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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의 삶, 그에 대한 기억

"청문회 있었으면 나도 장관 못 됐을 것"...청와대 비서관들에게 명함도 파지 못하게 해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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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절 9년 3개월간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金正濂‧1924~2020)씨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세. 

고인은 강경상업학교와 일본 오이타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부친(김교철)도 조흥은행장을 세 번 역임한 금융인 집안이었다. 일제 말에는 특별갑종간부후보생으로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군관구 교육대에서 교육을 받던 중 원자폭탄을 맞았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해방 후 한국은행으로 복귀, 한은 내 엘리트 부서인 조사부 등에서 근무하면서 1952년 제1차 화폐개혁, 1954년 한국의 IMF(국제통화기금)‧IBRD(세계은행) 가입 때 실무 담당자로 활약했다. 자유당 말기에는 재무부의 핵심 요직인 이재국장으로 일했고, 장면 정권 시절에는 한일회담 예비회담의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5‧16 혁명 후인 1962년 4월 제2차 화폐개혁 당시에는 혁명정부에 불려가 화폐개혁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았다. 고인은 화폐개혁을 하면서 유의해야 할 점들을 역설하면서 사실상 반대했으나, 이미 정책은 결정된 후였다. 하지만 이때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1964년 5월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자, 한일회담 과정에서 안면이 있었던 고인에게 경제정책 방향을 자문했다. 고인은 경제정책의 방향을 시장자유화, 수출입국, 공업입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공감한 장 부총리는 고인을 상공부 차관으로 발탁했다. 시장자유화, 수출입국, 공업입국으로의 정책전환이 전적으로 고인의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 국내외 경제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은 적절한 조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1964년 11월 수출목표 1억 불 달성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한 것도 당시 상공차관이던 고인이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이오? 1억 불, 1억 불을 달성했단 말이지…. 1억 불, 1억 불…”이라며 감격스러워 했다고 한다. 고인은 이후 재무부‧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9년 10월 내각 총사퇴로 상공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고인을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고인은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며 사양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國政)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돼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무장공비 침투 등 긴박한 안보상황을 설명하면서 “나는 국방과 외교안보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어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으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대신 잘 챙겨 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고인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실상 ‘경제대통령’ 역할을 했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중화학 공업화 정책, 새마을운동, 부가가치세제 도입 등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중요 경제정책들은 대부분 그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던 시절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중화학공업의 아버지’ 오원철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천거한 것도 고인이었다.
 
고인은 전임 이후락 실장 시절 비서실이 무소불위의 권부(權府)로 비추어졌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청와대가 '권부'로 여겨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비서실장이 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비서실 근무자들에게 명함을 파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비서는 뒤에서 소리 없이 대통령을 돕는 존재’라는 것이 고인의 비서관(秘書觀)이었다. 대통령비서실장, 수석비서관, 비서관 등이 ‘소통’이랍시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다.  고인은 전임 이후락 실장 시절 '실세'행세를 했던 비서관들도 조용히 내보냈다. 겉으로는 얌전한 선비 같았지만, 고인은 비서실을 확실하게 장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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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실장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한 김정렴 전 실장. 두 손을 모아 쥔 모습이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박 대통령을 보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인은 생전에 기자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는 동안 대통령에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드리려 노력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문서로 보고할 때는 A4 한 장 정도로 요점 위주로 보고했으며, 대통령이 직접 결재하는 서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인은 “주요 현안에 대해 보고할 때에는 구두(口頭)보고를 많이 활용했다. 내가 대통령께 먼저 요점을 보고하면, 배석한 수석비서관들이 보충설명을 했다”면서 “회의나 서류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은 박 대통령은 주요 국책사업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국가를 위한 큰 구상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비서실장 임명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유신 이후에는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일도 그에게 맡겼다. 유신 이전에는 비서실, 중앙정보부, 김성곤 등 공화당 실력자들로 다원화(多元化)되어 있던 것이 청와대로 일원화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에 힘입어 고인은 인사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국방·내무·법무·무임소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장관은 비서실장에게 복수(複數)로 추천하도록 했는데, 비서실에서 추천한 인사의 90% 정도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고인은 술회했다.
 
하지만 철저한 자기관리와 겸양 덕분에 고인은 재직 중 잡음을 전혀 내지 않았다. 1975년 8‧15 저격사건 이후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도 고인은 어려워했다. 1970년대 말 차지철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 와중에서도 고인은 권부의 무게중심 역할을 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총선 이후 개각을 하면서 고인은 9년 3개월간 지켜온 대통령비서실장 자리를 내려놨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계원씨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비서실장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고, 이것이 10‧26사태로 이어졌다. 당시 주일대사로 있다가 10‧26사태 후 조문을 위해 귀국한 고인을 붙잡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실장님이 계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통탄했다고 한다.

5공 출범 후 공직에서 물러난 고인은 1990년대 이후 《중앙일보》에 《김정렴회고록/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한국경제정책 30년사》, 《김정렴정치회고록/아, 박정희》 등을 연재하고, 나중에 이를 책으로 펴냈다. 고인의 저서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청렴함, 따뜻한 인간성 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고인은 말년에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완성했다. 박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발의했던 김대중 정권이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이 사업에 흥미를 잃고, 노무현 정권이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상황에서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고인은  자신의 한참 후임자인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선처를 부탁하고 다니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기자는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취재를 위해 고인을 여러 번 찾아뵈었다. 고인은 당신이 보기에 한참 어린 세대인 기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박 대통령에 대해 널리 알리려 하는 것이 기특했는지, "참, 조갑제 사장, 배 기자 같은 사람이 없어요"라며 늘 기자를 반겨주곤 했다. 기자에게도 늘 존댓말을 썼다. 
‘비서실장론’을 듣기 위해 찾아뵈었을 때, 기자는 “공직자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인가, 도덕성인가? 위장전입 같은 문제로 장관 후보자 발목을 잡는 게 타당한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고인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시절에 청문회가 있었고 그런 기준으로 하면 나도 장관 못 됐어요. 애들이 국민학교 들어갈 때, 미동국민학교가 좋다고 집사람이 위장전입을 한 게 있어서…”

고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출 1억달러 돌파에 대한 것과 산업체 부설학교 설립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교부 장관이 규정상 학생들에게 정식 중학교 졸업자격을 줄 수 없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동생들 학교 보내고 집안 돕겠다고 어린 학생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시간 쪼개 공부해서 졸업을 하게 됐는데, 규정 때문에 자격인정을 못한다니 무슨 소리요? 규정은 바꾸면 될 것 아니오?'라며 호통을 쳤다. 박 대통령을 모시는 동안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 이야기를 할 때 고인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업적이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기꺼이 털어놓았지만, 간혹 당시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물어보면 “그건 잘 모르는 일”이라며 말을 아꼈다.

2012년 2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이 완공된 후 고인을 기념관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젠 박대통령을 뵈면 ‘제가 각하 기념관까지 지어놓고 왔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보고드릴 수 있으시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환한 표정으로 껄껄 웃던 고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입력 :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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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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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재광 (2020-04-27)

    배기자님, 8.15 저격 사건은 1974년 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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