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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38)

척화비(斥和碑)는 흥선 대원군이 아닌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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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실록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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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척화비(斥和碑)를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라 정의하고 1871년 신미양요 후 미군이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싸운 뒤 4월 25일 퇴각하자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전국 각지에 세웠다는 것이다.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다는 서술은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학사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168)
금성출판사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 등 서양 열강의 군사적 도발을 물리친 뒤,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의 뜻을 더욱 강하게 밝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였다.(222)
동아출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2차례의 양요를 겪은 뒤 국방력을 강화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157)
리베르스쿨
두 차례에 걸친 양요를 겪은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한성 종로 거리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203)
미래엔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177)
비상교육
두 차례 양요에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198)
지학사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수교를 거부한다는 의지를 널리 알렸다.(210)
천재교육
신미양요 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수교 거부 의지를 밝혔다.(180)
 
과연 그럴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밝힌 1871년 4월 25일자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연생전(延生殿) 진강(進講)시에 영의정 홍순목과 나눈 척화와 관련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고종은 이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하교를 하고 이를 조보(朝報)에 실어 반포하도록 하였다.
 
이 오랑캐가 화친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예의를 지켜온 나라가 어찌 개나 양 같은 무리와 서로 화친한단 말인가. 비록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통렬히 끊어버리고야 말 것이니, 만약 ‘화친’이라는 글자로 말하는 자가 있거든 매국(賣國)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此夷之所欲和者, 未知何事, 而以若數千年禮義之邦, 豈可與犬羊相和乎? 雖幾年相持, 必痛絶乃已, 若有以和字爲言者, 當施賣國之律矣. - 승정원일기 1871. 4. 25)
 
화친(和親)을 말하는 자에 대한 엄격한 법률을 적용할 것을 지시한 고종의 명이다.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실린 『고종실록』에는 아래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 때에 종로(鐘路) 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는, ‘오랑캐들이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 고종실록 187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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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화비(국립중앙박물관)
이는 곧 고종의 명이 조보에 실려 반포되자 바로 척화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국가 시책이니 국왕의 명에 의해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세워진 비석에는 ‘양이의 침범에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행위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나의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서 신미년에 세움(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고종의 명에 의하여 척화비가 세워졌다는 사실(史實)은 1876 1월 27일, 우통례(右通禮) 오상현의 상소(上疏)에도 나타난다.
 
“전하께서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도(邪道)를 배척하시며 네거리에 비를 세워 ‘양이(洋夷)가 침범하였는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 행위이다.’는 글을 새겨 만년토록 온 나라의 백성에게 경계하셨으니, 누구인들 아주 흠앙하지 않겠습니까.(殿下, 衛正學斥邪道, 竪碑於通衢, 勒之以洋夷侵犯, 主和賣國, 垂戒于萬年, 八域臣民, 孰不欽仰萬萬也.)”
 
특히 이 글에서 ‘만년토록 온 나라의 백성에게 경계하셨다.’는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민(臣民)은 자손(子孫)과 같은 뜻의 단어로 척화비에 새겨진 ‘나의 만년 자손들에게 경계한다.’는 문장과 단어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의 글이다. 백성들을 신민(臣民)이라 하고 자손(子孫)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국왕 외에 따로 없다. 흥선 대원군은 군주가 아니니 백성을 자손이라 일컫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니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물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 세우는 일을 진두지휘하였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실무를 담당한 것이지 최고 통치자로서 명을 내린 것은 아니다. 척화비는 국가 최고 통치자인 고종이 화친을 배척한다는 의지를 담아 세운 비석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대국민 담화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담화문 성격의 비석을 공식적 통치 기구에 있지 않은 흥선 대원군이 세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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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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