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 항소심 공판에서 재판부가 입장을 바꿔 검찰의 일방적인 국제 사법공조 진행을 받아들였다. 국제사법공조는 삼성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송금 받은 미국 로펌 ‘에이킨검프’를 상대로 한 사실조회를 위해 미국 사법당국과 공조하는 절차다.
10월 21일 속행된 공판에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 정준영)는 변호인 측 의견을 제외한 검찰의 일방적인 국제사법공조 진행이 검찰의 입증활동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무기대응의 원칙’(양 당사자가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원칙) 상, 국제사법공조 질의사항에 변호인 측 의견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기존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앞서 검찰은 삼성이 에이킨검프와 계약을 맺고, 송금한 금액이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자금지원이라며 뇌물 수수 혐의로 이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직접 자금을 수수한 에이킨검프 및 그 중계자 역할을 한 김석한 전 에이킨검프 변호사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원심 재판부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무시하고 일치되지 않은 두 핵심증인의 진술을 근거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이 신원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가 국민권익위에 제출한 에이킨검프의 인보이스(송장·送狀) 사본을 증거로 제출하고 공소사실을 추가하면서 다시 에이킨검프에 대한 사실조회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 과정에서 추가 제출된 인보이스 내용만을 국제사법공조를 통해 입증해야 한다는 검찰의 입장과, 기존 공소사실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입장이 대립했다.
이에 재판부는 기존 공소사실에 대한 질의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주장도 타당하다며, 검찰에 변호인단의 질의내용도 포함시킨 국제사법공조 안(案)을 만들어 지난 7일까지 재판부에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검찰이 일방적으로 변호인단의 질의내용을 누락시킬 경우, 무기대응의 원칙 상 재판부가 변호인단의 의견을 포함시켜 사법공조를 진행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기존 공소사실에 대한 변호인 측의 질문은 누락시킨 채, 지난 4일 추가 공소사실에 대한 내용만으로 법무부에 사법공조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7일 재판부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검찰이 변호인단의 요청사항을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이 검찰의 주장과 취지가 일치하는 내용만을 포함시켰다고 의견서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며 “이는 기존 공소사실에 대한 질의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기대응의 원칙 상 국제사법공조에 변호인단의 질의사항도 포함시켜야 한다던 재판부는, 이날 돌연 입장을 바꿔 국제사법공조는 검찰의 입증 활동이므로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직접 사법공조 방식으로 에이킨검프에 대해 사실조회를 해 달라는 변호인 측 요청은 기각하는 대신 같은 사항을 개별적인 질의를 통해 입증하라는 내용의 석명(釋明) 준비명령을 내렸다.
재판부는, '에이킨검프가 사법공조를 통해 질의를 이미 받게 되면 개별적인 질의에 대해서도 답변할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닌가'라고 판단한 듯하다.
한편 이날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이 제출한 추가증거에 대한 공방도 이어졌다. 이 증거는 “청와대를 방문한 김석한 변호사와 함께 이 전 대통령을 접견하여 삼성의 자금지원 내용을 보고했고, 이 전 대통령은 밝은 미소로 승인했다”는 김백준 전 기획관의 진술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김 전 기획관의 진술은 원심 유죄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당 증거는 김석한 변호사가 청와대를 방문한 시각, 이 전 대통령이 아버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며 찍은 사진으로 촬영시간이 기록되어 있어 김석한 변호사와의 접견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변호인단이 일방적으로 제출하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증거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증거로 제출된 사진 자료는 전직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야만 열람할 수 있는 지정기록물이 아니고, 누구나 신청만 하면 열람할 수 있는 일반기록물로 분류된 것”이라며 “검찰도 신청만 하면 열람할 수 있는데 뭔가 오해를 하고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음 공판은 국제사법공조를 통해 에이킨검프의 회신을 받은 후 새롭게 기일(期日)을 잡아 진행될 예정이다. 재판부는 사법공조 절차에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재판을 마무리 짓겠다는 입장이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