ―李敏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첫눈에 반했습니까? 그때 두 분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나요.
 
  『1939년 여름, 우리 부대가 梧桐河(오동하)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나는 부대의 정치교육을 책임지면서 문화 지식도 가르쳤습니다. 李敏을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십사오 세 된 어린 소녀와 스물한 살 난 청년 사이에 사랑을 운운할 형편은 아니었지요. 우선 李敏은 너무 어렸고, 서로 민족이 달라서 언어 소통도 잘 안되었으니까요.
 
  1939년 7월, 나는 6군 군부를 떠나 6군 조직과장 신분으로 2사 정치사업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西征軍(서정군)과 함께 海倫(해륜)으로 진격했습니다. 1939년 말 북만성위의 당시 조선족 출신 省委 서기 金策(김책)과 장수천 동지가 나를 抗日聯軍 3로군 1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金策(金日成과 함께 북한정권을 세운 뒤 6·25 때 전사)은 노련한 혁명가이며 남을 끄는 힘이 있는 영도자였습니다. 점잖고 온화하며 후덕하고 친절하여 내게는 좋은 인상을 남겼지요. 동북抗日聯軍은 사실상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부대인 만큼 金策이야말로 중요한 영도자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周恩來 총리가 동북에 와서 「동북抗日聯軍은 中朝(중조)연합 抗日聯軍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렵고 참혹했던 항일 투쟁에서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친형제와 같은 혁명적 우정을 나눈 것입니다. 그때 배운 몇 마디 조선말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물이 있소?」 「담배 있소?」
 
  조선족 마을에 가든가, 조선족 戰友(전우)들과 가장 자주 쓰게 되는 말이지요. 조선인은 동북의 항일투쟁을 위해 큰 몫을 해냈다는 데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梧桐河(오동하)에서 李敏을 처음 만났다가 헤어진 후 다시 만나게 된 사연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나요.
 
  『오동하에서 헤어진 후 李敏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오빠 李雲鳳(이운봉)과는 함께 西征(서정)에 참여하면서 무슨 말이나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었지요. 李雲鳳은 당시 6사 1대대 정위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둘이서 한담을 나누다가 李雲鳳이 농담으로 「내동생 네게 시집 보내주마」고 말하지 않겠어요? 뜻밖에 몇년 후 이 농담이 진담이 되었지요.
 
  나와 李敏이 진정으로 사랑을 약속하게 된 것은 소련에서였습니다. 抗日聯軍이 하바로프스크에서 70여㎞ 떨어진 野營(야영)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어요. 거기서 李敏은 무선전신 교육을 받고 나는 부대원들에게 정치과목과 문화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내가 그때 문화를 알고 공부를 열심히 한 점이 李敏의 호감을 사게 된 것 같습니다. 프로포즈는 남자인 제가 했지요. 李敏이 이를 받아들여서 우리들은 사랑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장수천 동지와 함께 중국 동북지방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가 떠난 후 李敏은 괴로움을 당했답니다. 조선족 동지들이 우리의 결합을 반대하고 심지어 黨의 小組長(소조장) 직무도 빼앗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후 우리는 몇년 동안 서로 못 만났습니다.
 
  1942년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나는 중상을 입어 정신을 잃고 소련의 야영으로 호송되었지요. 정신이 깨어나서 보니 나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李敏이 아닙니까! 몇년 만에 다시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나의 상처를 보고 李敏은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야 그동안 李敏이 우리의 사랑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사실을 알았지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당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사실에 나의 사랑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1943년 겨울 우리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무렵 나는 抗日聯軍 3로군 총사령 趙尙志(조상지)의 편이라 하여 黨의 배척을 받았을 때였지요. 많은 동지들은 李敏에게 前途(전도)가 밝지 못한 나와 관계를 끊으라고 충고했습니다. 특히 조선족 동지들은 더욱 강경하게 말렸습니다. 조선족 여인이 중국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적 이기주의를 나타낸 것이지요. 당시 모든 조선족 동지들이 다 반대하는데 오직 金策, 金日成 두 사람만이 우리들의 결합에 찬동했습니다. 결국 李敏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아서 우리의 결혼이 이루어졌지요. 1946년 우리는 동북에 돌아와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손녀가 셋입니다』
 
 
  金日成이 결혼을 돕다
 
 
  ―해방 후 당장 무슨 일을 했습니까.
 
  『소련 시절 나의 계급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88여단 3영 6연의 지도원이었는데 계급은 소위였지요. 趙尙志 파로 몰려 강등된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日帝를 물리치고 중국에 돌아온 뒤부터 나의 官運(관운)은 잘 풀려나갔습니다. 縣委(현위) 서기직을 맡아 3개 현을 관장했습니다. 1945년 東北民主聯軍(동북민주연군) 흑룡강 1旅(여)의 正尉(정위)로 임명되었는데 1여는 5천명의 정규군으로 전투력이 대단했지요. 1946년 흑룡강 남부지역 龍南(용남) 지역위원회 부서기 겸 軍分區(군분구) 정치위원으로 승진되었습니다. 1947년 우리 부대는 중국 본토로 國府軍(국부군)과의 전쟁 일선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흑룡강 省委는 나를 정치공작과 사상공작에 능하다고 평가하여 省委 비서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뒤 1952년 흑룡강 省政府(성정부) 副省長(부성장), 그 다음 해 1953년 毛澤東 주석 임명으로 흑룡강 성정부 主席(주석)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승진할 수 있었는지 무슨 배경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부지런한 배움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전쟁 때, 평화 때나 결코 배움을 게을리한 적이 없습니다. 배움은 내 평생 할 일이지요.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배움이 제일입니다. 중국 속담, 「배우지 않으면 재능이 없다」, 「배움의 바다에는 代案(대안)이 없고 종점도 없다」를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나는 書冊(서책)을 열독하며 배움을 쉬지 않습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큰 재난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당신은 문화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文革 때 간첩 누명
 
 
  『문화혁명은 나에게도 큰 재난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문화혁명 때 三反(삼반) 분자, 走資派(주자파), 소련 간첩, 조선 간첩 등 여러 가지 누명을 쓰고 크게 당했습니다. 억울함도 겪었고 모진 매도 맞았지만 혁명과 인민에 대한 신념과 믿음은 한시도 동요한 적이 없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나는 1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아내도 5년간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요. 나는 감옥에 가서도 배움을 계속했습니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문화혁명 前 중국과 일본은 국제적 지위나 발전 수준이 엇비슷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은 20년 후퇴했고 일본은 반대로 고속으로 발전했으므로 오늘은 큰 차이가 났습니다.
 
  문화혁명이 다 지난 1976년 나는 감옥에서 나와 하얼빈市 베아링 공장에 가서 再교육을 받고 나서 省 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명예와 이익을 따진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인민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 굳은 의지를 키울 수 있지요. 이 시기 나는 두 가지 큰일을 해놓았습니다. 하나는 하얼빈 공장을 건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흑룡강성 화학섬유공장을 세운 것입니다. 1977년 흑룡강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1978년 鄧小平 동지의 임명으로 다시 省長職(성장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흑룡강성의 最長壽(최장수) 省長인 셈이지요』
 
 
  金日成, 내게 언제나 뜨거운 소련식 포옹
 
 
  ―金日成 부자와의 친분에 대하여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金日成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사실은 金日成을 만나기 전부터 그가 조선 인민혁명군의 영도자라는 말을 들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金日成을 만난 것은 소련에서였지요. 나는 88여단 黨委 비서요, 金日成은 1營 영장이었습니다. 金日成의 1營은 전투력이 강한 잘 훈련된 부대로 이름이 나 있었지요. 그런데 그 부대에 마땅한 정치 교육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날더러 정치 훈련을 지도해달라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나는 黨委의 허락을 받고 1營에 가서 정치 교원이 되면서 金日成과 朝夕(조석)으로 만났습니다. 金日成은 내가 만든 敎案(교안)을 언제나 꼼꼼히 검사했지요. 그만한 정치 수준을 가졌다고 봅니다. 나를 만나면 언제나 소련식으로 뜨겁게 포옹하곤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友情(우정)은 돈독해졌습니다.
 
  우리의 돈독한 우정에 관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지요. 한번은 金日成 주석이 소련을 방문했다가 牧丹江(목단강)을 지나 귀국한다고 하기에 나와 省委 서기가 목단강 역에 마중 나갔습니다. 金日成은 우리와 만났을 때 나보다 서열이 위인 省委 서기를 제쳐놓고 나에게 먼저 달려와 뜨거운 포옹을 했지요. 또 한번은 내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얘깁니다. 마침 金日成은 중국을 방문중이었어요. 周恩來 수상이 金을 안내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대련에 왔을 때 갑자기 金日成은 周恩來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周恩來가 그 연유를 묻자 金은 「지금 陳雷가 조선에 가 있는데 빨리 귀국하여 그가 돌아가기 전에 만나봐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후 나와 金의 친분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에게 金日成은 언제나 친한 戰友(전우)였습니다. 金日成 생전에 나는 두 번 조선에 가서 만나 보았습니다. 한 번은 대련에서 돌아온 그때였고 다른 한 번은 1992년 4월 그의 80회 생일에 특별초청을 받고 갔었습니다. 1994년 7월 그의 장례식에는 물론 金正日의 초청으로 가서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다른 분들은 모두 머리만 숙이고 目禮(목례)를 했지만 나는 엎드려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金日成과 나는 전쟁을 통하여 혁명적 義氣(의기)가 투합된 그야말로 知己(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생 동한 知己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逝去(서거)를 진실로 슬퍼했습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이 역사적 공동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단결하여 日帝와 싸웠으며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金正日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金日成 주석 장례식에 갔을 때 金正日과 단독 접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0주년을 맞아 경축행사에 갔을 때는 金正日과 단독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金正日은 인민위원회 상무부위원장 양형섭을 대신 내게 보냈지요. 매우 섭섭했습니다. 金正日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소련을 답습하는 敎條主義(교조주의)를 버리고 사상을 해방하여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권고할 생각이었지요』
 
 
  북한의 어려움은 영도자의 과오
 
 
  ―金日成 주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 나라의 수령으로 볼 때 金日成은 합격입니다. 정치, 외교 면에서 모두 조선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가 추진한 천리마운동, 청산리 경험 보급 등은 아주 찬양받을 만한 정책이었지요. 구태여 부족한 점을 말하라면 후계자 선택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꼭 아들이 계승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계승자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전임자의 뜻을 이어 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인민들의 요구를 보장할 수 있는가이지요.
 
  근간에 조선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水災(수재)와 旱災(한재) 등 자연 재해로 말미암은 일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사업의 중점을 마땅히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데 두고 이를 해결하기에 전력을 다 해야겠지요. 그런데 조선에서 사정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라가 그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결코 인민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영도자들의 과오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毛澤東 때도 세 끼 식사는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요. 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 이후에는 더욱 큰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흑룡강성만 하더라도 곡식이 남아돌아 이제는 貯藏(저장)이 문제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요. 결국 소련 모델을 고집하여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련은 이미 해체되지 않았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南이 北을 도와주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 점은 찬성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햇볕정책이라고 하면 어딘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움을 받는 쪽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도와주려면 어떤 美名(미명)도 필요 없겠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北에 대한 원조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타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南이 햇볕이고 北은 그 햇볕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북한 통일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민족이 2차 대전 이후 분단되어 이렇게 오랫동안 敵對視(적대시)하고 갈라져 있는 것은 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하는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평화적 통일과 무력 통일. 우리는 지금까지 무력통일을 반대해 왔습니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남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줄어들 것이며 남북은 서로 접근할 것입니다. 남북이 모두 통일할 의사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보기에 빠른 시일 안에 정치적 합의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해요. 너무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조선의 남북통일 문제는 미국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크게 문제삼고 있지요. 내가 보기에도 미군의 주둔은 남한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맞서서 북한은 강경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强硬 一邊倒(강경 일변도)로 나가면 결국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겠지요. 남한도 한 민족이 장기적으로 외국의 指示(지시)와 使嗾(사주)를 받는다는 것은 어쨌든 불행한 비극입니다.
 
 
  金日成은 엄한 軍紀로 소련 사령관들에 잘 보여
 
 
  중국해방전쟁 때 스탈린은 해방군이 양자강을 넘어 南下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주장대로 양자강을 건너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만일 그때 남의 의사를 따랐다면 중국도 두 부분으로 갈라져서 각각 두 大國(대국)의 눈치를 살피고 살아야 했겠지요. 자기 나라 일은 자기 의사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一國 兩制度(일국 양제도)의 방법으로 홍콩을 되찾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마카오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제도라고 하여 결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만도 결국 이런 형식으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곳이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전하였다 해도 대륙을 먹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걱정은 안합니다』
 
  陳雷 성장과 李敏 여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金日成의 항일 빨치산 활동에 관하여 기억이 희미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족 역사학자 金宇鍾 교수에 의하면 金日成은 중국 공산당 게릴라 부대였던 東北抗日聯軍의 한 支隊長(지대장)이었다는 것. 이 부대는 원래 일제가 滿洲國(만주국)을 만든 뒤 동북지방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활약하던 중국인과 한인 빨치산들을 통합한 사령부를 말한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이 부대는 3 路軍(로군)으로 재편성된다. 한인 빨치산들은 韓滿(한만)국경이 가까운 東滿(동만)지방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제1로군에 편입되었다. 金日成은 이 1로군에서 두각을 보인 십여 명의 韓人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金日成 부대의 규모는 50명에서 3백명까지 일정치 않았다. 가장 유명한 작전은 1937년 6월 韓滿 국경 마을 보천보에 주둔한 일본군 지대를 공격한 사건인데 당시 부대원 수는 약 2백명이었다. 金日成은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게릴라 전투를 계속하다가 1940년 말 소련으로 후퇴했다.
 
  소련 보병 장교들에게 특수 훈련을 받은 金日成은 1942년 8월 소련극동 88여단에 배속된다. 이 여단은 만주에서 패퇴한 중국인과 韓人 빨치산들로 편성된 부대다. 소련군 편제로 4개 대대인데 1개 대대 병력은 약 1백50명. 이들의 훈련 내용은 주로 偵察(정찰)과 침투작전이지 전투 기술이 아니었다. 金日成은 대위계급으로 한 대대를 지휘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이 항복하기 7일 전에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던 88극동여단의 韓人들이 전투를 해볼 시간이 없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金日成 원수가 일본을 물리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인 소학교에서 레닌사상 전파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金日成은 소련 사령관들에게 잘 보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엄격한 軍紀(군기)로 소문나 있었다. 소련 장교들은 그가 부하들의 酒色(주색)을 엄격히 다스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金日成 소좌를 비롯한 88여단 66명의 다른 韓人 장교들은 38선 이북 소련 주둔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현지 주민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1945년 9월19일 金日成과 그의 동지들, 최현, 최용건, 김일, 오진우, 박성철, 전문섭, 한익수, 서철, 이을설 등은 이 자격으로 북한에 돌아온다. 이 사람들은 金日成의 개인 독재 시절 모두 북한의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金正日 밑에서 아직도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하얼빈에서 제2일과 제3일은 李敏 여사의 긴 이야기를 듣는 데 활용했다. 李여사는 아주 자상한 안주인이었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내 찻잔이 식을새라 뜨거운 차를 계속 부어준다. 가끔 벌떡 일어서서 항일 투쟁가를 불러준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더 실감나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여사 자신이 1995년에 東北抗日聯軍 歌曲集(가곡집)을 출간한 바 있다. 남편은 詩와 서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여사는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하다. 인터뷰하는 동안 내 귀에는 쇼팽의 에튀드 피아노 연습곡이 간간이 들린다. 아마 이 집 손녀딸이 2층에서 피아노 연습중인 것 같다. 과연 미술과 음악이 흘러 넘치는 집안 분위기다.
 
