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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美 VH1 선정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1~10위)

[阿Q의 ‘비밥바 룰라’]비틀스, 마이클 잭슨, 롤링스톤즈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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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미국의 음악전문 채널 VH1(Video Hits One)이 2010년 9월 10일 위대한 아티스트 100명(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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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록(로큰롤) 시대에 위대한 100인 아티스트"(100 Greatest Artists of the Rock Era)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혹은 "지난 60년 동안 가장 위대한 팝 스타100인"(100 Greatest Pop stars of the Last 60 Years)
1998년 발표한 리스트를 업 데이트한 순위다. 비평가와 음악산업 종사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20년 가까이가 지난 순위지만, 당대 팝 아티스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 즐겁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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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Stevie Wonder 본명은 Stevland Hardaway Morris. 1950년 5월 13일생. 미국의 가수, 작곡가, 음악가, 음반 프로듀서.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그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팝, 리듬 앤 블루스, 소울, 펑크, 록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에게 선구자이자 영향력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해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중 한 명. 25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하여 역대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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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 원더
1984년 영화 <우먼 인 레드(Woman in Red)>로 아카데미 베스트 오리지널 송을 수상한 최초의 모타운(Motown) 출신 예술가이자 두번째 흑인 음악가였다.  또 리듬 앤 블루스 명예의 전당,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다
 
유아기 때 인큐베이터의 산소 과다 공급으로 망막이 손상되어 실명한 원더는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이름의 신동으로 알려졌다.
 
이미 11세 때 모타운의 타믈라 레이블(Tamla label )과 계약을 맺었다. 1963년 싱글  "Fingertips"는 13세 때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역대 최연소 차트 1위에 올랐다.
 
원더의 성공은 1972년 《Music of My Mind》와  《Talking Book》의 발매로 ‘클래식 시대’를 시작한 후 1970년대 최고조에 달했다.  "Superstition"은 호너 클라비넷 키보드(the Hohner Clavinet keyboard) 사운드의 가장 특색 있고 유명한 예 중의 하나이다.

 《Innervisions》(1973),  《Fulfillenness' First Finale》(1974),  《Songs in the Key of Life》(1976)가 모두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면서, 원더는 프랑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동률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원더도 3집 연속으로 이 상을 받은 유일한 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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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운. 1973년 라이브 공연 모습이다.

 09 James Brown 1933년 5월 3일 生~2006년 12월 25일 歿. 미국의 소울 가수. 소울과 펑크(funk)의 대중화에 기여해 '갓파더 오브 소울(The Godfather Of Soul)'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경쾌한 반주의 곡이 다수의 힙합에 차용됨으로써 힙합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Papa's Got A Brand New Bag"(1965), "I Got You (I Feel Good)"(1965), "It's A Man's Man's Man's World"(1966) 등이 대표곡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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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08 Elvis Presley 1935년 1월 8일 生~ 1977년 8월 16일 歿. 만인이 사랑한 로큰롤 아이돌.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 20세기 미국적 욕망과 쾌락의 해방을 불러왔다는 평가다. 대표곡으로 "Heartbreak Hotel"(1956), "Hound Dog"(1956), "Love Me Tender"(1956), "Jailhouse Rock"(1957), "Burning Love"(1972) 등이 있다.
 
 07 Prince 1958년 6월 6일 生~ 2016년 4월 21일 歿. 생전 프린스는 천재 뮤지션으로 통했다. 생전 주류 음악계에 반기를 들었고 언론과도 불편한 관계였다. 그가 사망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은 속보로 “"키스(Kiss)"와 "퍼플 레인(Purple Rain)"과 같은 노래로 80년대 음악을 규정하고, 창조적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음반업계에 반항했던 프린스가 목요일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전 미(美) 대통령은 프린스의 광팬(Huge Fan)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비밀리에 백악관으로 불러 ‘극비쇼(A Top Secret Show)’를 가졌을 정도다. 프린스의 사망 소식을 듣자 오바마는 “그의 사운드와 재능에 많은 아티스트들이 영향 받았고 탄도의 궤적처럼, 그리고 뚜렷하게, 많은 사람을 어루만졌다”고 애도했다.
 
