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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18세기의 화가인 강희언(姜熙彦:1710~1764)의 작품이다. 오른쪽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登桃花洞望仁王山)’라는 화제(畫題)가 있어 인왕산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렸으니 실경산수(實景山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왕산도」를 찾으면 ‘조선 후기의 화가인 강희언이 그린 실경산수화’라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이어진 설명에서는 ‘이 「인왕산도」는 조선 후기 정선의 영향을 받은 정선 일파의 실경산수화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고 하였으며, 같은 사전에서 강희언을 검색해도 ‘정선 일파의 실경산수화풍’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두산백과』에서는 ‘정선의 실경산수화풍이 완연한 「인왕산도」는 당시로서는 좀처럼 실현하기 어려웠던 정확한 원근법과 완전한 투시법으로 그려진 서구적 기법의 사생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뛰어난 작품이다.’고 하였다.
강희언의 「인왕산도」에 대해 모두 ‘정선의 실경산수화풍’이라 한 것이다. 왜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아니고 실경산수화풍인가? 그렇다면, 이 그림은 실경산수인가? 진경산수인가? 아니면 실경산수도 되고 진경산수도 되는가? 분명한 것은 이 그림을 실경산수라고 했을 때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을 진경산수라고 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진경산수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진경(眞景)이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논리 부족 때문이다.
‘진경(眞景)’은 표암 강세황이 겸재 정선의 화첩에 쓴 발문(跋文)에서 ‘정겸재는 동국 진경을 가장 잘 그렸다.(鄭謙齋 最善東國眞景)’고 한데서 출발한다. 이렇게 출발한 진경은 최완수 실장이 정선을 두고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라 하고, 유홍준 교수는 ‘정선이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다.’고 함으로써 ‘진경’은 겸재 정선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산수화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진경(眞景)을 그리는 자는 늘 지도와 같을까 걱정하는데 이 그림은 매우 핍진(逼眞:진짜에 가깝다)한 데다 화가의 모든 법도 잃지 않았다.(寫眞景者 每患似乎地圖 而此幅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는 표암 강세황의 화찬(畵讚)이 있다. 이를 보면 표암은 진경이란 용어를 겸재 정선의 그림에 한정하여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표암은 정선의 그림이나 강희언의 그림이나 ‘진짜에 가까운 풍경’, ‘정말 제대로 그려낸 풍경’이라는 의미에서 ‘진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진경이라는 단어는 우리 산천의 특징적 요소를 제대로 그려낸 풍경화에 대한 찬사이자 미칭(美稱)이다. 진경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감상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다. 감상자에 따라 우리의 산천을 ‘정말 제대로 그려낸 풍경’이라 생각한다면 진경이라 할 것이고 동국진경이라고도 할 것이다. 남종화법이든 서양화법이든 상관없이 감상자의 판단에 따라 진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동일한 작품이라도 감상자의 판단에 따라 진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경은 고정 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감상자에 따라 얼마든지 변동 가능한 개념이다. 이것이 ‘진경산수’나 ‘진경문화’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다.
