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김종희 회장은 격동기의 한 시대를 넘어, 한국 근대사 발전에 선명한 족적을 남겼던 경영인이다. 전란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영토 위에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화약산업을 일으킨 이래 30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 산업사에 큰 획을 남겼다.
1922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에서 태어난 현암 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직산보통학교와 성환심상소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서울의 명문 경기도립상업학교로 유학하는 등 배움에 남다른 열정이 있던 현암 회장이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일찍부터 조선화약공판과 인연을 맺으며, 장차 대한민국의 대표 기업인으로서 성장하게 될 첫 걸음을 내디뎠다. 경제 불모지가 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산업용 화약의 중요성을 깨달은 현암 회장은 1952년 부산에서 지금의 한화그룹 전신이라 할 '한국화약 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53년, 조선화약공판 인수를 시작으로 1955년엔 인천화약공장을 보수 신축해 본격적인 화약 국산화의 기틀을 다졌고, 불굴의 집념으로 국내 최초의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성공적인 화약산업을 발판 삼아 그룹 기반을 다져나가던 때에도, 현암 회장은 철저히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간산업에 매진했다. 1964년, 손해를 감수하면서 만성 적자기업이었던 신한베어링공업을 인수해 국가경제의 최대 과제였던 기계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고, 석유화학산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해 조국 근대화를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특히 전력이 부족하던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민간화력 발전소와 함께 대규모 정유공장인 경인에너지를 건설하여 사업보국의 이념을 더욱 확고히 실천해 나갔다.
단순한 기업인의 역할을 넘어 민간외교사절로서 현암 회장의 업적도 눈부셨다. 일찍부터 남다른 국제감각으로 한미친선협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고, 1967년에는 그리스 명예 총영사로 취임해 국익을 대변하는 민간사절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대 들어서는 사세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국민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3차 산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영세한 낙농업계를 지원하겠다는 대의를 품어 부도 직전의 대일유업 인수에 나섰고, 서울의 얼굴이 될만한 호텔이 없다는 말에 당시 최고급인 프라자호텔(現 더 플라자)을 지어 국내 관광산업 육성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또 1975년에는 고향 땅에 국내 최고수준의 사립명문 천안북일고를 세워 오랜 염원이었던 육영사업의 꿈을 실현하며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에도 책임을 다했다.
1977년 예기치 못했던 이리역 폭발사고는 현암 회장에게도 크나큰 시련이자 고통이었다. 하지만 기업의 존망이 위태롭던 순간에도 사재를 모두 출연하면서 의연히 사회적 책임을 다했고 결국 더 큰 성장을 이룬 현암 회장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를 신망이 두터운 ‘인간 김종희’로 기억하게 한다.
그의 나이 59세이던 1981년 지병의 악화로 영면에 들었으며 이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됐다. 2009년에는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을 수상했다.
글=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