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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특별기획]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② 대만

[편집자 주]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윤미향 및 정의기억연대 논란과 관련, "조선은 아주 집중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언론사"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2015년 하반기 특별기획으로 4차례에 걸쳐 '끝나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제하에 전세계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당시 관계자들을 만났다. 월간조선 기자들은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 현지의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을 만나 심층취재했고 마지막으로 일본을 찾았다. 당시 기사를 다시 소개한다.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② 대만

‌“위안부 문제에 젊은 사람들이 관심 가져야”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 대만, 국제위안부 기념일(8월 14일) 기념관 현판식 예정
⊙ 정부·사회단체, 피해자 치료·보호에 적극적
⊙ 대만 변호사, “공식사과 없는 보상은 피해자에 또 다른 치욕”
 
올해 12월 10일(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개관할 대만 일본군 ‘위안부’ 기념관에 전시될 유물. 대만 부녀구원회는 1990년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방문해, 기념으로 받은 선물이라고 밝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난 6월 말 대만(臺灣) 일본군 위안부 피해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타이베이시(臺北市)를 방문한 기자는 한국에서 쉽게 경험하기 힘든 더위를 느꼈다. 10분 걸으면 옷이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었다.
 
  대만의 대표적인 위안부 지원단체인 부녀구원사회복리사업기금회(婦女救援社會福利事業基金會, 이하 부녀구원회)를 찾은 날도 숨쉬기 힘든 더위를 느꼈다.
 
  날씨는 더웠지만, 타이베이시 외곽 조그만 건물 10층에 자리 잡은 부녀구원회 직원들은 활기가 넘쳤다.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 일본 언론의 잇따른 방문과 국제사회의 관심에 크게 고무된 표정이었다.
 
  광복 70주년(대만은 항일승전 70주년으로 표현)을 맞아 대만에 첫 종군 위안부 기념관이 세워질 것이라는 소식은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은 6월 3일 열린 ‘항일승전 70주년 기념 명사포럼’에서 오는 10월쯤 위안부 기념관을 완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 총통은 “기념관 설립은 항일승전을 과시하거나 누구의 허물을 들추려 함이 아니다”며 “이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기억하기 위한 목적이다”고 말했다.
 
  해당 기념관은 부녀구원회가 주도해 추진하고 있다.
 
  부녀구원회는 1988년 9월 정식 출범하여, 성매매로 팔려 나가는 여성들을 돕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구원회는 타이베이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하고 있다.
 
  기념관 등 관련 사업 추진배경에 대해 캉슈화(康淑華·여) 대표는 “대만에 위안부 할머니 가운데 이제 네 분만 남아 있다”며 “젊은 사람들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기념관을 준비 중이다”고 말했다.
 
 
  일본 사과하고 잘못 인정해야
 
부녀구원회 캉슈화(康淑華) 대표.
  캉 대표는 기자를 만나자, 일본 우경화(右傾化)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일본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베의 태도가 매우 아쉽고, 받아들일 수 없어요. 종전 70주년을 맞이해 정식으로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사과하길 바랍니다. 현재 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분 안 남아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계속 책임을 회피하면 다른 아시아 국가와 관계회복이 힘들어요.”
 
  그렇다면 기념관 사업 추진의 배경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캉 대표에게 질문했다.
 
  —부녀구원회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1년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만도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비슷한 피해 할머니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만 여성이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1992년 일본에서 나왔어요. 이를 계기로 1992년 기금회 내부에 위안부팀을 창설했지요. 피해사례를 조사하고, 피해자 치료가 목적이었습니다.”
 
  —피해자 현황은 어떻습니까.
 
  “대만에는 총 58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중 12명은 대만 원주민이었습니다. 현재 네 분이 살아 계세요. 다들 연세가 90을 넘었어요. 91~94세입니다.”
 
 
  기념관, 국제연대의 상징 될 듯
 
대만 위안부 기념관에 전시될, 피해 할머니 육성 기록(좌). 부녀구원회가 발간한 피해 사례집. 《침묵의 상흔》(우).
  부녀구원회는 위안부 기념관의 공식 개장에 앞서 8월 14일 기념관 명판을 공개하는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이날은 한국과 중국, 인도네시아, 대만, 필리핀 등의 시민단체들이 위안부의 날로 지정한 기념일이다.
 
