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잘못된 용어 해석에서 출발한 서술 오류

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본문이미지

한문(漢文)을 모르고 제대로 된 우리 역사(歷史) 연구가 가능할까? 한문을 모르고 제대로 된 우리 역사 교육이 가능할까? 필자는 검정 8종 한국사 교과서를 정독하면서 발견된 다수의 오류를 해당 출판사에 질의하거나 수정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그들 오류의 대부분은 한문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이번부터 다루고자 하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하 「조・청 무역 장정」으로 약칭함)의 ‘내지 통상권(內地通商權)’에 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한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용어 해석이 틀리고, 용어 해석이 틀리니 역사 서술이 틀린 것이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지 통상권’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내지 통상권’을 이해하기 위해 개항 이후 조선에서 외국 상인들의 무역 여건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조약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 1876. 7. 6. 제4관, 이후 부산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로의 거리는 부두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선 거리 10리[조선의 里法]로 정한다. 동래부 중 한 곳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이 거리 안에서 오갈 수 있도록 하고, 일본국 인민은 뜻에 따라 자유롭게 다니면서 토산물과 일본국 물품을 사고팔 수 있다. (第四款, 嗣後於釜山港口, 日本國人民可得閒行道路里程, 自埠頭起算, 東西南北各直徑十里[朝鮮里法]爲定. 至於東萊府中一處, 特爲往來於此里程內, 日本國人民隨意閒行, 可得賣買土宜及日本國物産.)
 
조선과 일본은 1876년 「조・일 수호 조규」 체결 후 이어진 후속 조치인 「수호 조규 부록」에서 한행이정(閑行里程:자유롭게 다니면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리)을 부산항 부두를 기점으로 동서남북 각 직선거리 10리로 정했다. 일본 상인들은 이 한행이정 내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조선의 토산물과 자국의 물품을 사고 팔 수 있었다. 아직은 개항장에 한정된 무역이다. 일부 교과서에서 이를 ‘거류지 무역’이라고 하였으나, 개항 당시 일본인 거류지(居留地:租界)는 종래의 동래 왜관을 계승한 것으로 일본인 집단 거주지라 할 수 있다. 개항 전에는 조・일 무역이 주로 동래 왜관의 개시 대청(開市大廳)에서 이루어졌으나, 개항 후에는 부산항 부두로부터 한행이정 10리 내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개항장 무역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조・미 조약」 1882. 4. 6. 제6관 ……미국 상인은 양화(洋貨)를 내지(內地)로 운입(運入)하여 매매할 수 없고, 또 스스로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매할 수 없다. 아울러 토산물을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판매하여 보낼 수 없다.(第六款 ……美國商民, 不得以洋貨運入內地售買, 亦不得自入內地採買土貨. 倂不得以土貨由此口販運彼口.)
 
이후 조선은 1880년에 인천항을 개방하고 1883년에 원산항을 추가로 개방하게 된다. 그 사이에 체결된 「조・미 조약」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두 항구에서만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졌다. 상품을 내지로 운반하여 매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지에서 조선의 토산물을 구매할 수도 없었다. 또, 제3관에 ‘……당해 선적이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몰래 들어가 무역을 하다가 잡힌 경우 배와 화물은 관에서 몰수한다.’고 정하여 미개방 항구에서의 밀무역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개항장에 한정된 무역이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 1882. 7. 17. 제1 부산・원산・인천의 각 항구의 한행 이정을 이후 확대하여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이 지난 뒤 다시 각 100리로 한다. 지금부터 1년 뒤에는 양화진을 개시로 한다.(第一 釜山・元山・仁川各港閒行里程, 今後擴爲四方各五十里, 期二年後, 更爲各百里事. 自今期一年後, 以楊花津爲開市.)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일 강화 조약(속칭 제물포 조약)」과 함께 체결된 「수호 조규 속약」에서는 한행이정이 확대된다. 「수호 조규 속약」 체결과 동시에 한행이정을 50리로 확대 적용하고, 1년 후에는 다시 100리 까지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런가 하면 1년 후에는 양화진을 개시(開市)로 지정하여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1882. 8. 23.‘제4조 ……조선 상인이 북경에서 규정에 따라 허락한 교역과, 중국 상인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에 들어가 개설이 허락된 영업소[行棧]를 제외하고 각종 화물을 내지로 운반하여 들어가 상점을 차리고 판매하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 만약 양국 상인이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입하고자 할 때는 마땅히 피차의 상무위원[중국]과 지방관[조선]에게 청구하고 [이들이] 함께 서명한 증명서를 발급하되 구입할 처소를 분명히 적어 넣는다. 거마(車馬)와 선박은 해당 상인이 고용하도록 하고, 연도(沿途)에서는 바쳐야 할 세금을 정확히 파악하여 수령한다.……’(第四條 ……朝鮮商民, 除在北京例准交易, 與中國商民, 准入朝鮮楊花津・漢城, 開設行棧外, 不准將各色貨物, 運入內地, 坐肆售賣. 如兩國商民, 欲入內地, 採辦土貨, 應稟請彼此商務委員與地方官, 會銜給與執照, 塡明採辦處所. 車馬船隻, 聽該商自雇, 仍照納沿途應完釐稅.……)
 
