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16일 사망한 정두언 전 의원은 생전 수많은 인터뷰와 어록, 기고를 남겼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의 어린시절과 초기 공직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 전 의원이 정치 초년병 시절 <월간조선>에 보내온 인생 이야기를 다시 게재한다. <월간조선> 2001년 7월호에 '鄭斗彦씨의 「작은 自敍傳」'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내용이다. 당시 한나라당 서대문을 지구당위원장으로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한울)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던 그는 개인사를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내가 써서 보내 주겠다"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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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全校 2등
나는 1957년 지금은 청와대 춘추관이 들어선 종로구 삼청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군수였던 할아버지가 병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열네 살 때 돌아가시자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광복 후 고향인 전남 광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결혼 후 무작정 상경하다시피 서울로 올라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도로 공사장 잡부 일 등 별의별 일을 다해 가며 서울에 정착했고,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던 사촌 형의 운전기사로 들어가면서 삼청동에 살게 됐다.
삼청 국민학교 4학년 때 경무대 경비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건물이었던 집이 헐리게 돼, 그 후 몇 달 동안 그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버티다가 결국은 신촌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신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서 당구장을 하며 살게 됐는데 그 덕분에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 당구 실력이 200에 도달, 혼자 온 손님의 파트너를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전학 간 창서 국민학교에서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에게 꿇리지 않으려고 한 학기 내내 싸움판을 벌이다가 결국은 싸움 전교 1위와 맞붙게 됐다. 수십 명의 급우들이 결승전을 보려고 몰려 왔는데, 고아원 출신으로 나이도 두세 살 많았던 그 싸움왕은 나를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겁에 질려 있던 나에게 『우리 싸우지 말고 네가 싸움 2등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지켜주겠다』고 해 나는 흔쾌히 그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골목길을 걸어 나오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반쯤에 중학교 무시험 발표가 났는데 全校 석차 1, 2위를 하며 경기 중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던 나는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 이 발표가 그리 섭섭하지 않았다.
추첨으로 배문 중학교에 들어가, 팝송을 무지하게 많이 불렀다. 지금 영화나 광고방송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팝송들이 대개 그때 나왔던 것들인데 아직도 가사를 다 외우고 있을 정도다. 연습장소가 주로 화장실이었는데 화장실에 한번 들어가면 30분에서 1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나와 그때 이미 치질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全校 3등으로 졸업하고 시험을 쳐 경기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장안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 들어가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를 펴기가 힘들었다. 뻑적지근한 집안 출신들에게 기가 죽어, 1학년 내내 건달노릇을 하며 지냈고, 2학년 때는 그룹 사운드들과 어울리며 돌아다녔다. 3학년 때도 응원단장 한다고 춤 배우러 다니다가 결국 서울대 입시에서 낙방했다.
성균관大에 입학했다가 재수를 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갔다. 지금의 법대, 사회대, 경영대가 모두 묶여 있었는데 2학년 때 과배정을 1학년 성적으로 했다. 1학년 때도 지극히 공부를 안 한 나는 법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드리지 못하고 무역학과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공부와는 담을 쌓고 그룹 사운드와 술, 그리고 연애질로 당시 사복 경찰이 학교 내에 상주하는 암울한 유신 시절을 보냈다.
체제에 저항해 온 몸을 투신할 용기는 끝내 갖지 못했고, 데모하다 감옥에 가거나 제적당한 친구들에게 엄청난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私(사)기업체는 어느 개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 결국 考試를 보는 길이 남아 있었다.
막상 공부란 걸 해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밤늦게 도서관을 뒤로 하고 학교 문을 나설라치면 이게 바로 대학생활의 진수로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잘못된 독재체제의 한 귀퉁이로 진입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이듬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考試 합격 후 정무장관실에서 한 일은 의자 나르기 등 허드렛일
1981년 정무제2장관실로 배치를 받았다. 경제를 전공했기에 남들도 좋다고 하는 경제부처에 가고 싶었는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지원순위에서 밀리는 군사문화의 잔재 때문에 갈 수 없었다.