  —기념관 설립배경은 무엇인가요.
 
  “위안부 기념관을 기획한 것은 십여 년 되었어요.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념관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또 20여 년에 걸쳐 위안부 관련 사료, 자료들을 수집해 왔는데, 보관할 장소 역시 필요했어요. 8월 14일 국제 위안부기념일에 기념관 현판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정식 개관일은 12월 10일(세계인권선언기념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설립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기념관을 기획한 지 10년이 넘었어요. 마잉주 총통이 적극적이었어요. 직접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고, 총통부(한국의 청와대)에 초대해 만찬을 같이 했어요. 마 총통은 과거 타이베이 시장 시절부터 구원회와 위안부 기념관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서 줬어요. 타이베이시 정부에서 따로 지원을 받는 것은 없어요. 다만 추후 전시회나 기타 행사가 있으면 시의 지원을 받을 예정입니다. 기업 및 민간 모금으로 운영하려 합니다.”
 
  —기념관의 위치와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장소는 현판식까지 비공개입니다. 현재 개·보수 중입니다. 타이베이 중심에 있는 건물인데, 시에서 저렴하게 임대해 줘서 개관을 준비 중입니다.”
 
  부녀구원회 관계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기념관에 전시할 유물들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생전에 만들었던 공예품, 기증 물품들이 가득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축적한 자료들이었다. 한국을 방문해, 일본 항의집회에서 입었던 ‘정신대 만행 사실인정’이라고 쓰인 옷 등 한국과의 연대(連帶)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도 많았다. 올해 말 해당 자료를 공개하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국제연대를 상징하는 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현재 생존해 있는 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 면담을 요청했다. 구원회는 네 명의 생존 할머니들 건강이 극히 좋지 않고, 상당수가 현지 원주민 출신으로 중국어 의사소통이 어려운 문제를 들어 직접 면담은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디지털 자료, 자료집 등을 통해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는 자료를 넘겨받았다. 주요 피해사실은 다음과 같다.
 
  린센충(Lin, Shen Chung)
  출생: 1927
  피해기간: 420일(1944/12~1946/02)
  피해사실: 17살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일본군에 보내져 요리와 빨래를 시킨다며 끌려갔다. 낮에는 하녀처럼 일했고, 밤에는 성노예(sex slave)로 일해야 했다. 일본군은 의료 등 안전조치를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 기간에 강간을 당해 세 번 유산(流産)했다.
  증언: “네 번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고 불행하게 마무리됐어요. 성노예가 된 이후 내 삶은 끝났어요.”
 
  차팡메이(Tsai, Fang Mei)
  출생: 1931
  피해기간: 420일(1944/06~1945/08)
  피해사실: 13살에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일 년 넘게,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 창고에서 집단강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도, 공포감을 느껴 강간당한 곳 근처를 피해 다녔다.
  증언: “나의 상처는 약으로 치료될 수 없었죠. 오직 신앙심으로 극복할 수 있었어요.”
 
  원훙쉐(Wen, Hung Shih)
  출생: 1921
  피해기간: 540일(1942/01~1943/06)
  피해사실: 21살 때 남편이 홍콩의 탄약창고 경비로 징집당했다. 남편을 찾아 홍콩으로 가려고 하다가, 성노예로 납치당했다. 일본군 장교 집에 감금되어, 낮에는 가정부로 밤에는 일본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임신해서 딸을 낳았는데, 전쟁 후 말라리아로 죽었다.
  증언: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 보라면, 못할 것 같아요.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창중메이(Chuang, Jung-mei)
  출생: 1928
  피해기간: 400일(1944~1945/12)
  피해사실: 16살 때 일본군에 끌려가 세탁 등의 노동을 해야 했다. 밤에는 성노예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처음 6명의 일본 군인으로부터 강간당했다.
  증언: “일본 정부는 나의 자존감과 육체를 더럽혔어요. 50년이 넘었지만, 고통은 계속되고 있어요.”
 