  ―먼저 李여사님 어린 시절과 가정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1924년 음력 11월5일 흑룡강성 湯原縣 梧桐河라는 고장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 성함은 李錫元(이석원)이었는데 혁명에 가담하면서 여러 가지 변성명을 썼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李石元(이석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지요. 어머님은 崔聖滿(최성만). 나보다 다섯 살 위 오빠 李雲鳳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이 고향인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중국에 와서도 반일투쟁에 항상 앞장섰던 모양입니다. 언제 중국에 왔는지 확실한 날짜는 잘 모르겠어요. 南滿洲(남만주)를 거쳐서 長春(장춘)에 와서 얼마간 살았답니다. 아버지는 정미소에 가서 쌀가마 나르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잡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그후 하얼빈을 거쳐 탕원현 오동하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가 장춘에서 임신하여 오동하에서 낳았답니다.
 
  그때 오동하에는 河東(하동), 河西(하서), 河南(하남) 등 몇 개의 조선족 부락이 있었고 모두 3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조선족이 여기 집중된 것은 福豊稻公司(복풍도공사)라는 벼농사 농장 때문이지요. 당시 흑룡강성 督軍(독군·지금의 省長) 吳俊盛(오준성)이란 자가 일본 자본을 들여다가 세운 것입니다. 농장 책임자 萬福林(만복림)이란 자는 벼농사 경험이 많은 조선 농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농장에 찾아오는 조선인들에게 우선 초막을 지어주고 소금과 얼마 동안 먹을 좁쌀을 외상으로 주었답니다.
 
  조선인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아가자 反日 선각자들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 계열인 崔庸健(최용건), 李秋岳(이추악), 李雲健(이운건), 全華(전화), 李春滿(이춘만) 등은 송도모범소학교라는 6년제 소학교를 세우고 현대 교육과 함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전파했지요. 또 청소년 군정학교도 만들어 앞으로의 무장투쟁을 위해 군사 지식과 정치의식 등 항일 무장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夜學(야학)을 열어 부녀자들과 성인들의 문맹퇴치에도 힘썼지요. 모두 혁명의 이념을 일깨워주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오동하의 교육은 인근 지역에 유명해져서 멀리 伊蘭(이란), 羅北(라북) 등지에서도 조선인들이 모여왔습니다. 학비는 면제였기 때문에 나도 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지요.
 
 
  地主 착취 보고 어린 나이에 혁명 가담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기자들이 12~13세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혁명에 참가할 수 있었는가, 야유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나이에 내가 겪었던 두 가지 일만 가지고도 충분한 대답이 될 겁니다. 오동하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해 벼농사가 아주 잘되어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요. 얼마간 신세가 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곡식을 털어놓자 地主가 家兵(가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먹을 양식도 남기지 않고 몽땅 빼앗아가 버린 거예요. 그때 그 원한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님은 이곳에서 더 못살겠다고 70여 리 떨어진 鳳皇鎭(봉황진)이란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그곳 지주 역시 더 악착 맞았습니다. 거기서도 농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家兵들을 몰고 와서 양식을 다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모르니까 조선 농민들을 감시하며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곳에는 朴(박)씨 성 가진 조선인 마름이 있었지요. 조선인 젊은이들은 朴씨에게 원한을 품고 거의 죽도록 패주었습니다. 그후에 돌아온 보복은 더욱 무서웠지요. 그때 주동이 된 청년 둘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朴씨가 우리 집에다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추위를 막으려고 우리 집 벽에 둘러 친 벼 짚단에 불이 붙어 불길은 아주 세찼습니다. 나와 오빠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우리 가족은 地主 家兵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오동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원한을 배우게 되었지요. 오직 혁명만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후 抗日聯軍에 참가하여 死線(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사랑하는 아버님과 오빠를 잃었을 때도, 문화혁명 때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나의 믿음은 흔들려 본 적이 없었어요. 또 내가 자란 지역의 영향도 무시 못할 요인입니다. 당시 오동하 北滿 지역은 可謂(가위) 혁명의 요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지역 조선인 농민들은 99%가 혁명활동에 가담했습니다. 따라서 혁명 참가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지요. 학교에 들어간 첫날 나는 윗학년 학생들이 합창하는 「레닌 탄생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오동하 유역에 널리 퍼진 노래였어요. 나도 듣는 순간 이 노래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합니다.
 
  「1870년 4월10일 그때로다/볼가 강의 평화 농촌/붉은 레닌 탄생했다/아버지는 일리안노브/어머니는 마리아…/별과 같은 붉은 레닌 탄생했다」
 
  당시 레닌은 無産(무산) 혁명의 수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 학교에서는 러시아말도 가르쳤지요. 이 학교 교육은 나의 인생관을 결정해주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레닌의 훌륭한 학생으로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兒童團(아동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소련식으로 붉은 피오네르를 매고 다녔는데, 당시 천이 너무 귀하니까 붉은 실로 만들었지요. 적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옷 속에 매고 다니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신분 확인이 필요할 때만 꺼내 보여 주었어요.
 
 
  마을 전체가 抗日 운동 가담
 
 
  1932년 음력 8월 송화강에 큰 물이 나서 오동하도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건물이 다 무너졌지요. 우리 집은 다시 오동하를 떠나 集賢縣(집현현) 安邦河(안방하)라는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 도착했을 때는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생계를 위하여 아버지는 하루하루 품팔이를 다녔고 어머니는 우리들을 데리고 배추 뿌리를 캐고 이삭 주이에 나서서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그럭저럭 겨울을 나고 봄이 오자 이 고장에 猩紅熱(성홍열)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이 몹쓸 병에 걸려 며칠 앓다가 1932년 5월 23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후 우리는 다시 오동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라 抗日 분위기가 대단했어요. 마을 전체가 抗日 운동에 가담했지요. 아버지는 赤衛隊(적위대) 분대장을 맡았고 나와 오빠는 소년 선봉대 선전대에 참가하여 송화강 유역 마을, 탄광, 금광을 돌며 抗日 전선에 나섰지요. 그후 우리는 탕원현 유격대에 참가하고 이 유격대가 나중에 동북抗日聯軍에 편입된 것입니다. 오빠는 抗日聯軍 6군 1사 6대대 정치위원, 6군 1사 後勤處(후근처: 보급처) 처장을 맡아 抗日聯軍의 西征(서정)에 참가하여 1938년 寶靑縣(보청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당시 만주에서 金日成이 이끄는 부대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인민혁명군은 1934년 3월 東滿에서 창건되었는데 선언문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세운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은 잘 쓰지 않고 「東滿인민혁명군」으로 많이 통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진출 때는 삐라나 선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크게 썼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보천보 전투였습니다』
 
  ―항일 투쟁 시절 소련에 몇 번 갔습니까? 金日成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두 번 蘇聯領(소련령)으로 건너갔었습니다. 첫번은 1939년 음력 5월인데 일본군과 전투에서 불리하게 되어 소련령으로 철수했던 것이죠. 40여 일간 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는 장수천, 다른 이름으로 李兆麟 동지가 나를 파견시켜 주어 무선 전보 기술을 배우러 갔습니다. 抗日聯軍은 통신 연락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를 포함한 여성 戰士(전사) 3명을 소련에 파견하여 무선 전보 기술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교육은 1941년 여름, 하바로프스크 70여 km 지점 野營에서 받았습니다. 내가 金日成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7월 야영에서였어요. 그때 金日成은 소련 극동군 특별 88여단 대위였습니다』
 
  ―그때 金日成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당시 金日成은 무척 젊어 보였지요. 30세 미만으로 보였는데 몸이 여위었어요. 특히 허리가 아주 가늘어 보였습니다. 멋쟁이 타입이었고 소탈하고 친절했습니다. 부하나 병사들에게 낯을 붉히는 일 없이 언제나 스스럼없이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했어요. 훌륭한 將領(장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정숙은 미인형에 多才多能
 
 
  ―金日成의 처 김정숙은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金正日은 정말 소련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김정숙과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가을입니다. 그때 남북 야영이 합하여 우리는 한 장막 안에서 자게 되었지요. 金正日이 태어날 때는 내가 아직 김정숙을 만나기 전입니다. 金正日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李敏 여사는 이 질문만은 내게 자세히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金正日이 백두산 密營(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공식 선전 내용에 異意(이의)를 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 정말 모를지도 모른다. 1995년 내가 외국 기자들과 함께 북한측 안내로 백두산에 올랐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영국기자가 金正日의 탄생지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에게 질문했다.
 
  『1994년에 하바로프스크에 갔더니 거기 金正日의 출생지가 있었어요. 어떻게 두 장소에서 동시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1985년 하바로프스크 갔을 때 金正日의 출생지를 본 일이 있어요』
 
  북한 안내원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러시아 인들은 거짓말쟁이예요!』
 
  하얼빈에서 만난 십여 명 인사들에게 물어봐도 金正日의 백두산 탄생을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김정숙에 대한 인상과 에피소드를 좀 얘기해 주세요.
 
  『김정숙은 상당히 예뻤습니다. 얼굴은 미인형인데 오랫동안 들에서 살아서 그런지 피부는 희지 않았어요. 눈동자가 특히 까맣고 속눈썹이 길어서 더욱 예뻤어요. 인품은 인물보다 더 훌륭했지요. 우리는 1942년부터 1945년 귀국할 때까지 죽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가 달린 김정숙은 겨울이면 집에 들어가 지냈고 여름이면 장막에 나와서 생활했습니다. 키는 작은 편인데도 端雅(단아)한 몸매가 정력적이었으며 마음은 한없이 넓었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多才多能(다재다능)하여, 요리, 바느질, 춤, 연극, 노래 못하는 것이 없었어요. 나도 노래는 자신이 있었는데 노래도 나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전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었어요. 金日成과 김정숙 부부의 금슬도 아주 좋았지요. 金日成이 舞劇(무극)을 쓰고 김정숙이 무용을 지도하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어요』
 
 
  金正日 어릴 때 木銃놀이 즐겨
 
 
  ―金正日의 어릴 때 인상을 듣고 싶습니다.
 
  『金正日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어요. 어머니를 닮아 눈이 까맣고 피부는 검은 편인데 포동포동하여 아주 귀여웠지요. 유치원에서 일찍 돌아오면 봐줄 사람이 없어서 김정숙은 우리가 군사훈련 받는 곳으로 金正日을 데려오곤 했어요. 金正日은 木銃(목총)을 들고 자기도 병사들처럼 훈련하는 흉내를 내는 거예요.
 
  1945년 광복을 맞아 우리는 9월에 동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김정숙은 좀 뒤처져서 11월에 돌아온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둘째 자제 분도 이미 그곳에서 태어났지요. 둘째와 金正日은 두세 살 차이로 기억합니다. 나는 남편 陳雷와 함께 작별 인사차 金日成 부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문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배웅했어요. 그때 金正日이 우리를 따라 가겠다고 어머니에게 떼를 쓰던 일이 기억납니다.
 
  金正日은 늘 목총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崔賢(최현)의 딸 곱단이 등과 군사 놀음을 할 때면 늘 대장을 맡았습니다. 곱단이는 金正日보다 한 살 위였어요. 내가 나무 총으로 일본 놈을 죽일 수 있는가 물으면 金正日은 죽일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진짜 총이어야 한다고 말하면 아버지 총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어요. 그때 김정숙은 이렇게 가르쳤지요. 아버지 총은 안 된다, 재간이 있으면 나무 총을 가지고 敵의 진짜 총을 빼앗아야 진짜 장군이다. 김정숙의 金正日에 대한 훈육은 무섭게 엄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리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金正日을 다시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1992년 金日成 탄생 80주년 기념행사 때였지요. 金正日은 사람을 보내 특별히 우리 부부에게 예물을 보내왔어요. 그리고 金日成 주석 장례식 때도 만났습니다. 우리가 조선에 갈 때마다 각별하게 대접해 주었지요. 1983년 9월에는 金日成의 전용 열차를 보내어 청진에서부터 우리를 평양으로 모셔갔으며 개성 등 여러 지방을 돌아볼 때에도 金日成이 쓰던 방을 우리에게 내주었습니다』
 
  ―지난 9월16일 김정숙 여사 서거 50주년을 맞아 북한에서는 인민 무력성 주최로 김정숙 혁명사적에 관한 연구토론회를 가졌는데 김정숙의 업적이 과연 그렇게 위대합니까.
 
  『위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에 참가했다고 누구나 다 선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김정숙은 화려한 항일투쟁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라의 수령인 金日成을 모시고 항일투쟁을 했으니 연구토론회 정도야 못하겠습니까』
 
  ―김정숙의 사망후 金日成이 김성애와 재혼을 할 때 동북에서 혁명 활동을 한 老(노) 혁명가들이 반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처음 듣는 얘깁니다. 金正日은 친어머니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겠지요.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글쎄, 다른 간부들이 반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金日成은 개혁 필요 느끼자 사망
 
 
  ―당신은 金日成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金日成은 조선 인민의 수령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습니다. 항일 투쟁 시기 抗日聯軍 중에서 그는 군사에서, 정치에서 다른 조선인 장령들보다 단연 뛰어났습니다. 당시에 金日成을 국가의 수령으로 추대한 것은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金日成이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 모델을 그대로 도입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중국은 이미 그 점을 깨우치고 일대 개혁을 단행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외길을 고집하여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金日成의 사망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金日成은 개혁의 필요성을 막 느꼈는데 미처 그것을 실천에 옮겨보지 못하고 그만 서거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金日成은 조국통일을 위해 네 가지 방침을 제시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입니다. 실천 가능한 매우 과학적인 아이디어인데 애석하게도 실천을 못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 문제도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 형편보다 훨씬 나았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개혁·개방을 추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중국은 개혁·개방한 지 20년이 되어 그 성과와 변화를 세계가 알고 있는데 조선은 수십 년 뒤떨어졌습니다』
 
  ―金正日의 영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영도 능력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金正日은 외국에 나가서 視野(시야)를 넓히고 세상의 변화를 살펴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소련의 영향을 너무 깊이 받아서 온 몸이 움직일 수 없이 굳어져 고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黃長燁(황장엽)의 망명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 나라, 한 민족의 고위급 인물로서 그런 행동은 수치스럽습니다. 더구나 공산당원으로서, 더욱이 국가와 黨의 정상급 지도자로서 망명은 절대 허용할 수 없지요. 또 인간적인 면에서도 70여 세 된 사람으로서 가족과 다른 사람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黃長燁은 주체사상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가 주체사상 창제활동에 참가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만들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억울하다고 적에게 넘어간 자는 용서 받지 못한다』
 
 
  ―黃長燁은 자신의 망명이 통일을 위한 행동이라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 생각에는 북한에서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남한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북한에서 여러 가지로 잘 나가고 있었다면 결코 망명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자기 나라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심지어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었다 해도 그가 정말 옳았다면 역사는 반드시 언젠가 그에게 공정한 평가를 내려줄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알 수 있지요. 그렇게 큰 죄목을 덮어쓰고 불행하게 돌아간 劉少奇(유소기), 彭德懷(팽덕회) 등도 결국 훗날 정확한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버리고 간 者(자)는 다릅니다. 그것이 林彪(임표)가 지금까지 손가락질받는 이유입니다. 항일 전쟁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숙청되었지요. 그러나 나중에 공정한 평가에 따라 다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하여 敵에게 넘어간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식량난을 피해 중국에 온 사람들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정황은 어떻습니까? 유엔 세계인권위원회 결의처럼 중국이 이들을 難民(난민)으로 보호해줄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한국의 論調(논조)는 실제와 어긋납니다. 중국의 동포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조선에서도 중국에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의 잘못을 더는 추궁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죄가 있는 사람들은 체포를 하겠지요. 이 문제는 한국이 시비 걸지 않으면 중국과 조선이 잘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飢餓(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다닌 예가 부지기수이지요. 지금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의 선조들도 이런 사정으로 중국에 오게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한국에서는 지금 중국에 온 조선인이 십만 명이나 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숫자예요』
 
 
  金日成 처음엔 父子 승계에 반대
 
 
  ―金日成이 정권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와서 보면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권의 부자승계의 책임을 몽땅 金日成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최용건, 김일, 최현 등 老간부들이 여러 번 金正日을 후계자로 세우자고 건의했지만 金日成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모든 사람들이 강력하게 金正日 승계를 주장하자, 金日成은 「다 동의하는데 나 혼자 반대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회로 미루어 토론하자」고 말한 일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老간부들의 강경한 주장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소련은 흐루시초프 시대부터 레닌과 스탈린을 부정하고 나왔고, 중국에서도 「4인방」의 농간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老간부들의 생각은 이런 사정이 조선에서 재발되지 않게 하려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후계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金正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에 가서야 金日成은 「다 동의하면 나도 동의한다」는 입장에서 그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원래 동생 김영주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로 되어 있는데 金正日이 가로챘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됩니다. 김영주는 金日成과 동년배인데 어떻게 후계자로 선정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金正日의 영도 방법을 어떻게 보십니까.
 