그나마 정무제2장관실은 당시 2인자 소리를 듣던 盧泰愚(노태우)씨가 장관이었던 탓에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단 한 자리만 뽑는 것이어서 동기들은 지원을 망설였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배짱으로 밀어붙였는데 결국 나 혼자만 지원했기에 無血入城(무혈입성)했다.
그러나 이것이 평범하지 않은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단초가 된 것 같다.
정무장관실은 직원이 30명도 안 되는 작은 조직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주로 복사, 팩스 보내기, 회의 준비를 위한 의자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考試에 합격하고 나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던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 중요한 일을 하게 되겠지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는 20년 후 공직을 마칠 때까지 결국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체육부가 신설되면서 盧泰愚씨가 체육부 장관이 됐다. 이에 따라 정무제2장관실은 없어지고 모든 직원이 체육부로 옮겨가게 되면서, 나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학교 다닐 때부터 제일 못하던 체육을 담당하게 됐다. 참 싫었다.
어디 가서 체육부에 있다고 하면, 무슨 신문사 체육부냐는 질문을 자주 받게 돼 너무 짜증이 났다.
그러던 중 입대 영장이 나왔다. 행정고시 출신은 장교로 가게 돼 있었는데 사병에 지원했다. 복무 기간이 짧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이왕 군대에 가서 고생할 거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겪는 길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월 10일, 네 살 밑의 친 동생과 한 날 한 시에 같은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으로 내려갔다. 수용연대에 있는 3일 동안 동생은 옆 자리에 곤히 잠든 형 때문에 계속 불침번을 서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공무원을 하다 왔으니 육군본부 정도에 떨어지겠거니 생각했지만 강원도 양구까지 가서 힘든 군대 생활을 했다. 제대 후 체육부로 복귀해 올림픽지원총괄업무를 맡았는데 여전히 적성에 안 맞았다. 국무총리실에 청소년 대책반이 신설되면서 그곳에 있던 후배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와, 1985년 1월 총리실로 옮겨가게 됐다. 청소년대책반에서 일 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과거에 문제 청소년이었으니 누구보다도 잘 할 것이라고 격려해 줬다.
『영화배우가 돼 세상을 조롱해 주자』
당시 제5공화국 시절 공무원으로서 민주화 투쟁 경력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다가 동기생 하나와 함께 퇴근을 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금주의 교훈란을 보는데, 거기에 당시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어느 행사에 가서 훈시를 한 내용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순간 동기생과 내 눈이 마주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교훈을 잡아 떼 박박 찢은 다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도망쳤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경력이다.
그러다가 1987년, 드디어 全斗煥 정권의 마지막 해가 왔다. 온 국민이 그랬듯 공무원들도 모두 5共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민주 세상이 온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4·13 호헌조치가 내려졌다. 숨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더 이상 공무원 하기가 싫어졌다. 더 이상 그들을 권력자로 모신다는 것은 비참 그 자체일 뿐이었다.
심각한 고민 끝에 공직을 내던질 결심이 섰다. 그러나 죽어도 곱게 죽지 않는다고 「4·13 호헌 결사 반대」라고 쓴 현수막을 정부종합청사 옥상에서 길게 늘어뜨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행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옥상까지의 운반 자체가 난제였고,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확인됐고, 동조자를 끌어들일 재주도 없어 몇 날 며칠의 고민 끝에 포기를 했다.
그렇다면 사표를 내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던 영화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다, 영화배우가 돼 세상을 조롱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KBS에서 기획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를 공모하겠다는 공고가 나와 1주일 휴가를 내고 응시했다. 서류 전형, 면접, 카메라 테스트, 연기 테스트, 최종 면접 순의 전형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 명을 제치고 4단계까지 통과했다.
최종 면접을 남겨둔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니, 온 가족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로부터 나의 탈선에 대한 제보를 받은 아내가 친가와 처가 부모들을 모시고 농성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양가 부모들의 집요한 설득과 아내의 눈물겨운 협박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어차피 정치를 시작한 마당에 그때 탤런트를 했더라면 이미 국회의원이 돼 있을 게 아닌가? 훗날 아내는 그때 왜 그렇게 반대를 했냐고 하니까 다른 여자하고 키스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출마, 낙선, 머리를 싸매고…
그 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 노릇을 3년 가까이 하다가 보스가 사무실에서 순직하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미국으로 2년 기간의 연수를 가게 돼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정책학 석사를 땄다.