이번에 다루게 될 ‘내지 통상권’과 관련된 「조・청 무역 장정」 제4조의 일부다. 「조미 조약」이나 「수호 조규 속약」과 비교하여 외국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이제 개항장과 함께 양화진과 한성에 개설이 허락된 행잔(行棧:영업소)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양화진과 한성 어디에서나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핵심은 양화진과 한성에 개설이 허락된 행잔 외에 ‘내지로 상품을 운반하여 판매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무게 중심은 후반부에 있다.
 
내지에서의 상품 판매를 금지한 것과는 달리, 내지로 들어가서 채판토화(採辦土貨:토산물 구매)하고자 할 경우에는 증명서를 발급 받는 등의 정해진 절차에 의해 가능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채판토화(採辦土貨)’는 ‘토산물 구매’라는 뜻으로 판매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다. 어느 쪽으로 보던지 내지에서의 상품 판매, 즉 ‘내지 통상’은 허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3조에 ‘……양국 상선이 풍랑을 만나 손상을 입어 수리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 개방하지 않은 항구에 몰래 들어가 무역을 하는 자는 조사하여 체포하고 배와 화물은 관에서 몰수한다.’는 내용이나, ‘……아울러 해안에 올라가 음식물과 식수를 살 수 있으나, 사적으로 화물을 무역할 수 없다. 위반하는 자는 배와 화물을 관에서 몰수한다.’고 한 것에서도 내지의 무역을 엄격히 금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영 수호 조약」 1883. 10. 27. 제4관 6. ……영국 인민이 또한 증명서를 지니면 앞으로 조선의 각 처에 여행이나 통상을 할 수 있고, 아울러 각종 화물을 운반하여 판매하는 것과 일체의 토산물 구매를 허락한다. (第四款 六. ……惟英國民人, 亦準持照, 前往朝鮮各處, 游歷・通商, 竝將各貨, 運進出售, 及購買一切土貨.)
 
1883년 10월에는 영국 및 독일과 동시에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통상과 관련한 위의 조항도 양국이 동일하다. 이 조약에서는 비록 증명서 소지의 조건이 붙기는 하였으나 전국을 다니며 구매와 판매를 할 수 있는 내지 통상이 허용되었다. 즉, 내지 통상은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 무역 장정」이 아닌 영국・독일 양국과 체결한 조약에서부터 허용된 것이다. 이러한 무역 환경의 변화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조 약
허 용
금 지
수호조규부록
1876. 7. 6.
개항장 무역, 한행이정 10
 
조미조약
1882. 4. 6.
개항장에 한정된 무역
내지 무역, 조선 토산물 구매
미개방 항구 밀무역
토산물 타 항구로 판매 운반
수호조규속약
1882. 7. 17.
한행이정 50, 2년 후 100
1년 후 양화진 개시
 
조청무역장정
1882. 8. 23.
양화진한성에 개설이 허락된 행잔에서만 무역
내지의 토산물 구매는 조건부 허용
내지 통상
미개방 항구의 밀무역
조영수호조약
1883. 10. 27.
내지 통상 허용(증명서 지참 조건)
 
 
 
이상 몇몇 조약을 통해서 무역 여건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를 토대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조・청 무역 장정」의 ‘내지 통상’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한다.
 