  고취란(Gao, Qiu Lan)
  출생: 1922
  피해기간: 400일(1944~1945/12)
  피해사실: 22살 때 결혼해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해, 남편이 남태평양에 징용을 떠나야 했다. 할머니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군대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녀는 군대에서 일하면, 남편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성노예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4달 후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이러한 사실을 알까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에 숨어서 지냈다. 태어난 아이는 피부병으로 두 달 만에 죽었다.
  증언: “내 몸의 반은 죽었어요. 나는 일본 정부를 증오해요. 그들은 나에게 치욕적인 고통을 안겼어요.”
 
 
  한국과 다른 대만의 역사인식
 
  부녀구원회에 따르면, 1992년 조사 당시 파악한 피해자는 총 58명이었다. 피해자들은 죽기 전까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의 상처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위안소 등 상처의 현장은 남아 있을까. 기자는 피해 유적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대만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위안부 관련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장궈밍(莊國明) 변호사로부터 “베이터우에 ‘위안소’ 건물이 남아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
 
  아직까지 위안소 건물이 남아 있다는 설명에 아마도 역사관 등으로 보존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베이터우 현장으로 향했다.
 
  대만 타이베이시 외곽에 위치한 베이터우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하다. 산기슭에 온천과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위안소 건물을 찾아 헤매던 기자는 한눈에 봐도 일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을 발견했다.
 
  해당 건물은 타이베이시가 ‘역사건물(historical site)’로 지정해 놓았다. 현재는 대만 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전통 공예품을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은 전통음식과 전통차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기자는 해당 박물관 안내 책자를 구해, 위안소 관련 내용을 찾았으나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박물관 어디에도 ‘위안소’의 흔적은 없었다. 엉뚱한 곳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시에서 설치한 유적지 안내 표지판을 발견했다. 표지판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초기 일본 제국주의 시대(1895~ 1945)에 베이터우는 온천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결과 주말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해당 건물은 일본군 장교 클럽으로 이용됐다. 가미카제(神風) 폭격대의 거처로도 이용됐다.”
 
  일본군 시설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좀 더 자세한 내력을 확인하기 위해 박물관 지배인을 찾아, 해당 시설을 위안소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물었다. 지배인은 과거 해당 시설에서 일본군의 성매매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막연히 일본군 오락시설이었고, 당시에는 성매매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답했다.
 
  결국 해당 시설은 일본군이 대만인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장소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적어 놓지 않았고, 막연히 일본 장교 클럽으로 사용하였다고 적어 놓은 것에 그치는 이유를 기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는 해당 시설 이용자에게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만인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였다. 몇몇 인터뷰로 대만인들의 생각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온천에서 성매매가 이뤄지는 것이 당연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크게 분개해야 할 역사적 인권유린 장소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국민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분명 온도차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에 대한, 대만 청년들의 생각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만의 정치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기자는 한국의 서울 명동과 비슷한 번화가인 타이베이시 시먼(西門)에서 대만 대학생들을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대만 대학에 진학한 화교(華僑) 출신들로 한국과 대만 양국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청년들이었다. 기사에 이름이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주요 발언은 이러했다.
 
  —일본에 대한 대만인들의 감정은 어떤가요.
 
  “대만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좋아해요. 대만은 한국과 같은 전세 제도가 없어요. 대부분 월세죠. 그렇다고 보증금을 크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어서, 월세를 얻을 때 세입자를 꼼꼼히 확인해요. 일본인이라면 쉽게 집을 얻어요. 일본인은 돈을 떼먹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이죠. 확실히 일본에 대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아요.”
 
  —침략의 역사, 제국주의의 역사에 대한 감정은 없나요.
 
  “오히려 개발을 해 줬다고 보는 시각이 많아요. 일본은 무력을 동원해 대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 승리로 할양(割讓) 받은 것이죠. 홍콩을 영국이 지배한 것과 비슷한 것이죠.”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피해사실을 시민들이 알고 있나요.
 
  “교과서에 관련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매우 적었어요. 대만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해요.”
 
  —특수한 상황은 무엇인가요.
 