  『물론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나의 戰友인 박경숙(강건의 부인, 강건은 한국전쟁 당시 동부전선 사령관, 박경숙은 전 경공업부 부장)의 사위가 延邊(연변)으로 와서 내게 전화를 했어요. 무얼 하려고 왔는가 물었지요. 장사 일로 왔다는 거예요.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그러면서 국내 생활도 많이 변하고 있다는군요. 金正日은 대문을 활짝 열면 자본주의 세계의 파리, 모기들까지도 들어올까 걱정하여 조심스럽게 천천히 개방하는 모양입니다. 필요 없는 걱정이지요.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았어도 잘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어
 
 
  ―남북통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大中의 햇볕 정책은.
 
  『햇볕 정책, 포용 정책에 대하여서 좀 들어보았습니다. 도와주고 잘 지내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이왕 도와주려면 너무 책략적인 방법으로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모두들 북한의 무력 침입을 걱정하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金日成 주석이 이미 조국의 평화통일 네 가지 방침을 제시해 놓았고, 또 두 나라가 旣定事實(기정사실)로 되어 안정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력 침입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자 한국 기자들은 1950년 북한이 서울로 쳐들어왔는데 지금도 그럴 수 있지 않은가 물었지요. 그때 형편과 지금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지금 무력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오히려 남북통일의 가장 큰 장애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사실 남북통일이 이루질 것을 희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 간의 갈등을 언제나 조장하고 있지요. 한 나라에 다른 나라 군대가 장기적으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민족으로서는 더욱 창피한 일입니다. 미군이 하루빨리 한국에서 철수한다면 통일은 한층 빨라질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金大中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잘하고 있는 듯 합니다. 대통령 직에 있는 동안 시간을 아껴 더 많은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金日成의 極左的 과오 지금도 계속돼
 
 
  ―金日成의 過誤(과오)는 무엇입니까.
 
  『물론 金日成은 과오가 있습니다. 金日成뿐만 아닙니다. 소련 공산당도, 중국 공산당도, 모두 적지 않은 과오를 범했었지요. 金日成은 특히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그와 떨어져 있어서 잘 모르겠으나 한마디로 極左的(극좌적) 과오였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일 시기에 오랫동안 敵의 심장부에서 투쟁해 왔습니다. 敵에 대한 고도의 적개심과 고도의 경각심이 몸에 깊이 배어 있지요. 그래서 金日成이 언제나 적대적인 정책, 강경한 정책을 펴 오지 않았나 합니다.
 
  국내 통치도 너무 경직되고 부드럽지 못했지요. 전에 중국도 그랬어요. 정부나 당에 대하여 조금만 불만스러운 言行(언행)을 보여도 右派(우파)요 反혁명이요 하면서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그러나 조선은 아직도 金日成 때 하던 식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너무 긴 시기입니다. 이렇게 오래 변화가 없는 것은 폐쇄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金日成 주석은 돌아갈 때까지도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듯싶어요』
 
  ―북한에서는 1956년에 박헌영을 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고 기타 自進 越北者(자진 월북자)들도 간첩 누명 아래 많이 죽였습니다. 그런 일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구체적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의 수령도 사람인 이상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지요. 毛澤東도 그렇고 金日成도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해야 하지요. 金正日은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金日成이 세운 나라를 잘 건설해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하루빨리 발전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深思熟考(심사숙고)하여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안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선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뚜렷한 변화가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金正日이 사상이 개방되지 못하고 시야가 좁은 것은 그의 경력과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자주 외국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보았더라면 관점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겠지요. 鄧小平이 과감한 개혁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어려서 서방 유학을 한 경험과 또 자주 해외에 나간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金日成 부자의 개인숭배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숭배주의는 물론 좋지 못합니다. 스탈린, 毛澤東도 그랬고 金日成, 金正日은 더욱 철저했지요. 이것은 사상이 해방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남다른 생각과 재능을 갖춘 지도자는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민들의 서로 다른 의견과 목소리를 허용하고 잘 가려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위대할 것입니다. 개인숭배주의는 결국 민족과 국가에 나쁜 영향만 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개방 가로막는 主體사상은 잘못
 
 
  ―주체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체사상의 골자를 독립·자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자주는 물론 올바른 정책이며 한 나라와 한 민족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지요. 그러나 20세기 말까지 온 오늘의 상황에서 국제적인 환경에 발맞추어 함께 가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自主만 고집하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독립·자주는 남의 간섭을 반대하고 인격을 세우는 데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정신이지요. 그러나 그 참뜻을 잘못 해석하여 나라의 개혁·개방을 가로막는 방패가 된다면 이것은 독립·自主 정신의 요체와는 모순되는 것입니다. 독립·自主는 원칙이고 개혁·개방은 방법이기 때문에 양자를 잘 조화시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요. 역사적으로도 그런 예가 많습니다』
 
  ―陳雷 省長과의 로맨스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1938년 봄 오동하에서 선생과 학생으로서 만났습니다. 抗日聯軍 6군에서 나는 교도대 학생, 그는 군부 조직과장으로 교관이었지요. 그 당시 15세인 어린 소녀가 남녀간의 감정을 무얼 알았겠습니까. 순수한 교관과 학생 사이였어요. 그 해 7월 그는 西征 부대와 함께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41년 소련의 野營에서였지요. 趙尙志가 北滿 省委와 의견이 대립되어 黜黨(출당)당하는 바람에 그 수하에서 선전부장을 맡았던 그도 黨에서 제명당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陳雷는 얼마 안 있어서 동북의 戰場(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떠나는 날 밤 뜻밖에 그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불러냈어요. 西征 길에서의 전투 이야기, 나의 오빠를 포함하여 戰死한 戰友들 이야기, 그러다가 지난날 교도대 시절의 이야기, 온통 부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西征 길에서 오빠가 나를 자기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농담한 얘기를 꺼내더라구요. 물론 우스개로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지하게 물어오는 거예요. 그제야 저도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차렸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무어라고 선뜻 대답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사랑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도 더는 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더군요. 내 기억에 그날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이야기로 보낸 것 같았어요. 다음날 아침 그는 전선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몰랐어요. 그날 아침 兵營(병영)에는 나와 陳雷가 연애한다는 포스터가 나붙고 내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여자라는 소문이 온 주둔지에 쫙 퍼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요. 게다가 일이 여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어요. 상급자들에게 몇 번 불려가서 訊問(신문)을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 陳雷와 무슨 얘기를 했는가? 陳雷가 무슨 나쁜 말을 하지 않았는가? 당시 陳雷가 黨에서 제명당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무얼 감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없는 말을 만들어 陳雷 동지를 모함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사실대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상급자에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陳雷 동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학문이 깊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내심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신문을 해 보았지만 무슨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했지요. 그래도 상급자들은 나를 처벌했습니다. 黨 小組 조장 직을 떼어버렸어요.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리벙벙한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도 가라앉았지요. 풍파를 겪은 후 나는 일체 잡념을 버리고 학습에 전념했습니다. 마침 병영 도서관 「레닌 텐트」를 관리하면서 병영의 壁報(벽보) 편집도 맡아 하는 바람에 공부하기는 좋았어요.
 
 
  야전병원에서 부상당한 陳雷와 再會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42년 나는 陳雷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전선에서는 抗日聯軍이 패전하여 많은 부상병이 야영으로 실려왔습니다. 나도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제일 나중에 실려 온 부상병이 내가 맡았던 침대에 옮겨졌습니다. 아,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陳雷, 그 사람이었습니다. 왼팔의 동맥이 끊어져 있었어요. 철사로 꼭 동여맸으나 지혈이 되지 않아 약솜을 말아 동맥에 쑤셔 넣고 여기까지 온 것이에요. 그의 팔과 손은 벌써 시퍼렇게 죽어 있었지요.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런 鬪士(투사)를 反혁명 분자라고, 타락한 地主의 후손이라고 黨에서 쫓아내다니! 이렇게 철저하고 굳센 혁명가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상처를 처치해 주었습니다. 정신이 든 陳雷 동지는 눈물을 흘리는 나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가슴속에 삼키고 눈물로써 우리의 사랑을 굳게 약속한 것입니다.
 
  1942년 5월19일, 드디어 陳雷 동지는 그의 용감한 투쟁이 공정한 평가를 받아 中共 黨籍(당적)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남자들의 병영에서 전체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그를 만나볼 것을 기대하고 미리 편지를 썼습니다. 회의 장소에 들어가서 나는 陳雷 동지가 앉았던 침대에 걸린 외투 호주머니에 몰래 써온 편지를 살짝 밀어 넣었어요. 편지는 나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黨을 믿고 민중을 믿어야 한다. 언제든지 문제는 정확히 밝혀질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 건강해야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내 걱정은 할 것 없다.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준엄한 시련 겪은 사랑은 흔들리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키우고 또 지켜왔습니다. 그처럼 준엄한 시련을 겪은 사랑은 그후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도 흔들려 본 적이 없지요. 1943년 결혼식을 올린 우리는 이미 金婚式(금혼식)을 지내고 결혼 6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陳雷 동지가 흑룡강성 省長으로 계시고 여사님이 省 民族事務委員會(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일하실 때, 우리 민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민족을 위하여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해방 후 교육분야에서 4년, 공장에서 10년, 감옥에서 5년, 노동조합에서 5년 일하다 보니 조선족과 접촉할 기회가 아주 적었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민족 사업을 맡게 되어 좀 생소합니다. 그러나 黨에서 맡겨준 일이고, 민중들의 신임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잘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우리 省의 조선족은 혁명전쟁 시기에 승리를 위하여 큰 몫을 했으며, 다른 소수 민족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나의 민족 사업은 소수민족들의 생활 향상과 산업 발전 및 문화예술 진흥으로 요약됩니다.
 
  나는 우선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 省의 조선족 마을과 허저族 호르존族, 몽골族 마을들을 거의 다 한번씩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서로 다른 생업에 따라 각각 다른 지원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소수민족 생산발전 교류대회를 열어 서로 남을 배우는 자리를 만들었지요. 결국 낙후한 소수민족들의 경우 문화수준이 높은 관리자가 없다는 사실을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소수민족지구의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우선 유능한 소수민족 간부를 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흑룡강 소수민족 간부학교를 세웠지요.
 
  학교가 준공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선 학생들을 뽑아서 그날부터 수업을 시작했어요. 관리 전공은 경제관리학교에, 정치전공은 당 학교에, 기타 학과는 다른 종합대학에 위탁하여 학교가 준공될 때까지 모두 밖에서 공부하고 모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수민족간부학교는 지금까지 많은 간부들을 양성하여 생산 일선에 내보냄으로써 소수민족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예술과 민속은 소수민족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의 골자입니다. 나는 牧丹江에 흑룡강성 조선민족 가무단을 만들고, 黑河(흑하)에다 호르존族 가무단을, 通江(통강)에는 허저族 가무단을 각각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얼빈에 대형극장 조선민족문화궁전을 지었지요. 지금도 사람들은 내가 민족종교사무위원회에 있던 시기를 소수민족 문화예술발전의 황금기라고들 하지요.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산골과 변방에 살고 있습니다. 기차를 보지 못한 아이들도 많아요. 나는 소수민족 학생들의 여름방학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우리 省의 名勝 古蹟地(명승 고적지)를 돌아보며 역사를 배우고 시야를 넓혀주었지요. 가는 길에 烈士碑(열사비)나 혁명 戰迹地(전적지)에 들러 혁명 교육도 시켰습니다. 1982년부터 10년간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일하느라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별로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문화혁명 때 부부가 함께 큰 수난
 
 
  ―여사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겠지만 문화혁명 때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문화혁명은 突發的(돌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毛澤東이 직접 일으켰기 때문인지 시작부터 그 氣勢(기세)가 대단했지요. 당시 나는 하얼빈市 제1도구공장 당위원회 서기였어요. 1966년 8월18일 내가 공장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홍위병 완장을 팔에 두른 대학생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노동자들이 제지했지요. 나는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학생들을 들어오게 했어요. 학생들은 走資派(주자파)를 반대하고 혁명적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회의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의견이 있으면 정당한 경로를 통해 제출해야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지요.
 
  그러자 학생들은 내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비방하며 문화혁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미리 준비해온 고깔모자를 내게 씌우려고 들지 않겠어요? 복도에 지키고 섰던 노동자들이 나를 둘러싸서 보호했습니다. 회의장 한가운데 내가 서 있고, 노동자들이 손에 손잡고 나를 둘러싼 圓(원)과 학생들이 나를 욕 주려고 둘러싼 또 하나의 원이 그려진 이상한 상황이었지요. 그날은 그런 대로 넘어갔습니다. 다음날 우리 공장 주위의 大字報(대자보)들은 한결같이 학생운동을 탄압한 나의 죄상을 성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省委 제1부서기 겸 省 정부 부성장 陳雷 동지는 8월23일 齊齊哈爾(제제합이)市에서 벌어진 유혈 사건을 해결하려고 출장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齊齊哈爾로 떠난 뒤 만나지 못한 陳雷 동지가 8월26일 하얼빈市 인민운동장에서 열린 성 정부 지도자 성토대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사령부를 포격하자」는 슬로건 아래 50만명의 군중이 모여 省長과 省 정부 간부들의 머리를 깎고 얼굴에 검댕이를 칠하여 演壇(연단) 위에 세워 욕을 보였습니다. 陳雷 동지의 죄목은 反혁명 분자, 주자파, 반역자, 조선 간첩 등 굵직한 것만 너댓 가지였지요. 게다가 항일 투쟁시기에 抗日聯軍 2백명을 학살했다는 터무니없는 죄상도 있었어요. 홍위병들은 앞에 쇠가 달린 가죽 혁대로 陳雷 동지를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눈에서 피가 나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연단에서 약 50m 거리에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사실을 밝혀야 한다. 군중들과 학생들이 역사를 몰라서 저런다. 오직 그 일념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단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도 감시를 받고 있던 몸입니다. 그만 홍위병 다섯 명이 나를 번쩍 들어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 공장으로 보내졌어요.
 
  나는 陳雷 동지를 만날 수도 없었고 소식조차 감감했습니다. 공장은 생산이 완전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어찌된 판국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 공장에서 小字報(소자보) 전단을 하나 주웠는데 이게 무슨 기사입니까. 「陳雷 조리돌림 참관기」라니!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은 비판받은 사람들의 목에 나무 패쪽을 걸고 화물자동차 뒤에 실어 거리를 돌며 그의 죄목을 큰 소리로 외치면서 수시로 매질을 했습니다. 그 전단에는 陳雷가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맞아서 눈이 멀었고 갈비뼈가 4대나 부러졌으며 무릎이 끊어지고 머리가 터졌다고 쓰여 있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허나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몰랐고 갈 수도 없었어요.
 
  공장의 노동자들은 중앙에서는 폭력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 지경인가 따지기 위하여 모두 省委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청원도 내지 못하고 省委를 점령한 홍위병들과 싸움만 하다가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이튿날 거리에는 李敏이 노동자들을 사주하여 야료를 부렸다는 죄목을 성토하는 대자보가 나붙었습니다. 매일 밀려드는 홍위병들을 만나느라고 집에도 한 번 들르지 못했지요.
 
 
  남편은 너무 맞아 입이 저팔계처럼 돼
 
 
  나는 陳雷 동지가 죽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 나서기로 했지요. 노동자들은 나의 안전을 염려하여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그들과 함께 가면 또 싸움이 날까 봐 나는 혼자 갔습니다. 省委의 한 보위과 간부를 통해 陳雷 동지의 가족 신분으로 그를 만나게 해줄 것을 강경하게 요구했지요. 홍위병들이 인도한 작은 방에서 오래 기다렸습니다. 陳雷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어요. 포기하고 일어서려는데 전혀 모를 사람이 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보다가 순간 저 사람이 남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陳雷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남편이 아닙니다.
 
