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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옛 익옥 수리 조합 사무소로 일제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는 자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경지 정리와 개간, 벼 품종 개량, 대규모 수리 조합 창설 등을 추진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익옥 수리 조합도 이 수탈 정책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2018 수능 한국사 15번 지문-
15번은 산미 증식 계획의 결과를 묻는 문제로 정답은 ④번의 ‘한국인의 식량 사정 악화로 다량의 만주산 잡곡이 수입되었다.’이다. 이러한 정답은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곡식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만주에서 잡곡을 들여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비상교육, 278)’는 서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타의 교과서도 비슷하다.
이 서술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이다. 첫째는 쌀의 대용식으로 만주속(滿洲粟:만주산 조)을 먹는 이유는 값 차이 때문이지 수량 때문이 아니다. 위 서술대로라면 쌀을 수출하지 않고 국내에서 소비했다면 1인당 쌀 소비량이 늘어났을 것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음식을 먹느냐의 선택은 구매력(購買力)에 있는 것이지 국내 잔존량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수출량이 늘어서 국내 소비량이 줄었다는 논리대로라면 자동차 수출이 늘어나자 국내 가구당 차량 보유대수가 줄었다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된다.
다음으로, 당시에는 쌀과 조의 소비층이 일치하지 않았다. 위 서술은 마치 그동안 쌀밥을 먹던 사람이 쌀이 부족하여 조를 먹게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쌀을 소비하는 층은 상위 2~30%에 해당하며 대부분 소작인인 농민은 속(粟)을 비롯한 잡곡을 상식(常食)으로 하였다. 이들에게 쌀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에 그것을 팔아서 이런 저런 필수 비용에 지출하고 남는 돈으로 쌀보다 값싼 식량인 조를 구입하게 된다. 조를 살 경우 두세 달 먹을 수 있으나 쌀의 경우 한 달밖에 먹지 못한다면 조를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1인당 연간 소비량이 대략 평균 0,6섬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쌀을 상식으로 하는 일본에서는 이런 통계가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쌀과 조의 소비층이 다른 조선은 별 의미가 없다.
물론 1930년도와 같이 조선이나 일본 모두 유례없는 풍작으로 수출이 줄어들면서 국내 쌀 소비량이 늘어난 적이 있긴 하다. 600만 섬 이상을 일본으로 수출하려고 했으나, 일본에서 이입(移入)을 제한하자 겨우 400만 섬 넘는 쌀을 수출하는데 그쳤다. 그에 따라 200만 섬 이상의 쌀이 국내에 풀리면서 쌀값이 폭락했다. 그러자 쌀과 잡곡 소비의 경계선에 있던 일부 소비층이 값이 싸진 쌀을 소비하면서 소비량이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피땀 흘려 농사지은 쌀을 내다 팔아도 1~2월을 넘기기 어려운 농민들에게 쌀값 폭락은 그야 말로 목숨을 위협하는 대재앙이었다. 쌀값 폭락으로 지주에게 줄 돈조차 부족하게 된 농민들은 만주속보다 더 싼 식량을 찾아 먹거나 그것조차 구할 능력이 안 될 때는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식량 소비층은 맨 위에 쌀 소비층, 그 아래 외미(外米:대만산 쌀), 그리고 대부분 소작인인 농민은 조를 비롯한 잡곡을 상식으로 삼았다. 외미는 조선미보다 값이 싼 대신 품질 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조와의 값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때 형편이 좀 나은 농민들이 조 대신 외미를 먹는다. 삼남 곡창지대의 농민들 중에는 더러 사정이 나은 경우도 있으나 경상도와 강원도처럼 답(畓)이 부족한 지역 농민들은 쌀 구경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주식(主食)인 쌀을 먹지 못하고 잡곡을 상식으로 하는 것은 결국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때문이며, 이러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소작제(小作制)라는 제도적 허점이 크게 작용했다.