기자의 기억으로, 프린스가 TV에 등장할 때면 신비주의 연금술사처럼 드라이아이스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항상 일렉트릭 기타를 어깨에 메고 무대에 올라 면도날 같은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 모습은 천재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케 했다. 칼칼한 기타 소리만큼이나 가냘프고 날카로우며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파워풀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사생활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시절, 부모의 양육 방식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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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프린스는 1958년 6월 6일 미국 미네소타 주(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프린스 로저스 넬슨(Prince Rogers Nelson)’이다. 군말이지만, 58년 개띠 뮤지션 중에는 마돈나(8월 16일생), 스티비 원더(5월 14일생)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인물로 낮에는 공장일을 했고, 밤에는 재즈 댄스밴드에서 연주했다. 프린스의 아버지 존 넬슨은 프린스가 〈웬 도브스 크라이(when doves cry)〉에서 묘사했듯 난폭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내를 때리곤 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부모는 프린스가 7살 때 갈라서고 말았다. 이혼한 부모가 아들에게 남겨준 것이라곤 낡은 피아노 한 대였다. 프린스는 내성적인 성격이 더욱 굳어졌고 점점 피아노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후 숙모 집에서 자랐는데 혼자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교 시절, 몇몇 밴드(샴페인)를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자 뉴욕행 기차에 오른다. 데뷔 앨범 ‘For You’를 발표할 당시 프린스 나이는 18살. 1인 밴드처럼 기타와 드럼, 베이스에다 노래까지 불러 음반 제작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사망할 때까지 32장의 정규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했고, 그중 6집에 실린 《퍼플 레인(Purple Rain)》은 세계적인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동명의 영화 주제곡으로, 영화는 무명 그룹사운드의 애환을 담았다. 사운드트랙 앨범 《Purple Rain》(1984년 작)은 마이클 잭슨이 참여한 잭슨즈(Jacksons)의 ‘빅토리 투어’가 시작될 무렵 발매됐다. 당시 앨범 차트에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앨범 《Born In The USA》가 1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예상을 깨고 1위에서 끌어내렸다. 1996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1300만 장, 전 세계적으로 20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싱글 "웬 도브스 크라이" 역시 스프링스턴의 "댄싱 인 더 다크(Dancing In The Dark)"를 제치고 싱글 차트 1위로 올랐다.
앨범 《Purple Rain》은 프린스의 개성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기본 음악 방향은 그가 지향해 왔던 크로스오버 계열에 속한다. 독특한 목소리와 더불어 펑크의 체취가 팝적인 선율과 뭉쳐져 음악적 완성을 이뤄 냈다는 평가다. 프린스는 미국 팝 음악계에 가장 권위 높은 ‘그래미 어워드’를 7차례나 수상했고 2004년에는 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100인’ 중 27번째 인물로 등재됐다.

그는 나이가 무색케 할 만큼 장르를 파괴하며 음악적 개성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그의 개성은 백인 중심의 음반시장에 저항하는 것처럼 비칠 만큼 미국 주류 팝시장에서 외면당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쩌면 대중 친화적인 기호에 철저하게 저항했으나 그렇다고 전위예술가처럼 ‘파괴’를 양식화하지 않았다. 철저히 세속적이면서 세속적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퍼플 레인’은 이미 팝팬 사이에 명반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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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06 Jimi Hendrix 지미 헨드릭스는 단 세 장의 스튜디오 음반과 한 장의 라이브 음반으로 새로운 록의 시대를 개척한 뮤지션.

그는 스톡홀름 공연에서 이(빨)로 기타를 치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미국 국가를 변주하는 등 놀랍고도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그는 관객을 만족시키려고 애쓰기보다 자신을 과감하게 내던질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을 갈망했기에 장르를 넘어 음악으로, 예술로 혹은 다른 세계로 그의 관심과 목표는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1942년 시애틀에서 정원사인 아버지와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고교 퇴학 후 입대한 공수부대원 시절, 그러나 부상을 입고 전역하여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를 따라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66년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Noel Redding)과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을 만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The Jimi Hendrix Experience)’를 결성했다.
 
