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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9)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인가?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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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제(지학사, 216-217)

이 자료는 지학사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조일 수호 조규(속칭 강화도 조약)와 관련된 서술 면(面)이다. 보는 바와 같이 두 면에 걸쳐 ‘불평등’이란 용어가 무려 여덟 번이나 등장한다. 이러한 서술 기조는 여타의 교과서도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불평등 외에도 주권 침해, 경제적 침탈, 침략 의도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침탈에 직면하였으며, 나아가 이후 벌어지는 조선 침략의 길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과연 수호 조규는 교과서의 서술대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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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로 보는 역사 - 강화도 조약, 무엇이 문제인가(동아출판, 160)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과 개항 통상 조약을 맺게 되었다. 1조는 일본이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자주국’이라는 조항을 넣은 것이다. 4조는 개항장 확대, 7조는 해안 측량권, 10조는 일본 영사관의 재판권을 규정하여 조선의 재판권을 제외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서구 열강들을 본따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보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불평등한 조항을 집어넣었다.‘(동아출판, 160)
 
이 자료에는 수호 조규의 불평등 조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타의 교과서도 유사하다. 이 서술과 함께 여타 교과서의 서술을 종합하면, 제1관(교과서의 조는 관의 잘못)은 청의 종주권 차단하여 조선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서, 제4관은 정치적・군사적 침탈을 위한 개항장 확대를 위해서, 제7관은 군사적 침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해안 측량권 획득을 위해서, 제10관은 조선의 재판권을 배제하기 위한 영사 재판권 획득을 위해 정한 조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모두 조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서술이 얼마나 타당한지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제1관에 대해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다.’라는 문장을 넣음으로써 청의 종주권을 차단하여 일본이 조선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였다. 즉,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다.’라는 글이 표면적으로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추후 조선 침략을 쉽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지 먼저 제1관을 살펴보도록 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禮)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린(交隣)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두루 통하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서 영원히 잘 지내기를 기약한다.’
 
국가 간의 조약이든 개인 간의 계약이든 기본적으로 상호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쓴다. 기록된 내용 그대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조관의 글도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간명하다. 조선국은 자주국으로써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때문에 서로 동등한 예로 대해야 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과 함께, 앞으로 교린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구제(舊制)를 혁파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영원히 잘 지낼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조약 체결 당사자의 자격과 체결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 조관이다.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다.’는 문장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자주의 나라’는 곧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권 국가를 이르는 것으로 국제법에 따라 체결되는 조약에서 체결 당사국의 당연한 자격이자 조건이다. 체결 당사국이 특정 국가의 속방(屬邦)으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어느 나라도 조약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국가라면 조약의 성실한 이행과 실효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1882년 조・미 조약 체결 당시 청이 속방(屬邦) 조항의 포함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미국의 주장에 결국 그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조선이 자주국일 때만이 조약 체결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조약의 마지막 서명 부분에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이라 하여 청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 연도 표시법인 개국 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한 점이다. 개국 기년은 조선이 개국한 1392년을 기산점으로 삼아 연도를 표시한 독자적 기년법으로 1876년을 환산하면 ‘개국 485년’이 된다. 지금까지 모든 교과서에서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개국(開國)은 연호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국 기년은 수호 조규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조선이 일본국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준 서술책자(敍述冊子)에 이미 사용하여 자주국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교과서 서술대로 청의 종주권을 차단하여 조선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 ‘자주국’이라는 내용을 삽입했다면 그런 해석을 뒷받침해줄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체 조관이든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든 어디에도 그러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제1관의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다.’라는 조문은 국제법상 조약 체결 당사국인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공언(公言)한 것이며, ‘대조선국 개국485년’은 이러한 공언의 명시적(明示的) 표현이다. 조문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불평등’이나 ‘침략’과 같은 의도를 도출해 내기는 어렵다.
 
다음은 ‘3개 항구의 개항’과 관련한 서술이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제4관을 들어 추가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래는 항구의 개항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는 제4관이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 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으나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곳 중의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종래 조선과 일본은 1609년 체결된 기유약조에 따라 해마다 일정의 세견선(歲遣船)을 보내고 동래부의 초량 왜관에서 상품을 교역하는 왜관 무역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수호 조규 체결로 이러한 제도를 혁파하고 근대적 무역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선박으로만 무역이 가능했던 시기에 무역의 핵심은 상선이며, 이 상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는 필수 조건이다. 이에 일본은 항구 확대를 위해 수호 조규 제5관에서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 두 곳을 선정하기로 약속하였으며, 추진 과정에서 다소간의 문제가 있었으나 약속대로 원산항(1880)과 인천항(1883)을 추가로 개방하게 된다.
 
