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조선DB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삼성 자금수수 혐의’와 관련해 항소심 재판부가 검찰에 석명(釋明:사실을 설명하여 내용을 밝힘)을 요구했다. 재판부의 요구로 검찰이 이미 한 차례 공소장을 변경한 상황에서, 또 다시 재판부의 석명 요구가 이어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8일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재판이 어렵게 진행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전 대통령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뇌물은 금전이나 물품, 재산적 이익뿐 아니라 일체의 유·무형의 이익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성 측이 에이킨검프(Akin Gump:다스 소송을 맡은 미국 로펌)에게 돈을 주면서, 에이킨검프가 제공하는 법률서비스를 (이 전 대통령에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이에 대한 검찰 측의 석명을 요구했다.
재판부의 이 같은 석명요구는, 기존 검찰 주장으로는 이 전 대통령의 삼성 자금수수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초 검찰은 삼성 측이 에이킨검프와 ‘프로젝트M’이란 명칭의 자문계약을 체결하고 지급한 자문비용을 다스 소송비 대납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계약 기간이 앞당겨지면서 다스 소송비와 삼성의 지급액이 불일치하는 모순에 직면했다. 이에 검찰은 자문료 67억 원을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자금지원’으로 보고 직접 뇌물혐의로 기소했다.
그런데 검찰의 주장대로 직접뇌물 혐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에이킨검프가 이 전 대통령의 사자(使者:신부름꾼) 또는 대리인이거나, 삼성으로부터 자문료가 입금된 에이킨검프 계좌가 이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이킨검프가 미국 10대 로펌 중 하나인 대형로펌임을 감안할 때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항소심 초기 재판부가 검찰에게 삼성 자금수수 혐의를 ‘직접뇌물’이 아닌 ‘제3자 뇌물’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검찰은 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 기존의 직접뇌물 혐의를 고수하다가 지난 4월 10일 예비적으로 ‘제3자 뇌물 혐의’를 추가하는 공소장 변경을 법원에 신청했다.
제3자 뇌물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공여자의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한다.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어떤 특정한 사안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기보다는, 도와주면 회사에 유익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서 지원했다”며 부정한 청탁이 없었음을 증언했다. 이로 인해 제3자 뇌물 혐의도 입증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검찰에 석명요구를 하면서 전혀 새로운 논리를 제시한 셈이다. 그 동안 삼성에서 에이킨검프로 간 돈의 흐름을 놓고 뇌물혐의에 대한 공방이 이어졌다.
재판부는 돌연, 삼성이 에이킨검프에게 돈을 지급함으로써, 이 전 대통령에게 해당 기간 동안 해당 금액만큼 에이킨검프의 법률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권한을 뇌물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삼성이 에이킨검프로부터 일종의 ‘법률 서비스 상품권’을 구매해 이 전 대통령에게 제공했다는 논리다. 이 경우 이 전 대통령이 법률 서비스를 얼마만큼 사용했는지 와는 상관없이, 삼성이 서비스 제공을 위해 지급한 금액 자체가 뇌물로 성립될 수 있다.
이 부분이 입증된다면 다스 소송비와 삼성의 자문료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나, 에이킨 검프가 이 전 대통령의 사자나 대리인이 될 수 있냐는 문제 등, 검찰이 직면한 혐의 입증에 따른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검찰 측이 재판부의 이 같은 논리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전 대통령의 삼성자금 수수 혐의는 객관적 증거보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증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찰의 공소장 및 검찰이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 등 핵심증인들로부터 받아낸 진술조서 대부분이 현금수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이다.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은 검찰 조사에서 '삼성 자금 지원은, 쓰고 남은 돈을 돌려받는 ‘캐쉬백’ 형식이며, 이 전 대통령의 지시로 남은 돈을 돌려받기 위해 김석한 전 에이킨검프 변호사 및 이학수 전 삼성전자 부회장을 찾아갔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재판부의 논리대로 뇌물이 현금이 아닌 법률 서비스 제공이라면, 이 같은 김 전 기획관의 주장은 모두 허위진술이 되는 셈이다.
삼성 내부에서도 에이킨검프에 '프로젝트M'이란 명목으로 지급한 자문료의 용처와 관련해 추측성 진술만 있는 상황에서, 공소사실이 바뀌면서 핵심증인들의 진술의 신빙성이 무너진다면 검찰은 혐의를 입증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 역시 검찰이 제출한 다수 증거에 반하는 가설(假說)을 세워 유죄를 이끌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석명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섰다는 비판에 직면할 소지도 있다.
한편 이날 증인으로 채택된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이 또 다시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증인신문이 무산됐다. 재판부는 “소환장이 송달안되고 구인장도 집행 안 돼 다음 기일을 잡는 것이 의미가 없다”며 “증인이 발견되거나 출석하겠다고 알려주면 재판이 끝나기 전에 기일을 다시 잡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