  “대만이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때문이죠. 미국과 일본은 동맹이잖아요. 결국 일본이 대만이라는 나라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국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대만 입장에서 일본,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죠. 이 점이 한국과 달라요.”
 
 
  대만은 중국인가?
 
  확실히 대만의 정서는 한국과 차이가 있었다. 대만은 나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아가 중국에 흡수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강하다. 국가의 존립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고민의 우선순위가 한국과는 다른 것이다.
 
  대만에선 불편한 ‘질문’이 있다.
 
  우선 ‘중국에서 가장 큰 섬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극심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지난 7월 대만 현지 신문들은 대만 고등학교 학생 400여 명이 타이베이 교육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다고 보도했다. 새 교과서가 불씨가 됐다. 학생들은 새 교과서에 검은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며, 검은 우산을 들고 시위했다.
 
  기존 대만 교과서는 중국사, 대만사, 세계사를 별도의 교과서로 분리했다. 즉 기존 교과서에 따르면 ‘중국에서 가장 큰 섬은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하이난 섬이 정답이다. 그런데 새 교과서는 중국사와 대만사를 본국사(本國史)로 통합해 버렸다. 또 기존 중국으로 기술하던 표현을 ‘중국 대륙’으로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과서에 따르면, 중국에서 가장 큰 섬은 대만 섬이라고 말해야 되는 것이다.
 
  불편한 질문은 또 있다. ‘대만의 수도(首都)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대만 정치인들에게 가장 곤란한 질문이다. 막연히 ‘타이베이’라고 말하면, 곧 바로 공격이 들어온다. 대만 헌법에 의하면 수도는 대륙의 난징(南京)이다. 타이베이는 임시 수도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면 한국전쟁 당시 임시로 부산을 수도로 정했던 것과 같다. 엄연히 대만의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Republic of China)이다. 헌법에 따르면, 대륙은 수복(收復)해야 할 땅이다. 그러나 만일 대만의 수도가 난징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반발이 뻔하다. 1970년대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을 압도할 당시는 대륙 수복의 꿈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정치, 경제적으로 중국이 대만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륙 수복은 비현실적이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대만의 냉혹한 현실이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상황은 현실정치에도 이어지고 있다.
 
대만 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기술 내용

 
 
기자는 대만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특히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기술이 매우 적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역사는 교육을 통해 후세에 전해진다. 교과서 기술은 그래서 중요하다. 대만 교과서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주(駐) 타이베이 한국대표부가 조사한 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위안부 기술 내용은 이렇다.
 
  중학교 교과서
 
  ① 남일서국(南一書局) 사회 교과서(P.82)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이 속속 발발한 후, 대만총독부는 전쟁 추진을 위해 엄격한 경제, 군사 관리조치를 실시하고, 지원군 모집 및 대만인 징집을 추진하고, 한편으로는 강제적 방법을 사용하거나 부녀자들을 속이는 방식으로 이들을 모아 전쟁터로 보내서 위안부로 삼았음.
 
  ② 강헌문교(康軒文敎) 사회 교과서(P.79)
  또한, 총독부는 대만지역에서 지원병을 선발하여 남양(지금의 동남아 지역 지칭) 전구(戰區)로 보내서 일본을 위해 싸우게 했으며, 이와 더불어 대만인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삼았던바, 이들은 전화(戰火)의 희생자가 되었음.
 
  ③ 한림출판(翰林出版) 사회 교과서(P.83)
  이와 더불어 전쟁기간 동안, 일부의 대만인 부녀자들이 강제로 위안부가 되어 전화(戰火)의 희생자가 되었음.
 
 
  고등학교 교과서 기술 현황
 
  ① 한림출판(翰林出版) 역사 교과서(P.147)
  일본군은 침략전쟁을 하는 당시 군인의 부녀자 겁탈, 성병 감염 등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는 점령지역의 (주둔군) 군기 및 전력에 영향을 준바, 일본군은 군내 ‘위안소’를 설립하여, 일본, 조선 및 대만에서 사람을 징발하여 위안부로 삼았음.
  당시에 수많은 대만인 부녀자들이 일본군의 간호사, 세탁부 등 명의의 모집에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던바, 이는 당사자들에게 평생 동안의 심신의 상처를 남겼음.
 
