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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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문제는 최근 치러진 제3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문제 중의 하나다.
‘이 사당은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 (가) ]의 위패를 모신 충청남도 청양의 모덕사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던 그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하였습니다.’
(가)에 해당하는 인물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으로 그는 상소(上疏)에서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첫째, 흥선 대원군은 공식적 통치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하야(下野)’라는 용어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냥 ‘영향력 상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다.
둘째, 위에서 말한 소(疏)는 최익현이 1873년에 올린 것으로 여기에는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 내용이 없다. 고종의 친정은 1866년 2월 13일 대왕대비가 철렴(撤簾:수렴청정을 거둬들임)과 함께 전권 위임을 선포함으로써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친정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지문은 완전히 엉터리다. ‘하야(下野)’와 ‘친정(親政)’의 의미를 알고, 해당 상소를 한 번이라도 읽어봤더라면 이런 지문을 쓸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는 1863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 대원군이 마치 최고의 권좌에 앉아서 모든 국정을 통할(統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경복궁 건립도 그 중의 하나다.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란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었다.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도 발행했는데,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였다. 또 백성을 강제로 동원했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했으며,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베어냈다.<미래엔, 174>
대원군이 집권 후 심혈을 기울인 다른 한 가지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중략- 흥선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4월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스스로 진두에서 사업을 지휘하였다.<『신편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윗글은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와 『신편한국사』의 서술이지만 나머지 교과서도 대동소이하다. 이를 요약하면,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이를 위해 1865년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진두에서 사업을 지휘했다는 것으로 경복궁 중건의 주체가 흥선 대원군이라는 논지다. 과연 그럴까?
아래는 이와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이다.
대왕대비전이 전교하기를,“경복궁(景福宮)은 바로 우리 왕조가 설 때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정궁(正宮)이다. 규모의 정대함이나 위치의 정제함에서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볼 수 있고, 정령의 시행이 하나도 정도(正道)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복을 입은 것이 이 궁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란으로 불타 버린 뒤 미처 중건하지 못하여 뜻 있는 이들이 탄식해 온 지 오래되었다. 지금 정부의 중수를 인하여 국가가 융성할 때 민물(民物)이 번창하고 훌륭한 이들이 등용된 것을 매양 생각하면 대체로 공경히 되뇌이며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중략- 이 궁궐을 중건하여 중흥의 대업을 이루려면 여러 대신들과 일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원임 대신은 내일 음식을 내린 뒤에 남아서 기다리라.”하였다.<『승정원일기』 1865. 4. 2.>
경복궁은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4년 12월부터 이듬해 9월에 걸쳐 정도전의 지휘 아래 건립된 조선의 정궁(正宮)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燒失)되었다. 그 후 순조와 헌종 때에 중건을 시도한 바가 있으나 재정이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고종 즉위와 함께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로부터 시작되었다. 전교가 있은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논의를 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날 동녕위(東寧尉) 김현근을 비롯하여 80여명이 넘는 2품 이상의 대신들이 개진(開陳)한 의견을 모아 보고하였는데 하나같이 적극 찬성이었다. 이에 고종은 “여러 재상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의정부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품의한 뒤 조처하도록 하라.”고 전교(傳敎)함으로써 경복궁 중건은 결정되었다.
이어 같은 날 오후에는 대왕대비가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을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어제 경복궁의 중건 문제를 명령한 바가 있는데 경들은 들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경복궁 중건에 관한 논의는 이어졌다. 이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이, “지금 받은 명령은 대소 신민들이 항상 바라던 것입니다. 그런데 궁전을 짓자면 먼저 규모도 정하고 준비도 있어야만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대왕대비는 "나라에서 공사를 하려고 드는 이상 안 될 리가 있겠는가? 옛날 그 대궐을 사용할 때에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므로 태평 시대라고 칭송하였다. 그 때문에 주상이 백성을 위하여 이 공사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라 하며 중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경복궁을 중건하여 사용하면 백성들이 늘어나고 물산이 풍부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배어있는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오후 소견에서는 경복궁 중건에 대한 핵심적인 두 가지 사안이 거론되었다. 하나는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고 대왕대비가 윤허함으로써 별 논란 없이 결정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책임 관리 차출이었다. 영건도감 설치에 따라 임명된 책임 관리로는 도제조(都提調)에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이, 제조(提調)에는 흥인군 이최응, 좌찬성 김병기, 판중추부사 김병국, 겸호조판서 이돈영, 대호군(大護軍) 박규수, 종정경 이재원 등이었다. 국가적인 대역사(大役事)인만큼 영의정에게 공사의 모든 책임을 맡긴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경복궁 중건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민력(民力)의 동원과 재원 마련의 문제였다. 영의정 조두순이 “경복궁 중건에 민력(民力)을 동원할지의 여부는 온 조정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아뢰겠다.” 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는 “실로 재물을 마련하자면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길밖에 없어 결국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여야 할 형편인데 절약하는 방도는 유사(有司)들이 어떻게 조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여 민력 동원의 불가피성을 아뢰는가 하면, 좌의정 김병학은 "대체로 나라에 큰 공사가 있으면 으레 백성의 힘을 빌리는데 이것은 어버이의 일을 도우려고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여 민력 동원이 관례임을 강조하였다.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에 백성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대신들의 의견에 대왕대비는 “이번의 중건 공사는 순전히 백성들을 위하여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맨 먼저 백성들의 힘을 소비할 수 있겠는가?”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자 정원용은 "옛 제도에도 한 해에 백성들의 품을 3일간 썼습니다. 이런 나라의 공사에 백성들이 품을 들이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백성 동원의 불가피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어 대왕대비가 백성들의 힘만 빌릴 것인지에 대해 묻자 조두순은 서민(庶民)뿐 아니라 위로 경재(卿宰)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힘을 내어 돕게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위로 경재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동원되는 국가사업을 구중궁궐에 있는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왕대비는 흥선 대원군의 조력(助力)을 얻고자 하여 영의정 조두순에게 아래와 같은 명을 내린다.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精力)으로는 미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大院君)에게 맡길 것이니, 매사를 반드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如此重大之事, 以予精力, 有所不逮, 故都委於大院君矣, 每事必講定爲之也.)<『승정원일기』 1865. 4. 3.>
대왕대비의 명을 받은 조두순은 ‘하교(下敎)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모든 것이 정리 됐다.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중건의 책임자인 도제조 조두순은 중요한 문제를 흥선 대원군과 협의를 거쳐 결정해야만 했다. 흥선 대원군에게는 일종의 자문 역할이 부여된 셈이다. 이는 서원을 정리할 때 전국의 1인(人) 1원(院)에 한해 존속시키고 나머지 모든 서원을 철폐할 때 그 대상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실질적 문제는 흥선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해서 실행하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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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서울 종로) - 동아출판 155쪽 |
자문 역할이 부여되긴 했지만 중건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이 반드시 그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했으니 실로 막강한 권한이 아닐 수 없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건립의 총감독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흥선 대원군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국왕이 아니다. 서원 철폐 때도 그랬고 경복궁 중건 때도 그랬듯이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가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국왕의 조력자(助力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합법적 최고 통치 기구인 대왕대비나 국왕을 배제하고 흥선 대원군이 마치 국왕의 지위에서 국정을 총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서 1863년부터 1873년까지의 역사 서술에는 고종은 없고 오로지 흥선 대원군만이 있다.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