미국에서의 2년은 이상한 얘기지만 지금까지도 향수로 남아 있다. 考試공부할 때 이상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여행도 많이 했으며, 가족 간의 관계를 再정립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복귀해, 교통업무와 정책업무를 맡아보다가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기게 됐다. 이후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을 하다가 2001년 초에 퇴직했다.
비서실에서는 주로 청와대, 안기부, 경찰, 검찰, 국회와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주로 정치와 행정이 겹치는 일들을 했다. 李會昌 총재와는 정무 비서관으로 만났다. 불과 4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신명나게 일을 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지난 4·13 총선 직전 李총재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공직사퇴 시한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표를 내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몇 달만 더 있으면 연금 대상자가 될 수 있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한 달 반 정도의 선거운동 끝에 지금 산자부 장관을 하는 張在植(장재식) 의원에게 2000여 표 차이로 졌다. 선거 후에 모두가 3일 만 더 있어도 이겼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아쉬운 선거였지만, 당선과 낙선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낙선 후 한 달 가까이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다.
집 사람은 역시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고, 남편을 위로하다가 안 되니까 『당신, 그런 사람밖에 안 되느냐』고 야단까지 쳤다. 어느 날 일어나 밖에 나가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사람들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대단하다, 실제로는 당신이 이긴 선거다, 다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용기를 줬다.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용기를 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게 됐다.
책(<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편집자주)을 써내고 나서 받은 질문 중에 공무원 사회를 비판했는데, 당신은 제대로 잘 했느냐는 것이 제일 많았다. 잘했다 못했다 라는 대답보다는, 싫든 좋든 주어진 일은 충실히 해놓고 비판도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불만부터 늘어놓는 사람을 나는 경멸한다. 자기가 몸 담았던 조직을 비난할 수 있느냐는 항의도 받았다. 그런 항의를 한 사람은 필경 책을 읽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격려 전화를 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책은 공직 실태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공직사회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인 목소리들을 대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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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7년 지금은 청와대 춘추관이 들어선 종로구 삼청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군수였던 할아버지가 병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열네 살 때 돌아가시자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광복 후 고향인 전남 광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결혼 후 무작정 상경하다시피 서울로 올라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도로 공사장 잡부 일 등 별의별 일을 다해 가며 서울에 정착했고,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던 사촌 형의 운전기사로 들어가면서 삼청동에 살게 됐다.
삼청 국민학교 4학년 때 경무대 경비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건물이었던 집이 헐리게 돼, 그 후 몇 달 동안 그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버티다가 결국은 신촌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신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서 당구장을 하며 살게 됐는데 그 덕분에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 당구 실력이 200에 도달, 혼자 온 손님의 파트너를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전학 간 창서 국민학교에서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에게 꿇리지 않으려고 한 학기 내내 싸움판을 벌이다가 결국은 싸움 전교 1위와 맞붙게 됐다. 수십 명의 급우들이 결승전을 보려고 몰려 왔는데, 고아원 출신으로 나이도 두세 살 많았던 그 싸움왕은 나를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겁에 질려 있던 나에게 『우리 싸우지 말고 네가 싸움 2등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지켜주겠다』고 해 나는 흔쾌히 그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골목길을 걸어 나오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반쯤에 중학교 무시험 발표가 났는데 全校 석차 1, 2위를 하며 경기 중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던 나는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 이 발표가 그리 섭섭하지 않았다.