  ② 삼민서국(三民書局) 역사 교과서(P.140~141)
  1942~1945년 동안, 전황의 악화로 징병제가 실시되었으며, 15~60세의 남성, 17~40세의 여성은 모두 병역 또는 징발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대만인들이 명령에 따라 공항 또는 방어시설 건설 공역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위안부’로 징집된 사례도 있으며, 대다수가 강제로 징집되었음.
 
  ③ 남일서국(南一書局) 역사 교과서(P.130)
  군역, 군속 및 지원병 외에도, 해군 소년공, 학도병 등이 동원되었으며, 또한 대만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으로 파견된 흔적이 있으며, 이들은 대다수 강제 또는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음.
 
  ④ 강희문화(康喜文化) 역사 교과서(P.121)
  생존자 대다수가 신체 또는 심리적 상처를 안고 돌아와 통분의 삶을 보냈으며,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군표 및 우체국 저축 또한 합리적 배상을 받지 못했음.
  또 수많은 부녀자들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으며, 이 또한 당사자들에게 평생 동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음.
 
  차기 대만 권력의 속내
 
  6월 말 기자가 대만을 찾았을 때, 택시 운전기사들이 스마트폰으로 여성 정치인의 연설을 들으며 운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녀는 누구인가. 기자의 의문은 곧 풀렸다. 방문 당시 시사주간 《타임》 아시아판 표지모델이었다.
 
  차이잉원(蔡英文·58세) 대만 민진당 주석이었다. 《타임》은 ‘차기 총통이 자신을 말하다’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2016년 1월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의 당선을 거의 확실하게 내다봤다.
 
  최근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이잉원은 40.7%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현재 여당인 국민당의 유력 총통 후보 역시 여성인 훙슈주(洪秀柱)이다.
 
  커버스토리 제목은 중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중화권 유일의 민주체제를 이끌 수 있을 전망이다(She could lead the only Chinese democracy)’라며, 중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중국 언론은 《타임》 해당 호 제목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기존 국민당 정부는 친중 노선을 취해 온 반면, 새롭게 떠오르는 민진당은 대만 독립을 주장해 왔다. 차기 정권 장악이 유력한 민진당 측은 최근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기자는 최근 차이잉원의 핵심 측근을 만나 일본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의견을 교환한 인사를 만났다. 그가 전하는 분위기는 이렇다.
 
  “차이잉원 측 핵심 측근을 만나 야스쿠니 참배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어요. 그랬더니, 그것은 일본의 국내 문제라고 말해 당황했어요. 침략의 역사로 이웃 국가들이 분노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민은 없는지)물어보니 대만 사람들은 일본 사람을 좋아해 그런 것(야스쿠니 참배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고 답변했어요. 한일 간의 최근 긴장 관계와 관련해, 왜 한국은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듯했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더라고요.”
 
 
  왜 대만은 일본을 좋아하나?
 
대만에서 역사 유물로 보존 중인 일본 유적들. 베이터우 박물관(왼쪽), 진과스 일본인 숙소(오른쪽).
  기자는 취재 기간 도중에, 대만에 남아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을 돌아봤다. 대부분의 시설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었다. 일본풍 건물뿐 아니라 신사(神社)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해당 유적지의 대만인 관광객들에게 침략의 역사가 있는데, 거부감은 없는지 물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대만인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의 대만 강점 시대 자체를 크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대만 관광청이 대만을 대표하는 10개 관광 소도시로 선정한 ‘진과스’였다. 그곳은 일본이 대만을 점령했을 당시 건설한 탄광이었다. 일본의 자원약탈 장소, 혹은 강제노역 장소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진과스 어디에도 그러한 역사의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숙소를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대만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만에서 일본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대만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 김영실 정무경제과장을 만나 이해하기 힘든 대만 정서에 대해 물었다.
 
