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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33)

진경시대는 없다.(1) -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아닌 산수화는 위경산수(僞景山水)인가?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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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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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의 창시자, 겸재 정선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창비, 67)
 
이것은 현행 교과서인 『고등학교 국어Ⅱ』에 실린 글이다. 이 글대로라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한 인물이다. 실로 위인전(偉人傳)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정선이 창시한 진경산수는 종래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정선이 창시했으니 정선 이전에는 진경산수가 없어야 하고, 정선이 완성했으니 정선 이후에도 진경산수는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가 있다면 그것은 정선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진경산수는 정선이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은 실상 겸재 정선의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자리매김한 최완수 실장(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아래는 최완수 실장의 글이다.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의 시조인 것이다.(『진경시대2』 51, 돌베개)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를 주도해 간 장본인으로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수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최완수 실장 외, 『진경시대2』 107, 돌베개)
 
학술 용어는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글을 보면 진경산수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유홍준 교수는 정선이 진경산수(진경산수화와 동일-필자 주)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다고 한 반면, 최완수 실장은 정선을 두고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라고 했다.
 
여기에 더하여, 간송미술관의 연구원인 탁현규는 ‘겸재가 진경산수를 창안, 발전, 절정, 추상화까지 이루었기 때문에 후대 화가들이 겸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네이버 미술캐스트, 진경산수 비교 감상하기)라고 했다. 사용된 단어를 보면 창시, 창안, 개척, 발전, 완성, 대성, 시조 등 참으로 화려하다. 한 사람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기 위해 세상의 좋은 말은 다 동원한 것 같다. 예술 분야에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분이 또 있을까? 그러니 화성(畵聖:그림의 聖人)’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완수 실장의 진경시대(眞景時代)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수시로 만나는 것이 ‘고유(固有)’라는 단어다. 최완수 실장은 겸재를 두고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했다. 고려 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도입된 이래 조선조가 이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학자들이 나타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밝히고 이를 글로 남겼다. 조선 초에는 정도전과 권근이 있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이 발단이 되어 7년간 논쟁으로 이어진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있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이기론(理氣論) 대화가 있었고, 송시열(宋時烈)의 재제자(再弟子)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있었다. 이 외에도 성리학에 대한 학설을 남긴 학자는 부지기수(不知其數)다.
 
그렇다면, ‘조선 성리학’은 이들 모두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인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학자마다 주장이 다른 성리학을 두고 하나로 아울러 조선 성리학이라 일컫는 것도 부당하지만, 특정인의 성리학을 두고 조선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또, 어느 쪽이든 그 성리학이 조선 고유의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주지하듯이 성리학은 송(宋)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의 성격조차 불분명하게 제시한 최완수 실장은 정선에 대해 ‘조선의 고유사상인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지었다. 성리학과 같은 고도의 사상 체계는 해당 학자가 남겨놓은 글을 통해서만이 파악할 수 있다. 정선이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면 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선은 문집은커녕 그 흔한 시 한 수조차 찾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최완수 실장은 정선의 그림을 두고 ‘조선 고유색’, ‘우리 고유의 화법’, ‘우리 고유의 회화미’라고 하였다. ‘고유(固有)’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유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과거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화법이나 회화미와 같은 요소가 만약 고유의 것이라면 이는 ‘계승(繼承)‧발전(發展)’시킬 수 있을지언정 새롭게 창안하거나 창시할 사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최완수 실장의 주장대로 정선이 창안한 화법이나 회화미를 두고 여기에 ‘고유(固有)’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라면 더더욱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정인이 창안한 것을 두고 후대에 와서 ‘고유’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 글만 보면 정선과 진경산수화는 엄청난 화가이고 대단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眞景山水)’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유홍준 교수는 앞의 글에서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 최완수 실장 실장은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고 하였다.
 
사진기법과 초상기법을 동원하여 산수의 정신까지 어떻게 묘사해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우리나라에 실재(實在)하는 풍경(風景)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는 산수화의 소재(素材)를 상상 속의 풍경이 아닌 ‘실재하는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산수화’는 당연히 ‘실경산수(實景山水)’다. 그런데, 왜 진(眞)자를 써서 진경산수라고 하였을까? 아래 글은 탁현규가 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원이 쓴 글이니 최완수 실장의 생각도 이와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Q. 그럼 실경(實景)산수와 진경산수는 다른 그림인가요?
 