근래 쌀값 폭락 이래로 지방농민의 생활상태가 점점 궁핍에 빠져가는 일은 기보(旣報)와 같거니와 종래 지방의 소위 지주와 소작인 간의 관계는 실로 무리한 일이 많으니 연전 쌀값 폭등시대에 지주의 소작 남봉(濫捧:규정보다 함부로 더 받음)은 실로 극도에 달하야 토지소출의 생산액 중에서 7~8할씩 탈취하야 오던 것을 근래에도 아직도 고치지 아니하고 여전히 이 계약을 속행케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으로 지방 소작인 등은 곤란이 막심한바 이것도 수년전 미가가 고등하던 시에는 별로 다대한 고통은 없었으나 쌀값이 폭락하여 생산비를 변상키 불능한 금일에 있어서는 농민과 소작인의 고통은 실로 태심한 일은 명료한 사실이라. - 1921. 3. 15. -
소작제에서 지주는 늘 갑(甲)이다. 지주(地主)는 소작인을 자기 소유의 노예처럼 취급하며 농사철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집에 일이 있을 경우 이들을 징발하여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을 시킨다. 소작인을 상대로 물품이나 돈을 빌려주고 폭리를 취하기도 하고, 빌리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억지로 떠맡기는 일도 다반사다. 만약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그 대가는 혹독하였다.
소작료의 경우도 부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작료의 비례는 확정하지 않은 가운데 지주 위주로 어떤 경우에는 반작(半作), 어떤 경우에는 그 이상도 부담 지운다. 소작료를 징수할 때에도 지주의 편의에 따라 어느 때든지 가져오라 하면 소작인은 지주의 명령을 따르기만 할 뿐이다. 도조(賭租)의 경우 애초에 70%를 정해놓고 흉년이 들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경우에도 악착같이 뜯어내거나 다음해의 부채로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소작료를 징수할 때에도 미품(米品)의 건습(乾濕)이나 분량을 재는 것 모두 지주의 임의와 전횡(專橫)에 맡길 뿐, 아무리 손해가 많아도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농민들은 비인격적 대우를 받으면서도 살 길이 소작 밖에 없으니 울분을 삼켜가면서도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나날이 삶의 비참함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지주의 행위가 곧 착취(搾取)고 수탈(收奪)인 것이다.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데는 지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농장을 소유한 지주는 그 많은 농지를 다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마름[舍音]을 채용하여 농지와 소작인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소작인들의 삶을 직접 위협하는 존재로 지주보다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가령 마름의 눈밖에 벗어나면 아무리 소작료를 잘 낸다 하더라도 마름은 지주에게 속여서 누구누구는 소작료를 잘 내지 않으니 바꿔야겠다고 한 다음 자의적으로 바꾸어버리기도 한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마름은 농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농민들을 경제적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생충처럼 전국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다.
고리대금업자가 마치 내장(內臟)에 박혀 있는 기생균과 같이 곳곳마다 뿌리를 잡고 있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이며 그리하여 이들은 정면으로 농민을 흡취(吸取)하는 지주와 서로 교차하여 다시 측면으로부터 묘하다 할만치도 여지없이 그들을 흡취하여 가는 것이다. - 1929. 7. 3. -
고리대금업자의 횡포가 얼마나 악독했으면 내장에 박혀 있는 기생균과 같다고 했을까 싶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민들에게 접근하여 돈을 빌려 주고 다음 해가 되면 원금보다 더 많은 이자를 붙여 상환을 요구한다. 지금의 악덕 사채업자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이처럼 당시 농민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독립하고 못하고 비참하게 살았다.
한 해 농사를 지어 추수기가 되면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보다 고액의 소작료와 고리(高利)의 빚 청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갚으려면 쌀을 있는 대로 내다 팔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곡기가 되면 조선에서는 일시에 쌀이 쏟아져 나온다. 당연히 제값 받기가 어렵다. 농민들의 쌀을 기다리던 상인들은 농민들이 파는 대로 다 사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구매한 쌀을 보관해 두었다가 순차적으로 팔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쌀을 보관할 창고가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인들은 또 농민들에게 산 곡식을 그 즉시로 일본으로 수출한다.
때문에 신곡기 3~4개월 동안 일시적으로 조선미가 일본으로 이입(移入)되어 조선미는 제값을 받지 못하면서 일본 미가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일본은 조선미의 일시 유입을 억제하기 위해 조선에 미곡 창고를 짓고 저리 자금을 융통하기도 해보지만,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미이 이출(移出)과 만주속 수입이 함께 증가하는 이유는 바로 조선 농민의 궁핍 때문이라는 아래 기사가 설득력이 있다.
