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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9)

1920~30년대 쌀 수출인가? 수탈인가?(4) - jtbc의 팩트 체크, 이정도면 거짓 선동 방송이다.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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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는 2015년 10월 15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특집토론' 짚어보기에서 그 전날 있었던 국정교과서 토론 중 쌀 수출이냐 수탈이냐에 대한 팩트 체크를 내보냈다. 'fact'라는 제목이 붙은 만큼 모두가 ‘사실’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먼저 김필규 기자의 말이다.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해 쌀을 일본으로 내보낸 게 수출이냐 수탈이냐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수출과 수탈을 마치 竝用(병용)할 수 있는 단어처럼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병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수출의 주체는 조선이고 수탈의 주체는 일본이기 때문이다. 수출의 상대어는 수입이고, 수탈의 상대어는 피탈이다. ‘내보낸 것’이란 뜻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輸移出(수이출), 수출, 이출, 搬出(반출) 등이 있다. 말꼬리 잡는 것 같지만 방송 언어는 정확해야 한다.
 
다음으로 현행 역사교과서에 이 부분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에 대한 앵커의 질문에 기자는 ‘8종 교과서에 어떤 용어 썼나’라는 제목 아래 교과서 표지와 함께 각각 사용된 단어를 제시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가 8종 교과서 모두를 확인한 결과 미래엔, 교학사 등 4종에서는 수탈로 표현했고 지학사 등 3종은 수출이나 수탈이란 표현 없이 반출이라는 표현을, 나머지 한 교과서에선 수출수탈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행 8종 검정 한국사 교과서를 모두 확인했다. 위 그림에서 상단에 거북선 이미지가 있는 그림은 현행 교과서에 없는 표지이나 이에 해당하는 출판사는 리베르스쿨이다. 이제 위의 그림과 같은 순서로 출판사를 배치하고 산미 증식 계획 부분에 서술된 단어를 찾아 빈 칸을 채웠다.
 
8종 교과서 서술 표현 ( )안 숫자는 노출 횟수, 은 조선 입장/는 일본 입장
미래엔
리베르스쿨
교학사
천재교육
수탈
반출(2)
반출(2)
반출
반출, 수출
수탈(2)
 
수탈(3)
약탈, 수입
수탈(2)
 
 
가져가다(2)
지학사
동아출판
금성출판
 
반출
반출(2)
판매, 유출
반출(3)
 
가져가다(2)
가져가다(3)
 
 
비상교육
 
 
 
수출+수탈
수출 유출
빠져나가다
 
 
 
 
 
 
 
 
이를 보면 수탈로 표현한 교과서는 3종이다. 특히 리베르스쿨의 경우 수탈 외에 약탈・수입이란 용어도 함께 사용하였다. 일본이 어떤 때는 수탈하고, 어떤 때는 약탈하고, 어떤 때는 수입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전문가 한 명 없이 교사 서 너 명이 만든 교과서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두 번째 지학사 등 3종은 수출이나 수탈이란 표현 없이 반출을 썼다고 했으나 동아출판과 비상교육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에서 반출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반출 외에 다른 용어도 함께 썼다. 반출은 수출과 동의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마지막의 비상교육은 수출과 수탈을 함께 썼다고 했으나 전혀 다르다. 기자가 말한 fact는 아무것도 없다. 기자는 어떤 교과서를 보고 확인했는지 궁금해진다.
 
다음은 ‘쌀 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유출량’이라는 제목 아래 현행 8종 교과서에 수록된 통계 자료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1920년 이후 이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 쌀 생산량은 늘었지만, 일본으로 가져가는 양도 늘었고, 그러자 조선인 한 사람이 먹는 쌀 소비량은 오히려 줄었다는 내용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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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자료는 출처로 밝힌 「조선미곡요람」의 통계 오류를 근거로 작성한 잘못된 그래프임을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일 수출량’ 통계도 사실과 다르다.
 
대일 쌀 수출량 비교 (단위:천 섬)
자료
1921
1922
1926
1927
비고
조선미곡요람(‘36)
3,387
3,138
5,575
6,455
 
조선미곡요람(‘37)
3,080
3,316
5,429
6,186
 
근현대사사전
3,080
3,316
5,429
6,136
 
 
 
오류인 1937년도 「조선미곡요람」과 달리 1936년도에 발행한 「조선미곡요람」은 여타의 자료와 비교한 결과 정확한 통계 자료임이 확인됐다. 두 자료는 전체 통계 수치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특히 1921년과 1922년의 경우 1936년도 요람은 1921년도 수출량이 많은 반면, 1937년도 요람은 1922년도 수출량이 더 많다. 『한국근현대사사전』은 이처럼 오류가 심한 1937년도 「조선미곡요람」의 수치를 전재하면서 1927년도의 수출량인 6,186을 6,136으로 잘못 옮겨 적었다. 또, 교과서 중에는 1926년 수출량인 5,429를 옮기면서 교학사는 5,479로, 금성출판사는 4,429로 오기하였다. 『한국근현대사사전』이 오류를 범한 데다 교과서가 다시 오류를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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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교학사 교과서 / (우)금성출판사 교과서

