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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항에 야적된 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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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11월 24일 시행된 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문제 중 15번이다. (가)에 해당하는 단어는 ‘산미 증식 계획’이며,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제시한 정답은 ④번이다. 이는 아래의 예와 같이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한 모든 교과서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다.
품종개량, 수리 시설 구축, 경지 정리, 개간 등을 통해 쌀을 증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증산량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쌀 반출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일본의 식량 사정은 개선되었지만 국내 식량 사정은 크게 나빠졌다. 일제는 한국 내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조‧수수‧콩 등의 잡곡을 들여와 보충하였다.(미래엔, 246)
산미 증식 계획의 결과 계획만큼은 아니지만 쌀의 생산이 늘어났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양이 계속 늘어났으며 조선의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에서 잡곡을 대량으로 수입하였다.(천재교육, 253)
이에 덧붙여, 교과서에는 1937년 조선총독부 농림국에서 발행한 「조선 미곡 요람」<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를 근거로 쌀 생산량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그리고 일부 교과서에는 대일본 수출량의 변화를 그래프로 작성하여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통계 자료를 근거로 잘못 작성된 엉터리 그래프이며, 이를 토대로 한 서술 또한 잘못이다. 이에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하여 교과서의 서술 오류와 함께 수능 15번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교과서에 수록된 엉터리 통계 그래프
모든 교과서에는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그래프가 수록되어 있다. 노란색 선그래프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의 쌀 생산량을 나타내며, 녹색 막대그래프는 같은 기간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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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쌀 생산량을 나타내는 노란색 그래프를 보면 1928년도까지 쌀 생산량은 점점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짝수 연도로만 표시된 검정 한국사의 통계 자료(①)는 『한국근현대사사전』(②)의 자료와 일치하나, 홀수 연도의 수치를 생략했다. 그러면서 이들 이들은 모두 출처를 「조선미곡요람」(③)이라 하였다.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근현대사사전』과 같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런데 천 단위 이하까지 표시된 「조선미곡요람」의 자료는 앞의 ①‧②번의 자료와 모두 일치하나 1930년도의 수치가 다르다. 「조선미곡요람」에는 ‘13,701,146’인 반면 두 자료에는 모두 ‘13.511’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관련 연구자 또는 8종 교과서 집필자 모두 출전인 「조선미곡요람」을 확인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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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검정한국사
(단위:천 섬) |
②근현대사전(단위:천 섬) |
③조선미곡요람(1937,단위:섬) |
④동아일보
(1931.2.11) |
⑤미곡요람
(1934) |
1920(大正9) |
12,708 |
12,708 |
12,708,208 |
14,882,352 | |
1921(同10) |
14,882 |
14,882,352 |
14,325,326 | ||
1922(同11) |
14,324 |
14,324 |
14,325,326 |
15,014,291 | |
1923(同12) |
15,014 |
15,014,291 |
15,174,645 | ||
1924(同13) |
15,174 |
15,174 |
15,174,645 |
13,219,322 | |
1925(同14) |
13,219 |
13,219,322 |
14,773,102 | ||
1926(昭和1) |
14,773 |
14,773 |
14,773,102 |
15,300,707 |
15,300,707 |
1927(同2) |
15,300 |
15,300,707 |
17,298,887 |
17,298,887 | |
1928(同3) |
17,298 |
17,298 |
17,298,887 |
13,511,725 |
13,511,725 |
1929(同4) |
13,511 |
13,511,725 |
13,701,746 |
13,701,746 | |
1930(同5) |
13,511 |
13,511 |
13,701,746 |
19,180,677 |
19,180,677 |
