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봉 주교. 2023년 월간조선과 인터뷰할 때의 모습이다.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 땅에 파견돼 71년 간을 한국인과 함께 한 목자가 세상을 떠났다.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르레 뒤퐁(Rene Dupont) 주교가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善終)했다. 향년 96세.
한국 이름은 두봉(杜峰). 두견새 두와 봉우리 봉이 합쳐져 두견새 우는 봉우리로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경북 의성군 봉양면 ‘의성 문화마을’에 위치한 두봉 주교의 집이다. 대문 문패는 ‘두봉 천주교회’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드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21세의 나이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인 1954년 12월 한국에 입국했다.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1969년 7월 25일 주교품을 받았다.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을 맡았으나 네 차례나 사임 청원을 한 끝에 1990년 교구장에서 퇴임했다. “한국 사람이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지난 2019년 12월에는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2012년 만해실천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당시의 두봉 주교.
《월간조선》은 2023년 9월호에 <사제 서품 70주년 맞은 두봉 주교가 사는 법>이란 제목으로 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두봉 주교의 철학은 “열린 교회를 만들자”였다.
처음 안동교구장으로 내려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하는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최대 규모였던 6층짜리 안동문화회관을 세웠다. 1973년 9월 개관한 안동문화회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신상’을 평생 처음 타보기 위해 영주, 군위, 의성에서 두루마기 한복 차림으로 어르신들이 찾아왔다. 계단이 인조석 마감인데 반달반들 닦아놓으니 길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왔다고 한다. 문화회관은 잠실야구장, 대구시민회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을 설계한 청구대(현 대구대) 건축과 김인호(金仁鎬·1932~1989년) 교수가 지었다. 놀라운 것은 문화회관으로는 대도시인 대구시민회관보다 1년 먼저 착공해 1년 앞서 개관했다.
또 가톨릭상지대학과 나환자를 치료하던 병원(영주 다미안 의원)도 그 무렵 설립됐으며 농민회관과 학생회관도 세워졌다. 그렇게 두봉 주교는 안동 주민이 되었고 안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대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왜 외국인이 선교하러 왔느냐’고요. ‘유교, 불교 다 있는데 우리가 왜 서양 종교를 믿어야 하나. 우리를 존중해달라. 서로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서로가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선교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안 좋다. 정말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구장이 되면 아유~ 더욱더…. 교구장이 외국인이면 더욱 외국 종교라 생각할 테니 거절했는데, 어쩔 수 없이….”
6·25전쟁 당시 납북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13명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구인덕(프랑스명 셀레스텡 코요스·1908~1993년) 신부가 안동교구장으로 내려갈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는데 젊은 주교가 임명되어 안동교계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착좌식 취임사를 하며 첫말을 《논어》의 구절을 예로 들자 신도들은 물론이고 구경 온 내빈, 유림들마저 놀랐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말도 아주 유창했단다
“생각지 못했던 데로 자꾸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 안동교구장이 되신 뒤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셨지요? 문화회관이니 농민회관 같은 건물들이 지금도 있나요.
“가톨릭상지대학은 잘 운영되고 있고 농민회관은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어요. 지금은 농민회관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은 완전히 없어졌고요. 안동시에서 새롭게 건물을 지었어요. 나환자촌도 지금은 다 없어지고…. 안동교구가 처음 생겼을 때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지금 얼마인지 아십니까?”
― 절반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60만 명이에요. 가장 작은 교구가 되었고 그래서 재조정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포항대리구하고 합친다? 그거는 뭐, 포항에서 안동까지 (너무 멀어) 찾아오는 사람, 없고요. 차라리 작은 교구로 남아 있는 것이, 작은 농촌 교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여기 안동교구에 주일학교 없는 본당이 자꾸 많아집니다. 왜? 초등학생이 한 명도 없어요.”
― 큰일이네요. 농촌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안 들리고….
“그래도 신부들이 다른 교구를 부러워한다든가, 큰 교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있는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요. 있는 대로 감사하게…. 저에게 버릇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 안에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안 좋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해요. 원치 않는 일을 두고도 감사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끌어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받들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네, 그냥 주시는 대로 받아들여야죠.”
― 신(神)의 뜻을 받들면 종국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암만해도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창조주시니까, 자신 있게 ‘주님의 뜻이 이것’이라 말하기 어렵죠. 그런데 성령(聖靈)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우리 교회를 지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주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더라도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원하시는 대로 무조건 승낙하고, 고마워하고,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그냥, 제 삶을 볼 것 같으면 생각지 못했던 데로 자꾸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주셨어요. 그래서 훗날 이게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판단할 수가 있지만 그 순간엔 잘 모르죠.
다만 아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은 판단하고, 주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처럼 따라가면 이상하게 다른 길로 이끌어주시는 경우가 있어요. 생각하지 않았던….
그냥 나 같은 사람을 한국으로 보낸 것부터 생각해보면,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일…, 안동교구가 생긴 거라든지….”
―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비신자도 이끌어주십니까.
“네, 네! 신자가 아닌 분도 양심이라는 곳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당시 두봉 주교의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아 보였다. 웃는 모습이, 마치 안동에 처음 내려가 교구 모토를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정했을 때로 되돌아간 듯, ‘기쁘고 떳떳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렇게나 감동스럽게 느껴졌다. 두봉 주교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천주교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