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37)

명성황후 시해 장소로 알려진 옥호루(玉壺樓)는 옥곤루(玉壼樓)의 잘못이다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본문이미지

1895년 8월 20일(음력) 새벽, 경복궁 향원정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乾淸宮) 경내에서는 조선의 국모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가 미우라 고로의 지휘를 받은 자객(刺客)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지휘자 미우라는 조선에 부임한지 한 달이 갓 넘은 일본공사였으며, 행동대는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 등이다. 이들은 중전을 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신을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우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다.  

본문이미지
▲명성 황후가 피살당한 옥호루(리베르스쿨 225)
이 사건에 대하여 『두산백과』에는 경복궁 건청궁을 소개하면서 ‘곤녕합(坤寧閤)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고 하였으며,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에는 옥호루를 명성황후가 피살된 곳으로 표시하였다. 애초에 비밀리에 거행된 사건인데다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궁궐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정확하게 어디에서 살해되고 어디로 어떻게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건청궁 내 중전의 공간인 곤녕합(坤寧閤)과 옥호루(玉壺樓)를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사진에 보이는 현판 글씨를 모두가 ‘옥호루’로 읽는다는데 있다. ‘玉(옥)으로 만든 항아리(壺)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명성황후기념관)’는 그럴듯한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옥호’라는 이름이 건청궁 건립 시기와 멀지 않은 때에 살았던 주요 인물의 제택(第宅) 명칭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사가(私家)에서 사용하던 명칭을 그대로 궁궐에서 사용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본문이미지
▲옥호정도(국립중앙박물관)
옥호라는 이름은 최근까지 이병도(李丙燾) 가(家)에 전해지다가 2017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옥호정도(玉壺亭圖)’라는 그림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재위1800~1834)의 장인이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별서(別墅:별장)인 옥호산방(玉壺山房) 일대를 그린 것이다. 삼청동 북악산 백련봉(白蓮峯) 일대의 실제 경관을 자세하게 그린 그림에는 옥호산방 편액이 있는 사랑채 건물 외에, 후원(後園)의 죽정(竹亭)과 산반루(山半樓), 첩운정(疊雲亭), 그리고 옥호동천(玉壺洞天), 을해벽(乙亥壁), 일관석(日觀石) 등 암벽 각자(刻字)와 주요 건물의 명칭이 부기되어 있다. 옥호동천(玉壺洞天)이라는 후원의 이름에서 차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옥호산방(玉壺山房)은 김조순이 당시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문예 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옥호산방의 주인인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면서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으로 추존)의 외조부로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에게는 시외조부가 된다. 또, 신정왕후는 고종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여 익종(翼宗)의 대통을 잇도록 하였으므로 명성황후는 신정왕후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김조순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시간적으로 보나 인척 관계로 보나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이처럼 가까이 있는 인물이 늘 사용하던 사랑채의 이름을 궁궐의 중전이 거처하는 건물 명칭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어색하다. 더군다나 옥호산방은 남자의 공간이기에 더 그렇다.
본문이미지
▲ 명성황후 필적(복제, 명성황후기념관)
이 의구심에 대한 해답은 명성황후가 남긴 필적에서 쉽게 풀려버린다. 현재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기념관에 명성황후의 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玉壼(옥곤)’이라는 두 글자가 보인다. 얼핏 보면 ‘玉壺(옥호)’로 읽기 쉬우나 壺(호)와 ‘壼(곤)’은 분명 다른 글자다. 壼(곤)은 ‘궁궐 내의 길’이라는 뜻에서 내궁(內宮), 내실(內室)이라는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여기서 발전하여 중전이나 왕비의 뜻이 되어 곤전(壼殿)이나 곤위(壼位)와 같은 단어로 쓰였다. 이는 또 곤전(坤殿)이나 곤위(坤位)와 동의어로 곤(坤)과 곤(壼)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주역(周易)』에서 곤(坤)은 여러 면에서 건(乾)과 대응되는데, 건의 성질이 강건(剛健)함에 비하여 곤은 유순(柔順)함을 뜻한다. 건(乾)이 남성성(男性性)을 대표한다면 곤(坤)은 여성성(女性性)을 대표한다. 건(乾)이 임금을 상징한다면 곤(坤)은 왕비를 상징한다. 그래서 곤녕합(坤寧閤)은 왕비가 편안하게 거처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침전의 이름이다. 곤녕합에 이어서 2층 마루로 지어진 옥곤루는 그래서 호(壺)가 아닌 곤(壼)이어야 자연스럽다. 우리 역사에서 호(壺)와 곤(壼)은 글자가 비슷한 탓에 혼동하여 기록된 경우가 적지 않다. 더욱이 행서나 초서에서 두 글자는 의미에 따라 읽어야 혼동을 피할 수 있다.
 
본문이미지
▲ 品物咸亨 德合无疆
다시 명성황후의 글씨로 돌아와서 ‘壼(곤)’자 아래에는 ‘모든 사물이 다 형통하도다.’라는 뜻의 品物咸亨(품물함형)과 ‘끝이 없이 덕과 부합한다.’는 뜻의 德合无疆(덕합무강)이라는 여덟 글자가 백문(白文)과 주문(朱文)으로 찍혀 있다. 모두 『주역』 「곤괘(坤卦)」에 나오는 글이다. 명성황후는 옥곤(玉壼) 두 글자를 쓰면서 「곤괘」를 의식하였음이 분명하다. 더불어 건청궁의 건물 명칭을 정할 때 명성황후도 직접 관여하거나 최소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경복궁 건청궁은 고종의 거처이자 사랑채에 해당하는 장안당(長安堂)과 명성황후의 거처이자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坤寧閤)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들이 채워져 있다. 건청궁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다시 함광문(含光門)을 거치게 되는데 ‘함광(含光)’도 『주역』 「곤괘」에 나오는 ‘含弘光大(함홍광대)를 줄인 것이다. 다시 함광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곤녕합과 옥곤루 현판이 걸린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 건물들은 모두 「곤괘」의 의미를 담은 중전의 공간이다. 그러니 곤(坤)과 의미가 통하는 곤(壼)을 써서 옥곤루(玉壼樓)라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본문이미지
▲ 건청궁 곤녕합(坤寧閤)과 옥곤루(玉壼樓)
 
본문이미지
▲ 옥곤루(玉壼樓) 현판
현재의 건청궁 건물은 1909년 본래의 건청궁이 철거되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세워져 미술관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1998년 철거되고 옛 건청궁 복원이 시작되어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런데 옛날 사진 속에 있는 현판을 이미지 복원하여 현재 걸려 있는 현판과 비교해 보니 차이가 많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글씨의 색깔이 흑색에서 백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형도 많이 바뀌고 두인(頭印)과 낙관(落款)이 사라졌다. 좀 더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본래 모습에 가까운 복원이 되었으면 한다.
 
또, 현재 걸려 있는 주련(柱聯)도 과거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좌측으로 한 칸씩 밀렸을 뿐만 아니라 개수도 정면 5개와 우측면 2개로 모두 7개가 걸려 있다. 대부분 건물의 주련이 짝수를 이룬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입력 : 2017.10.27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