당연히, ‘1920년 이후 이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 쌀 생산량은 늘었지만, 일본으로 가져가는 양도 늘었고, 그러자 조선인 한 사람이 먹는 쌀 소비량은 오히려 줄었다는 내용이다’라는 기자의 설명은 ‘fact’가 아니다. 이 부분은 교과서의 오류를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여 jtbc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다음이 문제다. 기자는 동아일보의 1930년과 1931년 두 사설을 제시하고,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의 삶은 어땠느냐? 1930년대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쌀 생산량은 늘었는데 다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값은 떨어지니 제값을 못 받는다. 풍작이 오히려 저주다. 모든 인민을 가난함에 빠뜨리는 산미 증식계획을 중단하라’는 내용이 잇따라 나옵니다.” 라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자는 이 사설을 읽지 않은 것 같다. 이유는 아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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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930년 10월 25일 사설이다. 이 날짜 사설은 ‘산미증식안을 중지하라.’라는 題下에 ‘米價 문제의 근본 代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쌀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대책이 곧 산미 증식 계획 중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설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옮겨 본다.
 
금일의 세계적 불황의 主因이 농업 공황에 있으며 농업 공황은 생산의 증대시장의 狹隘化(협애화)로 인하여 절대 또는 상대적으로 공급 과잉을 드러낸 탓이다. 구미 각국에 있어서 소맥, 면화, 사탕 등등에서 이를 입증하는 바이며 조선에 있어서는 쌀의 과잉 생산이 곧 금일의 참상을 致來(치래)한 것이 아닌가. 시장 즉 소비자의 구매력이 소화하지 못하리만큼 한 생산은 유리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30. 10. 25. 동아일보 사설)
 
1930년은 조선이나 일본 모두 대 풍년이 들면서 쌀값이 폭락한 해이다. 조선의 유일한 수출 대상국 일본도 풍작으로 자국 쌀이 넘쳐나는 처지에서 조선의 쌀 수입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입량을 대폭 축소한 것이 아니라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500만 섬 대를 유지했다. 문제는 급격히 늘어난 쌀을 모두 수출하지 못하고 국내 소비로 남으면서 쌀값이 폭락한 것이다. 기자의 말 대로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값은 떨어지니’가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갈 수 없어서 값이 떨어진 것이다. 공급이 줄면 값이 오르고, 공급이 늘어나면 값이 떨어지는 것이 상식인데 기자는 오히려 공급이 줄어서 쌀값이 떨어졌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구체적 수치와 그래프를 통해 대일본 수출량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한다.
 
조선미의 연도별 수이출량과 국내 소비량(단위:) - 조선미곡요람(‘36) 63~65
연도
수확고
수이출량
국내소비량
1921(大正10)
14,325,326
3,556,230
10,769,096
1922(11)
15,014,291
3,210,036
11,804,255
1923(12)
15,174,645
4,083,811
11,090,834
1924(13)
13,219,322
4,886,461
8,332,861
1925(14)
14,773,102
4,758,071
10,015,031
1926(昭和1)
15,300,707
5,784,883
9,515,824
1927(2)
17,298,887
6,470,279
10,828,608
1928(3)
13,511,725
7,021,649
6,490,076
1929(4)
13,701,746
5,790,810
7,910,936
1930(5)
19,180,677
5,173,294
14,007,383
1931(6)
15,873,999
9,058,839
6,815,160
1932(7)
16,345,825
7,508,445
8,83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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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와 그래프에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도 생산량은 전년도에 비해 550만 섬 정도 늘어난 반면 수출은 오히려 60만 섬 정도 줄어들면서 국내 소비량은 전해보다 무려 두 배나 늘어났다. 그렇다면 조선 농민의 식량 사정이 나아져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 일부 계층에서 1인당 쌀 소비량이 늘어나기는 하였으나 쌀을 사먹을 경제적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오히려 쌀값 폭락으로 쌀을 팔아서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반 토막 나면서 생활은 더욱 窮迫(궁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설에서 ‘풍작 흉년, 풍작 공포, 풍작 저주, 이것이 現下 조선의 심각한 현실이다.’라는 문장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 농민도 쌀밥을 먹고 싶어 하나 조밥을 먹게 되며 조밥이나마 구해도 얻지 못하는 빈약한 구매력의 소지자이다. 과거 2~3년간 수재와 한재로 흉작의 비참을 당하다가 금년엔 3백여만 섬이 증가되었으나 도리어 미증유의 미가폭락으로 구매력의 증대는 고사하고 일반 농민은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며 일본시장은 조선미의 배척을 결의하지 않았는가. 불과 3백여만 섬 증가도 소비하기 불능한 일본시장을 상대로 한 8백 2십만 섬의 산미증식안의 전도는 이미 운명을 缺(결)한 것이 아니냐. (1930. 10. 25. 사설)
 