 1967년에 데뷔 음반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하여 음악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았고, 같은 해 두 번째 음반 《Axis: Bold as Love》을 통해 뛰어난 명성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1968년에 세 번째 음반 《일렉트릭 레이디랜드Electric Ladyland》를 끝으로 밴드는 해체했다.

이후 오랜 친구인 버디 마일스(Buddy Miles), 빌리 콕스(Billy Cox)와 함께 ‘밴드 오브 집시스Band of Gypsys’를 결성하여 동명의 라이브 음반을 발표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과 아일오브와이트 페스티벌에서 역사적인 뮤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성공 이후 지미 헨드릭스는 전쟁과 인종 갈등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가족을 걱정하고 휴머니즘을 옹호하는 등 성숙한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약물 소지 혐의로 꾸준히 구설수에 올랐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해체 이후에는 다소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 9월 18일, 영국 런던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불명의 원인으로 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쓰고 최민우가 옮긴 《지미 헨드릭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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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05 Bob Dylan 밥 딜런(1941년 5월 24일 ~ )은 미국의 작곡가, 가수, 화가, 작가이다.  지난 2016년 포크록 가수인 밥 딜런(Bob Dylan· 1941~)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 왔다”고 했지만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불문학자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문학이라는 큰 배가 타이타닉호가 돼 가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
 
기자는 그의 노랫말을 여러 편 찾아보았다. 대중가요에서 볼 수 없는 표현, 단어, 낯선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도 반전(反戰)과 평화 같은 메시지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는 듯한 초현실주의 느낌이 묻어 났다. 〈A hard rain's gonna fall〉도 마찬가지다. ‘… 뚝뚝 떨어지는 피로 얼룩진 검은 강줄기, 방 가득 피범벅이 된 쇠망치를 들고 있는 사내들과 물에 젖은 하얀 사다리, 혀가 찢어진 1만명의 수다쟁이들, 어린아이들 손에 들린 총과 날카로운 칼을 보았다 …’는 노랫말은 보통의 대중가요에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20세기 중반 이후 어느 시인도, 어느 대중가수도 밥 딜런만 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시도 딜런의 히트곡만큼 불리지 않았고 어떤 노래도 그보다 리메이크된 노래는 드물었다. 그의 노랫말이, 시라는 장르에 편입될 수 있다면, 20세기 밥 딜런만큼 불린 시도 없을 것이다.
 
사실 시는 노래다. 내재율·외형률 같은 율격을 운명적으로 지닌다. 고대 사회에서 모든 시는 노래였다. 가령 호머(Homer)의 서사시들은 원래 악기 연주가 함께 구술로 낭송됐지만 현재 우리는 텍스트만 접한다. 구약성서의 〈시편〉이나 〈애가〉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의 노랫말이다. 〈청산별곡〉 〈가시리〉 같은 속요(俗謠), 즉 고려가요나 3·4조의 음수율과 3장6구, 45자 안팎으로 만들어진 시조도, 과거엔 노래로 불리다가 문자로 남았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시와 대중음악은 문학적 추구와 음악적 추구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결합된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구술 예술(oral arts)과 문자 전통(literary traditions) 차이를 밥 딜런이 극복했을까. 극복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이미 20대부터 노인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밥 딜런은 1960년대에 등장했다. 그 무렵, 미국의 포크음악은 한창 대중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대학가는 "Tom Booley"의 킹스턴 트리오나 "Greenfields"의 브러더스 포가 등장,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딜런은 일찍이 리틀 리처드의 로큰롤, 행크 윌리엄스의 컨트리, 우디 거스리의 철학에 빠졌으며, 특히 거스리는 그의 우상이었다. 당대 거스리는 몰락한 농부와 뜨내기의 비극을 노래에 담은 저항가수이자 사회비평가, 부상당한 전쟁영웅, 방랑자였다. 딜런의 초기 성공은 거스리의 철학을 잇고 있었다.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 "Like a rolling stone", "Knocking on heaven's door〉, "Visions of Johanna", "Mr. tambourine man" 등은 그의 음악을 따르는 수많은 모방자와 또다른 창조자를 탄생시켰다.
딜런의 노래와 노랫말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시인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표방한 가수들까지 시인의 지위를 갖게 만들었다. 존 바에즈, 레너드 코언이 대표적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민기,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 〈작은 연못〉 같은 노래는 밥 딜런의 포크정신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딜런의 노래는 1970~80년대 당시 한국의 민주화와 20~30대 한국인의 현실참여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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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스

