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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의 금강전도(리움 소장) |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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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二千峯皆骨山(만이천봉개골산) 일만이천봉 개골산을
何人用意寫眞顔(하인용의사진안) 어느 누가 참모습 그릴 생각이나 했으랴.
衆香浮動扶桑外(중향부동부상외) 많은 향기는 동쪽 바다 너머에 떠돌고
積氣雄蟠世界間(적기웅반세계간)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크게 서렸네.
幾朶芙蓉揚素彩(기타부용양소채) 몇몇 송이 부용은 흰 빛깔 드날리고
半林松栢隱玄關(반림송백은현관) 반쯤 되는 송백 숲에는 집이 숨어있다.
縱令脚踏須今遍(종령각답수금편) 설령 지금 당장 걸어서 두루 다닌다 한들
爭似枕邊看不慳(쟁사침변간불간) 머리맡에 두고 아낌없이 보는 것에 비기랴.
개골산(皆骨山)은 겨울 금강산의 이칭이다.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岳山)이라 한다. 둘 째 구의 중향(衆香)도 불교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다스린다는 중향국(衆香國)의 준말로 금강산을 가리키는 말이니 중의법(重義法)으로 쓰였다. 부상(扶桑)은 중국 전설에서, 동쪽 바다 속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를 이른 데서 해가 뜨는 동쪽 바다라는 뜻으로 옛글에 자주 등장한다.
1‧2구가 금강산의 참모습 그리기가 쉽지 않음을 표현하였다면, 3‧4구는 멀리서 본 금강산에 대한 묘사다. 동쪽 바닷가에 떠도는 많은 향기와 온 누리에 크게 서려 있는 기운, 이것이 제화시의 작가가 생각하는 금강산의 모습이다. 5구는 오른쪽에 흰색으로 우뚝 우뚝 솟아오른 금강산의 봉우리를 부용(芙蓉)으로 표현하였고, 6구는 왼쪽 송백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집들을 묘사하였다. 여기까지가 금강전도에 대한 묘사다. 그 다음 7‧8구는 이 그림에 대한 작가의 소회를 나타낸 것이다. 금강산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직접 걸어 다니며 두루 구경한다 한들 이 그림을 머리맡에 두고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보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그림에 대한 이만한 찬사가 다시 있을까 싶다.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는 금강전도를 보고 느낀 점을 유감없이 드러낸 찬사(讚辭), 즉 화찬(畵讚)이다. 화찬은 감상자가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시나 글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조선전기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안평대군의 시를 비롯한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화찬(畵讚)이 대표적이다. 만약 화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화찬까지 썼다면 이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인 셈이다. 때문에 금강전도를 극찬한 이 시를 겸재가 직접 짓고 썼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글씨도 겸재의 필법과 전혀 다르다. 겸재가 그린 여타의 그림에 써진 글씨는 그림의 흐름과 유사하게 거침이 없는 반면 금강전도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유연한 행서로 많은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글자 수를 좌우 대칭이 되도록 배분하고 그 아래 빈 공간에 ‘甲寅冬題’라는 네 글자를 네모 안에 넣은 것도 배치에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자유분방한 겸재의 글씨와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최완수 실장도 이 제화시는 겸재의 글씨가 아니라고 한 바가 있으며, 기법 상 70대 중반을 넘겨 1752년 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면서 갑인년은 1734년이 아닌 1794년이 오히려 맞는다고 하였다. 공감하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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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가 이 화제시를 짓고 썼는지 궁금해진다. 지금으로서는 도서(圖書)와 이름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부상외(扶桑外)’가 ‘동쪽 바다 바깥’, ‘동쪽 바다 너머’의 뜻을 지니고 있어 적어도 조선인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조선이 기준이면 부상외는 일본이 된다. 하지만, 금강산이 있는 조선이 ‘부상외’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은 중국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청나라 사람 중 감식안이 뛰어난 누군가가 금강전도를 본 다음 시를 짓고 손수 썼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해줄 다른 근거는 없다. 분명한 건 이 화제시를 겸재가 짓고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1734년 겨울에 그린 그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