  너무 맞아서 입은 猪八戒(저팔계)의 주둥이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쑥 나와 있고, 머리는 너댓 군데 터져서 온통 피가 말라붙었고,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했어요. 덜컹거리는 화물차에 너무 오래 꿇어앉아 무릎의 살은 다 떨어져나가고 뼈가 드러날 지경이며, 발을 거꾸로 들고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려서 발바닥도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작은 의자에 앉히고 적삼을 들치고 잔등을 보았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졌는가 살펴본 것이지요. 등은 성한 데가 없었고 검푸르게 멍들었습니다. 나는 통곡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홍위병들에게 한 시간 이상 남편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그들을 설득해보았습니다. 이 사람 몸을 보라! 항일 전쟁 때 일곱 번이나 부상을 입은 상처가 그대로 있지 않은가. 역사는 결국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가지고 간 빵이며 과일을 짓밟아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그후 나도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남편 소식은 더 이상 알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감옥에 끌려가기 전에 쪽지를 하나 써서 保姆(보모)에게 주며 기회가 있으면 남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쪽지에서 나는 남편에게 네 가지를 당부했어요. 첫째, 毛주석의 혁명노선을 믿어야 한다. 둘째, 사실대로 해야 한다. 견디기 어렵다고 없는 일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 셋째, 신체 건강을 지켜야 한다. 넷째, 절대 자살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남는 것이 곧 승리이다. 당시 많은 간부들이 정신적인 절망과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옥 속에서 나는 남편의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집에 두고 온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어느 날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맑은 날인데 내가 호수에서 쪽배를 저어가고 있었어요. 갑자기 풀밭이 나타났지요. 풀밭에 오르니 웬 이불이 펴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陳雷 동지의 이불이에요. 이불을 들추니까 남편의 시체가 있었어요. 나는 통곡했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 간수가 와서 소리쳐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꿈을 꾸면서 진짜로 울었던 것입니다.
 
  나는 陳雷 동지가 틀림없이 죽었다고 단정했어요. 슬픔에 잠겨 있는데 철창 밖에서 조리돌림을 하면서 외치는 구호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陳雷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섞여 들려왔어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지요. 그 구호는 陳雷 동지가 살아 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5년 동안 각각 감옥에 갇혀서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韓中 결혼의 이상적 커플
 
 
  李敏 여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혁명 때 남편이 광적인 홍위병들에게 당한 잔인하고 야만적인 학대를 얘기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은 잘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악몽 같은 10년을 되돌아보고 얘기한다는 것이 李여사로서는 매우 가슴아픈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여사 자신의 수감생활 5년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와 같은 호된 試鍊(시련)과 艱難(간난)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과 존경은 더욱 깊어만 갔다. 두 사람 사이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가 서로의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고 있었다. 과연 韓中(한중) 결혼의 이상적인 커플인저!
 
  중국 지도를 보면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백조의 모습과 같다. 하얼빈은 그 백조 목에 걸린 빛나는 진주라고나 할까. 이렇게 詩的 지형을 가진 중국 동북 지방에서 陳雷 부부는 아주 존경받는 유명한 커플이다. 실제로 가장 모범적인 출세한 부부라고 하겠다. 陳雷는 省長으로서, 李敏은 여성과 소수민족 문제의 선구자로서 여러 가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들 부부는 사람들의 憧憬(동경)의 대상으로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陳雷 성장과 李敏 여사와 3일간 집중 인터뷰를 마쳤다. 두 분 다 솔직하게 아는 사실을 다 말해 준 것은 틀림없다. 어느 날인가 나는 그분들 집에서 점심을 함께 들 정도로 가까워졌다. 金宇鍾 교수에 의하면 보통 사이가 아니면 외국 손님과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분들과 작별하자니 金日成 부자에 관한 대목이 좀 아쉬웠다. 혹시 수십 년 친한 우정과 의리 때문에 더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중국인들은 義理心(의리심)이 강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이유로 오랜 항일투쟁 戰友인 金日成에 대한 기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또 평양에 있는 그분들 친구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金日成 부자에 관한 완벽한 진실을 밝혀줄 가능성은 있었다. 아무리 중국이 남북한과 미묘한 관계에 있고, 그분들이 중국 공산당 평생 동지이지만, 내가 가까이서 본 두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陳雷선생은 나의 박정희 傳記를 높게 평가하면서 『박정희의 初年(초년) 인생이 毛澤東과 비슷하지요?』라고 말했다.●
 
  에드거 스노의 친구라는 위력
 
 
  李敏(이민) 여사는 자신의 항일운동 내력, 특히 金日成(김일성) 父子(부자)와 가까웠던 얘기는 아무에게나 잘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입 다물었던 얘기를 내게 털어놓게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에드거 스노(Edgar Snow)의 친구라는 인연으로 나는 1980년 5월 당시 朝鮮族(조선족)이 아닌 在外 韓人(재외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中共(중공)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은 바로 黃華(황화) 外相(외상)이었는데, 1930년대 초 毛澤東(모택동)이 머물고 있던 延安(연안) 동굴을 찾아온 젊은 미국기자 에드거 스노의 통역을 맡았던 분이다. 그때 인터뷰가 나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책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로 나온 것은 유명한 얘기다.
 
  당시 중국에서 스노는 중국 공산혁명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기자로 존경과 추앙을 받아왔다. 그런 스노의 친구였던 나는 물론 VIP(要人) 대접이었다. 덕분에 그때 나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 孫文(손문)의 미망인 宋慶齡(송경령) 같은 저명 인사를 만났다. 宋慶齡 여사는 바로 국민당 蔣介石(장개석) 총통 부인 宋美齡(송미령) 여사의 언니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에드거 스노와 가까운 친구였다는 인연 덕분에 나를 위해 짜놓은 공식초청 계획조차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원래는 上海(상해), 南京(남경), 延安 등 에드거 스노의 발자취를 따라 짜여진 여행 스케줄이었다. 가는 곳마다 지방 당국은 「미국에서 온 에드거 스노의 옛 친구」를 맞는 환영위원회를 준비하고 있어 도저히 스케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옛날 스노와 알고 지내던 중국인 친구들까지 모아 놓았다는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를 환영하는 만찬 석상에서 마오타이를 마시고 상당히 취한 김에 농담처럼 떼를 썼다. 옛날 滿洲(만주), 지금 東北(동북)지방에 가야만 한다. 한민족 해방군을 조직하여 고구려 왕국의 舊土(구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거기 가야 한다고 했더니, 모두들 처음엔 啞然失色(아연실색) 어리둥절했다가 한참 뒤에야 농담인 줄 깨닫고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꼭 가셔야지요. 스케줄을 바꿔 선생을 동북지방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가셔서 선생의 꿈 같은 포부를 한번 펴보시지요. 하하하』
 
  이번엔 내 쪽에서 놀랐다. 중국인들의 넓은 마음씨는 감동적이었다. 농담처럼 던진 내 제의를 선뜻 들어주다니! 실은 나로서는 동북지방에 가는 문제가 절실했다. KBS 다큐멘터리와 한국의 한 일간신문에 기사를 쓰기로 하고 두 군데서 이번 중국 여행에 재정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북지방에 가서 그곳 조선족과 만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었다. 그때 내가 에드거 스노와 그렇게 가까운 우정을 쌓지 않았던들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내게 好意(호의)를 베풀었을까 의문이다.
 
 
  14년 만의 再會
 
 
  그후 나는 중국을 수십 번 들락거리면서 중국의 한인 인사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중에서도 李敏이라는 여인을 잊을 수 없다. 1985년 여름 하얼빈 국제호텔 로비에서 그때 동행했던 작은 형님 玄鳳學(현봉학) 박사와 함께 만난 분이다. 黑龍江省(흑룡강성) 省長(성장) 부인으로서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과 소수민족위원회 주임을 맡아 활동이 많은 李여사가 바쁜 시간을 내서 형님과 나를 호텔까지 직접 찾아와 준 것은 여간 영광이 아니었다.
 
  『먼 길 찾아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간신히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함께 온 조선족 직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때 우리는 항일투쟁과 우리나라 독립운동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분은 자신이 젊었을 때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게릴라 전투원으로 활동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全(전) 세계 해외동포들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함께 뭉치자고 역설했던 기억이 난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차림이지만 어딘가 고상한 매력이 풍기는 51세 된 중년 여인에게서 그 가슴에 간직한 열렬한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는 강인한 決意(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感動(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내 생애를 통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9년 10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세계 NGO 대회에 흑룡강성 소수민족 聯誼會(연의회) 명예회장 자격으로 그분이 참석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서울로 달려왔다. 형님 玄鳳學 박사는 그분을 위해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대접하였다. 李敏 여사는 하얼빈에서 우리가 서로 만난 지 14년 만의 再會(재회)를 몹시 반가워했다. 그날 저녁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중년의 조선족 학자 金宇鍾(김우종) 교수가 완벽한 한국말로 그분의 통역을 맡아주었다.
 
  우리는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金교수는 내 명함의 玄雄(현웅)이라는 한국 이름을 보더니 다시 묻는다.
 
  『몇 해 전에 베이징의 紅旗出版社(홍기 출판사)에서 나온 박정희 傳記(전기)를 쓰신 玄선생 아니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뜻밖에 만나 뵈니 반갑군요! 그 책이 나왔을 때 베이징 출판사에서 한 권 보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인간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李敏 여사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번역 원고의 복사본을 金正日(김정일)에게 주었지요. 아마 金正日이 그 책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과 경제발전 업적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朴正熙는 한국의 秦始皇』
 
 
  이런 뉴스를 듣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홍기 출판사가 내놓은 중국어판 박정희 전기는 지금도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槪要(개요)에 불과하고 아직 脫稿(탈고)가 안 끝난 상태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책은 故(고) 李先念(이선념) 전 국가주석의 사위 劉亞洲(유아주)가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PEN 대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내 영문 개요를 읽고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 정부 관리, 학자와 일반 독자들에게 읽히는 게 좋겠다고 하여 나오게 된 배경까지 털어놓았다. 劉亞洲 자신은 朴正熙의 뛰어난 업적에 감동한 나머지 그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金교수는 한마디 더 보탠다.
 
  『중국에서 홍기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권위입니다. 이 출판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이기 때문에 보통 중요한 책이 아니면 절대로 취급 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過讚(과찬)의 말씀』이라고 인사를 차릴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 가면서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하얼빈 손님들은 醉興(취흥)이 무르익었다. 李敏 여사는 일어서더니 愛唱曲(애창곡) 抗日 鬪爭歌(항일 투쟁가) 「어머님 울지 마세요」를 부른다. 그 옛날 젊고 용감한 항일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만주에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춘만 작사, 작곡의 「어머님 울지 마세요」의 가사는 원래 중국어로 된 것인데 李여사가 번역한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엄마 엄마 어머님은 왜 우십니까/ 어머니가 우시면 나도 울고 싶어요/엄마 품에 안기어서 나도 울고 싶어요.
 
  네 아버지 떠나신 후 오늘날까지/ 한번도 못 뵈옵고 해와 달이 바뀌어/ 어언간 삼년 세월이 흘러 가고나.
 
  네 아버지 떠나신 후 오늘날까지/ 밤마다 정성 들여 기도 드려왔지만/기도해도 허망한 일 쓸데가 없고나.
 
  엄마 엄마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아들아 수동아 네 아버지는/ 전선으로 왜놈들과 싸우러 가셨다.
 
  어머님 어머님 울지 마세요/ 어머님 어머님 울지 마세요/ 어머니가 우시면 나도 울고 싶어요』
 
  李여사는 청아하고 앳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감정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우리가 만주 벌판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릴 때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사기를 올렸습니다』
 
  李여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잔 다르크를 떠올렸다. 꿈과 용기와 자신을 던진 애국심으로 프랑스 역사의 자랑스럽고 전설적인 한 章(장)을 기록한 女人像(여인상) 말이다.
 
 
  평생 첫 인터뷰 허용
 
 
  李여사에게 그 옛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 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기에는 그날 저녁 자리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 헤어질 때 나는 李여사의 화려한 과거에 대하여, 특히 金日成 부자와의 오랜 우정에 관하여 좀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李여사는 주저하는 빛을 보이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李여사에게 다짐했다. 언젠가 李여사에 대한 글을 쓴다면, 중국 인민들이 바이블로 생각하는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처럼 절대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그러면서 1985년 「중국의 붉은 별」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베이징 대학에서 열린 에드거 스노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나의 연설문이 人民日報(인민일보)에 실린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날 발표자들 중에는 黃華 외상과 뉴욕타임스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sbury) 등 국내외 저명 인사들이 10여명이나 되었었는데 인민일보에 실린 연설문은 내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China Daily)가 「중국의 韓人(The Koreans in China)」이라는 나의 긴 기사를 실었다는 사실과 함께 나 자신이 黃華 전 외상이 회장으로 있는 중국 에드거 스노 연구회 명예理事(이사)의 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말했다.
 
  李敏 여사는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金교수가 나섰다. 그 문제는 李여사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한 2주쯤 됐을까, 그분들이 하얼빈으로 돌아간 다음에 장거리 전화로 金교수를 불러 졸랐다. 적당한 시간에 李여사와 그 문제를 꼭 의논하겠노라는 친절한 대답이었다. 며칠 뒤 다시 한번 전화했더니 李여사가 여지껏 아무한테도 한 일이 없는 인터뷰를 내게만 특별히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었다.
 
 
  항일투쟁의 살아 있는 증인
 
 
  무엇보다도 李敏 여사는 그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왔다. 특히 김일성 부자와 가까이 지낸 대목에 와서는 언제나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李여사는 누가 뭐래도 일본 식민지 통치시절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벌인 항일투쟁 경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생존자의 한 분이다. 이분이야말로 그동안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학자, 정치 지도자, 작가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章을 놓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혹은 조작해온 갖가지 잘못된 인식과 기록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獨步的(독보적)인, 살아 있는 증인이 아닌가.
 
  작년 12월 초 서울-하얼빈 직행 아시아나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반 동안 오직 한 가지 생각이 줄곧 나를 사로잡았다. 과연 李敏 여사가 자신의 항일 투쟁과 그의 오랜 동지 金日成 부자와의 관계를 내게 사실대로 말해줄까? 그분이 1930년대부터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이 그분의 생각과 판단을 지배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金日成의 행적에 관한 그분의 진짜 평가를 밝혀줄 것인가? 예컨대 金正日의 출생지에 관한 진실을 지금 북한에서 얘기하듯이 백두산 기슭이라고 우길 것인가, 아니면 소련의 기록과 다른 주장들처럼 하바로프스크였다고 할 것인가?
 
  한편, 나는 북한의 慘狀(참상)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북한과 같은 1인 독재국가에서 지도자의 특징, 인간성, 인생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金日成의 경우를 보라. 젊었을 때 겪었던 여러 가지 인생 경험들, 특히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시절 경험과 1940년대 스탈린주의 소련에서 직접 겪었던 체험이야말로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또 그 후 정치 권력을 잡아 북한이라는 독재 국가를 만들어 가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말이다. 나는 꼭 그렇다고 믿는다. 그럼, 李敏 여사의 理想(이상)과 思想(사상)은 어떤 것인가? 이분 역시 청춘을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으로 보내고 비록 잠깐이지만 소련 체재 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평생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점과 과거 中蘇(중소)간의 이념 대립이 심각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나는 제발 이분이 金日成 부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주기를 바랐다. 아니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얼빈의 북한 여성들
 
 
  하얼빈 취재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 여행은 태국의 비단결처럼 매끄러웠다. 공항에 도착하니까 아시아나 하얼빈 지점장 文明永(문명영)씨가 마중 나와주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 찾는 데로 가는데 관세 구역에 요란한 색깔의 치마 저고리를 입은 아가씨들이 우리들을 반긴다. 『하얼빈에 오신 것 환영합니다』고 인사하면서 명함을 나누어준다. 앞면에는 『조선-평양, 금강산 식당 어서 오세요』라고 적혔고 뒷면에는 식당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다.
 