최완수 실장은 진경시대를 구성하는 요소로 그림에는 진경산수(眞景山水), 글씨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 시에는 진경시(眞景詩)를 들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경산수는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용어다. 진경산수의 올바른 표현은 실경산수다. 동국진체는 최완수 실장이 초보적인 한문을 오역(誤譯)했거나 오역인줄 알면서도 동국진경(東國眞景)과 짝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용어다. 동국진체라는 새로운 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경시도 진경산수와 같은 맥락에서 성립할 수 없는 용어다. 풍경을 묘사한 시는 일반적으로 사경시(寫景詩)라 한다.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실체가 없거나 잘못 지어진 이름이니 이를 근거로 한 ‘진경시대’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다.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文化絶頂期)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 그 기간은 숙종(1675~1720)대에서 정조(1777~1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이라 할 수 있는데 숙종 46년과 경종4년의 50년 동안은 진경문화의 초창기라 할 수 있고, 영조51년의 재위기간이 그 절정기이면 정조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진경문화가 이 시대에 이르러 이처럼 난만한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의 뿌리가 되는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라는 고유이념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최완수 외, 『진경시대1』 13)
최완수 실장은 존재하지도 않는 진경시대에 대해 시기로는 조선후기 1675년부터 1800년까지 125년간이며, 특징으로는 ‘조선 고유색’이 드러나고, 이념적으로는 ‘조선 성리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정의하였다. ‘조선 고유색’이나 ‘조선 성리학’이 근거 없는 표현임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시기를 125년으로 설정한 것도 근거가 없는데다 서술된 곳마다 제 각각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라 하였는가 하면,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설령 1800년까지를 진경시대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이후 우리 산천을 그린 산수화에 대한 명칭도 문제다. 진경시대가 끝났으니 더 이상 진경산수라 할 수 없을 테고, 실경산수를 이어서 진경산수가 등장했다고 했으니 다시 실경산수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또,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를 창시했다고 하였으니 겸재 전에 진경산수가 나와서도 안 된다. 그런데, 『신편한국사』에는 고려 중기경부터 전개되었던 기존의 실용적인 실경도가 17세기의 조선 중기를 통해 진경산수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전환에는 김식(金禔:1524∼1593)과 이경윤(李慶胤:1545∼1609)과 같은 대표적인 문인화가들이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16세기에 이미 몇몇 작가들이 진경산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조속(趙涑:1595∼1668)과 김명국이 진경산수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한시각(韓時覺:1621∼?)의 『북관실경첩(北關實景帖)』과 조세걸(曺世傑:1636∼1702)의 『곡운구곡첩(谷雲九曲帖)』 등의 진경산수화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겸재 이전에 이미 진경산수가 존재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시각의 산수를 진경산수라고 하면서도 정작 화첩은 『북관실경첩』이다. 앞뒤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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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박연폭’ |
진경산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겸재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표암 강세황 등 조선 후기의 많은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산수화를 비롯하여 시의도(詩意圖), 고사인물도, 화훼도(花卉圖)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 그는 특히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 독자적 기법을 구사하여 우리의 산천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산수는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동국진경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다 하여 동국진경의 창시이니 진경산수의 대가이니 하는 수식어를 동원하여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감상자에 따라서 겸재를 으뜸으로 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단원을 으뜸으로 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다른 화가를 으뜸으로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주관적 판단과 취향에 달려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겸재 정선은 어떤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 존재가 되어있다. 남겨진 글 한 줄 없는데도 조선 성리학의 대가요 주역의 대가가 되어 있다. 고유(固有)란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뜻임에도 조선 고유색의 발현자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자가 되어 있다. 진경산수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데 진경산수의 시조이며, 창시자이며, 개척자이며, 대성자가 되어 있다. 진경문화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진경문화의 주도자요 장본인이요 중심인물이 되어 있다. 급기야 우리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화성(畵聖)의 지위에 오르셨다. 왜 겨우 화성(畵聖)인가? 이 정도 능력자라면 신(神)적 존재나 마찬가지이니 화신(畵神)으로 추앙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겸재 정선을 ‘진경산수’라는 허울을 씌워 화성(畵聖)으로 추앙하는 순간 우리 미술사는 심각한 왜곡의 늪에 빠져든다. 겸재의 다양한 그림 중에 진경산수라 불리는 그림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겸재를 제외한 나머지 화가들도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미술에는 겸재의 진경산수화만이 존재하고 겸재 정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만약, 겸재 정선이 환생하여 자신이 진경산수의 창시자요, 진경문화의 주도자요, 진경시대의 대표적 화가로 화성(畵聖)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작금의 현상을 목도(目睹)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흐뭇해할까? 아니면 아연실색(啞然失色)할까?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그가 남긴 작품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작품이 아닌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과대평가하거나 추앙하는 순간 그는 예술가가 아닌 우상(偶像)이 되어버린다. 작금(昨今)의 겸재 우상화는 겸재에 대한 영예(榮譽)가 아니라 모욕(侮辱)이다. 더 이상 겸재 정선을 욕보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