옛날 사람들이 쓴 책을 보면, 진경이란 말보다 실경이란 말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경이란 말이 더 뒤에 나옵니다. 실경에는 산수뿐만 아니라 지도와 같은 지형도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 산천을 산수화로 그리면서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이상 경치가 아닌 진짜 경치로 불러 준 것입니다. 실경과 진경은 비슷한 의미지만 산수화를 이야기할 때는 진경산수화라고 부르는 게 올바릅니다.(진경산수화 감상법 - 네이버 미술캐스트)
 
집필자는 분명 실경산수와 진경산수가 다른 그림이라는 주장을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 글을 몇 번이나 읽고도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선, 집필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를 포함한 그림을 실경산수라 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잘못이다. 실경산수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가 포함된 실용적 그림도 있으나 완상(玩賞)을 위한 산수화나 기록을 위한 산수화 등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집필자가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불러 준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는 제목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는 의미의 강약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정선의 그림이 여타의 그림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진(眞)이란 글자로 바꾸어 정한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정선의 진경산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홍준 교수와 최완수 실장의 글에 모두 드러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황산도>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寫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 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유홍준 교수가 쓴 이 글을 요약하면,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그리면서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는데, 이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남종화 기법을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정선이 창안한 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에서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구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즉, 소재의 변화가 아닌 기법(技法)의 변화를 말한다. 변한 것은 기법인데 정작 소재로 인해 주어진 명칭인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바뀌어버렸다.
 
최완수 실장의 주장은 더욱 분명하다.
 
겸재는, 스승 삼연과 집우 사천이 진경시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사생해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림으로 바꿔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창강 조속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성리학파들의 숙제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겸재는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중략- 이는 중국 회화사에서 항상 시도하면서도 이루어내지 못하였던 남북방화법의 이상적 조화의 성공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기도 하였다. 이런 화법은 겸재가 벌써 36세에 금강산을 그려내면서 시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완성해 낸 독자기법이었던 것이다.(최완수 외, 『진경시대1』, 27~28)
 
최완수 실장은 정선이 남종화와 북종화를 수용한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하고 이를 36세에 금강산을 그리면서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독자적 기법으로 완성했다고 하였다. 정선이 완성한 그 독자적 기법이 바로 진경산수화이고, 진경산수화법이고 진경산수화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완수 실장의 글에서는 화(畵)와 화법(畵法)과 화풍(畵風)을 번갈아 쓰고 있다. 혼란스럽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정의하고, ‘화풍은 종래의 실경 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테마로 보는 미술」에서는 ‘진경이란 용어 자체가 남종화의 개념이듯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도 남종화풍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하여 진경을 남종화와 동일시하였다. 이렇듯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라는 것은 실상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새로운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산수화’를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 교과서에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교학사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였고,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통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 화가는 정선이었다. 그는 우리의 자연을 직접 보고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153)
금성출판사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다. (204)
동아출판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중국의 화법을 모범으로 하여 이상향을 그리는 관념적인 산수화 대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조선의 자연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구도와 화법을 창안하였다.(142)
리베르스쿨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과 인물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가 발달하였고,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은 한성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들을 직접 돌아보고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사실적으로 그렸다.(188)
미래엔
후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림과 글씨에서도 한국적 고유색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림에서는 정선이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인왕제색도금강전도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165)
비상교육
그림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사실적으로 표현진경산수화와 백성의 생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풍속화등장하였다. 특히 정선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기존의 산수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여 금강전도인왕제색도등의 진경산수화를 그렸다.(184)
지학사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진경산수화는 우리 고유의 자연과 풍속을 대상으로 하면서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르게 수용하여 창안된 새로운 화법이다.(190)
천재교육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산수화가 등장하였는데, 이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다.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선은 금강전도인왕제색도등을 통해 사실 그대로의 조선의 자연을 독특한 필체로 담아내었다.(159)
 
위와 같이 한국사 교과서에는 진경산수화에 대해 ‘등장’, ‘유행’, ‘시작’, ‘발달’ 등 실로 다채롭게 쓰고 있다. 이 네 단어는 같은 뜻일까, 아니면 다른 뜻일까? 또, 정선의 업적에 대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 이룩’, ‘회화의 토착화 이룩’, ‘독자적 구도와 새로운 화법 창안’, ‘진경산수화의 개척’, ‘독자적 화풍의 개척’, ‘새로운 기법 활용’ 등 참으로 풍성하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이렇게 다양한 서술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역사 해석의 다양성인가?
 