그렇다고 「조선미곡요람」의 1930년도 생산량인 ‘13,701,146’이 옳은 것도 아니다. 1930년도는 조선이나 일본 모두 유례없는 풍작으로 ‘풍년기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쌀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쌀값이 폭락한 해다. 그런데도 이해 수확량이 전 해인 1929년보다 겨우 20만 섬 정도 증가에 그치고 있다. 근현대사 연구자라면 당연히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아래 두 신문 기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금년도 조선미의 제1회 수확 예상고는 1,635만여 섬이라 한다. 그럼으로 미증유의 대풍으로 일컫든 작년도의 미실수고 1,918만여 섬에 비하면 실로 280만여 섬 즉 1할 4푼 7리의 감소를 보인다. 또 일본의 금년도 제1회 米수확 예상고를 보더라도 5,796만여 섬이어서 작년도 실수고 6,687만여 섬에 비하면 890만여 섬, 즉 1할 3푼 3리의 감소이다.(1931. 10. 5. 동아일보 사설)
증수 백구십만 섬 - 조선미 위기 재현출
조선미의 금년도 제1회 수확 예상량은 18,254,898 섬으로 발표되었다. 작년도 實收量(실수량)에 비하야 1할 1푼의 증수이며 과거 7년간의 최풍, 최흉년을 제한 5개년 산술 평균 수확량 1,570만 섬에 비하면 실로 1할 6푼 强의 증수이어서 이 숫자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소화5년(1930)의 1,918만 섬을 내놓고는 다시없는 풍작이다.(1933. 10. 1. 동아일보 기사)
두 신문 기사에서는 1930년도의 조선 쌀 생산량을 ‘미증유의 풍작’, ‘다시없는 풍작’이라는 표현과 함께 ‘1,918만 섬’으로 적고 있다. 또 1931년 2월 11자 신문을 확인해 보니 ‘昨年朝鮮米實收, 千九百十八萬石’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전년도인 1930년의 생산량을 ‘19,183,135섬’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 수치는 두 달 후인 4월 16일 총독부에서 ‘19,180,677섬’으로 정정 발표하였다. 결국, 1930년도 쌀 생산량은 ‘19,180,677섬’이 확정된 수치인 셈이다.
한편, 이 신문에는 1930년도 쌀 생산량을 보도하면서 1926년부터 1930년까지 5개년 간의 쌀 생산량도 함께 제시하였다. 이를 위의 표 「조선미곡요람」 옆에 ‘④동아일보’ 항목으로 옮겨 적어 「조선미곡요람」과 비교해보니 같은 수치가 한 칸씩 밀려있다. 확인이 필요하여 관련 자료를 검색하던 중 1934년 일본 농림성 미곡국에서 간행한 『미곡요람(米穀要覽)』<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1912년부터 1933년까지의 쌀 생산량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가 바로 그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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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에 제시된 수치와 앞의 동아일보(④)에 보도된 5개년의 수치를 비교해보니 정확하게 일치한다. 일단 『미곡요람』 자료에 신빙성을 두고 자료를 더 찾아본 결과 1934년 4월 3일자 동아일보에 「조선 累年 米收穫高表(누년미수확고표)」라는 자료가 있어 대조해보니 역시 『미곡요람』과 일치한다. 이어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발표한 전년도 조선 쌀의 실제 수확고를 찾아 일일이 대조하고,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확인한 결과 일본 농림성 미곡국의 『미곡요람』(⑤)이 정확한 통계 자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교과서에 인용한 1937년 「조선미곡요람」 통계 자료는 한 칸씩 미뤄 적은 잘못된 통계 수치다. 마치 시험 보는 학생이 문제지에 표시한 답을 답안지로 옮겨 적으면서 한 칸씩 미뤄 쓴 것과 같다. 이렇게 잘못된 「조선미곡요람」의 통계 수치를 『한국근현대사사전』과 국정 국사는 천 단위 이하를 절사(切捨)하여 전재(轉載)하면서 또 1930년도 수치의 오류까지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들 잘못된 통계 자료를 토대로 생산량의 변동 추이를 아래와 같은 그래프로 작성하여 모든 교과서에서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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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그래프는 홀수 연도를 생략하고 짝수 연도의 통계 수치만 반영하여 마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제한된 지면 때문일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나 중요한 통계 요소 일부가 생략된 상태에서 그것을 선으로 연결했을 경우 변동 추이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그래프도 실상 의미가 없다. 『조선미곡요람』의 잘못된 통계 수치를 근거로 작성된 그래프이기 때문이다. 아래가 정확한 자료인 『미곡요람』을 근거로 작성한 통계 그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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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1,500만 섬인 생산량은 1924년에 대폭 떨어졌다가 1927년 큰 폭으로 증가한다. 이후 1928년과 1929년에 다시 1,500만 섬 아래로 떨어졌다가 1930년대는 대폭으로 증가한다. 1929년은 한해(旱害)로 인한 흉년이었고, 1930은 조선이나 일본 모두 유례없는 풍년이 들어 쌀값이 폭락한 해였다. 이를 보고 과연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현행 검정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조선미곡요람」의 쌀 생산량 통계를 검증 없이 가져다 쓴 것도 문제지만, 통계 그래프를 작성하면서 중요한 요소인 홀수 연도는 생략하고 짝수 연도만 표시하여 선으로 연결함으로써 마치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처럼 보이도록 왜곡하였다. 당연히, 이 그래프에 따라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고 한 서술은 잘못이다.