  『저 아가씨들이 어떻게 관세 구역 안에서 손님 끄는 영업행위를 하는 거요?』
 
  文 지점장에게 물어보았다.
 
  『와이로요, 여기서는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아가씨들은 서울발 아시아나 항공이 도착하는 시간에 늘 이 자리에 나옵니다. 금강산 식당 음식 형편없어요. 전 거기 절대 안 갑니다』
 
  호텔로 오면서 보니까 1980년대 중엽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공항부터 새로 지은 현대식 시설이고 시내로 들어오면서 수십 채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길도 많이 넓어졌다. 1980년대에는 鄧小平(등소평)의 경제개혁과 근대화 정책이 이곳 동북지방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중국 어디 가나 드러난다.
 
  수많은 外製車(외제차)들이 한길을 메우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섭씨 영하 10도의 거리에서 핸드폰을 들고 통화하면서 바삐 걸어간다. 하얼빈도 베이징, 상하이, 홍콩, 아니 서울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두 군데나 있어서 안심이었다. 내가 묵을 샹그릴라 호텔은 개장한 지 불과 몇 달 안된 별 다섯 개짜리였다.
 
  12층에 있는 내가 묵을 방은 세계 다른 도시의 샹그릴라 호텔이나 다름없이 우아하고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아, 넓은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松花江(송화강)의 傳說(전설)어린 壯觀(장관)이여! 지금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나는 1985년 여름에 왔을 적에 본 유유히 흐르던 물결을 눈에 그릴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출신 항일 빨치산들이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이 강을 건넜던고! 그날 밤 이름난 항일 빨치산 두 분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하고 조바심이 났다.
 
 
  빨치산 출신 老신사의 풍모
 
 
  李敏 부인과 그 남편인 前 흑룡강성 성장 陳雷(진뢰)가 나를 위해 베풀어준 화려한 저녁 모임은 하얼빈에서 유명한 식도락 궁전 雪龍酒家(설룡주가)에서 열렸다.
 
  모두들 내가 동북지방에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중국공산당 中央顧問委員會(중앙고문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省長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몸이 장대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83세의 중국인 老紳士(노신사)는 뿔테 안경 너머로 사물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분이 젊었을 때 용감한 항일 빨치산이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요, 또 흑룡강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省長이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風貌(풍모)였다. 비록 연로했지만 분명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리 있게 환영사를 해주었다.
 
  중국 동북지방 최고의 요리사가 특별히 마련한 산해진미가 끊임없이 서브되는 동안 새 접시가 나올 때마다 乾杯(간빠이)를 계속했다. 우리들은 알코올 도수 38도짜리 白酒(백주)를 마셨지만 李敏 여사는 중국산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다른 젊은 손님들에게 지지 않는 省長의 酒量(주량)에 놀랐다.
 
  省長과 다른 손님들이 간빠이를 제의할 때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재빨리 잔을 비우고 진짜 友情(우정)을 나누는 분위기에 동참하였다. 나로서는 省長과 李여사의 나에 대한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분들이 나를 믿으면 믿는 그 만큼 앞으로 사흘간 가질 인터뷰에서 솔직한 얘기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人民日報(인민일보)와 영자신문 차이나 데일리에 난 내 기사와 중국 에드거 스노 연구회 명예이사 임명장 카피까지 그분들에게 보여주었다. 省長이 나를 좋아하는 빛을 보고 나도 그가 좋아졌다. 따뜻한 우정은 서로 오고가게 마련이다. 이번 취재 여행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 같은 육감이 느껴졌다. 못해도 50%는 성공한다는 자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하얼빈 도심 省 정부 청사에서 가까운 鞍山路(안산로)에 있는 省長의 저택을 찾아갔다. 거대한 저택의 정원 담은 漢詩(한시) 구절을 새긴 석판으로 장식되어 주인의 詩(시)와 서예에 대한 조예를 짐작하게 한다. 널찍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한가운데 작은 亭子(정자)가 있어서 흡사 露天(노천)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자연과 예술의 완벽한 調和(조화)여!
 
  李敏 여사의 한국어가 서툴고, 그 남편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르기 때문에 黨史연구소 소장 金宇鍾 교수와 흑룡강신문사 李太福(이태복) 부주임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다. 사실 陳성장이야말로 만주 시베리아 항일 투쟁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력자이면서, 한국인 항일 빨치산들과 공동 작전도 펴왔고, 그러다가 李여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金日成 부자와 각별히 친한 사이인 만큼, 나는 그와 먼저 인터뷰할 필요를 느꼈다. 아니, 내가 첫 질문을 떼기도 전에 陳성장은 자신의 獨白(독백)을 읊어나갔다.
 
 
  조선족 反日투쟁 보고 中2 때 혁명 가담
 
 
  『나는 1917년 흑룡강성 佳木斯(가목사)시 서쪽 교외 火龍溝(화룡구)라는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淸朝(청조) 말엽, 원래 산동성에 살던 증조부는 이 고장에 와서 말을 달려 금을 그어 백ha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여 제법 큰 地主(지주)가 되었지요. 말을 달려 땅을 차지하게 한 것은 그 당시 淸朝의 변방 개발 장려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家門(가문)이 기울어진 것은 가족간의 訟事(송사) 때문이었어요. 종부 한 분이 증조부의 재산분배가 불공정하다고 관청에 고발하자 증조부도 맞고소하여, 아무튼 이 송사가 베이징의 大理院(대리원)까지 올라가면서 몇 년이 걸리는 동안 家産(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했지요. 결국 증조부는 땅을 열 몫으로 나누어 나의 조부에게만 부모를 모신다고 하여 20ha를 물려주고 나머지 일곱 아들에게는 11ha 남짓 되는 땅들을 쪼개어 주었답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해졌지요.
 
  1929년 열두 살 나던 해에 樺川縣(화천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고 내 장래에 큰 희망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점쟁이까지 불러서 내 운명을 점쳤으니까요. 그 점쟁이는 기껏 좋은 소리 한다는 것이 내가 크면 管帶(관대) 벼슬에 오르겠다고 했다나요. 지금 대대장 급에 해당하는 당시 군대 계급이지요. 할아버지께서 그 말을 듣고도 몹시 기뻐했다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점쟁이 담이 작았던 모양이지요. 흑룡강성 省長까지 된 사람을 겨우 관대 벼슬이라니. 하하하』
 
  이제부터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이 아주 어려서부터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투쟁에 가담하게 된 動機(동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혁명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른바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 9월18일 이후였다고 기억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지요. 당시 동북지방에서 제일 먼저 反日(반일)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조선족들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조선족들은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 와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저렇게 희생적으로 反日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 우리도 일어나 日帝(일제)에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 이런 생각에 나도 反日 활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反日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일본군이 가목사를 점령한 것은 1932년, 그 바람에 우리 학교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 1년 넘게 농사를 지었지요. 짧은 경험이었지만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가, 농촌의 깊숙한 裏面(이면)을 좀 깨닫게 되었지요. 이 귀중한 체험은 나의 진로 선택과 인생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만주사변 후 동북지방의 애국 將領(장령) 馬占山(마점산)이 嫩江(눈강) 다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들의 항일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지요. 우리는 그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항일 운동을 선전하는 연극을 만들어 거리에 나가 공연하고 또 義捐金(의연금)을 모아 항일 전선의 장병들을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골 농촌까지 내려가서 농민들에게 反日 애국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1933년 화천중학교 사범반에 들어갔습니다. 학비가 면제되는 사범반을 지원한 것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지요. 1936년 졸업하자마자 나는 가목사 동문소학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사범학교 졸업반 때 共産黨 입당
 
 
  ―중국 공산당에 入黨(입당)한 것은 언제입니까? 그 당시 동북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중국 공산당 입당은 1935년, 아직 사범학교 졸업반 학생 때였지요. 졸업 후 중국 공산당 가목사 지하당 조직위원을 맡았고, 1937년 가목사 市(시)위원회 서기로 활동했습니다. 市委(시위) 서기로 약 반년 일했지요. 1938년 3월15일 가목사에서 中共 지하당 당원들이 日帝(일제)에 대거 검거되었습니다. 이 「3·15 사건」으로 많은 동지들과 나를 이끌어주던 선생님까지 체포되는 바람에 지하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동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는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을 찾아 나서야 했지요.
 
  일제의 검거 소식을 듣고 나는 그 길로 松花江(송화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습니다. 東北抗日聯軍이 강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抗日聯軍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하여 이미 강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차 편으로 가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수상한 사람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일제의 끄나풀 같았어요.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기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송화강 다리를 지나느라고 마침 기차가 속력을 줄여 느린 속도로 가는 틈을 이용한 거지요. 풀밭에 숨어 가면서 가목사로 돌아왔지만 집으로 가지 못하고 무슬림 교회당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한적하고 외딴 곳이라 안전했습니다. 아침에 몰래 집에 들러 식구들과 작별하고 고향 화룡구로 가서 숨었습니다.
 
  고향 친척집에 한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사람의 눈을 피하여 낮에는 밀짚더미에 가서 종일 몸을 숨기다가 밤이면 친척집에 들어가 잤지요. 화룡구 지하당 조직이 아직 살아 있어서 기회를 보아 나를 抗日聯軍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어요. 과연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抗日聯軍 연락병이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 말을 타고 抗日聯軍의 주둔지 後石山(후석산) 기슭의 吳小號屯(오소호둔)으로 갔지요. 이곳 부대는 6군 4사 23대대였어요. 李淸剛(이청강) 정치위원은 환영하면서 내가 黨신분 회복을 위해 北滿省共産黨委員會(북만성공산당위원회)로 찾아가야 한다니까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십여 일간 그 부대에 머무는 동안 세 차례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일본군과 우리 軍(군)이 모두 말을 타고 싸운 騎兵戰(기병전)이었지요. 나는 이 전투에서 말이 수렁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그 후 또 한 차례의 전투에서는 23대대 정치부 주임이 말을 탄 채 敵彈(적탄)에 맞아 희생되었어요. 우리는 후석산 동쪽 기슭에 그를 묻었습니다. 아, 그 어렵고 참혹한 항일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烈士(열사)들이 그렇게 귀한 생명을 바쳤는지요』
 
  ―송화강을 건넌 뒤의 여러 가지 활동을 들려주세요.
 
  『가목사市 서쪽 교외에서 23대대장을 만나 함께 송화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이미 再建(재건)된 가목사市 黨 지하조직이 돛배 세 척으로 우리 부대를 渡江(도강)시켜 주었지요. 부대와 함께 湯原縣(탕원현)으로 나가니 그곳에서 抗日聯軍 6군 4사 정치위원으로 있던 조선족 출신의 吳玉光(오옥광)을 만났습니다. 1939년 4월 늦은 눈이 내리는 어느 날 黑金河(흑금하)로 가서 6군 정치위원 장수천, 곧 李兆麟(이조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李兆麟은 抗日聯軍의 중요한 영도자이며 해방 후 하얼빈 市委(시위) 제1서기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장수천 동지도 북만성위에 갈 일이 있다고 나와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敵(적)의 점령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버리고 도보로 보름 걸려서 마침내 북만성위에 도착했지요.
 
  당시 북만성위 秘書長(비서장) 馮中雲(풍중운)은 내가 가목사 서기직에 있을 때 자주 만나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가 증명해주어서 나의 黨 신분은 곧 회복되었지요. 북만성위는 나를 抗日聯軍 제6군에 배치했고 군부 조직과장 일을 맡겼습니다. 함께 갔던 장수천(李兆麟)은 정식으로 6군 정치위원에 임명되었구요』
 
 
  金策이 抗日聯軍 정치위원으로 임명
 
 
  ―李敏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첫눈에 반했습니까? 그때 두 분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나요.
 
  『1939년 여름, 우리 부대가 梧桐河(오동하)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나는 부대의 정치교육을 책임지면서 문화 지식도 가르쳤습니다. 李敏을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십사오 세 된 어린 소녀와 스물한 살 난 청년 사이에 사랑을 운운할 형편은 아니었지요. 우선 李敏은 너무 어렸고, 서로 민족이 달라서 언어 소통도 잘 안되었으니까요.
 
  1939년 7월, 나는 6군 군부를 떠나 6군 조직과장 신분으로 2사 정치사업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西征軍(서정군)과 함께 海倫(해륜)으로 진격했습니다. 1939년 말 북만성위의 당시 조선족 출신 省委 서기 金策(김책)과 장수천 동지가 나를 抗日聯軍 3로군 1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金策(金日成과 함께 북한정권을 세운 뒤 6·25 때 전사)은 노련한 혁명가이며 남을 끄는 힘이 있는 영도자였습니다. 점잖고 온화하며 후덕하고 친절하여 내게는 좋은 인상을 남겼지요. 동북抗日聯軍은 사실상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부대인 만큼 金策이야말로 중요한 영도자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周恩來 총리가 동북에 와서 「동북抗日聯軍은 中朝(중조)연합 抗日聯軍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렵고 참혹했던 항일 투쟁에서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친형제와 같은 혁명적 우정을 나눈 것입니다. 그때 배운 몇 마디 조선말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물이 있소?」 「담배 있소?」
 
  조선족 마을에 가든가, 조선족 戰友(전우)들과 가장 자주 쓰게 되는 말이지요. 조선인은 동북의 항일투쟁을 위해 큰 몫을 해냈다는 데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梧桐河(오동하)에서 李敏을 처음 만났다가 헤어진 후 다시 만나게 된 사연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나요.
 
  『오동하에서 헤어진 후 李敏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오빠 李雲鳳(이운봉)과는 함께 西征(서정)에 참여하면서 무슨 말이나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었지요. 李雲鳳은 당시 6사 1대대 정위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둘이서 한담을 나누다가 李雲鳳이 농담으로 「내동생 네게 시집 보내주마」고 말하지 않겠어요? 뜻밖에 몇년 후 이 농담이 진담이 되었지요.
 
  나와 李敏이 진정으로 사랑을 약속하게 된 것은 소련에서였습니다. 抗日聯軍이 하바로프스크에서 70여㎞ 떨어진 野營(야영)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어요. 거기서 李敏은 무선전신 교육을 받고 나는 부대원들에게 정치과목과 문화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내가 그때 문화를 알고 공부를 열심히 한 점이 李敏의 호감을 사게 된 것 같습니다. 프로포즈는 남자인 제가 했지요. 李敏이 이를 받아들여서 우리들은 사랑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장수천 동지와 함께 중국 동북지방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가 떠난 후 李敏은 괴로움을 당했답니다. 조선족 동지들이 우리의 결합을 반대하고 심지어 黨의 小組長(소조장) 직무도 빼앗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후 우리는 몇년 동안 서로 못 만났습니다.
 
  1942년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나는 중상을 입어 정신을 잃고 소련의 야영으로 호송되었지요. 정신이 깨어나서 보니 나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李敏이 아닙니까! 몇년 만에 다시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나의 상처를 보고 李敏은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야 그동안 李敏이 우리의 사랑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사실을 알았지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당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사실에 나의 사랑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1943년 겨울 우리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무렵 나는 抗日聯軍 3로군 총사령 趙尙志(조상지)의 편이라 하여 黨의 배척을 받았을 때였지요. 많은 동지들은 李敏에게 前途(전도)가 밝지 못한 나와 관계를 끊으라고 충고했습니다. 특히 조선족 동지들은 더욱 강경하게 말렸습니다. 조선족 여인이 중국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적 이기주의를 나타낸 것이지요. 당시 모든 조선족 동지들이 다 반대하는데 오직 金策, 金日成 두 사람만이 우리들의 결합에 찬동했습니다. 결국 李敏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아서 우리의 결혼이 이루어졌지요. 1946년 우리는 동북에 돌아와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손녀가 셋입니다』
 
 
  金日成이 결혼을 돕다
 
 
  ―해방 후 당장 무슨 일을 했습니까.
 