이를 두고 교과서에서는 인천항은 정치적 목적에서, 원산항은 군사적 목적에서 개방을 강요한 것으로 명백한 불평등 조항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항이든 원산항이든 기본적으로 무역을 위한 항구로, 무역의 최대 이익을 위해서 원활한 물류(物流)나 수도의 접근성 등을 고려하여 선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정치적 또는 군사적으로 이용되었다 할지라도 개항 당시의 목적은 무역을 위한 것이니만큼 불평등 조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해안 측량권에 관한 것으로 해안 측량은 항구 개설을 위한 사전 조사 행위를 말한다. 이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은 일본에게 해안 측량권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은 조선 연안의 지형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삼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허용해서는 안 될 권리를 일본에게 허용함으로써 우리의 영토 주권을 침해당했다는 논리다. 이에 해당하는 제7관은 다음과 같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隨時)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5관에서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선택하며 개항 시기는 1876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고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박의 출입 경험과 연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지역의 지형을 조사하도록 한 것이 제7관이다. 해안 측량은 분명 조약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를 주권 침해라 하는 것은 근거 조항을 부정하는 것이며, 근거 조항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수호 조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상호 약속에 따라 해안을 측량할 수 있도록 한 제7관을 두고 조선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한 교과서의 서술은 조약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사법권을 침해했다는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 부분이다. 치외 법권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것이 조선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일 때에는 모두 일본 관원이 재판한다.’라는 문장만을 제시하고 이를 조선의 사법권을 침해한 불평등 조항으로 소개하고 있다. 제시된 문장만 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아래의 제10관 전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 있으면서 만약 그가 범한 죄가 조선국 인민과 관계되더라도 모두 일본국에 귀속시켜 심의 판단하며, 만약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 관계되더라도 모두 조선 관리에게 귀속시켜 조사 하여 심판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 신문(訊問)하고 판단하여 털끝만큼도 비호하는 일이 없이 공평하고 합당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는 조선국이 지정한 항구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범죄자는 일본국에 귀속시키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범죄자는 조선 관리에게 귀속시켜 심판한다는 내용이다. 즉, 일본국 범죄자는 일본국에, 조선국 범죄자는 조선국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재판 관할권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일본인 범죄자를 일본국 관원이 재판한다는 내용만 수록하고 이를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치외 법권 또는 영사 재판권 조항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때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영사가 아닌 인민 관리관을 두었는데, 이 관리관이 관리하는 대상은 상민(商民)이라는 점에서 치외 법권이 될 수 없으며, 아직 영사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사 재판이라 할 수도 없다.
 
또 조·일 양국 범죄자 처리에 대한 규정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 조항이라 한다면 조선인 범죄자도 치외 법권 대상에 해당되는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결국 수호 조규 제10관은 조선국 항구에서 발생한 양국 범죄자를 누가 관할할 것인지를 정한 재판 관할권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일본국이, 조선인은 조선국이 재판한다는 점에서 불평등을 논하는 것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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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 수호 조규는 협상 단계에서 일본 측이 13개 조관을 제시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축조심의하여 최혜국 대우 조항인 12관은 삭제하고 나머지 조관도 조선 정부의 수정 요구를 대부분 반영하여 결정하고 국왕이 비준한 문서다. 비록 협상 과정에서 일본의 강압적 자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 정부에서도 통상 조약을 주장하는 인사들의 후원을 받은 국왕이 체결을 독려하고 최종적으로 어보(御寶)를 날인(捺印)한 국가 간의 약속이다. 조선의 접견대관인 신헌이 체결 당시의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심행일기(沁行日記)≫를 보더라도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체결된 조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체결된 조약에 대해 각 조관의 부분만을 취하거나, 신뢰할 만한 근거 없이 무리하게 해석하여 불평등 조약이라 단정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물론, 조약에 정한 것과 달리 운영과정에서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전혀 다른 문제점이 발생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조약에 있는 본래의 뜻과 운영과정의 문제점 등은 분리하여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조약 체결 후 일어난 문제점이나 심지어 조약과 상관없이 몇 십 년 뒤에 일어난 일본의 침략 행위마저 조약의 본래 취지인 양 끌어다가 해석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입력 : 2017.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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