교과서의 잘못된 통계 수치는 이미 2016학년도 수능 한국사에 출제된 바 있다. 이 문제의 수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2014년에 출제된 수능 한국사 17번 문제와 비교해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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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1920 |
1922 |
1924 |
1926 |
1928 |
1930 |
1931 |
2014 |
1,488 |
1,501 |
1,322 |
1,530 |
1,351 |
1,918 |
1,587 |
2016 |
12,708 |
15,174 |
17,298 |
|
둘 다 산미 증식 계획에 관한 문제이나, 제시한 같은 해의 통계 수치가 서로 다르다. 2014학년도 문제는 『미곡요람』의 정확한 수치인 반면, 2016학년도 문제는 『조선미곡요람』의 잘못된 자료인 것이다. 때문에 2016학년도 문제에서는 12,708(1920) → 15,174(1924) → 17,298(1928)이라는 생산량을 볼 때 점점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2014학년도 문제에서 동일한 3개 연도를 보면 1,488(1920) → 1,322(1924) → 1,351(1928)로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2년 차이를 두고 치러진 수능 시험에서 이렇게 잘못된 자료를 제시하고 학생들을 평가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총독부의 오류 자료를 사용하고 홀수 해를 생략한 체 그래프를 작성함으로써 사실과 전혀 다른 생산량 변동 추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모든 교과서에 이 그래프를 수록하고 이를 근거로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였다.’고 가르쳐 왔다. 잘못된 내용을 가르쳐 놓고 이를 수능에 출제하여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2. 1인당 연간 쌀 소비량도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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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시한 것과 동일한 그래프로 녹색 막대그래프가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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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검정 한국사 |
②근현대사사전 |
③조선미곡요람 |
④동아일보 |
1920(大正9) |
0.63 |
0.63 |
0.6342 |
0.634 |
1921(同10) |
0.67 |
0.6706 |
0.673 | |
1922(同11) |
0.63 |
0.63 |
0.6340 |
0.635 |
1923(同12) |
0.65 |
0.6473 |
0.651 | |
1924(同13) |
0.60 |
0.60 |
0.6032 |
0.605 |
1925(同14) |
0.52 |
0.5186 |
0.528 | |
1926(昭和1) |
0.53 |
0.53 |
0.5325 |
0.533 |
1927(同2) |
|
0.52 |
0.5245 |
0.525 |
1928(同3) |
0.54 |
0.54 |
0.5402 |
0.541 |
1929(同4) |
0.45 |
0.4462 |
0.452 | |
1930(同5) |
0.45 |
0.45 |
0.4508 |
0.677 |
검정 교과서와 『근현대사사전』의 수치는 「조선미곡요람」 자료를 소수점 셋 째 자리 이하를 사사오입(四捨五入)하여 둘 째 자리 이하는 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1930년도의 통계 수치가 이상하다. 1930년도는 미증유(未曾有)의 대풍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당시에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대풍이어서 대일 수출량은 줄어들고 덩달아 쌀값이 폭락하여 농민들에게는 고통스러운 해였다. 특이한 것은 쌀값이 폭락하여 좁쌀 값에 근접하게 되자 잡곡을 상식(常食)으로 하던 계층 중의 일부와 밀가루를 주로 먹던 중국인들이 쌀을 소비하면서 쌀 소비량은 급격히 늘어나 그 전해인 1929년보다 대략 50% 정도 증가하였다. 그런데도 「조선미곡요람」도 『근현대사사전』도 모두 그 전 해와 똑같은 0.45의 최저 수치로 표시되어 있다.