  —대만인들은 일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만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이 일본인이에요. 청·일전쟁 이후 50년 동안 지배를 받았는데,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해석이 우리와 많이 달라요. 한국과 대만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많이 다른 것에 대해 저희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이 대만은 이주민 사회로 일본 식민지배 이전에도 스페인, 네덜란드의 식민점령 경험이 있고 일본 지배 이후에는 중국 본토로부터 이주가 계속되었다는 관점에서 일본인들을 점령자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위안소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상황은 대만인들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려해 해석해야 하는 면이 있어요. 다만 위안부 문제는 대만에서 오랜 세월 이슈화하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요. 이와 관련해, 마셜 군도에 가면 일본군에 의해 학살이 벌어진 곳에 ‘평화 공원’이 만들어져 있어요. 과거의 만행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인상이 깊은 거죠.”
 
 
  대만 역시 위안부 문제 주시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 김영실 정무경제과장.
  —대만이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볼 때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역사 문제에 대해 우리와 제기하는 방식이 다를 뿐 위안부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마잉주 총통의 개인적인 관심 표명도 상당하고요. 곧 개관할 예정인 위안부 박물관 건립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 총통이 직접 나서서 부지선정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 총통은 일본의 과거 행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일본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하되 영토 문제,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대만 정부와 한국 정부와의 공조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1992년 단교 이래로 공식적인 교류는 없으나 실질 차원에서 많은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한국과 가장 유사한 나라를 꼽으라고 하면 대만일 것입니다. 민주화와 경제발전 단계가 비슷하고 공통적으로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고 유교권에 속하다 보니 우리와 비슷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어 서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아요. 위안부도 공통의 문제이면서 서로가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보며 타산지석 또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것이죠.”
 
  —대만 정부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대만의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거대한 중국과 공생하는가입니다. 내년 1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과 야당의 가장 첨예한 대립점은 중국대륙과의 관계, 즉 양안(兩岸)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죠. 두 번째는 국제사회에의 참여인데, 20여개 국가와만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대만으로서는 다자기구, 지역기구, 그리고 양자 간 협의체 참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만의 해결책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국민들의 반은 단어 자체를 모른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드러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른다거나 무심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주로 맡고 있는 타이베이 시정부 산하 부녀구원회는 규모는 작으나 지속적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가까이에서 지원하고 있고, 그분들의 어릴 때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각 단체와 연대하여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어릴 적 꿈이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던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항공사와 협력하여 하루 동안만이라도 그 꿈을 실현해 드리는 것이죠.”
 
  —일부 대만 교과서가, ‘자원해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기술했다가 부녀구원회의 요청으로 수정한 적도 있다면서요.
 
  “대만 중·고교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 내용을 확인해 보니, 자발적 또는 자원했다는 내용은 없고 대부분은 속아서 강제로 갔다고 기술되어 있었어요.”
 
  일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은 아시아여성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Asian Women’s Fund)의 성격이다.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다. 이러한 고노담화의 약속을 구체화한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다. 해당 기금의 설립목적은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함으로써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에 관련한 문제 해결이었다.
 
  1994년 8월 무라야마 총리는 민간기금을 통해 위로금을 지급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여성기금의 주요 사업은 피해자에 대한 생활지원 사업으로, 일본 국민의 모금에 의한 위로금 1인당 200만엔 지급과 정부 예산에 의한 의료·복지 지원사업, 총리의 사과편지 전달 등이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배상을 배제한 일본만의 해결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로금 수령을 거부했다.
 
  대만은 한국과 함께, 이러한 일본의 대응에 반발해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 내는 운동을 전개해 왔다.
 
 
  한국 성과 높이 평가
 
장궈밍(莊國明) 변호사.
  가장 대표적인 인사가 장궈밍(莊國明) 변호사이다. 그는 부녀구원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그 이후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관련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소송과정을 설명하기 전에 대만의 현실을 설명했다.
 
  “대만에는 반일감정이 아예 없습니다. 그게 한국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집권 국민당은 매우 친미(親美) 노선입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넘어온 후, 미국은 대만과 일본을 묶어서 중국을 방어하려 했어요. 이러한 (정치적 이유가) 배경이 됐어요. 대만 정부는 위안부라는 이슈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을 못 느낄뿐더러 그러한 능력도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일본과의 소송에 직접 나서는 등 법률적인 측면의 국제 전문가였다. 그의 법률가적 견해를 듣고 싶어 주요 쟁점을 질문했다.
 
