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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미조약 원문 부분 |
현행 교과서에서는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의 제1관을 들어 ‘타국이 분쟁을 일으킬 경우 중간에서 조정한다.’는 뜻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래는 이에 해당하는 제1관 번역문이다.
제1관 ......만약 타국이 어떤 불공평하고 경멸하는 일을 일으켰을 때는 일단 확인하고 서로 도와주며, 중간에서 잘 조정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 준다.(천재교육 185)제1조 조선과 미국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 우호를 지키되 만약 타국이 불경하는 일이 있게 되면 1차 조사를 거친 뒤에 서로 도와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리베르스쿨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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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천재교육 교과서 185쪽 우) 리베르스쿨 교과서 208쪽 |
이 인용 사료에 해당하는 한문본 원문은 '若他國有何不公輕藐之事, 一經照知, 必須相助, 從中善爲調處, 以示友誼關切.'이다.
여기서 '一經照知(일경조지)'를 천재교육은 '일단 확인하고'라 번역하였으나 이는 『고종실록』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리베르스쿨의 '1차 조사를 거친 뒤에'라고 한 것은 원문을 무시한 기발한 창작이다. ‘一經(일경)’은 '거치다.'라는 뜻이며, '照知(조지)'는 '知照(지조)', '告知(고지)', '照會(조회)'와 같이 쓰이는 용어로 '통보', '통지', '고지' 등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一經照知(일경조지)’는 '통지를 거쳐', '통지 하면', '통지에 따라'와 같이 번역해야 한다. 이어지는 必須相助(필수상조)에서 相(상)은 대부분 대상이 있을 때 삽입되는 글자로 굳이 번역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도와준다.’고 번역하면 된다. 이에 따라 위 조항을 다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만약 다른 나라가 어떤 불공정하거나 경멸하는 일을 일으키면 통지를 거쳐 반드시 도와주고,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우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 두고 천재교육 교과서에는 ‘도움말’이란 항목을 정해 아래와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내용 중 가장 큰 특징은 거중 조정(good office,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돕고 조정한다는 것), 관세 자주권, 최혜국 대우 등이었다. 거중 조정에 대해서 미국은 의례적인 표현으로 생각하였으나, 조선은 미국과의 동맹으로까지 확대하여 받아들였다. 이후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을사조약 등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미국에 거중 조정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협조하지 않았다.’
요약하면, ‘거중조정은 관세 자주권 및 최혜국 대우와 함께 「조미조약」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조선은 이를 중요하게 받아들인 반면 미국은 의례적 표현으로 생각하여 이후 조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거중 조정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1905년 7월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의 의도도 갖지 않는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의 평화에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가쓰라・테프트 협약도 함께 거론된다. 을사조약 이후 조선이 도와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미국이 거중조정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이 협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교과서의 도움말처럼 의례적인 표현이지 어떤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제1관은 조약 전체의 내용을 아우르는 총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대부분 다소 의례적이고 상투적 표현이 들어간다. 여기의 ‘중간에서 잘 조처한다.’는 문구도 의례적 표현으로 이후 영국,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와의 조약에도 똑같이 등장하며, 「한청통상조약(1899)」에는 위에 거론한 한문본과 한 두 글자의 차이만 있을 뿐 문장 전체가 동일하다. 특정 국가와의 조약에만 삽입된 의미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중간에서 잘 조처한다.’는 표현만 믿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영문본 제1관인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보면 알 수 있다. 한문본과 이 영문본을 비교해보면 한문본에는 영문본에 없는 문구가 더 있다. 이는 ‘必須相助’로 ‘반드시 도와준다.’라는 문구다. 교과서에 서술한 대로 고종이 제1관을 근거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면 아마도 ‘중간에서 잘 조처한다.’는 상투적 표현 보다는 ‘필수상조’라는 문구에 더 의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례적 표현인 ‘중간에서 잘 조처한다.’는 문장을 두고 ‘거중 조정’이란 이름을 붙여 비중 있게 다루어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이다.
우리 역사 연구는 한문 원전부터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 한문 번역이 틀리면 그 다음부터는 점점 역사적 사실에서 멀어지게 된다. 우리 역사 연구에서 한문 소양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