추첨으로 배문 중학교에 들어가, 팝송을 무지하게 많이 불렀다. 지금 영화나 광고방송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팝송들이 대개 그때 나왔던 것들인데 아직도 가사를 다 외우고 있을 정도다. 연습장소가 주로 화장실이었는데 화장실에 한번 들어가면 30분에서 1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나와 그때 이미 치질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全校 3등으로 졸업하고 시험을 쳐 경기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장안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 들어가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를 펴기가 힘들었다. 뻑적지근한 집안 출신들에게 기가 죽어, 1학년 내내 건달노릇을 하며 지냈고, 2학년 때는 그룹 사운드들과 어울리며 돌아다녔다. 3학년 때도 응원단장 한다고 춤 배우러 다니다가 결국 서울대 입시에서 낙방했다.
성균관大에 입학했다가 재수를 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갔다. 지금의 법대, 사회대, 경영대가 모두 묶여 있었는데 2학년 때 과배정을 1학년 성적으로 했다. 1학년 때도 지극히 공부를 안 한 나는 법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드리지 못하고 무역학과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공부와는 담을 쌓고 그룹 사운드와 술, 그리고 연애질로 당시 사복 경찰이 학교 내에 상주하는 암울한 유신 시절을 보냈다.
체제에 저항해 온 몸을 투신할 용기는 끝내 갖지 못했고, 데모하다 감옥에 가거나 제적당한 친구들에게 엄청난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私(사)기업체는 어느 개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 결국 考試를 보는 길이 남아 있었다.
막상 공부란 걸 해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밤늦게 도서관을 뒤로 하고 학교 문을 나설라치면 이게 바로 대학생활의 진수로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잘못된 독재체제의 한 귀퉁이로 진입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이듬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考試 합격 후 정무장관실에서 한 일은 의자 나르기 등 허드렛일
1981년 정무제2장관실로 배치를 받았다. 경제를 전공했기에 남들도 좋다고 하는 경제부처에 가고 싶었는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지원순위에서 밀리는 군사문화의 잔재 때문에 갈 수 없었다.
그나마 정무제2장관실은 당시 2인자 소리를 듣던 盧泰愚(노태우)씨가 장관이었던 탓에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단 한 자리만 뽑는 것이어서 동기들은 지원을 망설였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배짱으로 밀어붙였는데 결국 나 혼자만 지원했기에 無血入城(무혈입성)했다.
그러나 이것이 평범하지 않은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단초가 된 것 같다.
정무장관실은 직원이 30명도 안 되는 작은 조직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주로 복사, 팩스 보내기, 회의 준비를 위한 의자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考試에 합격하고 나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던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 중요한 일을 하게 되겠지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는 20년 후 공직을 마칠 때까지 결국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체육부가 신설되면서 盧泰愚씨가 체육부 장관이 됐다. 이에 따라 정무제2장관실은 없어지고 모든 직원이 체육부로 옮겨가게 되면서, 나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학교 다닐 때부터 제일 못하던 체육을 담당하게 됐다. 참 싫었다.
어디 가서 체육부에 있다고 하면, 무슨 신문사 체육부냐는 질문을 자주 받게 돼 너무 짜증이 났다.
그러던 중 입대 영장이 나왔다. 행정고시 출신은 장교로 가게 돼 있었는데 사병에 지원했다. 복무 기간이 짧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이왕 군대에 가서 고생할 거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겪는 길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월 10일, 네 살 밑의 친 동생과 한 날 한 시에 같은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으로 내려갔다. 수용연대에 있는 3일 동안 동생은 옆 자리에 곤히 잠든 형 때문에 계속 불침번을 서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공무원을 하다 왔으니 육군본부 정도에 떨어지겠거니 생각했지만 강원도 양구까지 가서 힘든 군대 생활을 했다. 제대 후 체육부로 복귀해 올림픽지원총괄업무를 맡았는데 여전히 적성에 안 맞았다. 국무총리실에 청소년 대책반이 신설되면서 그곳에 있던 후배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와, 1985년 1월 총리실로 옮겨가게 됐다. 청소년대책반에서 일 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과거에 문제 청소년이었으니 누구보다도 잘 할 것이라고 격려해 줬다.
