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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11)

지학사 한국사 교과서, 211쪽 모든 내용이 오류...한국사 교과서, 이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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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사 한국사 교과서 211쪽에는 위와 같이 ‘흥선 대원군과 노론 세력’이라는 제목 아래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관련된 사진을 싣고 설명을 덧붙였다. 1번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대로사(大老祠)를, 2번은 충북 괴산군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중심으로 한 송시열의 유적이다. 그런데 제시된 설명을 보면 제대로 된 것보다 잘못 되거나 부정확한 것이 더 많다. 한 면에 이토록 많은 오류가 있는 경우는 보기 드문 일이다. 설명의 편의상 맨 아래의 하마비(下馬碑)부터 무엇이 잘못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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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 서원 입구의 하마비
 
‘중국의 황제와 우암 송시열을 모신 곳이니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 화양동의 경치를 구경하고 만동묘를 둘러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동묘지기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하마비(下馬碑)는 대체로 장방형 돌에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를 새겨 하마비가 세워진 곳으로부터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교과서의 그림은 글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른 주먹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큰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돌은 만동묘 근처 길 양쪽에 한 개씩 세워져 있는데, 마치 제주도 민가에서 사용된 정주석을 연상케 한다. 하마비가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했더니 출판사에서는 충청북도 공식 블로그(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pkB&articleno=16906550)의 안내를 토대로 서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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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블로그 자료를 교과서 집필의 근거로 삼았다는 답변은 교과서와 관련하여 받은 답변 중에 가장 황당한 경우로 기억된다. 안내해준 블로그에 게시된 글을 보니 교과서의 집필 자료로 삼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였다. 필자의 거듭된 이의 제기에 지학사는 2015년 판에 ‘하마비’를 ‘하마소 근처에 세워진 돌’로 수정하였다. 삭제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이상하게 해놓았다. 하마소의 위치에 대한 근거는 있는지, 세워진 돌의 용도는 무엇인지, 저렇게 세워진 돌이 어떻게 ‘중국의 황제와 우암 송시열을 모신 곳이니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인지 필자의 설명이 궁금해진다.
 
다음으로, ‘흥선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 화양동의 경치를 구경하고 만동묘를 둘러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동묘지기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하인의 부축을 받고 계단을 오르다가 만동묘지기의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졌다.’, ‘만동묘 제사 때 부채를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가 유생(儒生)의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졌다.’는 등 흥선 대원군이 만동묘에서 봉변당했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하여 마치 사실인양 단정하여 서술한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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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 송시열 충유적의 구조(북 괴산)
 
숙종 때 사사되었던 송시열이 복권된 후 전국 각지에 그를 모시는 서원이 40개가 넘게 세워졌다. 화양 서원은 숙종 때 송시열 문하의 유생들이 세웠다.
 
교과서의 건물 배치도는 만동묘 인근에 세워진 안내 간판이다. 출판사에서 제시한 블로그에는 몇몇 현판 글씨를 알아보기 쉽도록 왼쪽 상단에 세로로 배치해놓았다. 하지만, 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할 현판 글씨를 반대로 읽어 잘못 배치해놓은 것이다. 왼쪽 글씨는 아래에서 위로 읽어야 현판 글씨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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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안내 간판에는 이 건물을 ‘존사청’으로 표시하였으나 현판 글씨는 敬奉殿(경봉전)이다. 초서를 잘못 읽어 간판에 엉뚱한 건물명으로 표기한 것을 교과서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간판에는 이 외에도 소소한 오류가 있다. 제대로 살펴보고 실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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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동묘(萬東廟)
 