  『소련 시절 나의 계급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88여단 3영 6연의 지도원이었는데 계급은 소위였지요. 趙尙志 파로 몰려 강등된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日帝를 물리치고 중국에 돌아온 뒤부터 나의 官運(관운)은 잘 풀려나갔습니다. 縣委(현위) 서기직을 맡아 3개 현을 관장했습니다. 1945년 東北民主聯軍(동북민주연군) 흑룡강 1旅(여)의 正尉(정위)로 임명되었는데 1여는 5천명의 정규군으로 전투력이 대단했지요. 1946년 흑룡강 남부지역 龍南(용남) 지역위원회 부서기 겸 軍分區(군분구) 정치위원으로 승진되었습니다. 1947년 우리 부대는 중국 본토로 國府軍(국부군)과의 전쟁 일선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흑룡강 省委는 나를 정치공작과 사상공작에 능하다고 평가하여 省委 비서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뒤 1952년 흑룡강 省政府(성정부) 副省長(부성장), 그 다음 해 1953년 毛澤東 주석 임명으로 흑룡강 성정부 主席(주석)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승진할 수 있었는지 무슨 배경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부지런한 배움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전쟁 때, 평화 때나 결코 배움을 게을리한 적이 없습니다. 배움은 내 평생 할 일이지요.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배움이 제일입니다. 중국 속담, 「배우지 않으면 재능이 없다」, 「배움의 바다에는 代案(대안)이 없고 종점도 없다」를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나는 書冊(서책)을 열독하며 배움을 쉬지 않습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큰 재난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당신은 문화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文革 때 간첩 누명
 
 
  『문화혁명은 나에게도 큰 재난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문화혁명 때 三反(삼반) 분자, 走資派(주자파), 소련 간첩, 조선 간첩 등 여러 가지 누명을 쓰고 크게 당했습니다. 억울함도 겪었고 모진 매도 맞았지만 혁명과 인민에 대한 신념과 믿음은 한시도 동요한 적이 없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나는 1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아내도 5년간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요. 나는 감옥에 가서도 배움을 계속했습니다. 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문화혁명 前 중국과 일본은 국제적 지위나 발전 수준이 엇비슷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은 20년 후퇴했고 일본은 반대로 고속으로 발전했으므로 오늘은 큰 차이가 났습니다.
 
  문화혁명이 다 지난 1976년 나는 감옥에서 나와 하얼빈市 베아링 공장에 가서 再교육을 받고 나서 省 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명예와 이익을 따진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인민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 굳은 의지를 키울 수 있지요. 이 시기 나는 두 가지 큰일을 해놓았습니다. 하나는 하얼빈 공장을 건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흑룡강성 화학섬유공장을 세운 것입니다. 1977년 흑룡강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1978년 鄧小平 동지의 임명으로 다시 省長職(성장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흑룡강성의 最長壽(최장수) 省長인 셈이지요』
 
 
  金日成, 내게 언제나 뜨거운 소련식 포옹
 
 
  ―金日成 부자와의 친분에 대하여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金日成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사실은 金日成을 만나기 전부터 그가 조선 인민혁명군의 영도자라는 말을 들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金日成을 만난 것은 소련에서였지요. 나는 88여단 黨委 비서요, 金日成은 1營 영장이었습니다. 金日成의 1營은 전투력이 강한 잘 훈련된 부대로 이름이 나 있었지요. 그런데 그 부대에 마땅한 정치 교육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날더러 정치 훈련을 지도해달라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나는 黨委의 허락을 받고 1營에 가서 정치 교원이 되면서 金日成과 朝夕(조석)으로 만났습니다. 金日成은 내가 만든 敎案(교안)을 언제나 꼼꼼히 검사했지요. 그만한 정치 수준을 가졌다고 봅니다. 나를 만나면 언제나 소련식으로 뜨겁게 포옹하곤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友情(우정)은 돈독해졌습니다.
 
  우리의 돈독한 우정에 관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지요. 한번은 金日成 주석이 소련을 방문했다가 牧丹江(목단강)을 지나 귀국한다고 하기에 나와 省委 서기가 목단강 역에 마중 나갔습니다. 金日成은 우리와 만났을 때 나보다 서열이 위인 省委 서기를 제쳐놓고 나에게 먼저 달려와 뜨거운 포옹을 했지요. 또 한번은 내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얘깁니다. 마침 金日成은 중국을 방문중이었어요. 周恩來 수상이 金을 안내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대련에 왔을 때 갑자기 金日成은 周恩來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周恩來가 그 연유를 묻자 金은 「지금 陳雷가 조선에 가 있는데 빨리 귀국하여 그가 돌아가기 전에 만나봐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후 나와 金의 친분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에게 金日成은 언제나 친한 戰友(전우)였습니다. 金日成 생전에 나는 두 번 조선에 가서 만나 보았습니다. 한 번은 대련에서 돌아온 그때였고 다른 한 번은 1992년 4월 그의 80회 생일에 특별초청을 받고 갔었습니다. 1994년 7월 그의 장례식에는 물론 金正日의 초청으로 가서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다른 분들은 모두 머리만 숙이고 目禮(목례)를 했지만 나는 엎드려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金日成과 나는 전쟁을 통하여 혁명적 義氣(의기)가 투합된 그야말로 知己(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생 동한 知己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逝去(서거)를 진실로 슬퍼했습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이 역사적 공동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단결하여 日帝와 싸웠으며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金正日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金日成 주석 장례식에 갔을 때 金正日과 단독 접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0주년을 맞아 경축행사에 갔을 때는 金正日과 단독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金正日은 인민위원회 상무부위원장 양형섭을 대신 내게 보냈지요. 매우 섭섭했습니다. 金正日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소련을 답습하는 敎條主義(교조주의)를 버리고 사상을 해방하여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권고할 생각이었지요』
 
 
  북한의 어려움은 영도자의 과오
 
 
  ―金日成 주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 나라의 수령으로 볼 때 金日成은 합격입니다. 정치, 외교 면에서 모두 조선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가 추진한 천리마운동, 청산리 경험 보급 등은 아주 찬양받을 만한 정책이었지요. 구태여 부족한 점을 말하라면 후계자 선택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꼭 아들이 계승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계승자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전임자의 뜻을 이어 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인민들의 요구를 보장할 수 있는가이지요.
 
  근간에 조선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水災(수재)와 旱災(한재) 등 자연 재해로 말미암은 일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사업의 중점을 마땅히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데 두고 이를 해결하기에 전력을 다 해야겠지요. 그런데 조선에서 사정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라가 그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결코 인민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영도자들의 과오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毛澤東 때도 세 끼 식사는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요. 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 이후에는 더욱 큰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흑룡강성만 하더라도 곡식이 남아돌아 이제는 貯藏(저장)이 문제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요. 결국 소련 모델을 고집하여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련은 이미 해체되지 않았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南이 北을 도와주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 점은 찬성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햇볕정책이라고 하면 어딘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움을 받는 쪽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도와주려면 어떤 美名(미명)도 필요 없겠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北에 대한 원조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타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南이 햇볕이고 北은 그 햇볕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북한 통일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민족이 2차 대전 이후 분단되어 이렇게 오랫동안 敵對視(적대시)하고 갈라져 있는 것은 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하는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평화적 통일과 무력 통일. 우리는 지금까지 무력통일을 반대해 왔습니다.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남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줄어들 것이며 남북은 서로 접근할 것입니다. 남북이 모두 통일할 의사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보기에 빠른 시일 안에 정치적 합의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해요. 너무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조선의 남북통일 문제는 미국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크게 문제삼고 있지요. 내가 보기에도 미군의 주둔은 남한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맞서서 북한은 강경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强硬 一邊倒(강경 일변도)로 나가면 결국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겠지요. 남한도 한 민족이 장기적으로 외국의 指示(지시)와 使嗾(사주)를 받는다는 것은 어쨌든 불행한 비극입니다.
 
 
  金日成은 엄한 軍紀로 소련 사령관들에 잘 보여
 
 
  중국해방전쟁 때 스탈린은 해방군이 양자강을 넘어 南下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주장대로 양자강을 건너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만일 그때 남의 의사를 따랐다면 중국도 두 부분으로 갈라져서 각각 두 大國(대국)의 눈치를 살피고 살아야 했겠지요. 자기 나라 일은 자기 의사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一國 兩制度(일국 양제도)의 방법으로 홍콩을 되찾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마카오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제도라고 하여 결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만도 결국 이런 형식으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곳이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전하였다 해도 대륙을 먹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걱정은 안합니다』
 
  陳雷 성장과 李敏 여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金日成의 항일 빨치산 활동에 관하여 기억이 희미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족 역사학자 金宇鍾 교수에 의하면 金日成은 중국 공산당 게릴라 부대였던 東北抗日聯軍의 한 支隊長(지대장)이었다는 것. 이 부대는 원래 일제가 滿洲國(만주국)을 만든 뒤 동북지방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활약하던 중국인과 한인 빨치산들을 통합한 사령부를 말한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이 부대는 3 路軍(로군)으로 재편성된다. 한인 빨치산들은 韓滿(한만)국경이 가까운 東滿(동만)지방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제1로군에 편입되었다. 金日成은 이 1로군에서 두각을 보인 십여 명의 韓人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金日成 부대의 규모는 50명에서 3백명까지 일정치 않았다. 가장 유명한 작전은 1937년 6월 韓滿 국경 마을 보천보에 주둔한 일본군 지대를 공격한 사건인데 당시 부대원 수는 약 2백명이었다. 金日成은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게릴라 전투를 계속하다가 1940년 말 소련으로 후퇴했다.
 
  소련 보병 장교들에게 특수 훈련을 받은 金日成은 1942년 8월 소련극동 88여단에 배속된다. 이 여단은 만주에서 패퇴한 중국인과 韓人 빨치산들로 편성된 부대다. 소련군 편제로 4개 대대인데 1개 대대 병력은 약 1백50명. 이들의 훈련 내용은 주로 偵察(정찰)과 침투작전이지 전투 기술이 아니었다. 金日成은 대위계급으로 한 대대를 지휘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이 항복하기 7일 전에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던 88극동여단의 韓人들이 전투를 해볼 시간이 없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金日成 원수가 일본을 물리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인 소학교에서 레닌사상 전파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金日成은 소련 사령관들에게 잘 보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엄격한 軍紀(군기)로 소문나 있었다. 소련 장교들은 그가 부하들의 酒色(주색)을 엄격히 다스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金日成 소좌를 비롯한 88여단 66명의 다른 韓人 장교들은 38선 이북 소련 주둔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현지 주민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1945년 9월19일 金日成과 그의 동지들, 최현, 최용건, 김일, 오진우, 박성철, 전문섭, 한익수, 서철, 이을설 등은 이 자격으로 북한에 돌아온다. 이 사람들은 金日成의 개인 독재 시절 모두 북한의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金正日 밑에서 아직도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하얼빈에서 제2일과 제3일은 李敏 여사의 긴 이야기를 듣는 데 활용했다. 李여사는 아주 자상한 안주인이었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내 찻잔이 식을새라 뜨거운 차를 계속 부어준다. 가끔 벌떡 일어서서 항일 투쟁가를 불러준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더 실감나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여사 자신이 1995년에 東北抗日聯軍 歌曲集(가곡집)을 출간한 바 있다. 남편은 詩와 서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여사는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하다. 인터뷰하는 동안 내 귀에는 쇼팽의 에튀드 피아노 연습곡이 간간이 들린다. 아마 이 집 손녀딸이 2층에서 피아노 연습중인 것 같다. 과연 미술과 음악이 흘러 넘치는 집안 분위기다.
 
  ―먼저 李여사님 어린 시절과 가정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1924년 음력 11월5일 흑룡강성 湯原縣 梧桐河라는 고장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 성함은 李錫元(이석원)이었는데 혁명에 가담하면서 여러 가지 변성명을 썼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李石元(이석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지요. 어머님은 崔聖滿(최성만). 나보다 다섯 살 위 오빠 李雲鳳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이 고향인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중국에 와서도 반일투쟁에 항상 앞장섰던 모양입니다. 언제 중국에 왔는지 확실한 날짜는 잘 모르겠어요. 南滿洲(남만주)를 거쳐서 長春(장춘)에 와서 얼마간 살았답니다. 아버지는 정미소에 가서 쌀가마 나르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잡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그후 하얼빈을 거쳐 탕원현 오동하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가 장춘에서 임신하여 오동하에서 낳았답니다.
 
  그때 오동하에는 河東(하동), 河西(하서), 河南(하남) 등 몇 개의 조선족 부락이 있었고 모두 3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조선족이 여기 집중된 것은 福豊稻公司(복풍도공사)라는 벼농사 농장 때문이지요. 당시 흑룡강성 督軍(독군·지금의 省長) 吳俊盛(오준성)이란 자가 일본 자본을 들여다가 세운 것입니다. 농장 책임자 萬福林(만복림)이란 자는 벼농사 경험이 많은 조선 농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농장에 찾아오는 조선인들에게 우선 초막을 지어주고 소금과 얼마 동안 먹을 좁쌀을 외상으로 주었답니다.
 
  조선인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아가자 反日 선각자들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 계열인 崔庸健(최용건), 李秋岳(이추악), 李雲健(이운건), 全華(전화), 李春滿(이춘만) 등은 송도모범소학교라는 6년제 소학교를 세우고 현대 교육과 함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전파했지요. 또 청소년 군정학교도 만들어 앞으로의 무장투쟁을 위해 군사 지식과 정치의식 등 항일 무장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夜學(야학)을 열어 부녀자들과 성인들의 문맹퇴치에도 힘썼지요. 모두 혁명의 이념을 일깨워주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오동하의 교육은 인근 지역에 유명해져서 멀리 伊蘭(이란), 羅北(라북) 등지에서도 조선인들이 모여왔습니다. 학비는 면제였기 때문에 나도 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지요.
 
 
  地主 착취 보고 어린 나이에 혁명 가담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기자들이 12~13세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혁명에 참가할 수 있었는가, 야유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나이에 내가 겪었던 두 가지 일만 가지고도 충분한 대답이 될 겁니다. 오동하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해 벼농사가 아주 잘되어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요. 얼마간 신세가 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곡식을 털어놓자 地主가 家兵(가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먹을 양식도 남기지 않고 몽땅 빼앗아가 버린 거예요. 그때 그 원한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님은 이곳에서 더 못살겠다고 70여 리 떨어진 鳳皇鎭(봉황진)이란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그곳 지주 역시 더 악착 맞았습니다. 거기서도 농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家兵들을 몰고 와서 양식을 다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모르니까 조선 농민들을 감시하며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곳에는 朴(박)씨 성 가진 조선인 마름이 있었지요. 조선인 젊은이들은 朴씨에게 원한을 품고 거의 죽도록 패주었습니다. 그후에 돌아온 보복은 더욱 무서웠지요. 그때 주동이 된 청년 둘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朴씨가 우리 집에다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추위를 막으려고 우리 집 벽에 둘러 친 벼 짚단에 불이 붙어 불길은 아주 세찼습니다. 나와 오빠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우리 가족은 地主 家兵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오동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원한을 배우게 되었지요. 오직 혁명만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후 抗日聯軍에 참가하여 死線(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사랑하는 아버님과 오빠를 잃었을 때도, 문화혁명 때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나의 믿음은 흔들려 본 적이 없었어요. 또 내가 자란 지역의 영향도 무시 못할 요인입니다. 당시 오동하 北滿 지역은 可謂(가위) 혁명의 요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지역 조선인 농민들은 99%가 혁명활동에 가담했습니다. 따라서 혁명 참가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지요. 학교에 들어간 첫날 나는 윗학년 학생들이 합창하는 「레닌 탄생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오동하 유역에 널리 퍼진 노래였어요. 나도 듣는 순간 이 노래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합니다.
 
  「1870년 4월10일 그때로다/볼가 강의 평화 농촌/붉은 레닌 탄생했다/아버지는 일리안노브/어머니는 마리아…/별과 같은 붉은 레닌 탄생했다」
 
  당시 레닌은 無産(무산) 혁명의 수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 학교에서는 러시아말도 가르쳤지요. 이 학교 교육은 나의 인생관을 결정해주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레닌의 훌륭한 학생으로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兒童團(아동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소련식으로 붉은 피오네르를 매고 다녔는데, 당시 천이 너무 귀하니까 붉은 실로 만들었지요. 적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옷 속에 매고 다니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신분 확인이 필요할 때만 꺼내 보여 주었어요.
 
