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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 역사 (2)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는 서술은 옳은가?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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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이하응’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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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니 당연히 한 치 어긋남이 없는 서술로 생각하겠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과 어떻게 어긋났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한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받아들였다.”
 
이 부분에 대한 『고종 실록』의 해당 기사는 아래와 같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빨리 대왕대비의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즉시 큰 계책을 정하시기를 천만 번 빌고 있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기로 작정하였다.’
하자, 정원용이 아뢰기를,
‘언문 교서(諺文敎書)를 써서 내려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발 안에서 언문 교서 한 장을 내놓았다. -중략-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흥선군의 둘째 아들의 작호(爵號)는 익성군(翼成君)으로 하비(下批:비답을 내려 임명함)하라.’
하였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고 신망 받는 신하라 할지라도 특정인을 지목하여 왕통을 잇도록 요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연히, ‘정원용의 발의를 받아들였다’는 기술은 잘못이다.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발[簾]을 드리우고[垂]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남성인 흥선 대원군이 ‘수렴청정’을 했다는 기술(記述)은 실수라 하기에는 지나치다. 또, 섭정(攝政)이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수렴청정 이전의 제도로 친정(親政)의 상대적인 용어다.
흔히 대원군이 섭정을 했다고 하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마당에 대원군이 섭정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며, 『승정원 일기』나 『고종 실록』 등 사료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명성황후는 장성해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 공작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문을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해 그는 하야(下野)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친정 이야기에 앞서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의 탄핵(彈劾)은 현재의 탄핵과 다소 달라서 양사(兩司) 즉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법을 어기거나 비리를 저지른 관원의 죄를 묻고 파면할 때 적용하였다.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양사에서는 탄핵 대상과 그 죄상을 분명히 적시하고 이를 국왕에게 상소하여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 흔히 흥선 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한 것은 1873년 말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이르는 것으로,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집』에는 ‘호조참판을 사직하고 아울러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소[辭戶曹參判, 兼陳所懷䟽]’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에서 최익현은 호조참판을 사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함께 만동묘(萬東廟)의 복구, 서원(書院) 신설 허용, 호전(胡錢:청나라 돈) 사용 혁파, 토목공사를 위한 원납전(願納錢) 징수 중단 등의 건의와 함께 마지막에 모든 정사(政事)를 정부 조직에 따라 운영하고 종친들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이 출입하는 창덕궁의 전용 문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함으로써 더 이상의 정치 간여(干與)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기본적으로 양사의 탄핵 대상이 아니며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였다면 탄핵 대상인 대원군을 명시하고 그의 죄상을 조목조목 나열한 다음 이의 처벌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긴 하였으나 이를 두고 ‘흥선 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하는 것은 다소 부정확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다시 고종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명성황후는 장성해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 공작을 추진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기록과 다소 다르다. 12살 어린 나이의 이명복이 철종(哲宗)을 이어 즉위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2년이 갓 넘은 1866년 2월 13일 대왕대비는 철렴(撤簾:수렴청정을 거둠)을 선언하면서 대소의 공사(公事)를 고종이 직접 총괄하도록 전교(傳敎)하고 이를 아래와 같은 언문 교서(諺文敎書)로 남긴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상의 나이가 이미 혈기 왕성한 때이고 훌륭한 자질을 타고 나서 슬기로운 지혜가 나날이 성숙되어 중요한 공무(公務)는 밝게 익히게 되었고 학문도 독실하게 해서 능히 모든 정사를 총괄할 수 있고 복잡한 사무를 직접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왕업을 계승해 나갈 수 있고 장차 후세에 가서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내가 처한 바에 그냥 계속 앉아있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보존하고 큰 원칙을 바로 세우는 바가 아니므로, 오늘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대소의 모든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하게 하라.
(今則主上春秋旣鼎盛矣. 聖質天縱, 睿智日就, 機務之明習, 問學之篤實, 有可以總庶政而親萬機. 萬億年迓績景命, 其將有辭於來後. 然則以予所處, 一向蹲仍, 甚非所以存國體而正大經. 自今日撤簾, 大小公事, 一聽主上總斷.- 『고종실록』, 1866. 2. 13. 기사 중에서)
 
이어, 2월 26일에는 인정전(仁政殿)에서 고종의 친정을 축하하는 의식이 진행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이달 26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들로 사형죄 이하의 죄인은 모두 용서해 주라.’는 특별 사면령(赦免令)을 내린다. 친정은 국가적 경사이기에 축하연과 함께 사면령이 내려진 것이다. 고종 행장(行狀)에도 ‘병인(1866) 2월. 이달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이 친정을 시작했다.(丙寅 二月. 是月, 大王大妃殿撤簾, 王始親政)’라고 적고 있다. 물론 1873년 11월 4일 최익현의 처벌을 논하는 과정에서 잠시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바로 없었던 것으로 하고 공식화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해는 1873년이 아닌 186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아래와 같이 1873년에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교학사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176)
금성출판사
고종의 친정과 대외 정책의 변화 - 1873년에 고종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대외 정책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229)
동아출판
하지만 강경한 외교 노선을 펼치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뒤 고종은 일본과 외교 교섭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160)
리베르스쿨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207)
미래엔
1873년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면서 대외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178)
비상교육
흥선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민씨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205)
지학사
1873년에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고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고 민씨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였다.(216)
천재교육
한편,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 체제가 수립되었다.(182)
국정한국사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168)
 
1863년 고종 즉위 이후 합법적인 최고의 권력 기구는 국왕인 고종과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참여한 대왕대비이며, 1866년 대왕대비가 철렴한 이후에는 국왕만이 존재한다. 국정교과서에서 ‘1863년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168쪽)’고 한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흥선 대원군의 권력 행사는 섭정과 같은 정상적 통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국정교과서 연표에는 ‘1863 고종 즉위, 흥선 대원군 집권(302쪽)’이라 하여 마치 정상적 권력을 행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서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와서야 고종이 나라를 직접 다스렸다면 『승정원 일기』나 『고종 실록』 등에 수록된 그 이전의 기록은 누구의 통치 행적인지 설명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를 비롯하여 ‘친정의 시작’, ‘친정 선포’, ‘친정 체제 수립’ 등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입력 : 2017.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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