그런가 하면, 정선의 그림을 두고 ‘사실적 그림’ 또는, ‘사실적 표현’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술서나 대중 역사물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최완수 실장이 진경산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 한 것을 보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 기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선의 그림은 전혀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아니다. 만약, 정선의 그림을 두고 말한 ‘사실적 표현’이라는 서술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학술 용어의 자의적 사용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후기에 겸재 정선이 창안하고 완성한 산수화’로 정의된다. 그런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이렇게 정의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여러 혼선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진(眞)’이라는 글자로 인한 혼선이다. 진(眞)은 기본적으로 ‘가치 평가’를 위한 글자이기 때문에 비평자의 관점에 따라 ‘진(眞)’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자연을 담은 실경산수를 그려왔고 지금도 그리고 있다. 그 그림 중에 남종화 기법이 있으면 진경산수이고 없으면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정선을 포함하여 우리의 산천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 중에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한 사람의 작품 중에도 시기에 따라 작품에 따라 우열이 있는데, 작품성이 뛰어난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경산수가 아닌 산수화는 위경산수(僞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실경산수(實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또, 정선 이전에 진경산수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안자이고 창시자이고 시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완수 실장 스스로도 정선 이전 인물인 조속(趙涑)에 대해 ‘인조반정 성공 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사생(寫生)해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이때 사생해낸 시를 진경시(眞景詩),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경산수의 창시자는 정선이 아닌 창강 조속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에도 ‘명산탐승 중에 절경을 보면 문득 말에서 내려앉아 “率意畵出眼前光景(솔의화출안전광경)” 즉 “눈앞의 광경을 뜻(창생적 흥취)에 따라 그려내고” 천기론(天機論)에 입각한 자득적 창작으로 평가받은 조속(1595∼1668)과 금강산 만이천봉을 최고의 전신법(傳神法)으로 묘사한 김명국(1600년경∼1662년 이후)이 진경산수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서술하였다. 정선 이전에도 이미 진경산수 작가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진경산수는 곧 정선의 그림이라는 인식이 각인됨으로 인해 미술사에서 남종화 기법과 관련 없는 여타 작가들이나 작품이 매몰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정선의 화법 또는 남종화법을 구사한 작가나 그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정선의 아류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래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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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세황의 영통골입구 그림

이 그림에 대해 교학사 교과서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소개하고 난 다음 ‘이 밖에도 산수화에 서양 화풍을 접목한 18세기의 강세황과 다양한 소재를 힘차고 능숙한 필법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19세기의 장승업도 주목할 만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영통골 입구의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임에도 서양화 기법을 적용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정선의 진경산수와 별도로 취급되는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세황의 ‘영통골입구도’나 우리의 산천을 그린 실경산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정선의 그림은 중국의 남종화기법을, 강세황의 그림은 서양화기법을 적용한 점이다.
 
교과서는 전문가가 아닌 어린 학생들이 보고 공부하는 책이다. 당연히 개념이 분명하고 설명이 일목요연해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자들조차 실상에 맞지 않은 용어를 제시하고 제대로 된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니 8종 교과서의 서술이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일선 교사들은 과연 진경산수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이는 불가능하다. ‘진경산수’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사 교과서에 제시된 작가와 작품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조선후기 산수화에 대한 서술을 재정리해본다.
 
산수화는 상상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이 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기록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의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서양화 기법을 구사하여 영통골입구도와 같은 독창적인 실경산수를 남겼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에는 대부분 화제(畵題)에 지역이나 명승지(名勝地)의 이름이 들어 있어 어느 곳을 그렸는지 쉽게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은 ‘버려야 한다.’이다. 지금까지 18세기에 유행한 산수화로 소개된 진경산수는 실상 소재(素材)와 기법(技法)을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진 용어다. 이는 반드시 ‘실경산수’로 바로잡아야 한다.▩

입력 : 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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