 
  마을 전체가 抗日 운동 가담
 
 
  1932년 음력 8월 송화강에 큰 물이 나서 오동하도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건물이 다 무너졌지요. 우리 집은 다시 오동하를 떠나 集賢縣(집현현) 安邦河(안방하)라는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 도착했을 때는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생계를 위하여 아버지는 하루하루 품팔이를 다녔고 어머니는 우리들을 데리고 배추 뿌리를 캐고 이삭 주이에 나서서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그럭저럭 겨울을 나고 봄이 오자 이 고장에 猩紅熱(성홍열)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이 몹쓸 병에 걸려 며칠 앓다가 1932년 5월 23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후 우리는 다시 오동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라 抗日 분위기가 대단했어요. 마을 전체가 抗日 운동에 가담했지요. 아버지는 赤衛隊(적위대) 분대장을 맡았고 나와 오빠는 소년 선봉대 선전대에 참가하여 송화강 유역 마을, 탄광, 금광을 돌며 抗日 전선에 나섰지요. 그후 우리는 탕원현 유격대에 참가하고 이 유격대가 나중에 동북抗日聯軍에 편입된 것입니다. 오빠는 抗日聯軍 6군 1사 6대대 정치위원, 6군 1사 後勤處(후근처: 보급처) 처장을 맡아 抗日聯軍의 西征(서정)에 참가하여 1938년 寶靑縣(보청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당시 만주에서 金日成이 이끄는 부대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인민혁명군은 1934년 3월 東滿에서 창건되었는데 선언문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세운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은 잘 쓰지 않고 「東滿인민혁명군」으로 많이 통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진출 때는 삐라나 선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크게 썼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보천보 전투였습니다』
 
  ―항일 투쟁 시절 소련에 몇 번 갔습니까? 金日成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두 번 蘇聯領(소련령)으로 건너갔었습니다. 첫번은 1939년 음력 5월인데 일본군과 전투에서 불리하게 되어 소련령으로 철수했던 것이죠. 40여 일간 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는 장수천, 다른 이름으로 李兆麟 동지가 나를 파견시켜 주어 무선 전보 기술을 배우러 갔습니다. 抗日聯軍은 통신 연락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를 포함한 여성 戰士(전사) 3명을 소련에 파견하여 무선 전보 기술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교육은 1941년 여름, 하바로프스크 70여 km 지점 野營에서 받았습니다. 내가 金日成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7월 야영에서였어요. 그때 金日成은 소련 극동군 특별 88여단 대위였습니다』
 
  ―그때 金日成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당시 金日成은 무척 젊어 보였지요. 30세 미만으로 보였는데 몸이 여위었어요. 특히 허리가 아주 가늘어 보였습니다. 멋쟁이 타입이었고 소탈하고 친절했습니다. 부하나 병사들에게 낯을 붉히는 일 없이 언제나 스스럼없이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했어요. 훌륭한 將領(장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정숙은 미인형에 多才多能
 
 
  ―金日成의 처 김정숙은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金正日은 정말 소련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김정숙과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가을입니다. 그때 남북 야영이 합하여 우리는 한 장막 안에서 자게 되었지요. 金正日이 태어날 때는 내가 아직 김정숙을 만나기 전입니다. 金正日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李敏 여사는 이 질문만은 내게 자세히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金正日이 백두산 密營(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공식 선전 내용에 異意(이의)를 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 정말 모를지도 모른다. 1995년 내가 외국 기자들과 함께 북한측 안내로 백두산에 올랐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영국기자가 金正日의 탄생지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에게 질문했다.
 
  『1994년에 하바로프스크에 갔더니 거기 金正日의 출생지가 있었어요. 어떻게 두 장소에서 동시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1985년 하바로프스크 갔을 때 金正日의 출생지를 본 일이 있어요』
 
  북한 안내원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러시아 인들은 거짓말쟁이예요!』
 
  하얼빈에서 만난 십여 명 인사들에게 물어봐도 金正日의 백두산 탄생을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김정숙에 대한 인상과 에피소드를 좀 얘기해 주세요.
 
  『김정숙은 상당히 예뻤습니다. 얼굴은 미인형인데 오랫동안 들에서 살아서 그런지 피부는 희지 않았어요. 눈동자가 특히 까맣고 속눈썹이 길어서 더욱 예뻤어요. 인품은 인물보다 더 훌륭했지요. 우리는 1942년부터 1945년 귀국할 때까지 죽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가 달린 김정숙은 겨울이면 집에 들어가 지냈고 여름이면 장막에 나와서 생활했습니다. 키는 작은 편인데도 端雅(단아)한 몸매가 정력적이었으며 마음은 한없이 넓었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多才多能(다재다능)하여, 요리, 바느질, 춤, 연극, 노래 못하는 것이 없었어요. 나도 노래는 자신이 있었는데 노래도 나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전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었어요. 金日成과 김정숙 부부의 금슬도 아주 좋았지요. 金日成이 舞劇(무극)을 쓰고 김정숙이 무용을 지도하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어요』
 
 
  金正日 어릴 때 木銃놀이 즐겨
 
 
  ―金正日의 어릴 때 인상을 듣고 싶습니다.
 
  『金正日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어요. 어머니를 닮아 눈이 까맣고 피부는 검은 편인데 포동포동하여 아주 귀여웠지요. 유치원에서 일찍 돌아오면 봐줄 사람이 없어서 김정숙은 우리가 군사훈련 받는 곳으로 金正日을 데려오곤 했어요. 金正日은 木銃(목총)을 들고 자기도 병사들처럼 훈련하는 흉내를 내는 거예요.
 
  1945년 광복을 맞아 우리는 9월에 동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김정숙은 좀 뒤처져서 11월에 돌아온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둘째 자제 분도 이미 그곳에서 태어났지요. 둘째와 金正日은 두세 살 차이로 기억합니다. 나는 남편 陳雷와 함께 작별 인사차 金日成 부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문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배웅했어요. 그때 金正日이 우리를 따라 가겠다고 어머니에게 떼를 쓰던 일이 기억납니다.
 
  金正日은 늘 목총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崔賢(최현)의 딸 곱단이 등과 군사 놀음을 할 때면 늘 대장을 맡았습니다. 곱단이는 金正日보다 한 살 위였어요. 내가 나무 총으로 일본 놈을 죽일 수 있는가 물으면 金正日은 죽일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진짜 총이어야 한다고 말하면 아버지 총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어요. 그때 김정숙은 이렇게 가르쳤지요. 아버지 총은 안 된다, 재간이 있으면 나무 총을 가지고 敵의 진짜 총을 빼앗아야 진짜 장군이다. 김정숙의 金正日에 대한 훈육은 무섭게 엄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리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金正日을 다시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1992년 金日成 탄생 80주년 기념행사 때였지요. 金正日은 사람을 보내 특별히 우리 부부에게 예물을 보내왔어요. 그리고 金日成 주석 장례식 때도 만났습니다. 우리가 조선에 갈 때마다 각별하게 대접해 주었지요. 1983년 9월에는 金日成의 전용 열차를 보내어 청진에서부터 우리를 평양으로 모셔갔으며 개성 등 여러 지방을 돌아볼 때에도 金日成이 쓰던 방을 우리에게 내주었습니다』
 
  ―지난 9월16일 김정숙 여사 서거 50주년을 맞아 북한에서는 인민 무력성 주최로 김정숙 혁명사적에 관한 연구토론회를 가졌는데 김정숙의 업적이 과연 그렇게 위대합니까.
 
  『위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에 참가했다고 누구나 다 선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김정숙은 화려한 항일투쟁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라의 수령인 金日成을 모시고 항일투쟁을 했으니 연구토론회 정도야 못하겠습니까』
 
  ―김정숙의 사망후 金日成이 김성애와 재혼을 할 때 동북에서 혁명 활동을 한 老(노) 혁명가들이 반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처음 듣는 얘깁니다. 金正日은 친어머니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겠지요.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글쎄, 다른 간부들이 반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金日成은 개혁 필요 느끼자 사망
 
 
  ―당신은 金日成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金日成은 조선 인민의 수령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습니다. 항일 투쟁 시기 抗日聯軍 중에서 그는 군사에서, 정치에서 다른 조선인 장령들보다 단연 뛰어났습니다. 당시에 金日成을 국가의 수령으로 추대한 것은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金日成이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 모델을 그대로 도입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중국은 이미 그 점을 깨우치고 일대 개혁을 단행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외길을 고집하여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金日成의 사망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金日成은 개혁의 필요성을 막 느꼈는데 미처 그것을 실천에 옮겨보지 못하고 그만 서거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金日成은 조국통일을 위해 네 가지 방침을 제시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입니다. 실천 가능한 매우 과학적인 아이디어인데 애석하게도 실천을 못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 문제도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 형편보다 훨씬 나았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개혁·개방을 추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중국은 개혁·개방한 지 20년이 되어 그 성과와 변화를 세계가 알고 있는데 조선은 수십 년 뒤떨어졌습니다』
 
  ―金正日의 영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영도 능력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金正日은 외국에 나가서 視野(시야)를 넓히고 세상의 변화를 살펴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소련의 영향을 너무 깊이 받아서 온 몸이 움직일 수 없이 굳어져 고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黃長燁(황장엽)의 망명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 나라, 한 민족의 고위급 인물로서 그런 행동은 수치스럽습니다. 더구나 공산당원으로서, 더욱이 국가와 黨의 정상급 지도자로서 망명은 절대 허용할 수 없지요. 또 인간적인 면에서도 70여 세 된 사람으로서 가족과 다른 사람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黃長燁은 주체사상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가 주체사상 창제활동에 참가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만들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억울하다고 적에게 넘어간 자는 용서 받지 못한다』
 
 
  ―黃長燁은 자신의 망명이 통일을 위한 행동이라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 생각에는 북한에서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남한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북한에서 여러 가지로 잘 나가고 있었다면 결코 망명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자기 나라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심지어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었다 해도 그가 정말 옳았다면 역사는 반드시 언젠가 그에게 공정한 평가를 내려줄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알 수 있지요. 그렇게 큰 죄목을 덮어쓰고 불행하게 돌아간 劉少奇(유소기), 彭德懷(팽덕회) 등도 결국 훗날 정확한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버리고 간 者(자)는 다릅니다. 그것이 林彪(임표)가 지금까지 손가락질받는 이유입니다. 항일 전쟁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숙청되었지요. 그러나 나중에 공정한 평가에 따라 다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하여 敵에게 넘어간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식량난을 피해 중국에 온 사람들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정황은 어떻습니까? 유엔 세계인권위원회 결의처럼 중국이 이들을 難民(난민)으로 보호해줄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한국의 論調(논조)는 실제와 어긋납니다. 중국의 동포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조선에서도 중국에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의 잘못을 더는 추궁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죄가 있는 사람들은 체포를 하겠지요. 이 문제는 한국이 시비 걸지 않으면 중국과 조선이 잘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飢餓(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다닌 예가 부지기수이지요. 지금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의 선조들도 이런 사정으로 중국에 오게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한국에서는 지금 중국에 온 조선인이 십만 명이나 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숫자예요』
 
 
  金日成 처음엔 父子 승계에 반대
 
 
  ―金日成이 정권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와서 보면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권의 부자승계의 책임을 몽땅 金日成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최용건, 김일, 최현 등 老간부들이 여러 번 金正日을 후계자로 세우자고 건의했지만 金日成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모든 사람들이 강력하게 金正日 승계를 주장하자, 金日成은 「다 동의하는데 나 혼자 반대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회로 미루어 토론하자」고 말한 일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老간부들의 강경한 주장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소련은 흐루시초프 시대부터 레닌과 스탈린을 부정하고 나왔고, 중국에서도 「4인방」의 농간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老간부들의 생각은 이런 사정이 조선에서 재발되지 않게 하려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후계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金正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에 가서야 金日成은 「다 동의하면 나도 동의한다」는 입장에서 그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원래 동생 김영주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로 되어 있는데 金正日이 가로챘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됩니다. 김영주는 金日成과 동년배인데 어떻게 후계자로 선정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金正日의 영도 방법을 어떻게 보십니까.
 
  『물론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나의 戰友인 박경숙(강건의 부인, 강건은 한국전쟁 당시 동부전선 사령관, 박경숙은 전 경공업부 부장)의 사위가 延邊(연변)으로 와서 내게 전화를 했어요. 무얼 하려고 왔는가 물었지요. 장사 일로 왔다는 거예요.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그러면서 국내 생활도 많이 변하고 있다는군요. 金正日은 대문을 활짝 열면 자본주의 세계의 파리, 모기들까지도 들어올까 걱정하여 조심스럽게 천천히 개방하는 모양입니다. 필요 없는 걱정이지요.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았어도 잘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어
 
 
  ―남북통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大中의 햇볕 정책은.
 
  『햇볕 정책, 포용 정책에 대하여서 좀 들어보았습니다. 도와주고 잘 지내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이왕 도와주려면 너무 책략적인 방법으로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모두들 북한의 무력 침입을 걱정하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金日成 주석이 이미 조국의 평화통일 네 가지 방침을 제시해 놓았고, 또 두 나라가 旣定事實(기정사실)로 되어 안정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력 침입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자 한국 기자들은 1950년 북한이 서울로 쳐들어왔는데 지금도 그럴 수 있지 않은가 물었지요. 그때 형편과 지금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지금 무력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오히려 남북통일의 가장 큰 장애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사실 남북통일이 이루질 것을 희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 간의 갈등을 언제나 조장하고 있지요. 한 나라에 다른 나라 군대가 장기적으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민족으로서는 더욱 창피한 일입니다. 미군이 하루빨리 한국에서 철수한다면 통일은 한층 빨라질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金大中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잘하고 있는 듯 합니다. 대통령 직에 있는 동안 시간을 아껴 더 많은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金日成의 極左的 과오 지금도 계속돼
 
 
  ―金日成의 過誤(과오)는 무엇입니까.
 
  『물론 金日成은 과오가 있습니다. 金日成뿐만 아닙니다. 소련 공산당도, 중국 공산당도, 모두 적지 않은 과오를 범했었지요. 金日成은 특히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그와 떨어져 있어서 잘 모르겠으나 한마디로 極左的(극좌적) 과오였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일 시기에 오랫동안 敵의 심장부에서 투쟁해 왔습니다. 敵에 대한 고도의 적개심과 고도의 경각심이 몸에 깊이 배어 있지요. 그래서 金日成이 언제나 적대적인 정책, 강경한 정책을 펴 오지 않았나 합니다.
 