조선 농민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생산량 저하로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는 3백여만 섬이나 증가하는 풍작을 이루었다. 모두들 생활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유래 없는 쌀값 폭락으로 또다시 곤궁한 삶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설에서 3백만 섬의 증가라고 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집계된 통계에 따르면 약 550만 섬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 쌀이 수출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서 쌀값 폭락을 초래한 것이다. 산미 증식 계획의 목표는 8백 2십만 섬인데 일본 시장에서는 겨우 300만 섬의 증가도 수용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산미 증식 계획은 더 이상 진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산미증식안 건립 당시 추정한 섬당 12원대 설에 대하여 吾人은 이것을 합리적 기준이라고는 아니하나 당국은 이나마도 능히 유지할 역량이 있느냐 하면 그 불가능함이 현실에 의하여 입증되는 바가 아닌가? 미가는 더욱 폭락할 뿐이며 따라서 농민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동요된다. 旣設 未設 수리조합 중에는 그 관계 주민 지주 농민 등의 반대와 불평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력의 위압으로 강행하는 것도 없지 아니하다. 실로 조선 농촌을 구제하려면 현재의 미산 면적을 한정하고 차라리 부업장려 등으로 농가 수입을 다각화할 필요는 있을망정 무한정 미작을 확장함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인은 미가문제의 근본대책으로 생산조절을 역설하는 동시에 산미증식안의 중지를 주장하는 바이다.(1930. 10. 25. 사설)
 
쌀값 폭락의 원인은 일본의 수입 제한에 따른 국내 공급 과잉이었다. 그러함에도 일본은 8백 2십만 섬의 증산을 목표로 국민의 불평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리조합 설치를 강행하고 있다. 이에 쌀값 폭락의 근본 대책으로 무한정 米作을 확장할 것이 아니라 부업 장려 등 농가 수입원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 생산량을 조절하고 수출이 보장되지 않는 증산 계획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쌀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갈 보장이 없으니 중지하자는 것이다.
 
1931년 4월 19일 ‘산미증식계획을 중지하라.’는 사설도 마찬가지다. ‘未曾有의 농업공황은 전 인민을 窮巷(궁항)에 빠져들게 하였다.’로 시작한 이 사설은 주로 수리조합이 경영난에 처한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수리조합의 경영난을 개혁할 것이 아니라 아예 산미 증식 계획의 중지를 요구하는 사설이다.
 
이미 산미증식계획의 제일기간인 12개년이 소화5년으로서 절반을 지냈다. 그동안 산미증식계획의 성적을 보면 착수한 것은 예정 면적 10만 8천 2백 정보가 11만 3천여 정보로 초과되었음에 반하여 준공한 것은 예정면적 8만 정보의 약 절반인 4만 7천 정보밖에 못 갔다. 그뿐만 아니라 예정 기간의 절반기간에 산미액은 예상을 넘어 금년 같은 풍작을 이루고 미가 폭락으로 되지 않았는가. 그 전도는 암담타 않을 수 없다. 총독부 내 일부에서는 사실에 비추어 산미증식계획의 중지를 찬동하면서 체면상으로 이것을 어쩔 수도 없다는 풍문이 있거니와 이에 사실이 이럴진대 체면상 문제를 논치 말고 속히 그 계획을 중지할 것이다. (1931. 4. 19. 사설)
 
여기서 ‘그 전도는 암담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산미 증식으로 쌀 생산량이 더울 늘어날 경우 공급 과잉으로 인한 쌀값 폭락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수리 조합을 개선하는 등의 일대 개혁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공급 과잉으로 인한 쌀값 폭락을 초래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당장 중지하라는 것이다. 이 두 사설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중지하라는 주장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쌀값 폭락을 초래하는 공급 과잉을 줄여야 한다는데 있다.
 
다음으로, 앵커는 ‘어제 토론에서는 이 과정에서 대가가 지급됐느냐, 이걸 놓고 수출이냐, 수탈이냐를 가지고 굉장히 논란이었는데, 그건 어떻게 봐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기자는 ‘일제시대 당시에는 이를 두고 이출, 그러니까 국가 내에서 대가를 주고 상품을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요.’라고 하자, 앵커는 ‘국가 내라는 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국가가 아니니까, 우리나라와 일본을 같은 국가 내로 본 거군요? 참 서글픈 얘기입니다.’라고 했다.
 