『영화배우가 돼 세상을 조롱해 주자』
당시 제5공화국 시절 공무원으로서 민주화 투쟁 경력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다가 동기생 하나와 함께 퇴근을 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금주의 교훈란을 보는데, 거기에 당시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어느 행사에 가서 훈시를 한 내용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순간 동기생과 내 눈이 마주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교훈을 잡아 떼 박박 찢은 다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도망쳤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경력이다.
그러다가 1987년, 드디어 全斗煥 정권의 마지막 해가 왔다. 온 국민이 그랬듯 공무원들도 모두 5共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민주 세상이 온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4·13 호헌조치가 내려졌다. 숨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더 이상 공무원 하기가 싫어졌다. 더 이상 그들을 권력자로 모신다는 것은 비참 그 자체일 뿐이었다.
심각한 고민 끝에 공직을 내던질 결심이 섰다. 그러나 죽어도 곱게 죽지 않는다고 「4·13 호헌 결사 반대」라고 쓴 현수막을 정부종합청사 옥상에서 길게 늘어뜨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행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옥상까지의 운반 자체가 난제였고,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확인됐고, 동조자를 끌어들일 재주도 없어 몇 날 며칠의 고민 끝에 포기를 했다.
그렇다면 사표를 내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던 영화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다, 영화배우가 돼 세상을 조롱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KBS에서 기획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를 공모하겠다는 공고가 나와 1주일 휴가를 내고 응시했다. 서류 전형, 면접, 카메라 테스트, 연기 테스트, 최종 면접 순의 전형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 명을 제치고 4단계까지 통과했다.
최종 면접을 남겨둔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니, 온 가족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로부터 나의 탈선에 대한 제보를 받은 아내가 친가와 처가 부모들을 모시고 농성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양가 부모들의 집요한 설득과 아내의 눈물겨운 협박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어차피 정치를 시작한 마당에 그때 탤런트를 했더라면 이미 국회의원이 돼 있을 게 아닌가? 훗날 아내는 그때 왜 그렇게 반대를 했냐고 하니까 다른 여자하고 키스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출마, 낙선, 머리를 싸매고…
그 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 노릇을 3년 가까이 하다가 보스가 사무실에서 순직하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미국으로 2년 기간의 연수를 가게 돼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정책학 석사를 땄다.
미국에서의 2년은 이상한 얘기지만 지금까지도 향수로 남아 있다. 考試공부할 때 이상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여행도 많이 했으며, 가족 간의 관계를 再정립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복귀해, 교통업무와 정책업무를 맡아보다가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기게 됐다. 이후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을 하다가 2001년 초에 퇴직했다.
비서실에서는 주로 청와대, 안기부, 경찰, 검찰, 국회와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주로 정치와 행정이 겹치는 일들을 했다. 李會昌 총재와는 정무 비서관으로 만났다. 불과 4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신명나게 일을 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지난 4·13 총선 직전 李총재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공직사퇴 시한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표를 내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몇 달만 더 있으면 연금 대상자가 될 수 있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한 달 반 정도의 선거운동 끝에 지금 산자부 장관을 하는 張在植(장재식) 의원에게 2000여 표 차이로 졌다. 선거 후에 모두가 3일 만 더 있어도 이겼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아쉬운 선거였지만, 당선과 낙선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낙선 후 한 달 가까이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다.
집 사람은 역시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고, 남편을 위로하다가 안 되니까 『당신, 그런 사람밖에 안 되느냐』고 야단까지 쳤다. 어느 날 일어나 밖에 나가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사람들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대단하다, 실제로는 당신이 이긴 선거다, 다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용기를 줬다.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용기를 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게 됐다.
책(<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편집자주)을 써내고 나서 받은 질문 중에 공무원 사회를 비판했는데, 당신은 제대로 잘 했느냐는 것이 제일 많았다. 잘했다 못했다 라는 대답보다는, 싫든 좋든 주어진 일은 충실히 해놓고 비판도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불만부터 늘어놓는 사람을 나는 경멸한다. 자기가 몸 담았던 조직을 비난할 수 있느냐는 항의도 받았다. 그런 항의를 한 사람은 필경 책을 읽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격려 전화를 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책은 공직 실태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공직사회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인 목소리들을 대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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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간조선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