  국내 통치도 너무 경직되고 부드럽지 못했지요. 전에 중국도 그랬어요. 정부나 당에 대하여 조금만 불만스러운 言行(언행)을 보여도 右派(우파)요 反혁명이요 하면서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그러나 조선은 아직도 金日成 때 하던 식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너무 긴 시기입니다. 이렇게 오래 변화가 없는 것은 폐쇄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金日成 주석은 돌아갈 때까지도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듯싶어요』
 
  ―북한에서는 1956년에 박헌영을 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고 기타 自進 越北者(자진 월북자)들도 간첩 누명 아래 많이 죽였습니다. 그런 일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구체적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의 수령도 사람인 이상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지요. 毛澤東도 그렇고 金日成도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해야 하지요. 金正日은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金日成이 세운 나라를 잘 건설해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하루빨리 발전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深思熟考(심사숙고)하여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안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선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뚜렷한 변화가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金正日이 사상이 개방되지 못하고 시야가 좁은 것은 그의 경력과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자주 외국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보았더라면 관점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겠지요. 鄧小平이 과감한 개혁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어려서 서방 유학을 한 경험과 또 자주 해외에 나간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金日成 부자의 개인숭배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숭배주의는 물론 좋지 못합니다. 스탈린, 毛澤東도 그랬고 金日成, 金正日은 더욱 철저했지요. 이것은 사상이 해방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남다른 생각과 재능을 갖춘 지도자는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민들의 서로 다른 의견과 목소리를 허용하고 잘 가려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위대할 것입니다. 개인숭배주의는 결국 민족과 국가에 나쁜 영향만 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개방 가로막는 主體사상은 잘못
 
 
  ―주체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체사상의 골자를 독립·자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자주는 물론 올바른 정책이며 한 나라와 한 민족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지요. 그러나 20세기 말까지 온 오늘의 상황에서 국제적인 환경에 발맞추어 함께 가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自主만 고집하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독립·자주는 남의 간섭을 반대하고 인격을 세우는 데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정신이지요. 그러나 그 참뜻을 잘못 해석하여 나라의 개혁·개방을 가로막는 방패가 된다면 이것은 독립·自主 정신의 요체와는 모순되는 것입니다. 독립·自主는 원칙이고 개혁·개방은 방법이기 때문에 양자를 잘 조화시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요. 역사적으로도 그런 예가 많습니다』
 
  ―陳雷 省長과의 로맨스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1938년 봄 오동하에서 선생과 학생으로서 만났습니다. 抗日聯軍 6군에서 나는 교도대 학생, 그는 군부 조직과장으로 교관이었지요. 그 당시 15세인 어린 소녀가 남녀간의 감정을 무얼 알았겠습니까. 순수한 교관과 학생 사이였어요. 그 해 7월 그는 西征 부대와 함께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41년 소련의 野營에서였지요. 趙尙志가 北滿 省委와 의견이 대립되어 黜黨(출당)당하는 바람에 그 수하에서 선전부장을 맡았던 그도 黨에서 제명당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陳雷는 얼마 안 있어서 동북의 戰場(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떠나는 날 밤 뜻밖에 그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불러냈어요. 西征 길에서의 전투 이야기, 나의 오빠를 포함하여 戰死한 戰友들 이야기, 그러다가 지난날 교도대 시절의 이야기, 온통 부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西征 길에서 오빠가 나를 자기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농담한 얘기를 꺼내더라구요. 물론 우스개로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지하게 물어오는 거예요. 그제야 저도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차렸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무어라고 선뜻 대답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사랑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도 더는 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더군요. 내 기억에 그날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이야기로 보낸 것 같았어요. 다음날 아침 그는 전선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몰랐어요. 그날 아침 兵營(병영)에는 나와 陳雷가 연애한다는 포스터가 나붙고 내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여자라는 소문이 온 주둔지에 쫙 퍼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요. 게다가 일이 여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어요. 상급자들에게 몇 번 불려가서 訊問(신문)을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 陳雷와 무슨 얘기를 했는가? 陳雷가 무슨 나쁜 말을 하지 않았는가? 당시 陳雷가 黨에서 제명당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무얼 감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없는 말을 만들어 陳雷 동지를 모함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사실대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상급자에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陳雷 동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학문이 깊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내심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신문을 해 보았지만 무슨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했지요. 그래도 상급자들은 나를 처벌했습니다. 黨 小組 조장 직을 떼어버렸어요.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리벙벙한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도 가라앉았지요. 풍파를 겪은 후 나는 일체 잡념을 버리고 학습에 전념했습니다. 마침 병영 도서관 「레닌 텐트」를 관리하면서 병영의 壁報(벽보) 편집도 맡아 하는 바람에 공부하기는 좋았어요.
 
 
  야전병원에서 부상당한 陳雷와 再會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42년 나는 陳雷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전선에서는 抗日聯軍이 패전하여 많은 부상병이 야영으로 실려왔습니다. 나도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제일 나중에 실려 온 부상병이 내가 맡았던 침대에 옮겨졌습니다. 아,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陳雷, 그 사람이었습니다. 왼팔의 동맥이 끊어져 있었어요. 철사로 꼭 동여맸으나 지혈이 되지 않아 약솜을 말아 동맥에 쑤셔 넣고 여기까지 온 것이에요. 그의 팔과 손은 벌써 시퍼렇게 죽어 있었지요.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런 鬪士(투사)를 反혁명 분자라고, 타락한 地主의 후손이라고 黨에서 쫓아내다니! 이렇게 철저하고 굳센 혁명가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상처를 처치해 주었습니다. 정신이 든 陳雷 동지는 눈물을 흘리는 나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가슴속에 삼키고 눈물로써 우리의 사랑을 굳게 약속한 것입니다.
 
  1942년 5월19일, 드디어 陳雷 동지는 그의 용감한 투쟁이 공정한 평가를 받아 中共 黨籍(당적)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남자들의 병영에서 전체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그를 만나볼 것을 기대하고 미리 편지를 썼습니다. 회의 장소에 들어가서 나는 陳雷 동지가 앉았던 침대에 걸린 외투 호주머니에 몰래 써온 편지를 살짝 밀어 넣었어요. 편지는 나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黨을 믿고 민중을 믿어야 한다. 언제든지 문제는 정확히 밝혀질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 건강해야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내 걱정은 할 것 없다.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준엄한 시련 겪은 사랑은 흔들리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키우고 또 지켜왔습니다. 그처럼 준엄한 시련을 겪은 사랑은 그후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도 흔들려 본 적이 없지요. 1943년 결혼식을 올린 우리는 이미 金婚式(금혼식)을 지내고 결혼 6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陳雷 동지가 흑룡강성 省長으로 계시고 여사님이 省 民族事務委員會(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일하실 때, 우리 민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민족을 위하여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해방 후 교육분야에서 4년, 공장에서 10년, 감옥에서 5년, 노동조합에서 5년 일하다 보니 조선족과 접촉할 기회가 아주 적었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민족 사업을 맡게 되어 좀 생소합니다. 그러나 黨에서 맡겨준 일이고, 민중들의 신임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잘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우리 省의 조선족은 혁명전쟁 시기에 승리를 위하여 큰 몫을 했으며, 다른 소수 민족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나의 민족 사업은 소수민족들의 생활 향상과 산업 발전 및 문화예술 진흥으로 요약됩니다.
 
  나는 우선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 省의 조선족 마을과 허저族 호르존族, 몽골族 마을들을 거의 다 한번씩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서로 다른 생업에 따라 각각 다른 지원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소수민족 생산발전 교류대회를 열어 서로 남을 배우는 자리를 만들었지요. 결국 낙후한 소수민족들의 경우 문화수준이 높은 관리자가 없다는 사실을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소수민족지구의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우선 유능한 소수민족 간부를 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흑룡강 소수민족 간부학교를 세웠지요.
 
  학교가 준공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선 학생들을 뽑아서 그날부터 수업을 시작했어요. 관리 전공은 경제관리학교에, 정치전공은 당 학교에, 기타 학과는 다른 종합대학에 위탁하여 학교가 준공될 때까지 모두 밖에서 공부하고 모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수민족간부학교는 지금까지 많은 간부들을 양성하여 생산 일선에 내보냄으로써 소수민족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예술과 민속은 소수민족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의 골자입니다. 나는 牧丹江에 흑룡강성 조선민족 가무단을 만들고, 黑河(흑하)에다 호르존族 가무단을, 通江(통강)에는 허저族 가무단을 각각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얼빈에 대형극장 조선민족문화궁전을 지었지요. 지금도 사람들은 내가 민족종교사무위원회에 있던 시기를 소수민족 문화예술발전의 황금기라고들 하지요.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산골과 변방에 살고 있습니다. 기차를 보지 못한 아이들도 많아요. 나는 소수민족 학생들의 여름방학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우리 省의 名勝 古蹟地(명승 고적지)를 돌아보며 역사를 배우고 시야를 넓혀주었지요. 가는 길에 烈士碑(열사비)나 혁명 戰迹地(전적지)에 들러 혁명 교육도 시켰습니다. 1982년부터 10년간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일하느라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별로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문화혁명 때 부부가 함께 큰 수난
 
 
  ―여사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겠지만 문화혁명 때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문화혁명은 突發的(돌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毛澤東이 직접 일으켰기 때문인지 시작부터 그 氣勢(기세)가 대단했지요. 당시 나는 하얼빈市 제1도구공장 당위원회 서기였어요. 1966년 8월18일 내가 공장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홍위병 완장을 팔에 두른 대학생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노동자들이 제지했지요. 나는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학생들을 들어오게 했어요. 학생들은 走資派(주자파)를 반대하고 혁명적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회의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의견이 있으면 정당한 경로를 통해 제출해야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지요.
 
  그러자 학생들은 내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비방하며 문화혁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미리 준비해온 고깔모자를 내게 씌우려고 들지 않겠어요? 복도에 지키고 섰던 노동자들이 나를 둘러싸서 보호했습니다. 회의장 한가운데 내가 서 있고, 노동자들이 손에 손잡고 나를 둘러싼 圓(원)과 학생들이 나를 욕 주려고 둘러싼 또 하나의 원이 그려진 이상한 상황이었지요. 그날은 그런 대로 넘어갔습니다. 다음날 우리 공장 주위의 大字報(대자보)들은 한결같이 학생운동을 탄압한 나의 죄상을 성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省委 제1부서기 겸 省 정부 부성장 陳雷 동지는 8월23일 齊齊哈爾(제제합이)市에서 벌어진 유혈 사건을 해결하려고 출장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齊齊哈爾로 떠난 뒤 만나지 못한 陳雷 동지가 8월26일 하얼빈市 인민운동장에서 열린 성 정부 지도자 성토대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사령부를 포격하자」는 슬로건 아래 50만명의 군중이 모여 省長과 省 정부 간부들의 머리를 깎고 얼굴에 검댕이를 칠하여 演壇(연단) 위에 세워 욕을 보였습니다. 陳雷 동지의 죄목은 反혁명 분자, 주자파, 반역자, 조선 간첩 등 굵직한 것만 너댓 가지였지요. 게다가 항일 투쟁시기에 抗日聯軍 2백명을 학살했다는 터무니없는 죄상도 있었어요. 홍위병들은 앞에 쇠가 달린 가죽 혁대로 陳雷 동지를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눈에서 피가 나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연단에서 약 50m 거리에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사실을 밝혀야 한다. 군중들과 학생들이 역사를 몰라서 저런다. 오직 그 일념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단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도 감시를 받고 있던 몸입니다. 그만 홍위병 다섯 명이 나를 번쩍 들어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 공장으로 보내졌어요.
 
  나는 陳雷 동지를 만날 수도 없었고 소식조차 감감했습니다. 공장은 생산이 완전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어찌된 판국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 공장에서 小字報(소자보) 전단을 하나 주웠는데 이게 무슨 기사입니까. 「陳雷 조리돌림 참관기」라니!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은 비판받은 사람들의 목에 나무 패쪽을 걸고 화물자동차 뒤에 실어 거리를 돌며 그의 죄목을 큰 소리로 외치면서 수시로 매질을 했습니다. 그 전단에는 陳雷가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맞아서 눈이 멀었고 갈비뼈가 4대나 부러졌으며 무릎이 끊어지고 머리가 터졌다고 쓰여 있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허나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몰랐고 갈 수도 없었어요.
 
  공장의 노동자들은 중앙에서는 폭력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 지경인가 따지기 위하여 모두 省委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청원도 내지 못하고 省委를 점령한 홍위병들과 싸움만 하다가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이튿날 거리에는 李敏이 노동자들을 사주하여 야료를 부렸다는 죄목을 성토하는 대자보가 나붙었습니다. 매일 밀려드는 홍위병들을 만나느라고 집에도 한 번 들르지 못했지요.
 
 
  남편은 너무 맞아 입이 저팔계처럼 돼
 
 
  나는 陳雷 동지가 죽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 나서기로 했지요. 노동자들은 나의 안전을 염려하여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그들과 함께 가면 또 싸움이 날까 봐 나는 혼자 갔습니다. 省委의 한 보위과 간부를 통해 陳雷 동지의 가족 신분으로 그를 만나게 해줄 것을 강경하게 요구했지요. 홍위병들이 인도한 작은 방에서 오래 기다렸습니다. 陳雷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어요. 포기하고 일어서려는데 전혀 모를 사람이 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보다가 순간 저 사람이 남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陳雷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남편이 아닙니다.
 
  너무 맞아서 입은 猪八戒(저팔계)의 주둥이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쑥 나와 있고, 머리는 너댓 군데 터져서 온통 피가 말라붙었고,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했어요. 덜컹거리는 화물차에 너무 오래 꿇어앉아 무릎의 살은 다 떨어져나가고 뼈가 드러날 지경이며, 발을 거꾸로 들고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려서 발바닥도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작은 의자에 앉히고 적삼을 들치고 잔등을 보았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졌는가 살펴본 것이지요. 등은 성한 데가 없었고 검푸르게 멍들었습니다. 나는 통곡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홍위병들에게 한 시간 이상 남편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그들을 설득해보았습니다. 이 사람 몸을 보라! 항일 전쟁 때 일곱 번이나 부상을 입은 상처가 그대로 있지 않은가. 역사는 결국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가지고 간 빵이며 과일을 짓밟아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그후 나도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남편 소식은 더 이상 알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감옥에 끌려가기 전에 쪽지를 하나 써서 保姆(보모)에게 주며 기회가 있으면 남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쪽지에서 나는 남편에게 네 가지를 당부했어요. 첫째, 毛주석의 혁명노선을 믿어야 한다. 둘째, 사실대로 해야 한다. 견디기 어렵다고 없는 일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 셋째, 신체 건강을 지켜야 한다. 넷째, 절대 자살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남는 것이 곧 승리이다. 당시 많은 간부들이 정신적인 절망과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옥 속에서 나는 남편의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집에 두고 온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어느 날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맑은 날인데 내가 호수에서 쪽배를 저어가고 있었어요. 갑자기 풀밭이 나타났지요. 풀밭에 오르니 웬 이불이 펴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陳雷 동지의 이불이에요. 이불을 들추니까 남편의 시체가 있었어요. 나는 통곡했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 간수가 와서 소리쳐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꿈을 꾸면서 진짜로 울었던 것입니다.
 
  나는 陳雷 동지가 틀림없이 죽었다고 단정했어요. 슬픔에 잠겨 있는데 철창 밖에서 조리돌림을 하면서 외치는 구호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陳雷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섞여 들려왔어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지요. 그 구호는 陳雷 동지가 살아 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5년 동안 각각 감옥에 갇혀서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韓中 결혼의 이상적 커플
 
 
  李敏 여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혁명 때 남편이 광적인 홍위병들에게 당한 잔인하고 야만적인 학대를 얘기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은 잘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악몽 같은 10년을 되돌아보고 얘기한다는 것이 李여사로서는 매우 가슴아픈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여사 자신의 수감생활 5년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와 같은 호된 試鍊(시련)과 艱難(간난)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과 존경은 더욱 깊어만 갔다. 두 사람 사이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가 서로의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고 있었다. 과연 韓中(한중) 결혼의 이상적인 커플인저!
 
  중국 지도를 보면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백조의 모습과 같다. 하얼빈은 그 백조 목에 걸린 빛나는 진주라고나 할까. 이렇게 詩的 지형을 가진 중국 동북 지방에서 陳雷 부부는 아주 존경받는 유명한 커플이다. 실제로 가장 모범적인 출세한 부부라고 하겠다. 陳雷는 省長으로서, 李敏은 여성과 소수민족 문제의 선구자로서 여러 가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들 부부는 사람들의 憧憬(동경)의 대상으로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陳雷 성장과 李敏 여사와 3일간 집중 인터뷰를 마쳤다. 두 분 다 솔직하게 아는 사실을 다 말해 준 것은 틀림없다. 어느 날인가 나는 그분들 집에서 점심을 함께 들 정도로 가까워졌다. 金宇鍾 교수에 의하면 보통 사이가 아니면 외국 손님과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분들과 작별하자니 金日成 부자에 관한 대목이 좀 아쉬웠다. 혹시 수십 년 친한 우정과 의리 때문에 더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중국인들은 義理心(의리심)이 강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이유로 오랜 항일투쟁 戰友인 金日成에 대한 기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또 평양에 있는 그분들 친구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金日成 부자에 관한 완벽한 진실을 밝혀줄 가능성은 있었다. 아무리 중국이 남북한과 미묘한 관계에 있고, 그분들이 중국 공산당 평생 동지이지만, 내가 가까이서 본 두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陳雷선생은 나의 박정희 傳記를 높게 평가하면서 『박정희의 初年(초년) 인생이 毛澤東과 비슷하지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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