먼저 쌀 생산 농민에 대한 대가 지급 문제다. 1920~30년대 조선의 농민은 거의 대부분 소작인이었다. 이들은 농부이기는 하나 지주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지주의 말 한 마디에 가족의 생계가 오락가락하는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소작인들의 생명 줄을 틀어쥐고 있는 부류에는 조선인 대지주, 대지주가 거느린 마름[舍音], 일본인 대지주, 東拓(동척) 등이 있었다. 소작인들은 이들 대지주로부터 도지권을 인정받아 피땀 흘려 한 해 농사를 짓고 나면 소출의 7~8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한다. 그리고 남은 얼마간의 쌀을 팔아서 의복, 주거, 부채, 세금, 월동 준비 등을 해결하고 다음 추수 때까지의 생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다행히 쌀값이 비쌀 때는 그나마 다음 수확기까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쌀값이 떨어지는 해에는 소작료조차 낼 수 없어 고리의 부채로 남아 다음해의 소작료에 전가된다. 이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은 대부분 지주에게 뜯기고 한편으로는 시장으로 팔려나가 그들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소작농의 손을 떠난 쌀은 미곡상에 의해 미곡시장을 중심으로 상품으로 거래된다. 미곡은 현물을 거래하는 미곡시장과 선물을 거래하는 米穀取引所(미곡취인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미곡취인소는 당시 주식과 함께 대표적인 투기 상품인 期米(기미)를 취급하는 곳으로 일확천금을 노린 자산가의 자제들이 부나비처럼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기 십상인 주요 투기장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경성표준물가, 인천일용물가, 미곡표준시세 등과 같은 제목으로 각종 물가가 공시되었고, 미곡 시세는 실물 시세뿐만 아니라 미곡취인소에서 다루는 期米 시세까지 거의 매일 신문에 게재되었다. 특히 기미시세는 서울과 인천의 시세뿐만 아니라 오사카, 도쿄, 고베의 시세도 함께 보도되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수탈이니 약탈 같은 말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기자는 ‘일제시대 당시에는 이를 두고 이출, 그러니까 국가 내에서 대가를 주고 상품을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이출의 뜻은 현재의 국어사전에 나온 풀이다. 당시 신문을 확인해보면 미곡 상품 거래와 유통과 관련된 용어가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이출과 수출을 합한 용어로 輸移出(수이출)을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의 수출이란 용어와 같은 뜻이다. 移出(이출)이라는 용어는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 국가인 조선, 대만, 만주와의 거래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일본에 수출해도 이출이고 대만에 수출해도 이출이다. 물론 그 반대는 移入이다. 대만으로부터 이입은 있어도 이출은 없었으므로 이출은 모두 일본으로의 수출을 의미한다. 반면 미국이나 칠레와 같은 외국의 경우에는 수출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는 아래의 표에서도 확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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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농림국 발행 『조선미곡요람』, 1936.(부분)

위 표를 보면 수출과 이출을 구분 사용하였으며, 일본으로 보낸 이출에 비해 기타 외국으로 보낸 수출의 수치가 극히 미미함을 알 수 있다. 計로 표시된 수치가 수출과 이출을 합한 수이출, 즉 현재의 수출을 의미한다. 반면, 국가 내에서의 이동은 搬出(반출)이라 하였다. 도와 도 사이의 이동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인천, 인천에서 군산 등 주요 지역으로의 이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당시의 조선, 대만, 만주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제 하에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별개의 국가였다. 당연히 국가 내 이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형식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수출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에게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 비정상적 상황이었다, 이를 수출로 인정하면 강제징용도 정당한 고용이란 논리나 마찬가지니 이는 수탈'이라는 반박이 나오는 겁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한 어이없는 논리다.
 
수출은 국가 간 시장원리와 국제법에 따라 진행되는 무역을 말한다. ‘형식적’이란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농민의 손을 떠난 쌀은 미곡시장과 미곡취인소를 거치면서 경제적 이득을 노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소작 농민들에게 대가가 돌아가지 않은 비정상적 상황은 수출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소작제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다. 지금도 산지 농산물 값이 폭락하여 밭을 갈아엎는 일이 있을지라도 소비자가 찾는 음식점에서는 가격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대가가 생산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수출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반드시 생산 농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또, 소작제와 수출은 분명 별개의 사안임에도 이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얼버무려서 수출이 아니라 수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jtbc에서 방송한 팩트 체크에는 fact가 거의 없다. 이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jtbc는 은근슬쩍 수출이 아니라 수탈이라고 여론을 부채질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채질을 한자로 쓰면 煽動(선동)이다. 방송 내용 상당 부분이 거짓이니 이는 ‘거짓 선동’인 셈이다. 국민에게 fact를 제공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언론이 이런 식의 거짓 내용으로 국민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언론의 역할은 ‘거짓 선동’이 아니라 正論(정론)과 直言(직언)임은 해당 방송의 종사자가 더 잘 알 것이다.▩

입력 :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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