대개 조선인이 그 생산한 미(米)를 수이출하는 것은 결코 조선인이 그 의당히 소비할 것을 소비하고 남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생계가 곤란한 고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파는 것이다. 이를 반면으로 말하면 조선미와 외미(外米) 및 속(粟)과의 사이에는 가격차가 있기 때문으로 이 가격차를 얻어서 식 이외의 생계 즉 의복‧주거‧부채‧세금의 방도에 보충하기 위하여 자가 생산의 조선미를 팔아가지고 외미 혹은 속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미와 속과의 값 차이는 조선미와 외미와의 간의 값 차이보다 크다. 고로 생활난의 도(度)가 크면 클수록 조선미를 팔아가지고 값 차이가 큰 속(粟)을 사는 사람이 값 차이가 적은 외미를 사는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고로 조선미의 수이출이 증가하는 일방으로 외미의 수이입은 감소되면서 속의 수입만이 증가하는 사실은 조선인의 생활난의 정도가 점점 심각화 한다는 것을 이중으로 실증하는 것이다. -1927. 4. 8. -
추수 후 당장 청산해야 할 빚이 많은 농민들은 일시에 쌀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농민의 손을 떠난 쌀은 상인들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수출된다. 농민은 다급해서 투매하고 상인들은 달리 보관할 장소나 여유 자금이 없기에 구입하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한다. 수요 공급의 조절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수가 끝나자마자 지주나 고리대금업자에게 착취당하고 나면 그 다음 추수 때까지 먹을 양식 구입할 돈이 턱없이 부족한 농민들은 외미는커녕 값이 가장 싼 조를 구입하게 되고 조의 수입은 자연 증가할 수밖에 없다. 농민의 경제적 궁핍이 곧 조선미의 수이출 량을 증가시키고 만주속 수입을 촉진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5번 문제의 정답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인의 식량 사정 악화로 다량의 만주산 잡곡이 수입되었다.’
식량 사정 악화라는 말은 수요(需要)는 있는데 공급(供給)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다. 즉, 농민들은 쌀밥을 먹으려고 하나 쌀이 부족하였으며, 그에 따라 도리 없이 만주산 잡곡을 수입하였다고 한다면 위 서술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은 쌀밥을 소비할 만큼의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다. 돈이 없이 늘 궁핍한 생활에 허덕인 농민들은 쌀밥을 먹고 싶어도 구매력이 없으니 그들의 쌀을 모두 내다 팔아 가장 값이 싸고 양이 많은 조를 구입하는 것이다. 먹을 쌀이 부족해서 못 먹는 것과 애초에 먹을 능력이 안 되는 것과는 다르다.
또, 당시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줄었다는 것은 대일 쌀 수출이 늘어 외화를 획득했다는 뜻이다. 쌀 외에 수출 상품이 전무했던 당시에 나라가 살고 농민이 사는 길은 많은 쌀을 좋은 값에 수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많은 쌀을 수출하게 되면 국내 쌀 공급은 줄어들 것이며 덩달아 국내 쌀값이 올라 농민들의 소득은 오히려 올라가는 것이 정상이다. 반면, 1930년대는 유례없는 대풍작이었으나 일본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국내 쌀 소비량이 전년 대비 200만섬 이상 늘어나면서 쌀값이 폭락하자 가장 먼저 고통 받은 부류는 하층 농민이었다. 국내에 쌀이 많으니 쌀밥도 해먹고 떡도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풍년기근, 풍작공포라는 말이 괜히 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식량 사정 악화로 다량의 만주산 잡곡이 수입되었다.’는 정답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다.
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 문제는 (1)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서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한 잘못된 통계자료와 왜곡된 그래프를 수록하여 서술하였으며, (2) 시장 기능에 의해 거래된 후 이루어진 수출을 ‘수탈’이라 왜곡하였으며, (3) 어느 교과서에서도 산미 증식 계획을 ‘수탈 정책’이라 한 적이 없음에도 ‘수탈 정책’이라 하였으며, (4) 정답 ④는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잘못된 서술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이는 반드시 무효처리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