 04 Rolling Stones 1962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록 밴드. 록 음악의 역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활동 중인 가장 위대한 록 밴드. 약 2억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고 데뷔 이래 수익은 거의 9000억 원에 달한다. 비거 뱅 투어(Bigger Bang Tour)는 단독공연 최다 수익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197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면서도 서던 록이나 소울, 글램 록, 댄스, 뉴 웨이브 등의 요소를 포함시킨 작품이 많다. 이름은 시카고 블루스의 거장 머디 워터스의 노래 "Rollin' Stone"을 기념하여 브라이언 존스가 이름지었다.
 
2008년 《빌보드》지는 핫 100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롤링 스톤스는 10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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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

 03 Led Zeppelin 세상에서 가장 헤비한 사운드를 구사한 밴드. 미국 블루스 록과 영국 포크가 제플린 사운드의 양축이었지만 장르를 가지리 않는 그들의 왕성한 음악적 식욕은 단순한 록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들의 음반에는 동양적 선율, 서정적인 포크(컨트리) 편곡, 미국 서부 사이키델릭, 펑키 비트 및 레게 리듬, 나아가 재즈적인 즉흥음악까지 확인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의 음반 판매고는 전 세계적으로 2억 장 내지 3억 장으로 추산된다. 1억 장 이상이 미국음반산업협회(IAA) 판매 인증을 받아 제플린은 미국에서 2번째로 음반을 많이 판 밴드가 됐다. (정유석이 쓴 《레드제플린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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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02 Michael Jackson  1958년 8월 29일 生 ~ 2009년 6월 25일 歿. 팝의 황제는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 캐서린 잭슨과 제철소를 다니며 그룹 펠콘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 조 잭슨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친척들과 형제들로 이루어진 ‘잭슨5’와 후의 ‘잭슨즈’에서 활동했고, 1979년 첫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했다. 그 후 《Thriller》(1982), 《Bad(1987)》,《Dangerous》(1991),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995)』 등의 앨범을 출시하였다.

이 중 《Thriller》는 전 세계적으로 1억 400만 장이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앨범들은 현재까지 7억 50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또한 그래미 시상식에서 13개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노래 "Billie Jean"은 ‘문워크(Moon Walk)’라 불리는 안무를 유행시킨 히트곡이다. 2001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으며, 2002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01 The Beatles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은 비틀스에서 주로 보컬과 리듬 기타를 맡으면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오노 요코와 유대하면서 자신의 뛰어난 음악성을 드러냈다. 특히 솔로 활동 중에는 평화 운동, 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2008년 《롤링스톤》지에서 뽑은 역대 최고의 가수 순위에서 당당히 5위에 오른 바 있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1942~)는 비틀스에서는 주로 보컬과 베이스를 맡았다. 솔로 활동 중에도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팀 동료인 존 레논과 함께 팝 역사상 최고의 작곡 콤비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솔로 활동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비틀스 멤버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간 인물이다.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은 비틀스의 리드 기타리스트. 폴과 존 콤비에 가려 팀 내에서 큰 빛을 보진 못한 편이지만 비틀스 해체 후 명곡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멤버들과 함께 인도여행을 다녀오면서 인도 문화와 힌두교를 적극 수용했고, 그 후 그의 음악과 삶은 인도 철학 속에서 호흡했다.
 
링고 스타(Ringo Starr, 1940~)는 본명은 리처드 스타키(Ricahrd Starkey). 드럼을 연주했지만 리드 보컬을 맡기도 했다. 낙천적이고 유연한 성격으로 팀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비틀스 활동 중에 연기 활동을 병행하면서 숨은 끼를 발산하기도 했고, 팀 해체 후에는 솔로 가수로 나서 지금까지도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비틀스가 직접 쓰고 강동구, 강은진, 고영탁이 옮긴 《비틀스 앤솔로지》 중에서)
 

입력 :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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