명 황제인 신종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숙종 때 지은 사당이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 이 말은 ‘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명에 대한 조선의 신하된 도리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군을 보낸 명의 황제는 의종(毅宗)이 아닌 신종(神宗:재위 1573-1620)이다. 만동묘라는 이름을 선조(宣祖)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는 설명도 옳지 않다. 친필에서 따왔으면 글씨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절필동’은 선조가 중국에 보낸 ‘피무변명주(被誣辨明奏)’에 ‘일편단심 명 황제를 향한 정성은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惟其一心拱北之誠, 有似萬折必東之水]’고 한 글에 포함된 것으로, 명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의리를 담고 있다. 선조는 이 중의 ‘만절필동’ 네 글자를 직접 써서 남겼는데 숙종 때 가평 군수 이제두 등이 경기도 가평군 소재 조종암(朝宗巖)에 이를 새겨놓았다. 또, 충북 괴산군 화양동 계곡 바위에는 이를 모본으로 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萬東’은 이 네 글자 중에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하여 조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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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송시열을 받들던 노론 세력은 경기 여주에 있는 송시열의 사우 현판에 ‘대로(大老)’라는 글자를 써서 걸었다. 그런데 1873년 조정에서는 공식적으로 흥선 대원군을 ‘대로’로 추대하고, 국태공(國太公) 등과 함께 공식 직함으로 사용하였다.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서양의 세력을 물리쳐 대의를 세운 공로라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대로’가 둘일 수 없다 하여 송시열 사우의 현판을 ‘강한(江漢)’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노론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흥선 대원군은 자신을 ‘대로’라 부르게 함으로써 송시열을 간접적으로 격하시켰다. 이는 10여 년 집권 동안 권세를 부려 온 노론 세력을 누르려 한 것이다.
 
송시열을 받들던 노론 세력이 ‘대로(大老)’라는 글자를 써서 걸었다고 하였으나,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정조 9년(1785) 9월에 예조가 송시열의 원우(院宇)를 완공했다는 보고를 하자 ‘편액의 이름은 예문관으로 하여금 짓게 할 필요 없이 대로사(大老祠)로 정하고, 내각의 제학 김종수(金鍾秀)로 하여금 써서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또, ≪정조실록≫에는 ‘대로란 두 글자는 예로부터 천하 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연전에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여 출처를 밝힌 바 있다. 노론 세력이 써서 걸었다는 설명도 잘못이지만 현판은 ‘大老祠’이므로 ‘大老’라는 글자를 써서 걸었다는 말도 잘못이다.
 
이어지는 ‘국태공 등과 함께 공식 직함으로 사용하였다.’에서 ‘대로’는 직함(職銜:벼슬이나 직책, 직무 따위의 이름)이 아닌 존칭(尊稱)이다. 그런가 하면 ‘흥선 대원군은 자신을 대로라 부르게 함으로써 송시열을 간접적으로 격하시켰다.’라고 한 설명도 잘못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대로’라는 존칭은 1873년(고종10) 윤6월에 관학 유생인 진사 이세우 등의 상소에 따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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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老祠(대로사) - 김종수 글씨

대로사 현판
 
‘대로사’는 정조가 직접 지은 것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라는 뜻이다.
 
‘대로사’를 ‘덕망이 높은 노인’이라 하였으나 이 뜻풀이는 ‘大老’에 해당한다. ‘大老’는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의 ‘두 노인은 천하의 대로이다.[二老者 天下之大老也]’라는 문구에서 온 말로 이 때의 ‘二老’는 백이와 태공이라고 되어 있다. 정조는 송시열을 백이와 태공에 버금가는 덕망이 높은 학자로 추앙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의 사가(私家)인 운현궁(雲峴宮) 건물에 걸려있는 ‘二老堂’의 ‘二老’도 백이와 태공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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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江漢祠(강한사) - 박규수 글씨 / (사진 오른쪽) 秋陽齋(추양재) - 김충현 글씨

 
 
강한사 현판
 
‘강한사는 남한강가에 있는 사우’라는 뜻으로, 사우 뒤쪽에 걸려 있다.
 
강한사를 ‘남한강가에 있는 사우’라고 하였으나 대로사 내 다른 건물에 걸려 있는 秋陽齋(추양재) 현판을 보면 강한(江漢)은 추양(秋陽)과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단어는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증자(曾子)가 공자의 덕망을 칭송하면서 ‘강한(江漢)의 물에 깨끗이 세탁해서 추양(秋陽)에 말리면 그보다 더 깨끗할 수 없는 것과 같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글에서 차용한 것이다. 강한은 중국의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가리킨다.
 
우리 역사 교과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약 70만 년의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에 압축하여 서술한다. 이처럼 장구한 역사를 다루면서 티끌만한 오류조차 허용치 않는 수준 높은 교과서가 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각 시대별 전문가뿐만 아니라 유관 분야의 전문가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현행 검정 8종 교과서의 필진을 보면 리베르스쿨 교과서와 같이 단 한 명의 전문가조차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 2~4명의 전문가만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지학사 교과서는 그나마 가장 많은 4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발견된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의 편찬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는 모두 27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였음에도 오류에 대한 시비가 끊이질 않았는데, 겨우 4명이 만든 교과서가 제대로 된 교과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誤算)이다.

입력 :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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