  —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의 노력을 평가해 주세요.
 
  “종전 70주년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세계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피해를 많이 본 국가 가운데 하나죠. 피해 국가 중 국가와 민간단체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왔어요. 그 결과 많은 성과를 얻어냈어요. 특히 한국 정부의 성과가 컸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고,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피해자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대만에도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1992년 즈음입니다. 당시 술집, 여관에 팔려나가는 어린 여성을 구제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 일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1993년에 위안부 관련 국제회의와 국제소송에 관여하게 됐어요.”
 
  —일본의 아베 정권이 고노담화를 부정하려 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요.
 
  “고노담화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책임을 인정하지만, 전쟁기간 발생했던 책임은 각국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통해 이미 법률적으로 책임을 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결과 일본의 사과, 피해자에 대한 존엄회복, 피해자 건강회복을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이미 (평화협정을 통해) 했으니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입니다.”
 
  —일본측이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보상을 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모든 법률적 배상을 다 했다는 입장인 것이죠. 평화협정(한국은 한일협정)을 통해 법률적 책임을 졌으니, 추가 배상을 위한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1995년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회를 설립한 것이죠. 한국, 필리핀, 대만 3개국 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겠다는 것이죠. 북한은 제외했습니다. 기금회는 일본 외무성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시작 당시 4억8000만 엔을 출자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도의적인 보상을 위해 모든 국민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어요. 그래서 법률적 책임을 뜻하는 ‘배상’이 아닌, 도의적 책임을 뜻하는 ‘보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죠. 즉 기금회는 법률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대만의 경우 위안부 문제는 전혀 거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청구권은 국가 대 국가의 청구권을 의미하는 것이죠. 개인 피해에 대한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은 것이죠. 국가는 피해자 개인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개인 피해 보상을 대신 청구할 자격이 없어요.”
 
 
  “일본 여성기금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치욕”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99년 일이죠. 최초는 1991년 한국이 제기했어요. 처음에는 일본 정부에 의한 해결, 즉 ‘행정적 노력’을 통해 해결하려 했으나, 일본이 여성기금회를 설립하면서 무산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입법을 통한 해결’을 시도했어요. 일본 변호사와 정치인들을 설득해, 위안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어요. 하지만 일본 국회는 보수적이라 해결되지 않았어요. 마지막 선택이 사법을 통한 해결입니다. 일본 법원은 독립적이고 수준이 높아요. 그래서 많은 기대를 걸었어요. 10건 정도 소송을 제기했는데, 모두 패소했어요.”
 
  —한국과 대만 모두 일본 측 여성기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하지 않고, 이러한 방법(여성기금)을 통해 편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또 다시 치욕을 안겨 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대만과 한국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한국은 정부가, 대만은 민간단체가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대만 정부는 앞장서서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 등을) 요구하거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있어요. 다만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처우는 대만이 더 잘하는 것 같아요. 일본 측 여성기금 수령과 별개로, 대만 정부에서 50만 대만달러(한화 1800만원)와 국민모금으로 마련한 50만 대만달러를 할머니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또한 1만5000 대만달러를 지급하고, 모든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향후 활동계획은 무엇인가요.
 
  “몇 년 안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실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일본 측은 해당 문제와 관련한 압력을 느끼지 않겠죠.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더라도 지지자들은 꾸준히 활동해야 합니다. 저희는 20년 동안 동일한 요구를 해 왔어요.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입니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만은 나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정서가 한국과 달랐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지원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지난해 8월 14일 부녀구원회 등 관련 단체는 일본 교류재단(주대만 일본대표처) 앞에서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매년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호소하는 날로, 전 세계 각지에서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아마 올해 8월 14일은 전세계의 관심이 대만에 쏠릴 전망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연대 상징이 될 기념관 현판식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유엔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며,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였다. 즉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피해를 입은 아시아 모든 국가의 문제이다. 양심 있는 대만 사회단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입력 :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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