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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조선 후기 문화를 소개하면서 추사 김정희의 서예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비상교육 |
서예에서는 중국의 서법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서를 담은 독자적인 기풍이 일어났다. 김정희는 많은 서체를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감을 가진 추사체를 만들었다.(185)
추사체 - 殘暑頑石樓 김정희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비문을 두루 살핀 후 개성 있고 독특한 글씨체를 완성하였다. 박규수는 이를 보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듯 기(氣)가 오듯 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다.”라고 평가하였다.(185) | ||
리베르스쿨 |
김정희는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파격적인 추사체를 창안하였다.(188) | ||
미래엔 |
19세기에는 김정희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여러 필법을 연구하여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안하였다.(165) | ||
지학사 |
추사 김정희는 우리의 금석문과 중국의 다양한 필체를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법을 창안하였다.(190)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 대웅전에는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이 있고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다. 우리 고유의 감정을 나타내는 동국진체와 독특한 세련미를 갖춘 추사체의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다.(191) |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 해보이나 실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내용이 가장 많은 비상교육 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중국의 서법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서를 담은 독자적인 기풍이 일어났다.’는 부분이다. 이를 둘로 나누면 ‘중국 서법의 모방’과 ‘모방에서 벗어난 독자적 기풍’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서예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유명 필법(筆法:서법)을 수없이 임모(臨摹: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씀)하는 과정에서 차츰 서가(書家) 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다 하여 더 이상 중국 서법의 모방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추사나 원교와 같은 유명 서가들이 평생 중국 필법을 끊임없이 연마하면서 따르고자 하였음은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모(臨摹) 즉 ‘모방단계’는 자신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구축되었다고 해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서예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추사가 중국 고대 필법을 철저히 따랐음은 아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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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씨는 후학인 윤정현(尹定鉉:1793~1874)의 부탁을 받은 지 30년 만에 써준 글씨로 梣溪(침계)는 윤정현의 호(號)다. 추사가 30년이 지나 부탁을 들어주게 된 사연은 왼쪽 낙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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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에게 부탁받은 호는 비록 두 글자 밖에 되지 않으나 첫 번째 글자인 梣[물푸레나무 침]자가 한비(漢碑)에 없어 함부로 쓸 수 없었는데, 수당 시대의 필법에서 겨우 그 근거를 찾아 완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필법의 근거를 찾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0년이라 하였으니 중국 필법에 충실하고자 한 추사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추사의 중국 필법 준수에 대하여 『완당전집』 서문에는 ‘공의 서예는 한위 육조(漢魏六朝)의 체(體)를 규범(規範)으로 삼아 거기에 가지가 뻗어나서 더욱 무성하게 된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니 중국 글자의 모방 단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잘못된 서술이다.
이어 ‘우리의 정서를 담은 독자적인 기풍이 일어났다.’는 서술도 마찬가지다. 서예의 기본은 문장(文章)과 시(詩)이며, 이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조형성이 가미된 글씨로 표현한 것이 서예다. 서예는 운필(運筆)의 강온(强穩), 결구(結構)의 긴밀(緊密), 포백(布白)의 소밀(疏密)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으로 구현된다. 당연히, 문장이나 시에서 특정 정서를 표현할 수는 있어도 서예로 이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개념조차 분명하지 않은 ‘우리의 정서’를 서예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등학교 한국사는 일선 교사가 설명이 가능해야 하고 고등학생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일선 교사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추사의 글씨에서 어떤 부분이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집필자는 또 설명이 가능할까? 단언컨대 이는 불가능하다. 집필자도 교사도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추어야 할 처지에 있는 학생들은 뜻도 내용도 모르고 그냥 외울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집필자조차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비문을 두루 살핀 후’라는 부분이다. 이는 지학사의 ‘우리의 금석문을 연구하여’라는 서술과 같은 내용으로 추사가 중국 글씨와 함께 우리나라 글씨도 함께 익혀 추사체를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서예는 중국 필법에서 시작하여 중국 필법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선인들의 필법을 익혀 일가를 이룬 경우는 전무하다. 더욱이,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에는 추사 자신이 중국의 많은 금석문을 보고 글씨를 익혔다는 글은 있으나, 우리나라의 어떤 금석문을 보고 글씨를 익혔다는 글은 없다. 이에 대한 필자의 문제제기에 두 출판사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제시하였다.
추사가 중국의 여러 서체에 대한 연구만을 하였다는 것은 제한적인 해석이며, 중국 금석문과 더불어 우리나라 금석문과 그 서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어떤 금석문을 보고 글씨를 익혔다는 명시적 지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우리나라 서체에 대해 전혀 참고를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정희가 종래의 조선 글씨가 지닌 한계를 지적한 것이나 북한산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것은 그가 우리나라 금석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추사체 완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비상교육 답변>
김정희는 우리나라 금석문을 두루 섭렵하여 “금석과안록”이라는 대표적인 자료집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사체의 어느 글자가 어느 금석문의 어느 글자를 따온 것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개설서에 참고할 만한 표현이 있어 첨부하고자 합니다. -중략- “금석문 연구에 바탕을 두고 고대의 금석문에서 서도의 원류를 찾아서 그것을 자기 개성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다.”<지학사 답변>
두 답변의 요지는 김정희가 우리나라 글씨를 보고 익혔다는 증거로 비상교육은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것을, 지학사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라는 자료집을 편찬한 것을 들고 있다.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것이 『금석과안록』에 포함되어 있으니 두 출판사의 답변은 같은 내용인 셈이다.
『금석과안록』은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를 대상으로 비문을 판독하고 고증한 연구서다. 『완당선생전집』 권1에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하고, 마지막에 조인영(趙寅永)과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 등을 덧붙여 단권으로 낸 것이 『금석과안록』이다. 「진흥이비고」를 살펴보면, 진흥왕비보다 황초령비에 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 황초령비는 비가 없어져서 탁본(拓本)을 대상으로 연구하였고, 북한산비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실물비를 바탕으로 분석 고증하였다. 연구 분석에는 『삼국사기』,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조선과 중국의 많은 역사 자료가 동원되었다.
따라서, 『금석과안록』은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자료집으로 글씨를 익히는 것과는 무관하며 또, 두 종류의 순수비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금석문을 익혔다’는 서술이나 ‘우리나라 금석문을 두루 섭렵하여 『금석과안록』이라는 대표적인 자료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는 답변은 잘못이다. 이를 보면 답변자는 학서(學書)와 금석문 연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김정희가 ‘우리나라의 글씨를 익혔다.’는 서술은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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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정희가 추사체를 창안하였다’는 부분이다. 비상교육은 ‘독특한 글씨체 완성’, 리베르스쿨은 ‘파격적인 추사체 창안’, 미래엔은 ‘독창적인 추사체 창안’, 지학사는 ‘독특한 필법 창안’이라 하여 ‘창안’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분명히 말하자면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이름의 필법을 창안하지 않았다. 추사체는 김정희가 남긴 많은 작품을 후대에 와서 그의 호를 붙여 부르는 것일 뿐이다. 왕희지가 남긴 글씨는 왕희지체, 조맹부가 남긴 글씨는 송설체, 한호가 남긴 글씨는 석봉체라 부르는 것과 같다. 더구나 ‘파격적’이나 ‘독특한’ 등의 서술은 추사 글씨의 일부에 대한 주관적 표현일 뿐 추사 글씨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성격이 될 수 없다. 김정희가 남긴 작품은 그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를 장식한 뛰어난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예술적 성과를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부풀리거나 왜곡하여 서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과서에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수록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시험에 대비해 암기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행 교과서에 수록된 추사 김정희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