본문이미지

‘한성개잔(漢城開棧: 한양에 화물을 쌓아 두고 객상이 유숙해 장사하는 곳) 내지채판(內地采辦: 내륙 지방의 시장에 상품을 운반해 판매하는 상행위)’(필자 주: 원문에 采는 採로 되어 있음)
 
개잔(開棧)을 ‘화물을 쌓아 두고 객상이 유숙해 장사하는 곳’이라고 했으나 이는 행잔(行棧)에 대한 풀이이다. 개잔은 ‘개설 행잔(開設行棧)’의 준말로 ‘행잔을 개설하다’ 또는 ‘개설된 행잔’이라는 뜻이다. 또, 채판(采辦)을 ‘내륙 지방의 시장에 상품을 운반해 판매하는 상행위’라고 하였으나 이는 정반대의 해석이다. 채판은 구매(購買)한다는 뜻이지 판매한다는 뜻이 아니다. 채판을 판매로 해석한 오류는 「조・청 무역 장정」의 ‘내지 통상권 금지’를 ‘내지 통상권 허용’으로 해석하는 출발점이 된다. 또, ‘내지 채판’이란 말도 「조・청 무역 장정」 원문에 있는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입하고자 할 경우[欲入內地, 採辦土貨]’라는 뜻이 담길 수 있도록 ‘내지 채판 토화’라고 해야 한다. 내지 채판이라 할 경우 ‘내지 구매’라는 뜻이 되어 아무것이나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내지 채판의 대상물은 토산물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미 조약」과 「조・청 무역 장정」에는 매매와 관련된 용어가 아래와 같이 조금씩 다르게 쓰이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용어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조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조약
매매
판매
구매
조미조약
賣買(매매)
售買(수매)
()
採買(채매)
조청무역장정
 
售賣(수매)
採辦(채판)
 
다음으로, 「조・청 무역 장정」에서 체결된 주요 내용에 대한 정리다. ⑤번이 내지 통상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여기서도 내지 채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한 번 잘못된 해석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본문이미지

‘북경과 한성의 양화진에서의 개잔 무역을 허락하되 양국 상민의 내지 채판을 금하고, 다만 내지 채판과 유력(遊歷: 돌아다니는 일)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
 
‘한성의 양화진’은 원문에 ‘朝鮮楊花津漢城’으로 되어 있어 ‘조선의 양화진과 한성’이라고 해야 하며, 이어진 ‘내지 채판을 금하고’는 ‘내지 통상을 금하고’라 해야 한다. 제4조에 ‘각종 화물을 내지로 운반하여 상점을 차리고 판매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양화진과 한성에서 개설이 허락된 행잔에서만 무역이 가능하고 그 외에 내지로 물건을 운반하여 판매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지 채판과 유력(遊歷: 돌아다니는 일)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내지로 들어가 토산물을 구매하고자 할 경우와 유력하고자 할 때는 양국 관계자가 공동으로 서명한 증명서를 발급받는 등의 절차에 의해 가능함을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이다.
 
본문이미지

‘여기서 양국 상인의 조선의 내지채판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영국・독일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 내지에서의 상행외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83년 10월 27일 체결된 영국・독일과의 통상조약에서는 증명서 지참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였으나 내지 통상이 허용된다. 따라서 이 서술 중 ‘조선의 내지 채판이 인정되었다.’는 서술도 ‘조선의 내지 통상이 인정되었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이어지는 ‘이로써, 영국・독일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 내지에서의 상행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라는 문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지 통상’은 청나라가 아닌 영국‧독일 양국과 체결한 통상조약에서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1882년 청나라에 ‘내지 통상권’을 허용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은 채판(採辦)을 ‘판매’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출발하였다. 즉 ‘채판’을 ‘통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조・청 무역 장정」 제4조의 성격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것이다.
 
현대사를 제외한 우리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1차 사료(史料)는 거의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한문 실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채판’의 경우와 같이 잘못 해석하고, 그런 잘못을 토대로 잘못된 역사 서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발생한 서술 오류는 한국사 교과서에 고스란히 전해져서 학생들로 하여금 잘못된 역사를 배우게 한다. 이는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조・청 무역 장정」의 제4조에 대해 현행 8종 검정 교과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어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에 보낸 질의와 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하고자 한다.▩

입력 : 2017.05.2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학사/석사/박사수료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