이에 근거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료를 찾던 중 1932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조선농촌경제와 米價 추세의 전망(二)’ 제하의 기사에서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자료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근현대사사전』 자료와 비교해보면 대부분 비슷하나 1930년도 분만 0.677로 되어 있다. 결국, 「조선미곡요람」과 『근현대사사전』의 1930년도 수치는 오류였던 것이다. 여기에 쌀 생산량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홀수 연도를 제외하고 짝수 연도만으로 그래프를 작성하여 사실을 왜곡하였다. 교과서의 그래프와 동아일보 기사의 통계 자료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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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자료를 보면 1924년까지 0,6섬 초과를 유지하다가 4년 동안 0,5섬 대를 유지한다. 그리고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1929년에는 0.5섬 이하로 떨어졌다가 1930년 대 풍작 때는 최고치를 기록한다. 결국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를 나타내는 그래프도 일부 오류 자료를 사용한데다 쌀 생산량과 마찬가지로 짝수 연도의 수치만으로 그래프를 그려 변동 추이를 나타냈다. 이런 자료로 일본으로의 수출로 국내 쌀 소비량이 줄었다고 서술하는 것은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3. 1920년대 일본과의 무역은 수탈이 아닌 수출이다.
이 건물은 옛 익옥 수리 조합 사무소로 일제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는 자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경지 정리와 개간, 벼 품종 개량, 대규모 수리 조합 창설 등을 추진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익옥 수리 조합도 이 수탈 정책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2018 수능 한국사 15번 지문-
산미 증식 계획이 추진되던 1920년대는 미곡 무역은 철저히 시장 경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농민들이 생산한 쌀은 지주(地主)와 시장(市場)을 거쳐 현물 거래가 위주인 ‘미곡 시장’과 선물 거래가 위주인 ‘기미(期米) 시장’에서 거래되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수탈(收奪)’은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미곡시장과 기미시장에서 시장 원리에 의해 거래된 후 일본에 수출된 무역 행위를 일본이 조선의 쌀을 ‘수탈’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시의 대일본 수출을 ‘수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실과 부합한다면 출제자는 반드시 이를 증명할 객관적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거의 매일 미곡시세(米穀市勢)와 기미시세(期米市勢)가 기사로 올라온다. 특히 미곡 무역과 직결 되는 기미(期米:정기 거래되는 쌀) 시세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오베, 오사카, 도쿄 등지의 시세도 함께 게재되어 양국의 시세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만약 강제로 빼앗아가는 수탈이었다면 이런 시세표가 있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1920년대의 양대 투기 상품은 주식(柱式)과 미곡(米穀)이었음은 얼마나 시장 기능이 발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선물 거래로 이루어지는 기미시장에서 쌀 거래로 일확천금을 노린 수많은 부민(富民) 자제들이 빚을 얻어가면서까지 쌀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가진 돈 다 잃고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시장(市場) 원리가 아닌 수탈(收奪)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일본은 자국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미(朝鮮米)에 대한 이입 억제책을 시행하였다는 점이다. 산미 증식 계획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토지 개량과 관개 시설 확충, 종자 개량등으로 증산되는 쌀을 일본이 수입하여 보충하고자 시행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미(朝鮮米)의 증산(增産)과 품질 개량으로 인해 이입량(移入量)이 급증하면서 일본은 갖가지 방법의 이입 억제책을 쓰게 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추수기의 일시 유입으로 인한 일본 내지미(內地米)의 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 순차적 이입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 내 미곡 창고의 설립을 독려하기도 하고, 창고 건립으로 쌀을 보관하는 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미곡상들을 위하여 은행을 통해 저리 융자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1928년 이후에는 일본 미곡상에게만 적용하던 미곡법을 조선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게 된다. 미곡법 제2조는 ‘정부는 미곡의 수량 또는 시가(市價)를 조절하기 위하여 특히 필요 있다고 인정하는 시는 칙령으로써 기간을 지정하야 미곡의 수입세(輸入稅)를 증감(增減) 혹은 면세(免稅)하며, 또는 그 수입 혹은 수출을 제한함을 득(得)함.’이라는 내용이다. 일본이 이러한 미곡법을 조선에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은 곧 조선미의 일본 유입을 합법적으로 막겠다는 것이었다. 수탈해 간다면 미곡법까지 동원하여 이입을 막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 1929년에는 일본 정부에서 조선미의 이입인가(移入認可)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자, 조선총독부 松村 식산국장은 먼저 이입인가 제한을 반대하는 전보를 본국으로 치고 나서 곧바로 동경으로 건너가 직접 반대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선 데는 일본에서 조선미 이입을 제한하게 되면 산미 증식으로 생산한 미곡의 판로가 막힌 조선인의 극심한 반발로 앞으로의 산미 증식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조선 통치 상에도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미의 일본 수출이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감미(甘味)나 식반(殖飯:밥이 불어나는 정도)이 좋은데다 일본 내지미보다 값이 싼 조선미가 속속 일본 미곡 시장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일본의 조선미 이입 억제책도 점점 강도가 높아졌다. 1933년이 되면 관세(關稅)를 부과하고 이입특허제(移入特許制)라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여 조선미 이입(移入)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유일한 판로인 일본에서 관세부과와 이입 특허제로 이입을 제한하자 조선에서는 더 이상 생산만 하고 수입해 가지 않는 일본이 시행하는 산미 증식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은 1934년에 이르러 산미 증식 정책을 중단하게 된다.
일본이 수탈해 가는 것이었다면 일본이 조선미 이입 억제책을 쓸 이유가 없으며, 조선은 일본의 이입 억제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수탈’이 아닌 ‘수출’이라는 증거는 당시의 신문에 실린 수많은 기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新米(신미)의 神戶[고베] 行, 35원에 환영 -1921. 8. 26.-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 이천(利川)에서 산출하는 잣채쌀은 자고로 일찍 익는 종자로 유명하야 해마다 유월 유두 때가 되면 의레히 진상하는 쌀이 나는 터인 바 금년에도 금월 초생에 이천에 산출한 햅쌀이 인천 시장에서 매매가 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동안 미곡검사소에서 검사를 맛치고 지나간 17일에는 일본으로 수출이 되어 오사카[大阪] 신쥬쿠[神戶]의 시장에서 한 섬에 35원금으로 매매가 되얏는데 일본 시장에서도 이와 같이 일찍 되는 종자는 매우 드물다고 크게 환영을 받았다더라.
農業 專業의 위험(上) - 1924. 10. 6. 동아일보 사설
조선의 백미는 아무리 풍작이 된다 할지라도 이것을 외국으로 수출케 하기에는 극히 어렵고 다만 2~3백만 섬 씩이라도 수출될 여지가 잇는 곳은 오직 일본뿐이니 일본도 근래에는 산미증식의 정책을 취하야 점차로 자급자족의 계획을 실현하랴 하니 일본을 유일의 시장으로 하는 조선미의 수출도 그 장래가 대단히 위태하게 보인다. 그러면 백미 하나를 의지하야 가지고 먹고 입고 쓰며 활동하는 것을 얻으려하는 우리의 생업이 십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東攻西征(동공서정)의 朝鮮米(조선미)는 누가 먹어주나. -1933. 9. 28. 경제시평-
......그런데 조선미 이입(移入)에 관세(關稅)를 부과한다고 하면 아직 부과안(賦課案)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으되 여하간 일본 내 시장에서의 조선미 시세(時勢)를 높이어 종래 다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하려고 조선미를 소비하든 경향을 감축시키고, 일본미 소비에 전향시키는 정도(程度)를 내리지 않을 것이므로 조선미 이출(移出)은 양적으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만약 일본에 이출하는 조선미의 총액이 소액에 불과하거나 또는 조선미 총수이출 액 중 이출액이 소부분에 불과하거나 또는 다른 데에서 판로(販路)를 구할 수 있다고 하면 관세 부과로 일본에의 이출액이 다소 감소한다 할지라도 그 영향이 적을 것이로되, 조선미 이출액(移出額)의 절대수로 보든지 그 수이출액(輸移出額)에 대한 이출액의 상대율로 보든지 실로 그 타격은 크지 않을 수 없다.......
4. 국내 쌀이 부족해서 만주 잡곡을 수입해서 먹은 것이 아니다.
15번 문제의 정답인 “④한국인의 식량 사정의 악화로 다량의 만주산 잡곡이 수입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이에 해당하는 교과서 서술은 대부분 아래와 같다.
산미 증식 계획의 결과 계획만큼은 아니지만 쌀의 생산이 늘어났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양이 계속 늘어났으며 조선의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에서 잡곡을 대량으로 수입하였다.(천재교육, 253)
여기서 1인당 쌀 소비량이 줄었다는 것은 곧 식량(쌀)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하였다는 논리다. 즉, 먹을 쌀을 일본에 수탈당해서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만주속(滿洲粟:만주에서는 대부분 조를 수입했다)을 대량 수입해서 먹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쌀 소비층과 만주속 소비층이 일치해야 한다.
조선 인구의 80% 내외는 소작농(小作農)이 대부분인 농민이며, 이들의 상식(常食)은 잡곡(雜穀)으로 쌀을 식량으로 소비하는 부류가 아니다. 조선 농민들에게 쌀은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다른 물건을 구매하기 위한 화폐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농민들에게 상식은 보리를 비롯한 잡곡이며 쌀은 그야 말로 돈이었다.
근대가 되어 화폐의 수요는 다양하게 늘어나지만, 농민들이 화폐를 대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쌀밖에 없었다. 지주에게 수탈당하고 남은 쌀로 비료대금, 종자대금, 의복비, 월동 준비를 하여 그 다음 신곡기(新穀期)까지 살아야 한다. 그렇게 쓰고도 얼마간의 쌀이 남는다면 잘 간직해 두었다가 잔치나 제사 또는 몸져누웠을 때 미음을 끓여 약 대신 먹는다. 하지만 다음 해 추수 때까지 별 걱정 없이 먹고 사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농민들은 살기 위해 쌀을 내다 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궁박상품미(窮迫商品米)라 하며, 이 상품이 미곡상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는 것을 ‘기아수출(飢餓輸出)’이라고 하였다.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쌀을 팔아서 만주속을 구매하는 결정적 이유는 가격 대비 양(量)에 있다. 쌀 한 말을 팔면 대략 만주속 3말을 살 수 있는 가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만주속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주속 조차 구매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이 쌀을 사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농민들이 쌀을 먹지 못하고 내다팔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교과서 서술대로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평균 0.6섬[石]이라 할 경우 이는 여섯 말[斗]이며 한 달 5되[升]가 된다. 소작농 네 식구가 사는 가구라면 한 달에 두 말이 되는 셈인데 다른 것 다 쓰고 네 식구가 한 달에 두 말 쌀을 먹을 수 있는 농민이라면 무척 행복한 농민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비 성향을 무시한 단순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농민을 제외한 나머지 20% 내외의 지주를 포함한 상위층이 대부분 소비하는 쌀을 전체 인구로 나누어버린 우(愚)를 범한 것이다.
농민들의 손을 떠난 쌀은 지주와 미곡상들에 의해 미곡시장과 기미시장에 하나의 투기 상품이 되어 유통되고 이는 일본으로 수출된다. 미곡시장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과정에는 이익을 좇아 동분서주하는 수많은 대소 상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들은 매일 신문에 게재된 조선과 일본 기미시장의 쌀값을 꿰고 있었다. 특히 양대 투기 상품이었던 미곡은 투기꾼들을 일순간에 대부호로 만들기도 하지만,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여기에 수탈이 개입할 곳은 아무데도 없다. 또한, 조선에 아무리 쌀이 남아돌아도 농민의 손을 떠난 쌀은 다시 돌아갈 일이 없다. 농민들이 구매해서 먹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쌀을 내다 판 다음에는 그 쌀이 수출이 되든 남아돌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당여히, “산미 증식 계획으로 증산된 쌀을 일본이 수탈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1인당 쌀 소비량이 감소하여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속(滿洲粟)을 대량 수입하였다.”는 서술은 사실 관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서술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은 학교에서 잘못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출제하였다는 점과 사실 관계에 어긋나는 서술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반드시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의 통계 그래프와 그에 따른 서술을 바로잡아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한 다음 평가하는 것이 교육적 처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